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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성안마을

영지니 2008. 4. 2. 19:33

 

 

 

 

금오산 성안마을

 

 

 
     

금오산에는 두개의 마을, 즉 외성리와 내성리가 포함되어 있다. 원호의 수는108호이고 인구는 451명이며 이 가운데 남자는 226명, 여자는 225명으로 되어있다(1994년 금오산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구미시, 안동대학교』). 이 규모는 작으나 두개 마을을 합한 숫자임을 감안할 때에는 결코 적은 수는 아니다. 이를 통해 최소한 18세기 후반기에 금오산성에 살았던 인구 규모가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0년대를 전후하면서 인구가 조금 감소하는데 이는 아마도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금오진이 가진 국방상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과거의 번성을 잃게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832년 만들어진 『청구도』를 보면 금오산성에 보관된 군기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외성마을 원호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내성안 마을에는 40호가 거주한다고 되어 있다. 호구당 평균 4~5명으로 잡으면 약 160~200명이 내성안 마을에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 화전정리 사업으로 산을 내려온 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해방을 전후해서 10여호가 살고 있었고, 해방 후 전쟁기간을 거치면서 주둔한 미공군 통신대와 국군의 주둔이 다시 한번 이 성안 마을에 활기를 가져 왔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통신대와 관련된 일을 하던 임시 고용인들이거나 출퇴근자였고, 군대가 철수하면서 함께 산을 내려 왔다고 한다.

 
 

그리고 성안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었다. 성안마을에는 논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도 하지만 기온 등의 조건이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부가 밭농사였다고 할 수 있다. 금오산 화전정리사업(1974년)을 위한 조사대장에 나타난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면 성안마을의 토지소유 상황을 추측할 수 있다.

이 곳 토지는 10명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평균 경작 면적이 2,500평 정도이고, 가장 많은 토지를 가졌던 사람은 4,880평인데, 4,000평 이상 경작자가 한 사람 더 있었다.

 
반면 500평 미만 경작자도 세가구가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평지보다 성안마을 사람들의 경제적 형편이 오히려 나았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산성에 있어서의 물의 존재는 아주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금오산성의 경우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 國輿地勝覽)에 나타난 수원(水源)은 못이 3개소에 계곡이 하나이던 것이 선조28년(1595) 배설에 의한 수축 때는 9정7택(9井7澤)이라 하여 9개소의 우물과 7곳의 저수지를 만들었으며 인조17년(1639)에

이낙(李烙)에 의하여 수축되었을 때의 산성에는 7개의 저수지와 1개의 계곡 그리고 8개소의 우물이 있었다.

현재 저수지가 내성에는 6개소 외성에는 1개소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인조 당시 내성에 있었다는 7개중 1개소 만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우물은 금호정 1개소만 확인되었다. 성내에 주둔하던 병졸들이 관군의 무장해제로 인해 각자 하산하여 귀향하게 되었으나, 개중에는 성내에 남아 토지를 개간하여 감자도 심고 배추도 가꾸고 약초도 캐면서 살아남은 유민이 10여호로 마을을 이루었다.

 
 

병졸 주둔시 개간하여 가꾸던 감자로 기호풍인 술을 빚어 먹던 솜씨가 남아 수시로 감자술을 빚어 마셨던 것이 애주가, 식도락가들의 입을 통해 "금오산성안 감자술"로 일약 이 고장의 명물로 등장하였고 등산길에 감자술의 맛을 봤던 인근고을의 애주가, 식도락가들이 못내 아쉬워하는 향수가 이향민이 고향에 대해 느끼는 향수 못지 않다고 하겠다.

순백색의 약간 걸죽한 그 백주(白酒)를 마시면 조금도 목에 걸리는 거부감 같은 반응이 없이 술술 글자 그대로 잘 넘어가고, 마신 후 서서히 취기가 도는 탓에 멋모르고 마시다 보면 몸을 가누기가 어렵다는 애주가들의 이야기가 있다.

또한 성내 분지의 화산회토(火山灰土)에 오랜 세월 부엽의 흙에서 나는 감자는 전분입자가 굵어 맛이 좋을 뿐 아니라 해발 천미터가 가까운 고냉지에서는 감자의 치명적인 병인 ‘바이러스'의 감염이 없어 더욱 풍산이고 맛이 좋다고 하였으며, 금오산의 약수인 성내마을 한 가운데에서 용출하는 금오정(金烏井)의 물맛이 또한 술맛에 절대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같은 감자를 가지고 같은 솜씨로 빚어도 산 밑 야지에서 빚으면 그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안배추는 비옥한 고냉지에서 재배하므로 "바이러스" 의 피해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여름에도 평균 기온이 10℃ 안팎이기 때문에 배추같은 십자화과(十字花科) 채소의 생장에 적온으로 맛 좋고 질 좋은 배추가 생산되어 60년대까지만 해도 교통상으로나 기술상으로나 대관령 등 고냉지(高冷地) 채소가 없을 당시 금오산 ‘성안배추'는 이 고장의 명물 중의 명물이었다.

 

67월 삼복더위 때 야지의 채소는 30℃가 넘어 고온다습으로 다 망한 다음 성안에서는 등짐으로 먼동이 틀 무렵 내려오는 배추가 금오산 입구까지 올라와 기다리던 아낙들에 의해 불똥이 튀기도록 경합되어 순식간에 동이 났었다. 그 때 재배되던 배추 품종은 ‘조선배추', ‘개성배추' 등 재래종 반결구형으로 줄기가 순백색으로 길고 유난히 사박사박하여 입안에서 녹는 듯한 감칠 맛이 있어, 50~60대의 옛 이 고장 사람들에게 그 맛을 못잊는 향수를 느끼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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