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삼국유사 - 10

영지니 2008. 1. 13. 20:00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신라 제 24대 진흥왕(眞興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삼맥종(삼麥宗)인데, 혹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나라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卽位)했다. 백부(伯父) 법흥왕(法興王)의 뜻을 사모해서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이 풍미(風味)가 있어서 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민가(民家)의 처녀들 중에 아름다운 자를 뽑아서 원화(原花)를 삼았으니, 이것은 무리를 모아서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치려 함이었으며, 이것은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했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교貞娘)의 두 원화를 뽑았고, 여기에 모여든 사람이 3,4백 명이나 되었다. 교정(교貞)이 남모(南毛)를 질투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취하도록 먹인 후에 남몰래 북천(北川)으로 데리고 가서 큰 돌을 들고 그 속에 묻어 죽였다. 이에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피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서, 노래를 지어 거리의 어린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남모의 무리들은 듣고 그 시체를 북천(北川) 속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여 버리니 이에 대왕(大王)은 영을 내려 원화의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 지 여러 해가 되자 왕은 또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영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 중에 덕행(德行)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고쳐 화랑(花娘(郞))이라 하고, 비로서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花郞) 국선(國仙)의 시초이다. 그런 때문에 명주(溟洲)에 비(碑)를 세우고,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쳐 착한 일을 하게 하고 웃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유산하게 하니 오상(五常)·육예(六藝)와 삼사(三師)·육정(六正)이 왕의 시애에 널리 행해졌다(<국사國史>에 보면,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경庚(병丙)신申에 처음으로 화랑花郞을 받들었다 했으나 이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진지왕(眞智王) 때에 와서 흥륜사(興輪寺) 중 진자(眞慈; 혹은 정자貞慈라고 함)가 항상 이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가 발원(發願)하여 맹세해 말했다.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花郞)으로 화(化)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 제가 항상 수용(수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자, 어느날 밤 꿈에 중 하나가 말했다. "내 웅천(熊天; 지금의 공주公州)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眞慈)는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여 그 절을 찾아 열흘길을 가는데 발자국마다 절을 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 밖에 탐스럽고 곱게 생긴 한 소년이 있다가, 예쁜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하니, 진자는 올라가 읍(揖)하고 말한다.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하여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 소년이 말한다. "나도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이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소년은 문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중들에게 지난 밤의 꿈과 자기가 여기에 온 뜻만 얘기하고 또 말했다.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소." 절에 있는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옛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서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오. 그곳으로 가 보는 것이 좋을 게요."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山神靈)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면서 말한다.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진자가 대답한다.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 노인이 또 말한다.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보려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내 달려서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그런 지 한 달이 넘어 진지왕(眞智王)이 이 말을 듣고는 진지를 불러서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으니, 단장을 갖추어 얼굴 모양이 수려한 한 소년이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거닐며 놀고 있었다. 진자는 그를 만나보자 놀라서 말한다. "이분이 미륵선화다." 그는 나가서 물었다. "낭(郎)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姓)은 누구신지 듣고 싶습니다." 낭이 대답한다. "내 이름은 미시(未尸)이고,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 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에 진자는 그를 가마에 태워 가지고 들어가 왕께 뵈었다.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다. 그는 화랑도(花郞徒) 무리들을 서로 화목하게 하고 예의(禮儀)와 풍교(風敎)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는 풍류(風流)를 세상에 빛내더니 7년이 되자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미시랑(未尸郎)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화(德化)를 이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도(道)를 닦으니, 만년(晩年)에 그 역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해설하는 자가 말한다. "미(未)는 미(彌)와 음(音)이 서로 같고 시(尸)는 역(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운 것을 취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들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견량(見郎)[樹]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선화(仙花) 찾아 한 걸음 걸으며 그의 모습 생각하니,
곳곳마다 심은 것은 한결같은 공로일세.
졸지에 봄은 되돌아가고 찾을 곳 없으니,
누가 알았으리, 상림(上林)의 한 때의 봄을.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努힐夫得)과 달달박박(달달朴朴)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에 이렇게 말하였다. "백월산(白月山)은 신라 구사군(仇史郡; 옛날의 굴자군屈自郡. 지금의 의안군義安郡)의 북쪽에 있었다.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가 수백 리에 뻗쳐 있어 참으로 큰 진산(鎭山)이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서 말한다. "옛날에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어느 때에 못을 하나 팠는데, 달마다 보름 전이면 달빛이 밝고, 못 가운데에 산이 하나 있고 사자(獅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히 비쳐서 못 가운데에 그림자를 나타냈다. 황제는 화공(畵工)을 시켜서 그 모양을 그리게 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서 온 천하를 돌면서 찾도록 했다. 사자가 해동(海東)에 이르러 보니 그 산에 큰 사자암(獅子巖)이 있고 산의 서남쪽 이보(二步)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는데 그 이름은 화산(花山; 그 산의 몸체는 하나인데 봉우리가 셋이어서 삼산三山이라고 했다)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다. 그러나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신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 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그 산 이름을 백월산(白月山)이라고 했다(보름 전에는 백월白月의 그림자가 못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못 가운데에 산 그림자가 없어졌다."

이 산의 동남쪽 3,000보 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고, 그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하나는 노힐부득(努힐夫得; 혹은 등等)이니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月藏)이라 했고, 어머니는 미승(味勝)이라 했다. 또 하나는 달달박박(달달朴朴)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수범(修梵)이라 했고, 어머니는 범마(梵摩)라 했다(향전鄕傳에는 치산촌雉山村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두 선비의 이름은 방언方言이니 두 집에는 각각 두 선비의 마음과 행동이 등등騰騰하고 고절苦節하다는 두 가지 뜻에서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骨格)이 범상치 않았고, 속세를 떠난 마음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남쪽 치산촌(雉山村)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옛절이 있는데, 서진(栖眞)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大佛田)·소불전(小佛田)의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夫得)은 회진암(懷眞巖)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을 양사(壤寺; 지금 회진동懷眞洞에 옛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다)라고도 했고, 박박(朴朴)은 유리광사(瑠璃光寺; 지금 이산梨山 위에 절터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에 살았다. 이들은 모두 처자(妻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産業)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고 편안히 마을을 길러 속세를 떠날 마음을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無常)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의식(衣食)이 마음대로 생기고 자연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 부녀(婦女)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지화장(蓮池花藏)에서 여러 부처가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놀면서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불도(佛道)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어 있는 것을 벗어 버리고 무상(無上)의 도(道)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 풍진(風塵) 속에 파묻혀 세속 무리들과 같이 지내서야 되겠는가." 이들은 드디어 인간 세상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 했다. 어느날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서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그 얘기를 하니 두 사람의 말이 똑같으므로 이들은 모두 한참동안 감탄하다가 드디어 백월산(白月山) 무등곡(無等谷; 지금의 남수동南藪洞)으로 들어갔다.

박박사(朴朴師)는 북쪽 고개의 사자암(獅子巖)을 차지하여 판잣집 8척 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 하고, 부득사(夫得師)는 동쪽 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곳을 차지하고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했다(향전鄕傳에는, 부득夫得은 산 북쪽 유리동瑠璃洞에 살았으니 곧 지금의 판방板房이요, 박박朴朴은 산 남쪽 법정동法精洞 뇌방磊房에 살았다고 했으니 이 기록과는 서로 반대된다. 지금 와서 보면 향전鄕傳이 잘못되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夫得)은 미륵불(彌勒佛)을 성심껏 구했고, 박박(朴朴)은 미타불(彌陀佛)을 경례하고 염송(念誦)했다.

3년이 못되어 경룡(景龍) 3년 기유(己酉; 709) 4월 8일은 성덕왕(聖德王) 즉위 8년이다. 해는 저물어가는데 나이 20이 가깝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낭자(娘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 냄새를 풍기면서 갑자기 북암(北庵; 향전鄕傳에는 남암南庵이라 했다)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친다.

갈 길 더딘데 해는 떨어져 모든 산이 어둡고,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러운 스님은 노하지 마오.

박박(朴朴)은 말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어서 다른 데로 가고 여기에서 지체하지 마시오."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기記에는 말하기를, "나는 모든 잡념雜念이 없으니 혈낭血囊을 가지고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낭자(娘子)는 남암(南庵; 향전鄕傳에는 북암北庵)으로 돌아가서 또 전과 같이 청하니 부득(夫得)은 말했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낭자가 대답한다. "맑기가 태허(太虛)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배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德行)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菩提)를 이루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게(偈) 하나를 주었다.

해 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시내와 골짜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잘 곳 찾는 게 아니요,
존사(尊師)를 인도하려 함일세.
원컨대 내 청 들어만 주시고,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오.

부득사(夫得師)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衆生)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일 것이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이에 그를 맞아 읍(揖)하고 암자 안에 있게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밤이 새려 할 때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 마침 산고(産故)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 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은은히 촛불을 비치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 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얽혔으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해서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니 이미 통 속 물에서 향기가 강하게 풍기면서 금액(金液)으로 변한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마지못하여 그 말에 좇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결이 금빛으로 되고, 그 옆을 보니 졸지에 연대(蓮帶) 하나가 생겼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고 말한다. "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인데 여기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朴朴)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계(戒)를 더럽혔을 것이니 비웃어 주리라"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되어 광명(光明)을 내뿜는데 그 몸은 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한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 주니 박박은 탄식해 말한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다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도리어 대우하지 못했으니, 큰 덕(德)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이루었소. 부디 옛날의 교분(交分)을 잊지 마시고 일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부득이 말한다. "통 속에 금액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과 같이 무량수(無量壽)를 이루니 두 부처가 서로 엄연히 대해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佛法)의 요지(要旨)를 설명하고 나서, 온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천보(天寶) 14년 을미(乙未; 755)에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즉위(<고기古記>엔 천감天監 24년 을미乙未에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했다고 했으나 그 선후가 뒤바뀐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할까)하여 이 말을 듣고 정유(丁酉; 757)년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白月山 南寺)라 했다. 광덕(光德) 2년(<고기古記>에는 대력大曆 원년이라고 했으나 역시 잘못된 것이다) 갑진(甲辰; 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자, 다시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금당(金堂)에 모시고 액자(額字)를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어 강당(講堂)에 모셨는데, 남은 금액(金液)이 모자라 몸에 전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는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논평해 말한다. "낭(娘)은 참으로 부녀의 몸으로서 섭화(攝化)했다 할 만하다. <화엄경(華嚴經)>에 마야부인(摩耶夫人) 선지식(善知識)이 십일지(十一地)에 살면서 부처를 낳아 해탈문(解脫門)을 여환(如幻)한 것과 같다. 이제 낭자의 순산한 뜻이 여기에 있으며, 그가 준 글은 슬프고도 간곡하고 사랑스러워서 천선(天仙)의 지취(志趣)가 있다. 아, 낭자가 만일 중생을 따라서 다라니(陀羅尼)를 해득할 줄 몰랐더라면 과연 이같이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 글 끝귀에는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자리함을 꾸짖지 마오'했어야 할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세속의 말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푸른빛 떨어지는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어떤 사람이 해 저문데 구름 속 길을 찾는가.
남암(南庵)이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위는 북암(北庵)을 찬(讚)한 글이다.

골짜기에 해 저문데 어디로 가리,
남창(南窓)에 자리 있으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念珠) 세고 있으니,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위는 남암(南庵)을 찬(讚)한 글이다.

10리(里) 솔 그림자에 한 길을 헤매다가,
밤 초제(招提)로 중을 찾아 시험했네.
세 통에 목욕 끝나니 날도 장차 새는데,
두 아이 낳아 던져 두고 서쪽으로 갔네.

위는 성랑(聖娘)을 찬(讚)한 것이다.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비옵나이다.
1,000손과 1,000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다 없는 이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慈悲) 얼마나 클 것인가.

찬(讚)해 말한다.

죽마(竹馬)·총생(총笙)의 벗 거리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 눈 먼 사람 되었네.
대사(大士)가 자비로운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몇 사춘(社春)이나 버들꽃 못 보고 지냈을까.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調信)

옛날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처음 당(唐)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 어느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낙산(洛山)이라고 이름했으니, 대개 서역(西域)에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 때문이다. 이것을 소백화(小白華)라고도 했는데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眞身)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것을 빌어다가 이름지은 것이다.

여기에서 의상이 재계(齋戒)한 후 7일 만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의 시종(侍從)들이 굴 속으로 안내해 들어가므로 공중을 향해 참례(參禮)하니 수정(水精)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를 내준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물러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들고 나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齋戒)하고 나서 비로소 관음(觀音)의 참 모습을 보았다. 관음이 말한다. "좌상(座上)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법사(法師)가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여기에 금당(金堂)을 짓고 관음상(觀音像)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바탕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대나무가 도로 없어지므로 그제야 비로소 관음의 진신(眞身)이 살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 하고,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에 봉안(奉安)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 후에 원효법사(元曉法師)가 뒤를 이어 와서 여기에 예(禮)를 올리려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郊外)에 이르자 논 가운데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法師)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다. 법사(法師)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친다. 법사(法師)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불러 말한다. "제호(醍호)스님은 쉬십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숨고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法師)가 절에 이르자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의 자리 밑에 또 전에 보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으므로 그제야 전에 만난 성녀(聖女)가 관음의 진신(眞身)임을 알았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했다. 법사는 성굴(聖窟)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眞容)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風浪)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그 뒤에 굴산조사(굴山祖師) 범일(梵日)이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니 한 중이 왼쪽 귀가 없어진 채 여러 중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조사에게 말한다. "나도 또한 한 고향 사람으로, 내 집은 명주(溟州)의 경계인 익령현(翼嶺縣)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다음날 본국(本國)에 돌아가시거든 모름지기 내 집을 지어주셔야 합니다." 이윽고 조사(祖師)는 총석(叢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鹽官)에게서 법을 얻고(이 일은 모두 본전本傳에 자세히 있다) 회창(會昌) 7년 정묘(丁卯; 847)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굴山寺)를 세우고 불교를 전했다.

대중(大中) 12년 무인(戊寅; 858) 2월 보름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중이 창문 밑에 와서 말한다. "옛날에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조사와 함께 약속을 하여 이미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늦는 것입니까." 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자 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翼嶺) 경계에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洛山) 아래 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德耆)라고 한다. 그 여인에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나이 겨우 8세로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 가에 나가 놀았다. 그는 어머니께 말한다. "나와 같이 노는 아이들 중에 금빛이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조사에게 말했다. 조사는 놀라고 기뻐하여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는 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니 물 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는데 꺼내 보니 한쪽 귀가 없어진 것이 전에 보았던 중과 같았다. 이것은 곧 정취보살(正趣菩薩)의 불상(佛像)이었다. 이에 간자(簡子)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洛山) 위가 제일 좋다고 하므로 여기에 불전(佛殿) 3간을 지어 그 불상을 모셨다(고본古本에는 범일梵日의 일이 앞에 있고,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의 일은 뒤에 있다. 그러나 상고해 보건대,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두 법사法師의 일은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에 있었고, 범일梵日의 일은 회창會昌 후에 있었다. 그러니 연대年代가 서로 120여 년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 때문에 지금은 앞뒤를 바꾸어서 책을 꾸몄다. 혹은 범일梵日이 의상義湘의 문인門人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그 뒤 100여 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져 왔으나 오직 관음(觀音)·정취(正趣) 두 성인(聖人)을 모신 불전만은 그 화재를 면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타 버렸다. 몽고(蒙古)의 병란이 있은 이후인 계축(癸丑)·갑인(甲寅) 연간(1253∼54)에 두 성인의 참 얼굴과 두 보주(寶珠)를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겼다. 몽고 군사가 몹시 급하게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므로 주지선사(住持禪師) 아행(阿行; 옛 이름은 희현希玄)이 은으로 만든 합(盒)에 두 구슬을 넣어 가지고 도망하려 하자 이것을 절에 있는 종 걸승(乞升)이 빼앗아 땅속에 깊이 묻고 맹세했다. "내가 만일 병란(兵亂)에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구슬은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못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내가 만일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두 보물을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 갑인(甲寅; 1254)년 10월 22일에 이 성이 함락되어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했다. 그는 적의 군사가 물러가자 이것을 파내어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郎中) 이녹수(李祿綏)가 감창사(監倉使)였는데, 이것을 받아 감창고(監倉庫) 안에 간직해두고 교대할 때마다 서로 전해서 이어받았다.

무오(戊午; 1258)년 11월에 이르러 본업(本業)의 늙은 중, 기림사(祇林寺) 주지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가 임금께 아뢰었다. "낙산사의 두 보주(寶珠)는 국가의 신보(神寶)이온데 양주성(襄州城)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 안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에 파내서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영(溟州營)의 창고 안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溟州城)도 지킬 수가 없사온즉 마땅히 어부(御府)로 옮겨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은 이를 허락하고 야별초(夜別抄) 10명을 내어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두 보주를 갖다가 내부(內府)에 안치해 두었다. 그때 사자로 간 10명에게는 각각 은 1근과 쌀 5석(石)씩을 주었다.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世逵寺; 지금의 興敎寺)의 장원(莊園)이 명주 날리군(捺李郡; <지리지地理志>를 상고해 보면, 명주溟州에는 날리군捺李郡이 없고 오직 날성군捺城郡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본래 날생군捺生郡이니 지금의 영월寧越이다. 또 우수주牛首州 영현領縣에 날령군捺靈郡이 있는데 본래는 날이군捺已郡이요 지금의 강주剛州이다. 우수주牛首州는 지금의 춘주春州이니 여기에 말한 날리군捺李郡은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다)에 있었는데, 본사(本寺)에서 중 조신(調信)을 보내서 장원(莊園)을 맡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태]수([太]守)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좋아해서 아주 반하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觀音菩薩) 앞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과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로부터 몇 해 동안에 그 여인에게는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생각하는 마음에 지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 속에 갑자기 김씨(金氏) 낭자(娘子)가 기쁜 낯빛을 하고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 속으로 사랑해서 잠시도 잊지 못했으나 부모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딴 사람에게로 시집갔다가 이제 부부가 되기를 원해서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여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집은 다만 네 벽뿐이고, 좋지 못한 음식마저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꼴이 말이 아니어서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草野)로 두루 다니니 옷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몸도 가릴 수가 없었다. 마침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나는데 15세 되는 큰아이가 갑자기 굶어죽자 통곡하면서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羽縣)에 이르러 길가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다. 이제 내외는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10세 된 계집아이가 밥을 빌어다 먹는데,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렸다. 아픈 것을 부르짖으면서 앞에 와서 누웠으니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이 눈물을 씻더니 갑자기 말한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그대와 나누어 입어,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에 정이 맺어져 친밀해졌고 사랑도 굳어졌으니 가위 두터운 인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쇠약한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해오는데 남의 집 곁방살이에 하찮은 음식조차도 빌어서 얻을 수가 없게 되어, 수많은 문전(門前)에 걸식하는 부끄러움이 산과도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워하고 배고파해도 미처 돌봐 주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초(芝草)와 난초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서 더 누(累)가 되고 나는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옛날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다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잃은 난새[난조鸞鳥]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人情)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아가고 그치는 것은 인력(人力)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 말을 따라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여인이 말한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그대는 남쪽으로 가십시오."

이리하여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 하다가 꿈에서 깨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밤도 이제 새려고 한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고 망연(망然)히 세상 일에 뜻이 없다.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한평생의 고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아예 관음보살의 상(像)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다. 그는 돌아와서 꿈에 해현(蟹峴)에 묻은 아이를 파 보니 그것은 바로 석미륵(石彌勒)이다. 물로 씻어서 근처에 있는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 장원(莊園)을 맡은 책임을 내놓고 사재(私財)를 내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가 없다.

논평해 말한다. "이 전기(傳記)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니, 어찌 조신사(調信師)의 꿈만이 그렇겠느냐. 지금 모두가 속세의 즐거운 것만 알아 기뻐하기도 하고 서두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이에 사(詞)를 지어 경계한다.

잠시 쾌활한 일 마음에 맞아 한가롭더니, 근심 속에 남모르게 젊은 얼굴 늙어졌네.
모름지기 황량(黃粱)이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생이 한 꿈과 같음을 깨달을 것을.
몸 닦는 것 잘못됨은 먼저 성의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 꿈꾸고 도둑은 재물 꿈꾸네.
어찌 가을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淸凉)의 세상에 이르리.


어산불영(魚山佛影)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의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 이것은 마땅히 마야사摩耶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어魚를 말한 것이다)이니, 그 곁에 가라국(呵라國)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서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가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이때 국경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고 못 속에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萬魚山)에 나찰녀(羅刹女) 다섯이 있어서 독룡과 왕래하면서 사귀었다. 그런 때문에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五穀)이 익지 못했다. 왕은 주문(呪文)을 외어 이것을 금하려 했으나 금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說法)한 뒤에 나찰녀(羅刹女)는 오계(五戒)를 받아 그 후로는 재앙이 없어졌다.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龍)이 마침내 화(化)하여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어서 각각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났다."(이상은 <고기古記>에 있다).

또 상고해 보면, 대정(大定) 12년 경자(庚子; 1180)는 곧 고려 명종(明宗) 11년인데 이때 비로소 만어사(萬魚寺)를 세웠다. 동량(棟梁) 보림(寶林)이 임금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말했다. "이 산 속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北天竺) 가라국(訶羅國) 부처의 영상(影像)과 서로 같은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산 가까운 곳이 양주(梁州) 경계의 옥지(玉池)인데 여기에도 역시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때때로 강가에서 구름 기운이 일어나서 산마루에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가 나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 영상(影像)의 서북쪽에 반석(盤石)이 있어 항상 물이 괴어 없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부처가 가사(袈裟)를 빨던 곳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상은 모두 보림(寶林)의 말인데, 지금 친히 와서 모두 참례(參禮)하고 보니 또한 분명히 공경하고 믿을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골짜기 속의 돌이 전체의 3분의 2는 모두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그 하나요,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아서 혹은 보이기도 하고 혹은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북천축(北天竺)의 글은 뒤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다.

가자함(可字函)의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제7권에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야건가라국(耶乾訶羅國) 고선산(古仙山), 담복화림(담복花林) 독룡(毒龍)의 옆이요 청련화천(靑蓮花泉)의 북쪽인, 나찰혈(羅刹穴) 가운데에 있는 아나사산(阿那斯山) 남쪽에 이르렀다. 이때 그 구멍에는 나찰(羅刹) 다섯이 있어 이것이 여룡(女龍)으로 화하여 독룡과 교접하는데, 독룡은 다시 우박을 내리고 나찰(羅刹)은 난폭한 행동을 하니 기근(飢饉)과 역질(疫疾)이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왕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신기(神祇)에게 빌고 제사지냈으나 아무런 도움도 없었다. 그때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범지(梵志)가 대왕께 아뢰었다. '가비라국(伽毗羅國) 정반왕(淨飯王)의 왕자(王子)가 지금 도(道)를 이루어 호(號)를 석가문(釋迦文)이라고 합니다.' 완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여 부처를 향해서 예를 올리고 말한다. '어찌해서 오늘날 불교가 이미 일어났다 하는데 이 나라에는 오지 않으십니까.' 그때 석가여래는 여러 비구(比丘)에게 영을 내려서 여섯 가지 신통력(神通力)을 얻은 자를 따르게 하고 나건가라왕(那乾訶羅王)의 불파부제(弗婆浮提)가 청하는 것을 받아 주기로 했다. 그때 세존(世尊)의 이마에서 광명(光明)이 나와서 1만이나 되는 여러 대화불(大化佛)을 만들어 그 나라로 갔다. 이때 용왕(龍王)과 나찰녀(羅刹女)는 온몸뚱이를 땅에 던져 부처에게 계(戒)를 받기를 청했다. 이에 부처는 곧 그들을 위하여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설법(說法)하니 용왕은 이 설법을 다 듣고 나자 꿇어앉자 합장(合掌)하고 세존이 항상 여기에 머물러 있기를 청하여 '부처님께서 만일 이곳에 계시지 않으면 저에게 악한 마음이 생겨서 아누보리(阿누菩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때 범천왕(梵天王)이 다시 와서 부처에게 예(禮)하고 청한다. '파가파(婆伽婆)께서는 앞으로 올 세상의 모든 중생(衆生)들을 위할 것이요, 이 작은 한 용(龍)만을 위하지 마시옵소서.' 이에 백천(百千)의 범왕(梵王)들도 모두 이러한 청을 했다.

이때 용왕이 칠보대(七寶臺)를 내어 여래(如來)에게 바치니 부처는 용왕에게 말한다. '이 대(臺)는 나에게 필요치 않으니 너는 지금 다만 나찰(羅刹)이 있는 석굴(石窟)을 가져다가 나에게 시주(施主)하도록 하라.' 용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한다. 이때 여래가 용왕을 위로했다. '내가 네 청을 받아들여 네 굴 속에 앉아서 1,500년을 지내겠다.' 말을 마치고 부처가 몸을 솟구쳐 굴 속으로 들어가니 이내 그 돌은 밝은 거울과 같아져서, 사람들이 그 얼굴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모든 용들이 다 나타났다. 부처는 돌 속에 있으면서 빛을 밖으로 나타내니 모든 용들은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서도 항상 부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때 세존(世尊)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석벽(石壁) 속에 앉아 있었는데, 중생들이 볼 때에 멀리서 바라보면 나타나 있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제천(諸天)이 부처의 영상(影像)에 공양하면 부처의 영상도 역시 설법(說法)했다."

또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바위 위를 발로 밟으니 문득 금옥(金玉)의 소리가 났다."

<고승전(高僧傳)>에는 또 이렇게 말했다. "혜원(惠遠)이 들으니 천축국(天竺國)에 부처님의 영상이 있는데 그것은 옛날 용을 위해서 남겨 놓은 부처님의 영상으로, 북천축(北天竺) 월지국(月支國) 나갈가성(那竭呵城)의 남쪽 고선인(古仙人)의 석실(石室) 속에 있었다 한다."

또 법현(法現)의 <서역전(西域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나갈국(那竭國)의 국경에 가면 나갈성(那竭城) 남쪽으로 반 유순(由旬)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으니, 그곳은 박산(博山)의 서남쪽이며 그 속에 부처가 영상을 남겼다. 여기서 10여 보(步)를 가서 보면 부처의 진형(眞形)처럼 광명이 환하게 나타나지만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하게 보였다. 여러 나라 왕들이 화공(畵工)을 보내서 이것을 그리려 했지만 비슷하게도 그릴 수가 없었다. 나라 사람들에게 전해 오는 말로는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이 모두 마땅히 여기에 영상(影像)을 남길 것이니, 그 영상의 서쪽 100보쯤 되는 곳에, 부처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깎던 곳이 있다고 한다."

성자함(星字函)의 <서역기(西域記)> 제2권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여래(如來)가 세상에 있을 때에 이 용이 소 치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소의 젖을 올렸는데, 올리다가 잘못하여 꾸지람을 받자 속으로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돈을 주고 꽃을 사서 부처님에게 공양했다. 그리고 솔도파(솔堵婆)에게 수기(授記)하기를, '부디 악룡(惡龍)이 되어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 주시오'하고는 석벽(石壁)에 가서 몸을 던져 죽자, 드디어 이 굴 속의 대룡왕(大龍王)이 되어 악한 마음을 일으켰다. 여래(如來)가 이것을 보고 몸을 변하여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 여기에 오니 용은 부처를 보자 독한 마음이 드디어 그쳐져서 불살계(不殺戒)를 받고 청하기를, '부처님께서 항상 이 굴에 계시면서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했다. 이에 부처가 말했다. '나는 장차 적멸(寂滅)할 것이다. 그러나 너를 위해서 내 영상을 남겨 둘 것이니 네가 만일 독하고 분한 마음이 생기거든 항상 내 영상을 바라보면 독한 마음이 없어질 것이다.' 부처는 정신을 가다듬어 홀로 석실(石室)로 들어갔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이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 위를 발로 차서 칠보(七寶)로 삼았다 한다." 이상은 모두 경문(經文)이니 대략 이와 같다.

해동(海東) 사람들은 이 산을 이름하여 아나사(阿那斯)라고 했으나 마땅히 마나사(摩那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나사를 번역하면 어(魚)가 되니, 대개 저 북천(北天)에서 있었던 일을 취해다가 산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대산(臺山) 오만진신(五萬眞身)

산중에 있는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을 진성(眞聖), 즉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살던 곳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善德王) 대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 <당승전唐僧傳>에서는 12년이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에 따른다)에 당(唐)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 태화지(太和池) 가의 돌부처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손히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갑자기 부처가 네 구(句)의 게(偈)를 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그 네 구의 글은 기억할 수가 있으나 모두가 범어(梵語)여서 그 뜻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중 하나가 붉은 비단에 금색(金色)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法師)의 곁으로 와서는, 어찌해서 수심에 싸여 있는가 하고 물으니 이에 법사는 대답한다. "꿈에 네 구의 게(偈)를 받았으나 범어로 되어 있어서 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은 그 글을 번역하여 말했다. "가라파좌낭(呵라婆佐낭)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예치구야)란 본래의 성품은 가진 바 없다는 말이요, 낭가희가낭(낭伽희伽낭)이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해석(解釋)한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達예盧舍那)란 노사나불(盧舍那佛)을 곧 본다는 말입니다." 말을 마치자 자기가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이것은 본사(本師) 석가세존(釋迦世尊)이 쓰시던 도구(道具)이니 그대가 잘 보호해 가지십시오." 그는 또 말했다. "그대의 본국의 동북방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五臺山)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법사(法師)는 두루 보살(菩薩)의 유적(遺跡)을 찾아 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현신(現身)해서 재를 청하고 7일 동안 공양하고 나서 법사(法師)에게 말한다. "전일에 게(偈)를 전하던 늙은 중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또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貞觀) 17년(643)에 이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려 했으나 3일 동안이나 날이 어둡고 그늘져서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살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고 하였다. 뒤에 칡덩굴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淨岩寺)가 바로 이곳이다(이것도 역시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그 후 두타(頭陀) 신의(信義)는 범일대사(梵日大師)의 제자로서 이 산을 찾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쉬던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가 죽은 후에는 암자도 역시 오랫 동안 헐어져 있었는데,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니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바로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太子) 보천(寶川)·효명(孝明) 두 형제(<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淨神·보천寶川·효명孝明의 세 부자父子에 대한 명문明文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하문下文에, 신룡神龍 원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했으니 신룡神龍 원년은 곧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 을사乙巳다. 왕王가의 이름은 흥광興光이요, 본명本名은 융기隆基이니 신문왕神文王의 둘째아들이다. 성덕聖德의 형 효조孝照는 이름이 이공理恭이니 혹은 홍천洪川이라고 했다. 이는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들이다. 신문왕神文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자는 일조日照니 정신淨神은 아마 정명政明 신문神文이 잘못 전해진 것인 듯싶다. 효명孝明은 효조孝照, 혹은 소昭의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 이 기록에 효명孝明이 즉위한 것만 말하고 신룡神龍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는 것은 또한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룡神龍 연간에 절을 세운 이는 바로 성덕聖德이다)가 하서부(河西府; 지금의 명주溟州에 또한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것이다. 또는 하곡현河曲縣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라 하나 잘못이다)에 와서 세헌각간(世獻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각 무리 1,000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닿아 여러 날 유람하는데, 갑자기 어느날 밤에 두 형제가 속세(俗世)를 벗어날 뜻을 남몰래 약속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하여 오대산(五臺山; <고기古記>에는, 태화太和 원년元年 무신戊申 8월 초에 왕王이 산속에 숨었다고 했으나 아마 이것은 잘못인 듯싶다. 상고해 보건대, 효조孝照를 효소孝昭라고도 했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에 즉위했는데 이때 나이 16세였고,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에 죽었으니 나이 26세였고, 성덕왕聖德王이 이 해에 즉위했으니 나이 22세였다. 만일 태화太和 원년이 무신戊申이라면 효조孝照가 즉위한 갑진甲辰년보다 이미 45년이나 지났으니 즉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다. 이것으로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것을 취하지 않는다)에 들어가니 그를 시중들던 사람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두 태자(太子)가 산 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에 피므로 형 태자(太子)가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았으니 이곳을 보천암(寶川庵)이라 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600여 보(步)를 가니 북쪽 대(臺)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으므로 아우 태자(太子) 효명(孝明)이 또 암자를 짓고 살면서 각각 부지런히 업(業)을 닦았다.

어느날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예(禮)를 하러 올라가니 동쪽 대(臺)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고, 남쪽 대(臺)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타나 있고, 서쪽 대(臺)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나타나 있고, 북쪽 대(臺)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이 나타나 있고, 중앙의 대(臺) 풍로산(風盧山)은 또 지령산(地靈山)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이와 같은 5만 보살의 진신에게 일일이 예를 했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는 문수보살이 지금의 상원(上院)인 진여원(眞如院)에 이르러 서른 여섯 가지의 모양으로 변하여 나타났다. 혹은 부처의 얼굴 모양이 되고 어떤 때는 보주(寶珠) 모양이 되고, 또 혹은 부처의 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손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보탑(寶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불두(萬佛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등(萬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교(金橋)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고(金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종(金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신통(神通)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루(金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륜(金輪)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강저(金剛杵)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옹(金甕)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비녀 모양으로도 된다. 또 혹은 오색 광명(五色 光明)의 모양으로, 혹은 오색 원광(圓光)의 모양으로, 혹은 길상초(吉祥草) 모양으로, 혹은 푸른 연꽃 모양으로도 되었다. 또 혹은 금전(金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은전(銀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뇌전(雷電) 모양으로도 되었다. 혹은 여래(如來)가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지신(地神)이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금봉(金鳳)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오(金烏)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말이 사자(獅子)를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닭이 봉(鳳)을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청룡(靑龍)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백상(白象)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유저(遊猪) 모양으로도 변하고, 혹은 청사(靑蛇) 모양으로도 변해 보였다. 두 태자(太子)는 항상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에서 도(道)를 닦았다.

이때 정신왕(淨神王)의 아우가 왕과 왕위(王位)를 다투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를 폐하고, 네 사람의 장군을 보내서 산에 와서 이들 두 태자(太子)를 맞아오게 했다. 이들은 먼저 효명(孝明)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오색 구름이 7일 동안 그곳을 덮어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찾아 모두 모여 노부(鹵簿)를 벌여놓고 두 태자를 맞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천(寶川)은 울면서 이를 사양하므로 효명을 받들고 돌아가서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이가 나라를 여러 해 다스렸다(기記에는 말하기를, 왕위王位에 있은 지 20여 년이라 했다. 이는 대개 죽을 때의 나이가 26세라 한 것을 잘못 전한 것이다. 그가 왕위王位에 있었던 것은 다만 10여 년뿐이었다.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우가 왕위王位를 다투었다고 하였는데, <국사國史>에는 그런 글이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신룡(神龍) 원년(이것은 당唐나라 중종中宗의 복위復位한 해로서 신라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이다) 을사(乙巳) 3월 초나흘에 비로소 진여원(眞如院)을 고쳐 세웠는데 이때 성덕왕(聖德王)은 친히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산에 와서 전당(殿堂)을 세우고, 또 흙으로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당(堂)에 모셨다. 그리고 이름있는 중 영변(靈卞) 등 5명으로 하여금 <화엄경(華嚴經)>을 오래 돌려 가면서 읽게 하고 이어 화엄사(華嚴社)를 조직해 오랫동안의 공비(供費)로,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이 산에서 가까운 주현(州縣)으로부터 창조(倉租) 100석(石)과 정유(淨油) 한 섬을 바치는 것을 정해 놓은 규칙으로 삼았으며,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000보(步)쯤 되는 의니점(矣尼岾) 고이현(古伊峴) 밖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結)과 밤나무밭 6결(結), 좌위(坐位) 2결(結)을 내어서 장사(莊舍)를 세웠다.

보천(寶川)은 항상 그 영동(靈洞)의 물을 길어다가 마시더니 만년(晩年)에는 육신(肉身)이 공중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 이르러 쉬었으므로 여기에서 수구다라니경(隨求陀羅尼經)을 외는 것으로 밤낮의 과업(課業)으로 삼았다. 어느날 장천굴(掌天窟)의 굴신(窟神)이 현신(現身)하여 그에게 말했다. "내가 이 굴의 신이 된 지가 이미 2,000년이나 되었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수구다라니경의 진리(眞理)를 들었습니다." 말을 마치자 신(神)은 보살계(菩薩戒)를 받기를 청했다. 그가 계(戒)를 받고 나자 그 이튿날 굴도 또한 형체가 없어져 버렸다. 보천(寶川)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곳에 20일 동안이나 머물고 있다가 오대산 신성굴(五臺山神聖窟)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또 50년 동안 참 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도利天)의 신(神)이 삼시(三時)로 설법(說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은 차를 달여 올렸으며, 40명의 성인(聖人)은 10척 높이 하늘을 날면서 항상 그를 호위해 주고 그가 가졌던 지팡이는 하루에 세 번씩 소리를 내면서 방을 세 바퀴씩 돌아다니므로 이것을 쇠북과 경쇠로 삼아 수시로 수업(修業)했다. 문수보살이 혹 보천(寶川)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成道記별)을 주기도 했다.

보천이 죽던 날, 후일에 산 속에서 행할 국가를 이롭게 할 일을 기록해 두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큰 산맥으로, 각 대(臺)는 진신이 항상 있는 곳이다. 푸른빛 방위인 동대(東臺) 북각(北角) 아래의 북대(北臺)의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어서 원상(圓像)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그린 1만 관음보살상을 모시도록 하라. 그리고 복전승(福田僧) 5명은 낮에는 8권의 <금경(金經)>과 <인왕반야(仁王般若)>·천수주(千手呪)를 읽고, 밤엔 <관음경(觀音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하고, 그곳을 원통사(圓通社)라 하라. 붉은빛 방위인 남대(南臺)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어 원상(圓像)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그린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地藏經)>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고, 밤엔 <점찰경(占察經)> 예참(禮懺)을 염송하고 이곳을 금강사(金剛社)라 일컬어라. 흰 빛 바위인 서대(西臺) 남쪽 면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원상(圓像) 무량수불(無量壽佛)과 흰 바탕에 그린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모시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8권의 <법화(法華)>를 읽고, 밤엔 아미타불(阿彌陀佛) 예참을 염송하고 수정사(水精社)라 일컬어라. 검은 빛 방위인 북대(北臺)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원상(圓像) 석가불(釋迦佛)과 검은 바탕에 그린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엔 <불보은경(佛報恩經)>과 <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엔 <열반경(涅槃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케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일컬어라. 누른 빛 방위인 중대(中臺)의 진여원(眞如院)에는 가운데에는 이상(泥像)으로 된 문수보살 부동상(不動像)을 모시고 뒷벽에는 누른 바탕에 그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삼십륙 문수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읽고, 밤에는 문수보살 예참을 염송하고 이곳을 화엄사(華嚴社)라 일컬어라. 보천암(寶川庵)을 고쳐 세워 화장사(華藏寺)라 하고 원상(圓像) 비로자나삼존(毗盧遮那三尊)과 대장경(大藏經)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문장경(門藏經)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할 것이며, 매년 100일 동안 화엄회(華嚴會)를 베풀고 이곳을 법륜사(法輪社)라 일컬어라. 이 화장사(華藏寺)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寺)로 하여 굳게 지키도록 하라. 여기에는 정행 복전(淨行 福田)에게 명하여 길이 향화(香火)를 계속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국왕(國王)은 오래 사시고 백성은 편안할 것이며, 문무(文武)가 모두 화평하고 백곡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下院)에 문수갑사(文殊岬寺)를 배치하여 사(社)의 도회(都會)로 삼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7명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화엄신중(華嚴神衆)의 예참(禮懺)을 행하고 위의 37명이 재(齋)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을 하서부(河西府) 도내(道內) 8주(州)의 조세(租稅)로써 공양하는 네 가지 물건의 자금에 충당할 것이다. 이렇게 대대(代代)의 임금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명주(溟州; 옛날의 해서부河西府) 오대산 보질도 태자전기(五臺山 寶叱徒 太子傳記)

신라의 정신태자(淨神太子) 보질도(寶叱徒)는 그 아우 효명태자(孝明太子)와 함께 하서부(河西府)의 세헌각간(世獻角干)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큰 고개를 넘어 각각 1,000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가서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 8월 5일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때 그 무리 중의 시위하는 자들은 두 태자를 찾지 못하고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 형 되는 태자는 오대산 중대(中臺) 남쪽 밑에 있는 진여원(眞如院) 터 아래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터에 풀로 암자를 지어 살고, 아우 태자 효명(孝明)은 북대(北臺)의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역시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형제 두 사람은 부처님에게 예배하고 염불하며 행실을 닦으면서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대(臺)에 나가서 공손하게 예배했다. 푸른 빛 방위인 동쪽 대(臺)의 만월형(滿月形)으로 된 산에는 관음보살의 진신(眞身) 1만이 항상 있고, 붉은 빛 방위인 남쪽 대(臺)의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항상 있고, 흰 빛 방위인 서쪽 대(臺)의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항상 있고, 검은 빛 방위인 북쪽 대(臺)의 상왕산(相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00 대아라한(大阿羅漢)이 항상 있고, 누른 빛 방위인 중앙 대(臺)의 풍로산(風盧山)은 또 지로산(地爐山)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비로자나(毗盧遮那)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항상 있다. 또 진여원(眞如院)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이른 아침이면 삼십륙형(三十六形; 대산오만진신전臺山五萬眞身傳에 나온다)으로 화하여 나타났다. 두 태자는 함께 예배하고, 날마다 이른 아침이면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서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에 공양했다.

이때 정신태자(淨神太子)의 아우 부군(副君)이 신라에 있어 왕위(王位)를 다투다가 죽음을 당하니 나라 사람들이 장군 네 명을 보내서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러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바로 이때 오색 구름이 오대산에서부터 신라에까지 뻗쳐 7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빛을 발했다. 나라 사람들은 그 빛을 찾아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질도태자(寶叱徒太子)는 울면서 돌아가지 않으려 하니 효명태자를 모시고 돌아가 왕위(王位)에 오르게 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20여 년인 신룡(神龍) 원년(705) 3월 8일에 진여원을 처음 세웠다 한다.

보질도태자는 항상 골짜기에 신령스러운 물을 마시더니 육신(肉身)이 공중을 떠서 유사강(流沙江)에 이르러 울진대국(蔚珍大國)의 장천굴(掌天窟)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다시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와 50년 동안이나 도를 닦았다고 한다. 오대산은 바로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로서 각 대(臺)에는 진신이 항상 있다고 한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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