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삼국유사 - 11

영지니 2008. 1. 13. 20:02

대산월정사(臺山月精寺) 오류성중(五類聖衆)

절 안에 전해 오는 고기(古記)를 상고하여 보면 이렇게 말했다. 자장법사(慈藏法師)는 오대산(五臺山)에 처음 이르러 진신(眞身)을 보려고 산기슭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으나, 7일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묘범산(妙梵山)으로 가서 정암사(淨巖寺)를 세웠다. 그 뒤에 신효거사(信孝居士)라는 이가 있었는데 혹은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化身)이라고도 했는데 그의 집은 공주(公州)에 있고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려고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학(鶴) 다섯 마리를 보고 활로 쏘나, 학 한 마리가 날개의 깃 한 조각을 떨어뜨리고 갔다. 거사는 그것을 집어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사람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이에 고기는 얻지 못하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어머니께 바쳤다.
그 후에 그는 중이 되어 자기 집을 내놓아서 절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효가원(孝家院)이다. 거사는 경주(慶州) 경계로부터 하솔(河率)에 이르러 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사람의 모양으로 보이므로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길에서 늙은 부인을 보고, 살 만한 곳을 물었더니 그 부인이 말했다.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는데 거기가 살 만합니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거사는 이것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가르침인 것을 알고, 곧 성오평(省烏坪)을 지나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 모옥(茅屋)을 지은 곳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윽고 중 다섯 명이 오더니 말한다.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袈裟) 한 폭은 지금 어디 있는가." 거사가 영문을 몰라하자 중이 또 말한다. "그대가 집어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본 그 학의 깃이 바로 가사이다." 거사가 그 깃을 내주자, 중은 그 깃을 가사의 뚫어진 폭 속에 갖다 대니 서로 꼭 맞았는데, 그것은 깃이 아니고 베였다. 거사는 다섯 중과 작별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들이 다섯 성중(聖衆)의 화신(化身)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月精寺)는 처음에 자장법사가 모옥을 지었으며, 그 다음에는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와서 살았고, 그 다음에는 범일(梵日)의 제자인 신의두타(信義頭陀)가 와서 암자를 세우고 살았으며 뒤에 또 수다사(水多寺)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와서 살았다. 이로부터 점점 큰 절을 이루었다. 절의 다섯 성중(聖衆)과 9층으로 된 석탑(石塔)은 모두 성자(聖者)의 자취이다.

상지자(相地者)가 말했다. "나라 안의 명산(名山)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
남월산(南月山; 또는 감산사甘山寺라고도 한다)

이 절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금당주미륵존상화광(金堂主彌勒尊像火光) 후기(後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원(開元) 7년 을미(乙未; 719) 2월 15일에 중아찬(重阿飡) 전망성(全忘誠)이 그의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죽은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서 공손하게 감산사(甘山寺)와 석미륵(石彌勒) 하나를 만들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前妻) 고로리(古老里), 후처(後妻) 아호리(阿好里)와, 또 서형(庶兄) 급막(及漠) 일길찬(一吉찬), 일당(一幢) 살찬(薩찬),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힐買) 등을 위하여 이러한 착한 일을 했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故人)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고인성지古人成之 이하는 글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옛 글 그대로 적어둘 뿐이다. 이 아래도 마찬가지다)

미타불화광(彌陀佛火光) 후기(後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侍全)은 일찍이 상의(尙衣)로서 임금을 모시고 또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도로 바치고 집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이때 국주(國主) 대왕(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죽은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 고로리(古老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서 감산(甘山)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절을 세웠다. 또 석미타(石彌陀) 하나를 만들어 죽은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하여 모셨는데,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제계帝系를 상고해 보면, 김개원金愷元은 태종太宗 김춘추金春秋의 여섯째 아들 개원각간愷元角干이며, 문희文熙가 낳은 이다. 성지전誠志全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우東海攸友는 필시 법민왕法敏王을 동해東海에 장사지낸 것을 말한 것인 듯싶다)


천룡사(天龍寺)

동도(東都)의 남산(南山) 남쪽에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세속(世俗)에서는 고위산(高位山)이라 한다. 산 남쪽에 절이 있는데 속칭(俗稱) 고사(高寺), 또는 천룡사(天龍寺)라고 한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는 이렇게 말했다. "계림(鷄林)에는 두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 줄기의 역수(逆水)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천재(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天龍寺)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이 생긴다."속전(俗傳)에는 이렇게 말한다. "역수는 이 고을 남쪽 마등오촌(馬等烏村)의 남쪽을 흐르는 내가 이것이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에서 시작되는데, 중국에서 온 사자(使者)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이내 나라가 망할 것이다.'"
또 서로 전하는 말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단월(檀越)에게 딸 둘이 있어서 이름을 천녀(天女)·용녀(龍女)라 하였는데, 부모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천룡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곳은 경지(境地)가 이상하고 불도(佛道)를 돕는 곳이었는데 신라 말년에 파괴되어 이미 오래되었다.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젖을 먹여 키운 최은함(崔殷함)의 아들 승로(承魯)가 숙(肅)을 낳고 숙(肅)이 시중(侍中)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제안(齊顔)이 이 절을 중수(重修)하여 없어졌던 절을 일으켰다. 이에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하고, 조정의 명을 받았으며, 다시 신서(信書)와 원문(願文)까지 절에 남겨 두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자 절을 지키는 신(神)이 되어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을 많이 나타냈다.

그 신서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단월인 내사시랑 동내사문 하평장사주국(內史侍郞 同內史門 下平章事柱國) 최제안(崔齊顔)은 쓰노라. 경주(慶州) 고위산(高位山)의 천룡사가 파괴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에 제자 최제안은 특별히 성수(聖壽)가 무강하시고 국가가 편안하고 태평하기를 원해서 전당(殿堂)·낭각(廊閣)과 방사(房舍)·주고(廚庫)를 모두 갖추어 이룩하고, 또 석조불(石造佛)과 이소불상(泥塑佛像) 몇 개를 만들어 석가만일도량을 열었다. 이미 국가를 위해서 수리하여 세웠으니 조정에서 절의 주지(住持)를 정해 보내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지만 이 주지를 교대할 때에는 도량(道場)의 중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가 없다. 희사(喜捨)한 토지를 가지고 사원(寺院)을 충족하게 하는 것을 보면, 팔공산(八公山)의 지장사(地藏寺)와 같은 절은 희사한 토지가 200결(結)이었고, 비슬산(毗瑟山)에 있는 도선사(道仙寺)는 20결이었고, 서경(西京) 사면에 있는 산사(山寺)들도 각기 20결씩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유직(有職)·무직(無職)을 물론하고 모름지기 계(戒)를 갖추고 재주가 높은 이를 뽑아서 절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여러 차례를 계속하여 주지로 삼아 분향(焚香)하고 도 닦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제자 제안(齊顔)은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 천룡사에서도 역시 절의 많은 중들 가운데서 재주와 덕이 함께 뛰어난 고승(高僧)으로 동량(棟樑)이 될 만한 사람을 뽑아서 주지로 삼아 길이 분향(焚香) 수도(修道)하게 하고자 한다. 이에 갖추어 글로 기록하여 강사(剛司)에게 맡겨 두는 것이니 이때부터 비로소 주지를 두게 되었다. 유수관(留守官)은 공문(公文)을 받아 도량의 여러 중들에게 보여 모두를 각각 알도록 할 것이다. 중희(重熙) 9년 6월 일에 관직(官職)을 갖추어 위와 같이 서명(署名)한다."
상고해 보면 중희(重熙)는 거란(契丹) 흥종(興宗)의 연호이며, 본조(本朝) 정종(靖宗) 7(6)년인 경신년(庚辰年; 1040)이다.


무장사(무藏寺) 미타전(彌陀殿)

서울 동북쪽 20리 쯤 되는 암곡촌(暗谷村) 북쪽에 무장사(무藏寺)가 있으니, 이것은 신라 제38대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아버지 대아간(大阿干) 효양(孝讓), 즉 추봉(追封)된 명덕대왕(明德大王)의 숙부 파진찬(波珍飡)을 추모(追慕)해서 세운 것이다. 그윽한 골짜기가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세운 듯하다. 그곳은 깊고 어두워 저절로 허백(虛白)이 생길 것이니, 이야말로 마음을 쉬고 도(道)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절의 위쪽에 아미타(阿彌陀)의 고전(古殿)이 있다. 곧 소성대왕(昭成大王; 혹은 昭聖大王)의 비(妃) 계화왕후(桂花王后)가, 대왕(大王)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왕후는 근심에 차서 황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지극히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했다. 이에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명복을 빌 것을 생각했다. 이때 서방(西方)에 아미타(阿彌陀)라는 대성(大聖)이 있어 지성으로 그를 믿으면 잘 구원하여 맞아 준다는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하고는 이에 육의(六衣)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구부(九府)에 저장해 두었던 재물을 다 내어 이름난 공인(工人)들을 불러서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 하나를 만들게 하고, 아울러 신중(神衆)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는 늙은 중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진인(眞人)이 석탑(石塔)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여 대중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에 숨겨 두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원래 바위가 험하고 시냇물이 급하게 흐르므로 공인(工人)들은 돌아다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터를 닦을 때에는 평탄한 곳을 얻어서 집을 세울 만하여 확실히 신령스러운 터와 같으니 보는 이들은 깜짝 놀라 좋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근고(近古)에 와서 미타전(彌陀殿)은 허물어지고 절만 홀로 남아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삼국(三國)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무藏寺)라고 한다"고 한다.


백엄사(伯嚴寺) 석탑사리(石塔舍利)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주첩(任道大監柱貼)에 이렇게 말했다. "선종(禪宗)의 백엄사(伯嚴寺)는 초팔현(草八縣; 지금의 초계草溪)에 있고, 절의 중 간유상좌(侃遊上座)는 나이 39세라 했고, 절을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전(古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전대(前代)인 신라 때에 북택청(北宅廳) 터를 희사해서 이 절을 세웠는데, 중간에 오래 폐지되었다가 지난 병인년(丙寅年; 1026)에 사목곡(沙木谷) 양부(陽孚) 스님이 고쳐 짓고 그 주지가 되었다가 정축년(丁丑年; 1037)에 죽었다. 을유년(乙酉年; 1045)에 희양산(曦陽山)의 긍양(兢讓) 스님이 와서 10년 동안 살다가 을미년(乙未年; 1055)에 다시 희양으로 돌아갔다. 그때 신탁(神卓) 스님이 남원(南原) 백암수(白암藪)에서 이 절에 와서 전에 있던 법대로 주지(住持)가 되었다. 또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와서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의 상규(常規) 10조(條)를 정했다. 또한 새로 5층 석탑을 세우고 진신(眞身) 불사리(佛舍利) 42알을 가져다 모셨다. 또 사재(私財)로 계를 모아서, '해마다 여기에 공양할 일, 특히 이 절의 법을 지키던 경승(敬僧)이었던 엄흔(嚴欣)·백흔(伯欣)의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嶽) 등 3위(位) 앞에 계를 모아 공양할 일(세속에 전하기는 엄흔嚴欣·백흔伯欣 두 사람이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백엄사伯嚴寺라 했으며, 이에 호법신護法神을 삼았다고 했다), 금당(金堂) 앞의 나무주발에 매달 초하룻날 공양미(供養米)를 갈아놓을 일' 등을 정했다. 이하 조목은 기록하지 않았다.


영취사(靈鷲寺)

절의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신라 진골(眞骨) 제31대왕 신문왕(神文王) 때인 영순(永淳) 2년(683; 본문本文에는 원년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장山國; 곧 동래현東萊縣이니 또한 내산국萊山國이라고도 한다)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야(桐旨野)에 이르러서 쉬었다. 여기에서 문득 보니 한 사람이 매를 놓아서 꿩을 쫓게 하자 꿩은 날아서 금악(金嶽)을 지나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없다. 방울소리를 듣고 찾아 굴정현(屈井縣) 관청 북쪽 우물가에 이르니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속에 있는데 물이 마치 핏빛 같았다. 여기에서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고, 매도 역시 그것을 측은하게 여겨서인지 감히 꿩을 잡지 않고 있다. 공(公)이 이것을 보고 측은히 여기고 감동하여 그 땅을 점쳐 보니 가히 절을 세울 만하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그 현청(縣廳)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절을 세워 이름을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유덕사(有德寺)

신라 대부각간(大夫角干) 최유덕(崔有德)이 자기 사삿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이름을 유덕사(有德寺)라고 했다. 그의 먼 자손 삼한공신(三韓功臣) 최언위(崔彦휘)가 유덕(有德)의 진영(眞影)을 여기에 걸어 모시고 또 비도 세웠다고 한다.


오대산문수사(五臺山文殊寺) 석탑기(石塔記)

뜰 가에 있는 석탑(石塔)은 대개 신라 사람이 세운 것이다. 만든 제도가 비록 순박하여 교묘하지는 못하지만 자못 영험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사실을 여러 옛 노인에게서 들었는데 이러하다. "옛날에 연곡현(連谷縣)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탑 하나가 배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그림자를 보자 물속 고기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난다. 이 때문에 어부(漁夫)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그림자를 따라서 찾아가니 이 탑이었다. 이에 도끼를 들어 그 탑을 쳐부수고 갔는데, 지금 이 탑의 네 귀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 까닭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탄식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그 탑의 위치가 조금 동쪽으로 당겨져서 중앙에 있지 않은 것을 괴상히 여겨서 현판 하나를 쳐다보니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비구(比丘) 처현(處玄)이 일찍이 이 절에 있으면서 탑을 뜰 가운데로 옮겼더니 그 후 30여 년 동안 잠잠히 아무 영험도 없었다. 일자(日者)가 터를 구하려고 여기에 와서 탄식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세울 곳이 아닌데 어찌해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는가'했다. 이에 여러 중들이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나는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처의 위신(威神)이 그 자취를 나타내어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이같이 빠른 것을 보고서 어찌 불자(佛子)가 된 사람으로서 잠자코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정풍(正豊) 원년 병자(丙子; 1156) 10월 일에 백운자(白雲子)는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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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4권

삼국유사 제 4권
의해 제 5
의해(意解) 제5

원광서학(圓光西學)

<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 제13권에 실려 있는 말이다. 신라 황륭사(皇隆寺)의 중 원광(圓光)의 속성(俗姓)은 박씨(朴氏)이다. 본래 삼한(三韓), 즉 변한(卞韓)·진한(辰韓)·마한(馬韓)에 살았으니, 원광은 곧 진한 사람이다. 대대로 해동(海東)에 살아 조상의 풍습(風習)이 멀리 계승되었다. 그는 도량(道量)이 넓고 컸으며, 글을 즐겨 읽어 현유(玄儒)를 두루 공부하고 자사(子史)도 연구하여 글 잘한다는 이름을 삼한(三韓)에 떨쳤다. 그러나 넓고 풍부한 지식은 오히려 중국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여 드디어 친척과 벗들을 작별하고 중국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나이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金陵)으로 가니, 당시는 진(陳)나라 때로서 문명(文明)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었다. 거기에서 전에 의심나던 일을 묻고 도(道)를 들어서 뜻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장엄(莊嚴) 민공(旻公)의 제자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본래 세상의 모든 전적(典籍)을 읽었기 때문에 이치를 연구하는 데는 신(神)이라고 했는데 불교(佛敎)의 뜻을 듣고 보니 지금까지 읽고 있던 것은 마치 썩은 지푸라기와 같았다. 명교(名敎)를 헛되이 찾은 것이 생애(生涯)에 있어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이에 진(陳)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도법(道法)에 돌아갈 것을 청하니 칙령(勅令)을 내려 이를 허락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중이 되어 이내 계(戒)를 갖추어 받고 두루 강의하는 곳을 찾아서 좋은 도리를 다 배웠으며, 미묘(微妙)한 말을 터득하여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성실(成實)>의 열반(涅槃)을 얻어 마음 속에 간직해 두고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연구해 찾았다. 끝으로 또 오(吳)나라 호구산(虎丘山)에 올라가 염정(念定)을 서로 따르고, 각관(覺觀)을 잊지 않으니 중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임천(林泉)에 모여들었다. 또 <사함(四含)>을 종합해 읽어 그 공효(功效)가 팔정(八定)에 흐르니 명선(明善)을 쉽게 익혔고 통직(筒直)에 어그러진 것이 없었다.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몹시도 맞았기 때문에 드디어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밖의 인사(人事)를 아주 끊고 성인(聖人)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며 생각을 청소(靑소)에 두고 길이 속세(俗世)를 하직했다.

이때 한 신사(信士)가 있어 산 밑에 살고 있더니, 원광(圓光)에게 나와서 강의해 주기를 청했지만 이를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맞아가려 하므로 드디어 그 뜻을 따라 처음에는 <성실론(成實論)>을 말하고 끝에는 <반야경(般若經)>을 강의했는데, 모두 해석이 뛰어나고 통철하며 가문(嘉問)을 전해 옮겨서 아름다운 말과 뜻으로 엮어 나가니, 듣는 자가 매우 기뻐하여 모든 것이 마음에 흡족했다.

이로부터 예전의 법에 따라 남을 인도하고 교화(敎化)하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매양 법륜(法輪)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문득 세상 사람들을 불법(佛法)으로 기울어지게 했다. 이는 비록 다른 나라에서의 통전(通傳)이지만 도에 젖어서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명망(名望)이 널리 흘러서 영표(嶺表)에까지 전파되니,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지고 오는 자가 마치 고기 비늘처럼 잇달았다. 이때는 마침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천하를 다스릴 때여서 그 위엄이 남쪽 나라에까지 미쳤다.

진(陳)나라의 운수가 다해서 수(隋)나라 군사가 양도(揚都)에까지 들어가니 원광은 드디어 난병(亂兵)에게 잡혀서 장차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수의 대장(大將)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구하려 하였으니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이 탑 앞에 결박되어 장차 죽음을 당하려 하고 있다. 대장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 보냈으니, 그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영험을 나타냄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학문이 오월(吳越)을 통달했기 때문에 문득 중국 북쪽 지방인 주(周)와 진(秦)의 문화를 보고자 하여 개황(開皇) 9년(589)에 수나라 서울에 유학(遊學)했다. 마침 불법의 초회(初會)를 당해서 섭론(攝論)이 비로소 일어나니 문언(文言)을 받들어 간직하여 미서(微緖)를 떨치고 또 혜해(慧解)를 달려 이름을 중국 서울에까지 드날렸다. 공업(功業)이 이미 이루어지자 신라로 돌아가서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본국(本國)인 신라에서는 멀리 이 소식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아뢰어 돌려보내 달라고 자주 청했다. 수나라 임금은 칙명을 내려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원광이 여러 해 만에 돌아오니 노소(老少)가 서로 기뻐하고 신라의 왕 김씨(金氏)는 그를 만나보고는 공경하면서 성인(聖人)처럼 우러렀다.

원광은 성질이 한가롭고 다정박애(多情博愛)하였으며,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표(전表)나 계서(啓書) 등 왕래하는 국명(國命)이 모두 그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 온 나라가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모두 그에게 맡기고 도(道)로 교화(敎化)하는 일을 물으니, 처지는 비록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것과는 달랐지만 실지로는 중국의 모든 것을 보고 온 것 같아서 기회를 보아 교훈을 펴서 지금까지도 그 모범(模範)을 보였다. 나아가 이미 높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궐에 출입했으며, 의복(衣服)과 약(藥)과 음식은 모두 왕이 손수 마련하여 좌우의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지 않고 왕이 혼자서 복을 받으려 했으니, 그 감복하고 공경한 모습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은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위문하면서 법을 남겨 백성을 구제할 일을 물으니, 그는 상서로운 것을 말하여 그 공덕(功德)이 바다 구석에까지 미쳤다.

신라 건복(建福) 58년(640)에 그는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을 느끼더니 7일을 지나 간곡한 계(誡)를 남기고는 그가 있던 황륭사(皇隆寺) 안에 단정히 앉아서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99세요, 때는 당(唐)나라 정관(貞觀) 4년이었다(마땅히 14년이라야 옳을 것이다). 임종(臨終)할 때 동북쪽 공중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 차니 모든 중들과 속인(俗人)들은 슬퍼하면서도 한편 경사로 여기면서 그의 영감(靈感)임을 알았다. 드디어 교외(郊外)에 장사지내는데 국가에서 우의(羽儀)와 장구(葬具)를 내려 임금의 장례와 같이 했다.

그 뒤에 속인이 사태(死胎)를 낳은 일이 있었는데, 지방 속담에 말하기를, "복 있는 사람의 무덤에 묻으면 후손(後孫)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므로 남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벼락이 사태를 쳐서 무덤 밖으로 내던졌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그를 존경하지 않던 자도 모두 우러러 숭배하게 되었다.

그의 제자 원안(圓安)은 정신이 지혜롭고 바탕이 총명하며, 천성이 두루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여 그윽한 곳에서 도(道)를 구하면서 스승을 우러러 사모했다. 그는 드디어 북쪽으로 구도(九都)에 가고, 동쪽으로 불내(不耐)를 보고, 또 서쪽으로 북쪽 중국인 연(燕)과 위(魏)에 가고, 뒤에는 장안(長安)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리하여 각 지방의 풍속에 자세히 통하고 여려 가지 경륜(經綸)을 구해서 중요한 줄거리를 널리 익히고 자세한 뜻도 밝게 알았다. 그는 늦게 심학(心學)에 돌아갔는데 세속 사람보다 자취가 높았다. 처음 장안의 절에 있을 때 도(道)가 높다는 소문이 나자 특진(特進) 소우(蕭瑀)가 임금에게 청하여 남전(藍田) 땅에 지은 진량사(津梁寺)에 살게 하고 사사(四事)의 공급이 온종일 변함이 없었다.

원안이 일찍이 원광의 일을 기록했는데 이렇게 말했다. "본국(本國)의 임금이 병이 나서 의원이 치료해도 차도가 없으므로 원광을 청해 궁중에 들여 별성(別省)에 모셔 있게 하면서 매일 밤 두 시간씩 깊은 법을 말하여 참회의 계(戒)를 받으니 왕이 크게 신봉했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니 금빛이 찬란하고 일륜(日輪)의 상(像)이 그의 몸을 따라다니니 왕후(王后)와 궁녀(宮女)들도 모두 이것을 보았다. 이로부터 거듭 승심(勝心)을 내어 원광을 병실(病室)에 머물러 있게 했더니 오래지 않아 병이 나았다. 원광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에 정법(正法)을 널리 펴고 해마다 두 번씩 강론하여 후학(後學)을 양성하고 보시(布施)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 데 쓰게 하니, 남은 것은 다만 가사(袈裟)와 바리때뿐이었다."


또 동경(東京)의 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효(貞孝)의 집에 있는 고본(古本) <수이전(殊異傳)>에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이 실려 있는데 이렇게 말했다. 법사의 속성은 설씨(薛氏)로 왕경(王京) 사람이다. 처음에 중이 되어 불법(佛法)을 배웠는데 나이 30세에 한가히 지내면서도 도를 닦으려고 생각하여 삼기산(三岐山)에 홀로 살기를 4년, 이때 중 하나가 와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절을 짓고 2년 동안 살았다. 그는 사람됨이 강하고 용맹스러우며 주술(呪術)을 배우기도 좋아했다.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서 불경을 외는데 갑자기 신(神)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그대의 수행(修行)은 참 장하기도 하오. 대체로 수행하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법대로 하는 이는 드무오. 지금 이웃에 있는 중을 보니 주술을 빨리 익히려 하지만 얻는 것이 없을 것이며, 시끄러운 소리가 오히려 남의 정념(情念)을 괴롭히기만 하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을 방해하여 매양 지나다닐 때마다 미운 생각이 날 지경이오. 그러니 법사는 나를 위해서 그 사람에게 말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하오. 만일 오랫동안 거기에 머무른다면 내가 갑자기 죄를 저지를지도 모르오."

이튿날 법사가 가서 말했다. "내가 어젯밤 신의 말을 들으니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 중은 대답한다.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魔鬼)의 현혹을 받습니까. 법사는 어찌 호귀(狐鬼)의 말을 근심하시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했다. "전에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중이 무어라 대답합디까." 법사는 신이 노여워할까 두려워서 대답했다. "아직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말을 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신은 말한다. "내가 이미 다 들었는데 법사는 어찌해서 말을 보태서 하시오. 그대는 잠자코 내가 하는 것만 보오." 말을 마치고 가더니 밤중에 벼락과 같은 소리가 났다. 이튿날 가서 보니 산이 무너져서 중이 있던 절을 묻어 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한다. "법사가 보기에 어떠하오." 법사가 대답했다. "보고서 몹시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신이 또 말한다. "내 나이가 거의 3,000세가 되고 신술(神術)도 가장 훌륭하니 이런 일이야 조그만 일인데 무슨 놀랄 것이 있겠소. 나는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온 천하의 일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소. 이제 생각하니 법사가 오직 이곳에만 있으면 비록 자기 몸을 이롭게 하는 행동은 있을지 모르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로는 없을 것이오. 지금 높은 이름을 드날리지 않는다면 미래에 승과(勝果)를 얻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어찌 해서 불법을 중국에서 취하여 이 나라의 모든 혼미(昏迷)한 무리를 지도하지 않으시오." 법사가 대답했다.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래 나의 소원이지만 바다와 육지가 멀리 막혀 있기 때문에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 이에 신은 중국 가는 데 필요한 일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법사는 그 말에 의해서 중국에 갔으며, 11년을 머무르면서 삼장(三藏)에 널리 통달하고 유교(儒敎)의 학술(學術)까지도 겸해서 배웠다.

진평왕(眞平王) 22년 경신(庚申; 600, <삼국사三國史>에는 다음해인 신유년辛酉年에 왔다고 했다)에 법사는 중국에 왔던 조빙사(朝聘使)를 따라서 본국에 돌아왔다. 법사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하여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에 갔다. 밤중에 신이 역시 와서 법사의 이름을 부르고 말했다. "바다와 육지의 먼 길을 어떻게 왕복하였소."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 "내 또한 그대에게 계(戒)를 드리겠소." 말하고는 이에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을 맺었다. 법사가 또 청했다. "신의 참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까." "법사가 만일 내 모양을 보고자 하거든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가를 바라보시오." 법사가 이튿날 아침에 하늘을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가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한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소."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고 이상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속칭(俗稱) 비장산(臂長山)이라고 했다. 신이 말했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하더라도 무상(無常)의 해(害)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니, 나는 앞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 그 고개에 사신(捨身)할 것이니 법사는 거기에 와서 영원히 가 버리는 내 영혼을 보내 주오." 법사가 약속한 날을 기다려서 가 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는데, 검기가 옻칠한 것과 같고 숨조차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그를 존경하여 스승으로 삼으니 법사는 항상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강의했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항상 변방을 침범하니 왕은 몹시 이를 걱정하여 수(隋)나라(마땅히 당唐나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에 군사를 청하고자 법사를 청하여 걸병표(乞兵表)를 짓게 했다. 수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더니 30만 군사를 내어 친히 고구려를 쳤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술(儒術)까지도 두루 통달한 것을 세상 사람은 알았다. 나이 84세에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지냈다.

또 <삼국사(三國史)> 열전(列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어진 선비 귀산(貴山)이란 자는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마을의 추항(추項)과 친구가 되어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들과 함께 사귀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욕 당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도를 묻지 않겠는가."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가슬갑(嘉瑟岬; 혹은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고 하는데, 모두 방언方言이다. 갑岬은 속언俗言으로 고시古尸(곳)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고시사古尸寺(곳절)라고 하니 갑사岬寺라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 9,000보步쯤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 하며,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에 잠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그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저희들 시속 선비는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을 주시어 평생의 경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원광이 말했다.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으니, 1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일이요, 2는 부모를 효도로 섬기는 일이요, 3은 벗을 신의(信義)로 사귀는 일이요, 4는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일이요, 5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일이다.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일은 모두 알아듣겠습니다마는, 말씀하신 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것은 아직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원광이 말했다. "6재일(齋日)과 봄·여름에는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다. 말·소·개 등 가축을 죽이지 않고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세물(細物)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또한 죽일 수 있는 것도 또한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좋은 경계인 것이다." 귀산 등이 말했다. "지금부터 이 말을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모두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

또 건복(建福) 30년 계유(癸酉; 613, 즉 진평왕眞平王 즉위 35년) 가을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오자 황룡사(黃龍寺)에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여러 고승(高僧)들을 청해다가 불경을 강의하니 원광이 제일 윗자리에 있었다.

논평해 말했다. "원종(原宗)이 불법을 일으킨 후로 진량(津梁)이 비로소 설치되었으나 당오(堂奧)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마땅히 귀계멸참(歸戒滅懺)의 법으로 어리석고 어두운 중생들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원광은 살던 가서갑(嘉西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어 이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다. 이때 시주(施主)하던 여승(女僧) 하나가 점찰보에 밭을 바쳤는데, 지금 동평군(東平郡)의 밭 100결(結)이 바로 이것이며, 옛날의 문서가 아직도 있다.

원광은 천성이 허정(虛靜)한 것을 좋아하여, 말할 때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었고 얼굴에 노여워하는 빛이 없었다. 나이가 이미 많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궐에 출입했는데, 그 당시 덕의(德義)가 있는 여러 어진 선비들도 그의 위에 뛰어날 사람이 없었으며, 그의 풍부한 문장은 한 나라를 기울였다. 나이 80여 세로 정관(貞觀) 연간에 세상을 떠나니 부도(浮圖)가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 지금의 안강安康 서남쪽 골짜기 즉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있다)에 있다.

당전(唐傳)에서는 황륭사(皇隆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고 했는데 그 장소를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이것은 황룡사(黃龍寺)의 잘못인 듯 싶으니, 마치 분황사(芬皇寺)를 왕분사(王芬寺)라고 한 예와 같다. 위와 같이 당전과 향전(香奠)의 두 전기(傳記)에 있는 글에 따르면, 그의 성은 박(朴)과 설(薛)로 되었고, 출가(出家)한 것도 동쪽과 서쪽으로 되어 있어 마치 두 사람 같으니, 감히 자세하고 명확하게 결정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여기에는 두 전기를 모두 적어 둔다. 그러나 그 두 전기에 모두 작갑(鵲岬)·이목(璃目)과 운문(雲門)의 사실이 없는데, 향인(鄕人) 김척명(金陟明)이 항간(巷間)의 말을 가지고 잘못 글을 윤색해서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을 지어 함부로 운문사(雲門寺)의 개조(開祖)인 보양(寶壤) 스님의 사적과 뒤섞어서 하나의 전기를 만들어 놓았다. 뒤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편찬한 자도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기록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많이 현혹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분별하고자 한 자(字)도 가감(加減)하지 않고 두 전기의 글을 자세히 적어 두는 것이다.

진(陳)·수(隋) 때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바다를 건너가서 도를 배운 자는 드물었으며, 혹시 있다고 해도 그 이름을 크게 떨치지는 못했다. 원광 뒤로 계속해서 중국으로 배우러 간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니 원광이 길을 열었다 하겠다.

찬(讚)해 말한다.

바다 건너 한(漢)나라 땅을 처음으로 밟고,
몇 사람이나 오가면서 밝은 덕을 배웠던가.
옛날의 자취는 오직 푸른 산만이 남았지만,
금곡(金谷)과 가서(嘉西)의 일은 들을 수 있네.


보양이목(寶壤梨木)

중 보양전(寶壤傳)에는 그의 향리(鄕里)와 씨족(氏族)은 실려 있지 않으나 삼가 청도군청(淸道郡廳)의 문적(文籍)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씌어 있다. "천복(天福) 8년 계유(癸酉; 943. 태조太祖 즉위 제26년) 정월 일의 청도군 계리(界里) 심사(審使) 순영(順英) 대내말수문(大乃末水文) 등의 주첩(柱貼) 문공(文公)을 보면,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 장생(長生)은 남쪽은 아니점(阿尼岾)이요, 동쪽은 가서현(嘉西峴)이라고 했다. 절의 삼강(三剛)의 전주인(典主人)은 보양화상(寶壤和尙)이요, 원주(院主)는 현회장로(玄會長老), 정좌(貞座)는 현량상좌(玄兩上座), 직세(直歲)는 신원선사(信元禪師; 위 공문公文은 청도군淸道郡의 도전장부都田帳簿에 의한 것)다."했다.

또 개운(開運) 3년 병진(丙辰(午); 946)의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 장생표탑(長生標塔)에 관계되는 공문(公文) 한 통에 보면, "장생(長生)이 11개이니 아니점·가서현·무현(畝峴)·서북매현(西北買峴; 혹은 면지촌面知村)·북저족문(北猪足門) 등이다."했다.

또 경인년(庚寅年)의 진양부첩(晉陽府貼)에는, "오도안찰사(五道按察使)가 각 도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사원(寺院)이 처음 세워진 연월(年月)과 그 모양을 자세히 조사해서 장부를 만들 때, 차사원(差使員) 동경장서기(東京掌書記) 이선(李선)이 자세히 조사하여 적었다."고 했다.

정풍(正豊) 6년 신사(辛巳; 1161, 이것은 대금大金의 연호이니 본조本朝 의종毅宗 즉위 16년임)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郡中古籍裨補記)에 따르면 이렇다. 청도군 전부호장(前副戶長) 어모부위(禦侮副尉) 이칙정(李則禎)의 집에 있는 옛 사람들의 소식 및 우리말로 전해 오는 기록에는, 치사(致仕)한 상호장(上戶長) 김양신(金亮辛), 치사한 호장 민육(旻育), 호장 동정(同正) 윤응(尹應), 전기인(前其人) 진기(珍奇)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用成) 등의 말이 적혀 있다. 그 때 태수(太守) 이사로(李思老)와 호장 김양신은 나이 89세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이 70세 이상이었다. 다만 용성만이 나이 60세 이상(운운云云이라 쓴 것은 이 다음부터는 쓰지 않는다)이었다. 신라 시대 이래로 이 청도군의 절과 작갑사(鵲岬寺)와 그밖의 크고 작은 사원(寺院)인 대작갑(大鵲岬)·소작갑(小鵲岬)·소보갑(所寶岬)·천문갑(天門岬)·가서갑(嘉西岬) 등 다섯 갑사(岬寺)가 모두 후삼한(後三韓)의 난리에 없어져서 다섯 갑사(岬寺)의 기둥을 대작갑사(大鵲岬寺)에 모아 두었다.

조사(祖師) 지식(知識; 윗글에는 보양寶壤이라 했다)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가운데에 이르니,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더니 금빛 비단의 가사(袈裟) 한 벌을 주고, 겸하여 아들 이목(璃目)을 그에게 주면서 조사를 모시고 가게 했다. 이때 용왕은 부탁한다. "지금 삼국(三國)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에 귀의(歸依)하는 군주(君主)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本國)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살면 능히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몇 해가 안 되어서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니 갑자기 늙은 중이 스스로 원광(圓光)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궤를 안고 나와서 조사에게 주더니 이내 없어졌다(상고하건대 원광圓光은 진陳의 말년에 중국에 들어갔다가 수隋의 개황開皇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또 가서갑嘉西岬에 살다가 황륭사皇隆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햇수를 계산하면 청태淸泰 초년까지는 무려 300년이나 된다. 이제 여러 갑사岬寺가 모두 없어진 것을 슬퍼하고 보양寶壤이 와서 장차 절이 이룩될 것을 보고 기뻐하여 여기에 왔을 것이다).

이에 보양법사(寶壤法師)는 장차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려 하여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의 누런 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가서 찾아보면 아무런 자취도 없으므로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다. 법사는 해룡(海龍)이 작갑(鵲岬)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그 곳을 찾아가서 파보니 과연 예전 벽돌이 수없이 있었다. 이것을 모아 쌓아 올려 탑을 이루니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으므로 이곳이 전대(前代)의 절터임을 알았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살면서 절 이름을 작갑사(鵲岬寺)라고 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하고 보양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다섯 갑(岬)의 밭 500결(結)을 합해서 이 절에 바쳤다. 또 청태(淸泰) 4년 정유(丁酉; 937)에는 절 이름을 운문선사(雲門禪寺)라 내리고, 가사(袈裟)의 신령스러운 음덕(蔭德)을 받들게 했다. 이때 이목(璃目)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법화(法化)를 음으로 돕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서 밭에 채소가 모두 타고 마르므로 보양(寶壤)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고을이 흡족하였다. 이에 천제(天帝)가 그를 죽이려 하자 이목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고하니 법사가 침상 밑에 숨겨 주었다. 이윽고 천사(天使)가 뜰에 와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자 법사는 뜰앞의 배나무[梨木]를 가리키니 천사는 거기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부러졌으므로 용이 쓰다듬으니 곧 되살아났다. 그 나무는 근년에 와서 땅에 쓰러졌는데 어떤 사람이 망치를 만들어서 선법당(善法堂)과 식당(食堂)에 안치(安置)하였다. 그 망치 자루에는 명(銘)이 있다.

처음 법사가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화군(推火郡)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마침 고려 태조가 동쪽을 정벌해서 청도(淸道)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산적들이 견성(犬城; 산봉우리가 물을 굽어보고 뾰족하게 섰는데 지금 민간民間에서 이것을 미워하여 이름을 견성犬城이라고 고쳤다 한다)에 모여서 교만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이르러 법사에게 산적들을 쉽게 물리칠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대답했다. "대체로 개란 짐승은 밤만을 맡았고 낮은 맡지 않았으며, 앞만 지키고 그 뒤는 잊고 있습니다. 하오니 마땅히 대낮에 그 북쪽으로 쳐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태조가 그 말을 좇으니 적은 과연 패해서 항복했다. 태조는 법사의 그 신통한 꾀를 가상히 여겨 매년 가까운 고을의 조(租) 50석을 주어 향화(香火)를 받들게 했다. 이에 이 절에 이성(二聖)의 진용(眞容)을 모시고 절 이름을 봉성사(奉聖寺)라고 했다. 뒤에 법사는 진용을 작갑사(鵲岬寺)로 옮겨서 크게 절을 세우고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古傳)에는 실려 있지 않고 다만 민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석굴사(石굴寺)의 비허사(備虛師; 혹은 비허毗虛)와 형제가 되어 봉성(奉聖)·석굴(石굴)·운문(雲門) 등 세 절이 연접된 산봉우리에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 왕래했다."

후세 사람들이 <신라이전(新羅異傳)>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사의 탑과 이목(璃目)의 사실을 원광(圓光)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해 넣었다. 또 견성(犬城)의 사실을 비허사(備虛師)의 전기에 넣은 것도 이미 잘못인 데다가 더구나 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지은 자도 여기에 따라서 글을 윤색하고 보양(寶壤)의 전기가 없어 뒷사람들이 의심내고 잘못 알게 했으니 그 얼마나 무망(誣妄)한 짓인가.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혹은 이 비용이 금빛을 칠할 때 든 것이라고도 한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가위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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