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낙산사

영지니 2008. 8. 15. 22:30

 

낙산사의 상징으로 여기는 해수관음상 - 울창한 숲은 민둥산이 되어버렸다.

 

양양 오봉산 자락에 자리 잡은 낙산사는 관음보살이 설법을 펼치며 항상 머무는 곳을 이르는 보타낙가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역대로 지위와 신분을 떠나 관음진신을 친견하려는 참배객들의 간절한 발원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절집이다

특히 낙산사는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풍광과 부처님진신사리가 출현한 공중사리탑, 보물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 천수관음상,  관음상 등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보타전, 창건주 의상대사의 유물이 봉안된 의상기념관 등 숱한 성보문화재를 갖추고 있어 관음성지이자 천년고찰로서 전 국의 불자뿐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낙산사는 지난 2005년 4월 대형 산불로 인해 많은 당우가 소실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새롭게 천년사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2006년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둔 4월28일, 공중사리탑 보존처리 과정에서 부처님 진신사리와 장엄구가 출현하여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해송으로 덥혀있던 울창한 숲은 흔적도 없다. 저 멀리 눈이 쌓인 설악산이 보인다(맨위). 홍예문 앞에 놓여진 소방차가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든다.(가운데) 불탄 흔적인 노송의 뿌리들이 검게 그을려 있다)아래)

 

낙산사를 올라가는 길은 민둥산이었다. 그렇게 울창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송림은 흔적도 없고 군데군데 아직도 불타버린 소나무의 뿌리가 볼썽사납게 여기저기 널려있다. 천년이 넘는 고찰의 아름다움에 한몫을 하던 송림이 사라지고 새롭게 조성한 작은 묘목들을 바라보려니 마음 한 구석이 찡하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인지...


한편에 세워진 소방차를 보려니 우리의 문화재를 보호하려는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 낙산사의 당우들의 소실, 그리고 보물인 동종의 소실과 복원 등 오만가지 생각이 스친다.

 

 

불타기 전의 홍예문과(위/낙산사 자료사진) 현재 복원중인 홍예문 루각

 

일주문을 지나 낙산사를 오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무지개 모양의 구름다리인 석문(石門)인 홍예문이다. 지난 날 낙산사를 몇 번인가 찾았을 때 그렇게 아름답다고 느끼던 홍예문은 한창 복원 불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는 것도 복원이 잘 이루어져 옛 모습을 되찾기를 간절한 바람에서다.


이 홍예문은 위는 누각(樓閣)이고 그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이룬다. 누각은 산불로 인해 소실되었다. 홍예문은 1467년(세조 13)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며, 그 위의 누각은 1963년 10월에 지은 것이다. 축조 방식은 먼저 문의 기단부에 걸치게 다듬은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된 방형의 선단석(扇單石) 3개를 앞 뒤 두 줄로 쌓아 둥근 문을 만들었다. 선단석은 홍예문 등에 사용되는 맨 밑을 괴는 모난 돌을 가리킨다. 문의 좌우에는 큰 강돌로 홍예문 위까지 성벽과 같은 벽을 쌓아 사찰 경내와 밖을 구분했다. 이 홍예문에는 장방형으로 26개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원통보전과 보물 제499호 칠층석탑의 설경(맨위/낙산사 자료) 불타버린 흔적을 가시고(두번째)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원장(세번째)과 대성문 옆 허물어진 원장(네번째) 그리고 보물 제499호 칠층석탑(맨아래)

 

안으로 들어가니 보물 제499호인 7층 석탑이 보인다. 그 뒤로 있던 원통보전은 간 곳이 없고 대성문 옆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원장(담장) 한편이 허물어져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낙산사 칠층석탑은 보물 제499호로 지정이 되었다.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基壇部)는 정사각형의 바닥 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탑의 머리장식부에는 가늘고 긴 쇠막대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어 또 다른 특징이 되고 있다.

 

 

보타전(맨위)과 보타락(두번째) 의상대사가 참선을 한 자리에 지은 의상대(세번째) 그리고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했다는 홍련암(아래)

 

보타전과 보타락을 우측 아래에 두고 동해바다 쪽으로 보면 해수관음상이 보인다. 지난날에는 이 곳 주변이 울창한 해송에 덥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산림욕을 즐기고는 하던 곳인데 이제는 바다 쪽 홍련암 쪽으로 난 비탈에는 산죽이 욱어져 있다.


보타전에서 의상대와 홍련암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에 의상대사기념관이 있다. 의상대는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산세를 살핀 곳이며 참선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의상대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면 그 경치가 가히 절경이다. 아마 2007년 1월 1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올라 해맞이를 할 것 같다.


홍련암은 한국의 3대 기도처 중에 한 곳이라고 한다. 그만큼 평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현재 홍련암도 보수 공사중이다.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짓기 전에 이곳에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곳으로 유명하다.


홍련암의 연혁은 주로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거해 살펴볼 수가 있다. 말사지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창건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619년(광해군 11)에 중건되었고, 1752년(영조 28)에 덕린(德麟)스님이 중수했다. 이어서 1797년(정조 21)에 혜민(惠旻)스님이 중건을 하였으며, 1869년(고종 6)에 의연(義演)스님이 중건,  1911년에 흥운(興雲)·청호(晴湖) 두 스님이 중수했다고 한다. 1869년의 중건은 1866년의 홍수로 무너졌기 때문이며, 1911년의 중수는 1908년(융희 2)에 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연혁이 비교적 짧고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연혁이 거의 전하지 않는 점이 아쉽지만,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나마 그런대로 낙산사와 더불어 꾸준히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당우로는 관음전과 요사가 있다. 전각이나 불상·불화 등에서 오래된 것은 없으나 홍련암 전체가 현재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복원 중인 낙산사를 한 바퀴 돌아 해수관음상을 보고 마음속에 간절한 소망을 빈다. 해수관음 상 뒤편으로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나르고, 저 멀리 대포항이 보인다. 지난 천년 세월을 꿋꿋하게 지켜 온 낙산사. 화마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오늘도 복원불사는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하루 빨리 옛 모습을 되찾아 아름다운 절집으로 거듭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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