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6.25 & 5,18 )

역사의 아이러니..파주 '적군묘지'를 가다

영지니 2016. 1. 1. 12:42

北ㆍ中軍 유해 964구 안장..KAL기 폭파범, 무장공비도 묻혀

소설가 이호철씨 "이 존재가 남북 화해분위기로 바꾸는 날 오길.."

(파주=연합뉴스) 우영식 기자 ='오호, 죽어서도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적군묘지 앞에서'라는 부제가 달린 구상 시인의 연작시 '초토(焦土)의 시(詩)8' 첫 구절이다.

시인은 1947년 원산에서 월남해 6ㆍ25전쟁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활동하고 1956년 15편의 연작시를 발표했다. 그는 전쟁 와중에 만들어진 적군(敵軍)묘지에 묻힌 병사를 애도하고 분단 현실에 대한 통한을 이렇게 표현했다.

 

 

 

구상 시인의 작품에 등장한 적군묘지는 6ㆍ25전쟁 직후 전국에 산재해 있다 1996년 7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5 한 곳에 모아졌다.

사망한 적군이라도 정중히 매장해 분묘로 존중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우리 정부가 북한군, 중국군의 유해를 모두 옮겨 조성한 것이다.

16일 묘지를 관리하고 있는 군(軍)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이 곳을 찾았다.

사람 발길이 끊긴지 오래된 듯 말 그대로 한적했다. 남방한계선으로부터 불과 5㎞가량 떨어져 있지만 안내자 없이는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임진강을 따라 파주와 연천을 연결해 제법 교통량이 많은 국도 37호선 바로 옆이어도 이정표는 물론 진입로 또한 제대로 없었기 때문이다.

적군묘지는 6천99㎡, 축구장 2개 규모로 생각보다 컸다. 이곳에는 1, 2묘역으로 나눠 북한군 709구와 중국군 255구 등 모두 964구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하지만 봉분 수는 520기 뿐이다. 유해 분리가 어려워 일부 유해를 합장했기 때문이다.

제1묘역은 처음에 100구였다 4년 뒤 146기로 늘며 만장돼 2000년 6월 제2묘역(374기)이 조성됐다.

제1묘역은 1996년 이전에 확인된 6ㆍ25전사자의 유해와 북한 공작원 등의 유해가 묻혀 있다.

풀이 다소 길게 자란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관리가 잘 돼 있다. 무덤 앞에는 1m 높이의 각목으로 된 흰색 묘비가 세워져 있지만 계급과 이름이 적힌 것은 20여기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명인'이다.

다만, 묘비 옆쪽에 '불상 6.25전투', '낙동강전투' 등 시대와 특정 사건을 지칭하는 푯말이 서 있다.

일반 전사자가 아닌 무장공비와 민간인을 겨냥한 무장테러범들의 무덤은 특히 기자의 눈길을 끌었다.

'1ㆍ21사태 무장공비' 푯말 뒤에는 1968년 김신조와 함께 휴전선을 넘어와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사살된 무장공비 30명이, '대한항공 폭파범'에는 1987년 김현희와 함께 KAL 858기를 폭파하고 자살한 김승일이, '남해안 침투 반잠수정 사체'에는 1998년 남해안에 침투했던 공작원 6명 각각 묻혀 있다고 군은 설명했다.

제2묘역에는 군이 2000년에 시작한 국군 6ㆍ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서 발견된 북한군, 중국군이 묻혀 있다.

봉분이 제1묘역에 비해 5분의 1 크기로 작다. 더 늘어날 것에 대비해 아예 작게 만든 것이다.

일부는 10여기씩, 20여기씩 한꺼번에 매장해 커다란 둔덕을 이루고 있다. 묘비만 없다면 묘지라는 사실을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제2묘역의 묘비는 모두 '무명인'이다. 북한군인지 중국군인지만 구분하고 발견 장소만 표기돼 있다.

이들 적군묘지의 무덤은 햇볕이 잘 드는 남쪽이나 동쪽을 향하게 하는 전통 매장방식과 달리 북쪽을 향하고 있다.

"적군이지만 고향 땅이라도 바라보라는 인정적인 배려였다"고 동행한 25사단 관계자는 설명했다.

하지만 이 곳은 군 관계자를 제외하면 찾는 이가 아예 없다.

외진 곳인 데다 마을 주민조차 접근을 꺼린다. 존재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북한에게조차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북한은 묘지 조성 이후 단 한차례도 유해 인도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한다. 1ㆍ21사태, 대한항공 폭파, 공작원 남파 등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게 군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최소한 고국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천안함 폭침에 이은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무력도발이 계속되고 있고 신뢰의 원칙을 무시하고 남북간 비밀접촉 내용까지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북한의 최근 행태를 볼 때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6년째 남북 분단문제에 천착해온 원로 소설가 이호철씨는 "남북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평소 넓은 품으로 북한을 품어 안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이런 차원에서 적군묘지의 조성은 우리 군이 잘한 일로, 적군묘지의 존재가 남북간 경색된 국면을 화해 분위기로 바꿀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5사단 관계자는 "군이 총칼을 겨눴던 적군의 묘지를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아이러니"라며 "이 묘역이 더는 채워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