사찰

서산에서-마애삼존불, 보원사 터

영지니 2007. 3. 3. 22:50

박물관
서산에서-마애삼존불, 보원사터 | 충청도박물관

 

 

▶ 태안반도

충청남도 서북부에 돌출한 좁고 긴 반도로 동쪽의 예산읍에서 반도 말단 만리포까지 약 130Km에 이른다.

 

행정적으로는 서산시, 예산군, 당진군, 태안군이 속하여 있다. 해안선이 복잡하여 아산만, 당진만, 서산만, 가로림만, 적돌만, 천수만 등이 40Km 전후의 좁고 긴 해안을 형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반도의 최서단에는 천리포, 만리포, 연포, 몽산포 등의 유명한 해수욕장이 많고 그 일대가 여름철 휴양지로 이용되고 있다.

 

해안에는 염전이 많고 조기, 새우, 김, 굴 등이 많이 잡힌다. 지질은 편마암 및 화강암이 대부분이고 동남쪽에는 가야산서 원산을 주봉으로 남북방향의 가야산맥이 있다. 반도의 중앙부에는 팔봉산 북쪽 대산면에 망리산이 있으며 이들 산지는 남쪽으로 75Km에 걸쳐 꼬리처럼 안면도까지 계속된다.

 

연안은 침강해안으로 전형적인 리아시스식해안을 형성하고 그 연장은 817Km에 이른다. 수심이 얕고 조차는 8.7m로 큰 편이며 간석지가 많아서 우리나라 최대의 천일염석지가 되었다. 곳곳에 저수지가 많아 농업용수로 공급되고 있으며 대단위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다. 

 

당진은 기름진 평야가 많으며 천연기념물인 두루미가 서식하고 서산은 교통이 불편한 편이나 농산물의 집산지로 쌀과 담배가 산출되며 목재도 유명하다.

 

마애삼존불(국보 84호)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보원사터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위치한 백제시대 사찰의 터로 사적 제 3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왕산 서쪽 보원마을에 위치하고 있는데 1970년대 일대의 대대적 목장경영으로 인하여 마을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절터에는 10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를 비롯하여 당간지주, 오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 등의 유물과 초석이 남아있다. 특히 1968년에는 절터에서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가까이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의 본사라고도 하고, 한때 고란사라는 이름이었다고도 하나 절의 내력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당간지주(보물 103호)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은 옛 절터로, 지금은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는데, 땅을 갈 때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석조(보물 102호)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팔각형·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 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도 알수 없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오층석탑(보물 104호)

2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쇠꼬챙이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보승탑(보물 105호)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은 사리탑 혹은 부도(浮屠)라 하여 절의 한켠에 세워두며,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쌓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어둔다.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보승탑비(보물 106호)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법인국사 탄문

법인국사(900~975)는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대오, 법명은 탄문(坦文), 시호는 법인(法人), 성은 고씨이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귀신과 관계하는데 한 중이 금빛의 자를 주고 갔는데 그날 임신이 되어 태어난 이가 법인국사이다. 원효대사가 살던 향성산 옛 절터에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장륙사의 신엄화상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신라 신덕왕 3년(914)에 구족계를 받았다.

 

이처럼 화엄종의 승려로서 수도 정진하던 중 925년에 고려 태조의 왕후 유씨가 임신하자 왕명을 받고 아들을 낳도록 기도를 드려 왕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그 아이가 4대 광종이 되었으니 탄문과 고려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는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탄문이 50세 되던 949년에 4대 광종이 즉위하자 대궐에서 법회를 베푼 뒤 개경에 새로 낙성한 귀법사의 주지로 왕사(王師)가 되었다.

 

호족연합세력에서 출발한 고려 왕권은 4대 광종 대에 이르면 명실상부한 왕권 중심으로 체제를 굳히게 되므로 광종은 호족과 결부된 선종보다는 화엄종 교리가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탄문은 이때에 광종의 즉위를 기념하여 철조 장륙상을 조성하여 보원사에 모셨으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보원사터 장륙철불좌상이 그것이다.

 

광종 26년인 975년에 탄문이 은퇴를 청하자 광종은 그를 국사(國師)로 임명하고, 보원사로 떠나는 그를 태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의 교외까지 나아가 전송하였다고 한다. 그해 3월에 가야산 보원사에서 열반하였으니 탑호가 보승(寶承)이다.

 

좋은 사진=문화재청, 션찮은 사진=머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