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난중일기 - 9

영지니 2008. 4. 13. 19:24

6월 12일 [양력 7월 25일]<신미> 맑다.
종 경(京)과 종 인(仁)을 한산도 진으로 보냈다. 전라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최호)? 경상수사(배설)? 가리포첨사(이응표)? 녹도만호(송여종)? 여도만호(김인영)? 사도첨사(황세득)? 동지 배흥립 (裵興立)? 조방장 김완(金浣)? 거제현령(안위)? 영등포만호(조계종)? 남해현감(박대남)? 하동현감(신진)? 순천부사(우치적)에게 편지를 했다. 저녁나절에 승장 처영(處英)이 와서 보고 부채와 미투리를 바치 므로, 물건으로써 갚아 보냈다. 또 적의 사정을 말하고 또 원공 (원균)의 일도 말했다. 낮에 중군장(이덕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 갔다고 한다. 어떤 일인지 몰랐는데, 원수(권율)에게 가 보니, 우병사(김응서)의 보고에, "부산의 적은 창원 등지로 떠나려 하고, 서생포의 적은 경주로 진을 옮긴다."고 했다. 복병군 을 보내어 길을 막고 적에게 위세를 뽐내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병사의 우후 김자헌(金自獻)이 일이 있어 원수에게 뵈러 왔다. 나도 원수를 보았다. 새벽 일찌기 돌아왔다.

6월 13일 [양력 7월 26일]<임신> 맑다.저녁나절에 가랑비가 뿌리다가 그쳤다.
저녁나절에 병마사의 우후 김자헌(金自獻)이 와서 봤다. 한 시간이나 넘도록 서로 이야기했다. 점심을 먹여서 보냈다. 이 날 낮에 왕골을 쪄서 말렸다. 어두울 무렵 청주의 이희남(李喜男)의 종 이 들어와서, 주인이 우병사의 부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지금 원수의 진 근처에까지 왔는데 날이 저물어서 묵고 있다고 했다.


6월 14일 [양력 7월 27일]<계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이희남(李喜男)이 들어와서 아산의 어머니 영연과 위?아랫사람들이 두루두루 무사하다고 한다. 쓰리고 그리운 마음을 어이 다 말하랴! 아침밥을 먹은 뒤에 이희남(李喜男)이 편지를 가지고 우병사(김응서)에게 갔다.

6월 15일 [양력 7월 28일]<갑술> 맑고 흐리기가 반반이다.
오늘은 보름인데, 군중에 있으니, 어머니 영전에 잔을 올리어 곡하지 못하니, 그리운 마음을 어이다 말하랴! 초계 원이 떡을 마련하여 보냈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군관을 보내 어 말하기를, "원수가 산성으로 가려고 한다."고 전했다. 나도 뒤를 따라 가서 큰 냇가에 이르렀다가 혹시 다른 계획이 있을까 염려되어 냇가에 앉은 채로 정상명(鄭翔溟)을 보내어 병이라고 아뢰게 하고서 그대로 돌아왔다.

6월 16일 [양력 7월 29일]<을해> 맑다.
혼자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들여다보는 이가 없었다. 아들 열 과 이원룡(李元龍)을 불러 책을 만들어 변씨 족보를 쓰게 했다. 저녁에 이희남(李喜男)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병마사는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변광조(卞光祖)가 와서 봤다. 아들 열 은 정상명(鄭翔溟)과 함께 큰 내로 가서 전마를 씻고 왔다.

6월 17일 [양력 7월 30일]<병자>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서늘한 기운이 쓸쓸하다. 밤 경치는 한없이 넓기만 한데 새벽에 앉았으니 쓰라린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아침밥을 먹은 뒤 에 원수(권율)에게로 가니, 원균(元均)의 정직하지 못한 짓을 많 이 말했다. 또 비변사에서 내려 온 공문을 보이는데, 원균(元均) 의 장계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무찌 른 연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하겠다고 하니, 안골포의 적 을 먼저 칠 수 없겠는가 하였다. 또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 (元)이라는 사람은 전진하려고는 아니하고 오직 안골포만 먼저 쳐야 한다.'고 하였다. 수군의 여러 장수들이 대개 딴 마음을 품 고 있을 뿐더러 원(元)이라는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나가지 않 으니,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대책을 합의하지 못할 것이라 일을 망쳐버릴 것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원수에게 이희남(李喜男)과 변 존서(卞存緖)? 윤선각(尹先覺) 등에게 공문을 띄워 독촉하여 오게 했다. 올 때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머물고 있는 곳에 들어가 앉아서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하다가 나의 임시로 사는 집 에 와서 곧 이희남(李喜男)의 종을 의령산성으로 보내고, 청도에는 파발로 공문을 보냈다. 초계 원을 보았더니 이른바 양심이 없다고 할만하다.

6월 18일 [양력 7월 31일]<정축>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종을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 절에 윤감(尹鑑)이 떡을 만들어서 왔다. 명나라 사람 섭위(葉 威)가 초계에서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 사람 주언룡이 일찌기 일본에 사로잡혔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나왔는 데, 적병 십만 명 이 벌써 사자마(沙自麻)나 대마도에 이르렀을 것이며, 소서행장은 의령을 거쳐 곧장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요, 가등청정은 경주 ?대구 등지로 옮겨 안동 등지로 갈 것이다."고 했다. 저물무렵 원수가 "사천에 갈 일이 있다."고 알려 왔다. 그래서 사복 정상명 (鄭翔溟)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더니, 원수가 "수군에 관한 일 때문에 사천으로 간다."고 하였다.

6월 19일 [양력 8월 1일]<무인>
새벽에 닭이 세 번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의 진에 이르를 즈음에 동트는 빛이 벌써 밝았다. 진에 이르니 원수와 종사관 황 여일(黃汝一)이 나와서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가 뵈었더니 원수는 원균(元均)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는 데, 통제사(원균)의 하는 일이 말이 아니다. 흉물은 조정에 청하여 안골포와 가덕 도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무슨 뜻이겠소? 질질 끌고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사천으로 가서 세 수사에게독촉하겠다. 통 제사(원균)는 이를 지휘할 것이 없다고 했다고 했다. 나는 또 조정에서 내려온 유지를 보니, "안골포의 적은 가벼이 들어가 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원수가 간 뒤에 황 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조금 있으니 초계 원이 왔다. 작별하면서 초계 원에게 하는 말이 진찬순(陳贊順)에게 심부름시키지 말라고 했더니 원수부의 병방 군관과 원이 모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돌아올 때 사 로잡혔다가 도망해 되돌아온 사람이 나를 따라 왔다. 이 날은 땅 이 찌는 듯했다. 저녁에 작은 워라말 풀을 적게 먹었다. 낮에 군사 변덕기(卞德基)? 변덕장(德章)? 변경완(卞慶琬)? 변경남(卞敬男)이 와서 봤다. 진사 이일장(李日章)도 와서 봤다. 밤에 소나기가 많이 쏟아져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6월 20일 [양력 8월 2일]<기묘> 종일 비오더니 밤에는 많이 내렸다.
늦은 아침 늦게 서철(徐徹)이 와서 봤다. 윤감(尹鑑)?문익신 (文益新)?문보 등이 와서 봤다. 변유(卞瑜)가 와서 봤다. 오후에 종과 말의 보수를 받아 왔다. 병들었던 말이 조금 나아졌다.

6월 21일 [양력 8월 3일]<경진> 비가 오락가락 하다.
새벽 꿈에 덕과 율온과 대가 꿈에 보였는데, 다들 나를 보고 좋 아하고 뵙고자 하는 기색이 많았다. 아침에 영덕현령 권진경 (權晉慶)이 원수께 뵈러 왔다가 원수가 이미 사천으로 갔으므 로 나에게 와서 보고 좌도의 일을 많이 전했다. 좌병사 군관이 편지를 가져왔다. 곧 회답편지를 써서 보냈다. 종사관 황여일 (黃汝一)이 문안을 보냈다. 저녁에 변주부(卞主簿)?윤선각(尹 先覺)이 여기와서 들어와서 밤까지 이야기했다.

6월 22일 [양력 8월 4일]<신사> 비가 오락가락 하다.
아침에 초계군수가 연포국(무우?두부?다시마?고기를 맑은 장 에 끓인 국)을 마련하여 와서 권하기는 했지만 오만한 빛이 많이 있었다. 그 처사가 체모 없음을 말하여 뭣하랴! 저녁나절에 이 희남(李喜男)이 들어왔다. 우병사의 편지를 전했다. 낮에 정순신 (鄭舜信)?정사겸(鄭思謙)?윤감(尹鑑)?문익신(文益新)?문보 등 이 와서 봤다. 이선손(李先孫)이 와서 봤다.

6월 23일 [양력 8월 5일]<임오> 비오다가 개다가 하였다.
아침에 대전(大箭)을 다시 다듬었다. 저녁나절에 우병마사(김 응서)에게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환도(環刀)의 크고 작은 것을 보냈다. 그러나 가지고 오는 사람이 물에 빠뜨려 장식과 칼집 이 결딴나버렸으니 아깝도다. 아침에 나굉(羅宏)의 아들 나재 흥(羅在興)이 그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봤다. 또 쪼들리는 데도 노자까지 보내어 주니 미안스럽다.

6월 24일 [양력 8월 6일]<계미> 이 날은 입추이다.
새벽에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골짜기를 분간할 수 없었다. 아 침에 수사 권언경(權彦卿)의 종 세공(世功)?종 감손(甘孫)이 와 서 무우밭에 관한 일을 아뢰었다. 무우밭을 갈고 씨부침하는 일의 감독관으로 이원룡(李元龍)?이희남(李喜男)?정상명(鄭翔 溟)?문임수(文林守) 등을 정하여 보냈다. 생원 안극가(安克可)가 와서 보고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오후에 합천군수가 조언형(曺彦亨)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더위가 찌는 듯했다.

6월 25일 [양력 8월 7일]<갑신> 맑다.
다시 무우씨를 부침하도록 시켰다. 아침을 먹기 전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는 해전에 관한 일을 많이 말하고, 또 원수가 오늘 내일 진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군사를 토론 하다가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저녁에 종 경(京)이 한 산도에서 돌아왔다.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이 적탄에 맞아 죽었다고 들었다. 놀라워 슬픔을 이길 수가 없다. 놀랍고도 애석 하며 놀라와 탄식했다. 한 놈의 적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 수를 잃었으니 통탄하고 한탄할 일이다. 거제도 사람을 보내어 미역을 실어왔다.

6월 26일 [양력 8월 8일]<을유> 맑다.
새벽에 순천의 종 윤복(允福)이 현신하기에 곧 곤장을 쉰 대 때 렸다. 거제에서 온 사람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중군장 이덕필(李德弼)과 변홍달(卞弘達)?심준(沈俊) 등이 와서 봤다. 종 사관 황여일(黃汝一)이 개벼루 강가의 정자로 갔다가 돌아갔다. 어응린(魚應 )과 박몽삼(朴夢三) 등이 와서 봤다. 아산 종 평세(平世)가 들어와서 어머니 영연이 평안하고, 집집이 위?아랫 사람들이 다 평안하다고 했다. 다만 석달이나 가물어서 농사는 틀려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장삿날은 7월 27일이나 또는 8 월 4일중에서 날잡는다고 했다. 그리운 생각에 슬픈 정회를 어 찌 다 말하랴! 저녁에 우병마사(김응서)가 체찰사(이원익) 에게, "아산의 이방(李昉)과 청주의 이희남(李喜男)이 복병하기 싫어서 원수(권율)의 진영 곁으로 피해 있다."고 말하여, 체찰사 가 원수에게 공문을 보내니, 원수는 무척 성내어 공문을 다시 작 성하여 보냈다. 이 날에 작은 워라말이 죽어서 내다버렸다.

6월 27일 [양력 8월 9일]<병술> 맑다.
아침에 어응린(魚應 )?박몽삼(朴夢三) 등이 돌아갔다. 이 희남(李喜男)과 이방(李昉)이 체찰사의 행차가 도착하는 곳으로 갔다. 저녁나절에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 한참동안 이야기하 였다. 오후 세시에 소나기가 많이 쏟아져 잠깐 사이에 물이 흘러 넘쳤다고 했다.

6월 28일 [양력 8월 10일]<정해> 맑다.
저녁나절에 황해도 백천에 사는 별장 조신옥(趙信玉)?홍대방 (洪大邦) 등이 와서 봤다. 초계 아전의 편지에, "원수가 내일 남원으로 간다."고 하였다. 이 날 새벽 꿈이 몹시도 뒤숭숭하였다. 종 경(京)이 물건을 사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6월 29일 [양력 8월 11일]<무자> 맑다.
변주부가 마흘방으로 갔다. 종 경(京)이 돌아왔다. 이희남(李喜 男)?이방(李昉) 등이 돌아왔다. 중군장 이덕필(李德弼)과 심준 (沈俊)이 와서 유격 심유경(沈惟敬)을 잡아가는 데, 총병관 양 원(楊元)이 삼가에 이르러 꽁꽁 묶어 보내더라고 전했다. 문림 수(文林守)가 의령에서 와서 전하기를 체찰사가 벌써 초계역에 이르렀다고 한다. 새로 급제한 량간(梁諫)이 황천상(黃天祥)의 편 지를 가지고 왔다. 변주부가 마흘방에서 돌아왔다.

6월 30일 [양력 8월 12일]<기축> 맑다.
새벽에 정상명(鄭翔溟)을 시켜 체찰사에게 문안했다. 이 날 몹시 더워 땅이 찌는 듯했다. 저녁에 흥양의 신여량(申汝樑)?신제 운(申霽雲) 등이 와서, 연해의 땅은 비가 알맞게 왔다고 전했다.

정유년 7월 (1597년 7월)

7월 초1일 [양력 8월 13일]<경인> 새벽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이다.
명나라 사람 세 명이 왔다가 부산으로 간다고 했다. 송대립(宋大 立)과 송득운(宋得運)이함께 왔다. 안각(安珏)도 와서 봤다. 저녁에 서철(徐徹) 및 방덕수(方德壽)와 그 아들이 와서 잤다. 이 날 밤 가을 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하랴! 그대로 송득운(宋得運)은 원수의 진에 갔다가 왔는데,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큰 냇가에서 피리를 불렀다고 하니 놀랍고 놀랄 일이다. 오늘은 인종의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7월 2일 [양력 8월 14일]<신사> 맑다.
아침에 변덕수(卞德壽)가 돌아왔다. 저녁나절에 신제운(申霽雲)과 평해에 사는 정인서(鄭仁恕)가 종사관의 심부름으로 문안하러 여기 왔다. 오늘이 곧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일인데, 멀리 천리 밖에 와서 군복을 입고 있으니 사람의 일이 어찌 이러냐!

7월 3일 [양력 8월 15일]<임오> 맑다.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뼈속으로 스민다. 비통한 마음이 한층 더했다. 제사에 쓸 유과와 밀가루를 장만했다. 저녁나절에 정읍의 군사 이량(李良)?최언환(崔彦還)?건손(巾孫) 등 세 사람을 심부름 시키라고 보내왔다. 저녁나절에 장준완(蔣俊 琬)이 남해에서 와서 보고 남해 원의 병이 중하다고 전하였다. 몹시 민망하다. 조금 있으니 합천군수 오운(吳澐)이 와서 보고, 산성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원수의 진으로 가니, 황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종사관은 전적(典籍) 박안의(朴安義) 와 활을 쐈다. 이때 좌병마사의 군관이 항복한 왜놈 두 명을 잡아 왔는데, 가등청정의 부하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 왔다. 그 때 고령 원이 성주에 갇혔다는 말을 들었다.



7월 4일 [양력 8월 16일]<계미> 맑다.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정인서(鄭仁恕)를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절에 이방(李芳)과 류황(柳滉)이 스스로 군사를 모집하러 왔다. 흥양의 량점(梁霑)?찬(纘)?기(紀) 등이 왔다. 변여량(卞汝良)? 변회보(卞懷寶)? 황언기(黃彦己) 등이 모두 벼슬했다고 와서 봤다. 변사증(卞師曾)과 변대성(卞大成) 등도 와서 봤다. 점심을 먹은 뒤에 비가 뿌렸다. 아침밥을 먹을 때 안극가(安克可)가 와서 봤다. 어두어서 비가 많이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7월 5일 [양력 8월 17일]<갑신>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초계원이 체찰사의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이 경내를 지나간다고 하면서 산성에서부터 영문을 지나갔다. 저녁나절에 변덕수(卞德壽)가 왔다. 변존서(卞存緖)가 마흘방(馬訖坊)으로 갔다.

7월 6일 [양력 8월 18일]<을유> 맑다.
꿈에 윤삼빙(尹三聘)을 보았는데 나주로 귀양간다고 했다. 저녁나 절에 이방이 와서 봤다. 홀로 빈방에 앉았으니 그리움과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저녁에 바깥채에 나가 앉았다. 변존서 (卞存緖)가 마흘방에서 돌아왔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각(安珏) 형제도 변흥백(卞興伯)을 따라 왔다. 이 날 제사에 쓸 중배끼 다섯 말을 꿀에다 반죽하여 시렁에 얹었다.

7월 7일 [양력 8월 19일]<병술> 맑다.
오늘은 칠석이다. 슬픔과 그리움을 어찌하랴! 꿈에 원균(元均)과 같이 모였다. 내가 원균(元均)의 윗자리에 앉아 음식상을 받자 원균(元均)이 기쁜 빛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박영남(朴永男)이 한산에서 와서 그 주장의 잘못으로 대신 죄 받으러 원수에게 잡혔다고 했다. 초계 현감이 햇물건을 마련하여 보내왔다. 아침에 안각(安珏) 형제가 와서 봤다. 저물어서 흥양의 박응사(朴應泗)가 와서 봤다. 심준(沈俊) 등이 와서 봤다. 의령현감 김전(金銓)이 고령에서 와서 병마사의 잘못된 일을 많이 말했다.

7월 8일 [양력 8월 20일]<정해> 맑다.
아침에 이방(李芳)이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그에게서 들으니, 원수가 구례에서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집 주인 이어해(李魚海)와 최태보(崔台輔)가 와서 봤다. 변덕수 (卞德壽)가 또 왔다. 저녁에 송대립(宋大立)?류홍(柳洪)?박영 남(朴永男)이 왔다. 송과 류 두 사람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7월 9일 [양력 8월 21일]<무자> 맑다.
내일 아들 열을 아산으로 내려 보내고자 한다. 제사에 쓸 과일을 봉하는 것을 살펴봤다. 저녁나절에 윤감(尹鑑)?문보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열과주부 변존서(卞存緖) 등에게 전별하고 돌아 갔다. 이 날 밤 달빛이 대낮 같았다. 어버이를 생각하니, 슬퍼서 울면서 밤늦도록 잠을 못잤다.

7월 10일 [양력 8월 22일]<기축> 맑다.
열과 변존서(卞存緖)를 보내려고 앉아서 날새기를 기다렸다가 일찌기 아침밥을 먹는데 정회를 스스로 억누르지 못해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구례에서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걱정이 된다. 열 등이 막 떠나자 종사 관 황여일(黃汝一)도 와서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서철(徐徹)이 와서 봤다. 정상명(鄭翔溟)이 싸움터에 나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종이로써 만들기를 마쳤다. 저녁에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이 끓어 올라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7월 11일 [양력 8월 23일]<경인> 맑다.
열이 어떻게 갔는지 생각하고 있으니 견딜 수 없다. 더위가 너무도 심하여 걱정 뿐이다. 저녁나절에 변홍달(卞弘達)?신제운(申 霽雲)?림중형(林仲亨)이 와서 봤다. 홀로 빈 대청에 앉았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너무도 비통하다. 종 태문(太文)과 종이가 순천으로 갔다.

7월 12일 [양력 8월 24일]<신묘> 맑다.
아침에 합천이 햅쌀과 수박을 보냈다. 점심밥을 지을 적에 방응원(方應元)? 현응진(玄應辰)? 홍우공(洪禹功)? 림영립(林英立) 등이 박명현(朴名賢)이 있는 곳에서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종평세(平世)는 열을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잘 갔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러나 슬퍼서 탄식함을 어찌 말로써 하랴! 이희남(李喜男)이 사철쑥(더위지기,생당쑥; 입추때에 베어 말려 냉, 황달,습열,간장염 등의 한약재로 씀)백 묶음을 베어 왔다.

7월 13일 [양력 8월 25일]<임진> 맑다.
아침에 남해현령이 편지를 보내고, 음식물도 많이 보냈다고 하고, 또 싸움말(戰馬)을 몰고 가라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이태수 (李台壽)?조신옥(趙信玉)?홍대방(洪大邦)이 와서 보고, 또 적을 토벌할 일을 말하였다. 송대립(宋大立)?장득홍(張得洪)도 왔다. 장득홍은 스스로 마련한 것이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양식 두 말을 내주었다. 이 날 칡을 캐어 왔다. 이방도 와서 봤다. 남해 아전과 심부름꾼 두 명이 왔다.

7월 14일 [양력 8월 26일]<계사> 맑다.이른 아침에 정상명(鄭翔溟)과 종 평세(平世)?종 귀인(貴仁)이 짐말 두 필을 남해로 보냈다. 정(상명)은 싸움말(戰馬)을 끌고 올 일로 보낸 것이다. 새벽 꿈에 나는 체찰사와 같이 어느 곳에 이르니, 송장들이 쫙 깔려 있었는데 혹은 밟기도 하고 혹은 목을 베게도 했다. 아침밥을 먹을 때 문인수가 와가채(모시조개 음식)와 동아선(동아를 기름에 볶아 잣가루를 묻혀 겨자를 찍어 먹는 술안주)을가져 왔다. 방응원(方應元)? 윤선각(尹先覺)? 현응진(玄應辰)? 홍우공(洪 禹功) 등과 함께 이야기했다. 홍이라는 사람은 제 아버지의 병으로 종군하고 싶지 않아 팔이 아프다고 핑계하니 엄청 놀랍다. 오전 열시쯤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은 정인서(鄭仁恕)를 보내어 문안했다. 또 김해 사람으로 왜놈에게 부역했던 김억(金億)의 편지를 보이는 데, "초7일 왜선 오백 여 척이 부산에서 나오고, 초9일 왜선 천 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부산시 영도구 영도) 앞 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다섯 척이 표류하여 두모포에 닿았고, 또 일곱 척은 간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종사관 황여일(黃汝一) 이 군사 점호하는 곳으로 달려 나가서 황 종사관과 상의하였다. 그대로 앉아서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조금있으니 내가 타고 간 말을 홍대방(洪大邦)더러 달려보라고 했더니 잘 달렸다. 날씨가 비올 것 같아 돌아와 집에 이르자마자 비가 마구 쏟아졌다. 밤 열시 쯤에야 맑게 개이니 달빛이 낮보다 훨씬 더 밝았다. 쌓이는 그리움을 말할 수 없다.

7월 15일 [양력 8월 27일]<갑오> 비가 오락가락 하다.
저녁나절에 조신옥(趙信玉)?홍대방(洪大邦) 등과 여기 있는 윤선각(尹先覺)까지 아홉 명을 불러 떡을 차려 먹었다. 가장 늦게 중군 이덕필(李德弼)이 왔다. 저물어서 돌아갔다. 그에게서 우리 수군 스무 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분통이 터진다. 한스럽기 짝이 없는 것은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다는 것이다. 어두워서 비가 많이 내렸다.

7월 16일 [양력 8월 28일]<을미> 비오다 걷혔다 하면서 종일 흐리고 맑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손응남(孫應男)을 중군(이덕필)에게 보내어 수군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좌병사의 긴급보고로 보아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갖추 다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탄식할 일이다. 저녁나절에 변의정(卞 義禎)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 꼬락서니가 어리석고도 용렬하다. 두멧골에 묻혀 사는 사람인지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는가 보다. 이 역시 거짓없고 인정이 두터운 태도이다. 이 날 낮에 이희남(李喜男)에게 칼을 갈게 했더니, 너무 잘들어 괴수 맨머리로 깎을만 했다.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졌다. 아들 열이 가는 길을 많이 생각하니 씁쓰레하다. 마음 속으로만 빌 뿐이다. 저녁에 영암군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世男)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초4일에 전 병마사의 우후가 탄 배의 격군이 되어 초5일에 칠천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6일 옥포에 들어왔다가, 7일에는 날이 밝기 전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니, 왜선 여덟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곧장 돌격하려는데, 왜놈들은 몽땅 뭍으로 올라 가고 빈 배만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그것들을 끌어 내어 불질러 버리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일천 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 와서 서로 맞아 싸우려는 데, 왜선이 흩어져 달아나서 끝까지 섬멸할 수가 없었다. 세남 (世男)이 탔던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 표류되어 서생포 앞바다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모두 모두 살륙 당하였다. 요행히 세남(世男)만은 혼자 숲속으로 기어 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미더운 것은 오직 수군 뿐인데, 수군마저 이와같이 희망이 없게 되었으니,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선장 이엽(李曄)이 왜적에게 묶여 갔다고 하니, 더더욱 원통하다. 손응남(孫應男)이 집으로 돌아갔다.

7월 17일 [양력 8월 29일]<병신> 가끔 비가 내렸다.
아침에 이희남(李喜男)을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에게 보내어 세남(世男)의 말을 전했다. 저녁나절에 초계원이 벽견산성에서 와서 보고 돌아갔다. 송대립(宋大立)? 류황(柳滉)? 류홍(柳弘)? 장득홍(張得弘) 등이 와서 보고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변대헌(卞大獻)?정운룡(鄭雲龍)? 득룡(得龍)?구종(仇從) 등은 초계 아전인데 어머니 쪽의 같은 파 사람들로서 와서 봤다. 큰비가 종일 내렸다. 이름을 적지 않은 사령장을 신여길이 바다 가운데서 잃어버린 일로 심문받으러 갔다. 경상순변사가 그 기록을 가져 갔다.

7월 18일 [양력 8월 30일]<정유> 맑다.
새벽에 이덕필(李德弼)?변홍달(卞弘達)이 전하여 말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元 均)?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충청수사(최호) 및 여러 장수 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대패했다."고 했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오전 열 시가 되어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난 뒤에 이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니, 원수가 기뻐하여 마지 않았다. 나는 송대립(宋大立)?류황(柳滉)?윤선각(尹先覺)? 방응원(方應元)? 현응진(玄應辰)? 림영립(林英立)? 이원룡(李元龍)? 이희남(李喜男)? 홍우공(洪禹功)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새로 부임하여 나를 기다렸다. 한치겸(韓致謙) 도 왔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7월 19일 [양력 8월 31일]<무술> 종일 비가 내렸다.
오는 길에 단성의 동산 산성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니, 매우 험하여 적이 엿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대로 단성현에서 잤다.

7월 20일 [양력 9월 1일]<기해> 종일 비가 내렸다.
아침에 권문임(權文任)의 조카 권이청(權以淸)이 와서 봤다. 단성현감도 와서 봤다. 오정때에 진주 정개산성(定介山城) 아래 강정에 이르니, 진주목사가 와서 봤다. 굴동(옥종면 문암리)의 이희만(李希萬)의 집에서 잤다.


7월 21일 [양력 9월 2일]<경자> 맑다.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李天樞)가 군에 있고, 백성들도 많이 본업에 힘써, 혹 이른 곡식을 거두어 들이기도 하고, 혹 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낮에 점심을 먹은 뒤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安衛)?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 등 여나믄 명이 와서 통곡하였으며, 피하여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보므로 패하던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元均)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함께 이 야기했다. 밤 세 시(四更)가 되어도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생겼다.

7월 22일 [양력 9월 3일]<신축>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고, 원균(元均)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남해현감 박대남(朴大男)이 있는 곳에 이르니, 병세가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싸움말을 서로 바꿀 일을 다시 이야기했다. 종 평세(平世)와 군사 한 명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오후에 곤양에 이르니, 몸이 불편하므로 잤다.

7월 23일 [양력 9월 4일]<임인> 비가 오락가락 하다.
아침에 노량에서 했던 공문을 송대립(宋大立)에게 부쳐 먼저 원수부에 갖다 주게 하고, 곧 뒤따라 떠나 십오리원(곤명면 봉계 리)에 이르니, 백기 배흥립(裵興立)의 부인이 먼저 와 있었다. 말에서 내려 잠깐 쉬었다. 진주 굴동의 전에 묵었던 곳에 이르러 잤다. 백기 배흥립(裵興立)도 와서 잤다.

7월 24일 [양력 9월 5일]<계묘> 비가 그침없이 내렸다.
한치겸(韓致謙)?이안인(李安仁)이 부찰사에게로 돌아갔다. 정씨의 종 예손과 손씨의 종이 같이 돌아갔다. 식사를 한 뒤에 이 홍훈(李弘勛)의 집으로 옮겼다. 방응원(方應元)이 정개산성에서 와서,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정개산성에 이르렀다"고 전하고, 연해안 사정을 듣고 본대로 전하더라는 것이다. 군량 스무 말, 말 먹이 콩 스무 말, 말 대갈 일곱 벌을 가져 왔다. 이 날 저녁에 조방장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보기에 술로써 위로했다.

7월 25일 [양력 9월 6일]<갑진> 저녁나절에야 맑다.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했다. 조방장 김 언공이 와서 보고서는 그 길로 원수부로 갔다. 배수립(裵樹立) 이 와서 보고, 이곳 주인 이홍훈(李弘勛)이 와서 봤다. 남해현 령 박대남(朴大男)이 자기의 종 용산(龍山)을 보내어 내일 들 어오겠다고 전했다. 저녁에 가서 백기 배흥립(裵興立)의 병을 보니, 고통이 극도로 심했다. 걱정이다. 송득운(宋得運)을 보내어 황종사관에게 문안했다.

7월 26일 [양력 9월 7일]<을사> 비가 오락가락 하다.
일찍 밥을 먹고 정개산성 아래에 있는 송정 아래로 가서 종사관 황여일(黃汝一)과 진주목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날이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7월 27일 [양력 9월 8일]<병오> 종일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孫景禮)의 집으로 옮겨 가서 머물렀다.저녁나절에 동지 이천(李薦)과 판관 정제(鄭霽)가 체찰사에게서 와서 전령을 전했다.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이 동지는 배 조방장에게 가서 잤다.

7월 28일 [양력 9월 9일]<정미> 비가 내렸다.
이희량(李希良)이 와서 봤다. 초저녁에 동지 이천(李薦) 및 진주목사와 소촌찰방 이시경(李蓍慶)이 와서 왜적과 맞싸울 대책을 논의했다. 밤에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지나서 돌아갔다. 의논한 것은 모두 계책을 돕는 일이었다.

7월 29일 [양력 9월 10일]<무신> 비가 오락가락 하다.
아침에 이군거(李君擧:薦의 字) 영감과 함께 밥을 먹고 체찰사 앞으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리는데, 원수가 보낸 자들은 모두 말도 없고 또 활과 화살도 없으니, 아무 쓸 데가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저녁에 돌아올 때 배 동지와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에게 들려 봤다. 밤 내내 큰비가 왔다. 찰방 이시경(李蓍慶)에게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정유년 8월 (1597년 8월)

8월 초1일 [양력 9월 11일]<기유> 큰비가 와서 물이 넘쳤다.
저녁나절에 소촌찰방 이시경(李蓍慶)이 와서 봤다. 조신옥(趙 信玉)?홍대방(洪大邦) 등이 와서 봤다.

8월 초2일 [양력 9월 12일]<경술> 잠시 개었다.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비통할 따름이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豆恥)로 가는 길로 곧 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했다.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江亭: 하동읍 서해량 홍수통제소 서쪽 섬진강가)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 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이원춘(李元春)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구례 읍 북봉리)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孫仁弼)은 바로 와서 볼겸하여 곡식까지 가져 왔다. 손응남(孫應男)은 올감(早?)을 바쳤다.

8월 4일 [양력 9월 14일]<임술> 맑다.
□□을 보내 왔다. 다시 들어와 관청을 보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압록강원(곡성군 오곡면 압록리)에 이르러 점심밥을 짓고 말의 병을 고쳤다. 고산현감 최진강(崔鎭剛)이 군인을 교체 할 일로 와서 수군의 일을 많이 말했다. 낮에 곡성(곡성군 곡성읍 읍내리 713-2번지)에 이르니, 관 청(곡성현감:崔忠儉)과 여염집이 한결같이 비어 있고, 사람사는 기척이 끊어졌다. 이 일대에는 온통 비어있고 말 먹일 풀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 현청에서 잤다.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은 곧장 남원으로 갔다.

8월 5일 [양력 9월 15일]<계해> 맑다.
거느리고 온 군사를 인계할 곳이 없다고 하면서 이제 이원에 이르러 병마사가 경솔히 물러난 것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옥과(곡성군 옥과읍)땅에 이르니, 피난민이 길에 가득 찼다. 남자와 여자가 부축하고 걸어가는 것이 차마 볼 수 없었다. 울면서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이제야 살았다'고 했다. 길가에 큰 홰나무 정자가 있기에 말에서 내려 타일렀다. 옥과현에 들어갈 때, 순천에서 이기남(李奇男)의 부자를 만나 함께 현에 이르니, 정사준(鄭思竣)? 정사립(鄭思立)이 와서 마중 했다. 옥과현감(홍요좌)은 병을 핑계 삼아 나오지 않았다. 잡아다 죄주려 하니 그제야 나와서 봤다.

8월 6일 [양력 9월 16일]<갑자> 맑다.
이 날은 옥과에서 머물렀다. 초저녁에 송대립(宋大立)이 적을 정탐하고 왔다.

8월 7일 [양력 9월 17일]<을축> 맑다.
일찍 길을 떠나 곧장 순천으로 갔다. 고을에서 십리쯤 되는 길에서 선전관 원집(元潗)을 만나 임금의 분부를 받았다. 길 옆에 앉아서 읽어보니 병마사가 거느렸던 군사들이 모두 패하여 돌아가는 길이 줄을 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세 필과 활과 살을 약간 빼앗아 왔다. 곡성현 석곡 강정 (석곡면 능파2구 능암리 3490번지 일대)에서 잤다.

8월 8일 [양력 9월 18일]<병인>
곧바로 부유창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이형립(李亨立)을 병마사에게로 보냈다. 새벽에 떠나 부유창(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아침밥을 먹는데, 이곳은 병마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미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불을 질렀다. 다만 타다 남은 재만 있어 보기에도 처참하였다. 광양현감 구덕령(具德齡)?나주판관 원종의 (元宗義)?옥구 원(홍요좌) 등이 창고바닥에 숨어 있다가 내가 왔단 말을 듣고 배경남(裵慶男)과 함께 구치(鳩峙: 순천시 주 암면 행정리 접치 마을)로 급히 달아났다. 내가 말에서 내려 곧 전령을 내렸더니, 한꺼번에 와서 절을 하였다. 나는 피해 돌아 다니는 것을 들추어서 꾸짖었더니, 다들 그 죄를 병사 이복남 (李福男)에게로 돌리었다. 곧 길을 떠나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에 사람 발자취가 하나도 없어 적막했다. 오직 절에 있는 중 혜희(慧熙)가 와서 알현하므로 의병장의 사령장을 주었다. 저물어서 순천에 이르니 관사와 곳간의 곡식 및 군기 등 물건은 옛날과 같다. 병마사가 처치하지 않은 채 달아났다.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총통같은 것은 옮겨 묻고,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은 군관들이 져 나르게 하고, 총통과 운반하기 어려운 것들은 깊이 묻고 표를 세웠다. 그대로 순천부사가 있는 방에서 머물러 잤다.

8월 9일 [양력 9월 19일]<정묘> 맑다.
일찍 떠나 낙안군에 이르니, 오리까지나 사람들이 많이 나와 환영하였다.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진 까닭을 물으니, 모두 하는 말이, "병마사가 적이 쳐들어 온다고 퍼뜨리며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그 때문에 이와같이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관청에 들어가니 적막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김제군수 고봉상(高鳳翔) 등이 와서, 산골에서 내려와서, 병마사의 처사가 뒤죽박죽 이었다고 말하면서 하는 짓을 짐작했다고 하니, 패망한 것을 알만하다. 관청과 창고가 모두 다 타버리고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서 말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길가에 동네 어 른들이 늘어서서 술병을 다투어 바치는 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저녁에 보성군 조양창(조성면 조성리)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창고에는 곡식이 묶여진 채 그대로였다. 그래서, 군관 네 명을 시켜 지키게 하고, 나는 김안도(金安道)의 집에서 잤다.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난나가 버렸다.

8월 10일 [양력 9월 20일]<무진>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金安道)의 집에 머물렀다. 동지 배흥립(裵興立)도 같이 머물렀다.

8월 11일 [양력 9월 21일]<기사> 맑다.
아침에 박곡(朴谷) 양상원(梁山沅)의 집으로 옮겼다. 이 집 주인도 벌써 바다로 피란갔고 곡식은 가득 쌓여 있었다. 저녁 나절에 송희립(宋希立)?최대성(崔大晟)이 와서 봤다.

8월 12일 [양력 9월 22일]<경오> 맑다.
아침에 장계를 초잡고 그대로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안위)?발포만호(소계남)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들 편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 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해내지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나랏일을 크게 그릇치건마는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보성군수가 왔다.

8월 13일 [양력 9월 23일]<신미> 맑다.
거제현령 안위(安衛) 및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가 와서 인사하고 돌아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우후 이몽구(李夢龜)가 전령을 받고 들어 왔는 데, 본영의 군기를 하나도 옮겨 실어 오지 않은 죄로 곤장 여든 대를 쳐서 보냈다. 하동현감 신진(申 )이 와서, "초3일에 내가 떠난 뒤에 진주 정개산성과 벽견산성도 풀어 흩어지니 병마사가 바깥 진(外陣)을 제 손으로 불을 질렀다."고 전하였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8월 14일 [양력 9월 24일]<임신>
아침에 각각으로 장계 일곱 통을 봉하여 윤선각(尹先覺)으로 하여금 지니고 가게 했다. 저녁에 어사 임몽정(任夢正)을 만나러 보성에 갔다가 열선루에서 잤다. 밤에 큰비가 쏟아지듯 내렸다.

8월 15일 [양력 9월 25일]<계유> 비 오다가 저녁나절에 맑게 개었다.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열선루 위에 앉아 있으니,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8월 7일에 만들어진 공문이었다. 영의정은 경기 지방으로 나가 순시중이라고 했다. 곧 잘 받들어 받았다는 장계를 썼다. 보성의 군기를 검열하여 네 말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않았다. 술을 너무많이 마셔 잠을 자지 못했다.

8월 16일 [양력 9월 26일]<갑술> 맑다.
아침에 보성군수와 군관 등을 굴암으로 보내어 도피한 관리들을 찾아 오게 했다.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돌아갔다. 그래서 나주 목사와 어사 임몽정에게 답장을 부쳤다. 박사명(朴士明)의 집에 심부름꾼을 보냈더니, 박사명의 집은 이미 비어 있었다고 한다. 오후에 활장이 지이(智伊)와 태귀생(太貴生)? 선의(先衣)? 대남(大男) 등이 들어왔다. 김희방(金希方)?김붕만(金鵬 萬)이 뒤따라 왔다.

8월 17일 [양력 9월 27일]<을해> 맑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장흥땅 백사정(장흥읍 원도리)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수사배설(裵楔)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의 군량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맘대로 모조리 훔쳐 나누어 갈 적에 마침 그 때 이르러 잡아다가 호되게 곤장을 쳤다. 거기서 잤다. 배설(裵楔)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괘씸하다.

8월 18일 [양력 9월 28일]<병자> 맑다.
늦은 아침에 곧바로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멀미를 핑계를 대므로 보지 않았다. 다른 장수는 보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


8얼 19일 [양력 9월 29일]<정축> 맑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를 하는 데, 경상수사 배설(裵楔)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 여기고 잘난 체 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너무도 놀랍다. 이방(吏房)과 그 영리(營 吏)에게 곤장쳤다. 회령포만호 민정붕(閔廷鵬)이 그 전선(戰船)에서 받은 물건을 사사로이 피란인 위덕의(魏德毅) 등에게 준 죄로 곤장 스무 대를 쳤다.

8월 20일 [양력 9월 30일]<무인> 맑다.
앞 포구가 몹시 좁아서 진을 이진(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겼다. 창고로 내려가니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않고 앓았다.

8월 21일 [양력 10월 1일]<기묘> 맑다.
날이 채 새기 전에 도와리가 일어나 몹시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싶어 소주를 마셨더니 한참동안 인사불성이 되었다. 하마트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을 앉아서 새웠다.

8월 22일 [양력 10월 2일]<경진> 맑다.
도와리가 점점 심하여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8월 23일 [양력 10월 3일]<신사> 맑다.
병세가 무척 심해져서 정박하여 배에서 지내기가 불편하므로 배타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에서 나와서 (뭍에서) 잤다.

8월 24일 [양력 10월 4일]<임오> 맑다.
아침에 도괘땅(刀掛浦)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낮에 어란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텅텅 비었다. 바다 위에서 잤다.

8월 25일 [양력 10월 5일]<계미> 맑다.
그대로 어란포에서 머룰렀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당포의 보자기가 놓아둔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적이 쳐들어 왔다. 적이 쳐들어 왔다."고 헛소문을 내었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말일줄 알고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니, 군중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8월 26일 [양력 10월 6일]<갑신> 맑다.
그대로 어란 바다에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임준영(任俊英)이 말을 타고 와서 급히 보고하는 데, "적선(賊船)이 이진(梨 津)에 이르렀다"고 했다. 전라우수사가 왔다. 배의 격군과 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꼬락서니가 놀랍다.

8월 27일 [양력 10월 7일]<을유> 맑다.
그대로 어란 바다 가운데 있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는 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게 아니오!"라고 말하였다.

8월 28일 [양력 10월 8일]<병술> 맑다.
새벽 여섯시 쯤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 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드르며 따라 잡도록 명령하니, 적선이 물러갔다. 뒤쫓아 갈두(葛頭: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적선이 멀리 도망하기에 더 뒤쫓지 않았다. 뒤따르는 배는 쉰여 척이라 고 했다. 저녁에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8월 29일 [양력 10월 9일]<정해> 맑다.
아침에 건너왔다.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대었다.

8월 30일 [양력 10월 10일]<무자> 맑다.
그대로 벽파진에서 머물렀다. 정탐꾼을 나누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배설(裵楔)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관할 아래의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裵楔)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 좀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뭍으로 내려 몸조리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裵楔)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정유년 9월 (1597년 9월)

9월 초1일 [양력 10월 11일]<기축> 맑다.
그대로 벽파진에 머물렀다. 나는 내려가 벽파정위에 앉았는데, 점세(占世)가 탐라에서 나와서 소 다섯 마리를 싣고 와서 바쳤다.

9월 2일 [양력 10월 12일]<경인> 맑다.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도망갔다.

9월 3일 [양력 10월 13일]<신묘> 아침에 맑았다가 저녁에 비가 뿌렸다.
밤에는 된바람이 불었다. 봉창아래에서 머리를 웅크리고 있으니 그 심사가 어떠하랴!

9월 4일 [양력 10월 14일]<임진>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배가 가만히 있지 못해서 각 배들을 겨우 보전했다. 천행이다.

9월 5일 [양력 10월 15일]<계사>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각 배를 서로 보전할 수가 없었다.

9월 6일 [양력 10월 16일]<갑오>
바람은 조금 자는 듯 했으나, 물결은 가라앉지 앉았다. 추위가 엄습하니 격군들 때문에 걱정이다.

9월 7일 [양력 10월 17일]<을미> 맑다.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군관 림중형(林仲亨)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쉰다섯 척 가운데 열세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 뜻이 우리 수군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각 배들에게 엄중히 일러 경계하였다. 오후 네 시쯤에 적선 열세 척이 곧장 진치고 있는 곳으로우리 배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서 공격하여 급히 나아가니, 적들이 배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뒤 쫓아 먼 바다에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러 흘러(逆流) 항해할 수가 없어 복병선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더 쫓아가지 않고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이 날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며 말하기를, 오늘 밤에는 반드시 아무래도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아, 여러 장수 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라고 재삼 타일러 분명히 하고서 헤어졌다. 밤 열 시쯤에 적선이 포를 쏘며 기습으로 공격해 왔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집어 먹는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리고,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진동했다. 그랬더니 적의 무리는 당해 내지 못하고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났다 하면서 포를 쏘아댔다. 밤 한시가 되니 아주 물러 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다.

9월 8일 [양력 10월 18일]<병신> 맑다.
적선이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는 겨우 만호깜이나 맞을까 대장으로 쓰일 재목은 못되는 데도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9월 9일 [양력 10월 19일]<정유> 맑다.
오늘이 곧 9일(중양절)이다. 군대 전부에게도 좋은 명절이다. 나는 복재기(喪制)이지만 여러 장병들에게야 먹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제주에서 나온 소 다섯 마리를 녹도와 안골포 두 만호에게 주어서 장병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는 데, 저녁나절에 적선 두 척이 어란포에서 바로 감보도(진도군 고군면)로 들어와 우리 배의 많은지 적은지를 정탐했다.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끝까지 따라 갔더니, 적들은 어리둥절하여 배에 실었던 물건을 몽땅 바다 가운데로 던져버리고 달아났다.

9월 10일 [양력 10월 20일]<무술> 맑다.
적선들이 멀리 달아났다.

9월 11일 [양력 10월 21일]<기해> 흐리고 비가 올 것 같다.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언짢아 하였다.

9월 12일 [양력 10월 22일]<경자> 종일 비가 뿌렸다.
봉창 아래서 심회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9월 13일 [양력 10월 23일]<신축>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배가 가만 있지를 못했다. 꿈이 이상하다. 임진년에 대첩했을 때와 얼추 같다. 이 징조를 모르겠다.

9월 14일 [양력 10월 24일]<임인> 맑다.
벽파정 맞은편에서 연기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어 싣고 오니 바로 임준영(任俊英)이 육지를 정탐하고 와서 말하기를, "적선 이백 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金仲 乞)이 전하는 데, 이 달 6일에 달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 날 밤에 김해 사람이 김중걸(金仲乞)의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는 말이, `조선 수군 열 여 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 하겠다. 극히 통분하다.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조리 죽인 뒤에 한강으로 올라 가겠다.'고 하였습니다."는 것 이었다. 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 가라고 하였다.

9월 15일 [양력 10월 25일]<계묘> 맑다.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는 울돌목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이르되,"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조금이라도 너그럽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 했다. 이 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9월 16일 [양력 10월 26일]<갑진> 맑다.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는 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울돌목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서른세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대장선이 홀로 적진 속으르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건만 여러 배들은 관망만 하고 진군하지 않아 사태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현자총통 등 각 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같기도 하고 우레 같기도 하였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히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겹으로 둘러 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한 가진들 알 수가 없었다. 배마다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러면서,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감히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에게 쏴라."고 하고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었다. 나는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니 적들이 더 대어들 것 같아 나아 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서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내리고 또 초요기를 돛대에 올리니, 중군장미 조항첨사 김응함(金應 )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몸소 안위(安衛)를 불러 이르되, "안위(安衛)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너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것 같으냐? 고 하니, 안위(安衛)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金應 )을 불러 이르되,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고 하니,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 할 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두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安衛)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 가려고 다투었다. 안위(安衛)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몽둥이로 치기도 하고, 긴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러이 싸우니 배 위의 사람들은 기진맥진하게 된데다가, 안위(安衛)의 격군 일여덟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는데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얼추 엎어지고 자빠지는데 녹도만호 송여종 (宋汝悰)?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줄이어 와서 합력하 여적을 쏘아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항복해온 왜놈 준사(俊沙)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이다. 내 배위에서 내려다 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다"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金乭孫)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로 끌어 올렸다. 그러니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렸다. 이 때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는 침범해오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치며 나아가면서 지자총통?현자총통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우리를 에워 싼 적선 서른 척을 쳐 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기어 밤을 지냈다. 이 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9월 17일 [양력 10월 27일]<을사> 맑다.
어외도(於外島:무안군 지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삼백 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임치첨사는 배에 격군이 없어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나주진사 림선(林 )?림환(林 )?림업(林 ) 등이 와서 봤다. 우리 수군이 대첩한 것을 알고 서로 앞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 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9월 18일 [양력 10월 28일]<병오> 맑다.
그대로 어외도에서 머물렀다. 임치첨사가 왔다. 내 배에서 는 순천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戒生)이 탄환에 맞아 죽고, 박영남(朴永男)과 봉학(奉鶴) 및 강진현감 이극신(李克新)도 탄환 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9월 19일 [양력 10월 30일]<정미> 맑다.
일찍 떠나 출항했다. 바람도 순하고 물살도 순조를 타 무사히 칠산(七山: 영광군 낙월면) 바다를 건넜다. 저녁에 법성포(영 광군 법성면) 선창에 이르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해서 들어 와 사람사는 집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 해질 무렵에 홍농(弘 農: 영광군 홍농면) 앞에 이르러, 배를 정박시키고 잤다.

9월 20일 [양력 10월 30일]<무신> 맑고 바람도 순조로왔다.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위도(蝟島: 영광군 위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황득중(黃得中)과 종 금이 (金伊) 등을 보내어 종 윤금(允金)을 찾아서 잡아오라고 했더니, 과연 위도 밖에 있었다. 그래서 묶어다가 배 안에 실었다. 이 광축(李光軸)?이광보(光輔)가 와서 봤다. 이지화(李至和) 부자가 또 와서 봤다. 날이 저물어서 잤다.


9월 21일 [양력 10월 31일]<기유> 맑다.
일찍 떠나 고군산도(옥구군 미면 선유도)에 이르니, 호남순찰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광풍이 세게 불었다.

9월 22일 [양력 11월 1일]<경술>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대로 머물렀다. 나주목사 배응경(裵應 )?무장현감 이람(李覽)이 와서 봤다.

9월 23일 [양력 11월 2일]<신해> 맑다.
승첩한 장계의 초본을 수정했다. 정희열(丁希悅)이 와서 봤다.

9월 24일 [양력 11월 3일]<임자> 맑다.
몸이 불편하여 신음했다. 김홍원(金弘遠)이 와서 봤다.

9월 25일 [양력 11월 4일]<계축> 맑다.
이 날 밤에 몸이 몹시 불편하고, 식은 땀이 온 몸을 적셨다.

9월 26일 [양력 11월 5일]<갑인> 맑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이 날 밤에는 식은 땀이 온몸을 적셨다.

9월 27일 [양력 11월 6일]<을묘> 맑다.
송한(宋漢)?김국(金國)?배세춘(裵世春) 등이 승첩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 갔다. 정제(鄭霽)는 충청수사에게 부찰사로 보낼 공문을 가지고 같이 같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내내 아팠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

 

 


'고 서적 , 역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하비결`이라는 예언서를 아시나요?   (0) 2010.04.19
난중일기 - 10   (0) 2008.04.13
난중일기 - 8   (0) 2008.04.13
난중일기 - 7   (0) 2008.04.13
난중일기 - 6   (0) 2008.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