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암자.정자

약천정

영지니 2008. 2. 24. 22:52

동해시 심곡동 약천문화마을 동산에 위치한 약천정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는 여태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밧츨 언제 갈려 하나니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쯤은 암기를 한 기억들도 있을 남구만의 시 ‘동창이 밝았느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약천 남구만선생은 조선 후기(1629(인조 7)~1711(숙종 37))의 문신이다.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남구만의 본관은 의령이며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미재(美齋)로 불렀다. 후일 영의정까지 지낸 남구만은 1684년 남인의 기사환국으로 강원도 강릉(현재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부근에 있는 심곡동으로 약천동이라고도 한다)에 서 1년 여 유배생활을 하였다. 동창이 밝았느냐는 약천마을의 농촌 정경을 보고 지은 시조라고하나,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짙은 시조라고도 한다.

 

약천마을의 지명이 생기게 된 내력을 지닌 약천 


남구만선생이 이 마을로 유배를 왔을 때 약천(藥泉)이라는 샘물이 있어 자신의 호를 약천이라 짓고, 마을에 심일서당(深逸書堂)을 개설하여 마을사람들에게 1년 정도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동창이 밝았느냐」는 바로 이 심일서당에서 지은 시조이다. 심일서당은 200년 넘게 지속되어 오다가, 1900년대 들어 이 고장의 학자 김남용과 여운형 등이 운영을 하였으며, 1927년 명진소년회사건(明進少年會事件)으로 일제에 의하여 폐쇄 당하였다. 


해안의 정자를 찾아서 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는 길. 정동진을 출발하여 따라가는 길은 바람이 불기는 하지만 하얀 포말을 일구는 잔 파도물결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동해 망상해수욕장으로 가다가보면 망상역 못 미쳐 우측에 <약천문화마을>이란 입간판이 보인다. 길에서 조금 들어가긴 하지만 그 마을에 약천정(藥泉亭)이란 정자가 있다고 하니 들어갈 수밖에. 안으로 들어가니 마을 어구에 마을 유래에 대한 설명을 해 놓았는데 바로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가 이 마을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죽전의 맑은 바람, 약천 샘물가의 버드나무, 초구의 목동이 부는 피리소리, 마평 들에서 들리는 농악소리, 노봉에서 보이는 고깃배 불, 한나루에 들어오는 어선의 풍경, 향로봉에 뜨는 아침 해, 승지동의 저녁밥 짓는 연기 등 약천팔경이 있다고 하니 마음이 설렌다.


마을 안에는 이곳저곳 이정표와 안내문이 있어 여기저기 찾기가 쉽다. 정자에 오르기 전 먼저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나름대로 약천팔경의 한부분이라도 느껴보고 싶어서다. 그러나 어디 팔경이라는 것이 잠시 돌아본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을 괜히 조바심을 낸 것 같아 오히려 송구스럽다. 마을 한복판에는 지난해에 지었다는 큰 누각이 있다. 아직은 주변 정리가 다 끝나지 않았으나 이 마을에 새로운 명소가 될듯하다. 이정표를 따라 마을 진입로 우측에 자리한 송림 안에 위치한 약천정을 찾는다.

 

심곡동 약천문화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리는 당산제장

제장 앞에는 금줄을 쳐놓아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약천정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한쪽만 터놓고 돌담을 쌓은 곳이 있다. 앞에 금줄이 서려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에서 제를 지내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약천정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는 제장이란다. 매년 음력 11월에 길일을 택해 당산제를 지낸다고 하니 그때 다시 한 번 이 마을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약천정을 오르는 돌길은 약천정의 운치를 더해준다. 

하늘 닿게 솟은 노송 사이로 2월의 햇살이 따사롭다.

       

약천정(藥泉亭).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노송 사이에 2월 중순의 한낮의 햇볕이 따사로웠는지, 인적 없는 약천정은 그렇게 졸듯 고요함 속에 있다가 나그네를 반기는듯하다. 약천정 뒤로 몇 그루 오죽(烏竹)이 있어 바람에 흔들리고, 정자 안에는 떨어진 솔잎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 오히려 정겹다. 돌길로 깨끗하게 잘 정돈이 된 오르는 계단만큼이나 약천정도 그렇게 다소곳이 마을 동산 노송 숲속에 자리를 하고 있다.

 

  

송림 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 약천정


노송에서 이따금 떨어지는 솔잎과 ‘툭’하고 소리를 내는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이 모든 것이 약천 남구만선생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아니었을까? 아마 옛 선인들이 정자와 누각을 짓고 그 곳에 올라 시를 읊으며 한세상을 산 것도 이런 풍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나는 행인들이 이런 풍류에 취해 시 한수 적어 걸어두고 여정을 재촉한 것도, 모두 이런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지어 발길을 멈추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 내 시 한수 읊을 그런 풍류가 없음이 심히 안타깝기만 하다.

 

마을 한 가운데 약천 샘 옆에 자리한 약천사 


약천정을 뒤로하고 마을길로 내려오면 마을안쪽 200m 지점에 약천사(藥泉祠)가 있다. 깨끗하게 잘 정돈이 된 약천사 입구 좌측으로는 그 유명한 약천(藥泉)이 있다. 샘이라고 하여서 조금씩 솟아나는 물을 생각하다가 정작 물소리를 내며 물줄기를 내뿜는 약천을 보니 조금은 의아스럽다. 대리석으로 잘 정돈이 된 약천은 옛날 남쪽의 어느 선비가 몸에 병을 얻어 각처에 돌아다니며 물 좋은 곳을 찾다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몸이 다 나았으며, 후일 조정에 나아가 큰 벼슬을 하였다하여 약천이라고 했단다.

 

약천사 앞에 세워진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비 


약천사 앞에는 커다란 돌에 동창이 밝았느냐를 적은 시조비가 서 있다. 이 약천사는 남구만 선생이 귀향생활(1년)을 하는 동안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오다가 임금의 조정의 부름을 받아 떠난 후 약천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노곡서원(魯谷書院)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 약천사는,  김수붕(1682~1750)이 건립 후 영조 17년(1741)에 철폐되었다가, 순조 1년(1801) 중건(김수붕 후손 김종정) 하였으며, 철종 6년(1855)에 강릉신석(납돌)으로 이전하였다.  


지난 97년부터 약천 남구만선생의 얼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도비 5억 원과 시비 8억 원 등 총 13억 원의 예산을 들여 약천문화마을 약천사를 비롯해 동·서재 약천정 토담 등을 건립하는 약천사 복원사업을 추진해 온 동해시는 연차적으로 약천사 일원을 관광테마파크로 조성한다고 하니 기대할 만하다. 다음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약천정에 올라 '동창이 밝았느냐'에 버금가는 시조 한 수 읊을 수 있으려는지. 

 

고성을 출발하여 속초, 양양, 강릉을 거쳐 도착 한 곳 동해시. 그 초입에 찾아간 약천마을은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문인 약천 남구만선생의 시조 한편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리고 송림 사이에서 단아한 자태를 지니고 말없이 나그네를 맞는 약천정도 오늘 그 모습 그대로 긴 세월 또 다른 발길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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