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백담사

영지니 2008. 8. 15. 22:28

 

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절로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을 흘러온 맑은 물이 합쳐지는 백담계곡 위에 있어 내설악을 오르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세웠는데 처음은 한계사라 불렸으나 그 후, 대청봉에서 절까지 물이 고이는 소(沼)가 백 개소가 있다고 하여 백담사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백담사는 십여 차례 소실되었다가 6. 25동란 이후인 1957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는 등 역사적 곡절이 많은 절이다.


문화재로는 자장율사의 유물소동일좌와 인조 때 설정대사에게 하양한 칠층소형옥탑 등이 있으며, 암자로는 영시암, 오세암, 봉정암이 있다. 그 밖에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머리를 깎고 수도를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만해의 대표작인 『님의 침묵』이 백담사에서 써졌기에 더욱 유명하다.

백담사 경내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흉상

 

백담사를 찾은 날은 유난히 쌀쌀한 날씨 덕분에 잔뜩 옷깃을 여미고 길을 나섰다. 11월 말의 날씨치고는 바람도 불고 첫눈도 내린 뒤라서 인가 괜스레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고 생각이 든다. 일요일이라서 인가 백담사를 오르는 용대리 백담사를 오르는 주차장엔 벌써 만차를 이루었다고 한다. 입구에는 백담사를 오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첫 눈이 내린 산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과 백담사에서 시간을 보낸 전두환 전 대통령의 거처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섞여있는 듯하다. 


백담사를 오르겠다고 하니 동행을 하신 스님덕분에 <사찰업무차량>이라는 스티커를 앞에 놓고 백담사로 향했다. 산길을 구불거리며 오르는 동안 몇 번인가 버스를 피해 곡예 아닌 곡예를 하면서 길 아래쪽을 보니 맑은 물이 흐르고 백 개의 웅덩이가 있다고 하더니 물이 한번 돌때마다 소가 만들어진 것이 보인다.

 

백담사의 전각들

 

백담사, 넓지 않은 절집 터에 여기저기 많은 전각들이 들어차 있다. 새로 불사를 한 많은 전각들 때문에 오히려 조금은 답답해 보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몰려다니면서 구경을 하느라 소란하다. 천년을 훌쩍 넘긴 고찰이라고 하기에는 예스러운 고풍이 부족한 듯도 하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찬찬히 훑어보면 백담사만의 정취를 찾을 수가 있다.


백담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도 아니고 만해도 아니다. 백담사에는 무문관이라는 선원이 있다. 백담사 무문관은 큰절에서 계곡을 왼편에 끼고 위쪽으로 150여 미터를 올라가면 옛날 원통전이 있던 자리에 있다. 1998년 개설된 무문관은 3채의 목조건물이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무문관은 동안거나 하안거 때 수행을 하기 위한 스님들이 안거에 들면 밖에서 문을 잠가버린다.

 

평 남짓한 쪽방에서는 안거 동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신다. 물론 이 동안에는 묵언(黙言)을 하신다고 하니 그 고행이야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루에 한번 사시에 30cm 남짓한 공양구를 통해 밥과 국, 나물 등이 들어온다. 이것이 100일 동안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소통을 할 수 있는 통로다. 수행 중 몸에 이상이 생기면 쪽지로 상태를 적어 내보내면 거기에 맞게 약을 지어 들이거나 생식 등으로 처방을 한다고 한다. 무문관은 법랍 20년 이상 20안거 이상의 구참 수좌들을 대상으로 입방 자격이 주어진다. 그것도 미리 신청을 하지 않으면 방을 얻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무문관에는 노장스님들이 매 안거 때마다 참여를 하신다.

 

 

방문객의 염원을 담은 기와들

 

절집을 한 바퀴 돌아 극락보전 앞으로 가니 기와에다가 자신들의 염원을 적어 여기저기 가득 쌓아 놓았다. 절집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원이 적힌 기와를 보면서 참으로 사람이란 살아가는 자체가 고행(苦行)이요, 세상이 고해(苦海)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첫눈 내린 뒤 초겨울의 백담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