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삼의 정의
고려인삼은 다년생의 반 음지성 숙근초(宿根草)로서 그 뿌리를 약용으로 하는 초본식물(草本植物)이다.
식물학적으로 보면 오가과(araliace)의 인삼속(人蔘屬)에 속하며 학명은 파낙스 진생(Panax ginseng C.A Meyer)으로서, 1843년 소련의 본 메이어(Carl Anton Von Meyer : 1795-1855 A.D)가 명명한 것이다.
속명인 파낙스(Panax)는 그리스어의 판(Pan : 모두)과 악소스(Axos : 의약)가 결합된 복합어로서 ‘만병통치약'이란 뜻에서 유래되었으며<진생>은 인삼의 중국음을 표기한 것이다.
인삼은 땅 밑의 뿌리와 뇌두, 땅 위의 줄기, 잎, 꽃(열매)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삼은 종자 번식을 하며, 스스로 수정을 원칙으로 하지만 드물게 타화수정도 한다.
꽃은 3년생부터 피기 시작하며 개화 시기는 5월 중순으로 채종은 7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실시한다.
채종 당시의 종자는 미숙 상태로서 일정한 휴면 기간을 거쳐야만 발아할 수 있다.
가시 없이 똑바로 뻗은 줄기는 보통 한 개가 나지만 때로는 2개 이상 5개까지 나는 경우도 있다.
길이는 보통 30-80㎝ 정도이며 줄기 위에 5개의 잎(장상엽)이 손을 펼친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인삼의 뿌리는 비대근(肥大根)으로서 주근(主根), 지근(支根) 및 세근(細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황백색을 띤다.
뿌리의 발육과 형태는 년생에 따라 차이가 있고 수확은 4-6년생 때 한다.
다년생이므로 매년 봄이 되면 땅속의 뿌리에서 새싹이 나오고 줄기는 매년 가을이 되면 고사되며, 그때 뇌두(腦頭)에 1년마다 착생한 흔적을 남긴다.
뇌두의 모양은 여러 형태로 수삼의 품질 선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뇌두가 약하거나 떨어진 것은 저가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고려인삼은 뇌두가 큰 것이 특징인데, 이는 우리나라의 재배 환경적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타국산 인삼과 구분하는 지표로서 이용되고 있다.
2) 인삼의 명칭
전래되는 인삼의 고유명칭은 ‘심'이며 그 어원 및 사용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동의보감 제중신편(濟衆新篇)이나 황도연(黃度淵)의 방약합편(方藥合篇) 등에 ‘심'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 상용 명칭으로 ‘심'이 쓰였음을 알 수 있고 근래까지 산삼 채취인의 은어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고려인삼(人蔘)의 ‘인(人)'자는 인삼의 뿌리 형상이 사람의 모양을 닮았다 하여 생긴 것으로 보는데 삼을 표시하는 한자는 ‘석 삼(參)'자 또는 ‘가지 치솟을 삼(蔘)'자 등으로 중국 문헌에 기재되어 있으며, 사람의 형상을 닮지 않은 다른 종의 인삼과 구별된다.
원래 ‘삼(蔘)'이라는 문자는 계피나무를 가리키며 고대 중국에서 귀한 약초인 계피와 생강을 칭하는 것으로 약초 중에서도 으뜸인 인삼에게도 ‘삼(蔘)'자를 붙였으리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세계적으로 인삼속의 식물 종은 6-7종이 알려지고 있으나 경제적으로 재배되어 세계 시장에서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는 인삼종은 크게 3가지 종류가 있다.
지리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중국 등 아시아 극동 지역에 분포, 재배되고 있는 고려인삼종과 미국 및 캐나다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는 미국삼(Panax quinquefolius L.) 및 중국 남부의 운남성, 광서성에서 생산되고 있는 전칠삼(Panax notoginseng F. H. Chen) 등이다. 미국삼이나 전칠삼, 죽절삼은 고려인삼종과는 다른 식물종으로 일반적으로 ‘인(人)’자를 사용하지 않으며 고려인삼만을 ‘인(人)’자를 사용하여 인삼(人蔘)이라고 한다.
3) 인삼의 역사
① 상고시대의 삼
고려인삼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약용 식물로서 시대에 따라 화폐를 대신한 경제식물(經濟植物)로 국가 재정을 도왔고 국난이 있을 때는 정치식물(政治植物)로서 국권과 민생을 수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 고려삼(高麗蔘)을 세상에 알린 학설로는 고대 노자의 약용설(藥用)과 한방의학의 원조를 이루는 신농씨(神農氏)의 “약초발견설"과 자연생삼인 산삼(山蔘)을 논한 동의서(東醫書)가 있다.
백제 온조시대와 고구려 20대 장수왕 23년(AD 435년)에는 위(魏)국과 수교품으로 인삼을 취급한 기록이 있고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12년에는 양(梁)나라와 인삼을 수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628년 당태종(唐太宗)이 중국을 통일하자 신라와 번창한 수교 교역이 시작되었고 629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과 중국 대륙 제국과의 인삼 교역이 진행되었다.
신라 26대 진평왕 49년(627)에는 당 고조에게 수교품으로 인삼을 보낸 기록이 있고 33대 성덕왕 22년(723)과 33년(734) 39대 조성왕(照聖王) 원년(799년)에 당나라와 인삼이 수교품으로서 중요하게 사용되었으며, 46대 문성왕 원년(840년)에 이르러 무역품(貿易品)으로서의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② 한눈으로 보는 연보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려인삼의 교역과 재배상의 발전 그리고 인삼에 관한 국가 시책상의 주요한 변천상을 발췌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
★연도 내용
513 -백제 무령왕 12년 4월에 양(梁)의 무제(武帝)에게 인삼을 보내다.
627 -신라 진평왕 9년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10년에 왕사(王使)를 통해 인삼을 예물로 보내다.
662 -신라 문무왕 2년 나당(羅唐) 연합군 편성시에 수교품으로 인삼 200근을 보내다.
739 -신라 효성왕 3년 발해국 문왕이 인삼 30근을 왜국(倭國)의 동대사(東大寺)에 보내다.
1009 -고려 현종 원년(元年) 당시 국제 무역항인 예성강 벽란항에서 아라비아 상인들이 그들의 토산품과 고려인삼을 교역하다.
1123 -고려 인종 원년 산양삼(山養蔘)의 번식 및 인공 재배를 시도하다.
1123 -“고려 인종 원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하였던 서긍(徐兢)은 귀국 후에 <宣和 奉使 高麗圖經> 이라는 서책을 출간하였으며 그 내용 중에는 고려인삼에 관해 “然而 涉夏則損蠱.不若經湯釜而.熟者可久留"라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시 고려에서 홍삼 제조 기술이 개발되어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1392 -조선으로부터의 조공품(朝貢品)에 인삼을 정하다.
1398 -“조선 정종 원년 7월 왜국사자(倭國使者)에게 인삼 50근을 하사하였고, 동년 8월 왜국 족리막부(足里幕府) 사자(使者)에게 인삼을 하사하다. 송도(松都) 고려 유민들이 대거 은둔하여 삼농사에 종사했으며 인삼의 인공 재배를 발전시키고 토착화하였다."
1405 -조선 태종 5년 연경에 사신으로 갔던 예문관제학 김한로가 인삼을 사사로이 무역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며 그후로는 인삼의 사적인 국외 반출을 나라에서 금하다.
1413 -鄕藥集成方을 편찬하다.
1429 -조선 세종 11년 명나라와 타협하여 양국간 교역 결제 수단으로 금은과 고려인삼을 병용하고 1인당휴대량을 10근으로 제한하다.
1601 -“전국 공납 인삼의 양이 1,900근이다."
1602 -명나라 사신이 조선의 국고에서 다량의 인삼과 은을 탈취해 가다.
1606 -“조선 선조 39년 파삼(把蔘, 煮製蔘 : 홍삼을 10개씩 묶은 것)의 제조를 엄금하였으며 로인(路引)을 발급하여 증명서 없이는 평안도 인삼 산지의 출입이나 인삼의 상거래를 할 수 없도록 엄금하였는데 이는 인삼의 개별적인 상행위를 규제한 최초의 법이다."
1608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서 인삼과 은을 강요하여 국고가 결핍되다.
1610 -조선 광해군 10년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술하다.
1621 -명나라 사신에 의한 인삼과 은의 수탈로 인해 국고가 결핍되다.
1624 -“북경으로 가는 朝貢使(年數回, 數百人)의 여비를 은에서 인삼으로 바꾸다."
1645 -청의 칙사가 평양에 와서 국경을 건너 인삼을 밀채취하는 자가 많은 강계부(江界府)의 행정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요청하다.
1650 -가짜 또는 조악한 품질의 인삼이 증가하여 외교 예물의 검사를 엄중히 하다.
1652 -북경으로 가는 조공사절(朝貢使節)의 인삼 사무역(私貿易)을 금하다.
1662 -북경 조공사(朝貢使)의 여비를 인삼에서 은으로 바꾸다.
1669 -월강(越江)의 방지를 위한 주민 조사로 인하여 농사 불능이 되다.
1685 -조선 숙종 12년 금삼절목(禁蔘節目)을 제정하여 인삼의 밀무역과 무단 불법 채취를 단속하고 처벌하였다.
1693 -인삼의 공납이 어렵게 되자 상인들이 이를 악용하여 대납(代納)하고 폭리를 취함으로서 많은 주민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곤궁해져 이의 구제를 조연(朝延)에 요청하다.
1705 -“채삼지(採蔘地)에 부정이 횡행하며, 인삼의 밀매를 단속하다."
1711 -가짜 인삼이 횡행하였는데 이를 놓친 지방관들은 엄한 처벌을 받다.
1724 -영조 원년 송도(松都) 삼농인(蔘農人)들은 박유철(朴有哲)을 중심으로 대동 단결하여 일복식(日覆式)삼농법(蔘農法)을 크게 일으키다.
1731 -위조은률(僞造銀律)에 의해 부정인삼의 밀매자를 참형으로 다스릴 것을 정하다.
1771 -조선 영조 47년 경상도 산간지방에 인삼의 밀 재배가 성행하였고 중국 무역용 사제 홍삼이 제조되었다.
1772 -조선 영조 48년 경상도와 전라도 산간 지방에서 인삼 재배가 성행하다.
1796 -“홍삼(紅蔘)"이라는 문자가 처음으로 나타나다.
1810 -북경 조공(朝貢) 무역에 홍삼이 증가하고 개성에서는 인삼 재배가 성황을 이루며 증포소(蒸包所)를 한양에서 개성으로 이전하다.
1835 -조선 헌종 원년 개성의 보부상인 최문(崔文)이 전국 각 지방의 인삼 재배를 관찰한 후에 개성지방의 풍토에 알맞은 인삼의 집약 재배법을 고안하여 보급함으로써 오늘날 개성인삼 재배법의 기틀을 세우다.
1853 -“홍삼제조량이 25,000근에 이르다."
1908 -조선 순종 2년 7월 대한제국 법률 제14호로 홍삼 전매법을 제정하여 공포하고 홍삼 제조권을 탁지부 사세국 삼정과로 이관하였는데 이때부터 홍삼의 전매 제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③ 문헌상 유래/중국 본초서
고전적인 중국의 본초서(本草書)에 기록된 인삼을 살펴보면,
1895년 러시아의 북경주재 영사관인 Bretschneider가 중국 본초학을 연구하여 <고대 중국 본초 약물서>를 발간한 서적 중에서 인삼과 관련된 중요한 문헌으로 Pen King(=本經神農本草經), Pie Lu(名醫別錄), Wu Pu(=吳氏本草, 吳普)가 있고 주요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순(李珣 : 海藥本草, A.D. 8) : 신라국에서 공물로 바치는 인삼은 사람과 비슷하며 수족이 있다.
길이는 약 30㎝ 정도이며 압착하며 삼(杉) 나무상자에 넣어 붉은 비단으로 싸서 보관한다.
중국 사주의 인삼은 소형이며 아무 가치도 없다.
이시진(李時珍) : 고대 산동 지방은 지금의 남동 서산성을 말하는 것이며 인삼이 자생하는 국가의 국민들은 인삼을 재앙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인삼을 왕에게 아무 보상도 없이 헌납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사용되고 있던 인삼은 만주 지방에서 도입되었다.
인삼 생산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며 고려를 칭하는 것이다.
고려인삼이 대량 중국으로 수입되었으며 고려 사람들은 채소와 같이 재배하였다.
이와 같은 중국 본초서의 고전을 통해 한국인삼은 이미 옛날부터 재배법이 개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④ 역사에 근거한 동양의 인삼
인삼에 대한 인류 최초의 기록 문헌은 중국 전한(前漢)의 원제시대(元帝 BC:33-38)시대에 사유(史遊)가 저술한 급취장(急就章)으로서 인삼을 “蔘"으로 기록하였으며 후한(後漢, AD:196-220)에 장중경(張仲景)이 저술한 상한론(傷寒論)에는 인삼을 배합한 21개 약 처방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인삼을 약의 조제에 이용한 최초의 기록이다.
또한 한방의서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徑)>에 이르러서는 인삼의 산지, 품질을 비롯하여 그 약효와 응용 등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었고 야생 인삼의 자생지 등 인삼에 대한 유래도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인삼이 이용되었으며 중국에 예물로 보내었고 또한 많은 교역을 하였던 바 이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많은 사료와 문적을 통해 고증된다.
중국 양(梁) 시대의 도홍경(陶弘景)은 그가 저술한 명의별록(名醫別錄)중에 백제 무령왕(武寧王 12년, AD:513년)은 양(梁)의 무제(武帝)에게 인삼을 예물로 보내었음을 기록하였으며 당(唐) 시대의 문적인 책부원구(冊府元龜)에는 신라 진평왕이 당의 고조(古祖) 10년(AD:627)에 사신을 통해 인삼을 예물로 보내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삼의 효과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고 약초로서의 가치가 나날이 높아지자 야생인삼(山蔘)의 채취만으로는 도저히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삼의 부족현상이 고려말엽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조에는, 중국의 요구와 왕실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관의 주구가 혹심해져서 할당량을 조달하기 어렵게 된 인삼산지의 지방민들은 고향을 떠나버리는 사태마저 빈번하였다 한다.
이미 중국도 남획으로 자연삼이 거의 절멸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한반도에서 인삼을 수급하여 지탱되었으니 공급하는 우리나라는 인삼을 확보하여야 하는 필요성에 의하여 인삼 재배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시기는 고려말경으로 추종된다.
그후 조선 영조대왕 시대에 와서 인삼재배는 크게 발전되고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었다.
중국의 인삼 재배는 청(淸)대에 와서 수요가 급증함에 반하여 산출 수량이 감소되어 산에 종자를 인공적으로 파종하여 번식을 시켰을 것으로 추측되며 청대 후기에 와서 본격화되었다.
청의 건융(乾隆)년대 중기 이후 말년까지는 산양삼(山養參)이 주종을 이루었고 가경(嘉慶), 도광(道光)년대에는 점차 규모가 커져서 농업화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인삼의 자생이 전혀 없던 나라이며 742년에 조선으로부터 인삼 30근을 받았다는 기록이 인삼 도입의 최초라고 되어 있다.
인삼의 중요성을 인식한 일본이 드디어 강호 막부(江戶幕府)시대에 이르러 조선에서 인삼의 생근(生根)과 종자(種子)를 얻어 1727년경 닛꼬(日光)로 가져와 재배에 성공한 것이 재배의 시초라 한다.
지금도 일본의 인삼을 가리켜 ‘어종(御種) 인삼'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선의 인삼 종자로부터 그 근(根)이 시작되었다는 데 연유하는 것이다.
⑥ 서양의 인삼사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동방견문록>(1274년)에서 중국의 약초 이용에 관하여 상세히 기술함으로서 인삼을 최초로 서방 세계에 전하였다. 네덜란드인 E. U. Chasse는 1610년 처음으로 유럽에 인삼을 들여왔다고 하였고, 프랑스의 J. F. Lafitan(1618)은 최초로 인삼을 Ginseng chinensium이라 명명하였다.
네덜란드의 하멜은 1653년(효종 4년) 제주도에 표류하여 14년 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 체험을 기록한 <조선표류기> 가운데 조선의 특산품으로 인삼을 소개하였으며, Nicolass Witsen(1692)은 <북동부 달탄인> 중에 인삼에 관해 기록하여 유럽에 인삼을 소개하였다.
프랑스인 신부 Jartoux는 1711년 4월 달탄 지방(고구려 영토에 속하였던 만주 지방)을 여행하면서 인삼의 생태와 약효에 관해 듣고 관찰한 체험록을 인도 및 중국 포교 총사제에게 서간문으로 보내었으며, 1714년에는 이를 잡지에 게재함으로써 인삼을 보다 구체적으로 유럽에 소개하게 되었다.
1716년 프랑스인 선교사 Joseph Francois Lafiteau는 캐나다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위의 서간문을 보고 캐나다의 기후가 만주 지방과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기록중의 인삼 사생도(寫生圖)를 원주민 인디언에게 보여주고 몬트리올 근교에서 미국삼을 발견하였다.
채집된 표본을 프랑스에 보내어 식물학자에게 감정한 결과 현재 미국삼(美國蔘)으로 알려져 있는 Panax quinquefolium L.로 판명되었다.
북미에서 인삼이 발견된 후에 캐나다의 프랑스인들은 인삼이 중국에서는 귀중한 약재로 사용된다는 점을 알고 미국삼을 채취하여 중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는 1750년 뉴잉글랜드의 근교에서 미국삼이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1700년대 후반부터 중국으로의 수출이 시작되었다.
1830년에 네덜란드의 P. F. Siebold는 고려인삼을 ‘Panax quinquefolia var. corrensis Siebold'라고 명명하였으며 1833년 독일의 Nees von Esenbeck은 고려인삼의 학명을 ‘Panax schinseng var. coraiensis Nees'로 명명하여 “고려(高麗)"를 학명에 표시하였다.
그러나 1843년에 러시아의 C. A. Meyer는 다시 고려인삼의 학명을 ‘Panax ginseng var. ginseng'으로 변경하였고 그 후 ‘Panax ginseng C. A. Meyer'로 수정하여 발표하였으며 이 학명이 통용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