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난중일기 - 10

영지니 2008. 4. 13. 19:26

9월 28일 [양력 11월 7일]<병진> 맑다.
송한(宋漢)과 정제(鄭霽)가 바람에 막혀 되돌아 왔다.

9월 29일 [양력 11월 8일]<정사> 맑다.
송한(宋漢) 등 계본(啓本)?장달(狀達)(을 가진 사람) 및 판관 정제(鄭霽)는 바람이 순조로와 도로 올라갔다.

정유년 10월 (1597년 10월)

10월 초1일 [양력 11월 9일]<무오> 맑다.
아들 회( )를 보내서 제 어미를 보고 여러 집안의 생사(生死)를 알아 오게 하였다. 심회가 몹시 안달나서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병조(兵曹)의 역꾼이 공문을 가지고 내려 왔는 데, "아산 고향의 한 집안이 이미 적에게 불타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게 없다."고 한다.

10월 2일 [양력 11월 10일]<기미> 맑다.
아들 회가 집안 사람들의 생사를 알아볼 일로 배를 타고 올 라 갔으나, 잘 갔는지 못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내 심정을 어찌 다 말하랴.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심회가 만 갈래였다.

10월 3일 [양력 11월 11일]<경신>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변산을 거쳐 곧바로 법성포로 되돌아 가는데 바람은 부드러워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저물어서 법성포 선창 앞에 이르렀다.

10월 4일 [양력 11월 12일]<신유> 맑다.
그대로 머물러 잤다. 림선(林 )?업 등이 사로잡혔다가 적에게 빌어 임치로 돌아와서 편지를 보내왔다.

10월 5일 [양력 11월 13일]<임술> 맑다.
그대로 머물면서 마을집 아래로 내려가 잤다.

10월 6일 [양력 11월 14일]<계해> 흐렸다가 비가 뿌렸다.
눈비가 세차게 왔다.

10월 7일 [양력 11월 15일]<갑자> 바람이 고르지 않고 비가 오락가락한다.
소문에 호남 안팎에는 적선이 없다고 한다.

10월 8일 [양력 11월 16일]<을축> 맑으며, 바람이 살랑거렸다.
출항하여 어외도에 이르러 잤다.

10월 9일 [양력 11월 17일]<병인> 맑다.
일찍 출항하여 우수영에 이르니, 성 밖에는 집에 사람이 살지 않 고, 인적(人跡)이 하나도 없다. 보이는 것은 참혹 뿐이었다. 그 러나 저녁에 "해남에서 흉악한 적들이 진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초저녁에 김종려(金宗麗)?정조(鄭詔)?백진남(白振南) 등이 와서 봤다.

10월 10일 [양력 11월 18일]<정묘> 비가 뿌리고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항해할 수가 없어 그대로 머물렀다. 밤 열 시쯤(二更)에 중군장 김응함(金應 )이 와서 전하는 데, 해남에 있던 적들이 많이 물러 간 모양입니다. 이희급(李希伋)의 부친이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빌 어서 놓여 왔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마음이 언짢아서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새벽이 되었다.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이 왔는 데, 배가 보이지 않은 것은 바깥 섬으로 달아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11일 [양력 11월 19일]<무진> 맑다.
밤 두 시쯤에 바람이 자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닻을 올려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정탐인 이순(李順)? 박담동(朴淡同)? 박수환(朴守 還)? 태귀생(太貴生)을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에는 연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이는 반드시 적의 무리들이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다. 오정에 안편? 발음도(安便發音島= 안창도?팔금도)에 이르니,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하다. 육상에 내려 산마루로 올라 가서 배 감출 곳을 찾아보니, 동쪽에는 앞에 섬이 있어 멀리 바라볼 수는 없고,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 월출산으로 뚫렸으며, 서쪽에 는 비금도로 통하여 눈앞이 툭 터였다. 잠깐 있으니, 중군장과 우치적(禹致績)이 올라 오고, 조효남(趙孝 南)?안위(安衛)?우수(禹壽)가 잇따라 왔다. 날이 저물어 산봉우리에서 내려와 언덕에 앉았으니, 조계종(趙繼 宗)이 와서 왜적의 사실 형편을 말하고, 또 왜놈들이 우리 수군을 몹시 싫어한다고 했다. 이희급(李希伋)의 부친이 와서 알현하 고 또 사로잡혔던 경위를 말하는데, 아픈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저녁에는 따뜻하기가 봄 같아 아지랑이가 하늘에 아른 거려 비올 징조가 많았다. 초저녁에 달빛이 비단결 같아 홀로 봉창에 앉았으니 심사가 만 갈래였다. 밤 열시쯤에 식은 땀이 몸을 적셨다. 한밤에 비가 왔다. 이 날 우수사가 군량선에 있는 사람에게 장단지를 몹시 때렸다고 했다. 놀랄 일이다.

10월 12일 [양력 11월 20일]<기사> 비가 내렸다.
오후 한시에 맑게 개었다.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절하기에 하인 의 장단지를 때린 죄를 용서했다. 가리포첨사(이응표)?장흥부 사(전봉) 등 여러 장수들이 와서 절하고 종일 이야기했다. 탐후 선이 나흘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 걱정이 된다. 아마 생각건대, 흉악한 적들이 멀리 도망가기에, 그 뒤를 쫓아가 느라 돌아오지 않는 것이리라. 그대로 발음도에 머물렀다.

10월 13일 [양력 11월 21일]<경오> 맑다.
아침에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경상우후(이의득)가 와서 봤다. 조금 있으니, 탐망선이 임준영(任俊英)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소식을 들으니, "해남에 들어와 웅거해 있던 적들은 7 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 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몽땅 도망가버렸는 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신용 등이 적속으로 들어가 왜놈 들을 꾀어 내어 선비들을 죽였다."고 했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곧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금갑도만호 이정표(李廷彪) ?제포만호 주의수(朱義壽)?당포만호 안이명(安以命)?조라포만 호 정공청(鄭公淸) 및 군관 림계형(林季亨)?정상명(鄭翔溟)?봉 좌(逢佐)?태귀생(太貴生)?박수환(朴壽還) 등을 해남으로 보냈 다. 저녁나절에 내려가 언덕에 앉아 윗자리에서 조방장 배흥 립(裵興立)?장흥부사 전봉(田鳳) 등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이 뒤떨어진 죄를 다스렸다. 우수사의 군관 배영수(裵永壽)가 와서 아뢰기를, 수사의 부친이 외해에서 살아서 돌아왔다고 했다. 이 날 새벽 꿈에 우의정을 만나 조용히 이야기했다. 낮에 선전관 네 명이 법성포에 이르러 내려 왔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김응함(金應 )에게서 섬 안에 알지 못하 는 어떤 사람이 산골에 깊숙히 숨어서 소와 말을 잡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황득중(黃得中)?오수(吳守) 등을 보내어 염탐케 하였다. 이 날 밤 달빛은 비단결 같고 잔잔한 바람도 일지 않았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다.

10월 14일 [양력 11월 22일]<신미> 맑다.
밤 두 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는 데, 말이 발을 헛디디어 냇물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쓸어지지는 않고,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는데 깨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나절에 배 조방장과 우후 이의득(李 義得)이 와서 봤다. 배 조방장의 종이 영남에서 와서 적의 형세를 전했다. 황득중(黃得中) 등은 와시 아뢰기를 내수사의 종 강막지 (姜莫只)라는 자가 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에 열두 마리를 끌고 갔다고 했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 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 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짐작했다. 어느새 간담 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 하지 못하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너 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너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 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 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 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 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꼬!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네 누이?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으며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 이 날 밤 열시쯤에 비가 왔다.

10월 15일 [양력 11월 23일]<임신> 비바람이 종일 불었다.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종일 이리뒤척 저리뒤척 했다. 여러 장수 들이 와서 문안하니 얼굴을 들고 어찌 맞으랴! 림홍(林 )? 림중형(林仲亨)?박신(朴信)이 적을 정탐하려고 작은 배를 타고, 흥양?순천 등지의 바다로 나갔다.

10월 16일 [양력 11월 24일]<계유> 맑다.
우수사와 미조항첨사를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현감도 보냈다.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지 나흘째가 된다. 마음 놓고 통곡할 수도 없으므로, 영 안에 있는 강막지(姜莫只) 집으로 갔다. 밤 열 시쯤에 순천부사?우후 이정충(李廷忠)?금갑도만호?제포 만호 등이 해남에서 돌아왔다. 왜놈 열세 명과 투항했던 송원봉 (宋元鳳) 등을 목베고서 왔다.

10월 17일 [양력 11월 25일]<갑술> 맑은 날씨인 데 바람도 종일 세게 불었다.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을 하는데, 하얀 띠를 두르고 있으니, 비통함을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10월 18일 [양력 11월 26일]<을해> 맑다.
바람이 자는 것 같았으나 우수사는 배를 출항할 수 없어 바깥바다에서 잤다. 강막지(姜莫只)가 와서 알현했다. 림계형(林季亨) ?임준영(任俊英)이 들어왔다.

10월 19일 [양력 11월 27일]<병자> 맑다.
새벽 꿈에, 고향집의 종 진(辰)이 내려왔기에 나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통곡하였다. 저녁나절에 조방장과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백 진사가 와서 봤다. 림계형(林季亨)은 와서 알현했다. 김신 웅(金信雄)의 아내?이인세(李仁世)?정억부(鄭億夫)를 붙잡아 왔다. 거제? 안골? 녹도? 웅천? 제포? 조라포? 당포?우우후가 와 서 봤다. 적을 잡은 공문을 와서 바쳤다. 윤건(尹健) 등의 형제가 왜적에게 붙었던 두 명을 잡아 왔다. 어두울 무렵 코피를 되 남짓이나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찌 다 말하랴! 이승에서의 영령이라 마침내 불효가 여기까지 이를 줄을 이찌 아랴! 비통한 마음 찢어지는 듯하여 억누를 수가 없다.

10월 20일 [양력 11월 28일]<정축> 맑고 바람도 잤다.
이른 아침에 미조항첨사?해남현감?강진현감이 해남현의 군량을 운반할려고 여쭙고 돌아갔다. 안골포만호 우수(禹壽)도 여 쭙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김종려(金宗麗)? 정수(鄭遂)? 백진남(白振男)이 와서 보고, 또 윤지눌(尹志訥)의 못된 짓을 말하였다. 김종려(金宗麗)를 소음도(所音島) 등 열세 곳 섬의 염전의 감자도감검(監煮都監檢: 감독관)으로 정하여 보냈다. 영의 둔덕에서 일하는 사화(士 化)의 모친이 배 안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곧 묻어버릴 일로 군관에게 시켰다. 남도포?여도 두 만호가 와서 알현하고서 돌아 갔다.

10월 21일 [양력 11월 29일]<무인> 밤 두시쯤에 비오다 눈오다 했다.
바람이 몹시 추웠다. 뱃사공이 추워 얼까 걱정이 되어 마음을 잡지 못했다. 오전 여덟시부터 바람이 불고 눈이 펑펑 내렸다. 정 상명(鄭翔溟)이 와서 아뢰기를 무안현감 남언상(南彦祥)이 들어 왔다고 했다. 남언상은 원래 수군에 소속된 관리인 데, 사사로 이 목숨만 보존할 꾀를 부려 수군에 오지 않고, 산골에 숨어서 달포쯤 관망하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는 무거운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비로소 이제야 나타나니, 그 하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꽤 씸하다. 저녁나절에 가리포 및 배 조방장과 우후가 와서 절했다. 바람불고 눈이 종일 내렸다. 장흥부사가 와서 잤다.

10월 22일 [양력 11월 30일]<기묘> 아침에 눈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장흥과 같이 식사를 했다. 오후에 군기사장(軍器査長) 선기룡 (宣起龍) 등 세 사람이 임금의 분부와 의정부의 방문을 가지고 왔다. 해남현감(유형)이 적에게 붙었던 윤해(尹海)?김언경 (金彦京)을 묶어서 올려 보내 왔다. 그래서 나장이 있는 곳에 단단히 가두었다. 무안현감 남언상(南彦祥)은 가리포의 전선에 가 두었다. 우수사가 황원에서 와서 말하기를, 김득남(金得男)이 처 형되었다고 했다. 진사 백진남(白振南)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10월 23일 [양력 12월 1일]<경진> 맑다.
저녁나절에 김종려(金宗麗)?정수(鄭遂)가 와서 봤다. 배 조방장 과 우후?우수사우후도 와서 봤다. 적량?영등포만호가 잇따라 왔다가 저녁에 돌아갔다. 이 날 낮에 윤해(尹海)?김언경(金彦京)을 처형했다. 대장장이 허막동(許莫同)을 나주로 보낼려고 밤 아홉시에 종을 시켜 불렀 더니 배가 아프다고 했다. 싸움말의 떨어진 편자를 갈았다.

10월 24일 [양력 12월 2일]<신사> 맑다.
해남에 있던 왜의 군량 삼백스무두 섬을 실어왔다. 초저녁에 선 전관 하응서(河應瑞)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우 후 이몽구(李夢龜)를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그 편에 들으니, "명 나라 수군이 강화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밤 열시쯤에 병을 다스 리려고 땀을 내니 등을 적시고 밤 한시에야 그쳤다. 밤 세 시 에 또 선전관과 금오랑이 왔다고 한다. 날이 밝자 들어오는데, 선전관은 권길(權吉)이요, 금오랑(의금부도사 주부) 홍지수(洪之 壽)였다. 무안현감(남언상)?목포만호(방수경)?다경포만호(윤승 남)를 잡으러 여기 왔다.

10월 25일 [양력 12월 3일]<임오> 맑다.
몸이 몹시 불편했다. 윤련(尹連)이 부안에서 왔다. 종 순화(順花) 는 아산에서 배를 타고 왔다. 집안의 편지를 받아 보니 심회가 불편하여 이리뒤척 저리뒤척이다가 혼자 앉아 있었다. 초저녁에 선전관 박희무(朴希茂)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명나라 수군이 배를 정박하기에 알맞은 곳을 골라서 장계 하라는 것이었다. 량희우(梁希雨)가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갔다 가 되돌아왔다. 충청우후가 편지를 보내고 또 홍시 한접을 보내 왔다.

10월 26일 [양력 12월 4일]<계미> 새벽에 비를 부렸다.
조방장 등이 와서 봤다. 김종려(金宗麗)?백진남(白振南)?정수 (鄭遂) 등이 와서 봤다. 이 날 밤 열시에 자는데 식은 땀이 나서 몸을 적시었다. 온돌이 너무 따뜻한 탓이었다.

10월 27일 [양력 12월 5일]<갑신> 맑다.
영광군수(전협)의 아들 전득우(田得雨)가 군관이 되어 알현했다. 곧 그 부친이 있는 곳으로 돌려 보냈더니 홍시 백 개를 가지고 왔다. 밤에 비가 뿌렸다.

10월 28일 [양력 12월 6일]<을유> 맑다.
아침에 여러 가지 장계를 봉하여 피은세(皮銀世)에게 주어서 보 냈다. 저녁나절에 강막지(姜莫只)의 집에서 대장선으로 옮겨 탔 다. 저녁에 소금밭의 서원 도걸산(都巨叱山)이 큰 사슴을 잡아 바 쳤다. 그래서 군관 등에게 주어 나누어 먹게 했다. 이 날 밤에는 잔잔한 바람도 일지 않았다.

10월 29일 [양력 12월 7일]<병술> 맑다.
밤 두 시쯤에 첫 나발을 불고 출항하여 목포로 향하는데 벌써 부터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샛바람이 살살 불었다. 목포에 이 르러 보화도(목포시 고하도)로 옮겨 정박하니, 된하늬바람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알맞다. 그래서 뭍에 내려 섬 안을 둘러 보니, 형세가 매우 좋으므로, (보 화도에서)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했다.

10월 30일 [양력 12월 8일]<정해> 맑으나 샛바람이 불고, 꼭 비올 것 같다.
아침에 집지을 곳으로 내려가 앉았으니,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 현했다. 해남현감 류형(柳珩)도 와서 적에게 붙었던 사람들의 소 행을 전했다. 일찍 황득중(黃得中)으로 하여금 자귀장이를 데리고 섬 북쪽 봉우리로 가서 집 지을 재목을 베어 오게 했다. 저녁나절에 해남에 있던 적에게 붙었던 정은부(鄭銀夫) 및 김신 웅(金信雄)의 부인이 왜놈에게 지시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죽인 자 두 명과, 선비 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金愛南)을 아울러 목 베어 효시하였다. 저녁에 량밀이 도양장의 벌레 먹은 곡식을 멋대로 나누어 준 일로 곤장 예순 대를 쳤다.

(** 다음은 날짜는 적혀 있지 않으나, 1597년(정유)(Ⅰ) 10월 8일(乙丑) 뒷 장부터 모두 3 장으로 적혀 있는데 그 앞의 한 장은 「讀宋史」 이다.)
어허 이 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綱)은 가려고 하는가. 가면 또 어디로 가려는가. 무릇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그 때야말로 종사의 위태함이 마치 터럭 한 가닥으로 천만 근을 달아 올림과 같아 정히 신하된 자는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이어서 간다는 말은 진실 로 마음에 생각도 내지 못할 말이거늘, 하물며 어찌 입 밖으로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내가 강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몸을 헐어 피로써 울며, 간담을 열어 젖히고서 사세가 여기까지 왔으니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서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면 거기 이어 죽을 것이요, 또 그렇지도 못한 다면, 짐짓 화친하려는 계획을 따라 몸을 그 속에 던져 온갖 일 에 낱낱이 꾸려가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면, 혹시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도리가 있게 될 것이어늘, 강의 계획은 이 런데서 내지 않고 그저 가려고만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던져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 다음은 위의 「독송사(讀宋史)」가 적힌 그 다음 장에 두 장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새로 급제한 원경전(元景銓)?한치겸(韓致謙)?정복례(鄭福禮)는 우병사의 진에, 남엽(南曄)? 정재순(鄭在淳)? 조형(趙珩)? 조완(趙 琓)은 진주 운곡에, 이홍훈(李弘勛) 주인집은 송곡에, 창노의 우두 머리 봉환(鳳還)?석운(石雲)?뢰손(雷孫)은 백천 별장에, 훈련정 조신옥(趙信玉)? 홍대방(洪大邦)은 쌀 14?콩 18?파초 4?콩2 및 10, 대오미 2를, 흥양 정병 김득상(金得尙)은 화살쏘기로, 김덕방 (金德邦)?김윤복(金允福)은 처음 벼슬에 나왔고, 처음 벼슬에 나온 조언해(趙彦海)?주부 송상보(宋象甫)는 말이 없고, 순천 이진 (李珍)과 아산에서 처음 벼슬한 박윤희(朴允希)는 지금 충청도 방어사의 진중에 있는데 싸움말이 있어 적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정유년 11월 (1597년 11월)

11월 초1일 [양력 12월 9일]<무자> 비가 내렸다.
아침에 얇은 사슴 가죽 두 장이 물에 떠내려 왔다. 그래서 명나라 장수에게 보내주기로 했다. 기이한 일이다. 오후 두 시에 비는 개었으나 된바람이 몹시 불었다. 뱃사람들은 추위에 괴로워하며, 나는 선실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하 루를 보내는 것이 일년 같았다. 비통함을 말할 수 없다. 저녁에 된바람이 세게 불어 밤새도록 배가 흔들리어 사람이 제대로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땀이 나서 몸을 적셨다.

11월 초2일 [양력 12월 10일]<기축> 흐렸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
일찍 우수사의 전선이 바람에 표류되어 암초에 걸려 깨졌다고 한 말을 들었다. 참으로 통분하다. 병선의 군관 당언량(唐彦良)에게 곤장 여든 대를 쳤다. 선창에 내려가 앉아서 다리 놓는 일을 감독했다. 그 길로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어두워서야 배로 내려왔다.

11월 3일 [양력 12월 11일]<경인> 맑다.
일찍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가 선전관 이길원(李吉元)이 배설 (裵楔)을 처단할 일로 들어왔다. 배설(裵楔)은 벌써 성주 본집으 로 갔는데, 그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 아주는 (이길원의) 죄가 더 크다. 녹도의 배에 보냈다.

11월 4일 [양력 12월 12일]<신묘> 맑다.
일찍 새 집 지어 세우는 곳으로 올라갔다. 이길원(李吉元)이 머물 렀다. 진도군수 선의문(宣義問)이 왔다.

11월 5일 [양력 12월 13일]<임진>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날이 저 물어서 배로 내려왔다. 영암군수 이종성(李宗誠)이 밥을 서른 말이나 지어 일꾼들에게 먹이고, 또 말하되, "군량미 이백 섬을 준비하고, 중간벼 칠백 섬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 날 보성 군수와 흥양현감으로 하여금 군량창고 짓는 것을 보살피게 했다.

11월 6일 [양력 12월 14일]<계사> 맑다.
일찍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가 종일 어설렁거리니 해가 저무는 것도 몰랐다. 새 집에 이엉으로 지붕을 이었다. 군량 곳간도 지었 다. 전라우우후가 나무 베어 올 일로 황원장으로 갔다.

11월 7일 [양력 12월 15일]<갑오> 맑도 따뜻하다.
해남 의병이 왜놈의 머리 하나와 환도 한 자루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이종호(李宗浩)와 당언국(唐彦國)을 잡아왔다. 그래서 거제의 배에 가두었다. 저녁나절에 전 홍산현감 윤영현(尹英賢)? 생원 최집(崔潗)이 와서 보고, 또 군량에 쓸 벼 마흔 섬과 쌀 여 덟 섬을 부쳐 왔다. 며칠 동안의 양식으로 도움이 될만하다. 본영의 박주생(朴注生)이 왜놈의 머리 두 개를 베어 왔다. 전 현령 김응인(金應仁)이 와서 봤다. 이대진(李大振)의 아들 순생(順生)이 윤영현(尹英賢)을 따라왔다. 저녁에 새 집의 마루를 다 놓았다. 수사마다 와서 봤다. 이 날 밤 자정에 꿈에 면( )이 죽는 것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 진도군수가 돌아갔다.

11월 8일 [양력 12월 16일]<을미> 맑다.
밤 두시쯤 꿈에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다. 이 날은 따뜻하 고 바람도 없다. 새방 벽에 흙을 발랐다. 이지화(李至和) 부 자가 와서 봤다. 마루를 만들었다.

11월 9일 [양력 12월 17일]<병신>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강진현감이 현으로 돌아갔다.

11월 10일 [양력 12월 18일]<정유> 눈과 비가 섞여 오다.
된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간신히 배를 구호했다. 이정충(李廷 忠)이 와서 말하기를, "장흥의 적들이 달아났다."고 했다.

11월 11일 [양력 12월 19일]<무술> 맑으나 바람기는 약간 있었다.
식사를 한 뒤에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 평산포의 새 만호가 도임장(부임 명령서)을 바쳤다. 그는 하동현감(신진) 의 형 신훤(申萱)이다. 전하는 말이 숭정으로 가자하는 것이 이미 발행되었다고 한다. 장흥부사와 배 조방장이 와서 봤다. 저녁에 우후 이정충(李廷忠)이 왔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11월 12일 [양력 12월 20일]<기해> 맑다.
이 날 저녁나절에 영암?나주 사람에게 배메기를 못하게 했다 고 하여 묶어서 왔다. 그래서 그 중 주모자를 가려서 처형하고 나머지 네 명을 각 배에 가두었다.

11월 13일 [양력 12월 21일]<경자> 맑다.

11월 14일 [양력 12월 22일]<신축> 맑다.
남해현감 류형(柳珩)이 와서 윤단중(尹端中)의 무리한 일을 많이 전했다. 또 말하기를, 해남의 아전이 법성포로 피란갔다가 돌아올 때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어지는데, 바다가운데서 만나도 구조하 기는 커녕 도리어 배안의 물건을 빼앗아 갔다고 했다. 그래서 중군선에 가두었다. 김인수(金仁守)를 경상도 수영의 배에 가두었다. 내일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삿날이라 나들이는 하지 않아야 겠다.

11월 15일 [양력 12월 23일]<임인>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새 집으로 올라갔다. 저녁나절에 림환 (林 )과 윤영현(尹英賢)이 와서 봤다. 저녁에 송한(宋漢)이 서울 에서 들어왔다.

11월 16일 [양력 12월 24일]<계묘> 맑다.
아침에 조방장?장흥부사 및 진중에 있는 여러 장수가 아울러 와서 봤다. 군공마련기(軍功磨鍊記: 개인별 전공 조사 기록)를 하 나씩 점고했더니 거제현령 안위(安衛)가 통정대부(정3품의 당 상관)가 되고, 나머지도 차례차례 벼슬을 받고, 은 스무 냥을 내 게로 보냈다. 명나라 장수 경리양호(楊鎬)는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배에 이 붉은 비단을 걸어 주고 싶으나, 멀어서 할 수 없다."고 했다. 영의정의 회답편지도 왔다.

11월 17일 [양력 12월 25일]<갑진> 비가 내렸다.
경리 양호(楊鎬)의 차관이 초유문(招諭文: 적이나 적에게 붙었던 자들을 너그러운 조건으로 포용한다는 포고문)과 면사첩(免死帖: 사형을 적용하지 않을 것을 보증하는 증서)을 가지고 왔다.

11월 18일 [양력 12월 26일]<을사>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윤영현(尹英賢)이 와서 봤다. 정한기(鄭漢 起)도 왔다. 땀이 났다.

11월 19일 [양력 12월 27일]<병오> 흐렸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장흥부사가 와서 봤다.

11월 20일 [양력 12월 28일]<정미>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임준영(任俊英)이 와서, "완도를 정탐하니 적들이 없습니다."고 전했다.

11월 21일 [양력 12월 29일]<무신> 맑다.
송응기(宋應璣) 등이 산의 일꾼을 거느리고 해남에 소나무 있는 데로 갔다. 이 날 저녁에 순생(順生)이 와서 잤다.

11월 22일 [양력 12월 30일]<기유> 흐렸다가 개다가 했다.
저녁에 김애(金愛)가 아산에서 돌아왔다.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이 달 초열흘 날에 아산에 들러 편지를 가져 왔다. 밤에 비가 오고 눈이 내렸으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흥에 있던 적들이 20일에 달아났다는 보고가 왔다.

11월 23일 [양력 12월 31일]<경술> 바람이 세고 눈이 많이 왔다.
이 날 승첩한 장계를 썼다. 저녁에 얼음이 얼었다고 했다. 아산의 집으로 편지를 쓰자니 죽은 아들 생각에 눈물이 흘러 거둘 수가 없었다.

11월 24일 [양력 1598년 1월 1일]<신해> 눈과 비가 내렸다.
된하늬바람이 계속 불었다.

11월 25일 [양력 1월 2일]<임자> 눈이 내렸다.

11월 26일 [양력 1월 3일]<계축> 비와 눈이 내렸다.
얼어서 막힌 게 갑절이나 혹독했다.

11월 27일 [양력 1월 4일]<갑인> 맑다.
장흥의 승첩계본을 수정했다.

11월 28일 [양력 1월 5일]<을묘> 맑다.
장계를 봉했다. 무안에 사는 진사 김덕수(金德秀)가 군량에 쓸 벼 열다섯 섬을 가져와 바치었다.

11월 29일 [양력 1월 6일]<병진> 맑다.
유격 마귀(麻貴)의 차관 왕재(王才)가, "물길을 따라 명나라 군사가 내려 온다"고 했다. 전희광(田希光)?정황수(鄭凰壽)가 왔다. 무안현감도 왔다.

정유년 12월 (1597년 12월)

12월 초1일 [양력 1월 7일]<정사> 맑다.
맑고 따뜻했다. 아침에 경상수사 입부 이순신(李純信)이 진에 왔 다. 나는 배가 아파서 저녁나절에야 수사를 보고, 그와 종일 이야기하며 대책을 의논했다.

12월 2일 [양력 1월 8일]<무오> 맑다.
날씨가 너무 따뜻하여 봄날 같다. 영암의 향병장 류장춘(柳長春) 이 적을 토벌한 사유를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곤장 쉰 대를 쳤다. 홍산현감 윤영현(尹英賢)?김종려(金宗麗)?백진남(白振南)?정수 (鄭遂) 등이 와서 봤다. 밤 열시쯤에 땀이 배어 젖었다. 된바람이 몹시 불었다.

12월 3일 [양력 1월 9일]<기미> 맑다.
바람이 세게 불렀다. 몸이 불편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12월 4일 [양력 1월 10일]<경신> 맑다.
몹시 추웠다. 저녁나절에 김윤명(金允明)에게 곤장 마흔 대를 쳤다. 장흥 교생 기업(基業)이 군량을 훔쳐 실은 죄로 곤장 세 대를 쳤다. 거제현령 및 금갑도만호?천성보만호는 배메기하는 데서 돌아왔다. 무안현감 및 전희광(田希光) 등이 돌아갔다.

12월 5일 [양력 1월 11일]<신유> 맑다.
아침에 공로를 세운 여러 장수들에게 상품과 직첩을 나누어 주었다. 봉제(奉 )가 김돌손(金乭孫)을 데리고 함평 땅으로 갔다. 보자기를 수색하는 정응남(鄭應男)이 점세(占世)를 데리고 진도로 갔다. 배를 새로 만들 때 나쁜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볼 일 로 아울러 나갔다. 해남의 독동(禿同)을 처형했다. 전익산군수 고 종후(高從厚)가 왔다. 김억창(金億昌)이 왔다. 광주의 박자(朴 仔)가 왔다. 무안의 나덕명(羅德明)이 왔다. 도원수의 군관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아직도 상제라 하여 방편을 따르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다.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아가 용맹이 없으 면, 효가 아니다.'고 하였다. 전쟁할 때의 용감이란 소찬으로 기운 이 없는 자는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예기에도 `원칙과 방편'이 있으니, 꼭 원칙대로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짐 작하여 소찬에 더하여 방편을 쫓도록 하라."고 하면서 고기반찬 을 하사하셨으니, 더욱 비통했다. 해남의 강간?약탈한 죄인을 함평에서 자세히 다스렸다.

12월 6일 [양력 1월 12일]<임술>
나덕준(羅德峻)?정대청(鄭大淸)의 아우 정응청(鄭應淸)이 와서 봤다.

12월 7일 [양력 1월 13일]<계해> 맑다.

12월 8일 [양력 1월 14일]<갑자> 맑다.

12월 9일 [양력 1월 15일]<을축> 맑다.
종 목년(木年)이 들어왔다.

12월 10일 [양력 1월 16일]<병인> 맑다.
조카 해?아들 열 및 진원(珍原)이 윤간(尹侃)?이언량(李彦 良)과 함께 들어왔다.

12월 11일 [양력 1월 17일]<정묘> 맑다.
경상수사와 조방장이 와서 봤다. 우수사도 와서 봤다.

12월 12일 [양력 1월 18일]<무진> 맑다.
12월 13일 [양력 1월 19일]<기사> 가끔 눈오다.

12월 14일 [양력 1월 20일]<경오> 맑다.

12월 15일 [양력 1월 21일]<신미> 맑다.

12월 16일 [양력 1월 22일]<임신> 맑다. 저녁나절에 눈오다.

12월 17일 [양력 1월 23일]<계유> 눈바람이 몹시 섞여치다.
조카 해와 헤어졌다.

12월 18일 [양력 1월 24일]<갑술> 눈오다.
새벽에 해는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았는데도 오늘 새벽에 출항했다.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12월 19일 [양력 1월 25일]<을해> 종일 눈이 내리다.

12월 20일 [양력 1월 26일]<병자>
진원(珍原)의 어머니와 윤간(尹侃)이 올라갔다. 우후가 교서에 숙 배했다.

12월 21일 [양력 1월 27일]<정축> 눈오다.
아침에 윤홍산이 목포에서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배 조방장과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몹시 취하여 돌아갔다.

12월 22일 [양력 1월 28일]<무인> 눈비가 섞여 내리다.
함평현감(손경지)이 들어왔다.

12월 23일 [양력 1월 29일]<기묘> 눈이 세 치나 내렸다.
순찰사가 진에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12월 24일 [양력 1월 30일]<경진> 눈이 오다 개이다 하다.
아침에 이종호(李宗浩)를 순찰사에게 보내어 문안했다. 오늘 밤 나덕명이 와서 이야기하는데, 머무르고 있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니 한심하다. 밤 열시에 집에 편지를 썼다.

12월 25일 [양력 1월 31일]<신사> 눈오다.
아침에 열이 돌아갔다. 제 어머니 병 때문이었다. 저녁나절에 경 상수사?배 조방장이 와서 봤다. 오후 여섯시에 순찰사가 진에 왔으므로, 함께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연해안 열아홉 고을을 수군에 전속하게 하였다. 저녁에 방안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이야기했다.

12월 26일 [양력 2월 1일]<임오> 눈오다.
방백과 함께 방에 앉아서 은밀히 군사 대책을 논의했다. 저녁 나절에 경상수사(이순신)와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와서 봤다.

12월 27일 [양력 2월 2일]<계미> 눈오다.
아침을 먹은 뒤에 순찰사가 돌아갔다.

12월 28일 [양력 2월 3일]<갑신> 맑다.
경상수사와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와서 봤다. 비로소 경상수사가 지니고 있던 물건이 왔다는 말을 들었다.

12월 29일 [양력 2월 4일]<을유> 맑다.
김인수(金仁秀)를 놓아 보냈다. 윤□□에게 곤장 서른 대를 치고서 놓아 보냈다. 영암좌수(座首)는 문초를 받고 놓아 주었다. 두우(杜宇)가 종이감으로 백지?상지를 아울러 쉰(장...이 아래 글자 가 지워져서 알아볼 수가 없음)을 가져왔다. 초저녁에 다섯 사람 이 뱃머리에 왔다고 했다. 그래서 종을 보냈다.(이 아래 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음) 그것이 무슨 듯인지 알 수가 없다. 거제의 망령됨을 알만도 하다.(이 아래 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음) 다친 팔과 손가락을 물로 씻었다고 했다.

12월 30일 [양력 2월 5일]<병술> 입춘. 눈보라가 몹시 휘날렸다.
□□□배 조방장이 와서 봤다. 여러 장수들이 와서 봤다. 평산 포만호?영등포만호는 오지 않았다. 부찰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 지고 왔다. 오늘밤이 일년의 마지막 날이 되는 그믐밤이라 비통한 생각이 한결 더 하다.

무술년 1월 (1598년 1월)

1월 초1일 [양력 2월 5일]<정해> 맑다.
저녁나절에 비기 잠깐 내렸다. 경상수사?조방장 및 여러 장수들이 다와서 모였다.

1월 초2일 [양력 2월 6일]<무자> 맑다.
나라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 祭日)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새로 만든 배의 진수식을 했다. 해남현감(류형)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송대립(宋大立)?송득운(宋得運)?김붕만(金鵬萬)이 각 고을로 나갔다. 진도군수(선의경)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1월 3일 [양력 2월 7일]<기축> 맑다.
이언량(李彦良)?송응기(宋應璣) 등이 산□□□ (□□□은 떨어져서 알아볼 수 없음)

1월 4일 [양력 2월 8일]<경인> 맑다.
무안현감(南彦祥)에게 곤장을 쳤다. □수사에게 □□했더니, 우수사가 □□□ 왔다.(□□□은 떨어져서 알아볼 수 없음.)

(**날짜 없음)

명나라 계(季金) 유격장(遊擊將)에게서 받은 물건은 4월 26일인데, 청운비단(靑雲絹) 1단, 남운비단(藍雲絹) 1단, 비단버선(綾襪) 1쌍, 구름무늬 신(雲履) 1쌍, 향기(香棋) 1부, 향패(香牌) 1부, 절 명(浙茗) 二근(36냥쭝), 향춘(香椿) 2근(36냥쭝), 사청차(四靑茶) 사발 10개, 산닭(生鷄) 4마리이고, 강인약(江鱗躍) 천총(千摠)에게 서 받은 물건은 춘명(椿茗) 1봉, 화합(花盒) 1개, 등부채(藤扇) 1 발, 복리(服履) 1쌍이고, 주 천총(朱千摠)에게서 받은 것은 술잔 (酒盞) 6개, 주사잔( 箋) 2장, 소합(小盒) 1개, 찻잎(茶葉) 1봉, 신 선로(神仙爐) 1, 응애(鷹埃) 2이고, 정문린(丁文麟) 천총(千摠)에게 서 받은 것은 여름양말(暑襪) 1켤레, 영견(領絹) 1모, 양차(兩茶) 1봉, 호추(胡椒) 1봉이며, 진자수(陳子秀) 파총(把摠)에게서 받은 것은 수보(繡補) 1부 등받이이다, 시쓴 부채(詩扇) 1발, 향선(香 線) 10가닥이며, 육경(陸卿)에게서 받은 것은 꽃수건(花 ) 1조, 허(許) 파총(把總)에게서 받은 것은 청포와 홍포(靑布紅布) 각 1, 금부채(金扇) 2, 꽃수건(花 ) 2이다. 10월 4일에는 복일승(福日 升) 유격(遊擊)에게서 받은 것은 청포(靑布) 1단, 남포(藍布) 1단, 금부채(金扇) 4자루, 젓가락(杭 ) 2모, 산닭(生鷄) 2마리, 양(鹹 羊) 1마리, 왕원주(王元周) 유격(遊擊)에게서 받은 것은 금띠(金 帶) 1, 양감도서갑( 嵌圖書匣) 1, 향합(香盒) 1, 경대(鏡架) 1, 금 부채(金扇) 2, 비단실(絲線) 1봉, 찻항아리(茶壺) 1, 빗(蘇梳) 2개, 오유림(吳惟林) 천총(千總)에게서 받은 것은 양대( 帶) 1개, 배첩 (拜帖) 20장이며, 진국경(陳國敬) 파총(把總)에게서 받은 것은 꽃 차(花茶) 1봉, 꽃무늬술잔(花酒盃) 1대, 구리찻숟갈(銅茶匙) 2부, 찻숟갈(細茶匙) 1부, 홍례(紅禮帖) 1개, 전간첩(全柬帖) 5장, 서간 첩(書柬帖) 10장, 길절간(吉折柬) 8장, 붉은 주사 젓가락( 紅 ) 10쌍이며, 계영천(季永 )에게서 받은 것은 금부채(眞金扇) 1발, 땀수건(汗巾) 1모, 부들채(蒲扇) 1자루, 수건(粗 ) 2장, 왕명(王 明) 기패(旗牌)에게서 받은 것은 남포(藍布) 1단, 베개(枕頭花) 1 부, 푸른비단실(靑絹線) 약간, 공진( 璡) 파총(把總)에게서 받은 것은 붉은 종이(紅紙) 1부, 절차(浙茶) 1봉, 차숟갈(茶匙) 6개, 바 늘(蘇針) 1포, 왕계자(王啓子) 중군(中軍)에게서 받은 것은 남띠 (藍帶) 1개, 빗(梳帶細) 2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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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 9월 (1598년 9월)

9월 15일 [양력 10월 14일]<정유> 맑다.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과 함께 일제히 항해하여 나로도에 이르러서야 잤다.

9월 16일 [양력 10월 15일]<무술> 맑다.
나로도에 머물었다. 도독과 함께 술을 마셨다.

9월 17일 [양력 10월 16일]<기해> 맑다.
나로도에 머물었다. 진(陳)과 함께 술을 마셨다.

9월 18일 [양력 10월 17일]<경자> 맑다.
낮 두 시에 행군하여 방답진(여천군 돌산읍 군내리)에 이르러 잤다.

9월 19일 [양력 10월 18일]<신축> 맑다.
아침에 좌수영 앞바다에 옮겨 대니, 눈앞의 전경이 참담하다. 한 밤에 달빛을 타고 하개도(何介島:남해군 남면 대정리 목도?)로 옮겨 대었다가, 채 밝기도 전에 출항했다.

9월 20일 [양력 10월 19일]<임인> 맑다.
오전 여덟 시쯤에 유도(여천군 율촌면 여흥리 송도)에 이르니, 명 나라 제독 유정(劉綎)이 벌써 진군했다. 수륙으로 모두 조여드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많이 겁내는 빛이다. 수군이 드나들며 대포를 쏘아댔다.

9월 21일 [양력 10월 20일]<계묘> 맑다.
아침에 진군하여 화살을 쏘기도 하고 화포를 쏘기도 하여 종일 싸웠으나, 물이 밀려나가 매우 얕아 진격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남해의 적이 가벼운 배를 타고서 들어와 정탐하려 할 즈음 허사 인(許思仁) 등이 추격하니, 왜적들은 뭍으로 올라가 산으로 도망 갔다. 그리하여 왜놈들의 배와 여러 잡된 물건을 빼앗아 도독(유 정)에게 바쳤다.

9월 22일 [양력 10월 21일]<갑진> 맑다.
아침에 진군하여 나갔다 들어갔다 하면서 싸웠는데, 유격(마귀) 이 어깨에 적탄을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명나라 군사 열한 명이 적탄에 맞아 죽고, 지세포만호?옥포만호가 적탄에 맞았다.

9월 23일 [양력 10월 22일]<을사> 맑다.
도독이 화를 냈다. 서천만호 및 홍주대장?한산대장 등에게 각각 곤장 일곱 대를 쳤다. 금갑도만호?제포만호?회령포만호에게도 아울러 곤장 열다섯 대씩 때렸다.

9월 24일 [양력 10월 23일]<병오> 맑다.
진대강(陳大綱)이 돌아갔다. 원수 군관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 충 청병사의 군관 김정현(金鼎鉉)이 왔다. 남해 사람 김득유(金得酉) 등 다섯 사람이 다녀 와서, 그 고을 적정을 전하였다.

9월 25일 [양력 10월 24일]<정미> 맑다.
진대강(陳大綱)이 도로 와서 제독 유정(劉綎)의 편지를 전했다. 이 날 육군은 비록 공격을 하려고 하나 기구가 완전치 못하였다. 김정현(金鼎鉉)이 와서 봤다.

9월 26일 [양력 10월 25일]<무신> 맑다.
육군의 기구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저녁에 정응룡(鄭應龍)이 와서 북도의 일을 말했다.

9월 27일 [양력 10월 26일]<기유> 아침에 잠시 비를 뿌리더니 히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명나라 군문 형개(邢 )가 글을 보내어 수군이 재빨리 진군한 것을 가상히 여긴다. 식사를 한 뒤에 도독 진린(陳璘)을 보고 조용히 이야기했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저녁에 신호의(愼好義)가 와서 보고 잤다.

9월 28일 [양력 10월 27일]<경술> 맑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들 수가 없었다.

9월 29일 [양력 10월 28일]<신해> 맑다.

9월 30일 [양력 10월 29일]<임자> 맑다.
오늘 저녁 명나라 유격 왕원주(王元周)?유격 복승(福昇)?파총 이천상(李天常)이 백 여 척을 거느리고 진으로 왔다. 이 날 밤 등불을 밝히니, 휘황찬란하여 적도들은 간담이 써늘했을 것이다.

무술년 10월 (1598년 10월)

10월 초1일 [양력 10월 30일]<계축> 맑다.
도독(진린)이 새벽에 제독 유정(劉綎)에게 가서 잠깐 서로 이야기 했다.

10월 초2일 [양력 10월 31일]<갑인> 맑다.
아침 여섯 시쯤에 진군했는데, 우리 수군이 먼저 나가 정오까지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사도첨사(황세득)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고, 이청일(李淸一)도 죽었다. 제포만호 주의수(朱義壽)? 사량만호 김성옥(金聲玉)? 해남현감 류형(柳珩)? 진도(군수) 선의문(宣義問)?강진(현감) 송상보(宋尙甫)가 적탄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

10월 초3일 [양력 11월 1일]<을묘> 맑다.
도독(진린)이 제독 유정(劉綎)의 비밀 서신에 따라 초저녁에 진군하여 자정에 이르기까지 사선(沙船) 열아홉 척, 호선(虎船) 스무 여 척에 불을 지르니, 도독의 엎어지고 자빠지는 꼴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안골포만호 우수(禹壽)는 적탄에 맞았다.

10월 초4일 [양력 11월 2일]<병진> 맑다.
아침에 출항하여 적을 공격하는데 종일 싸우니 적들은 허둥지둥 달아났다.

10월 초5일 [양력 11월 3일]<정사> 맑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배들을 간신히 구호하고 날을 보냈다.

10월 초6일 [양력 11월 4일]<무오> 맑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도원수(권율)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는데, "제독 유정(劉綎)이 달아나려 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분할 일이다. 나랏일이 앞으로 어찌 될 것인지!

10월 초7일 [양력 11월 5일]<기미> 맑다.
아침에 송한련(宋漢連)이 군량 넷?조 하나?기름 다섯 되?꿀 석되를 바쳤다. 김태정(金太丁)은 쌀 두 섬 한 말을 바쳤다.

(** 날짜 없음)

군사에 관한 일. 이 달(10월) 3일 오늘밤이 조류가 이로워 싸움을 하겠다고 총병 유정(劉綎)에게 서신으로 허가를 받았다. 주되는 일, 즉 각 장수를 통솔하여 전함을 전진시키는 것은 각 고을의 군사가 있는 힘을 다하여, 제몸을 돌보지 않고서 곧장 왜적선에 쳐 들어가 불태웠다. 10여 척을 끌어내는데, 왜적은 산성 위에서 총포를 쏘았다. 한창 격렬히 벌어진 싸움을 생각하니, 마침 조수(潮水)가 막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는 주되는 일이 곧장 손짓하여 병사들을 거두는 것이 마땅하므로, 앞에 있는 배들은 고함소리를 질러 하늘에까지 시끄럽도록 하였지만, 포성(砲聲)은 우레 같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여 사선(沙船) 19 척 병사를 □□ □, 무서운 것은 왜놈들에게 빼앗기는 것인데, 장수가 탈 배와 아울러 화약(火藥)으로 스스로 불을 내어 불타버렸다. 해당진에서는 왜적을 사로잡기도 하고, 진에서 눈을 잃은 병사를 빼고는 훤히 조사하여 보고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사선(沙船) 25척, 호선(號船) 77척, 비해선(飛海船) 17척, 잔선( 船) 9척 (모두 126척)

여기 가지가 기록에 남아있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solbi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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