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난중일기 - 7

영지니 2008. 4. 13. 19:19
 
일 [양력 9월 5일]<무신> 맑다가 흐리며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충청우후와 함께 활을 쏘았다. 이 날 밤 땀이 흘러 등을 적시었다. 아침에 우(禹)씨가 곤장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장사지낼 물건을 약간 보냈다.


8월 14일 [양력 9월 6일]<기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샛바람이 계속 불어 벼가 상했다고 한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과 충청우후와 같이 이야기를 중지시켰는데 땀나지는 않았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

3월 26일 [양력 4월 23일]<계사> 맑고 마파람이 불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조방장 및 방답첨사?녹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체찰사의 전령 이 왔는데, "전일(12일)에 우도의 수군을 돌려 보내라고 한 것은 회계(回啓)를 잘못 본 탓이다."고 하였다. 우습다.

3월 27일 [양력 4월 24일]<갑오> 맑다. 마파람이 불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활을 쏘았다. 우후?방답첨사도 왔다. 충청도 마량첨사? 임치첨사? 결성현감? 파지도권관이 함께 왔다. 술을 먹여서 보냈다. 저녁에 신 사과와 아우 여필이 들어왔다. 그 편에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고 다행하기 이를 데 없다.

3월 28일 [양력 4월 25일]<을미> 궂은비가 몹시 내리며 종일 개지 않았다.
나가 앉아서 공문을 만들어 나누어 보냈다. 충청도 뱃사람들이 다시 울짱을 설치하여 방비했다.

3월 29일 [양력 4월 26일]<병신> 궂은비가 걷히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부찰사(한효순)의 통지문이 먼저 이곳에 왔는데, 성주에서 진으로 온다고 했다.


병신년 4월 (1596년 4월)

4월 초1일 [양력 4월 27일]<정유> 비가 많이 내렸다.
신사과와 함께 이야기했다. 종일 비가 내렸다.

4월 초2일 [양력 4월 28일]<무술> 저녁나절에 개었다.
저물녘에 경상수사가 부찰사를 마중하는 일로 나갔다. 신사과는 같은 배로 갔다. 이 날 밤 몸이 몹시 불편했다.

4월 초3일 [양력 4월 29일]<기해> 맑고 마파람에 종일 불었다.
어제 저녁에 견내량 복병이 긴급보고한 내용에, "왜놈 네 명이 부산에서 장사하며 이익을 늘리려 나왔다가 바람에 표류되었다." 고 했다. 그래서 새벽에 녹도만호 송여종(宋汝宗)을 보내어 그렇게 된 까닭을 묻고 빼내오려고 보냈는데 그 정형(情跡)을 살펴 보니, 정탐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목을 베었다. 우수사에게 가 볼려고 하다가 몸이 불편하여 못 갔다.

4월 초4일 [양력 4월 30일]<경자> 흐렸다.
아침에 오철(吳轍)이 나갔다. 종 금이(金伊)도 같이 갔다. 아침에 체찰사의 공문에 도장을 찍어 벽에 붙였다. 여러 장수가 표신을 고쳤다. 우수사에게 가 보고는 취하여 이야기하고서 돌아왔다. 충청도의 군대에 울짱(木柵)을 쳤다. 초저녁이 지나서 저녁밥을 먹었다. 속이 덥고 땀이 났다. 밤 열시쯤에 잠깐 비가 그쳤다.

4월 초5일 [양력 5월 1일]<신축> 맑다.
부찰사(한효순)가 들어왔다.

4월 초6일 [양력 5월 2일]<임인>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부찰사가 활쏘기를 시험했다. 저녁에 나는 우수사 등과 들어가 앉아서 군사들에게 같이 마주하여 음식을 먹였다.

4월 7일 [양력 5월 3일]<계묘> 맑다.
부찰사가 나가 앉아서 상을 나누어 주었다. 새벽에 부산 사 람이 들어왔는데, "명나라 사신(이종성)이 달아났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부찰사가 입봉(立峯)에 올라갔다. 점심을 먹은 뒤에 두 수사와 더불어 같이 이야기했다.

4월 8일 [양력 5월 4일]<갑진> 종일 비가 내렸다.
저녁나절에 들어가 마주 앉아 부찰사와 같이 마주하여 술을 마 시니 몹시 취하였다. 초파일이라 등불을 켜 달고 헤어졌다.

4월 9일 [양력 5월 5일]<을사> 맑다.
이른 아침에 부찰사가 나갔다. 그래서 배를 타고 포구로 나 가 같이 배에서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4월 10일 [양력 5월 6일]<병오> 맑다.
아침에 들으니 암행어사가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수사 이 하 포구로 나가 암행어사를 기다렸다. 조붕(趙鵬)이 와서 봤다. 그 모습을 보니 학질을 오래 앓아 주린 모습이 무척 야위었다. 참으로 딱했다. 저녁나절에 암행어사가 들어 와서 같이 내려가 앉아서이야기했 다. 촛불을 밝혀주고 헤어졌다.

4월 11일 [양력 5월 7일]<정미> 맑다.
아침을 먹고 어사와 같이 마주하여 조용히 이야기했다. 저녁나 절에 장병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활 열 순을 쏘았다.

4월 12일 [양력 5월 8일]<무신> 맑다.
아침을 먹고 난 뒤에 어사가 밥을 지어 군사들에게 먹이게 한 뒤에 활 열 순을 쏘고 종일 이야기했다.

4월 13일 [양력 5월 9일]<기유> 맑다.
아침을 먹고 어사와 함께 마주해 있다가 느지막이 포구로 나갔더니, 마파람이 세게 불어 출항하지 못했다. 선인암(仙仁岩)으로 가서 종일 이야기하고 저물어질 때 서로 헤어졌다. 저물어서야 거망포(巨網初)에 이르렀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4월 14일 [양력 5월 10일]<경술> 흐렸다가 종일 비가 내렸다.
아침을 먹고 나가 앉아서 홍주판관(朴崙)?당진만호(趙孝悅)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에게 곤장 마흔 대를 쳤다. 당진포만호도 같은 벌을 받았다.

4월 15일 [양력 5월 11일]<신해> 맑다.
단오절의 진상품을 봉해서 곽언수(郭彦守)에게 받아다 내보냈다. 영의정(류성룡)?영부사 정탁(鄭琢)?판서 김명원(金命元)? 지사 윤자신(尹自新)?조사척?신식(申湜)?남이공(南以恭)에게 편지를 썼다.

4월 16일 [양력 5월 12일]<임자> 맑다.
아침을 먹고나서 나가 앉아서, 난에몬 등을 불러다가 불지른 왜 놈 세 놈이 누구누구인지를 물어본 뒤에 붙들어다가 죽여버렸다. 우수사?경상수사도 같이 앉아서 아우 여필이 가져온 술로 취 했다. 가리포첨사?방답첨사가 같이 마셨는데,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이 날 밤 바다에는 달빛이 차겁게 비치고 잔 물결 한 점 일지 않았다. 다시 땀을 흘렸다.

4월 17일 [양력 5월 13일]<계축> 맑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아우 여필 및 아들 면( )이 종을 데리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각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이 날 저녁에 울(蔚)이 안위(安衛)에게 가서 보고 왔다.

4월 18일 [양력 5월 14일]<갑인> 맑다.
식사하기 전에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 및 솟장을 처리해 주었다. 체찰사에게 갈 공문을 내보냈다. 저녁나절에 충청우후?경상우후?방답첨사?조방장 김완(金浣)과 더불어 활 스무 순을 쏘았다. 마도(馬島)의 군관이 복병한 곳에서 투항해 온 왜놈 한 명 을 잡아 왔다.

4월 19일 [양력 5월 15일]<을묘> 맑다.
습열(濕熱: 습기로 일어나는 열)로 침 스무 여 곳을 맞았다. 몸 에 번열(煩熱: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함)이 나는 것 같아 종일 방 에서 나가지 않았다. 어두울 무렵 영등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종 목년(木年)과 금화(今花)?풍진(風振) 등이 와서 인사했다. 이 날 아침에 난에몬(南汝文) 편에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 었다. 뛸 것 처럼 기쁘지만 믿을 수는 없다. 이 말은 진작부터 퍼졌었지만 아직은 확실한 기별이 온 것은 아니다.

4월 20일 [양력 5월 16일]<병진> 맑다.
경상수사가 와서 내일 만나자고 청했다. 활 열 순을 쏘고 헤어졌다.

4월 21일 [양력 5월 17일]<정사>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경상도의 진으로 가는 길에 우수사의 진에 들러 같이 갔다. 경상수사를 맞아 주며 종일 활을 쏘았다. 잔뜩 취해서 돌아왔다. 조방장 신호(申浩)는 병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영인(?永人)이 왔다.

4월 22일 [양력 5월 18일]<무오>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나가 앉아 있으니, 부산 허낸만(許乃隱萬) 이 보낸 편지(告目)에 이르기를, 명나라 사신(이종성)이 달아 나고 부사(副使:楊方亨)는 여전히 왜놈의 진영에 있는데, 4월 초8일에 달아난 까닭을 상부에 아뢰었다고 했다. 김 조방장이 와 서 아뢰기를, 노천기(盧天紀)가 술을 먹고 주책없이 굴다가 본영 진무 황인수(黃仁壽)?성복(成卜) 등에게서 욕을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곤장 서른 대를 때렸다. 활 열 순을 쏘았다.

4월 23일 [양력 5월 19일]<기미> 흐렸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아침에 첨지 김경록(金景祿)이 들어왔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앉아 같이 술을 마셨다. 저녁나절에 군사들 중에서 힘센 자 들을 뽑아 씨름을 시켰더니, 성복(成卜)이란 자가 판을 독차지 하였다. 그래서 상으로 쌀 말을 주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 마량첨사(金應潢)? 당진만호(趙孝悅)? 홍주판관(朴崙)? 결성현감(孫安國)? 파지도권관(宋世應)? 옥포만호(李曇) 등과 같이 쏘았다. 한밤에 영인(永人)이 돌아갔다.

4월 24일 [양력 5월 20일]<경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목욕을 하고 나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4월 25일 [양력 5월 21일]<신유> 맑다.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일찌기 목욕하러 들어갔다가 한참 있었다. 저녁에 우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또 목욕탕에 들어갔 는데 물이 너무 뜨거워 오래 있지 못하고 도로 나왔다.

4월 26일 [양력 5월 22일]<임술> 맑다.
아침에 체찰사의 군관이 경상도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밥을 먹 은 뒤에 목욕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체찰사의 군관 오(吳)도왔다. 김양간(金良看)이 소를 싣고 올 일로 본영으로 갔다.

4월 27일 [양력 5월 23일]<계해> 맑다.
저녁에 한 번 목욕했다. 체찰사의 공문 회답이 왔다.

4월 28일 [양력 5월 24일]<갑자> 맑다.
아침?저녁으로 두 번 목욕했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와서 봤다. 경상수사는 뜸뜨느라고 오지 않았다.

4월 29일 [양력 5월 25일]<을축> 맑다.
저녁에 한 번 목욕했다. 투항해온 왜놈 사고에몬(沙古汝文)을 난에몬(南汝文)에게 시켜 목을 베었다.

4월 30일 [양력 5월 26일]<병인> 맑다.
저녁에 한번 목욕했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충청우후가 봐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부산의 허낸만(許乃隱萬)의 편지 (告目)가 왔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군사를 철수할 뜻이 있 는 것 같다. 김경록(金景祿)이 돌아갔다. 어머니께서 무사하다는 편지가 왔다.


병신년 5월 (1596년 5월)

5월 초1일 [양력 5월 27일]<정묘>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한 번 목욕했다.

5월 2일 [양력 5월 28일]<무진> 맑다.
일찍 목욕하고 진으로 돌아왔다. 총통 두 자루를 부어 만들었다. 조방장 김완(金浣) 및 조계종(趙繼宗)이 와서 봤다. 우수사가 김인복(金仁福)의 목을 베어 효시했다. 이 날은 공무를 보지 않았 다.

5월 3일 [양력 5월 29일]<기사> 맑다.
가뭄이 너무 심하다. 근심되고 괴로운 맘을 어찌 다 말하랴!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우후가 와서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저물어서 들어왔다. 총통 두 자루를 녹여 만들었다.

5월 4일 [양력 5월 30일]<경오> 맑다.
이 날은 어머니 생신인데 헌수하는 술 한 잔도 올려 드리지 못하여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나가지 않았다. 오후에 우수사가 사무보는 집에서 불이 나서 다 탔다. 이 날 저녁에 문충공(文村 公)이 부요(富饒)에서 왔다. 조종(趙琮)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조 정(趙玎)이 4월 초하루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슬프고도 애달프다. 우후가 앞산마루에서 여귀(제사 못받은 귀신)에게 제사지냈다.

5월 5일 [양력 5월 31일]<신미> 맑다.
이 날 새벽에 여귀에게 제사를 지냈다. 일찌기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앉아 있고, 회령포만호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여러 장수 들이 와서 모였다. 그대로 들어가 앉아서 위로하고 술을 네 순 배를 돌렸다. 경상수사가 술이 거나하게 취했으므로 씨름을 시켰더니, 낙안군수 림계형(林季亨)이 으뜸이다.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마시고 뛰놀게 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즐겁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한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것이었다.

5월 6일 [양력 6월 1일]<임신> 아침에 흐렸다가 저녁나절에 큰 비가 왔다.
농민의 소망을 흡족하게 채워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말 할 수 없다. 비가 오기 전에 활 대여섯 순을 쏘았다. 비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땅거미질 무렵 총통 만들 때에 쓰는 숯을 쌓아두는 창고에 불이 일어나 홀랑 다 타버렸다. 이는 감독관(監 官) 놈들이 삼가지 않은 탓이다. 새로 받아들인 숯에 묵은 불이 있는지 살피지 않아 이런 재난을 보게 된 것이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울(蔚)과 김대복(金大福)이 같은 배로 나갔다. 비가 엄청 나게 쏟아져 잘 갔는지 못 갔는지 모르겠다. 밤새도록 앉아서 걱정했다.

5월 7일 [양력 6월 2일]<계유> 비가 내렸다. 저녁나절에 개었다.
이 날 걱정한 것은 울(蔚)이 가다가 잘 도착했는지 아닌지 였다. 앉아서 밤새도록 걱정하고 있을 적에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가 나기에 열고서 물어보니, 이영남(李英男)이 들어왔다. 불러 들여 조용히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5월 8일 [양력 6얼 3일]<갑술> 맑다.
아침에 이영남(李英男)과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봤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활 열 순을 쏘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두 번이나 구토했다. 이 날 영산 이중(李中)의 무덤을 파낸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조카 완(莞)이 들어왔다. 김효성 (金孝誠)도 왔다. 비인현감(신경징)이 들어왔다.

5월 9일 [양력 6월 4일]<을해>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이영남과 함께 서관(西關: 황해도와 평안도) 의 일을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비가 뿌리더니 새벽까지 왔다. 부안 전선에서 불이 났으나, 심하게 타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5월 10일 [양력 6월 5일]<병자> 맑다.
나라제삿날(太宗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몸도 불편하여 종일 끙끙 앓았다.

5월 11일 [양력 6월 6일]<정축> 맑다.
새벽에 앉아서 이정(李正)과 함께 이야기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비인현감 신경징(申景澄)에게 기일을 어긴 죄 로 곤장 스무 대를 쳤다. 또 순천 격군과 감관 조명(趙銘)의 죄 를 곤장쳤다. 몸이 불편하여 일찍 들어와 끙끙 앓았다. 거제현령 ?영등포만호는 이영남(李英男)과 같이 잤다.

5월 12일 [양력 6월 7일]<무인> 맑다.
이영남(李英男)이 돌아갔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김해 부사(白士霖)의 긴급보고가 왔는데 "부산에서 왜놈에게 붙었던 김필동(金弼同)의 편지(告目)도 온 것에도 풍신수길이 비록 정 사(正使)는 없다지만 부사(副使)가 그대로 있으니, 곧 화친하고 군사를 철수하려고 한다"고 했다.

5월 13일 [양력 6월 8일]<기묘> 맑다.
부산의 허낸만(許乃隱萬)의 편지(告目)가 왔는데, 가등청정이란 놈이 벌써 초10일에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갔고, 각 진의 왜놈들도 장차 철수해 갈 것이요, 부산의 왜놈은 명나라 사신을 모시고 바다를 건너 가려고 아직 그대로 머물고 있다고 했다. 이 날 활 아홉 순을 쏘았다.

5월 14일 [양력 6월 9일]<경진> 맑다.
김해부사 김사림(白士霖)의 긴급 보고 내용에도 허낸만(許乃隱 萬)의 편지(告目)와 같다. 그래서 순천부사에게 통보하여 그 로 하여금 차례로 통보하게 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결성현감 손안국(孫安國)이 나갔다.

5월 15일 [양력 6월 10일]<신사>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우수사는 오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서 앉아 있다가 들으니 한산도 뒷산 마루로 달려 올라 가 다섯 섬과 대마도를 바라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말을 타고 올라가서 이를 보니 과연 다섯 섬과 대마도가 보였다. 저녁나절에 작은 개울가로 돌아왔다. 조방장? 거제현령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진으로 돌아왔다. 어두워서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서 잤다. 밤바다에 달은 밝고 바람 한 점 없다.

5월 16일 [양력 6월 11일]<임오> 맑다.
아침에 송한련(宋漢連)의 형제가 물고기를 잡아 왔다. 충청우후 (원유남)? 홍주판관(박륜)? 비인현감(신경징)?파지도권관(송세응) 등이 왔다. 우수사(이억기)도 와서 보고 돌아갔다. 이날 밤 비가 많이 올 것 같더니 한밤에 비가 왔다. 이 날 밤 정화수(井花 水)를 마시고 싶었다.

5월 17일 [양력 6월 12일]<계미> 종일 비가 내렸다.
농사에 아주 흡족하다. 점을 쳐보니, 풍년이 들것 같다. 저녁나 절에 영등만호 조계종(趙繼宗)이 들어와 봤다. 혼자 읊조리며 수루에 기대어 있었다.

5월 18일 [양력 6월 13일]<갑신> 비가 잠깐 개긴 했으나, 바다의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체찰사의 공문이 들어왔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나가 앉았다가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 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그러나 진지를 전보다 줄어들었다고 하니 걱정되어 눈물이 난다. 봄철 누비옷을 가지고왔다.

5월 19일 [양력 6월 14일]<을유> 맑다.
방답첨사(장린)가 모친상(母喪)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우후를 가 장(假將)으로 정하여 보냈다. 활을 열 순을 쏘았다. 땀이 온 몸을 적셨다.

5월 20일 [양력 6월 15일]<병술> 맑고 바람도 없다.
대청 앞에 기둥을 세웠다. 자녁나절에 나가니 웅천현감 김충민 (金忠敏)이 와서 봤다. 양식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벼 두 휘(스무 말)을 체지(영수증)로 써 주었다. 사도첨사가 돌아왔다.

5월 21일 [양력 6월 16일]<정해> 맑다.
나가 앉았다가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5월 22일 [양력 6월 17일]<무자> 맑다.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좌우후 이몽구(李夢龜)?홍주판관 박륜(朴崙)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홍우(洪祐)가 장계를 가지고 감사(監司)에게 갔다.

5월 23일 [양력 6월 18일]<기축>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충청우후 등과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아침에 미조항첨사 장의현(張義賢)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장흥으로 부임했다. 춘절 (春節)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 날 밤 열시쯤에 땀이 예사롭지 않게 흘렀다. 이 날 저녁 새 수루의 지붕을 다 잇지 못했다.

5월 24일 [양력 6월 19일]<경인> 아침에 찌푸린 걸 보니 비가 많이 올 것 같다.
나라제삿날(文宗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저녁에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부산 허낸만(許乃隱萬)의 편지(告目)가 들어왔다. 좌도의 각 진의 왜놈들이 몽땅 철수하고, 다만 부산에만 머물러 있다고 했다. 명나라 수석 사신이 갈려서 새로 정해진 사람이 온다는 기별이 22일 부사에게 왔다고 한다. 허낸만(許乃隱萬)은 술쌀 열 말, 소금 열 말을 주고서 맘껏 정보를 잘 탐지하라고 했다. 어두워서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퍼부었다. 박옥(朴玉)? 옥지(玉只)?무재(武才) 등이 화살대 백쉰 개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5월 25일 [양력 6월 20일]<신묘> 종일 비가 내렸다.
홀로 다락 위에 앉아 있으니, 온 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우리나 라 역사를 읽어 보니 개탄할 생각이 많이 난다. 무재(武才) 등에 게 흰 굽으로 활을 바룬 것이 천 개, 흰 굽 그대로 인 것 팔백일 흔 개

5월 26일 [양력 6월 21일]<임진> 짙은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안장 있다가 충청우후 및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쏠 적에 경상수사도 와서 같이 활 열 순 을 쏘았다. 이 날 어두울 무렵 날씨가 찌는 듯했다. 땀이 줄줄 흘렀다.

5월 27일 [양력 6월 22일]<계사> 가랑비 종일 그치지 않았다.
충청우후?좌우후가 이곳에 와서 종정도를 내기했다. 이 날 어두 울 무렵에도 찌는 듯하여 답답했다. 땀이 온 몸을 적셨다.

5월 28일 [양력 6월 23일]<갑오> 궂은비가 걷히지 않았다.
전라감사(홍세공)가 파면되어 갈렸다고 한 말을 들었다. 가등청정 (加藤淸正)이 부산으로 도로 왔다고 한다. 모두 믿을 수 없다.

5월 29일 [양력 6월 24일]<을미> 궂은비가 저녁 내 내렸다.
장모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고성현령?거제현령이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5월 30일 [양력 6월 25일]<병신> 흐렸다.
곽언수(郭彦守)가 들어왔다. 영의정(류성룡) 및 상장군?우참찬 판부사정탁?지사 윤자신(尹自新)? 조사척? 신식(申湜)? 남이공(南以恭)의 편지가 왔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에게 가서 보고 종일 무척 즐기다가 돌아왔다.


병신년 6월 (1596년 6월)

6월 초1일 [양력 6월 26일]<정유> 종일 궂은비 내렸다.
저녁나절에 충청우후(원유남) 및 본영우후(이몽구)?(홍주판관)박륜(朴崙)? (비인현감)신경징(申景澄)을 불러 와서 술 마시며 이야기했다. 윤련(尹連)이 자기 포구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도양장의 콩 씨앗이 모자라거든 김덕록(金德祿)에게서 콩 씨앗을 가져 가라고 체지(영수증)을 써 주었다. 남해현령이 도임장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6월 초2일 [양력 6월 27일]<무술> 비가 그치지 않았다.
아침에 우후가 방답첨사에게 갔다. 비인현감 신경징(申景澄)이 나갔다. 이 날 아랫도리 속옷을 벗겨서 아래에다 넣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활 열 순을 쏘았다. 편지를 써서 본영으로 보냈다.

6월 초3일 [양력 6월 28일]<기해> 흐렸다.
아침에 제포만호 성천유(成天裕)가 교서에 숙배했다. 김량간(金良 看)이 농사짓는 소를 싣고 나갔다. 새벽 꿈에 어린 아이가 태어난 지 겨우 대여섯 달인데 몸소 안았다가 도로 내려 놓았다. 금갑 도만호가 와서 봤다.

6월 4일 [양력 6월 29일]<경자>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앉았는데, 가리포첨사?임치첨사?목포만호?남도포만호?충청우후 및 홍주판관 등이 왔다. 활 일곱 순을 쏘았다. 우수사가 와서 다시 과녁을 그리고 활 열두 순을 쏘았다. 술에 취하여 헤어졌다.

6월 5일 [양력 6월 30일]<신축> 흐렸다.
아침에 박옥(朴玉)?무재(武才)?옥지(玉只)) 등이 연습용 화살 백쉰 개를 만들어 바쳤다. 나가 앉았다가 활 열 순을 쏘았다. 경상우도 감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져 왔는데, 감사는 혼사가 있어 서울로 올라 갔다고 했다.

6월 6일 [양력 7월 1일]<임인> 맑다.
사도(四道)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여 활을 쏘고 술과 음식을 먹였다. 또 활쏘기 내기를 하여 승부를 가리고서 헤어졌다.

6월 7일 [양력 7월 2일]<계묘>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충청우후 등과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이 날 왜놈의 조총값을 주었다.

6월 8일 [양력 7월 3일]<갑진> 맑다.
일찍 나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남도포만호의 본포 첩이 허씨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강짜 싸움을 했다고 한다.

6월 9일 [양력 7월 4일]<을사> 맑다.
일찍 나가 충청우후?당진만호?여도만호?녹도만호 등이 활 을 쏠 때에 경상수사가 와서 같이 활 스무 순을 쏘았다. 경상 수사가 잘 맞혔다. 이 날 일찌기 종 금이(金伊)가 본영으로 갔다. 옥지(玉只)도 갔다.이 날 어두울 무렵 몹시 열이 나고 땀이 예사롭지않게 흘렀다.

6월 초10일 [양력 7월 5일]<병오> 비가 종일 쏟아지듯이 내렸다.
오정 때에 부산에서 편지가 와서 바치는데, 평의지(平義智)가 초9일에 대마도로 들어갔다고 했다.

6월 11일 [양력 7월 6일]<정미>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맑게 개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6월 12일 [양력 7월 7일]<무신> 맑다.
심한 더위가 찌는 것 같다. 충청우후 등을 불러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남해현감의 편지가 왔다.

6월 13일 [<양력 7월 8일]<기유> 맑으며, 몹시 더웠다.
경상수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가 잘 맞혔는데 김대복(金大福)이 으뜸이었다.

6월 14일 [양력 7월 9일]<경술> 맑다.

일찍 나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아침에 아들 회와 이수원 (李壽元)이 같이 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6월 15일 [양력 7월 10일]<신해>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우수사?가리포첨사?나주판관 등은 배 탈이 났는지 병으로 말미를 청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충청우후?우후?조방장 김완(金浣) 등 여러 장수들을 불러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이 날 일찌기 부산 허낸만(許乃隱萬)이 와서 왜놈의 정보를 전하기에 군량을 주어서 돌려 보냈다.

6월 16일 [양력 7월 11일]<임자> 맑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나가 앉았다가 활 열 순을 쏘았다. 저녁에 김붕만(金鵬萬)? 배승련(裵承鍊) 등이 자리를 사가지고 진에 왔다.

6월 17일 [양력 7월 12일]<계축> 맑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왔다. 활 열다섯 순을 쏘고 헤어졌다. 수 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충청수사는 그 아버지의 제삿날이라 아뢰고 거망포(巨網浦: 걸망포)로 갔다.

6월 18일 [양력 7월 13일]<갑인> 맑다.
저녁나절에 나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6월 19일 [양력 7월 14일]<을묘> 맑다.
체찰사에게 공문을 써 보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이설(李渫)에게서 황정록(黃廷祿)의 형편없는 말과 발포 보리밭에서 스무여섯 섬이 났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6월 20일 [양력 7월 15일]<병진> 맑다.
어제 아침 곡포권관 장후완(蔣後琓)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평산 포만호에게 진작 진에 도착하지 않은 까닭을 문책할 적에, 기 일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50여 일이나 물리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그 해괴하기 짝이 없어 곤장 서른 대를 쳤다. 바로 이 날 오정에 남해현령이 들어와서 숙배한 뒤에 이야기하고 서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왔다. 열다섯 순을 쏘고 안으로 들 어가 남해현감 박대남(朴大男)와 자세히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 서야 헤어졌다. 임달영(任達英)도 왔는데, 소를 무역한 발기(견적서)와 제주목사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6월 21일 [양력 7월 16일]<정사>
내일이 제삿날이므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아침에 남해현령을 불러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서 남해현령은 경상수사에게 갔다가 저녁에 되돌아와서 이야기했다.

6월 22일 [양력 7월 17일]<무오> 맑다.
할머니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남해현령과 종일 이야기했다.

6월 23일 [양력 7월 18일]<기미> 밤 두시쯤부터 종일 비가 내렸다.
남해현령과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남해현령은 경상수사에게 갔다.조 방장 및 충청우후? 여도만호? 사도첨사 등을 불러 술과 고기를 먹였다. 곤양군수 이극일(李克一)도 와서 봤다. 저녁에 남해현감이 경상수사에게서 왔다.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다. 하동현감도 왔는데 본현으로 도로 보냈다.

6월 24일 [양력 7월 19일]<경신> 초복이다. 맑다.
아침에 나가 충청우후와 함께 활 열 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 도 와서 같이 쏘았다. 남해현감은 자기 고을로 돌아갔다. 투항 해 온 왜놈 야에몬(也汝文) 등이 그의 또래 신시로(信是老: 信 次郞)를 죽이자고 청했다. 그래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남원의 김 굉이 군량을 축낸 데 대해 증빙자료를 얻으러 여기 왔다.

6월 25일 [양력 7월 20일]<신유> 맑다.
일찍 나가서 서류를 처리해 보내고서 조방장 및 충청우후?임치첨사? 목포만호? 마량첨사? 녹도만호? 당포만호?회령포만호 ?파지도권관 등이 왔다. 철전(鐵箭) 다섯 순, 편전(片箭) 세 순, 활 다섯 순을 쏘았다. 남원의 김굉이 아뢰고 돌아갔다. 이 날 어두울 무렵에 몹시 더워 땀을 흘렸다.

6월 26일 [양력 7월 21일]<임술> 바람이 세게 불고 잠시 비왔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철전(鐵箭) 및 편전(片箭)을 각 다섯 순씩 쏘았다. 왜놈 난에몬(亂汝文) 등이 말하는 자귀쟁이(耳匠木 手)의 아내에게 곤장을 쳤다. 이 날 낮에 망아지 두 필에 떨어진 편자 네 개를 갈아 박았다.

6월 27일 [양력 7월 22일]<계해> 맑다.
나가 앉았다가, 조방장 김완(金浣)?충청우후?가리포첨사?당진 포만호?안골포만호 등과 함께 철전(鐵箭) 다섯 순, 편전(片 箭) 세 순, 활 일곱 순을 쏘았다. 이 날 저녁에 송술(宋述)을 가두었다.

6월 28일 [양력 7월 23일]<갑자> 맑다.
명종의 나라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아침에 고성현령 이 달려 와서 보고하기를, "순찰사의 행차가 어제 벌써 사천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러니 오늘은 응당 소비포에 이를 것이다. 수원(壽元)이 돌아갔다.

6월 29일 [양력 7월 24일]<을축>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는 개었다.
주선(周旋)이 받아갔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공무를 본 뒤에 조방장?충청우후?나주통판과 함께 철전(鐵箭)?편전(片箭)? 활(帿)을 아울러 열여덟 순을 쏘았다. 무더위가 찌는 듯하다. 초저녁에 땀이 줄줄 흘렀다. 남해현감의 편지가 왔다. 야에몬(也汝文)은 돌아갔다.

병신년 7월 (1596년 7월)

7월 초1일 [양력 7월 25일]<병인> 맑다.
인종의 나라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우순찰사(서 성)가 진에 이르렀으나, 이 날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의 군관 라굉이 그의 장수의 말을 전하러 이곳에 왔다.

7월 초2일 [양력 7월 26일]<정묘> 맑다.
아침밥을 일찍 먹은 뒤에 경상순찰사영의 진으로 가서 순찰사와 함께 같이 이야기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새 정자로 올라가 앉 았다. 편을 갈라 활을 쏘았는데, 경상순찰사 편이 진 것이 백예 순두 점(劃)이다. 종일 몹시 즐거웠다. 등잔불을 밝히고서 돌아왔다.

7월 초3일 [양력 7월 27일]<무진> 맑다.
아침밥을 일찍 먹은 뒤에 순찰사와 도사(都事)가 이 영에 와서 활을 쏘았다. 순찰사 편이 또 진 것이 아흔여섯 점이다. 밤이 깊 어서야 돌아갔다. 아침에 체찰사의 공문이 왔다.

7월 4일 [양력 7월 28일]<기사> 맑다.
아침밥을 일찍 먹은 뒤에 경상도 영으로 가서 순찰사와 서로 만 나 이야기했다. 조금 있다가 배로 내려가 같이 타고 포구로 나가 니, 여러 배들이 밖으로 줄지어 있었다. 종일 이야기하고 선암(仙 巖) 앞바다에 이르러 닻을 걷고 출항하여 나뉘어 가면서 바라 보며 서로 읍했다. 그 길로 우수사?경상수사와 함께 같은 배로 들어왔다.

7월 5일 [양력 7월 29일]<경오> 맑다.
저녁나절에 나가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와서 같이 쏘았다.

7월 6일 [양력 7월 30일]<신미> 맑다.
일찍 나가 각 처의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저물 무렵 에 거제현령?웅천현감?삼천포권관이 와서 봤다. 이곤변(李鯤 變)의 편지도 왔다. 그 사연 속에는 입석(立石)의 잘못을 많이 말했다. 우습다.

7월 7일 [양력 7월 31일]<임신> 맑다.
경상우수사 및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아울러 와서 잠깐 활 세 쾌(貫)를 쏘았다. 종일 비는 오지 않았다. 활장이 지이(智伊)? 춘복(春卜)이 저녁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7월 8일 [양력 8월 1일]<계유> 맑다.
충청우후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체찰사의 비밀 표험(標驗?) 을 받으러 갔다고 한다.

7월 9일 [양력 8월 2일]<갑술> 맑다.
아침에 체찰사에게 갈 여러 공문에 관인을 찍어서 이전(李田)이 받아 갔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이곳에 와서 통신사가 탈 배에 풍석(風席: 돛만드는 돗자리)이 마련하기 어렵다고 여러번 말했다. 빌려 쓰고자 하는 뜻이 그 말하는 속에 보였다. 박자방 (朴自邦)을 물을 끌어들일 대나무와 서울가는 사람이 요구하는 부채만들 대나무를 얻어 올 일로 남해로 보냈다. 오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7월 10일 [양력 8월 3일]<을해> 맑다.
새벽 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 보니, 멀리 활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삭을 차서 부누는 것은 갓은 머리 위에 있는데 발길에 차 보이는 것으로서 이는 적의 괴수를 모조 리 잡아 없앨 징조라 하겠다. 저녁나절에 체찰사의 전령에, "첨지 황신이 이제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정사(正使)가 되고, 권황 이부사(副使)가 되어 가까운 시일에 바다를 건너 갈 것이니, 타고 갈 배 세 척을 정비하여 부산에다 대어 놓아라."고 했다. 경상우후가 여기 와서 흰 무늬 돗자리 백쉰 닢을 빌려 갔다. 충청우후? 사량만호? 지세포만호? 옥포만호? 홍주판관?전 적도만호 고여우(高汝友) 등이 와서 봤다. 경상수사가 달려와서 보고 하기를, "춘원도(통영시 광도면)의 왜선 한 척이 도착하여 정박하 였다."고 했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을 뽑아 보내어 샅샅이 찾아내라고 전령했다.

7월 11일 [양력 8월 4일]<병자> 맑다.
아침에 체찰사에게 행정선(通文船) 일로 공문을 써 관인을 찍 어보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바다를 건너 갈 격군과 뒤 따라 갈 것을 의논했다. 바다를 건너갈 양식이 스무세 섬인데, 새로 찧으니 스무한 섬이라 두 섬 한 말이 줄었다. 나가 앉았다가 몸소 활 세 쾌를 쏘는 것을 보았다.

7월 12일 [양력 8월 5일]<정축> 새벽에 비가 잠시 뿌리다가 곧 그치고 무지개 가 한참이나 서 있었다.
저녁나절에 경상우후 이의득(李義得)이와서 뜸 열다섯 번을 빌려 갔다. 부산으로 실어 보낼 군량 흰쌀 스무 섬?중쌀(中米) 마흔 섬을 차사원 변익성(邊翼星)과 수사(水使)의 군관 정존극(鄭存極) 이 받아갔다. 조방장이 오고, 충청우후도 와서 활을 쏘았다.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남치온(南致溫)도 왔다.

7월 13일 [양력 8월 6일]<무인> 맑다.
명나라 사신을 따라 갈 우리나라 사신들이 탈 배 세 척을 정비하 여 낮 열 시쯤에 떠나 보냈다. 저녁나절에 활 열세 순을 쏘았 다. 어두울 무렵 항복해온 왜놈들이 광대놀이를 차렸다. 장수된 사람으로서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만, 붙좇은 왜놈 들이 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못하게 하지 않았다.

7월 14일 [양력 8월 7일]<기묘> 새벽에 비가 뿌렸다.
이 날도 벌써 보름날이다. 저녁에 고성현령 조응도(趙凝道)가 와서 이야기했다.

7월 15일 [양력 8월 8일]<경진> 새벽에 비가 뿌렸다.
망궐례를 행하지 못했다. 저녁나절에 활짝 개었다. 경상수사? 전라우수사가 함께 모여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

7월 16일 [양력 8월 9일]<신사> 새벽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북쪽에 툇마루 세 칸을 만들었다. 이 날 충청도 홍주 격군으로 신평에 사는 사삿집 종 엇복(於叱卜)이 도망가다 붙잡혔으므로 목베어 내다 걸었다. 하동현감?사천현감이 왔다. 저녁나절에 활 세 쾌를 쏘았다. 이 날 어두울 무렵 바닷달이 너무도 밝아서 혼자 수루 위에 기대었다. 밤 열 시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7월 17일 [양력 8월 10일]<임오> 새벽에 비가 뿌렸다가 곧 그쳤다.
충청도 홍산에서 큰 도둑들이 일어나서 홍산현감 윤영현(尹英賢) 이 잡히고, 서천군수 박진국(朴振國)도 잡혀갔다고 한다. 바깥 도 둑도 없애지 못한 이 마당에 나라 안의 도둑들이 이러하니, 참으 로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다. 남치온(南致溫) 및 고성현령?사천 현감이 나갔다.

7월 18일 [양력 8월 11일]<계미> 맑다.
각 곳에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보냈다. 충청우후 및 홍주 반자가 충청도 도둑들의 일을 듣고 와서 아뢰었다. 저녁에 투항 해 온 왜놈 레나기(戀隱己)?야이(汝耳)?야몬(汝文) 등이 난야몬 (南汝文)을 해치려고 흉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였다.

7월 19일 [양력 8월 12일]<갑신> 맑으나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난야몬(南汝文)이 레나기(戀隱己)?야이(汝耳)?야몬(汝文) 등을 목베었다. 우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경상우후 이의득(李義得) 및 충청우후(원유남)?다경포만호 윤승남(尹承男)이 왔다.

7월 20일 [양력 8월 13일]<을유> 맑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 안하시다니 기쁘고 다행이다. 그 편에 충청도 토적(이몽학)이 이 시발(李時發)(巡按御史)의 포수에게 총맞아 즉사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7월 21일 [양력 8월 14일]<병술> 맑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거제현령?나주판관?홍주판관과 옥포만호?웅천현감?당진포만호가 왔다. 옥포에는 배 만드는데 쓸 양식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체찰사에 관계된 군량 스무 말을 주고, 웅천?당진포에는 배 만들 쇠 열다섯 근을 함께 주었다. 이 날 아들 회가 방자 수(壽)에게 곤장쳤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을 붙들어다가 뜰 아래에서 잘 타일렀다. 밤 열 시쯤에 땀이 줄 줄 흘렀다. 통신사가 청하는 표범 가죽을 가지고 올려고 배를 본영으로 보냈다.


7월 22일 [양력 8월 15일]<정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종일 나가지 않았다. 홀로 수루 위에 앉아 있었다. 종 효대(孝代) ?팽수(彭壽)가 나가서 흥양의 군량선을 탔다. 저녁에 순천 관 리의 통지문(文狀)에, "충청도 도둑들이 홍산에서 일어난 것을 곧 죽였다고 하는데, 홍주 등 세 고을이 포위를 당했다가 간신히 면했다"고 했다. 참으로 한심타. 한밤에 비가 많이 왔다. 낙안의 교대할 배가 들어왔다.

7월 23일 [양력 8월 16일]<무자> 큰 비가 내렸다.
오전 열 시쯤에 맑았다가 이따금 쏟아졌다. 저녁나절에 홍주판 관 박륜(朴崙)이 휴가를 얻어서 나갔다.

7월 24일 [양력 8월 17일]<기축> 맑다.
현덕왕후(顯德王后:文宗의 王后 權氏의 祭祀) 나라제삿날이다. 이 날 우물을 고쳐 파는데로 갔다. 경상수사도 왔다. 거제현령? 금갑도만호?다경포만호가 뒤따라 왔다. 샘줄기가 깊이 들어가 있고 물의 근원도 길다. 점심을 먹은 뒤에 돌아와 활 세 쾌(貫) 를 쏘았다. 어두울 무렵 곽언수(郭彦守)가 표범가죽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 날 밤 마음이 답답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인기척은 고요하여 앉 았다 누웠다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들었다.

7월 25일 [양력 8월 18일]<경인> 맑다.
아침에 공리(工吏)가 사냥한 것을 헤아리니 뿔이 열 개라 창고에 넣게 했다. 표범 가죽 및 꽃돗자리를 통신사에게 보냈다.

7월 26일 [양력 8월 19일]<신묘> 맑다.
이전(李筌)이 체찰사에게서 와서 표험(標驗) 세 벌을 가지고 왔다. 하나는 경상수사에게 보내고, 하나는 전라우수사에게 보냈다. 의금부의 나장이 윤승남(尹承男)(다경포만호)을 잡아 갈 일로 내려왔다.


7월 27일 [양력 8월 20일]<임진> 맑다.
저녁나절에 활터로 달려가서 길 닦는 일을 녹도만호에게 일러 주 었다. 종 경(京)이 아팠다. 다경포만호 윤승남(尹承男)이 잡혀 갔다.

7월 28일 [양력 8월 21일]<계사> 맑다.
종 무학(武鶴)?무화(武花)?박수매(朴壽每)?우롬금(于老音金) 등 이 스무엿새 날에 여기 왔다가 오늘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충청우후와 더불어 활 세 쾌를 같이 쏘았다. 철전 서른여섯 푼, 편전 예순 푼, 보통 화살 스무여섯 푼 모두 백스무 세 푼(계산 착오인 듯. 합이 백스무둘임)이었다. 종 경이 많이 앓 았다고 한다.무척 걱정이 된다. 고향 아산으로 한가위 제물을 보낼 때에 홍?윤?이 등 네 군데에 편지를 부쳤다. 밤 열시쯤에 꿈속에서까지 땀을 흘렸다.

7월 29일 [양력 8월 22일]<갑오> 맑다.
경상수사 및 우후가 와서 봤다. 충청우후도 아울러 와서 활 세 쾌를 쏘았는데, 내가 쏘던 활은 고자가 들떠서 곧 수리하라 고 하였다. 체찰사에게서 과거보는 자리를 설치한다는 공문이 와 닿았다. 저녁에 점장이의 집을 맡아 지키던 아이가 세간을 몽땅 훔쳐 달아나버렸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7월 30일 [양력 8월 23일]<을미> 맑다.
새벽에 갈몰(葛沒)이 들어왔다. 밤 꿈에 영의정과 같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아침에 이진(李珍)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춘화(春花) 등도 돌아갔다. 김대인(金大仁)은 담제( 祭)를 지낸다고 휴가를 받아갔다. 저녁나절에 조방장이 와서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임금의 분부가 두 통이 내려 오고 싸움에 쓸 말과 면의 말도 들어왔다. 지이(智伊)와 무재(武才)가 함께 왔다.)


병신년 8월 (1596년 8월)

8월 초1일 [양력 8월 24일]<병신>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충청우후?금갑도만호?목포만호?사도 첨사?녹도만호가 와서 참례했다. 저녁나절에 파지도권관 송세응(宋世應)이 돌아갔다. 오후에 활터로 가서 말을 달리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부산에 갔던 곽언수(郭彦守)가 돌아와서 통신사의 회답 편지를 전했다. 어두울 무렵 비올 징후가 많았다. 그래서비오기 전에 장만할 것들을 시켜놨다.

8월 초2일 [양력 8월 25일]<정유> 아침에 비가 몹시 왔다.
지이(智伊) 등에게 새로 만든 활을 폈다가 굽혔다가 하게 했다. 저녁나절에 광풍이 세게 일어 빗줄기는 삼대 같아서 대청 마루에 걸어 둔 바람막이가 날라가 방 마루 바람막이에 부딪쳐 한꺼번에 두 바람막이가 깨어져 조가조각 나버렸다. 아까웠다.

8월 초3일 [양력 8월 26일]<무술> 맑다가 이따금 비가 뿌렸다.
지이(智伊)에게 새로 만든 활을 펴게 했다. 조방장?충청우후가 와서 보기에 그대로 나가 활을 쏘았다. 아들들이 육냥궁(六兩弓)을 쏘았다. 이 날 저녁나절에 송희립(宋希立)과 아들들이 이름이 적힌 황득중(黃得中)?김응겸(金應謙)의 통행을 허락하는 증명서를 써서 주게 했다. 초저녁에 비가 오다가 밤 두 시쯤에야 그쳤다.

8월 초4일 [양력 8월 27일]<기해>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들 회?면?조카 완(莞) 등이 아내의 생일술을 올리려고 나갔다. 정선도 나갔다. 정사립(鄭思立)이 휴가를 받아서 갔다. 저녁나절에 수루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보느라고 술잔이 시어지는 줄도 몰랐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활 두어 순을 쏘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활 쏘는 것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몸은 얼어 터지는듯 떨려 곧 옷을 두껍게 입고 땀을 냈다. 저물 무렵 경상수사가 와서 문병하고 갔다. 밤에는 낮보다 갑절이나 아팠다. 끙끙 앓으며 밤을 지냈다.

8월 초5일 [양력 8월 28일]<경자> 맑다.
몸이 불편하여 나가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이의득(李義得) 가리 포첨사가 와서 봤다.

8월 초6일 [양력 8월 29일]<신축>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조방장 김완(金浣)?충청우후?경상우후 등이 문병을 왔 다. 당포만호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다고 와서 알렸다. 경 상수사 및 우수사 등이 와서 봤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들어왔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밤에 비가 많이 왔다.

8월 초7일 [양력 8월 30일]<임인>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서울에 편지를 썼다. 이 날 밤 땀이 위?아래 두 옷을 적셨다.

8월 초8일 [양력 8월 31일]<계묘>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박담동(朴淡同)이 서울로 올라가는데 혼수를 승지 서성(徐 )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강희로(姜熙老)가 이곳에 와서 남해현령의 병이 차즘 나아진다고 했다. 그와 함께 밤이 되도록 이야기했다. 중 의능(宜能)이 날삼(生麻) 백스무 근을 가져와서 바쳤다.

8월 9일 [양력 9월 1일]<갑진>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중 수인(守仁)에게서 날삼(生麻) 삼백서른 근을 받아들였다. 하동현감이 종이를 다시 두드려 만든다고 도련지 스무 권, 주 지 서른두 권, 장지 서른한 권을 김응겸(金應謙)? 곽언수(郭彦守) 등에게 주어 보냈다. 마량첨사 김응황(金應璜)이 직무평가에서 하등급(居下)을 맞고 나갔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서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밤 열 시쯤 되니 땀이 흘렀다.

8월 초10일 [양력 9월 2일]<을사> 맑다.
아침에 충청우후가 문병을 왔다가 그대로 조방장과 함께 같이 아 침식사를 했다. 아침에 송한련(宋漢連)에게 날삼(生麻) 마흔 근을 그물을 만들도록 주어서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한참동안 이나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저녁나절에 두 조방장 및 충청우 후를 불러다가 상화(床花)를 만는데 이를 같이 했다. 저녁에 체 찰사에게 보낼 공문에 관인을 찍었다. 어두워지니 달빛은 비단같고, 나그네 회포는 만갈래여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밤 열 시쯤에 방에 들어갔다.

8월 11일 [양력 9월 3일]<병오> 맑으나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체찰사에게 갈 여러 공문에 관인을 찍어 내보냈다. 조 방장 배흥립(裵興立)과 함께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 저녁나절에 그와 같이 활터(射場)에 가서 말달리는 것을 구경하고서 저 물 무렵에 영으로 돌아왔다. 초저녁에 거제현령이 달려와서 보 고한 내용에, "왜적서 한 척이 등산(登山: 마산시 합포구 진동 면)에서 송미포(松未浦: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로 들어온다."고 했다. 밤 열 시쯤에 또 보고하기를, "아자포(阿自浦)로 옮겨 대었 다."고 했다. 배를 정하여내어 보낼 즈음에 또 보고하여 말하기를, "견내량을 넘어갔다."고 했다. 그래서 복병장이 찾아서 잡았다.

8월 12일 [양력 9월 4일]<정미>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어 동쪽으로 가는 배는 도저히 오갈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안부를 알지를 못했으니, 몹시도 답답하 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땀이 두겹 옷을 적셨다.

8월 13일 [양력 9월 5일]<무신> 맑다가 흐리며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충청우후와 함께 활을 쏘았다. 이 날 밤 땀이 흘러 등을 적시었다. 아침에 우(禹)씨가 곤장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장사지낼 물건을 약간 보냈다.


8월 14일 [양력 9월 6일]<기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샛바람이 계속 불어 벼가 상했다고 한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과 충청우후와 같이 이야기를 중지시켰는데 땀나지는 않았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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