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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요충지

영지니 2008. 4. 2. 19:26

 

 

 

 

 

 

금오산성-영남의 요충지  
     

금오산성이 국방상의 요충으로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의 샘과 일곱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흔적이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중 영남 보장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선조 29년(1596) 11월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 충청 . 경상도 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상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

路)의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宣祖實錄 卷 82)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병신년(1596)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宣祖實錄 卷 82 )

선조 30년(1597) 1월,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상주목사 정기룡이 감사대장군을 겸하여 상주진영하 9개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목사 이수일과 함께 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곳 본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후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니 그중에서도 정기용이 인근 28개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내려가서 1만2천명의 적을 전멸케 한 고령전투는 금오산성이 전략본영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한 큰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을 삼송유고(三松遺稿 卷之一)에서 짐작할 수 있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조39년(1606)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三松遺稿卷之二에 의하면 4월부터 공가를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고 한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일꾼 연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 밖의 문루(門樓.西門), 포루(砲樓.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어졌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선조39년 병오년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1,730보(步)나 되었다. 그후 30년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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