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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성-국방의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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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족사상 최대의 치욕인 병자호란을 당하자 또다시 국방상의 요충으로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미 호란 이전부터 군제의 개편, 수도 피란처인 남한산성의 수축 등의 국방대책이 추진되어 왔으며 호란 이후는 청(淸)과의 강화조약이 있었음에도 왜구대비의 구실 아래 주요 산성의 수축은 은밀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 17년(1639) 7월에는 경상감사 이명웅이 왕의 윤허를 받아 선산부사 이각으로 하여금 산성을 수축하도록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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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영조시대에 이르러 국방시책이 다시 거론되어 축성, 해방(海防), 병제, 군기 등의 개선과 정비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시책의 일환으로 영조 11년(1735) 선산부는 우병사영(右兵使營) 관하의 독진(獨鎭)으로 승격되고, 선산도호부사는 무3품으로서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금오산성 별장(別將)을 겸하게 되었으며 진보(鎭堡)의 사속(史屬)으로 진사(鎭史)5명, 지인(知印) 5명, 사령(使令) 10명이 배치되었다. 당시 금오산성진(金烏山城鎭)의 병력은 3,500여명이었으며 내역은 다음과 같다. (興地圖書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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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국방의 관액(關厄)으로서 끊임없이 관심이 기울어져 그 기능이 계속되던 금오산성도 순조 이후 진관체제(鎭管體制)의 해이와 더불어 그 가치가 쇠퇴하기는 했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산성의 군액기록으로 미루어 조선말까지는 그 기능이 존속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특히 고종 5년(1868)경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重修頌功碑)의 비문에는 대체로 "이승지 용직이 소임을 띠고 진(鎭)에 올라 두루 살펴보니 성이 무너지고, 헐려져 루(樓)와 곽(廓)이 모두 쓰러져서 국방에 믿을 것이 못되어 대원군에게 이를 아뢰었다. 그리하여 창름(倉凜)을 밝게 하고, 여러 공인들과 사졸들을 백도(白度)로 갖추어 중수를 계획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이에 감명하여 동참하게 되었다. 공사가 끝나니 성곽이 새로워 졌다. 성은 그 길이가 무릇 3,370보요, 누각은 모두 백간 이 되었다." 내성에 유존(遺存)하는 비로써 추측컨대 현재 남아있는 금오산성의 모습은 이때 중수(重修)된 후의 | ||||||||||||||||||||||||
금오산성의 외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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