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 북경- 자금성, 이화원

영지니 2016. 7. 30. 22:18

베이징(북경:北京) 자금성(紫禁城)

자금성(이하 고궁)은 명조(明朝: 1368-1644) 중기에서 청조(淸朝: 1644-1912) 말기까지 중국의 황궁이었다. 북경(北京: Beijing)의 중심에 위치한 고궁은 현재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 관리되고 있다. 거의 5 세기 동안 황제와 그 가족들의 거처로 이용되었고, 중국정부의 의식과 정치의 중심지였다.

1406-1420년에 지어졌고, 8,707개의 칸으로 980여 개의 생활공간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720㎢로 경복궁의 두 배가 넘는다. 그 복잡한 궁전은 전통적인 궁전 건축의 훌륭한 사례로 동아시아와 그 외 지역의 문화와 건축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1924년 이 후 고궁은 궁전박물관으로 바뀌었고,  광범위하게 작품과 유물들을 수집하여 명청(明淸)왕조 황실의 소장품들을 확보하였다. 고궁박물원의 이전 수집품들 중 일부는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다. 두 박물관은 같은 기관에 소속되었으나, 국공내전(國共內戰)이 후 분리되었다. 북경의 고궁은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고대목조건축 중 세계에서 가장 큰 보호유적으로 UNESCO에 등재되었다.   

자금성(Zijincheng: 쯔진청)의 자(紫:Zi) 또는 “자줏빛”은 고대 중국에서 자미성(紫微星: Ziweixing)이라 칭하며, 천상의 황제가 거처한다고 믿었던 북극성과 관계가 있다. 천상황제 거처 주변의 자미원(紫微垣)은 천상의 황제와 그의 가족들의 왕국이라 생각했다. 땅에서 황제의 거처인 곳에 황제의 허락 없이 아무도 출입할 수 없다는 뜻에서 금(禁:Jin) 또는 “금단”의 의미가 포함되었다. 성(城: Cheng)은 성곽도시의 의미이다.

영락제

고궁의 터는 원조(元朝: 1271-1368) 동안에 대도(大都: Dadu, Khanbaliq)의 일부였다. 명조(明朝) 설립 후, 홍무제(洪武帝: 1368-1398)는 북쪽의 베이징에서 남쪽의 남경(南京: Nanjing)으로 천도하고 몽고궁궐을 없애라고 명령했다. 주체(朱涕: Zhudi)가 영락제(永樂帝: Yongle, 1402-1424)가 되었을 때, 그는 베이징으로 천도하고 1406년 고궁건축을 시작했다.

역사(役事)는 15년간 지속되었고 10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자재는 남서쪽 밀림에서 생산되는 귀중한 남목(楠木: Nanmu, Phoebe zhennan)을 통째로 사용했고 베이징 근처의 채석장에서 커다란 대리석판들을 공수해 왔다. 주요건물들의 마루는 특별히 소주(蘇州)의 금전(金磚: Jinzhuan, Golden bricks)으로 덮었다.

순치제

1420년에서 1644년까지 고궁은 명조의 수도였다. 1644년 4월 순조(順朝: Shun)의 황제라 칭했던 이자성(李自成: Lizicheng)이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는 곧 명의 장수였던 오삼계(吳三桂: Wusangui)와 만족(滿族/满族: Manchu)의 연합군을 피해 달아났지만, 이 과정에서 고궁의 일부가 소실되었다. 10월에 만족은 중국북부의 패권을 장악하고 청조(淸朝: 1644-1912)의 통치자로서 젊은 순치제(順治帝: Shunzhi)를 선언하는 의식을 고궁에서 개최하였다. 청조의 통치자들은 패권 보다는 화합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각들의 이름을 바꾸고, 중국어와 만주어 두 언어를 동시에 현판에 새기고, 궁에 무속적인 요소들도 도입했다.  

원명원 옛그림

2차 아편전쟁(鴉片戰爭: Opium War)기간인 1860년에, 영불 원정대는 고궁을 장악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점령하였다. 그들은 고궁을 약탈하고 원명원(圓明園: Yuanmingyuan)을 불태웠다. 1900년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운동이 좌절되자 고궁은 다시 약탈되었는데, 2만 명이 넘는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일본, 미국 그리고 러시아의 군일들과 상인들이 고궁 훼손에 앞장섰다.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1912년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 Puyi)는 퇴위하였다. 부위는 사치스러움을 충당하기 위해 많은 보물을 처분했고, 환관(宦官)들은 보물을 훔쳤다. 새로운 중화민국정부는 외궁(外宮)을 공식적 장소로 사용했고, 부의는 1924년 축출될 때까지 내궁(內宮)에 머물렀다.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

고궁박물원은 그렇게 자금성에 설립되었다. 1933년 항일전쟁(抗日戰爭)때에는 고궁의 국가보물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보물 일부는 돌아왔으나, 일부는 국공내전(國共內戰)에 패한 국민당(國民黨: Kuomintang)의 장개석(蔣介石: Chiangkaishek)에 의해 1947년 대만으로 옮겨졌다.  대만으로간 보물은 본토로 귀국하고 싶어하는 국민당(KMT)에 의해서 그곳에 오래도록 보관되었다. 결국 1965년, 그것들은 대만 타이베이(Taipei)의 국립고궁박물원의 핵심 소장품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1949 년 중화인민공화국( 中華人民共和國)설립 이 후, 혁명적인 물결에 휩쓸려 일부 피해를 입었다. 문화혁명(文化革命: 1966-1976)기엔 총리 주은래(周恩來: Zhouenlai)가 고성 보호를 위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훼손을 막았다.

1987년 UNESCO는 “명청조(明淸朝)의 황궁”으로 중국 건축과 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장소인 고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언했다. 고궁은 현재 고궁박물원이 관리하며, 1912년 이전의 자금성 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16년 복구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엔 고궁에 상업적인 기업을 존치시켜야 하는가가 논쟁거리다. 2000년 문을 연 Starbucks매점은 비난 여론에 밀려 2007년 결국 문을 닫았다. 중국 언론은 중국인들의 입장이 금지된 두 기념품 매점을 홍보하는데, 외국 관광객들에게 바가지(price-gouge)요금을 받기 위해서다. (원문: Chinese media also took notice of a pair of souvenir shops that refused to admit Chinese citizens in order to price-gouge foreign customers in 2006.)

고궁은 남북으로 961m 동서로 753m의 직사각형구조이다. 고궁은 북경의 고대도시 북경의 중심에 건축되어 있고, 황성(皇城)라고 부르는 보다 큰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황성는 다시 내성(內城)으로 둘러싸여 있고, 내성의 남쪽에 외성(外城)이 있다.

고궁은 북경의 도시설계에 영향력을 가진다. 고궁중앙의 남북 축은 북경의 중앙 축이다. 이축은 남쪽으로 천안문(天安門: Tiananmen)을 통해 중국의 주요행사장소인 천안문광장으로 통한다. 북쪽으로는 고루화종루(鼓楼和钟楼)를 통해 영정문(永定門: Yongdingmen)을 향해 뻗어있다. 흥미롭게도, 이축은 남북을 일직선으로 관통하지는 않고, 2도 이상 기울어져 있다. 사학자들은 이축이 원조(元朝: 1271-1368) 황실의 다른 수도였던 상도(上都: Xanadu)와 일치되게 설계한 축이라고 믿는다.

각루 야경

성곽과 성문

고궁은 7.9m의 성장(城墙: City wall)으로 둘러싸여 있고, 깊이 6m 폭 52m의 해자(垓子)가 감싸고 있다. 이런 담장들은 고궁의 방어벽과 옹벽의 역할을 했다. 중앙에 다져진(rammed earth) 흙으로 채우고, 양측에 구운 벽돌을 3겹으로 쌓아 틈을 회반죽으로 붙였다.

72개의 복잡한 지붕마루를 특징인 성장(城墻)의 4모퉁이에 있는 각루(角樓)들은 송조(宋朝: 960-1279)그림에 나타난 등왕각(滕王閣)과 황학루(黄鹤楼)를 모방하였다. 이틀 탑들은 담장 밖의 서민들에게 가장 눈에 띄는 지역으로 많은 민속이 전해져 내려온다. 한 전설에 의하면, 청조(淸朝:1644-1912) 초기에 한 장인이 재건을 위해 해체한 후 각루를 다시 조립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설적인 목수 이반(鲁班: Luban)이 와서야 조립에 성공했다고 한다.

오문 전경

성장의 각 면에 문이 하나씩 인데, 남쪽이 정문인 오문(午門: Meridian)이다. 북쪽이 신무문(神武門: Divine Might, 강희(康熙)이전 玄武門)인데, 경산(景山: Jingshan)공원을 마주보고 있다. 동쪽과 서쪽은 각각 동화문(東華門: East Glorious Gate) 서화문(西華門)으로 부른다. 고궁의 모든 문은 아홉 행렬의 금 징으로 장식되어 있다. (동화문은 8줄)

오문(Wumen)은 양쪽이 날개처럼 뻗어 나와 오문 앞 광장을 3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오문의 출입문은 5개인데, 가운데 문이 황제의 출입문이다. 자금성과 북경의 고도 중앙축에 조성된 통로에 포석(鋪石)을 깔고, 남쪽의 중화문(中華門)에서 북쪽의 경산(景山: Jingshan)까지 모든 길을 이어지게 하였다. 황제의 문은 황후가 결혼할 경우나, 과거(科舉)에 장원할 경우를 제외하곤 황제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외조(外朝)

전통적으로, 고궁은 의식(儀式)적인 장소였던 남쪽의 외조[外朝: Outer Court, 전조(前朝)]와 황제와 그의 가족들이 거주하면서 일상적인 장소로 사용했던 북쪽의 내정[內廷: Inner Court, 후궁(后宮)]으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고궁은 3개의 수직 축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건물들은 가운데 축에 위치하고 있다.

오문(午門: Meridian)을 통과하면, 커다란 광장과 마주하고, 5개의 다리가 놓인 구불구불한 금수하(金水河)를 통과하게 된다. 광장을 지나면 태화문(太和門: Supreme Harmony)이고 그 뒤가 태화광장이다. 태화광장엔 3층의 대리석 축대가 있는데, 이 축대 위해 궁전 건축의 핵심인 3개의 건물이 있다. 남쪽에서부터 태화전(太和殿:Supreme Harmony), 중화전(中和殿:Central), 보화전(保和殿;Preserving)이다.

태화전은 고궁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광장 바닥에서 높이는 30m 이다. 황권의 중심이었던 태화전은 중국의 목조건물 중 가장 크다. 9칸의 넓이에 5칸의 폭인데, 이들 숫자는 황제의 권위와 관련되어 있다.mso-fareast-language: ZH 전각의 중심 천장엔 헌원(軒轅: Xuanyuan, 전설상의 황제 이름)의 거울이라 부르는 샹들리에 같은 금속 구슬과 용을 새긴 복잡한 조정(藻井:caisson,궁전이나 사찰의 천장장식)으로 되어 있다. 명조(明朝: 1368-1644)에 황제는 국사에 대한 회의를 이곳에서 열기도 했으나, 주 회의실이 된 것은 청조(淸朝: 1644-1912)들어서다. 태화전은 원래 즉위식(卽位式), 임관식(任官式) 그리고 황제의 결혼 같은 의식행사에 사용하던 곳이었다.

태화, 중화, 보화전의 현판은 각기 다음과 같다.

건극수유(建極綏猷 – 나라를 세워 편안함을 꾀한다.)

윤집궐중(允執厥中 – 진실로 그 중심을 잡아 다스린다)

황건유극(皇建有極 – 황제가 존재하는 것(유극)을 다스린다)

좌측이 보화전 우측이 중화전

중화전은 사각궁전으로 황제가 의식행사를 준비하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뒤쪽의 보화전은 황제가 의식행사를 연습하거나, 최종과거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세 궁전에 모두 옥좌가 있는데, 태화전에 있는 것이 제일 크고 가장 정교하다.

축대의 남북 경사면의 단폐(丹陛, 섬돌) 가운데는 정교한 용문양이 대리석에 돋을새김(basrelief)되어 있다. 보화전 뒤쪽의 북쪽 단폐 중간의 조각품은 한 장의 대리석인데, 길이 16.57m, 폭 3.07m 두께가 1.7m이다. 무게는 200ton 정도인데, 대리석 조각품으론 중국에서 가장 큰다. 태화전의 남쪽 경사면의 단폐 길이가 더 길지만 두 석판을 연결해서 만들었다. 정교하게 감춰진 연결부위에 조각이 되어 있어서 20세기 들어서 풍화로 틈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태화광장을 둘러싼 회랑 외부의 남서쪽과 남동쪽엔 각각 무영전(武英殿: Military Eminence)과 문화전(文華殿: Literary Glory)이 있다. 무영전은 황제가 장수의 보고를 받거나, 신하들을 알현하는 장소였으나, 뒤에 궁전소유의 인쇄실로 사용하였다. 문화전은 고명한 유학자들의 강론 장소였으나, 후에 총비서의 집무실이 되었다. 지금은 사고전서(四庫全書: Siku Quanshu)의 영인본이 소장되어 있다. 태화전 동쪽의 남삼소(南三所)는 태자의 거처였다.

건청궁

내정(內廷)

내정은 도시 중심축에 직교하게 위치한 사각의 안뜰에 의해 외조와 분리된다. 내정은 황제와 그 가족들의 거처이다. 청조, 황제는 의식(儀式)행사를 제외하고는 내정에서 머물고 생활했다.  

내정의 중앙에는 또 다른 세 궁전이 있는데, 남쪽에서부터 건청궁(乾淸宮: Heavenly Purity) 교태전(交泰殿: Union), 곤령궁(坤寧宮: Earthly Tranguility)이다. 외조의 궁전들보다 작은 내정의 세 궁전은 황제와 황후의 공식적인 거처이다. 황제는 양(陽: Yang)과 하늘을 의미하므로 건청궁에 거처했고, 황후는 음(陰: Yin)과 땅을 의미하므로 곤령궁에 거처했다. 중간의 교태전은 음양(陰陽)이 화합하기 위해 교제하는 곳이다.

건청궁은 단층의 축대 위에 세워졌고, 넓이가 9칸에 폭이 3칸이다. 건청궁은 단으로 쌓인 통행로로 남쪽과 연결되어 있다. 명조(明朝: 1368-1644)에 황제의 거처로 이용되다가 청조(淸朝: 1644-1912) 옹정제(雍正帝: Yongzheng, 1722-1735)가 아버지 강희제(康熙帝: Kangxi, 1662-1723)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서쪽의 양심전(養心殿 /养心殿: Mental Cultivation)에 거처했다. 건청궁은 황제의 접견실이 되었다. 조정(藻井:caisson, 궁전이나 사찰의 천장장식)엔 용이 새겨져 있고, 옥좌 위엔 “정대광명(正大光明: Justice and Honour)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청조(淸朝: 1644-1912)엔 새로운 만족(滿族: Manchu) 통치자들에 의해서 궁전의 많은 부분이 무속예배 장소로 이용되었다. 옹정제(雍正帝: Yongzheng, 1722-1735) 통치기부터 황후는 궁 밖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곤령궁의 2개의 객실은 황제의 첫날밤 장소로 계속 이용되었다. 교태전(交泰殿: Union)은 사각의 뾰족한 지붕모양인데, 청조의 황실 도장 25개와 다른 의식용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세 궁전 뒤쪽이 어화원(御花園: Imperial Garden)이다. 상대적으로 작고 조밀하게 설계되었지만, 공들인 풍경을 가지고 있다. 정원의 북쪽이 신무문(神武門:the Gate of Divine Might)이다. 동서로 배치된 3개의 주요전각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안뜰과 후궁과 자녀들이 살았던 작은 궁전들이다. 서쪽 방향의 양심전(養心殿: Mental Cultivatio)은 원래 작은 궁전이었는데, 옹정제(雍正帝: Yongzheng, 1722-1735)이후 사실상 거처겸 집무실이 되었다. 청조(淸朝: 1644-1912) 마지막 10년 동안, 자희태후[慈禧太后: Cixi, 서태후(西太后)]를 포함한 황실의 미망인들은 양심전의 동쪽 부분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양심전의 주변에는 군기처(軍機處: Grand Council)와 다른 주요기관들이 있다.

내정(내정: Inner Court) 동쪽 지역의 영수궁(寧壽宮/宁寿宮, Tranquil Longevity)은 건륭제(乾隆帝: Qianlong, 1735-1796)가 그의 노후를 대비해 지은 복잡한 건물이다. 영수궁의 고궁의 모양을 본 따서 외조, 내정, 정원과 사찰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의 기와지붕이 있는 벽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만도라

종교

황궁에서의 생활에 종교는 중요한 요소인데, 청조(淸朝: 1644-1912) 곤령궁(坤寧宮: Earthly Tranguility)은 만족(滿族: Manchu)의 종교의식 장소가 되었다. 중국의 토착종교인 도교(道敎)도 명청조(明淸朝: 1368-1912)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황성(皇城) 내에 두 개의 도교사당이 있었다. 하나는 황실정원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정(內廷)의 중앙지역에 있었다.  

청조(淸朝) 종교의 일반적인 형태는 티베트 불교 또는 라마교 이었다. 수 많은 사찰과 사원들이 내정에 있었고, 불화도 많은 건물의 내부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건물이 서쪽의 우화각(雨花閣)인데, 수 많은 불상, 초상, 만도라(曼; 荼羅: Mandala)가 보관 되어 있다.

고궁외부

고궁은 황실정원이 삼면을 감싸고 있다. 북쪽의 경산(景山: Jingshan)공원은 해자와 근처의 호수를 판 흙으로 쌓은 인공언덕이다. 서쪽의 중남해(中南海: Zhongnanhai)는 과거 연결된 두 호수의 중심에 위치한 공원이었는데, 지금은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中国共产党)과 국무원(國務院/国务院)의 중앙 본부가 있다. 북쪽의 북해(北海: Beihai)공원도 호수중심이 남쪽의 두 호수와 연결된 시민공원이다.

고궁남쪽엔 2개의 중요한 사당이 있다. 황실 가문의 사당인 태묘(太廟/太庙)와 국가의 사당인 태사직(太社稷: Taisheji)이다. 황제는 각기 조상들의 신전과 국가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오늘날, 이곳은 각기 북경노동자문화센터이고 손중산[孫中山 or 손일선(孫逸仙: Sunyatsen)]을 기념한 중산공원(中山公園: Zhongshan)이 되었다.

남쪽엔 똑 같은 두 개의 문이 중심축에 있다. 위쪽의 문이 단문(端門: Duanmen)이고 아래쪽이 보다 유명한 천안문(天安門: Tiananmen)이다. 천안문엔 가운데 모택통(毛澤東: Maozedong)초상이 걸려있고, 좌우 양측엔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華人民共和國萬岁)와 세계인민대단결만세(世界人民大團結萬岁)간 간판이 걸려있다. 현대에 와서 고궁에 연결된 천안문 앞에는 중국의 상징적인 중심인 천안문 광장이 있다.

지금은 고궁의 주변지역이 잘 관리되면서 발전하고 있지만, 지난 세기 동안의 방치와 때때로 정치적인 동기에 의한 파괴와 재건을 통해 고궁 주변지역의 특징은 변화를 거쳐 왔다. 2000년 이후 북경자치정부는 정부와 군사위원회가 점유하고 있던 역사적인 건물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고, 남아 있는 황성(皇城)의 성벽 주변에 공원을 설치하였다. 2004년 황성지역과 도시 북쪽지역을 고궁의 완충지역으로 설정하기 위해 건물의 높이와 설계를 제한하는 조례가 통과되었다.

문연각

상징

전체적인 배치에서 세밀한 곳까지 고궁의 건축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원리 그리고 무엇보다 황권의 권위를 나타내는데 주력했다. 그러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노란색(금색)은 황제의 색이므로 고궁의 대부분의 지붕이 노란색 기와다. 두 가지 예외가 있는데, 문연각(文淵閣: The library at the Pavilion of Literary Proufundity,외조 동쪽 하단)의 기와는 물과 관련되어 화재를 막아준다는 검은색이다. 황태자(皇太子: the Crown Prince)의 거처는 나무와 관련되어 나무처럼 성장하라는 푸른색이다.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의 주요 건물들은 하늘은 나타내는 건괘(乾卦)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내정의 거처들은 땅을 나타내는 곤괘(坤卦: Kun,)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지붕 마루엔 작은 조각상 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 조각상 들의 숫자가 건물의 권위를 나타낸다. 작은 건물들은 3-5개 이고 태화전(太和殿)은 10개이다. 황제시절 중국에서 이 건물에만 허용된 숫자이다. 이들 10개의 조각상을 행십(行什: Hangshi)이라 부른다.

건물들의 배치는 예기(禮記: Classic of Rites)에 기초한 고대관습에 따랐다. 그래서 조상의 사당과 저장고 등은 고궁의 앞에 위치한다.   

영향

중국과 동아시아 건축 발달의 정점에 있던 고궁은 이후의 중국건축과 현대건축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베트남의 가륭(嘉隆: Gia Long, 1762-1820, 生卒)은 중국의 고궁을 축소한 궁전과 요새를 건설하고 싶어했다. 후에(Hue)가 그 곳인데, “황도”라 칭하고 영어로 “자금성”이라 번역한다.

워싱턴주의 시애틀의 5번가 극장은 중국 건축의 전통요소와 내부장식을 혼합하여 설계되었다. 용모양의 판자가 특징인 객석 천장 그리고 용을 새긴 조정(藻井:caisson, 궁전이나 사찰의 천장장식)이 연상되는 샹들리에 그리고 헌원(軒轅: Xuanyuan, 전설상의 황제 이름)의 거울은 고궁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의

예술, 영화, 문학에서의 묘사

부의(溥儀: Puyi)의 전기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1987)는 중국 정부가 고궁에서의 촬영을 허가한 최초의 영화이다.

1980년대 초에 방송된 NBC와 RAI TV의 합작 미니시리즈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고궁에 대한 이야기지만,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Kublai Kan)을 만났던 원조(元朝: 1271-1368)엔 현재의 고궁이 존재하지 않았다.

Kingdom Hearts 2 는 뮬란(Mulan)이 살았던 “용들의 땅”에서의 마지막 전투장소로 고궁을 채용했다.

북경(北京: Beijing) 이화원(頤和園: Yiheyuan, 이허위안)

이화원(頤和園/颐和园: Yi he yuan, 이하 이허위안)

이허위안은 북경(北京: Beijing)의 북서쪽 만수산(萬壽山/万寿山)과 곤명호(昆明湖: Kunming)에 일대에 조성된 황실정원이다. 이화(頤和)는 “Nurtured Harmony[평화를 찾다(기르다)]”로 번역한다. 면적은 2.9㎢(88만평으로 일산 호수공원의 2.8배)로 3/4이 호수이다. 중앙의 곤명호(2.2㎢)는 인력으로 호수를 파낸 것인데 이 흙으로 쌓은 것이 만수산이다. 70,000㎡(2만평)의 건축공간에는 다양한 궁전과 정원 그리고 전통건물들이 있다.

이허위안은 금조(金朝: Jin, 1115-1234)의 행궁(行宮)으로 조성되었다. 원조(元朝: 1247-1368)의 몽고황제 쿠빌라이 칸(Kublai Khan)은 서산(西山)에서 이허위안까지 운하를 건설하여 북경의 용수공급을 개선했다. 그는 또 저수지로 사용하기 위해 호수(지금의 곤명호)를 확장했다.

건륭제(乾隆帝, 1765)때 실질적인 황실정원이 되면서 청의원(淸漪園/淸漪园: Clear Ripples, 칭이위안)으로 불렀다. 장인들은 중국의 다양한 궁전과 정원형태를 재현했다. 곤명호는 항주(杭州: Hangzhou)의 서호(西湖: Xihu, 시후)를 모방하여 기존에 있던 수역(水域)을 더욱 확장했다.

1860년 아편전쟁(阿片戰爭: Anglo French allied invasion)으로 북경이 함락되자 칭이위안과 원명원(圓明園)의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다. 1886년 자희태후(慈禧太后: Cixi, 츠씨, 서태후)는 중국해군 북양함대(北洋艦隊: Beiyang Fleet)의 자금 30만 냥(两)을 유용하여 칭이위안을 재건하고 확장하여 이허위안(頤和園)이라 개명했다. 석방(石舫: Marble Boat)과 같은 수많은 자희태후의 사치는 청조(淸朝: 1644-1912)몰락을 상징하게 되었다.

원래의 여름 이궁(離宮)이었던 원명원과 구별하여 이허위안을 “New Summer Palace”라고도 한다.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이 일어난 1900년 8개 연합군의 침입으로 재건된 이허위안은 다시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1903년 피신했던 자희태후가 북경에 돌아오자 다시 복구를 시작했다. 이렇게 이허위안은 외세의 파괴적인 간섭주의의 문명과 관계되어 있다.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이 성공하자, 이허위안은 일반에 개방되었다. 1924년 청조(淸朝)의 마지막황제 부의(溥儀))가 축출되면서 이허위안은 공원이 되었다.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허위안은 관례상 궁전(통치), 거주(만수산), 풍경의 세 지역으로 나눈다.

동궁문(東宮門: Donggongmen)의 안쪽 그리고 곤명호의 북동쪽이 궁전지역인데, 자희태후와 광서제(光緖帝: 1875-1909)가 관리들을 만나 국무를 처리한 곳이다. 동궁문의 현판의 이화원(頤和園) 글씨는 광서제(Guangxu)의 작품이다.

인수전(仁壽殿: Renshoudian, 렌쇼디엔)

동문을 들어서 조금 걸으면 서쪽에 인수전(仁壽殿: Benevolence and Longevity)이 보이는데, 궁전지역의 주요건물이다. 원래 근정전(勤政殿: Qinzhengdian)이라 칭했는데 광서제가 인수전(Renshoudian)으로 변경했다. 인수전 내엔, 옥좌, 병풍, 공작깃털로 만든 장식용 부채, 향로, 크레인모양의 등이 원래 진열되어 있던 대로 남아 있다. 병풍은 아주 독특한데, 아홉 마리의 용과 각기 다른 226개의 수(壽)자가 새겨져 있다.

인수전 앞뜰에는 속이 빈 불사조와 용모양의 청동상이 있다. 마당의 진귀한 4개의 돌(壽星石 등)은 사계를 표현한 것이다. 인수전의 북쪽엔 연년정(延年井: Yannianjing)이 있다. 자희태후가 이 물을 먹고 열사병에서 회복되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옥란당(玉澜堂:

옥란당(玉澜堂: Jade Ripple)은 본전과 두 개의 보조전각으로 이루어진 삼합원(三合院: Sanheyuan)형태의 “ㄷ”자 건물이다. 건륭제(乾隆帝: Qianlong, 1735-1796)가 처음 지어 국사를 처리하던 곳이었으나, 1860년 소실되었고 1892년 재건축 되었다. 1898년의 개혁운동 백일유신(百日維新)이 실패하자 개혁을 옹호했던 광서제(光緖帝: Guangxu)는 이곳에 연금되었다.

옥란당의 명칭은 서진(西晉: 265-316)의 육기(陸機/陆机: Luji)의 시 “Jade spring with ripple water”에서 유래했다. 동쪽 전각의 응접실과 반대쪽의 침실은 광서제 때의 것이다. 자단(紫檀)의 다리에 침향(沈香: agalwood)의 판으로 된 광서제의 책상은 섬세한 조각품이다. 두 겹의 유리로 된 병풍엔 전통적인 중국과 서구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덕화원(德和園: Deheyuan, 더허위안)

인수전 북쪽의 덕화원(德和園)은 경극(京劇/京剧, jingju, 징쥐)을 관람하던 곳이다. 좌전(左傳: Zuozhuan)에서 따온 덕화(德和: Dehe)는 “섬세한 가락을 들으며 심신을 안정 시킨다”는 의미이다. 덕화원은 대희루(大戱樓/大戏楼), 이악전(頤樂殿/颐乐殿), 분희루(扮戱樓/扮戏楼)로 이루어져 있다.

청조(淸朝:1644-1912) 극장은 피서산장(避暑山庄)의 청음각(淸音閣: Qingyin), 자금성의 창음각(暢音閣), 그리고 대희루 등의 3곳인데, 이중에서 21m 높이의 대희루가 가장 크다. 자희태후의 회갑을 기념하여 세운 대희루는 3층으로 지어졌다. 각각 복(福: Fu), 녹(祿: Lu), 수대(壽臺/寿台: Shou)라 부르는데, 각층의 마루는 통풍구가 있고 수대(壽臺)아래에는 깊은 우물과 5개의 연못이 있다. 이 우물과 연못들은 소리의 공명(共鳴)을 통해 음향효과들 확대시킨다. 특수효과는 각층 밑에서 이루어졌다.

의예관(宜藝館/宜芸(艺)馆: Yiyun)

옥란당 북쪽엔 “학문에 정진하기 좋은 곳”이란 의예관이 있다. 본관은 광서제의 황후 륭유(隆裕: Longyu)의 거처였고, 서쪽의 이어진 건물에는 황비 진비(珍妃: Zhenfei)의 거처였다. 1898년 백일유신(百日維新)이 실패하자 광서제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건물이 나뉘어졌다.

본관은 앞쪽에 5개의 방과 뒤쪽에 3개의 방이 있고 10여 개의 연결된 객실이 있다. 이곳에는 많은 귀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안주인의 품위를 나타내는 술이 달린 문 옆엔 건륭제(乾隆帝: Qianlong)가 상감 새긴 10여 개의 석판이 회랑에 있다.

낙수당(樂壽堂/乐寿堂: Leshoutang, 르쇼탕)

곤명호의 북동쪽에 위치한 낙수당은 건륭제(1711-1799)가 그의 어머니의 처소로 처음 건립하였으나, 1860년 아편전쟁으로 소실되었다. 1887년 자희태후가 여름에 머무는 별장으로 재건했다. 그녀는 48명의 시종과 수천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이화원에 머물렀다. 낙수(Leshou)는 논어(論語: BC 551-479)의 “지자락(知者樂), 인자수(仁者壽)” - 지혜를 갖춘 사람은 즐겁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 에서 따온 말이다.

본관엔 옥좌(玉座), 부채(宮扇:궁선), 책상(御案:어안), 그리고 유리병풍(圍屛:위병) 등이 있다. 옥좌 양쪽의 자기는 청조(淸朝: 1644-1912)를 대표하는 청화백자이다. 동으로 만든 4개의 커다란 향로(香爐)엔 9개의 복숭아가 새겨져 있는데, 백단(白檀)을 태워 실내공기를 향기롭게 하였다. 홀 천장의 커다란 샹들리에는 1903년 독일에서 수입한 것인데, 중국에서 사용된 초기전등 중 하나이다. 자희태후가 어탁(魚卓)이라 불렀던 탁자는 자단(紫檀)의 틀에 유리로 장식하였다. 탁자엔 작은 궁전과 경관들이 새겨져 있다. 동쪽의 내실은 자희태후의 침실이었고, 서쪽은 의상실 그리고 뒤쪽으로 궁녀들의 대기실이 있다.

낙수당 앞뜰에는 동으로 만든 사슴(鹿), 학(鶴), 보병(寶甁)이(각각 2개) 일렬로 서 있고 옥란(玉蘭/玉兰: Yulan, 목련), 해당(海棠: Haitang, 능금), 모단(牡丹, 작약)이 심어져 있다. 동상들은 육합태평(六合太平)의 의미 취한 것이고 꽃들은 옥당부귀(玉堂富貴)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영지(靈芝/㚑芝: Lingzhi)처럼 생긴 거석은 “청지수(靑芝岫: Qingzhixiu)”라 하여 건강을 보호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랑(長廊/长廊: Changlang, 창랑)

악수당 서원(西院)에서 석장정(石丈亭: Shizhang)에 이르는 장랑은 길이가 728m, 칸이273개로 세계에서 가장 긴 회랑(回廊)이다. 중간중간에 “춘하추동”을 본뜬 유가(留佳) , 기란(寄澜), 추수(秋水), 청요(清遥)라는 4개의 정자가 있다.

장랑은 만수산의 남쪽 아래의 자연적인 지형을 따라 곤명호 수변에 지어져 그림 같은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1755년 장랑을 건축할 때 건륭제(乾隆帝)는 화가들에게 절강성(Zhejiang)의 항주(Hangzhou)의 경치를 스케치하여 오게 하였다. 화가들은 돌아와서 서호의 경관 546개의 그림을 장랑에 그렸다.

중국문화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17,000여 폭의 그림들은 다음과 같다.

서유기(西遊記/西遊记: 손오공), 삼국연의(三國演義/三国演义: 삼국시대), 홍루몽(紅樓夢/红楼梦: 가보옥), 서호풍경(西湖風景), 이십사효(二十四孝: 효자24명), 장창화미(張敞畵眉: 장창고사), 우랑직녀(牛郞織女: 견우직녀 ), 장량납리(張良納履: 전국시대인물 ) 등의 그림이 있다.

각 그림의 주요부분은 반원형의 도리의 안쪽에 그려져 있는데 그림을 위해 하부구조를 놓지 않았다. 그림들은 화가들의 영감에 의해 창작된 것이다. 대부분의 그림들이 전형적인 “Sushi Colored Paintings”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배운전[排雲(云)殿: Paiyundian, 파이윤디엔]

배운전의 이름은 진조(晋朝) 곽박(郭璞: Guopu, 276-324)의 시구 “신선배운출(神仙排雲出),단견금은대(但見金銀臺/但见金银台)” –신선이 나와 구름을 물리치고, 한가로이 금은대를 바라본다 - 에서 따온 이름이다.

만수산 남쪽의 중앙에 위치한 배운전은 축하연회에 쓰였던 곳이다. 대웅전(大雄殿: Daxiong)이 있던 장소에 지어 자희태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에 사용되었다. 붉은 기둥과 금색 기와의 배운전은 21개의 방이 있다. 배운전 앞에는 동으로 만든 용(龍), 불사조(不死鳥), 보병(寶甁)들이 있다.

자단(紫檀)에 구름 속의 용을 화려하게 조각하여 만든 중간 크기의 옥좌는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평가된다. 옥좌 양쪽에 침향(沈香)나무로 수(壽: Shou)자를 조각해 놓았다. 섬세하게 장식된 병풍과, 궁선, 그리고 독일 화가가 그린 자희태후의 유화도 있다.

배운전의 남쪽의 정문이 배운문인데, 장랑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문 양쪽에는 동으로 만든 사자상이 호위하고 있고 양측에 12속상석(屬相石: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이 있다.

FONT-SIZE: 10pt; -weight: bold">불향각(佛香閣: Foxiangge,FONT-SIZE: 10pt; 풔샹거FONT-SIZE: 10pt; )

이화원과 “삼산오원(三山五園) - [만수산(萬壽山), 옥천산(玉泉山), 향산(香山): 청의원(淸漪園: 이화원), 장춘원(長春園), 원명원(圓明園), 정의원(靜宜園), 정명원(靜明園)] –의 탑들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불교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만수산 앞쪽 기슭의 석대(石臺)에서 높이는 21m 석대를 합치면 41m 이다. 팔각, 3층, 처마가 4층 구조로 황학루(黃鶴樓)를 모방해서 지었다.  주변경관을 감상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로 남쪽이 곤명호 뒤쪽이 지혜해(智慧海) 전각이다.

건륭제(乾隆帝: 1711-1799)때 9층 탑을 계획하였으나 8층을 짓다가 중지하고 1758년 불향각이 되었다. 1760년 아편전쟁으로 소실되어 1891-1894년 은화 78만냥(萬兩: tael)을 들여 재건하였다. 내부엔 금박의 천수관음(千手觀音)상이 있어 자희태후가 음력 1일과 15일에 이곳에서 참례(懺禮)하고 선향(線香)을 태웠다.

지혜혜(智慧海:Zhihuihai, 찌휘하이)

만수산 정상의 지혜혜는 건륭제 때 처음 지어진 2층의 다채로운 유약을 입힌 벽돌로 되어있다. 목재 도리를 사용하지 않아 “No Beam Hall”로 알려져 있다. 목재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1860년 아편전쟁으로 인한 화재를 견뎌냈다. 그러나 Amitayus 부처상과 외벽 속에 새겨져 있던 부처 상들은 파괴되었다.

지혜해는 여래불(如來佛: Tathagada)의 강력한 힘과 무한한 지혜를 표현한 경전에서 온말 이다.

서제(西堤: Xidi, 시디)

곤명호 서쪽의 서제(西堤)는 절강성(浙江省: Zhejiang) 항주(杭州: Hangzhou)의 소제(蘇堤: Sudi)를 모방한 것으로 서제를 거닐면 서호(西湖)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한다. 서제는 호수주변을 더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꾸미기 위해 만들었다. 서제엔 아주 특별한 형태의 다리가 6개가 있는데, 북쪽에서부터 계호교[界湖橋(桥): Jiehuqiao], 빈풍교(豳風橋: Binfengqiao), 옥대교(玉帶橋: Yudaiqiao), 경교(鏡橋: Jingqiao), 연교(練橋: Lianqiao), 유교(柳橋: Liuqiao) 이다.

곤명호의 입구에 있는 계호교는 3개의 공(孔)이 있는 십자모양의 석교이다. 사각의 정자가 있는 빈풍교는 중국 남쪽지역의 교각 형태이다. 옥대교는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백과 흑 대리석으로 건설된 아크의 우아한 곡선이 인기이다. 건륭제의 용선이 통과하기 위해서 아크를 높였다.

경교는 이백(李白)의 시 취등선성사조북루(秋登宣城謝眺北樓)의 시구 “양수협명경(两水夹明镜),쌍교락채홍(双桥落彩虹)” – 거울 같이 많은 양수에, 쌍무지개 같은 쌍교라 – 에서 따온 이름이다. 연교는 징강정여연(澄江静如练) - 맑고 잔잔한 강이 흰 명주 같다 – 에서 취한 이름이고, 유교는 햇살 아래 버드나무 가지들이 다리 옆을 난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십칠공교(十七孔桥: Shiqikongqiao, 쉬치공촤오)

곤명호 동쪽 수변(水邊)과 남호도(南湖島)를 연결하는 십칠공교는 건륭제(乾隆帝: 1711-1799) 때 지어졌다. 길이 150m 폭 8m 이며, 소주(蘇州) 보대교(寶帶橋: Baodai)와 북경의 노구교(蘆溝橋: Lugou)의 특징이 접목되었다. 수면에서 보면 무지개 아치형태로 보인다. 난간의 대리석 기둥엔 554개의 사자상이 그리고 다리의 양쪽 끝에는 기괴한 동물이 조각되어  있다. 

남호도(南湖島: Nanhu, 난호도)

3천여평에 이르는 남호도에는 함허당(涵虛堂: Hanxu), 감원당(鑒遠堂/鉴远堂: Wangyan), 용왕묘(龍王廟/龙王庙) 드의 건물이 있다. 함허당은 배들의 훈련을 사열하던 곳이었고, 용왕묘는 광윤령우사(廣潤靈雨祠/广润灵雨祠: Guangrunlingyuci)로 바뀌어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가 되었다. 남호도는 조각된 돌과 청색과 백색의 돌들이 섬을 둘러싸고 있다.

석방(石舫)

청안항(清晏航: Qingyanhang)으로도 알려진 대리석 배는 건륭제(乾隆帝: 1711-1799)가 강남을 순회하던 배의 창루(舱楼)를 모방하여 1755년에 지었다. 옛 글에 이르길 “물은 배를 움직이게 할 수 있고 뒤집기도 할 수 있다” 고 했는데, 여기서 일반백성들을 말하는 물은 왕실을 지지할 수도 있고 전복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건륭제는 청조(淸朝:1644-1912)의 확고한 통치를 상징하는 거대한 석방을 물위에 건축했다.

1860년 소실된 후, 1893년 자희태후는 해군자금을 유용하여 다시 건축하였다. 삼감모양의다채로운 유리창, 수레바퀴, 색 벽돌들이 포장된 석방은 36m 길이에 2층 구조이다. 각층에 거대한 거울을 붙여서 우기에도 자희태후는 차를 마시며 호수경관을 감상할 수 있었다. 각 방향에 4개의 용머리를 설치하여 배수를 용이하게 하였고, 떨어진 빗물은 수로를 통해서 용의 입으로 그림같이 뿜어진다.

후호(后湖)

석방(石舫)을 통과해 북쪽으로 걸으면 후호를 만나게 된다. 작은 건물들이 둘러싼 후호 주변의 풍경은 한가하고 안락하다. 우거진 실록과 구불구불한 길은 후호주변의 풍경과 구별되는 독특한 모습이다. 만수산은 3면이 호수가 감싸고 있는데, 후호는 조망이 좋은 한가로운 장소다. 수변(水邊)에는 조원제(眺遠齋/眺远斋: Tiaoyuanzhai) 해취원(諧趣園/谐趣园: Xiequyuan), 소주가(蘇州街/苏州街) 등이 있다.

해취원(諧趣園/谐趣园: Xiequyuan, 시에취위안)

이허위안 북동쪽 끝에 위치한 해취원은 아름다운 설계와 독특한 배치로 “정원 속의 정원”으로 유명하다. 중국 북부지역의 정원 중에서 남부지역의 전통정원을 가장 잘 표현했다.

1751년 건륭제가 강남을 돌아볼 때, 강소성(江蘇省: Jiangsu) 무석(無錫: Wuxi)의 기창원(寄暢園: Jichuangyuan)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허위안에 유사한 정원을 짖도록 하고  혜산원(蕙山園: Huishanyuan)이라 칭했다. 1811년 수리한 후 해취원으로 변경하였으다. 1860년 소실되었다가 1893 재건되었다.

해취원은 3면이 경사면으로 가운데 연못이 있다.  해취원엔 7개의 별관, 5개의 홀, 수많은 회랑과 작은 다리들이 우아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 곳은 자희태후의 낚시 장소였는데, 환관들이 몰래 물 속에 들어가 바늘에 고기를 걸어주었다고 한다.

해취원 8경으로 유명한데, 재시당(載時堂/载时堂: Zaishi), 묵묘헌(墨妙軒/墨妙轩: Momiao), 취운루(就雲樓/就云楼: Jiuyun), 담벽재(淡碧齋/淡碧斋: Danbi), 수락정(水樂亭/水乐亭: Shuile), 지어교(知魚橋/知鱼桥: Zhiyu), 심시경(尋詩徑/寻诗径: Xunshi), 함광동(涵光洞: Hanguang)이 그곳이다.

소주가(蘇州街/苏州街:Suzhoujie, 쑤저우제)

60여 개가 넘는 상점들이 300m의 거리에 들어서 있다. 강소성 소주시를 본 따서 후호(后湖) 수변에 설치한 소주가는 후호가 거리의 역할을 했고 수변이 상점이다. 이 곳은 황제들과 후궁들이 상가를 거니는 듯한 기분을 내기 위한 오락장소였다. 환관과 궁녀들은 좌판상인, 손님, 상점직원으로 역할을 나누어 시장풍경을 흉내 내었다.

오늘날에는 염색 점, 기념품 점, 약국, 은행, 신발상점, 찻집, 전당포, 청조복장을 착용한 사무소 등의 점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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