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성(甘肅省: Gansu) 막고굴(莫高窟: Mogaoku, 돈황석굴)
막고굴(莫高窟: Mogaoku 무가오쿠)
천불동(千佛洞) 또는 돈황석굴(敦煌石窟)로 알려진 막고굴은 타클라마칸(Taklamakan)사막의 동쪽 감숙성(甘肅省: Gansu) 돈황(敦煌: Dunhuang)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져 있다. 막고굴은 4 - 14세기 실크로드의 문화적 중심지로서 수많은 불상과 벽화가 남아 있는 불교미술의 보고이다. 600(492개란 기록도 있다)여 개의 석굴사원이 남아 있으며, 현재는 30여 개의 동굴만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BC 2세기 이후 건설된 인도의 아잔타(Ajanta) 석굴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중국의 도교와 유교사원은 목재로 건축되었다. 석굴사원은 원래 인도에서 기원한 것인데, 건축재료의 부족과 폭염을 피하기 위한 대안으로 석굴사원을 건설했던 것이다.
복잡한 석굴사원은 4세기에 막고굴에서 등장했는데, 실크로드를 통과하는 순례자, 승려, 학자들이 명상하고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다. 상인들과 귀족들은 사업의 성공과 영혼의 안식을 찾기 위해 사원에 기부했다.
전설에 따르면, 첫 번째 석굴은 366년 천 개의 부처상을 봉안하기 위해 승려 낙존(樂尊: Lezun)이 건설했다. 그는 부유한 실크로드 순례자들에게 첫 번째 사원건설의 도움을 요청했고, 이런 방식으로 석굴이 늘어났다. 벽화는 원래 종교적인 명상을 돕기 위해 그려졌으나, 결국에는 설화를 묘사하기 위한 목적이 되었다.
비천상
수많은 화가와 장인들이 동굴에 고용되었으며, 종종 높은 곳에 비계를 설치해서 오일램프의 희미한 빛에 의지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통상 북쪽의 작은 동굴에서 생활하며, 벽돌침대에서 잠을 자고 약간의 대가를 받았다.
당조(唐朝: 618-907) 중국전역에서 불교가 융성하자 승려사회는 정점에 이르렀고 1000여 개가 넘는 동굴사원이 세워졌다. 하지만 그 후, 새로운 바닷길이 실크로드를 점차 대체해갔고 막고굴은 번영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14세기에 들어서 막고굴은 폐쇄되었고 방치되었다.
1900년 방랑 도사(道士) 왕원록(王圓籙 Wangyuanlu)은 우연히 막고굴을 발견했다. 그는 막고굴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일생 동안 발굴과 복구에 전념했다. 그는 벽화를 수정해서 나무와 정원을 그렸으며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지었다. 두 명의 제자가 이 일을 도왔고 탐험대가 재정지원을 했다.
이 복구작업은 놀라운 발견이 없었더라면 상대적으로 조용히 지속되었을 것이다. 어느 날, 왕원록은 벽돌로 막혀있는 방(17호 굴) 하나를 발굴했는데, 이 곳에는 수많은 원고, 경전 그리고 실크와 종이에 그려진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일부는 1,000여 년의 세월에도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이것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고고학적 발견들 중 하나였다.
발견소식을 전해들은 돈황당국은 그들을 위해 발견된 소중한 유물을 전유하려고, 동굴을 다시 봉한 후 나머지 보물을 운송하려 했으나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서 하지 못했다. 그러나 1907년, 탐험가이며 학자였고, 영국계 헝가리인이 이던 오렐 스테인(Aurel Stein)이 이곳에 도착했다.스테인은 왕원록에게 석굴을 다시 개장 할 것을 설득했다. 그는 나중에 기록했다:
“다시 봉해진 작은 방은 유일하게 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어떤 목적도 없이 겹쳐져 쌓여있는 고서들은 견고한 다량의 원고 묶음들은 3m에 가까운 높이로 쌓아져 성직자의 작은 램프의 어두운 빛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후에 나타난 수치는 미증유의 고고학적인 발견인 14㎥ 를 채우고 있었다.”
소장품 중에는 현장(玄奘: Xuanzang, 唐三藏)이 인도에서 가져온 원래의 경전과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어(Sogdian), 티베트어, 룬 투르크어(Runic-Turkic), 중국어, 위그르어(Uigur) 그리고 스테인(Stein)이 식별하지 못한 다른 언어들로 쓰여진 불경도 있었다. 또한 습기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아 심하게 부서진 비단과 종이에 그려진 수십여 장의 진귀한 당조(唐朝: 618-907) 그림이 있었다.
스테인(Stein)은 왕원록의 복구기금에 130파운드( mso-font-kerning: 0pt현재 환율의 200배가 5천만\)에 상당하는 것을 기부했고, 약 7,000여 개의 원고과 500여 개의 그림을 가지고 영국으로 떠났다. 그 해 말에,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는 비슷한 거래를 체결하고 6,000여 장의 원고를 싣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것들은 오늘날 영국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의 중국관의 주요 유물들이다.
1920년 백러시아의 최대 파벌이 석굴을 병영으로 사용하면서 프레스코 벽화 위에 그들의 이름을 쓰는 등 많은 훼손이 있었다. 하지만 문화혁명기에 석굴의 벽화는 훼손되지 않았는데, 주은래(周恩來: Zhouenlai)가 개인적으로 석굴보호를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 막고굴은 매력적인 여행지이고 고고학적인 프로젝트가 진행중에 있다. 막고굴은 1987년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볼거리
이곳에는 원래 1,000여 개의 석굴 사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600여 개 정도가 남아 있다. 대부분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거나 성적으로 노골적인 탄트라(Tantric) 벽화가 있기 때문이다.
30여 개의 주요 동굴은 공개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하루에 15개 이상의 동굴을 방문할 수 없다. 모든 석굴들의 입구 위에는 번호를 붙여 놓았다. 석굴내부의 벽화를 보호하기 위해서 붉을 밝히지는 않지만, 안내인이 손전등을 들고 방문객들과 동행한다.( mso-font-kerning: 0pt설마?)
align=left>북위(北魏: 386-581)시대 석굴
초창기 석굴은 4-5세기 북위시대에 만들고 장식되었는데, 이들은 Tobas로 알려진 튀르크어(Turkic)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에는 고대 Toba의 풍습을 유지하려던 사람들과 중국 풍습을 받아들이길 원했던 사람들 간에 왕조내 끝임 없는 마찰이 있었다.
북위시대의 석굴은 인도에서 들어온 형식으로 작게 파고 가운데 큰 기둥을 세웠다. 통상 1개의 부처상이 가운데 놓이고, 검은색, 힌색, 청색, 붉은색, 녹색을 칠한 벽에 수많은 작은 부처상들을 여러 줄로 그렸다. 부처상들은 흙을 구워서 만들었다. 석굴의 부드러운 바위는 섬세한 조각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위시대 석굴의 벽화는 긴 코를 가진 얼굴에 곱슬머리이고, 여인들의 가슴은 크게 그리는 등 외국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보다 많이 나타나 있다. 5세기 후반의 101호 굴의 부처는 서구인 형태를 띠고 있는데, 마치 예수와 비슷하고 그리스의 비잔틴 프레스코 벽화가 연상된다.
북위 부처상
257 석굴의 부처는 로마시대의 긴 옷(togo)을 입고 있는 것 같다. 428 석굴은 내용(천정의 공작)과 형식에서 인도의 강한 영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도 볼 수 있는데, 물결모양과, 이따금씩 위에 그려진 꽃 같은 천사가 그것이다.
묵상을 위한 그림에서 이야기를 표현하는 그림으로의 변화는 이 초창기 동굴에서 볼 수 있는데, 이야기를 수평적으로 연속해서 그렸다. 6세기 초의 135호 굴에는 부처가 그의 몸을 굶주린 암범에게 주어서 암범이 새끼들을 부양할 수 있게 하였다는 자타카(Jataka: 부처의 전생)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묘사되어 있고, 단순한 전경이 중간에 그려져 있다. 254호 굴에는 부처가 Mara(魔)와 병을 물리치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보다 중국적인 형식은 6세기 중반 북위시대 후기에 나타난다. 북위 벽화 중 가장 중국적인 하나인 120N호 굴은 원근감이 떨어지는 전투장면을 보여준다. 다른 위치에 있는 모든 인물을 똑같이 서 있는 모양으로 그리는 것은 중국 그림에서 선호하는 도안이다.
수조 석굴
align=left>수조(隨朝:581-618) 석굴
수나라는 단명했으나 역동적이었다. 이 시기의 석굴에는 서역의 영향이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이 기간에 불교와 불교미술은 유행했고 70여 개가 넘는 석굴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수나라의 석굴들에는 중앙기둥이 없어지고 복잡한 곡선과 풍부한 색조(금과 은을 포함)를 사용이 늘어나 굵은 북위의 화풍을 대체해 나갔다. 불상들은 보다 경직되고 완고해 졌고 중국의 의복을 걸쳤다.
150호 석굴의 그림은 옥좌 위의 부처와 보살(Bodhisattvas)을 연속해 표현했다. 427호 석굴의 인물은 수나라 사람의 짧은 다리와 긴 신체(힘과 신성함을 상징하는) 그리고 큰 머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45호 인물상(당조 대표작)
align=left>당조(唐朝: 618-907)의 석굴
막고굴의 예술은 당나라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된다. 과거의 전통과 실생활이 모두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전형적인 당나라 시대의 석굴사원은 4각의 바닥과 지붕으로 갈수록 좁아지고 예배를 위한 벽감(壁龕)은 벽의 뒤쪽에 배치했다. 조각상에는 무사가 포함되었고 모든 일물은 상세하게 묘사되었다. 보살(Bodhisattva)들은 특히 여성형태의 곡선을 취하고 부드럽고 몸에 착 붙게 주름을 접어 넣는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당나라의 석굴은 놀라운 크기로 만들어진 부처상으로 유명하다. 96호 석굴에는 황제의 곤룡포를 입은 34m 높이의 부처가 봉안되어 황후 무측천(武測天: Wuzetian, 측천무후)의 순례지로 만들었다. 148호 석굴에는 열반에 든 또 다른 거대한 부처상이 있고, 주변에 제자들이 있다.
당조(唐朝)의 벽화는 경전그림(초기의 연속된 구성 대신 한 장면으로 합성)에서부터 생생한 개인의 초상화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비말라키르티
당조 벽화 중 가장 인기 있는 것 중 하나는 비말라키르티(Vimalakirti: 유마힐)를 방문하는 문수사리보살(-style: italicBodhisattva Manjusri을 극적으로 표현한 103호 석굴 그림이다. ( mso-font-kerning: 0pt-style: italic원문은 cave 1-style: italic) 왼쪽의 비말라키르티는 천상에 존재하는 주인이며, 늙고 병든 왕으로서 담론을 원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말라카르티 위에는 중심의 섬 위에 부처와 주변의 보살들과 무한한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또 다른 작품은 51E호 석굴에서 볼 수 있는데, 인물들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관람이 자유로운 또 다른 볼만한 벽화는 70호 굴의 흐르는 듯한 풍경과 139A의 서방정토의 아미타 부처를 표현한 것이다. 139A 벽화에는 부처 위로 하늘의 풍경이 에워 싸는 장면에 연꽃에서 새로 태어난 영혼이 나타난다.
송조 석굴
align=left>후기의 석굴들
송조(宋朝:960-1279)와 서하(西夏: 1038-1277) 5대 왕조 거치는 동안 막고굴의 벽화는, 당조(唐朝:618-907)의 석굴에 약간의 발전을 보이는데, 주로 기존의 벽화를 복구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송조시대의 석굴은 풍부한 색상과 형식으로 소수민족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465호 석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원조(元朝: 1260 - 1368)동안, 뒤쪽 벽의 벽감(壁龕)의 표준은 중앙에 개조되어 배치되었고, 프레스코를 그리기 위한 정돈된 공간을 만들어 냈다. 가장 흥미로운 예는 465호 석굴인데, 가이드가 많은 요금을 요구할 것이다 – 근본적인 깨달음을 얻은 탄트라(Tantric) 형태를 포함한 벽화들이 성적인 결합을 한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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