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삼국유사 - 9

영지니 2008. 1. 13. 19:58

삼국유사 제 3권

탑상 제 4
탑상(塔像) 제 4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그리고 여러 사람의 전기에는 모두 이렇게 말했다. "신라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으니, 이것은 곧 전불(前佛) 때의 절터이며, 지금 황룡사(皇龍寺) 터는 곧 일곱 절의 하나이다."

<국사(國史)>를 상고하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開國) 3년 계유(癸酉; 553) 2월에 동쪽에 신궁(新宮)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황룡(皇(黃)龍)이 나타났으므로 왕은 이것을 의심해서, 고쳐서 황룡사(皇(黃)龍寺)라 했다. 연좌석은 불전(佛殿) 후면(後面)에 있었다. 일찍이 한 번 본 일이 있는데 돌의 높이는 5, 6척이나 되었으나 그 둘레는 겨우 서 발밖에 되지 않았으며 우뚝하게 서 있고 그 위는 편편했다. 진흥왕(眞興王)이 절을 세운 이후로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중이 여기에 쇠를 붙여서 보호하게 한다.

여기에 찬(讚)해 말한다.

불교가 침체함이 얼마인지 기억할 수 없는데,
오직 연좌석(宴坐石)만이 그대로 남아 있네.
상전(桑田)이 변해 몇 번이나 창해(滄海)가 되었는가
아깝게도 우뚝한 채 아무 데로도 옮기지 않았네.

이윽고 몽고(蒙古)의 큰 병란 이후에 불전(佛殿)과 탑은 모두 불타 버렸다. 그래서 이 돌도 역시 흙에 파묻혀서 겨우 지면(地面)과 같이 편편해진 것이다.

<아함경(阿含經)>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가섭불(迦葉佛)은 바로 현겁(賢劫)의 세 번째 부처다. 그는 사람의 나이로 쳐서 2만 세 때에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여기에 의거해서 증감법(增減法)으로 계산한다면 언제나 성겁(成劫)의 시초에는 모두 무량세(無量歲)를 누렸다. 이것이 점점 감해져서 8만 세에 이르면 그때가 바로 주겁(住劫)의 시초가 된다. 이때부터 또 100년마다 1 세씩 감하여 10 세가 되면 일감(一減)이 되고 또 증가하여 사람의 나이 8만 세가 되면 일증(一增)이 된다. 이렇게 해서 20번 감하고 20번 더하면 한 주겁(住劫)이 된다. 이 한 주겁 동안에 1,000의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는데, 지금 본사(本師)인 석가불(釋迦佛)은 네 번째의 부처이다. 이 네 번째의 부처는 모두 제9감(第九減) 중에 나타난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이 100세 때부터 가섭불의 2만 세까지는 이미 200만여 세나 된다. 만일 현겁(現劫) 시초의 첫째 부처였던 구류손불(拘留孫佛) 때에 이르면 또 몇 만 세(歲)가 된다. 구류손불 때로부터 위로 올라가 겁초(劫初)의 무량세(無量歲)를 누리던 때 까지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석가세존으로부터 아래로 지금의 지원(至元) 18년 신사(辛巳; 1281)까지는 이미 2,230년이고 보면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 때를 지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또 몇만 세나 되겠는가.

본조(本朝)의 명사(名士)의 오세문(五世文)이 역대가(歷代歌)를 지었는데 여기에 의하면, 대금(大金)의 정우(貞祐) 7년 기묘(己卯; 1219)에서 거슬러 따져서 4만 9,600여 세에 이르면 바로 반고씨(盤古氏)가 천지를 개벽한 무인년(戊寅年)이 된다고 했다. 또 연희궁(延禧宮) 녹사(錄事) 김희령(金希寧)이 지은 대일역법(大一曆法)에 의하면, 천지 개벽한 상원(上元) 갑자(甲子)로부터 원풍(元豊) 갑자(甲子; 1084)에 이르기까지 193만 7,641 세라고 했다. 또 <찬고도(纂古圖)>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때로부터 획린(獲麟; 前 477)에 이르기까지가 276만 세라고 했다. 여러 경문(經文)을 상고해 보면 또 가섭불 때부터 지금까지가 바로 이 연좌석의 나이가 된다고 하였으니, 오히려 겁초(劫初)의 천지가 때와는 어린애 나이가 될 정도다. 이들 삼가(三家)의 말들이 오히려 이 어린 돌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들은 천지개벽의 설(說)에 있어서는 몹시 소홀했던 것이다.

요동성(遼東城)의 육왕탑(育王塔)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이렇게 실려 있다.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곁에 있는 탑은 고로(古老)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러하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 지방을 순행하던 길에 이 성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오색 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는 그 구름 속을 찾아가 보았다. 거기엔 중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그 곁에는 세 겹으로 된 토탑(土塔)이 있는데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다시 가서 중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이 있을 뿐이다. 거기를 길 깊이나 되게 파보았더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더 파 보았더니 명(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 범서(梵書)가 있었다. 시신(侍臣)이 이 글을 알아보고 불탑(佛塔)이라고 말하였다. 왕이 자세한 것을 묻자 시신은 대답한다. "이것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그 이름을 포도왕(蒲圖王; 본래는 휴도왕休屠王이라 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이다)이라 합니다." 성왕은 이로부터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서 이내 칠중(七重)의 목탑(木塔)을 세웠고, 뒤에 불법(佛法)이 비로소 전해 오자 그 시말(始末)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탑의 높이를 줄이다가 본탑(本塔)이 썩어서 무너졌다. 아육왕(阿育王)이 통일했다는 염부재주(閻浮提州)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괴상할 것이 없다.

또한 당(唐)나라 용삭(龍朔) 연간(661-662)에 요동에 전쟁이 벌어져서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는 수양제(隋煬帝)가 토벌한 요동의 옛 땅에 이르렀다가 여기에서 산에 있는 불상(佛像)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몹시 쓸쓸하여 사람의 왕래가 끊어져 있었다. 고로(古老)에게 물었더니 "이 불상은 선대(先代)에 나타난 것입니다."한다. 이에 이 불상을 그대로 그려 가지고 서울로 왔다(이 사실은 모두 약함若函에 실려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三國)의 지리지(地理地)를 상고해 보면 요동성은 압록강밖에 있으며, 한(漢)나라 유주(幽州)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의 고구려 성왕이란 어느 임금인지 알 수가 없다. 혹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하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명제는 전한(前漢)의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前 37)에 즉위해서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任寅; 前 19)에 승하했으니, 그때라면 한나라에서도 역시 패엽(貝葉)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외(海外)의 배신(陪臣)으로서 범서(梵書)를 알아본단 말인가. 그러나 불(佛)을 포도왕(蒲圖王)이라고 했으니 서한(西漢) 때에도 필시 서역문자(西域文字)를 아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범서라고 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건대, 아육왕(阿育王)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인구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씩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염부계(閻浮界) 안에 8만 4,000개를 세워서 큰 돌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지금 여러 곳에서 그 상서로운 징조가 한두 번 나타난 것이 아니니 대개 진신(眞身)의 사리(舍利)란 그 감응(感應)되는 것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야육왕(阿育王)의 보탑(寶塔)은 속세 곳곳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히고 이끼마저 아롱졌네.
생각건데 그때의 길손들의 보는 눈은,
몇 사람이나 제신(祭神)의 무덤을 가리켰을까.


금관성(金官城)의 파사석탑(婆娑石塔)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金官國)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 48)에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타國)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두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 하는데,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父王)께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편하게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다. 이때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珠玉)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라고 한다. 그리고 맨 처음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바위를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旗)가 처음으로 해안에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한다.

수로왕(首露王)이 황후(皇后)를 맞아서 같이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신봉(信奉)하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가 전해 오지 않아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질知王) 2년 임진(壬辰; 452)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를 세워(이것은 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의 시대에 해당된다. 법흥왕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또 겸해서 남쪽 왜국(倭國)을 진압시켰으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탑은 모진 4면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彫刻)은 매우 기묘(奇妙)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 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草)에 말한, "닭의 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또한 가락국이라고 하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찬(讚)해 말한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치고 왔네.
어찌 황옥(黃玉)만을 도와서 이 언덕에 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노경(怒鯨)을 막고자 함일세.


고(구)려(高(句)麗)의 영탑사(靈塔寺)

<고승전(高僧傳)>에 말하기를, "중 보덕(普德)의 자(字)는 지법(智法)이니, 전 고구려 용강현(龍岡縣) 사람이다" 했으니 이것은 아래에 있는 본전(本傳)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보덕은 항상 평양성(平壤城)에 살고 있었는데 산방(山方)의 늙은 중이 와서 불경(佛經) 강의해 주기를 청하므로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가서 열반경(涅槃經) 40여 권을 강의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성 서쪽 대보산(大寶山)의 바위로 된 굴 밑에 이르러서 선관(禪觀)했다. 이때 신인(神人)이 와서 청하기를, "이곳에 사는 것이 좋겠다"하고, 석장(錫杖)을 그의 앞에 놓고 땅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속에 8면으로 된 7층의 석탑(石塔)이 있을 것이다"하므로 땅을 파니 과연 그러했다. 이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영탑사(靈塔寺)라 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황룡사(皇龍寺) 장육(丈六)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즉위한 14년 계유(癸酉; 553) 2월에 장차 용궁(龍宮)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하니,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이것을 고쳐서 절을 삼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고, 기축년(己丑; 569)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만에 완성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 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에 닿았다. 이 배를 검사해 보니 공문(公文)이 있는데 쓰기를, "서축(西竺) 아육왕(阿育王)이 누른 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별전別傳에는 쇠가 40만 7,000근, 금金이 1,000냥이라고 했으나 잘못인 듯싶다. 혹은 3만 7,000근이라고도 한다) 장차 석가(釋迦)의 존상(尊像) 셋을 부어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있는 국토(國土)로 가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했고, 부처 하나와 보살상(菩薩像) 둘의 모형(模型)도 함께 실려 있었다. 현(縣)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서 보고하자 왕은 사자를 시켜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동축사(東竺寺)를 세우고 세 불상(佛像)을 편안히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금(金)과 쇠는 서울로 보내서 태건(太建) 6년 갑오(甲午; 574) 3월(<사중기寺中記>엔 계미癸未년 10월 17일이라고 했다)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부어 만들었는데 공사는 금시에 이루어졌으며, 그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黃金) 198푼이 들었고 두 보살상(菩薩像)은 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었다. 이 장륙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으니, 이것은 대왕(大王)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혹은 불상이 진평왕(眞平王) 때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그릇된 말이다.

별본(別本)에는 이렇게 말했다. 아육왕은 서축 대향화국(大香華國)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100년 만에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쇠 몇 근씩을 모아서 세 번이나 불상을 부어 만들었지만 성광공지 못했다. 이때 왕의 태자가 아뢰기를,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더니, 그 배는 남염부제(南閻浮提)의 16개 큰 나라와 500 중국(中國), 10천의 소국(小國), 8만의 촌락(村落)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모두 불상을 부어 만드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로 신라국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이것을 부어 만들어 불상을 이루니 좋은 모양이 다 이루어졌다. 아육왕은 이래서 근심이 없게 되었다.

뒤에 대덕(大德) 자장(慈藏)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現身)해서 감응하여 비결(秘訣)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한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하던 곳으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黃鐵)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으니, 이는 대개 위덕(威德)의 인연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별기別記에 실려 있는 것과 같지 않다).

불상(佛像)이 이루어진 뒤에 동축사(東竺寺)의 삼존불(三尊佛)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져 안치(安置)했다. <사기(史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진평왕 5(6)년 갑진년(甲辰; 584)에 이 절의 금당이 이루어지고, 선덕왕(善德王) 때에 이 절의 첫 번째 주지(住持)는 진골(眞骨) 환희사(歡喜師)였고, 제2대 주지는 자장국통(慈藏國統), 그 다음은 국통혜훈(國統惠訓), 그 다음은 상률사(廂律師)였다." 이제 병화(兵火)가 있은 이후로 대상(大像)과 두 보살상(菩薩像)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찬(讚)해 말한다.

속세(俗世)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랴만,
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 나라가 으뜸일세.
이것은 아육왕(阿育王)이 착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月城) 옛터를 찾느라고 그랬던 것일세.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신라 제27대 선덕왕이 즉위 5년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불법을 전해주는 것을 감응해서 얻었는데(자세한 것은 본전本傳에 실려있다), 문수보살은 또 말했다. "너희 국왕은 바로 천축(天竺)의 찰리종(刹利種)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따로 인연이 있어 동이공공(東夷共工)의 종족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산천(山川)이 험한 탓으로 사람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간사한 말을 많이 믿는다. 그래서 때때로 혹 천신(天神)이 화를 내리기도 하지만 다문비구(多聞比丘)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화평한 것이다." 말을 끝내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大聖)의 변화인 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갔다. 법사(法師)가 중국 대화지(太和池) 가를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묻는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오?" 자장이 대답한다. "보리(菩提)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인은 그에게 절하고 나서 또 묻는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소?" "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靺鞨)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倭國)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는 등 이웃 나라의 횡포가 자주 있사오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신인이 말한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자장이 물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습니까?" 신인이 말한다. "황룡사(皇龍寺)의 호법룡(護法龍)은 바로 나의 큰아들이오. 범왕(梵王)의 명령을 받아,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구층탑(九層塔)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며,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租貢)하여 왕업(王業)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外賊)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 다시 나를 위해서 경기(京畿)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지어 함께 내 복을 빌어 주면 나도 또한 그 은덕(恩德)을 보답하겠소." 말을 하고 옥(玉)을 바친 후 이내 형체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사중기寺中記>에 말하기를,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서 탑 세울 까닭을 들었다고 했다).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佛經)·불상(佛像)·가사(袈裟)·폐백(幣帛)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하기를, "백제에서 공장이를 청해 데려와야 되겠습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청해 오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阿非知)라고 하는 공장이가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伊干)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이 그 역사를 주관하는데 거느리고 일한 소장(小匠)들은 200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에 공장이는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공장이는 마음 속에 의심이 나서 일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老僧) 한 사람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중과 장사는 모두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는 일을 멈춘 것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찰주기(刹柱記)>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아 가져온 사리(舍利) 100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또 대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것은 못에 있는 용의 청에 따른 것이다(대화사大和寺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다. 지금의 울주蔚州이니 역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뒤에 천하가 형통하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고려왕이 신라를 칠 계획을 하다가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황룡사(皇龍寺)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려왕은 그 침범할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周)나라에 구정(九鼎)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따위일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귀신의 힘으로 한 듯이 제경(帝京)을 누르니,
휘황한 채색으로 처마가 움직이네.
여기에 올라 어찌 구한(九韓)의 항복만을 보랴,
건곤(乾坤)이 특별히 편안한 것 처음 깨달았네.

또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 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올바른 도리는 있어도 위엄이 없어서 구한(九韓)이 침범하는 것이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皇龍寺)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을 진압시킨다."

또 <국사(國史)> 및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상고하면, "진흥왕(眞興王) 14년 계유(癸酉; 553)에 황룡사(皇龍寺)를 처음 세운 후에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9년 을사(乙巳; 645)에 탑이 처음 이루어졌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한 7년 성력(聖歷) 원년 무술(戊戌; 698) 6월에 절이 벼락을 맞았다(<사중고기寺中古記>에는 성덕왕善德王 때라 했으나 잘못이다. 성덕왕 때에는 무술년이 없다). 제33대 성덕왕 경신(庚申; 720)에 다시 이 절을 세웠으나 제 48대 경문왕(景文王) 무자(戊子; 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같은 임금 때에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다. 본조 (本朝) 광종(光宗)의 즉위 5(4)년 계축(癸丑; 953) 10월에는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顯宗) 13년 신유(辛酉; 1021)에 네 번째 중수(重修)했다. 또 정종(靖宗) 2(元)년 을해(乙亥; 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는데 이것을 문종(文宗) 갑진(甲辰; 1064)에 다섯 번째 중수(重修)했더니 또 헌종(憲(獻)宗) 말년 을해(乙亥; 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았다. 숙종(肅宗) 원년 병자(丙子; 1096)에 여섯 번째로 중수했더니, 또 고종(高宗) 16년 무술(戊戌; 1238) 겨울에 몽고(蒙古)의 병화(兵火)로 탑과 장륙존상(丈六尊像)과 절의 전우(殿宇)가 모두 재앙을 입었다" 했다.


황룡사(皇龍寺)의 종, 분황사(芬皇寺)의 약사(藥師) 봉덕사(奉德寺)의 종

신라 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이 천보(天寶) 13년 갑오(甲午; 754)에 황룡사(皇龍寺)의 종을 주조했는데, 길이는 1장(丈) 3촌(寸),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 7,581 근이었다. 시주(施主)는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三毛夫人)이요, 공장이는 이상택(里上宅) 하전(下典)이었다. 숙종(肅宗) 때에 새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6척 8촌이었다.

또 이듬해 을미(乙未; 755)에 분황사(芬皇寺)의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의 동상(銅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30만 6,700 근이요, 공장이는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未)이었다. 또 경덕왕(景德王)은 황동(黃銅) 12만 근을 내놓아 그 아버지 성덕왕(聖德王)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그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건운(乾運)이 대력(大曆) 경술(庚戌; 770) 12월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장이들을 모아서 기어이 완성시켜 봉덕사(奉德寺)에 안치(安置)했다. 이 봉덕사는 효성왕(孝成王)이 개원(開元) 26년 무인(戊寅; 738)에 그 아버지 성덕대왕(聖德大王)의 복을 빌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의 명(銘)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라 했다(성덕대왕은 경덕대왕의 아버지 전광대왕 典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대왕이 그 아버지를 위해서 시주한 금金이었으므로 성덕왕의 종이라고 한 것이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郎) 한림랑(翰林郞) 금필월(해)金弼월(奚)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종의 명(銘)을 지었으니 글이 너무 길어서 여기에 싣지 못한다.


영묘사(靈妙寺) 장육(丈六)

선덕왕(善德王)이 절을 짓고 소상(塑像)을 만든 내력은 모두 <양지법사전(良志法師傳)>에 실려져 있다. 경덕왕(景德王) 즉위 23년(764)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금으로 다시 칠했는데, 그 비용으로 조(租)가 2만 3,700석이었다(<양지전良志傳>에는, 불상佛像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이라고 써있다. 이 두 가지 설을 모두 싣는다).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

죽령(竹嶺) 동쪽 100리쯤 되는 곳에 우뚝 솟은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9년(587) 갑신(甲申)에 갑자기 사면이 한 길이나 되는 큰 돌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사방여래(四方如來)의 상(像)을 새기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는데 하늘에서 그 산마루에 떨어진 것이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그 돌을 쳐다보고 나서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했다. 여기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연경(蓮經)을 외는 중을 청해다가 이 절을 맡겨 공석(供石)을 깨끗이 쓸고 향화(香火)를 끊이지 않았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 하고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그 절의 중이 죽어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 연꽃이 피었다.

또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栢栗寺)에 거둥해서 산 밑에 이르렀더니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을 파게 했더니, 큰 돌이 있는데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굴볼사(掘佛寺)라고 했으니 지금을 잘못 전해져서 굴석사(掘石寺)라 한다.

경덕왕(景德王)은 또 당(唐)나라 대종황제(代宗皇帝)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공장이에게 명하여 오색(五色) 담요를 만들고 또 침단목(沈檀木)을 새겨서 명주와 아름다운 옥으로 꾸며서 높이 1장(丈) 남짓한 가산(假山)을 만들어 담요 위에 놓았다. 산에는 뾰족한 바위와 괴이한 돌과 동굴(洞窟)이 있어서 각 구역으로 나뉘었고, 그 각 구역 안에는 노래하고 춤추고 노는 모습과 온갖 나라들의 산천(山川)의 형상이 있다. 조금만 바람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벌과 나비가 훨훨 날고 제비와 참새가 츰을 추니, 얼핏 보아서는 참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 속에는 만불(萬佛)을 모셔 놓았는데 큰 것은 사방 한 치가 넘고 작은 것은 8,9푼 쯤 된다. 그 머리는 혹은 큰 기장만 하고 혹은 콩 반쪽만 하다. 머리털과 백모(白毛), 눈썹과 눈이 또렷하여 모든 형상이 다 갖추어졌으니, 다만 비슷하게 비유할 수는 있어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이 산을 만불산(萬佛山)이라고 했다.

다시 거기에 금과 옥을 새겨 유소번개(流蘇幡蓋)·암라(菴羅)·담복(담복)·화과(花果) 등 장엄한 것과, 백보(百步) 누각(樓閣)·대전(臺殿)·당사(堂사)를 만들었는데 모두가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 형용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앞에는 돌아다니는 중의 형상 1,000여 개가 있고, 아래에는 자금종(紫金鐘) 셋을 벌여 놓았는데, 모두 종각(鐘閣)이 있고 포뢰(蒲牢)가 있으며 고래 모양으로 종치는 방망이를 만들었다. 바람이 불어 종이 울면 돌아 다니는 중들이 모두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한다. 은은하게 염불하는 소리가 나는 듯하니, 이 까닭은 그 종에 있었다. 이것을 비록 만불(萬佛)이라고는 하지만 그 실상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만불산(萬佛山)이 이루어지자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서 바치니 대종(代宗)은 이것은 보고 탄식한다. "신라의 교묘한 기술은 하늘이 만든 것이지 사람의 기술이 아니다." 이에 구광선(九光扇)을 그 바위 사이에 두어 두고 이름을 불광(佛光)이라고 했다. 4월 8일에 대종은 두 거리의 승도(僧徒)들에게 명하여 내도량(內道場)에서 만불산에 예배하고, 삼장불공(三藏不空)에게 명하여 밀부(密部)의 진리(眞理)를 1,000번이나 외어서 경축(慶祝)하게 하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 교묘한 솜씨에 탄복했다.

찬(讚)해 말한다.

하늘은 만월(滿月)을 단장시켜 사방불(四方佛)을 마련했고,
땅은 명호(明毫)를 솟구어 하룻밤에 열렸도다.
교묘한 솜씨로 다시금 만불(萬佛)을 새겼으니,
부처님의 풍도를 삼재(三才)에 두루 퍼지게 하리.


생의사(生義寺) 석미륵(石彌勒)

선덕왕(善德王) 때에 중 생의(生義)는 항상 도중사(道中寺)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꿈에 한 중이 그를 데리고 남산(南山)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를 해 놓게 하고는 산 남쪽 골짜기에 와서 말한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이것을 파내다가 고개 위에 편하게 묻어 주시오." 꿈에서 깨자 그는 친구와 함께 표해 놓은 곳을 찾아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자 거기에서 석미륵(石彌勒)이 나왔으므로 삼화령(三花嶺) 위로 옮겨 놓았다. 선덕왕 13년 갑신(甲申; 644)에 그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뒤에 절 이름을 생의사(生義寺)라고 했다(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성의사性義寺라고 한다. 충담사忠談師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달여서 공양한 것이 바로 이 부처다).


흥륜사(興輪寺)의 벽화(壁畵), 보현(普賢)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 흥륜사의 남문과 좌우 낭무(廊무)가 불에 탔는데 이것을 수리하지 못하고 있어서, 정화(靖和)·홍계(弘繼) 두 중이 장차 시주를 받아 수리하려 했다. 정명(貞明) 7년 신사(辛巳; 921) 5월 15일에 제석신(帝釋神)이 이 절 왼쪽 경루(經樓)에 내려와 열흘 동안 머무르니 전탑(殿塔)과 풀·나무·흙·돌들이 모두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 구름이 절을 덮고 남쪽 연못의 어룡(魚龍)들도 기뻐서 뛰놀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이것을 보고 전에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경탄하여 옥과 비단과 곡식들을 시주하니 산더미처럼 쌓였다. 공장이들도 스스로 와서 하루가 안 되어 이루어졌다. 역사를 마치자 천제(天帝)가 장차 돌아가려 하니 이 두 중이 아뢴다. "천제(天帝)께서 만일 궁중으로 돌아가려 하시거든 저희에게 천제의 얼굴을 그려 정성껏 공양해서 하늘의 은혜를 갚게 하시고 또한 이로 인해서 영상(影像)을 여기에 남겨 두어서 이 세상을 길이 보호하게 하시옵소서." 천제가 말한다. "나의 힘은 저 보현보살(普賢菩薩)이 현화(玄化)를 두루 펴는 것만 못하니 이 보살의 화상을 그려서 공손히 공양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에 두 중은 천제의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상(像)을 벽에 공손히 그렸는데, 지금까지도 이 화상은 남아 있다.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

신라 고전(古傳)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 천자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름답기 짝이 없어 이에 천자가 말하기를, "고금(古今)에 있는 그림으로도 이같이 아름다운 것은 적을 것이다" 하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서 그 실지 모양을 그리도록 했다(그 화공畵工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혹은 장승요張僧繇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오吳나라 사람으로, 양梁나라 천감天監 연간에 무릉왕국武陵王國의 시랑직비각지화사侍郎直秘閣知화事가 되었고, 우장군右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 그러니 여기에 말한 천자天子는 중국 梁·陣 무렵의 천자일 것이다. 그런데 전傳에 당나라 황제라 한 것은 우리 조선 사람이 중국을 가리켜 모두 당唐이라 하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실상은 어느 시대의 제왕帝王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말을 모두 적어 둔다). 그 화공(畵工)은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어 그림을 다 그렸으나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을 찍어 놓았는데, 고쳐 보려 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붉은 점은 반드시 날 때부터 있던 것인가 보다 하고 그림이 끝나자 황제에게 바쳤더니 황제는 그 그림을 보고 나서 말한다. "모양은 실물과 독 같으나 배꼽 밑의 점은 속에 감추어진 것인데 어떻게 알고서 이것까지 그렸느냐." 황제는 크게 노해서 화공(畵工)을 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주려고 하니, 승상(丞相)이 아뢰었다. "저 사람은 마음이 아주 곧사오니 원컨대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말한다. "만일 저 사람이 어질고 곧다면, 내가 어제 꿈에 본 사람의 형상을 그려서 바치게 하라. 그 그림이 꿈에 본 얼굴과 틀림없다면 용서해 줄 것이다." 그 사람이 이에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의 상(像)을 그려 바치니 꿈과 맞는지라, 황제(皇帝)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화공은 죄를 면하자, 박사(博士) 분절(芬節)과 약속했다. "내가 들으니 신라국(新羅國)에서는 불법(佛法)을 존경하여 신봉(信奉)한다 하니 그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 곳에 가서 함께 불사(佛事)를 닦아 그 나라를 널리 이익되게 하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이들은 드디어 함께 신라국에 이르러 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의 상을 만들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었으니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신라 말년 천성(天成) 연간(926∼929)에 정보(正甫) 최은함(崔殷함)이 나이 많도록 아들이 없어, 이 절 관음보살 앞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더니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석 달이 되지 않았는데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서울을 침범해 와서 성 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은함(殷함)은 그 아이를 안고 이 절에 와서 말하였다. "이웃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일이 급합니다. 이 어린 자식으로 해서 누(累)가 겹친다면 식구가 모두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대성(大聖)께서 이 아이를 주신 것이라면, 원컨대 큰 자비(慈悲)의 힘을 내려 길러 주시어 우리 부자(父子)가 다시 만나게 해 주십시오." 슬피 세 번 울면서 세 번 아뢰고 난 후에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觀音像)의 예좌(猊座) 밑에 감추고 못잊어 하면서 떠나갔다. 반 달을 지나 적병이 물러간 뒤에 와서 아이를 찾아보니 살결은 마치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모양도 매우 예쁜데 젖냄새가 아직도 입에서 났다. 아이를 안고 돌아와 기르니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롭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이 사람이 곧 승로(丞魯)로서 벼슬이 정광(正匡)에 이르렀다. 승로는 낭중(郎中) 최숙(崔肅)을 낳았고, 숙은 낭중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이로부터 자손이 계속되고 끊어지지 않았다. 은함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대성(大姓)이 되었다.

또 통화(統和) 10년(992) 3월에 사주(寺主)인 중 성태(性泰)는 보살(菩薩)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절에 살면서 정성껏 부지런히 향화(香火)를 받들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하오나 절의 토지(土地)에서는 나는 것이 없어서 향사(香祀)를 계속할 수가 없으므로 장차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옵기에 하직하는 터입니다." 이날 성태는 조금 졸다가 꿈을 꾸니 관음대성(觀音大聖)이 말한다. "법사(法師)는 아직 여기에 머물러 있고 멀리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해서 제사에 쓸 비용을 충분히 마련해 주겠다." 중이 기뻐하여 꿈에서 깨어 오직 그 절에 머물러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런지 13일 만에 갑자기 두 사람이 말과 소에 물건을 싣고 문 앞에 이르렀다. 절에 있던 중이 나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금주(金州) 지방 사람인데 지난번에 스님 하나가 우리를 찾아와서 나는 동경(東京) 중생사(衆生寺)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공양에 쓸 비용이 어려워서 시주를 얻으려고 여기에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웃 마을에 가서 시주를 모아다가 쌀 엿 섬과 소금 넉 섬을 싣고 온 것입니다." 스님이 말했다.

"이 절에는 시주를 구하러 나간 사람이 없는데, 그대들이 필경 잘못 들은 것 같소." 그 사람들이 또 말한다. "그 스님이 우리들을 데리고 오다가 이 신견정(神見井) 가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절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따라온 것입니다." 절의 스님이 그들을 데리고 법당(法堂) 앞으로 들어가니, 그 사람들은 관음대성(觀音大聖)을 쳐다보고 절하면서 저희끼리 서로 말한다. "이 부처님이 바로 시주를 구하러 왔던 스님의 상(像)입니다." 말하면서 놀라고 감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이로부터 여기에 바치는 쌀과 소금이 해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또 어느날 저녁에 절 문에 화재가 나서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껐다. 그런데 법당(法堂)에 올라가 보니 관음상이 없으므로 살펴보니 이미 뜰 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누가 밖으로 내왔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그제야 모두들 이것은 관음대성(觀音大聖)의 신령스러운 힘인 것을 알았다.

또 대정(大定) 13년 계사(癸巳; 1173) 연간에 중 점숭(占崇)이 이 절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비록 글은 알지 못하지만 성질이 본래부터 순수하여 향화(香火)를 부지런히 받들었다. 어떤 중 하나가 그 절을 빼앗아 살려고 하여 친의천사(친衣天使)에게 호소했다. "이 절은 국가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구하는 곳이오니 마땅히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뽑아서 그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그 말을 옳게 여겨 그 사람을 시험하려 하여 소문(疏文)을 거꾸로 주어 보았다. 그러나 점숭은 이것을 받는 즉시로 줄줄 읽는다. 천사는 이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방 가운데로 물러앉아 다시 그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점숭은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읽지 못한다. 이것을 보고 천사가 말한다.

"스님은 참으로 관음대성이 보호하여 주시는 사람이로다." 이리하여 끝내 이 절을 빼앗지 않았다. 그 당시 점숭(占崇)과 같이 이 절에 살던 처사(處士) 김인부(金仁夫)가 이 이야기를 고을의 노인들에게 전해 주고 또 전기(傳記)로도 써 두었다.


백률사(栢栗寺)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그 절에 부처의 상(像)이 하나 있는데 어느 때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영험이 자못 뚜렷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의 신장(神匠)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소상(觀音塑像)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다"하고, 또 속전(俗傳)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부처님이 일찍이 도리천(도利天)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法堂)에 들어갈 때에 밟았던 돌 위의 발자국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부례랑(夫禮郞)을 구출하여 돌아올 때에 보였던 자취이다"한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 692) 9월 7일에 효소왕(孝昭王)은 대현(大玄) 살찬(薩찬)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았고, 주리(珠履)의 무리가 1,000명이나 되었는데 안상(安常)과는 무척 친했다. 천수(天授) 4년(장수長壽 2년) 계사(癸巳; 693) 3월에 부례랑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에 놀러 갔는데, 북명(北溟)의 경계에 이르렀다가 적적(狄賊)에게 사로잡혀 갔다. 문객(門客)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그대로 돌아왔으나 홀로 안상(安常)만이 그를 쫓아갔는데 이때는 3월 11일이었다. 대왕은 이 말을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말했다. "선왕(先王)께서 신적(神笛)을 얻어 나에게 전해 주셔서 지금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內庫)에 간수해 두었는데, 무슨 일로 해서 국선이 갑자기 적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의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자 왕은 또 놀라고 두려워하여 조사하게 하니, 천존고 안에 있던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없어졌다. 왕은 말했다. "내게 어찌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고 또 이제 현금과 신적까지 잃는단 말인가." 왕은 즉시 창고를 맡은 관리 김정고(金貞高) 등 5명을 가두었고 4월에 나라 안의 사람을 모집하여 말했다. "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을 얻는 사람은 1년 조세(租稅)를 상으로 주겠다." 5월 15일에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栢栗寺) 불상 앞에 나가 여러 날 저녁 기도를 올리자, 갑자기 향탁(香卓) 위에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놓여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두 부모는 매우 기뻐하여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부례랑이 말한다. "저는 적에게 잡혀간 뒤 적국의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서 말 치는 일을 맡아 대오라니(大烏羅尼)의 들에서(혹은 도구都仇의 집 종이 되어 대마大磨의 들에서 말을 먹였다고 했다)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데 갑자기 모양이 단정한 스님 한 분이 손에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 위로하기를, '고향 일을 생각하느냐?'하기에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앞에 꿇어앉아서 '임금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했습니다. 스님은 '그러면 나를 따라오너라'하고는 드디어 저를 데리고 바닷가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또 안상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신적을 둘로 쪼개어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서 각기 한 짝 씩을 타게 하고, 그는 현금(玄琴)을 타고 바다에 떠서 돌아오는데 잠깐 동안에 여기에 와 닿았습니다." 이 일을 자세히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크게 놀라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니 부례랑은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50냥의 금은(金銀)으로 만든 그릇 다섯 개씩 두 벌과, 마납가사(摩衲袈裟) 다섯 벌, 대초(大초) 3,000필, 밭 1만 경(頃)을 백률사에 바쳐서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고, 나라 안의 죄인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관리들에게는 벼슬 3계급을 높여 주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의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으며, 절의 주지(住持)를 봉성사(奉聖寺)로 옮겨 살게 했다.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大角干; 신라의 재상 작명爵名)을 삼고, 아버지 대현아식(大玄阿식)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龍寶夫人)은 사량부(沙梁部)의 경정궁주(鏡井宮主)를 삼았다. 안상은 대통(大統)을 삼고 창고를 맡았던 관리 다섯 사람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관작(官爵) 오급(五級)을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 또 서쪽 하늘에 나타나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것은 현금과 신적을 벼슬에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에 신적을 책호(冊號)하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했더니 혜성(彗星)은 이내 없어졌다. 그 뒤에도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지만 글이 번거로워 다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郞)의 무리라고 했으나 이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眞材)·번완(繁完) 등만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이들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자세한 것은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민장사(敏藏寺)

우금리(우金里)에 사는 가난한 여자 보개(寶開)에게 장춘(長春)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사꾼을 따라 나가더니 오래 되어도 소식이 없자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敏藏寺; 이 절은 곧 민장각간敏藏角干이 자기 집을 내놓아서 절을 만든 것이다) 관음보살 앞으로 가서 7일 동안 기도했더니 장춘이 금세 돌아왔다. 그 동안 어찌된 일이냐고 까닭을 묻자 장춘은 대답했다. "바다 가운데에서 회오리바람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저는 널판쪽을 타고 오(吳)나라 바닷가에 닿았는데 오나라 사람이 저를 데려다가 들에서 농사를 짓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날 이상한 스님 하나가 마치 고향에서 온 것처럼 은근히 위로하더니 저를 데리고 같이 가는데, 앞에 깊은 도랑이 가로막히자 스님은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 도랑을 뛰어넘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 우리 시골집 말 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여기에 와 있었습니다." 저녁때에 오나라를 떠났는데, 이곳에 도착한 것이 겨우 오후 7, 8시였다. 이때는 바로 천보(天寶) 4년 을유(乙酉; 745) 4월 8일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 말을 듣고 민장사에 밭을 시주하고 또 재물도 바쳤다.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국사(國史)>에 이렇게 말했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태청(太淸) 3년 기사(己巳; 549)에 양(梁)나라에서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舍利) 몇 알을 보내왔다.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唐)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00알과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을 가지고 왔는데,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皇龍寺) 탑에 두고, 하나는 대화사(大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에 두었으나,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통도사 계단에는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돌 뚜껑을 덮어서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다.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본조(本朝)에서 전후로 염사(廉使) 두 사람이 와서 계단에 절을 하고 공손히 돌솥을 들어 보았는데,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돌 함(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 번에는 큰 두꺼비가 돌 밑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이로부터는 감히 이 돌을 들어 보지 못했다 한다. 요새 상장군(上將軍)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高宗)의 명령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을 들고 절하려고 하니 절의 중은 지난 일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돌을 들게 하니 그 속에 작은 돌 함이 있고, 함 속에는 유리통(瑠璃筒)이 들어 있고, 통 속에는 사리(舍利)가 단지 네 알뿐이었다. 이것을 서로 돌려보면서 경례했는데 통에 조금 상한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庾公)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는 강화도(江華島)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이 되던 을미년(乙未年; 1235)이었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사리(舍利) 100개를 세 곳에 나누어 두었더니, 이제는 오직 네 개뿐이다. 그것은 숨겨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여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니 수효가 많고 적은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 또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한다. "황룡사(皇龍寺) 탑이 불타던 날에 돌솥 동쪽에 처음 큰 얼룩이 생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때는 바로 요(遼)의 응력(應曆) 3년 계축(癸丑; 953)이요, 본조(本朝) 광종(光宗) 5(4)년으로, 탑이 세 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曹溪)의 무의자(無衣子)가 시를 남겨 말하기를, "들으니 황룡사탑이 불타던 날, 번져서 탄 한 쪽에도 틈이 없었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원(至元) 갑자년(甲子年; 1264) 이후로 원(元)나라 사신과 본국 황화(皇華)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에 절했으며 사방의 운수(雲水)들도 몰려들어 참례했는데, 돌함을 들어보기도 하고 혹은 들지 않기도 했다. 진신(眞身)의 사리 네 알 외에 변신(變身) 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셔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이상한 향기를 강하게 풍겨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이따금 있었으니, 이것은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인 것이다.

당(唐)나라 대중(大中) 5년 신미(辛未; 851)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원홍(元弘)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의 일이다)와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 계미(癸未; 923) 곧 본조(本朝) 태조(太祖) 즉위 6년에 당(唐)나라로 보냈던 사신 윤질(尹質)이 가지고 온 오백나한(五百羅漢)의 상(像)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있다. 송(宋)나라의 선화(宣和) 원년 기묘(己卯(亥); 예종睿宗 15(4), 1119)에 입공사(入貢使) 정극영(鄭克永)·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내전(內殿)에 모셔 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서로 전해 내려오는 말은 이러하다.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 지엄존자(智儼尊者)에게 가 있었는데, 이웃에 선율사(宣律師)가 있어서, 항상 하늘의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 주방(廚房)에서 먹을 것을 보내 왔다. 어느날 선율사는 의상법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는데 의상이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랜데도 하늘에서 보내는 음식은 때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 의상이 빈 바리때만 가지고 돌아가자 비로소 천사(天使)가 내려왔다. 선율사가 "오늘은 어찌해서 늦으셨소"하고 묻자 천사는 대답한다. "온 동네에 가득히 신병(神兵)이 막고 있어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 호위가 있는 것을 알고는 그의 도(道)의 힘이 자기보다 나은 것에 탄복하고는 하늘에서 보내 온 음식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智儼)과 의상(義湘) 두 대사를 재 올리는데 청해다가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다. 의상이 조용히 율사에게 말한다. "율사는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신데,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帝釋宮)에는 부처님의 이빨 40개 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천제께 청하여 그것을 인간에게 내려보내어 복이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율사는 이 후에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천제에게 전하니 천제는 7일을 기한하여 이를 보내 주니 의상은 경례를 다한 뒤에 맞이하여 대궐에 안치했다.

그 후 송(宋)나라 휘종조(徽宗朝)에 이르러 좌도(左道)를 믿으니, 이때 나라 사람들은 도참(圖讖)을 전하여 퍼뜨리기를, "금인(金人)이 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건(黃巾)의 무리들이 일관(日官)을 충동하여 위에 아뢰기를, "금인이란 불교를 말하는 것이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장차 불교를 없애고 중들을 무찔러 죽이고, 경전(經典)을 불사르고, 따로 조그만 배를 만들어 부처의 어금니를 실어 큰 바다에 띄워 인연이 있는 곳으로 흘려 보내려 했다. 이때 마침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갔다가 그 사실을 듣고는 천화용(天花茸) 50령(領)과 저포(紵布) 300필을 배를 호송(護送)하는 관원에게 뇌물로 주고 남몰래 부처의 어금니를 받고 빈 배만 흘려 보내게 했다. 사신들이 부처의 어금니를 얻어 가지고 와서 왕에게 아뢰자 예종(睿宗)은 크게 기뻐하여 십원전(十員殿) 왼쪽에 있는 소전(小殿)에 모시고 항상 소전 문을 잠그고 밖에는 향과 등불을 설치하여 왕이 친히 거둥하는 날에만 대궐 문을 열고 경례를 했다.

임진년(壬辰年; 1232)에 서울을 강화(江華)로 옮길 때 내관(內官)들은 총망한 중에 잊어버리고 이를 거두어 챙기지 못했다. 병신년(丙申年) 4월에 왕의 원당(願堂)인 신효사(神孝寺) 중 온광(蘊光)이 불아(佛牙)에 경례하기를 청하므로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內臣)을 시켜서 두루 궁중(宮中)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백대(栢臺) 시어사(侍御史) 최충(崔沖)이 설신(薛伸)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謁者)의 방을 다니면서 물었으나 모두 어쩔 줄을 모를 뿐이었다. 내신(內臣) 김승로(金承老)가 아뢰기를, "임진년(壬辰年)에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를 조사해 보십시오"하므로 그 말을 쫓아 조사해보니 일기(日記)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입내시대부경(入內侍大府卿) 이백전(李白全)이 불아함(佛牙函)을 받다." 이백전(李白全)을 불러 물으니 대답한다. "청컨대 집에 돌아가서 다시 저의 사사 일기(日記)를 찾아보게 해 주십시오." 집에 가서 찾아보고 좌번알자(左番謁者) 김서룡(金瑞龍)이 불아함(佛牙函)을 받았다는 기록을 갖다가 바쳤다. 김서룡(金瑞龍)을 불러 물었으나 대답을 못한다. 또 김승로(金承老)가 아뢰는 대로 임진년(壬辰年)에서 지금 병신년(丙申年)까지 5년간의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에 수직한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했으나, 아무런 결말도 나지 않았다. 그런지 3일이 지난 날 밤중에 김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무엇을 던지는 소리가 나므로 불을 켜 조사해 보니 바로 불아함(佛牙函)이었다. 함은 본래 속 한 겹은 심향합(沈香合)이고 다음 겹은 순금합(純金合)이고 그 다음 바깥 겁은 백은함(白銀函)이고, 다음 바깥 겁은 유리함이고, 그 다음 겹은 나전함(螺鈿函)으로 각 함(各函)의 폭은 서로 꼭 맞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김서룡은 찾은 것이 기뻐서 대궐로 들어가 아뢰었다. 그러나 유사(有司)는 죄를 의논하여 김서룡과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의 수직하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하니 진양부(晉陽府)에서 아뢰었다. "불사(佛事)로 인하여 사람을 많이 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모두 죽음을 면했다. 다시 십원전(十員殿)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佛牙殿)을 지어서 불아함(佛牙函)을 모시게 하고 장사(將士)들을 시켜 지키게 했다. 길일(吉日)을 가려서 신효사(神孝寺)의 상방(上房) 온광(蘊光)을 청해다가 승도(僧徒) 30명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재를 올려 정성을 드리도록 했다. 그날 입직(入直)했던 승선(承宣) 최홍(崔弘)과 상장군(上將軍) 최공연(崔公衍)·이영장(李令長)과 내시(內侍)·다방(茶房) 관원들은 대궐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불아함(佛牙函)을 머리에 이고 정성을 드렸는데 불아함 구멍 사이에 있는 사리는 그 수를 알지 못할 만큼 많았다. 진양부(晉陽府)에서는 백은(白銀) 상자에 그것을 담아 모셨다.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불아(佛牙)를 잃은 후로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었소. 첫째 의심은, 천궁(天宮)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갔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 의심은 국난(國亂)이 이러하니, 불아는 신물(神物)이므로 인연이 있는 무사(無事)한 나라로 옮겨 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오. 셋째 의심은, 재물을 탐낸 소인(小人)이 그 상자를 도둑질하고 불아는 구렁에 버렸으리라는 것이오. 넷째 의심은, 도둑이 보물을 훔쳐가기는 했으나 이것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 집 속에 감추어 두었으리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네 번째 의심이 맞았소"하고 이내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헌수(獻壽)하는데, 심지어 이마와 팔을 불에 태우는 사람도 있어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실록(實錄)은 당시 내전(內殿)에서 향(香)을 피우며 기도하던, 전지림사(前祗林寺)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에게서 얻은 것이니, 그는 자기가 친히 본 것이라면서 날더러 기록하라고 했다.

또 경오년(庚午年; 1270)에 강화(江華)에서 환도(還都)할 때의 난리는 몹시 심하여 임진년(壬辰年)보다도 더했다. 십원전(十員殿)의 감주(監主)인 선사(禪師) 심감(心鑑)은 자기의 위태로움을 잊고 불아함을 가지고 나와 도둑의 난리에서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 사실을 대궐에 알리니 왕은 그 공을 크게 칭찬하고 이름 있는 절로 옮겨 살게 하여 지금 빙산사(빙山寺)에 살고 있다. 이것도 역시 각유(覺猷)에게서 친히 들은 것이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천가(天嘉) 6년 을유(乙酉; 565)에 진(陳)나라에서는 유사(劉思)와 중 명관(明觀)을 시켜 불경(佛經)·논(論) 1,700여 권을 보내왔으며,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삼장(三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通度寺)에 안치했다. 흥덕왕(興德王) 때인 태화(太和) 원년 정미(丁未; 827)에는 당(唐)에 간 학승(學僧)인 고구려 중 구덕(丘德)이 불경(佛經) 몇 상자를 가지고 오니 왕은 여러 절의 승도(僧徒)들과 함께 나가서 흥륜사(興輪寺) 앞길에 가서 맞이했다. 대중(大中) 5년(851)에는 당나라에 보낸 사신 원홍(元弘)이 불경(佛經) 몇 축(軸)을 가지고 왔고, 나말(羅末)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국(吳越國)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싣고 왔으니, 그는 곧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開山祖)이다.

송(宋)나라 원우(元祐) 갑술년(甲戌年; 1094)에 어떤 사람이 선사(禪師)의 진영(眞影)을 찬(讚)해 말했다.

거룩도 해라, 개조(開祖) 스님이시여! 우뚝 빼어났구나 저 참 모습이.
두 번이나 오월(吳越)에 가, 대장경(大藏經)을 가지고 오는 데 성공했네.
보요(普耀)라는 직함을 하사하시고, 네 번이나 조서(詔書)를 내리셨으니,
만일 그의 덕을 묻거든, 밝은 달 맑은 바람과 같다 하겠네.

또 대정(大定) 연간(1161∼1189)에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이 시(詩)를 지어 남겼다.

물과 구름 조용한 절에 부처님 계신데,
더구나 신룡(神龍)이 한 지경을 보호하네.
마침내 이 좋은 절 어느 누가 이어받을까,
처음 불교는 남쪽에서 전해왔네.

발문(跋文)이 있는데 이러하다.

옛날 보요선사(普耀禪師)가 처음으로 남월(南越)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구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바닷바람이 갑자기 일더니 조각배가 물결 사이에서 뒤집힐 것 같았다. 선사는 말하기를, "이것은 신룡(神龍)이 대장경을 여기에 머물러 두려는 것이 아닐까"하고 드디어 주문(呪文)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龍)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도 자고 물결도 가라앉았다. 본국에 돌아오자 산천(山川)을 두루 구경하면서 대장경을 안치할 곳을 구하다가 이 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나는 곳을 보고 이에 수제자(首弟子) 홍경(弘慶)과 함께 연사(蓮社)를 세웠으니,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온 것은 실로 이때에 시작된 것이었다.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은 제(題)한다.

이 해룡왕사(海龍王寺)에는 용왕당(龍王堂)이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당시 용왕은 대장경(大藏經)을 따라와서 여기에 머물러 있었는데, 용왕당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또 천성(天成) 3년 무자(戊子; 928)에 묵화상(默和尙)이 당에 들어가 역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며, 본조(本朝) 예종(睿宗) 때에는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조서를 받들고 중국으로 유학가서 요본(遼本) 대장경 3부(部)를 사 가지고 왔는데, 그 한 본(本)은 지금 정혜사(定惠寺)에 있다(해인사海印寺에 한 본本이 있고 허참정許參政댁에 한 본本이 있다).

대안(大安) 2년(1086) 본조(本朝) 선종(宣宗) 때에는 우세승통(祐世僧統) 의천(義天)이 송(宋)나라에 들어가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많이 가지고 왔으며, 이 밖에도 서적에 실리지 않은 고승(高僧)과 신사(信士)들이 왕래하면서 가지고 온 것은 이루 자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대체로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오는 데는 그 앞길이 양양(洋洋)했으니 경사스러운 일이다.

찬(讚)해 말한다.

중국과 동방은 오히려 연기로 막혔고,
녹원(鹿苑)의 학수(鶴樹)는 2,000년이네.
이 땅에 전해 오니 참으로 하례할 일이라,
동진(東震)과 서건(西乾)이 한 세상 되었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전(義湘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의상은 영휘(永徽) 초년(650)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선사(智儼禪師)를 뵈었다"한다. 그러나 부석사(浮石寺) 본비(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 8년(625)에 태어나 어려서 중이 되었다. 영휘(永徽) 원년 경술(庚戌; 650)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서 그대로 돌아갔다.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당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배웠다. 총장(總章) 원년(668)에 지엄법사가 죽자 함형(咸亨)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 702)에 죽으니 나이 78세였다"했다. 그렇다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宣律師)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天宮)의 불아(佛牙)를 청하던 일은 신유(辛酉; 661)에서 무진(戊辰; 668)까지의 7, 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本朝) 고종(高宗)이 강화(江華)로 옮기던 임진년(壬辰年; 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다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도리천(도利天)의 1주야는 인간(人間) 100세에 해당되는 것이다.

또 의상이 처음 당에 갔던 신유년(辛酉年; 661)에서부터 계산하여 본조(本朝) 고종(高宗) 임진(壬辰; 1232)까지는 693년이니 경자년(更子年; 1240)에 이르러야 비로서 700년이 차며, 7일 기한도 차는 것이다. 환도(還都)하던 지원(至元) 7년 경오(庚午; 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일 천제(天帝)의 말과 같이 7일 후에 천궁(天宮)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심감선사(心鑑禪師)가 환도(還都)할 때 가져다 바친 것은 필시 진짜 불아(佛牙)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해 봄 환도(還都)하기 전에 왕은 대궐 안 제종(諸宗)의 이름난 중들을 모아서 불아와 사리를 빌어 구하여 비록 정성과 부지런함을 다했지만 하나도 얻지 못했으니, 필경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듯 싶다. 지원(至元) 21년 갑신(甲申; 1284)에 국청사(國淸寺)의 금탑(金塔)을 보수(補修)하고 충렬왕(忠烈王)은 장목왕후(莊穆王后)와 함께 묘각사(妙覺寺)에 거둥하여 신도(信徒)의 무리들을 모아 경하(慶賀)하고 찬미(讚美)했다. 이것이 끝나자 심감(心鑑)이 바친 불아와 낙산(落山)의 수정염주(水精念珠)와 여의주(如意珠)를 군신(君臣)과 여러 신도(信徒)들이 모두 쳐다보고 경배한 뒤에 함께 금탑(金塔) 안에 안치했다.

나도 역시 이 모임에 참석해서 이른바 불아라고 하는 것을 친히 보았는데 그 길이는 세 치 가량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無極)은 쓴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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