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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성-국방의 요새

영지니 2008. 4. 2. 19:28

 

 

 

금오산성-국방의 요새

 

 
     

그 후 민족사상 최대의 치욕인 병자호란을 당하자 또다시 국방상의 요충으로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미 호란 이전부터 군제의 개편, 수도 피란처인 남한산성의 수축 등의 국방대책이 추진되어 왔으며 호란 이후는 청(淸)과의 강화조약이 있었음에도 왜구대비의 구실 아래 주요 산성의 수축은 은밀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 17년(1639) 7월에는 경상감사 이명웅이 왕의 윤허를 받아 선산부사 이각으로 하여금 산성을 수축하도록 하였다.

 
 

이때 수축된 금오산성의 규모는 내성의 석축 둘레가 7,644자(尺), 높이가 7자, 무성절벽(無城絶壁)이 661보이며 성안에 7개의 못, 한개의 계수(溪水), 8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였으니 내성은 국초에 수축된 규모와 동일하나 4개의 못과 8개의 우물이 증설되었다.

외성은 둘레가 4,135자 높이가 14자로 이 외성이 인조 17년에 가축(加築)된 것이며 속읍은 개령, 금산, 지례의 세 읍으로서 각 기 군량과 병기를 비축하고 있어 춘추로 합동훈련이 이 곳에서 실시되었다. 이로 보아 국초에는 내성만 존재했고, 이들의 외성은 인조 17년에 비로소 가축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영조시대에 이르러 국방시책이 다시 거론되어 축성, 해방(海防), 병제, 군기 등의 개선과 정비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시책의 일환으로 영조 11년(1735) 선산부는 우병사영(右兵使營) 관하의 독진(獨鎭)으로 승격되고, 선산도호부사는 무3품으로서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금오산성 별장(別將)을 겸하게 되었으며 진보(鎭堡)의 사속(史屬)으로 진사(鎭史)5명, 지인(知印) 5명, 사령(使令) 10명이 배치되었다. 당시 금오산성진(金烏山城鎭)의 병력은 3,500여명이었으며 내역은 다음과 같다. (興地圖書下)

 
千 摠(正3品 將官級)
3
旗手軍(旗手, 巡令, 傳令)
88
把 摠(從4品 武官)
6
吹鼓手(吹打手, 軍樂隊)
50
哨 官(巡哨兵을 거느린 將校)
25
塘報軍(斥候兵)
25
旗碑官(軍營의 將校)
69
東伍步軍(步兵)
2,350
節制使標下軍(節制使의 手下兵)
59
卜馬軍(緇重兵)
202
將官 標下軍(將官 手下兵)
458
火兵(炊事兵)
208
 

위와 같이 거진(巨鎭)으로 체제를 갖춘 금오산성은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와 군기고가 있었고, 이 대혜창에는 쌀이 2,561석, 조가 1,608석, 피가 약497석정도 보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조때에도 국방의 요새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정조 2년(1778)에는 사직(司直) 윤만동이 영남의 산성과 함께 금오산성의 중요성을 소론(疏論)한 바가 있고 정조 11년(1787) 9월에는 삼남암행어사 김복성의 암행복명시에 왕이 금오산성의 송금상황(松禁狀況)을 하문한 기록도 보인다.

 
 
 
복성의 답을 보면 금오산성의 산림보호는 잘 되고 있으나 개령현민의 무소(誣訴)로 보호경계가 축소되어 진민(鎭民)의 원성이 크다고 보고함에 그해 10월 대신들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소견(召見)한 자리에서 영의정 김치인은 금오산성은 국방상의 요충이므로 산림보호를 엄중히 해야 할 터인데 송금(松禁)한 계를 축정(縮定)하여 진졸(鎭卒)로 하여금 금양(禁養)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도신(道臣)의 순찰시에 형편을 살펴 선처하도록 분부 할 것을 주청하여 왕은 이를 재가한 것이다. (正祖實錄 卷 24)
 

이와 같이 국방의 관액(關厄)으로서 끊임없이 관심이 기울어져 그 기능이 계속되던 금오산성도 순조 이후 진관체제(鎭管體制)의 해이와 더불어 그 가치가 쇠퇴하기는 했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산성의 군액기록으로 미루어 조선말까지는 그 기능이 존속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특히 고종 5년(1868)경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重修頌功碑)의 비문에는 대체로 "이승지 용직이 소임을 띠고 진(鎭)에 올라 두루 살펴보니 성이 무너지고, 헐려져 루(樓)와 곽(廓)이 모두 쓰러져서 국방에 믿을 것이 못되어 대원군에게 이를 아뢰었다.

그리하여 창름(倉凜)을 밝게 하고, 여러 공인들과 사졸들을 백도(白度)로 갖추어 중수를 계획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이에 감명하여 동참하게 되었다. 공사가 끝나니 성곽이 새로워 졌다. 성은 그 길이가 무릇 3,370보요, 누각은 모두 백간 이 되었다."

내성에 유존(遺存)하는 비로써 추측컨대 현재 남아있는 금오산성의 모습은 이때 중수(重修)된 후의
모습이라 하겠다.

 
금오산성의 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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