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삼국유사 - 8

영지니 2008. 1. 13. 19:56

삼국유사 제 3권

홍법 제 3
제 3권

흥법(興法) 제 3

순도조려(順道肇麗: 도공道公의 다음에 또한 법심法深, 의연義淵, 담엄曇嚴의 무리들이 서로 계승해서 불교佛敎를 일으켰으나 고전古傳에는 기록記錄이 없으므로 감히 그 사실을 순서에 넣어 편찬하지 못한다. 자세한 것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있다.)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 이렇게 말했다. "소수림왕(小獸林王)이 즉위한 2년 임신(壬申; 372)은 곧 동진(東晉) 함안(咸安) 2년이며,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시켜서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보내고(이때 부견符堅은 관중關中, 즉 장안長安에 도읍하고 있었다), 또 4년 갑술(甲戌; 374)에는 아도(阿道)가 동진(東晉)에서 왔다. 이듬해 을해(乙亥; 375) 2월에 초문사(肖門寺)를 세워 순도(順道)를 거기에 두고 또 이불난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가 있게 하니,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법이 일어난 시초이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순도와 아도가 북위(北魏)에서 왔다는 것은 잘못으로, 사실은 전진(前秦)에서 온 것이다. 또 초문사(肖門寺)는 지금의 흥국사(興國寺)이고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興福寺)라고 한 것도 역시 잘못이다.

상고하건대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安市城)이며, 이것을 혹은 안정홀(安丁忽)이라고도 하는데 요수(遼水) 북쪽에 있다.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鴨綠)인데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찌 송경(松京) 흥국사(興國寺)의 이름이 여기에 있을 수 있으랴?

찬(讚)해 말한다.

압록강에 봄 깊어 물빛은 곱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로이 조네.
갑자기 어디서 들리는 노 젓는 소리에 놀라니,
어느 곳 어선(漁船)인지 길손이 벌써 당도했네.


난타벽제(難타闢濟)

<백제본기(百濟本記)>에 이렇게 말했다. "제15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14대라 한 것은 잘못이다.) 침류왕(枕流王)이 즉위한 갑신(甲申; 384.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의 태원太元 9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滅難陀)가 동진(東晉)에서 오자 그를 맞아서 궁중에 두고 예(禮)로 공경했다." 이듬해 을유(乙酉; 385)에 새 도읍인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세우고 도승(度僧) 열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百濟) 불법(佛法)의 시초이다.

또 아신왕(阿莘王)이 즉위한 대원(大元) 17년(392) 2월에 영을 내려 불법(佛法)을 숭상하고 믿어서 복(福)을 구하라고 했다. 마라난타(滅難陀)는 번역해서 동학(童學; 그의 이적異迹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이라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하늘의 조화는 옛날부터 아득한 것,
대체 잔재주로 솜씨부리기는 어려우리.
어른들은 스스로 노래와 춤을 가지고,
옆의 사람 끌어당겨 눈으로 보게 하네.

아도기라(阿道基羅; 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 한다)

<신라본기(新羅本紀)> 제4권에 이렇게 말했다. "제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중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오자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 혹은 모녹毛綠이라고도 씀)가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편안히 있게 했다." 이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의복과 향(香; 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梁나라에서 사자使者인 중 원표元表 편에 명단溟檀과 불상佛像을 보내 왔다고 했다)을 보내 왔는데 군신(君臣)들은 그 향의 이름과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두루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묻게 했다. 묵호자(墨胡子)가 이를 보고 말했다. "이는 향이라는 것으로, 태우면 향기가 몹시 풍기는데, 이는 정성이 신성(神聖)한 곳에까지 이르는 때문입니다. 신성(神聖)이란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태우고 축원(祝願)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눌지왕訥祗王은 진晉·송宋때 사람이다. 그런데 양梁에서 사신을 보냈다고 한 것은 잘못된 듯 싶다) 이때 왕녀(王女)의 병이 위중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축원하게 했더니 왕녀의 병이 나았다. 왕은 기뻐하여 예물을 후히 주었는데 갑자기 그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또 21대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毛禮)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그는 여기에서 몇 해를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講讀)하니 간혹 신봉(信奉)하는 사람이 생겼다(주注에 말하기를 "본비本碑와 모든 전기傳記와는 사실이 다르다"고 했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천축西天竺 사람이라고 했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했다).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이니,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曹魏) 사람 아(我; 아我는 성姓임)굴마(굴摩)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간통하고 돌아갔는데 이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그를 출가(出家)시켰는데, 나이 16세에 위(魏)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이 강독하는 자리에 나가서 불법을 배웠다. 19세가 되자 또 돌아와 어머니께 뵙자 어머니가 말했다. "이 고구려는 지금까지도 불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3,000여 달이 되면 계림(鷄林)에서 성왕(聖王)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 안에 일곱 곳의 절터가 있으니, 하나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 지금의 흥윤사興輪寺이다. 금교金橋는 서천교西天橋로서 우리 속명에는 솔다리[松橋]이다. 절은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처음 그 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법흥왕法興王 정미丁未(527)에 이르러 공사를 시작하며 을묘乙卯년에 크게 공사를 일으키고 진흥왕眞興王 때에 이루어졌다)이요, 둘은 삼천(三川)의 갈래(지금의 영흥사永興寺로, 흥륜사興輪寺와 한때에 세워졌다)요, 셋은 용궁(龍宮)의 남쪽(지금의 황룡사皇龍寺다. 진흥왕眞興王 계유癸酉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넷은 용궁(龍宮)의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다. 선덕왕善德王 갑오甲午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다섯은 사천(沙川)의 끝(지금의 영묘사靈妙寺다. 선덕왕善德王 을미년乙未年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여섯은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天王寺. 문무왕文武王 기묘년己卯年에 공사가 시작됐다)이요, 일곱은 서청전(서請田;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이것은 모두 전불(前佛) 때의 절터이니 불법이 앞으로 길이 전해질 곳이다. 너는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응당 네가 이 땅의 불교의 개조(開祖)가 될 것이다." 아도(我道)는 이 가르침을 듣고 계림(鷄林)으로 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살았는데 곧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다, 때는 미추왕(未鄒王) 즉위 2년 계미(癸未; 263)였다. 그가 대궐로 들어가 불법(佛法) 행하기를 청하니 당시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어서 이를 꺼리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 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의 집(록綠은 예禮와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 <고기古記>에 보면, 법사法師가 처음 모록毛祿의 집에 오니 그때 천지가 진동했다. 당시 사람들은 중이라는 명칭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아두삼마阿頭삼마라고 불렀다. 삼마삼마는 우리말로 중이니 사미沙彌란 말과 같다)으로 도망해 가서 숨었다. 미추왕(未鄒王) 3년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났는데 무당과 의원의 효험도 없으므로 칙사(勅使)를 내어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다. 법사(法師)가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드디어 그 병을 고치니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소원을 묻자 법사(法師)는 대답했다. "빈도(貧道)에게는 아무 구하는 일이 없고, 다만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워서 크게 불교를 일으켜서 국가의 복을 빌기를 바랄 뿐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령했다. 그때의 풍속은 질박하고 검소하여 법사는 따로 지붕을 덮고 여기에 살면서 강연(講演)하니, 이때 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지므로 그 절을 흥륜사(興輪寺)라고 했다. 모록(毛祿)의 누이동생의 이름은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와서 중이 되어 역시 삼천(三川) 갈래에 절을 세우고 살았으니 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고 했다. 얼마 안 되어 미추왕(未鄒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해치려 하므로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서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교도 또한 폐해졌다. 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에 왕위에 올라 불교를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癸未; 263)에서 252년이나 된다. 고도령이 말한 3,000여 달이 맞았다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가지 설(設)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은 것이 이와 같다. 내가 시험삼아 의론하자면 이러하다. 양(梁)과 당(唐)의 두 승전(僧傳)과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모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인 태원(太元) 연간이라 했으니, 순도(順道)·아도(我道) 두 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王) 갑술(甲戌; 374)에 고구려에 온 것은 분명하여 이 전기(傳記)는 잘못되지 않았다. 만일 비처왕(毗處王) 때에 처음 신라에 왔다면, 그것은 아도가 고구려에 100여 년이나 머물러 있다가 온 것이 되니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이나 동작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꼭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신라에서 불교를 시작한 것이 이처럼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만일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이것은 고구려에 온 갑술(甲戌; 374)년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는데 이때는 계림(鷄林)에 아직 문물이나 예교(禮敎)가 있지 않았고, 나라 이름조차도 아직 정하지 않았을 때이니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법 믿기를 청했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들르지 않고 건너뛰어 신라로 왔다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가령 잠시 일어났다가 폐해졌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중간에 적막하게 아무 소문도 없었으며, 향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겠는가? 연대의 하나는 어찌 그리 뒤졌으며, 하나는 어찌 그리 앞섰단 말인가

생각건대 불교가 동방으로 점점 번지던 형세는 필경 고구려와 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그쳤을 것이다. 곧 눌지왕(訥祗王)과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시대가 서로 가까우니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로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시대였을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소위 묵호(墨胡)란 것도 참 이름이 아니요 그저 그를 지목해서 부른 말일 것이다. 이것은 양(梁)나라 사람이 달마(達磨)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 하고, 진(晉)나라에서 중 도안(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니, 아도는 높은 행동으로 세상을 피하면서 자기 성명(姓名)을 말하지 않은 때문이다. 대개 나라 사람들은 들은 바에 따라서 묵호니 아도니 하는 두 가지 이름으로 두 사람을 만들어서 전했을 것이다. 더구나 아도는 겉모습이 묵호와 같다고 하니 이 말로도 한 사람임을 알 수가 있다. 도령(道寧)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들어 말한 것은 바로 절을 처음 세운 선후를 가지고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전기(傳記)는 잃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는 사천(沙川)의 끝을 다섯 번째에 실은 것이다. 또 3,000여 달이란 것도 꼭 다 믿을 수는 없으나 대개 눌지왕(訥祗王)때부터 정미(丁未; 527)년 까지는 무려 100여 년이나 되니, 만일 1,000여 달이라면 거의 비슷하다. 성(姓)을 아(我)라 하고 외자 이름을 한 것은 거짓이 아닌가 의심스러우나 자세하지는 않다.

또 원위(元魏)의 중 담시(曇始; 혹은 혜시惠始)의 전기(傳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담시(曇始)는 관중(關中)사람이다. 출가(出家)한 뒤에 이상한 일이 많았다.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384) 말에 경(經)과 율(律) 수십부(十部)를 가지고 요동(遼東)으로 가서 불교를 선전했다. 여기에서 삼승(三乘)을 가르쳐 즉시 불계(佛戒)에 귀의(歸依)했으니 이것이 대개 고구려에서 불교를 들은 시초였다. 의희(義熙) 초년(405)에 담시(曇始)는 다시 관중(關中)으로 돌아와 삼보(三輔)에 불교를 전파시켰다. 그는 발이 얼굴보다 희었고, 아무리 진흙물을 건너도 더러워지거나 젖는 일이 없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한다. 동진(東晉) 말년에 북방(北方)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關中)을 쳐서 빼앗고 죽인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이 때 담시(曇始)도 역시 해를 입었으나 칼이 그를 상하지 못하자 발발(勃勃)은 탄식하고, 중들을 널리 용서해서 석방하고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이에 담시(曇始)는 비밀히 산택(山澤)으로 도망하여 두타(頭타)의 행실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그 위세를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에까지 떨쳤다. 이때 단릉(단陵)에 최호(崔皓)란 사람이 있어 좌도(左道)를 조금 익혀서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했다. 지위가 위조(僞朝)의 재상에까지 올라서 탁발도의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를 달래어 "불교는 아무런 이익이 없고 백성들에게 해롭기만 합니다"하고 이에 불교를 폐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태평(太平) 말년에 담시는 비로소 탁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이에 정월 초하룻날 갑자기 지팡이를 짚고 대궐 문에 이르자, 도(燾)는 이 말을 듣고 베어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베어도 상하지 않으므로 도가 직접 베었지만 역시 상하지 않는다. 이에 북원(北園)에서 기르던 범에게 주었으나 범도 역시 감히 가까이하지 못한다. 도는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크게 나더니 드디어 역질(疫疾)에 걸리자 최호(崔皓)와 구겸지(寇謙之) 두 사람도 서로 잇달아 나쁜 병에 걸렸다. 도는 이 허물이 그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해서, 이에 두 집 가족을 죽여 없애고 나라 안에 선언해서 불교를 크게 퍼뜨리게 했다. 담시는 그 후 죽은 곳을 알 수가 없다.

논평하여 말한다. 담시는 태원(太元) 말년에 해동(海東)에 왔다가 의희(義熙) 초년에 관중(關中)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여기에 10여 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는데 어찌 동국역사(東國歷史)에는 이런 기록이 없단 말인가. 담시는 실로 괴이하고 이상한 일이 많아 헤아릴 수가 없는 사람이며, 아도·묵호·난타와 연대나 사적이 모두 같으니 필경 이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그의 변명(變名)인 듯 싶다.

찬(讚)해 말한다.

금교(金橋)에 눈이 쌓여 얼고 풀리지 않으니,
계림(鷄林)의 봄빛 아직도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네,
예쁘다. 봄의 신(神)은 재주도 많아서,
먼저 모랑(毛郞)의 집 매화(梅花)나무에 꽃이 피게 했네.

원종흥법(原宗興法; 눌지왕訥祗王 때로부터 100여 년이 된다)과 염촉멸신(염촉滅身)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보면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즉위한 14년(527)에 신하 이차돈(異次頓)이 불법(佛法)을 위해서 자기 몸을 죽이니 곧 소량(蕭梁) 보통(普通) 8년 정미(丁未; 527)에 서천축(西天竺)의 달마대사(達磨大師)가 금릉(金陵)에 온 해다. 이 해에 낭지법사(朗智法師)도 또한 영취산(靈鷲山)에 살면서 법장(法場)을 열었으니 불교의 흥하고 쇠하는 것도 반드시 원근(遠近)에서 한 시기에 서로 감응한다는 것을 이 일로 해서 알 수가 있다.

원화(元和) 연간에 남간사(南澗寺)의 중 일념(一念)이 촉향분례불결사문(촉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 사실이 자세히 실려 있으니 그 대략은 이러하다. 예전에 법흥대왕이 자극전(紫極殿)에서 왕위에 올랐을 때에 동쪽 지역을 살펴보고 말했다. "예전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감응되어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들어왔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백성들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려 한다." 이에 조신들(향전鄕傳에서는 공목알공工目謁恭 등이라 했다.)은 왕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大義)만을 지켜 절을 세우겠다는 신령스러운 생각에 따르지 않자 대왕은 탄식했다. "아아!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왕업(王業)을 이어받아 위로는 음양(陰陽)의 조화(造化)가 모자라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즐겨하는 일이 없어서 정사를 닦는 여가에 불교에 마음을 두었으니 그 누가 나의 일을 함께 할 것인가." 이때 소신(小臣)이 있었는데 성(姓)은 박(朴)이요, 자(子)는 염촉(염촉; 혹은 이차異次라 하고 또는 이처伊處라고도 하니 방음方音이 다르기 때문이며, 한어漢語로 번역하여 염염이라 한다. 촉촉·돈頓·도道·도覩·독獨 등은 모두 글쓰는 사람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곧 조사助辭이다. 이제 위 글자는 번역하고 아래 글자는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촉염촉이라 하고, 또는 염도염覩 등으로 쓴 것이다)인데,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조부(祖父)는 아진(阿珍) 종(宗)으로 습보(習寶) 갈문왕(葛文王)의 아들이다(신라의 관작官爵은 도합 17등급等級인데 그 넷째를 파진손波珍飡, 또는 아진손阿珍飡이라고도 한다. 종宗은 그 이름이며, 습보習寶도 역시 이름이다. 신라 사람은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葛文王이라고 했으니 그 까닭은 사신史臣도 역시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상고해 보면, 사인舍人은 그때 나이 26세였고, 아버지는 길승吉升, 조부는 공한功漢, 증조曾祖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했다).

그는 죽백(竹栢)과 같은 바탕에 수경(水鏡)과 같은 뜻을 품었으며, 적선(積善)한 집의 증손(曾孫)으로서 궁내(宮內)의 조아(爪牙)가 되기를 바랐고, 성조(聖朝)의 충신으로서 하청(河淸)에 등시(登侍)할 것을 기대했다. 그때 나이 22세로서 사인(舍人; 신라 관작官爵에 대사大舍·소사小舍 등이 있으니 대개 하사下士의 등급이다)의 직책에 있었는데, 왕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그 심정(心情)을 눈치채고 아뢰었다. "신이 듣자오니 옛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도 계교를 물었다 하오니 신은 큰 죄를 무릅쓰고 아룁니다"하니 사인은 말한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신하로서의 큰 절개이옵고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거짓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해서 신의 목을 베시면 만민이 굴복하여 감히 왕의 말씀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 장차 새 한 마리를 살리려했고 피를 뿌려 목숨을 끊어서 일곱 마리 짐승을 스스로 불쌍히 여겼다.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인데 어찌 죄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너는 비록 공덕을 남기려 하지만 죽음을 피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사인이 말한다. "일체(一切)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신명(神命)에 지나지 않으며,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불교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은 다시 성행하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왕은 말한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도 하늘을 뚫을 듯한 마음이 있고 홍곡(鴻鵠)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물결을 깨칠 기세를 품었다 하니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가위 대사(大士)의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왕은 일부러 위의(威儀)를 정제하고 동서쪽에는 풍도(風刀)를, 남북쪽에는 상장(霜仗)을 벌여 놓고 여러 신하를 불러 물었다. "경(卿)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이를 지체시키지 않았느냐."(향전鄕傳에서는 염촉염촉이 거짓 왕명王命으로 신하들에게 절을 세우라는 뜻을 전하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諫하자 왕王은 이것을 염촉염촉에게 책임지워 노하고 왕명王命을 거짓 전했다 하여 형刑에 처했다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벌벌 떨고 두려워하여 황망스레 맹세하고 손으로 동쪽과 서쪽을 가리키니 왕은 사인을 불러 꾸짖었다. 사인은 얼굴빛이 변하여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왕이 크게 노하여 이를 베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니 유사(有司)는 그를 묶어 관아(官衙)로 데리고 갔다. 사인은 맹세를 했다.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으며(향전鄕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사인舍人이 맹세하기를,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시므로 내가 신명身命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 인연을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려 두루 백성들에게 보여 주십시오"했다. 이에 그의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金剛山 마루에 떨어졌다고 한다), 하늘은 사방이 어두워 저녁의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포(袞龍袍)를 적시고 재상들은 근심하여 진땀이 선면(蟬冕)에까지 흘렀다. 감천(甘泉)이 갑자기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고 곧은 나무가 저절로 부러져서 원숭이들이 떼지어 울었다. 춘궁(春宮)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놀던 동무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돌아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마주하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이별을 애석해 하여 관(棺)을 쳐다보고 우는 소리는 마치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그들은 모두 말했다. "개자추(介子推)가 다리의 살을 벤 일도 염촉(염촉)의 고절(苦節)에 비할 수 없으며,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도 어찌 그의 장열(壯烈)함에 비할 수 있으랴. 이것은 곧 대왕의 신력(信力)을 붙들어서 아도(阿道)의 본심을 성취시킨 것이니 참으로 성자(聖者)로다." 드디어 북산(北山) 서쪽 고개(곧 금강산金剛山이다. 전傳에는, 머리가 날아가서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장사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에 장사지냈다. 나인(內人)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땅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다. 이로부터 집집마다 부처를 받들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불도(佛道)를 행하면 이내 불교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이 즉위한 5년 갑자(甲子; 544)에 대흥륜사(大興輪寺)를 세웠다(<국사國史>와 향전鄕傳을 상고하면, 실은 법흥왕法興王 14년 정미丁未(527)에 처음으로 터를 닦고 22년 을묘乙卯(535)에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크게 베어 비로소 역사를 시작했는데 기둥과 들보에 쓸 재목은 모두 이 숲에서 넉넉히 베어 썼으며, 주춧돌과 석감石龕도 모두 갖추었다. 진흥왕眞興王 5년 갑자甲子에 이르러 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갑자甲子라고 한 것이다. <승전僧傳>에 7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대청(大淸) 초년(547)에 양(梁)나라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舍利)를 가져오고 천가(天嘉) 6년(565)에 진(陣)나라 사신 유사(劉思)가 중 명관(明觀)과 함께 불경(佛經)을 받들고 오니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과 탑이 기러기처럼 줄을 지었다. 법당(法幢)을 세우고 범종(梵鐘)도 달아 용상(龍象)의 중들은 천하의 복전(福田)이 되고, 대승(大乘)·소승(小乘)의 불법은 서울의 자운(慈雲)이 되었다. 다른 지방의 보살(菩薩)이 세상에 출현하고(이것은 분황사芬皇寺의 진나陣那와 부석사浮石寺의 보개寶蓋, 그리고 낙산사落山寺의 오대五臺 등을 말한다) 서역(西域)의 이름난 중들이 이 땅에 오니 이 때문에 삼한(三韓)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사해(四海)를 통틀어 한 집이 되었다. 때문에 덕명(德名)은 천구(天구)의 나무에 쓰고 신적(神迹)은 성하(星河)의 물에 그림자를 비추니 어찌 세 성인(聖人)의 위덕(威德)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랴(여기서 세 성인이란 아도阿道·법흥法興·염촉염촉을 말한 것). 그 뒤에 국통(國統) 혜륭(惠隆)과 법주(法主) 효원(孝圓)·김상랑(金相郞), 대통(大統) 녹풍(鹿風), 대서성(大書省) 진노(眞怒), 파진손(波珍飡) 김의(金억) 등이 사인의 옛 무덤을 고치고 큰 비(碑)를 세웠다.

원화(元和) 12년 정유(丁酉; 817) 8월 5일은 바로 제 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9년이니, 흥륜사(興輪寺)의 영수선사(永秀禪師; 이때 유가瑜伽의 여러 중을 모두 선사禪師라고 했다)는 이 무덤에 예불(禮佛)할 향도(香徒)들을 모아 매월 5일에는 영혼의 묘원(妙願)을 위해서 단(壇)을 쌓고 법회(法會)를 열었다.

또한 향전(鄕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시골 노인들이 매양 그의 제삿날을 당하면 흥륜사(興輪寺)에 모임을 가졌다." 즉 이달 초닷새는 바로 사인(舍人)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佛法)에 순응한 날이다. 아아! 이런 임금이 없었으면 이런 신하가 없었을 것이요, 이런 신하가 없었으면 이러한 공덕(功德)이 없었을 것이니, 마치 유비(劉備)란 물고기가 제갈량(諸葛亮)이란 물을 만난 것과 같으며, 구름과 용(龍)이 서로 감응해 모인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법흥왕(法興王)은 이미 폐해진 불교를 일으켜 절을 세우고 절이 완공되자 면류관을 벗고 가사(袈裟)를 입었으며 궁중에 있는 친척들을 절의 노예로 쓰게 하여(절의 종은 지금까지도 왕손王孫이라고 한다. 그 뒤 태종왕太宗王 때에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佛法을 믿어 화보花寶· 연보蓮寶 두 딸을 바쳐 이 절의 종으로 하였으며, 또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을 데려다가 절의 노예로 삼았으니 이 두 가족의 후손은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 절의 주지(住持)가 되어 몸소 넓게 교화를 폈다.

진흥왕은 그 아버지의 덕을 계승한 성군(聖君)으로 임금의 직책을 이어받아 임금의 자리에 처하여 위엄으로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호령이 갖추어져서 이 절에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전왕(前王) 법흥왕의 성은 김씨(金氏)요, 출가한 뒤의 이름은 법운(法雲)이며 자(字)는 법공(法空)이다(<승전僧傳>과 여러 설設에 보면 왕비도 출가出家하여 이름을 법운法雲이라 했고, 진흥왕眞興王도 법운法雲이라 했으며, 진흥왕비眞興王妃도 법운法雲이라고 했다니 의심스럽고 혼동된 것이 퍽 많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보면 법흥왕의 성은 모(募) 이름은 진(秦)이라 했다. 처음 공사를 시작했던 을묘(乙卯)년에 왕비도 역시 영흥사(永興寺)를 세우고 모록(毛祿)의 누이동생인 사씨(史氏)의 유풍(遺風)을 사모해서 법흥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묘법(妙法)이라 했으며 역시 영흥사에 살다가 여러 해 뒤에 죽었다. <국사(國史)>에는 건복(建福)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塑像)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되지 않아 진흥왕비인 비구니(比丘尼)가 죽었다고 했다. 상고하건대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요, 왕비 사도부인(思刀夫人) 박씨(朴氏)는 모량리(牟梁里) 영실각간(英失角干)의 딸로서,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나 영흥사를 세운 주인은 아니다. 그러면 필경 진자(眞字)를 마땅히 법자(法字)로 고친다면 이것은 법흥왕의 비(妃) 파조부인(巴조夫人)이 비구니가 되었다가 죽은 것을 가리킨 것이니, 이는 그가 절을 이룩하고 불상(佛像)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법흥·진흥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것을 사관(史官)이 쓰지 않은 것은 세상을 경영하는 교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또 대통(大通) 원년 정미(丁未)에는 양(梁)의 무제(武帝)를 위하여 웅천주(熊天州)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고 했다(웅천熊天은 곧 공주公州이니, 그 때는 신라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미년丁未年의 일은 아닐 것으로, 중대통中大通 원년元年 기유己酉(529)에 세운 것이다. 흥륜사興輪寺를 처음 세우던 정미년丁未年에는 다른 군郡에 절을 세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성인(聖人)의 지혜는 원래 만세(萬世)를 꾀하나니,
구구한 여론(輿論)은 조금도 따질 것 없네.
법륜(法輪)이 풀려 금륜(金輪)을 쫓아 구르니,
요순 세월 바야흐로 불교로 해서 이루어지네.


이것은 원종(原宗)을 위한 것이다.

의(義)에 쫓아 생명 가볍게 하니 놀라운 일인데,
천화(天花)의 흰 젖의 이적(異蹟) 다시 다정해라.
이윽고 한 칼에 몸은 비록 죽었지만,
절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서울을 뒤흔드네.

이것은 염촉(염촉)을 위한 것이다.

법왕금살(法王禁殺)

백제 제 29대 법왕(法王)의 이름은 선(宣)인데 효순(孝順)이라고도 한다. 개황(開皇) 10년 기미(己未; 599)에 즉위하였다. 이해 겨울에 조서를 내려 살생(殺生)을 금지시키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나 새매 따위를 놓아주고 또 물고기 잡는 기구를 불살라서 일체 금지시켰다. 이듬해 경신(庚申)에 30명의 도승(度僧)을 두고 당시 서울인 사차성(泗차城; 지금의 부여夫餘)에 왕흥사(王興寺)를 세우려고 겨우 터를 닦다가 죽었다. 무왕(武王)이 왕위를 계승해서 아버지가 터를 닦은 것을 아들이 일으켜 수기(數紀)를 지내서 완성하니 그 절 이름도 역시 미륵사(彌勒寺)다. 산을 등지고 물에 임했으며, 화목(花木)이 수려하여 사시(四時)의 아름다운 경치를 갖추었다. 왕은 항상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가서 그 경치가 장엄하고 고운 것을 구경했다(<고기古記>에 실려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왕武王은 바로 가난한 어머니가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낳은 이로,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東으로서, 즉위한 뒤에 시호諡號를 무왕武王이라 했다. 이 절은 처음 왕비王妃와 함께 이룩한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너그러운 명으로 짐승 보호함은 그 은혜 천구(千丘)에 미치고,
은택(恩澤)이 돼지와 물고기에게까지 흡족하니 어짊이 온 세상에 넘치네.
성군(聖君)이 갑자기 돌아감을 말하지 말라.
상방(上方) 도솔(兜率)에는 이제 바로 꽃다운 봄이리.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 밀기긴 무덕(武德)·정관(貞觀) 연간에 나라 사람들은 다투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신봉했다.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이 말을 듣고 도사(道士)를 시켜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또 도덕경(道德經)을 강술(講述)케 하여 왕이 백성들과 함께 들으니 곧 제 27대 영류왕(榮留王) 즉위 7년 갑신(甲申; 624)이었다. 이듬해에 고구려에서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배울 것을 청하자 당나라 황제(皇帝; 고조高祖를 말함)는 이를 허락했다.

그 뒤에 보장왕(寶藏王)이 즉위하자(정관貞觀 16년 임인壬寅; 642) 또한 유(儒)·불(佛)·도(道)의 세 교(敎)를 모두 일으키려 했다. 이때 왕의 사랑을 받던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아뢰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다같이 성하게 일어나지만 도교는 그렇지 못하오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도교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이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도교가 불교와 맞서서 나라의 운수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해 여러 번 간했지만 왕은 듣지 않으므로 이에 신력(神力)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에 있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全州)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 가서 살았으니 곧 영휘(英徽) 원년(元年) 경술(庚戌; 650) 6월이었다(또 본전本傳에는, 건봉乾封 2년年 정묘丁卯(667) 3월月 3일日의 일이라 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나라가 망했다(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668)에 나라가 망했으니 그 사이를 따지면 경술년(庚戌年)의 19년 후가 된다). 지금의 경복사(景福寺)에 날아온 방장(方丈)이 바로 이것이라 한다(이상은 <국사國史>에 있는말 이다). 진락공(眞樂公)은 그를 위해 시(詩)를 지어 당(唐)에 남겨 두었고, 문렬공(文烈公)은 그의 전기를 저술하여 세상에 전했다.

또 당서(唐書)를 상고하면 이보다 앞서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비장(裨將) 양명(羊皿)이란 자가 있어서 전쟁에 불리하여 장차 죽게 되었을 때 맹세했다. "내 반드시 고구려의 총신(寵臣)이 되어 저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개씨(蓋氏)가 정권(政權)을 마음대로 하게 되자 개(蓋)로 성씨를 삼았으니 곧 양명의 응(應)함이었다.

또 <고구려고기(高句麗古記)>에 이렇게 말한다.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대업(大業) 8년 임신(壬申; 612)에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왔으며, 10년 갑술(甲戌; 614) 10월에 고구려왕(高句麗王; 그때는 제 26대 영양왕영陽王이 즉위한 25년이다)이 표문(表文)을 올려 항복을 청할 때 한 사람이 비밀히 소노(小弩)를 품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진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 안에 들어갔다. 양제(煬帝)가 표문(表文)을 들고 읽는데 소노(小弩)를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혔다. 양제가 즉시 군사를 돌리려 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주(君主)가 되어 작은 나라를 친정(親征)하여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萬代)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때 우상(右相) 양명(羊皿)이 아뢴다. "신이 죽으면 고구려의 대신(大臣)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帝王)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양제가 죽은 뒤에 그는 과연 고구려에 태어났다. 나이 15세에 총명하고 신기한 무용(武勇)이 있었다. 그때 무양왕(武陽王; <國史국사>에 영류왕(榮留王)의 이름은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무양왕武陽王이라 했으니 자세치 못하다)이 그의 어질다는 말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姓)을 개(蓋)라 하고 이름을 김(金)이라 했으며 지위가 소문(蘇文)에까지 이르니 바로 시중(侍中)의 벼슬이다(<당서唐書>에는 개소문蓋蘇文이 자칭 막이지莫離支라고 했으니 당唐나라의 중서령中書令과 같은 것이라 했다.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序文을 보면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序文을 쓰고 또 주注를 달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문蘇文은 곧 직명職名으로서 문증文證이 있다. 전傳에는,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이 서문序文을 썼다 했다.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치 못하다). 개금(盖金)이 아뢰었다. "솥에는 세 발이 있고, 나라에는 세 가지 교(敎)가 있는 법입니다. 신이 보기에 이 나라 안에는 오직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로운 것입니다." 왕은 옳게 여겨 당나라에 아뢰어 도교를 청하니 이에 태종(太宗)이 서달(敍(叔)達) 등 도사(道士) 8명을 보내주었다(<국사國史>에는 무덕武德 8년 을유乙酉(625)에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청했더니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이를 허락했다고 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양혈羊血이 갑술甲戌년(614)에 죽어서 이 고구려에 태어났다면 나이 겨우 10여 세에 총재寵宰가 되고 왕을 달래어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도교道敎를 청했다 하니 그 연월일年月日에 필경 한가지 잘못된 곳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한다). 왕이 기뻐하여 불사(佛寺)를 도관(道館)으로 만들고 도사(道士)를 존경하여 유사(儒士) 위에 앉게 했다. 도사들은 국내의 이름난 산천을 돌아다니며 이를 진압시키는데, 옛 평양성(平壤城)의 지세(地勢)가 신월성(新月城)이라 하여 도사들이 주문(呪文)을 읽어 남하(南河)의 용(龍)에게 명령해서 만월성(滿月城)을 더 쌓아서 용언성(龍堰城)이라 했으며, 참기(讖記)를 지어 용언도(龍堰堵), 또는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 했다. 여기에 혹 영석(靈石; 속언俗言에는 도제암都帝암이라 하고, 또 조천석朝天石이라고 하니 대개 옛날에 성제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上帝에게 올라가 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을 파서 깨뜨리기도 했다.

개금(盖金)은 또 왕에게 아뢰어 동북과 서남쪽에 긴 성을 쌓게 했다. 이때 남자들은 부역에 나가고 여자들이 농사를 지었는데, 그 역사는 16년만에 끝이 났다. 보장왕(寶藏王)때에 이르러 당나라 태종(太宗)이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나 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당나라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668)에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 대장군(大將軍) 이적(李勣)과 신라 김인문(金仁問) 등이 고구려를 쳐서 나라를 멸망시켜 왕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가니 보장왕의 서자(庶子)가 4,000여 가구를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다(<국사國史>와 조금 다르기에 여기에 모두 싣는다). 대안(大安) 8년 신미(辛未; 1092)에 고려의 우세승통(祐世僧統)이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의 비래방장(飛來方丈)에 가서 보덕성사(普德聖師)의 영정(影幀)에 예를 갖추고 시(詩)를 지었다.

열반(涅槃)의 평등한 가르침은,
우리 스승에게서 전해졌다고 하네.
애석하게도 승방(僧房)에 날아온 뒤에,
동명왕(東明王)의 옛 나라 위태로웠네.

그 발문(跋文)에는 이렇게 썼다.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혹해서 불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보덕법사(普德法師)는 이에 승방(僧房)을 날려서 남쪽 이산으로 옮겨 놓았다. 그 후에 신인(神人)이 고구려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라가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것은 모두 <국사(國史)>와 같고, 그 나머지는 본전(本傳)과 <승전(僧傳)>에 모두 기록되어있다. 보덕법사에게는 11명의 높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에 무상화상(無上和尙)은 제자 김취(金趣) 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를 세웠고, 적멸(寂滅)·의융(義融) 두 법사는 진구사(珍丘寺)를 세웠고,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세웠고, 일승(一乘)은 심정(心正)·대원(大原) 등과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세웠고,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를 세웠고, 사대(四大)는 계육(契育) 등과 함께 중대사(中臺寺)를 세웠고, 개원화상(開原和尙)은 개원사(開原寺)를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역시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本傳)과 같다.

찬(讚)해 말한다.

불교는 넓어서 바다와 같이 끝이 없어서,
백천(百川)의 유교(儒敎)와 도교(道敎)를 모두 받아들이네.
가소롭다. 저 여왕(麗王)은 웅덩이를 막고,
바다로 와룡(臥龍)이 옮겨가는 것 알지 못하네.


동경흥륜사(東京興輪寺) 금당십성(金堂十聖)

동쪽 벽에 앉아서 서쪽으로 향한 이상(泥像)은 아도(我道)·염촉(염촉)·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이다. 서쪽 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 이상(泥像)은 표훈(表訓)·사파(蛇巴)·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이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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