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난중일기 - 8

영지니 2008. 4. 13. 19:21

8월 15일 [양력 9월 7일]<경술> 새벽에 비가 내렸다.
망궐례를 못했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경상수사 및 두 조방 장과 충청우후? 경상우후? 가리포첨사? 평산포만호 등 열아홉 명의 여러 장수들이 모여서 이야기했다. 비가 종일 그치지 않았다. 초저녁이 지나니 마파람이 불면서 비가 많이 왔다. 밤 두 시 쯤까지 세 번이나 땀을 흘렸다.

8월 16일 [양력 9월 8일]<신해> 잠깐 맑다가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강희로(姜熙老)가 남해로 돌아갔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누워 끙끙 앓았다. 저녁에 체찰사가 진주성(晉城)에 왔다는 공문이 왔다. 다시 비 갠 뒤의 달빛이 너무 밝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밤 열 시쯤에 누워서 가랑비가 또 내리다가 잠시후에 그치는 걸 봤다. 땀이 흘렀다.

8월 17일 [양력 9월 9일]<임자> 맑고 흐림이 서로 섞여서 개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했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충청우후?거제현령이 아울러 와서 봤다. 이 날 샛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체찰사 앞으로 사람을 찾으러 내 보내었다.

8월 18일 [양력 9월 10일]<계축> 비가 오락가락 했다.
한밤 자정에 죄인에게 특사를 내리는 조칙문을 가지고 온 차사원 구례현감(이원춘)이 들어왔다. 땀을 흘리는게 예삿 일이 아니다.

8월 19일 [양력 9월 11일]<갑인> 흐리다가 맑다가 했다.
새벽에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죄인에게 특사내리는 조 칙문에 숙배하고 그대로 그들과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구례현 감이 아뢰고 돌아갔다. 송의련(宋義連)이 본영에서 아들 울(蔚)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다 행이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과 금갑도만호가 이곳에 와서 이야 기했다. 초저녁부터 한밤까지 땀에 젖었다. 어두울 무렵 자귀쟁이 (耳匠) 옥지(玉只)가 재목에 치어서 중상을 입었다고 보고 받았다.

8월 20일 [양력 9월 12일]<을묘> 샛바람이 세게 불다.
새벽에 전선(戰船)을 만들 재목을 끌어내리는 일로 우도군사 삼 백 명, 경상도군사 백 명, 충청도군사 삼백 명, 전라좌도군사 삼 백아흔 명을 송희립(宋希立)이 거느리고 갔다. 늦은 아침에 조카 봉?해와 아들 회?면?조카 완(莞)과 최대성(崔 大晟)?윤덕종(尹德種)?정선 등이 들어왔다.

8월 21일 [양력 9월 13일]<병진>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가서 아들들에게 화살 쏘는 연습 과 말달리며 활을 쏘는 것을 시켰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조 방장 김완(金浣)과 충청우후가 아울러 왔다. 같이 점심을 먹고 저물어서 돌아갔다.

8월 22일 [양력 9월 14일]<정사> 맑다.
외조모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8월 23일 [양력 9월 15일]<무오> 맑다.
활터에 가 보았다. 경상수사도 와서 같이 보았다.

8월 24일 [양력 9월 16일]<기미> 맑다.

8월 25일 [양력 9월 17일]<경신> 맑다.
우수사?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8월 26일 [양력 9월 18일]<신유>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사천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충청우후와 함께 종일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8월 27일 [양력 9월 19일]<임술> 맑다.
일찍 길을 떠나 사천현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그대로 진주성(晉城)으로 가서 체찰사(이원익)를 뵙고 종일 의논했다. 저물 무렵에 진주목사(나정언)의 처소로 돌아와서 잤다. 김응서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이 날 어두울 무렵 이용제(李用濟) 가 들어왔는데, 역적 도당의 편지를 지녔었다.

8월 28일 [양력 9월 20일]<계해> 맑다.
이른 아침에 체찰사 앞으로 가서 종일 여쭙고 의논하여 결정하 고, 초저녁이 지나서 진주목사의 처소로 돌아왔다. 진주목사와 함 께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청생(靑生)도 왔다.

8월 29일 [양력 9월 21일]<갑자> 맑다.
일찍 떠나 사천현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은 뒤에 그대로 가서 선 소리(사천시 용남면 선진리)에 이르렀다. 고성현령(조응도)도 왔 다. 삼천포권관과 이곤변(李鯤變)이 술을 가지고 뒤따라 도착했 다. 밤들도록 같이 이야기하고 구라량(仇羅梁)에서 잤다.


병신년 閏8월 (1596년 윤8월)

윤8월 초1일 [양력 9월 22일]<을축> 맑다.
일식(日蝕)을 했다. 이른 아침에 비망(飛望) 밑에 이르러 이곤변 (李鯤變) 등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서로 헤어졌다. 저물어 서 진중에 이르니, 우수사?경상수사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수사와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했다.

윤8월 2일 [양력 9월 23일]<병인> 맑다.
여러 장수들이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우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경상수사와 함께 활터 정자 마루로 갔다.


윤8월 3일 [양력 9월 24일]<정묘> 맑다.

윤8월 4일 [양력 9월 25일]<무진> 비가 내렸다.
이 날 밤 열 시쯤에 땀을 흘렸다.

윤8월 5일 [양력 9월 26일]<기사> 맑다.
활터 마루에 가서 아이들(아들들을 말함)이 말달리고 활쏘는 것 을 구경했다. 하천수(河天壽)가 체찰사 앞으로 갔다.

윤8월 6일 [양력 9월 27일]<경오>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경상수사 및 우수사와 함께 활터 마루로 가서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저물어서 돌아왔다. 이 날 밤 잠시 땀을 흘렸다. 방답첨사가 진에 이르렀다.

윤8월 7일 [양력 9월 28일]<신미> 맑다.
아침에 아산의 종놈 상시(向是)가 들어왔다. 가을보리는 소출이 마흔석 섬이고, 봄보리는 서른다섯 섬이며, 물고기로 바꾼 쌀은 모두 열두 섬 네 말인데, 또 일곱 섬 열 말이 나고, 또 네 섬이 났다고 했다. 이 날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고 솟장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윤8월 8일 [양력 9월 29일]<임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마루로 가서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구경했다. 광양현감?고성현령이 시험관으로서 들어왔다. 하천수(河天 壽)가 진주에서 왔다. 수하에 부리는 병졸 림정로(林廷老)가 휴가를 받아 나갔다. 이 날 밤 땀을 내었다.

윤8월 9일 [양력 9월 30일]<계유> 맑다.
아침에 광양현감이 교서(敎書)에 숙배했다. 조카 봉( )?아들 회 ( ) 및 김대복(金大福)이 교지(官敎)에 숙배하고서 그대로 이 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밤에 우수사?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윤8월 10일 [양력 10월 1일]<갑술> 맑다.
이 날 새벽에 과거 초시(初試)를 보였다. 저녁나절에 면( )이 쏜 것은 모두 쉰다섯 보이고, 봉()이 쏜 것은 모두 서른다섯 보이고, 해( )가 쏜 것은 모두 서른 보이고, 회( )가 쏜 것은 모두 서른다섯 보이고, 완(莞)이 쏜 것은 스무다섯 보라고 했다. 진무 성(陳武晟)이 쏜 것은 모두 쉰다섯 보여서 합격하였다. 어두울 무렵 우수사?경상수사?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같이 와서 밤 열 시쯤에 헤어져 돌아갔다.

윤8월 11일 [양력 10월 2일]<을해> 맑다.
체찰사를 기다릴 일로 출항하여 당포에 이르니, 초저녁에 체찰사 에게 문안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14일에 떠난다."고 하였다.

윤8월 12일 [양력 10월 3일]<병자> 맑다.
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열 시쯤에 어머니 앞에 이르니, 흰머리 카락이 에부수수하신데, 나를 보고는 놀라 일어나셨다. 기력은 숨 이 곧 끊어질 듯하여 아침 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 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리면서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윤8월 13일 [양력 10월 4일]<정축> 맑다.
아침 식사를 곁에서 모시고 드시게 하니 대단히 기뻐하시는 빛이다. 저녁나절에 하직인사를 여쭙고 본영으로 왔다. 오후 여섯 시 쯤 작은 배를 타고 밤새도록 노를 바삐 저었다.

윤8월 14일 [양력 10월 5일]<무인> 맑다.
새벽에 두치(豆恥:하동읍 두곡리)에 이르니, 체찰사와 부찰사가 어제 벌써 도착하여 잤다고 한다. 뒤미처 점검하는 곳으로 가서 소촌찰방을 만나고 일찍 광양현에 이르렀다. 지나온 지역이 한결 같이 쑥대밭이 다 되어 그 참상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임시로나마 전선 정비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마 음을 풀어 주어야겠다.

윤8월 15일 [양력 10월 6일]<기묘> 맑다.
일찍 떠나 순천에 이르니 체찰사 일행이 순천부 청사에 들어갔다 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정사준(鄭思竣)의 집에서 묵었다. 순찰사도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아들들이 참시관이 되었다고 들었다.

윤8월 16일 [양력 10월 7일]<경진> 맑다.
이 날은 그대로 거기서 머물렀다.

윤8월 17일 [양력 10월 8일]<신사> 맑다.
저녁나절에 낙안으로 향하여 그 군에 이르니 이호문(李好問) ?이지남(李智男) 등이 와서 보고 고치기가 어려운 폐단이 오로지 수군에 있다고 진술했다. 종사관 김용(金涌)가 서울로 올라갔다.

윤8월 18일 [양력 10월 9일]<임오> 맑다.
일찍 떠나 양강역(陽江驛)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나서 산성(고 흥군 남양면 대곡리)으로 올라가 멀리 바라보며 각 포구와 여러 섬들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었다. 그 길로 흥양(고흥읍)으로 향했 다. 저물 무렵에 흥양현에 이르러 향소청(鄕所廳)에서 잤다. 어두 워서 이지화(李知和)가 제 물건을 뽐내려고 거문고를 가지고 왔다. 영(英)도 와서보고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윤8월 19일 [양력 10월 10일]<계미> 맑다.
떠나서 녹도(고흥군 도양면 녹도)로 가는 길에 도양(도덕면 도덕리)의 둔전을 살펴 보았다. 체찰사는 매우 기뻐하는 빛이 많았다. 녹도에서 잤다.

윤8월 20일 [양력 10월 11일]<갑신> 맑다.
일찍 떠나 배를 타고 체찰사와 부찰사와 함께 같이 앉아 종일 군사 일을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그 길로 장흥부에 이르렀다. 나는 관청의 동헌에서 잤다. 김응남(金應男)이 와서 봤다.

윤8월 21일 [양력 10월 12일]<을유> 맑다.
그대로 머물러 자는데 정경달(丁景達)이 와서 봤다.

윤8월 22일 [양력 10월 13일]<병술> 맑다.
저녁나절에 병영(해남군 병영면 성남리 병영)에 몸을 던져 원균과 서로 만나 보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했다.

윤8월 23일 [양력 10월 14일]<정해> 맑다.

윤8월 24일 [양력 10월 15일]<무자>
나는 부찰사(한효순)와 같이 가리포(완도군 완도읍 군내리)로 갔 더니, 우우후 이정충(李廷忠)도 먼저 와 있었다. 남쪽 망대(남망봉 해발 150m)로 같이 올라가니, 좌우에는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한 도(一道)의 요충지이 다. 그러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진(해 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겨 합치기로 했다. 병영에 이르러서는 원균의 흉한 행동을 적지 않았다.

윤8월 25일 [양력 10월 16일]<기축>
일찍 떠나 이진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곧 해남으로 갔다. 도중에 김경록(金景祿)이 술을 차고 와서 봤다. 어느 결에 날이 저물어 횃불을 밝히고 가니, 밤 열 시께에야 해남현에 이르렀다.

윤8월 26일 [양력 10월 17일]<경인> 맑다.
일찍 떠나 우수영(해남군 문내면)에 이르렀다. 나는 곧 태평정(太平亭)에서 자고서 우후와 함께 이야기했다.


윤8월 27일 [양력 10월 18일]<신묘> 맑다.
체찰사가 진도에서 영(우수영)으로 들어왔다.

윤8월 28일 [양력 10월 19일]<임진> 비가 조금 내렸다.
바로 고쳐 놨다.

윤8월 29일 [양력 10월 20일]<계사> 비가 조금 내렸다.
이른 아침에 남여역(男女驛:해남군 황산면 남리리)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은 뒤에 해남현에 이르렀다. 소국진(蘇國秦)을 본영(전라좌수영)으로 보냈다.


병신년 9월 (1596년 9월)

9월 초1일 [양력 10월 21일]<갑오> 비가 뿌렸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일찍 떠나 석제원(강진군 성전면 성전리)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은 뒤에 영암에 이르러 향사당(鄕舍 堂)에서 잤다. 정랑 조팽년(趙彭年)이 와서 봤다. 최숙남(崔淑男) 도와서 봤다.

9월 초2일 [양력 10월 22일]<을미> 맑다.
영암에서 머물렀다.

9월 3일 [양력 10월 23일]<병신> 맑다.
아침에 떠나 나주의 신원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고 나서 나주판 관을 불러다가 고을의 일들을 물었다. 저물 무렵에 나주에 이르 렀다. 별관의 종 억만(億萬)이 와서 신원(新院)에서 알현했다.

9월 4일 [양력 10월 24일]<정유> 맑다.
나주에서 머물렀다. 어두울 무렵 목사(李福男)가 술을 가지고 와서 권했다. 일추(一秋)도 술잔을 가져 왔다. 이 날 아침에 체찰사와 함께 문묘에 절했다.

9월 5일 [양력 10월 25일]<무술> 맑다.
나주에서 머물렀다.

9월 6일 [양력 10월 26일]<기해> 맑다.
먼저 무안의 일로 가겠다고 체찰사에게 보고하고 일을 떠났다. 고막원(古莫院:나주시 다시면 고막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나주감목관 나덕준(羅德駿)이 뒤쫓아와서 서로 만났다. 이야기 하는 중에 강개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오랬동안 이야 기하다가 저물어서 무안에 이르러 잤다.

9월 7일 [양력 10월 27일]<경자> 맑다.
감목관 나덕준(羅駿) 및 무안현감(남언상) 함께 민폐에 관한 이야 기했다. 한참 있다가 정대청(鄭大淸)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 서 그를 청하여 앉아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떠나 다경포(무안군 운남면 성내리)에 이르러, 영광군수와 함께 밤 열 시쯤이나 되게 이야기했다.

9월 8일 [양력 10월 28일]<신축> 맑다.
나라제삿날(世祖의 祭祀)인데도 오늘 새벽에 조반(早飯)에 고기를 올려 놓았다. 그래서 나는 먹지도 않고 도로 내놓았다. 아 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서 감목관에 이르니 감목관과 영광군 수는 같이 있었다. 국화 떨기 가운데로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저물어서 동산원(東山院:무안군 현경면 옹산원;瓮山院) 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말을 재촉하여 임치진(해제면 임수리)에 이르니, 이공헌(李公獻)의 딸 여덟 살짜리 아이와 그 사촌의 계집종 수경(水卿)이 같이 와서 알현했다. 이공헌(李公獻)을 곰곰히 생각하니 참혹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수경(水卿)은 곧 이염(李琰)의 집에서 내다 버렸는데,(이공헌이) 얻어다가 기른 아이이다.

9월 9일 [양력 10월 29일]<임인> 맑다.
일찍 일어나서 임치첨사 홍견(洪堅)을 불러 방비책을 물었다. 아침 식사를 한 뒤에 뒷성(後城)으로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고 동 산원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뒤에 함평현에 이르렀다. 도중 에 한여경(韓汝璟)을 만났으나, 말위에서는 만나 보기가 어려우므 로 타일러서 함평으로 들어갔다. 함평현감은 경차관을 마중하 러 나갔다고 했다. 김억창(金億昌)도 같이 함평에 왔다.

9월 10일 [양력 10월 30일]<계묘> 맑다.
몸도 노곤하고 말도 힘들 것 같아서 함평에 머물러 잤다. 아침 식사를하기 전에 무안의 정대청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고을 유생도 많이 들어와 폐단된 일을 진술했다. 저녁에 도사(都事) 가 들어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밤 열 시쯤에 헤어져 나갔다.

9월 11일 [양력 10월 31일]<갑진> 맑다.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영광으로 갔다. 도중에 신경덕(辛慶德)을 만나 잠깐 이야기하고 영광에 이르니, 영광군수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들어와 같이 이야기했다. 이 때 산월(山月)도 와서 보고 술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누명을 벗길 수 없었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을사> 바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 (女眞)과 잤다.

9월 13일 [양력 11월 2일]<병오> 맑다.
이중익(李仲翼) 및 이광축(李光軸)도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이중익(李仲翼)이 말을 많이 하다가 막히어서 급하게 되니 옷을 벗고서 그에게 관여하며 종일 이야기했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정미>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무신>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번 관계했다.

9월 16일 [양력 11월 5일]<기유> 맑다.
체찰사 일행이 고창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장성에 이르러서야 잤다.

9월 17일 [양력 11월 6일]<경술> 맑다.
체찰사와 부찰사는 입암산성(立巖山城:정주시 입암면 임암산 해발 655m)으로 가고, 나는 혼자 진원현(장성군 진원면 석전리 진원)에 이르러 진원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종사관도 왔다. 저물어서 관청 안으로 들어가니 두 조카딸이 나와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못보았던 감회를 풀고 도로 작은 정자로 나가 진원현감 및 여러 조카들과 밤들도록 같이 이야기했다.

9월 18일 [양력 11월 7일]<신해> 비가 조금 내렸다.
식사를 한 뒤에 광주에 이르러 광주목사(최철견)와 이야기했다. 비가 많이 오더니, 한밤에는 달빛이 대낮 같았다. 밤 두 시쯤에 비바람이 세게 일었다. 영의정

9월 19일 [양력 11월 8일]<임자>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봉( )?해( )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밤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오후에 능성현령(李繼令)이 들어와서 곳 간을 봉하고 광주목사를 체찰사가 파면시켰다고 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가 와서 잤다.

9월 20일 [양력 11월 9일]<계축>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각가지 사무보는 색리들의 죄를 논란했다. 저녁나절에 광주목사를 보고 길을 떠나려 할 즈음에 명나라 사람 두 명이 이 야기 하자고 청하므로 술을 먹였다. 길을 떠났으나 종일 비가 내려 멀리 갈 수가 없어 화순에 이르러 잤다.

9월 21일 [양력 11월 10일]<갑인> 개다가 비오다가 했다.
일찍 능성(화순군 능주면)에 이르러 최경루(最景樓)에 올라가 연 주산(連珠山)을 바라보았다. 이 고을 원이 술을 청했다. 그래서 잠깐 취하고서 헤어졌다.

9월 22일 [양력 11월 11일]<을묘> 맑다.
아침에 각가지의 죄를 논란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이양원(화순 군 이양면 이양리)에 이르니,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먼저 와 있었 다. 내가 가는 것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청하므로 그와 함께 이야 기했다. 저물어서 보성군에 이르니 몸이 몹시 고단하여 잤다.

9월 23일 [양력 11월 12일]<병진> 맑다.
머물렀다. 나라제삿날(太祖의 神懿王后 韓氏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9월 24일 [양력 11월 13일]<정사> 맑다.
일찍 떠나 병사 선거이(宣居怡)의 집에 이르니, 선거이의 병이 매 우 중태였다. 염려된다. 저물어서 낙안에 이르러 잤다.

9월 25일 [양력 11월 14일]<무오> 맑다.
색리 및 선중립(宣仲立)의 죄를 논란했다. 순천에 이르러 순천 부사와 함께 같이 이야기했다.

9월 26일 [양력 11월 15일]<기미> 맑다.
일이 있어 더 머물렀다. 저녁에 순천부의 사람들이 소고기와 술을 차려 놓고 나오기를 청했다. 굳이 사양했으나 부사(府使)의 간청으로 잠깐 나가 마시고서 헤어졌다.

9월 27일 [양력 11월 16일]<경신> 맑다.
일찍 떠나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9월 28일 [양력 11월 17일]<신유> 맑다.
남양 아저씨의 생신이라 본영으로 왔다.

9월 29일 [양력 11월 18일]<임술>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동헌으로 나가 공문에 관인을 찍었다. 종일 앉아서 사무를 봤다.

9월 30일 [양력 11월 19일]<계해> 맑다.
옷 담아 둔 농을 꺼 내어 둘은 곰내로 보내고, 하나만 본영(여수) 에 남겨 두었다. 저녁에 선유사(宣諭使)의 군관 신탁(申省)이 와서 군사들을 위하여 위로연을 베풀 날짜를 말하였다.


병신년 10월 (1596년 10월)

10월 초1일 [양력 11월 20일]<갑자> 비가 오고 바람이 세게 불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고 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신 사과(司果)가 임시로 살고있는 집에 들어가서 몹시 취하여서 돌아왔다.

10월 초2일 [양력 11월 21일]<을축>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배를 다니게 할 수가 없었다. 청어 잡은 배가 들어왔다.

10월 3일 [양력 11월 22일]<병인> 맑다.
배를 돌려 어머니를 모시고 일행과 더불어 배를 타고 본영(여 수)으로 돌아와 종일토록 즐거이 뫼시었다. 이 날도 다 갔는데, 흥양현감이 술을 가지고 왔다.

10월 4일 [양력 11월 23일]<정묘> 맑다.
식사를 한 뒤에 객사 동헌에 앉았다가 일어나 종일 공무를 봤 다. 저녁에 남해현령이 오면서 그 첩을 데리고 왔다.

10월 5일 [양력 11월 24일]<무진> 흐렸다.
남양 아저씨 집안에 제사라 일찍 부르기에 갔다가 왔다. 남해 현령과 함께 이야기했다. 비 올 징조가 많다. 순천부사는 석보창 (여천시 석창)에서 잤다.

10월 6일 [양력 11월 25일]<기사> 바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이 날은 잔치를 차리지 못하고 이튿날로 물리었다. 저녁나절에 흥양현감?순천부사가 들어왔다.

10월 7일 [양력 11월 26일]<경오> 맑고 따사했다.
일찍 수연을 베풀고 종일토록 즐기니 참으로 다행이다. 남해현감 은 그 선대의 제삿날이어서 먼저 돌아갔다.

10월 8일 [양력 11월 27일]<신미> 맑다.
어머니께서 몸이 편안하시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순천부사와 작 별의 잔을 나누고 보냈다.

10월 9일 [양력 11월 28일]<임신> 맑다.
공문을 처리해 보냈다. 종일 어머니를 모셨다. 내일 진중(한산 도?)으로 들어갈 일로 어머니께서는 많이 서운한 빛이었다.

10월 10일 [양력 11월 29일]<계유> 맑다.
어머니께 절하고 하직했다. 한밤 한 시쯤에 뒷방으로 갔다가 밤 두 시쯤에 수루의 방으로 돌아왔다. 정오에 아뢰고 나갔다. 오후 두 시쯤에 배를 타고 바람따라 돛을 달고 항해하면서 밤새도록 노를 재촉하여 왔다.

10월 11일 [양력 11월 30일]<갑술> 맑다.

(** 1596년(병신) 10월 11일 뒷 장에 7장에 걸쳐 나와 있는 자료이다.)

10월 초9일 진무성(陳武晟)이 청어 4300 두름을 싣고 왔다. 1596년(병신) 9월 29일 을미(임진년 기간에 9월 29일의 간지가 을 미인 날이 없음)에 대를 베어서 다시 계산하니 91부가 창고안에 들 어 있었다. 1596년(병신) 5월 23일에 상품의 큰 대 30개, 다음 대 60개, 중치 대 60개 모두 150개를 박옥?옥지?무재 등이 받아다 만들어 바쳤 다. 계납할 물건 안에 기름 먹인 종이 비옷 100자, 기름 먹인 종이 20자, 만장할 종이 100자, 보통 종이 15권, 흰종이 2권. 1596년(병신) 3월 초6일에는 육냥궁(六兩弓) 6장에서 뽕나무로 만 든 활 6장에서 1장은 울궁(蔚弓)이고 세궁(細弓)이 2장이다. 1596년(병신) 9월(日은 月의 오기인 듯) 30일(日이 없음) 온전한 것 안에서 공히 109이고 쓸만한 것이 50으로 모두 3통 29이다. 2월 26일 큰대, 중치 대로 상품이 57개이다. 고기를 잡아서 양식을 대는 데, 임달영(任達英)은 제주의 농사짓는 소를, 송한련(宋漢連) ?갑사 송한(宋漢)? 송성(宋晟)? 이종호(李宗浩)? 황득중(黃得中)? 오수(吳壽)? 박춘양(朴春陽)? 류세충(柳世忠)? 강소작지(姜所作只)? 강구지(姜仇之)에게 아울러 포상하였다. 계향유사로 곡식바치는 참봉(종9품) 조응복(曺應福)?벼슬하지 않은 선비 하응문(河應文)? 류기룡(柳起龍)이 같이 힘을 썼고, 정(正) 김덕린(金德麟), 대구훈 정 김계신(金繼信), 창신도 감목.

11월기록에없음
12월기록에없음

정유년

1월2월3월기록에없음

정유년 4월 (1597년 4월)

4월 초1일 [양력 5월 16일]<신유> 맑음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더 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 (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봤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이순신(李純信)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 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류성룡)이 종을 보내고 판부사 정탁 (鄭琢)?판서 심희수(沈禧壽)?우의정 김명원(金命元)?참판 이 정형(李廷馨)?대사헌 노직(盧稷)?동지 최원(崔遠)?동지 곽영 (郭嶸)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4월 2일 [양력 5월 17일]<임술> 종일 비가 내렸다.
여러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방업(方業)이 음식을 매우 풍성하게 차려 왔다. 필공을 불러 붓을 매게 했다. 어두울 무렵 성으로 들어가 영의정과 밤 깊도록 이야기하다가 헤어져 나왔다.

4월 3일 [양력 5월 18일]<계해> 맑다.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빈(李士贇)?서리 이수영 (李壽永)?나장 한언향(韓彦香)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의왕시 인덕원)에서 말을 쉬게 하고 조용히 누워서 쉬 었다.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서, 경기 체찰사의 수하에서 심부 름하는 병졸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집에서 잤다. 신복룡(愼伏龍) 은 나의 임시로 사는 집에 이르러 내 지나가는 걸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순천부사 류영건(柳永健)이 나와서 봤다.

4월 4일 [양력 5월 19일]<갑자> 맑다.
일찍 길을 떠나, 독성(수원시 태안읍 양산리)아래에 이르니, 반자 (判刺) 조발(趙撥)이 술을 준비해 놓고 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 었다. 취하도록 마시고 길을 떠나 바로 진위구로(평택군 진위 면 봉남리)를 거쳐 냇가에서 말을 쉬게 했다. 오산에 이르러 황 천상(黃天祥)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황천상(黃天祥)이라는 사람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니, 고마울 뿐이 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낸손(李內隱孫)의 집에 투숙했는데, 주 인이라는 사람이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자는 방이 몹시 좁은 데 따뜻하게 불까지 때어 땀이 흘렀다.

4월 5일 [양력 5월 20일]<을축> 맑다.
해가 뜨자, 길을 떠나 바로 선산(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이르렀다. 나무들은 두번이나 들불이 나서 불에 탄 꼴을 차마 볼 수 없 었다. 무덤 아래에서 절하며 곡하는데 한참동안 일어나지 않았 다. 저녁이 되어 내려와 외가에 와서 사당에 절했다.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 곡하며 절 했다. 남양 아저씨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물 무렵 우리집에 이르러 장인?장모님의 신위 앞에 절하고 곧 작은 형님 (堯臣)과 여필(禹臣)의 처 제수의 사당에 다녀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4월 6일 [양력 5월 21일]<병인> 맑다.
멀고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오랫동안 막혔던 정 을 푹 풀고 갔다.

4월 7일 [양력 5월 22일]<정묘> 맑다.
금오랑(이사빈)이 아산현에서 오므로, 나는 나가 그윽히 대접했다. 홍찰방? 이별좌? 윤효원(尹孝元)이 와서 봤다. 금오랑은 변흥백(卞興伯)의 집에서 잤다.

4월 8일 [양력 5월 23일]<무진> 맑다.
아침에 자리를 깔고 남양 아저씨를 곡하고 상복을 입었다. 저 녁나절에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가서 이야기했다. 강설장(姜楔 長)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므로 나는 가서 문상했다. 그 길로 홍석 견(洪石堅)을 집에 들렀다. 저녁나절에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러 금부도사에게 접대했다.

4월 9일 [양력 5월 24일]<기사> 맑다.
동네 사람들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멀리 가는 길을 위로해 주므로 정의상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시니, 매우 취하여서 헤어 졌다. 홍군우(洪君遇)는 노래부르고 이별좌도 노래불렀다. 나는 노래를 들어도 쬐끔도 즐겁지 않았다. 금부도사는 잘 마시면서도 실수함이 없었다.

4월 10일 [양력 5월 25일]<경오>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러 도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홍찰방?이별좌 형제?윤효원(尹孝元) 형제가 와서 봤다. 이언길(李彦吉)?허제(許霽)가 술을 가지고 왔다.



4월 11일 [양력 5월 26일]<신미> 맑다.

새벽 꿈이 매우 번거로워 다 말할 수가 없다. 덕(德)이를 불러서 대충 말하고 또 아들 울(蔚)에게 이야기했다. 마음이 몹시 불안 하다.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 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을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 갔다.

4월 12일 [양력 5월 27일]<임신> 맑다.
종 태문(太文)이 안흥량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하는데, "어머니께 서는 숨이 곧 끊어질 듯해도 초9일에 위?아래 모든 사람이 모두 무사히 안흥량(서산시 근흥면 안흥)에 도착하였다."고 했다. 법성포(영광군 법성면 법성리)에 이르러 배를 대어 잘 적에 닻이 끌려 떠내려 가서 배에 머물며 엿새나 서로 떨어졌다가 탈없이 만났다고 했다. 아들 울(蔚)을 먼저 바닷가로 보냈다.

4월 13일 [양력 5월 28일]<계해> 맑다.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를 마중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흥찰방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蔚)이 종 애수 (愛壽)를 보내면서 "아직 배오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또 들으니, "황천상(黃天祥)이 술병을 들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왔다."고 한다. 흥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 갯바위(아산시 염치읍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대강 적다.

4월 14일 [양력 5월 29일]<갑술> 맑다.
홍찰방?이별좌가 들어와 곡하고 관을 장만했다. 관의 재목은 본 영에서 마련해 가지고 온 것인데, 조금도 흠난 곳이 없다고 했다.

4월 15일 [양력 5월 30일]<을해> 맑다.
저녁나절에 입관했다. 오종수(吳終壽)가 점심으로 호상해 주니, 뼈가 가루로 될지언정 잊지 못하겠다. 관에 따른 것에는 아무런 유감이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천안군수가 들어와 치행해 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마음을 다하여 상복 만드는 일 등을 돌보 아 주니, 고마운 말을 어찌 다 하랴!

4월 16일 [양력 5월 31일]<병자> 궂은 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

4월 17일 [양력 6월 1일]<정축> 맑다.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李秀榮)이 공주에서 와서 가자고 다그친다.

4월 18일 [양력 6월 2일]<무인>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머리를 내놓지 못하고,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今守)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저녁나절에 계 원들 중에서 나 있은 곳에 모여 와서 곗일을 논의하고서 헤어졌다.

4월 19일 [양력 6월 3일]<기묘>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아뢰었다. 금 곡(연기군 광덕면 대덕리)의 강 선전의 집앞에 이르니 강정(姜晶) ?강영수(姜永壽)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했다. 그 길로 보산 원(연기군 광덕면 보산원리)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냇가에 와서 말에서 내려 쉬었다 갔다. 임천군수 한술(韓述)은 중시(重試)보러 서울로 가던 중에 앞 길 을 지나다가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조문하고 갔다. 아 들 회?면?울(蔚), 조카 해?분(芬)?완(莞)과 주부 변존서(卞存緖)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 왔다. 원인남(元仁男)도 와 서 보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공주시 장기면 신관리) 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4월 20일 [양력 6월 4일]<경진> 맑다.
아침에 공주 정천동에서 밤을 먹고, 저녁에 니산(공주시 노성 면 읍내리)에 가니, 이 고을 원이 극진하다. 군청 동헌에서 잤다. 김덕장(金德章)이 나의 임시로 거처하는 집에 왔다가 서로 만났다. 금부도사가 와서 봤다.

4월 21일 [양력 6월 5일]<신사> 맑다.
일찍 떠나 은원(논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김익(金翼)이 우 연히 오게 되었다고 한다. 임달영(任達英)이 곡식을 사러 배로 은진포(恩津浦)에 왔다고 하는데, 그 꼴이 몹시 궤휼하다. 저녁에 여산(익산군 여산면 여산리) 관노의 집에서 자는데, 한밤 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4월 22일 [양력 6월 6일]<임오> 맑다.
오전에 삼례역(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의 역장과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서 잤다. 판관 박근(朴勤)이 와서 봤다. 부윤(府尹)도 후하게 접대했다. 판 관이 비올 때 쓰는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생강 등을 보내 왔 다.

4월 23일 [양력 6월 7일]<계미> 맑다.
일찍 떠나 오원역(임실군 관천면 선천리)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저물어서 임실현에서 잤다. 임실현감이 예에 따라 대우했다. 현감은 홍순각(洪純慤)이다.

4월 24일 [양력 6월 8일]<갑신> 맑다.
일찍 떠나 남원 시오리 쯤에서 정철(丁哲) 등을 만나서 남원부 오리 안까지 이르러 우리 일행과는 헤어지고 곧바로 십리 바깥 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희경(李喜慶)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슬픈 회포를 어찌하랴! 어찌하랴!

4월 25일 [양력 6월 9일]<을유> 비가 많이 올 모양이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운봉(남원군 운봉면)의 박롱(朴 ) 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많이 퍼부어 출두할 수가 없다. 여기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벌써 순천으로 떠났다고 한다. 곧 사람을 금오랑 있는 곳으로 보내어 머물게 했다. 운봉현감(남한)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4월 26일 [양력 6월 10일]<병술> 흐리고 개지 않았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나 구레현 금부 도사가 먼저 와 있었다. (손인필의 집)으로 내려가니 손인필(孫仁弼)의 집에 이르니, 구례현감(이원춘)이 급히 나와 보고는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 하다. 금부도사(이사빈)도 와서 봤다. 나는 금부도사에게 술을 권하라고 원에게 청했더니 원이 아주 대접을 잘했다고 한다. 밤에 앉았으니 비통함을 어찌 다 말하랴!

4월 27일 [양력 6월 11일]<정해> 맑다.
일찍 떠나, 송치(松峙; 순천시 서면 학구리 바랑산 해발 619m)밑 에 이르니 구례현감이 사람을 보내어 점심을 지어 보냈다. 순 천 송원(松院:순천시 서면 학구리 신촌)에 이르니, 이득종(李得宗) ?정선(鄭瑄)이 와서 기다렸다. 저녁에 정원명(鄭元溟)의 집에 이르니, 원수(권율)는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權承慶)을 보내어 조문하고, 또 안부도 묻는데, 그 위로하는 말이 못내 간곡 하다. 저녁에 순천부사가 와서 봤다. 정사준(鄭思竣)도 와서 원균 (元均)의 망녕되고 전도된 상황을 많이 말했다.

4월 28일 [양력 6월 12일]<무자> 맑다.
아침에 원수가 또 군관 권승경(權承慶)을 보내어 문안하고서 말 하기를,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기운이 회복되는 대로 나 오라"고 전했다. 또 말하기를, "통제사와 친한 군관이 있다 하니, 편지와 공문을 보내어 나오게 하여 데리고 가서 돌보라"고 하 는 편지와 공문을 만들어 왔다. 부사의 소실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4월 29일 [양력 6월 13일]<기축> 맑다.
사과(司果) 신씨와 방응원(方應元)이 와서 봤다. 병마사(이복남)도 원수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여 순천부로 들어왔다고 한다. 신 사과와 함께 이야기했다.

4월 30일 [양력 6월 14일]<경인> 아침에 흐리고 저물 무렵에 비가 내렸다.
아침 밥을 먹은 뒤에 신 사과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병마사에게 남아서 술을 마셨다고 했다. 병마사 이복남(李福男)이 아침밥 먹기도 전에 와서 보며, 원균(元均)에 대한 일을 많이 말했다. 감사도 원수에게 왔다고 군관을 보내여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정유년 5월 (1597년 5월)

5월 초1일 [양력 6월 15일]<신묘> 비가 내렸다.
사과 신씨가 머물러서 이야기하였다. 순찰사와 병마사는 원수가 머물고 있는 정사준(鄭思竣)의 집에 같이 모여 술을 마시며 무척 즐겁게 논다고 하였다.

5월 2일 [양력 6월 16일]<임진> 저녁나절에 비내렸다.
원수(권율)는 보성으로 가고, 병마사(이복남)는 본영으로 갔다. 순찰사(박흥로)는 담양으로 가는 길에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순 천부사(우치적)가 와서 봤다. 진흥국(陳興國)이 좌영에서 와서 눈 물을 뚝뚝 흘리면서 원균(元均)의 일을 말했다. 이형복(李亨復)? 신홍수(申弘壽)도 왔다. 남원의 종 끝돌이가 아산에서 와서 어머니 영연이 평안하다고 한다. 또 변유헌(有憲)은 식구를 데리고 무사히 금곡에 도착하였다고 했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

5월 3일 [양력 6월 17일]<계사> 맑다.
閱 신 사과?응원(應元)?진흥국(陳興國)이 돌아갔다. 이기남(李奇 男)이 와서 봤다. 아침에 차남 울(蔚)을 열(荷)로 이름 고쳤다. " 열"자는 소리는 "기쁠 열(悅)"과 같고 뜻은 "움이 돋아나다, 초목 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것으로 매우 좋은 글자이다. 저녁나절에 강소작지이 와 보고서 곡했다. 오후 네 시쯤에 비가 뿌렸다. 저녁에 부사가 와서 봤다.

5월 4일 [양력 6월 18일]<갑오> 비가 내렸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참으랴! 닭이 울 때 일어나 눈물만 흘릴 뿐이다. 오후에 비가 많이 내렸다. 정 사준(鄭思竣)이 오고, 이수원(李壽元)도 왔다.

5월 5일 [양력 6월 19일]<을미> 맑다.
새벽 꿈이 몹시 어수선했다. 아침에 부사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도에서 원균(元均)의 못된 짓 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병들이 군무이탈하여 반역질을 하니, 장차 일이 어찌 될지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오늘은 단오절인데, 멀리와 천리나 되는 땅의 끝 모퉁이에서 종군하느라고 어머니 영전에 예를 못하고 곡하며 우는 것도 내 뜻대로 못 하니 무슨 죄로 이런 보답을 받는고! 나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다.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누나! 다만 때를 못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5월 6일 [양력 6월 20일]<병신> 맑다.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우시면서 하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서 한단 말이냐. 통곡 한들 어찌하리!"라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 와서 근심하고 애달파함을 이렇게까지 한 것이니 비통할 따름이다. 또 남원의 추수를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 들의 혼령이 그윽히 걱정하여 주는 탓이라 슬픔이 한결 더하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 저녁나절에 능성현령 이계명(李繼命)도 상제의 몸으로 기용된 사 람인데, 와서 보고 돌아갔다. 흥양의 종 우롬금(禹老音金)?박수매(朴守每)?조택(趙澤)과 순화(順花)의 처가 와서 인사했다. 이기 윤(李奇胤)과 몽생(夢生)이 왔다. 송정립(宋廷立)?송득운(宋得運) 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저녁에 정원명(鄭元溟)이 한산도에서 돌아와 흉물(원균?)의 하 는 꼴을 많이 말했다. 또 부찰사(한효순)가 좌영으로 나와서 병 이라 하여 조리한다고 했다.우수사(이억기)가 편지를 보내 와 조문했다.

5월 7일 [양력 6월 21일]<정유> 맑다.
아침에 정혜사의 중 덕수(德修)가 와서 미투리를 바쳤다. 거절하며 받지 않으니, 재삼 간절히 받으라고 하므로 값을 주어서 보냈다. 미투리를 곧 정원명(鄭元溟)에게 주었다. 저녁나절에 송대기(宋大器)? 류몽길(柳夢吉)이 와서 봤다. 서산군수 안괄(安适) 도 한산도에서 왔다. 음흉한 자(원균)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저 녁에 이기남(李奇男)이 또 왔다. 이원룡(李元龍)은 수영에서 돌아왔다. 안괄(安适)이 구례에 갔을 때 조사겸(趙士謙)의 수절녀를 사통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놀랄 일이다.

5월 8일 [양력 6월 22일]<무술> 맑다.
아침에 승장(僧將) 수인(守仁)이 밥지을 중 두우(杜宇)를 데리 고 왔다. 종 한경(漢京)이 일이 있어서 보성에 보냈다. 흥양의 종 세충(世忠)이 녹도에서 망아지를 끌고 왔다. 활장이 이지(李 智)가 돌아갔다. 이 날 새벽꿈에 사나운 범을 때려 잡아서 가죽 을 벗기고 휘둘렀다. 이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조종(趙琮) 이 이름을 연(堧)으로 고치고는 와서 봤다. 조덕수(趙德秀)도 왔 다. 낮에 망아지에 안장을 얹어서 정상명(鄭詳溟)이 타고 갔다. 음흉한 원(元)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한다. 이는 곧 원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이경신(李敬信)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균(元 均)의 흉악한 일을 많이 말했다. 또 그가 데리고 온 서리를 곡 식을 사오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놓고 그 아내를 사통하려 했 다. 그러나 그가 기를 써도 따라주지 않고 밖으로 뛰처나가 고 래고래 소리쳤다고 했다. 원(元)이란 자는 온갖 꾀로써 나를 모 함하려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말에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길 에 잇닿았으며, 그렇게 해서 나를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하 니, 그저 때를 못 만났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5월 9일 [양력 6월 23일]<기해> 흐리다.
아침에 이형립(李亨立)이 와서 봤다. 곧 돌아갔다. 이수원(李壽元) 이 광양에서 돌아왔다. 순천급제 강승훈(姜承勳)이 응모해 왔 다. 순천부사가 좌수영에서 돌아왔다. 종 경(京)이 보성에서 말을 끌고 왔다.

5월 10일 [양력 6월 24일]<경자> 궂은 비 내렸다.
오늘은 태종(太宗)의 제삿날이다. 옛날부터 이 날에는 비가 온다 더니, 저녁나절에는 많은 비가 왔다. 박줄생(朴注叱生)이 와서 인사했다. 주인이 보리밥을 지어서 들여왔다. 장님 임춘경(任春 景)이 운수를 봐 가지고 왔다. 부찰사도 조문하는 글을 보냈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은 겸하여 삼 종이(麻紙) 두 가지를 부의로 보내 오고, 전라순찰사는 흰쌀?중간 쌀 각 열 말과 콩과 소금도 얻어서 군관을 시켜서 보 낸다고 말했다.

5월 11일 [양력 6월 25일]<신축> 맑다.
김효성(金孝誠)이 낙안에서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전 광양현감 김성(金惺)이 체찰사의 군관이 되었다. 화살대를 구하러 순천 에 왔던 길에 왔다가 봤다.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소문이란 것은 모두 흉물이 일이었다. 부찰사가 온다는 통지문이 먼저 왔다. 장 위(張渭)가 편지를 보냈다. 정원명(鄭元溟)이 보리밥을 지어서 내 었다. 장님 임춘경(任春景)이 와서 운수 본 것을 말했다. 부찰 사가 순천부에 도착했다. 정사립(鄭思立)과 양정언(梁廷彦)이 전 하기를 "부찰사가 와서 만나 보자"고 하는데, 내 몸이 불편하여 만나 보는 것을 거절했다.

5월 12일 [양력 6월 26일]<임인> 맑다.
이원룡(李元龍)이 보내어 부찰사에게 문안했다. 부찰사는 또 김덕 린(金德 )을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절에 이기남(李奇男)?기윤 (奇胤)이 와서 보고는 아뢰고 도양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아침 에 아들 열을 부찰사에게로 보냈다. 신홍수(申弘壽)가 와서 보고 원영감(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둔(상괘 坎,하괘 震:널 리 형통하지만 기운은 최악으로 험난함)변하여 천풍구(상괘 乾,하 괘 巽:여자가 지나치게 거센 괘로서 흉사를 만나는 확률이 열에 아홉임)가 되니 이 쓰임은 본체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하다. 남 해 원이 조문 편지를 보내고, 또 여러 가지 물건 - 쌀 둘, 참기름 둘, 꿀 다섯, 조 하나, 미역 둘 저녁에 향사당으로 가서 부찰사와 함께 이야기하고, 자정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정사립(鄭思立)?양정언(梁廷彦) 등이 왔다가 닭이 운 뒤에 돌아갔다.

5월 13일 [양력 6월 27일]<계묘> 맑다.
어젯밤에 부찰사의 말이 "상사가 보낸 편지에 영감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했더라"고 한다. 저녁나절에 정사준(鄭思竣)이 떡을 만 들어 왔다. 순천부사(우치적)가 노자를 보내왔다. 너무 미안하다.

5월 14일 [양력 6월 28일]<갑진>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부찰사는 부유(순천시 주 암면 창촌리)로 향했다. 정사준(鄭思竣)?정사립(鄭思立)?양정언 (梁廷彦)이 와서 모시고 가겠다고 한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길을 떠나 송치(솔티:순천시 서면 학구리 바랑산) 밑에 이르러 말을 쉬 게 했다. 혼자 바위 위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곤하게 잤다. 운 봉의 박롱(朴 )이 왔다. 저물 무렵 찬수강(순천시 환전면과 구례 사이의 강)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걸어서 건넜다. 구례현의 손인 필(孫仁弼)의 집에 이르니, 현감(이원춘)이 와서 봤다.

5월 15일 [양력 6월 29일]<을사> 개이다 비오다 하다.
주인 집이 너무 낮고 더러워 파리떼가 벌처럼 모여 사람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동헌의 띠풀로 엮은 정자로 옮겨 왔더니 마파람이 바로 들어왔다. 구례현감과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거기서 그대로 잤다.

5월 16일 [양력 6월 30일]<병오> 맑다.
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남원의 탐후인이 돌아와서 고하되, "체찰사가 내일 곡성을 거쳐 이 구례현에 들어와 며칠 묵은 뒤에 전주로 갈 것이다."고 했다. 원이 주물상을 무척 융숭하게 차렸다. 몹시 미안했다. 저녁에 정상명(鄭翔溟)이 왔다.

5월 17일 [양력 7월 1일]<정미> 맑다.
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남원 탐후인이 돌아와서 전하 여 말하기를, "원수(권율)가 운봉 길로 가지 않고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을 영접하는 일로 완산(전주)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내 여기 온 것이 헛걸음이라 민망스럽다.

5월 18일 [양력 7월 2일]<무신> 맑고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저녁에 김종려(金宗麗) 영감이 남원에서 곧바로 와서 봤다. 충청수영 영리 이엽(李燁)이 한산도에서 왔기로 집안에 편지를 부쳤다. 그러나 아침 술에 취해 미친듯 날뛰니 얄밉기만 하다.

5월 19일 [양력 7월 3일]<기유> 맑다.
체찰사가 이 구례현에 들어올 것이다. 성 안에 머물고 있기가 미 안해서 동문 바깥 장세호(張世豪)의 집으로 옮겨 나갔다. 명협정 에 앉았는데 구례현감(이원준)이 와서 봤다. 저녁에 체찰사가 현으로 들어왔다. 오후 네 시쯤에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오후 여 섯 시에 개었다.

5월 20일 [양력 7월 4일]<경술> 맑다.
저녁에 첨지 김경로(金敬老)가 와서 봤다. 또 말하기를 무주 장 박지리의 농토가 아주 좋다고 했다. 옥천에 사는 권치중(權致中) 은 첨지 김경로(金敬老)의 서처남(庶妻男)인데 옥천 양산창 근처 에 있다고 했다. 체찰사(李元翼)이 내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공생(貢生)을 보내고 또 군관 이지각(李知覺)을 보내 더니 조금 있다가 또 군관을 보내어 조문하기를, "일찍 상을 당 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비로소 듣고 놀라 애도한 다."고 하고, 저녁에 만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저녁에 마땅히 가서 뵙겠다."고 했다. 어둘 무렵에 가서 뵈오니, 체찰사는 소복을 입고 접대한다. 조용 히 일을 의논하고 체찰사가 개탄해 마지 않았다. 밤이 깊도록 이 야기하는 중에 일찌기 임금의 분부가 있었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많이 있었다는 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며, 또 흉물의 하 는 짓이 몹시도 그럴 듯하게 속이고 있음에도 하늘이 이를 살피 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할꼬! 나올 때에 남 종사(南從事)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나는 밤이 깊어서 나가 인사하지 못한다고 대답해 보냈다.

5월 21일 [양력 7월 5일]<신해> 맑다.
박천 류해(柳海)가 서울에서 내려와서는 한산도로 가서 공을 세 우겠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은진현(논산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은진 원이 뱃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했다. 해가 또 말하기를, 죄수의 우두머리 이덕룡(李德龍)을 고소한 사람이 옥 에 갇히어 세 차례나 형장을 맞고 다 죽게 될 판이라고 했다. 놀 랍고도 놀랍다. 또 과천의 좌수 안홍제(安弘濟) 등이 이상공(李尙 公)에게 말과 스무살짜리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 나오는 것을 보 고 나갔다고 했다. 안홍제(安弘濟)는 본시 죽을 죄도 아닌데도 여 러번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이 되었다 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달려있다고 하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 다. 이야말로 돈만 있으면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

5월 22일 [양력 7월 6일]<임자> 맑다.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손인필(孫仁弼)의 부자가 와서 봤다. 박천 류해(柳海)가 승평으로 가서 그 길로 한산도로 간다 하므로, 전라?경상 두 수 사에게 와 가리포 첨사 등에게 문안 편지를 써 보냈다. 늦게 체 찰사의 종사관 김광엽이 진주에서 이 구례현으로 들어오고 배흥 립(裵興立) 영감도 온다는 개인적인 편지도 왔다. 그 동안의 정 회를 풀 수 있겠다. 다행이다. 혼자 앉았으니 비통하여 견디기가 너무 어렵다. 어두울 무렵 배흥립(裵興立) 동지와 이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와서 봤다.

5월 23일 [양력 7월 7일]<계축>
아침에 정사룡(鄭士龍)?이사순(李士順)이 와서 봤다. 원공의 일 을 많이 전했다. 저녁나절에 동지 배흥립(裵興立)이 한산도로 돌아갔다. 체찰사가 사람을 보내어 부르므로 가서 뵙고 조용히 의논하는데, 시국의 그릇된 일에 대하여 많이 분개하고 다만 죽 을 날만 기다린다고 했다. 내일 초계로 간다고 하면서, 체찰사가 영수증을 주면서 이대백(李大伯)이 모은 쌀 두 섬을 모아서 이를 성밖 주인 장세휘(張世輝)의 집으로 보냈다.

5월 24일 [양력 7월 8일]<갑인> 맑다. 샛바람이 종일 세게 불었다.
아침에 광양의 고응명(高應明)의 아들 고언선(高彦善)이 와서 봤다. 한산도의 일을 많이 전한다. 체찰사가 군관 이지각(李知覺) 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의 연해안 지도를 그리고 싶으 나 도리가 없으니, 본 대로 지도를 그려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지도를 대강 그려서 보냈다. 저녁에 비가 많이 왔다.

5월 25일 [양력 7월 9일]<을묘> 비가 내렸다.
아침에 길을 떠나려 하려다가 비에 막혀 가지 않다. 혼자 시골집 에 기대어 있으니 회포가 그지없다. 슬프고 그리운 생각을 어찌 하랴!

5월 26일 [양력 7월 10일]<병진> 종일 많은 비가 내렸다.
비를 무릅쓰고 길을 막 떠나려 하려는데, 사량만호 변익성(邊翼 星)이 문초받을 일로 체찰사 앞으로 왔는데 이종호(李宗浩)가 잡 아 왔다. 잠시 서로 마주 보고는 그 길로 석주관(구례군 토지 면 송정리)에 이르니, 비가 퍼 붓듯이 쏟아진다. 말을 쉬게 했지 만, 엎어지고 자빠지며 간신히 악양(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이 정란(李廷鸞)의 집에 이르렀으나, 문을 닫고 거절당했다. 김덕령 (金德齡)의 아우 김덕린(金德 )이 빌려 쓰는 집이다. 나는 아들 열로 하여금 억지를 대고서 들어가 잤다. 행장이 흠뻑 다 젖었다 .

5월 27일 [양력 7월 11일]<정사> 흐렸다가 개이다.
아침에 젖은 옷을 바람에 걸어 말렸다. 저녁나절에 떠나 두치 최춘룡(崔春龍)의 집에 이르렀다. 류기룡(柳起龍)이 와서 봤다. 사량만호 이종호(李宗浩)가 먼저 왔었다. 변익성(邊翼星)은 곤장 스무 대를 맞아 꼼짝도 못한다고 했다.

5월 28일 [양력 7월 12일]<무오>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하동에 이르니, 하동현감(신진)이 서로 만나 보는 것을 기뻐하며 성 안 별채로 맞아들여 매우 간곡한 정을 베푼다. 또 원(원균)의 하는 짓이 엄청 미쳤다고 말했다.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했다. 변익성(邊翼星)도 왔다.

5월 29일 [양력 7월 13일]<기미> 흐리다.
몸이 너무 불편하여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머물러서 몸조리했다. 하동현감(신진)이 정다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 황 생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이가 일흔 살인데 하동에 왔는 데, 일찌기 서울에 있었으나 지금은 떠돌아 다닌다고 했다. 나는 만나지 않았다.

정유년 5월 (1597년 6월)

6월 초1일 [양력 7월 14일]<경신> 비 비가 내렸다.
일찍 떠나 청수역(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시냇가 정자에 이르러 말을 쉬었다. 저물녁에 단성땅과 진주 접경지역에 있는 박호원 (朴好元)이라는 농사짓는 종의 집에 투숙하려는데, 주인이 기꺼이 접대하기는 하나 잠잘 방이 좋지 못하여 겨우 겨우 밤을 지냈 다.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유둔 하나, 장지 둘, 백미 하나, 참 깨 다섯, 들깨 셋, 꿀 다섯, 소금 다섯과 미지 다섯은 모두 하동 에서 보낸 것이다.

6월 2일 [양력 7월 15일]<신유> 비오다 개이다 한다.
일찍 떠나 단계 시냇가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삼가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산성으로 이미 가버려 빈 관사에서 잤다. 고을 심부름꾼이 밥을 지어 먹어라고 한 것을 먹지 말라고 종들 에게 타일렀다. 삼가현 오 리 밖에 홰나무 정자가 있어 거기 앉아 있는데, 근처에 사는 노순일(盧淳鎰) 형제가 와서 봤다.

6월 3일 [양력 7월 16일]<임술> 비가 내렸다.
아침에 떠나려다가 비가 이토록 오니 웅크리고 앉아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을 적에 도원수의 군관 류홍(柳泓)이 흥양에서 왔다. 그와 같이 길 사정을 이야기했다. 비로 길을 떠날 수가 없어 그대로 묵었다. 아침에 고을 사람에게 밥을 얻어 먹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종들에게 매를 때리고 밥쌀을 도로 주었다.

6월 4일 [양력 7월 17일]<계해> 맑다.
일찍 떠나려는 데, 삼가현감(신효업)이 문안의 글을 보내면서 노자까지 보내왔다. 낮에 합천땅에 이르러 고을에서 십 리쯤 떨 어진 홰나무 정자가 있는 곳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너무 더워서 한참 동안 말을 쉬게 하고, 오 리쯤 가니, 길이 쌍갈래이다. 한 길은 곧바로 합천군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또 한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강을 건너지 않고 가다가, 거의 십리(4Km) 쯤 가니, 원수(권율)의 진이 바라 보였다. 문보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잤다. 고개를 끼고 넘어 오는데, 기암절벽이 천 길이나 되고, 강물은 굽이 돌며 깊고, 길은 험하고, 다리는 위험하다. 만일 이 험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명의 군사라도 지나가지 못하 겠다. 모여곡이다.

6월 5일 [양력 7월 18일]<갑자> 맑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초계군수가 급히 달려왔다. 곧 그를 불러 이야기했다. 식 사를 한 뒤에, 중군 이덕필(李德弼)도 달려 왔으므로 옛 이야기를 했다. 조금 있으니, 심준(沈俊)이 와서 보았다. 같이 점심을 먹고 잠자는 방을 도배했다. 저녁에 이승서(李承緖)가 와서 파수병과 복병이 도피했던 일을 말했다. 이 날 아침에 구례 사람과 하동현 감이 보내온 종과 말을 아울러 되돌려 보냈다.

6월 6일 [양력 7월 19일]<을축> 맑다.
잠자는 방을 다시 발랐다. 군관이 쉴 마루 두 칸을 만들었다. 저 녁나절에 모여곡 주인 집의 이웃에 사는 윤감(尹鑑)?문익신 (文益新)이 와서 봤다. 종 경(京)을 이대백(李大伯)에게 보냈더니 담당 아전이 나가고 없어서 받지 못하고 그냥 왔다고 한다. 어두워서 집에 들어갔는데 과부는 다른 집으로 옮겨 갔다.

6월 7일 [양력 7월 20일]<병인> 맑다. 몹시 더웠다.
원수(권율)의 군관 박응사(朴應泗)와 류홍(柳洪) 등이 와서 봤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므로 곧 사례하는 답장을 보냈다. 안방으로 들어가 잤다.

6월 8일 [양력 7월 21일]<정묘> 맑다.
아침에 정상명(鄭翔溟)을 보내어 황 종사관에게 안부를 물었다. 저녁나절에 이덕필(李德弼)과 심준(沈俊)이 와서 봤다. 고을 원과 그 아우가 와서 봤다. 원수를 마중 갔는데 원수 일행 여나믄 명 도 와서 봤다. 점심을 먹은 뒤에 오후에 원수(권율)가 진에 오 므로 나도 나가 보았다. 종사관은 원수 앞에 있었고 원수와 함께 이야기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원수가 박성(朴惺)이 써 올린 사직서 초고를 보여 주는데, 박성(朴惺)이 원수의 처사가 소탈 하다고 진술하니, 원수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아 체찰사(이원익) 에게 글을 올렸다. 또 복병에 관한 일들을 낱낱이 아뢴 것을 보았다.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몸이 매우 불편하므로,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6월 9일 [양력 7월 22일]<무진> 개이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정상명(鄭翔溟)을 원수에게 보내어 문안했다. 다음에 종사관에게 문안했다. 처음으로 노마료(보수)를 받았다. 숫돌을 캐어 왔는데 질이 연일석(경북 영일에 나는 고운 돌)보다 좋다고 했다. 윤감(尹鑑)?문익신(文益新)?문보 등이 와서 봤다. 이 날은 여필의 생일인데 혼자 수루터에 앉아 있으니 회포가 어떻겠노!

6월 10일 [양력 7월 23일]<기사> 맑다.
아침에 가라말?가라워라말?간자짐말?유짐말 등의 네 편자가 떨어진 것을 갈아 박았다. 원수의 종사관이 삼척의 홍연해(洪 漣海)를 보내어 문안하면서 좀 늦게 와서 보겠다고 한다. 홍연해 (洪漣海)는 홍견(洪堅)의 삼촌 조카이다. 어려서 죽마고우 서철 (徐徹)이 합천 땅 동면 율진에 사는 데,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봤다. 아이 때 이름은 서갈박지(徐乫朴只)인데 밥을 먹여 보냈다. 저녁에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 조용히 말하는 사이에 임진년에 왜적을 무찌른 일을 칭찬하지 않 는 것이 없고, 또 산성에 험고한 요새를 쌓지 않은데 대한 한 탄과 당면한 토벌?방비에 관한 대책이 허술한 것 등을 말하는 데,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돌아갈 것을 잊고서 이야기했다. 또 말하기를 내일은 원수가 산성을 살펴보러 간다고 했다.

6월 11일 [양력 7월 24일]<경오> 맑다.
중복날이라 쇠를 녹이고 구슬을 녹일 것처럼 땅이 찌는 듯하다. 저녁나절에 명나라 차관 경략군문(唐差官軍略軍門) 이문경(李 文卿)이 와서 보므로, 부채를 선물로 보냈다. 엊저녁에 종사관과 이야기 할 때, 변홍백이 집안 편지를 가지고 와서 전하므로 어머 니의 영연이 편한 줄은 알겠으나, 쓰라린 회포를 어찌 다 말하 랴! 다만, 변흥백(卞興伯)이 나를 만나볼 일로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청도로 갔다고 하니, 참으로 한이 된다. 이 날 아침에 편 지를 써서 변흥백(卞興伯)에게 보냈다. 아들 열이 토사로 밤새도 록 신음했다. 지짐 굽듯 말할 수 없이 답답하다. 닭이 울어서야 조금 덜하여 잠이 들었다. 이 날 아침에 한산도 여러 곳에 갈 편지 열네 장을썼다. 경의 모친이 편지를 보냈는데 지내기가 몹시 어렵다고 했다. 도둑이 또 일어났다고 했다. 작은 워라말이 먹지 않으니 이것은 더위를 먹은 것이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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