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4>
중국인들의 미운 오리새끼, 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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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상하리만치 중국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미국과 일본의 팽창주의는 열을 올리면서 성토하지만 우리와는 가까이 있어 현실적으로 더욱 무서운 중국의 팽창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든지 이해하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중국인들이 우리들에게 한 욕설조차도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학자들이 쓴 우리의 역사서들을 보면 우리의 조상이 되는 고대의 한반도인을 부르는 말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예맥(濊貊)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중국인들이 고대 한반도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말을 한자 음(音)을 빌어서 표현한 말이죠. 문제는 중국인들이 사용했던 예맥(濊貊)이라는 말은 ‘(똥이나 오물이 묻어) 더러운 (승냥이 또는 삵괭이 같은) 야만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예(濊)라는 글자는 예(穢)와 거의 같은 글자로 주로 오물(汚物)들이 묻은 것을 의미합니다. 동예(東濊 : 동쪽에 사는 더러운 족속)도 마찬가지지요.
예맥이나 동예 등의 말은 흉노(匈奴)라는 말이나 견융(犬戎)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체로 중국인들은 북방의 유목민들 즉 대쥬신족(?)들을 더럽고 시끄럽고 흉포한 개나 승냥이, 또는 삵괭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중국인들은 미국을 아름다운 나라라는 의미로 미국(美國)으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코카콜라도 가구가락(可口可樂) 즉 입에서 즐기기에 충분한 음료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맥이라는 말의 발음은 현대 중국어로 ‘웨이모’, 또는 ‘후이모’라고 읽혀지는데 일부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이 ‘후이모’라는 발음이 고대의 발음에 가까우며 ‘고마’라는 말에서 변화했다는 것이죠. 즉 ‘곰(熊)’이라는 말이죠(참고로 일본어로는 ‘구마’입니다). 이것은 곰 숭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시베리아인들에게 곰 숭배는 널리 퍼져 있는 보편적인 신앙이기도 했지요. 북만주 일대의 에벤크족은 곰을 ‘호모뜨이’라고 하고 영혼은 ‘호모꼬르’, 조상은 ‘호모켄’이라고 부릅니다.
가끔씩 한국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예맥이나 동이 같은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내버려둘 뿐 아니라 일부 사람들이 동이(東夷)를 자랑스러운 말로 재해석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침묵합니다. 아무리 기록이 없다고 해도 이런 유의 말들을 사용하지 않도록 과거의 우리가 우리를 불렀던 명칭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종류의 침묵은 결국 한족의 편협한 중화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요?
(1) 조조ㆍ원소 비교론
원소(袁紹)는 중국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을까요? 원소는 장ㆍ단점이 많은 사람으로 어쩌면 전형적인 중국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예의가 바르고 인자하여 덕(德)이 넘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측면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아들의 병 때문에 군대를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가정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 중국인들을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원소의 모습은 정사와 대부분 일치합니다. 원소가 비난을 면키 어려운 잘못한 일들은 ① 환관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한 행위, ② 한복의 땅을 차지하고서도 오히려 한복이 자살하게끔 한 행위, ③ 여포를 이용한 후 죽이려 한 것 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환관에 대한 살육만이 나관중 ‘삼국지’에 나옵니다.
먼저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원소에 대한 평가를 보죠. 곽가(郭嘉 : 170-207)는 조조(曹操)와 원소를 비교하면서 원소를 항우(項羽)에, 조조를 유방(劉邦)에 각각 비교하고 있지요. 곽가는 조조에게 “한나라 때의 유방은 원래 항우의 적수가 아니었음을 승상께서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항우는 귀족 출신으로 지금의 원소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개인적인 무용과 힘, 그리고 초기의 군사력은 항우에 못 미쳤으나 지략이 항우보다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지략에 의해서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천하를 통일하여 한고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조가 반신반의하자 곽가는 다시 원소의 군대가 조조의 군대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① 원소는 허례허식을 좋아하여 예절이 번다(煩多)하고, ② 조조는 천자를 모시고 있으며, ③ 원소는 법을 무시하고 관용(寬容)과 인(仁)만 중시하는 유가(儒家)를 숭상하지만 조조는 법(法)을 숭상하고 있고, ④ 조조는 원소보다 판단력이 앞서 있으며 책략이 뛰어나고 결단성이 있고 인재(人才)를 항상 지성을 다하여 모셔 오기 때문에 원소를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조조-원소의 비교론입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원소가 분명 허세가 강하고 실속이 없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정사에는 없고 정사에는 조조가 이와 유사한 말을 한 대목이 있습니다.
“(조조가 말하기를)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알고 있소. 원소의 뜻은 크지만 지혜가 적고, 겉모습은 엄정하지만 속으로는 겁이 많은 사람이요. 원소는 질투심도 많은 편이오. 원소의 군대를 보면, 병사는 많아도 편제가 부실하고 장수들 또한 교만하면서 명령 계통도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아요(위서, 무제기).”
조조는 확실히 원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 조조가 원소의 아주 깊은 부분까지도 잘 알 정도로 친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곽가가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조조와 비교하자면 원소는 확실히 유가(儒家)에 가까운 사람이고 조조는 병가(兵家) 또는 법가(法家)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나관중 ‘삼국지’에는 원소의 성품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죠. 전풍(田豊 : ?-200)이 조조가 유비를 치러 간 사이에 군대를 일으켜 허도를 공격하라고 진언했을 때 원소는 막내 아들이 아파서 그것을 따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즉 유비가 조조를 떠난 후 동승의 사건이 터지고 조조는 군대를 일으켜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친서(親書)를 손건에게 주어 기주의 원소에게로 보냅니다. 전풍은 조조가 유비를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원소에게 “지금 조조가 유비를 치려고 서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조조가 동쪽으로 유비를 치러 가면 허도가 비어있을 것입니다. 이 기회를 틈타 비어있는 허도를 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입니다. 이것은 위로는 천자를 보필하는 길이요. 아래로는 만 백성을 구하는 길이 됩니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기 어렵습니다. 장군께서는 빨리 결단을 내리십시오.”라고 하자 원소는 “우리 막내가 지금 너무 몸이 아프네. 이 녀석이 지금 등창이 생겨 다 죽어 가는데 내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겠느냐?” 라고 하며 거절합니다. 그러자 전풍은 지팡이로 땅을 치며 말합니다. “아, 우리는 이제 큰일이다. 백년에 한번 올까말까 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것도 사사로운 집안문제 때문에 천하의 주인 노릇을 못하게 되었군. 슬픈 일이로다.”
이 사건은 정사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이 대목은 원소가 군주로서 얼마나 답답한 사람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즉 원소는 국가의 대사를 사사로운 개인적 사정으로 그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좀 더 냉정히 볼 필요도 있습니다. 조조가 유비를 공격한 것은 서기 200년 1월입니다. 대개의 일반적인 군주들은 정월(正月)부터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정월에는 농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군대를 일으키면 사실상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되고 백성들 삶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도 만물의 싹을 키우는 시점에서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군주의 도(道)라고 할 수는 없지요. 특히 유교를 중시하는 군주라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경제적인 타격이 매우 클 것입니다). 국가의 절대적 위기 상황이라면 모를까 군주들이 함부로 선택하기는 어려운 일이죠.
이 점에서 조조는 원소에 비하여 매우 자유롭게 용병(用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가피할 경우에는 정월부터 전쟁을 하는 수도 있겠지만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중시했던 당시의 분위기로 본다면 정월에는 군대의 동원을 자제하는 것이 원칙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소가 당시 전풍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군대 동원을 거부한 데는 보다 유교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죠. 아무리 난세라 해도 이른 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것이며 더구나 아들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원소가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섭리를 무시하는 것으로 원소가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물론 그것은 원소의 판단 문제지요. 원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조조에 비하여 강하기 때문에 굳이 이 시점에서 백성들의 삶을 담보로 군대를 일으키지 않아도 조조를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선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원소의 이 같은 행위가 비난을 받는다면 유비가 형주에서 많은 백성들을 몰고 다닌 것도 똑같이 잘못된 행위지요. 전쟁터에 많은 군중들과 더불어 병력을 이동시키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유비는 천하의 성군으로 묘사하고 원소는 오히려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으니 불공평한 일입니다.
제가 보기엔 원소가 조조보다는 오히려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가까운 사람으로 보입니다. 조조는 유교의 일반적 가르침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군대를 일으키고 정책을 시행한 까닭에 중원(中原)을 통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원소가 4대 삼공의 명문가의 후손이었고 조조는 명문가이긴 해도 환관의 후예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원소는 매우 중국적인 요소를 많이 가진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중국인들이 왜 원소를 비하(卑下)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원소가 패자(敗者)이므로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유비는 같은 유의 패자라도 역사를 두고 평가를 받았지 않습니까? 나관중 ‘삼국지’를 보면 원소를 칭찬하는 구절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요?
(2) 중국인들의 미운 오리, 원소
원소가 나관중 ‘삼국지’의 편집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힌 까닭을 다른 각도에서 한번 살펴봅시다. 나관중 ‘삼국지’의 “곽가의 유언은 조조를 도와 요동(遼東)을 평정하다”라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조조가 문무백관을 모아 요서 지방의 오환(烏桓)을 토벌하려 하자, 조홍(曹洪 : ?-232) 등이 유표나 유비가 허도(허장)를 공격할 위험성을 들어 반대합니다. 이때 곽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공들은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지금 주공의 위력은 천하에 떨치고 있습니다. 사막의 사람(오랑캐)들은 아군이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공격에 대한 대비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부터 원소는 오환에 은혜가 있는데다 원상과 원희 형제를 살려둔다면 이것은 큰 우환거리이므로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이 말은 정사와 거의 일치합니다. 정사 곽가전(위서)을 한번 보시죠.
“명공(조조)께서는 비록 천하에 위세를 떨치고 계시지만 오랑캐들은 명공께서 멀리 계신다는 이유로 방비를 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랑캐들이 대비를 하고 있지 않을 때 바로 공격하면 그것을 멸할 수 있습니다. 원소는 그 동안 항상 북방 오랑캐의 민중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지요.”
이 대목은 원소가 북방 유목민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정사를 보시죠.
“원소는 삼군의 오환의 우두머리를 선우로 세우고 일가의 사람 자식을 자기 딸로 삼아서 그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요서 지방의 선우였던 답돈(?頓 : ?-207)은 세력이 워낙 강성하여 원소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 원상 형제는 그에게 투항했다(위서 : 무제기)”
이 대목에서 원소는 북방 유목민과 매우 가깝게 지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요. 북방의 한족(漢族) 군벌(軍閥)들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강병(强兵)이 있어야 되는데 답돈의 기병은 어느 한족보다도 강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북방 유목민들과 적대적인 되는 것보다는 적당히 포용하면서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어두는 것이 중원을 정벌하는 데도 유리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원소 개인적으로 포용력이 넓어서 이들과 친하게 지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원상이 싸움에 지고 답돈에게 도망을 가서 답돈의 세력에 의지하여 다시 기주를 회복하려고 한 것(위서, 오환전)을 보아도 이들의 관계는 일반적인 외교관계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원소는 오랑캐들과 혈연관계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특히 명나라 때의 나관중 ‘삼국지’ 편집자의 입장에서는 원소는 오랑캐와 놀아난 사람이라는 것이죠. 제가 보기엔 바로 이 점이 원소가 가진 ‘중국적인’ 요소들이 부정되고 원소가 우유부단하고 바보 같은 사람으로 묘사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다른 강의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원소는 큰 포용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정사에 “원소의 집안은 전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으며 원소는 지위가 낮은 선비들도 허리를 굽혀 존경했으므로 수많은 선비가 그에게 귀의했다(위서 : 원소전)”고 하지요. 그런데 이 풍부한 인재 풀(pool)이 오히려 원소 자신의 발목을 잡은 것 같습니다.
원소는 대외적으로는 유목민들과 친화정책을 사용하고 대내적으로도 많은 인재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려 한 듯합니다. 안정된 대외정책과 더불어 원소는 신진세력을 발탁하는 정치 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신구 세력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은 허유(구세대)가 조조에 투항하여 관도대전에서 대패하고 말지요. 이로써 원소는 몰락하게 됩니다. 난세(亂世)에는 포용(包容)하는 것만이 좋은 전략은 아닌 듯 합니다.
그리고 나관중 ‘삼국지’가 성리학적 정통 중화사상에 기반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性理學)은 전통유학(傳統儒學)과는 달리 훨씬 더 중화 민족주의적이며 편협하고 교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에서 원소에 대한 비판이 심한 것은 이 책이 철저히 편협한 중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씌어졌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따라서 원소나 유비가 조조보다 ‘유가적(儒家的)이라고 해도 그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원소는 보다 전통적인 유가적인 측면에 입각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유비가 인재를 편협하게 등용한 것이라든가 끝까지 한실 부흥 운운 한 것이 후대에 오히려 더욱 평가를 받은 것은 보다 교조적 중화주의적 유교, 즉 성리학적(신유학적)인 입장의 해석 결과라는 것이죠. 결국 원소가 전통 유학적 리더십을 보였다면 유비는 신유학적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받았다고 볼 수 있죠.
오늘날 중국을 봅시다. 이제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세계 최대의 투자 대상국이며,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선두를 질주하는 세계의 생산 공장입니다. 중국은 지금 경제 대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의 몰락 이후 미국 다음가는 군사 대국화의 길을 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가 유비적인 리더십과 같은 편협한 중화주의를 표방한다면 그것은 주변 민족들에게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3) 원소와 답돈 : 현대 중국과 원소형 리더십
원소가 답돈과 돈독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그것은 현대 중국이 나아가야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고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원소가 조조와 대립할 당시 요동반도의 상황을 먼저 살펴봅시다. 아래의 [그림③]을 보시죠.
나관중 ‘삼국지’에는 없는 얘기지만 정사(위서 : 오환전)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한나라 영제(靈帝)때 구력거(丘力居)라는 영걸이 나타나 강성하여 황제를 칭하였다고 합니다. 구력거는 선비족의 단석괴(檀石槐)가 가진 힘을 대부분 가지게 되었는데 구력거는 중산태수(中山太守) 장순(張純)이 투항하자 장순을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을 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즉 중국인의 입장에서 말하면 한족의 태수가 오랑캐인 구력거에게 귀순했다는 말이지요). 중산(현재의 하북(河北) 정현(定縣))이라면 13개의 현으로 기주(冀州)에 속하는 땅입니다. 구력거는 청주ㆍ서주ㆍ유주ㆍ기주 등 네 주를 점령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상의 사실로 보면 이 당시 중원을 제외하고서는 상당한 영역이 이들 북방 유목민들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영역은 후일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권과도 대부분 일치합니다(몽골 만주 지역의 민족 또는 인종적인 문제들은 ‘삼국지와 고구려’ 부분에서 충분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구력거가 죽자 그 아들인 루반(樓班)은 어려서 구력거의 조카인 답돈이 황제 위를 잇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사에는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나타납니다.
“원소가 공손찬과 계속 전쟁을 하여 승패를 가리기 어려울 때 답돈이 화친을 요구하여 같이 공손찬을 격파하였고 원소는 황제의 명령을 위조하여 그들을 전부 선우로 삼았다(위서 : 원소전)”
즉 원소가 공손찬과 힘겨운 투쟁을 하는데 답돈이 화친을 요청하고 이미 황제라고 하는 사람에게 한나라 황제의 명령을 위조하여 ‘선우(유목민들의 언어로 황제)’로 삼았다는 말이죠. 오랑캐의 일이라 한족 사관(史官)의 엄정성이 약해지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그러면 그 전에 원소는 왜 이들 유목민들에게 자기의 딸(수양딸)을 보내고 이들과 화친하려고 노력했을까요? 제가 보기에 원소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북방의 세력들과 어떤 형식으로든 간에 화친정책을 강화한 듯 합니다. 원소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이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돈독히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북방의 민족들이 비교적 다혈질이고 화통하여 의리가 깊은 것을 원소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원상과 원희 형제가 모든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이들을 받아주고 이들을 위해서 싸워준 사람이 답돈입니다.
정사의 사실로 판단해 보면 답돈은 원소와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사람으로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한족(漢族) 계열인 요동의 공손강(公孫康)은 원상(袁尙)과 원희(袁熹)를 죽여서 그 수급을 조조에게 보내는데 반하여 답돈은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원소의 아들들을 구하려고 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원소는 답돈과 친형제 이상의 의리를 맺을 수 있는 정도의 포용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답돈은 생각이 중국인들처럼 복잡하지 않고 오랜 동지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지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같은 정책을 시행하는 현대 중국의 지도자들의 편협한 중화주의(中華主義)와는 달리 원소는 상호공존을 추구하는 유연한 전통 유교주의를 가진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원소는 자신의 힘의 분산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상호공존을 추구했을 가능성도 있지요. 그러나 원소의 이력을 보면 오히려 포용력이 매우 강했던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답돈이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 원소의 아들들을 보호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 정황적인 조건으로 보아 원소는 평화시(平和時)라면, 상당한 성군(聖君)의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 판단됩니다.
나관중 ‘삼국지’가 옹호하는 편협한 중화주의는 다른 민족들의 민족주의(民族主義)만을 자극할 뿐입니다. 다음의 [그림④]를 보시죠. 역사적으로 보면 여명기의 중국 땅이라는 것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중심의 일부 지역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한나라 성립 이전까지 중국 대륙에 살았던 이들이 한족(漢族)이라는 의식은 없었습니다. 마치 몽골의 수많은 부족들이 징기스칸의 깃발 아래 모였고 만주의 많은 부족들이 누르하치의 깃발 아래 하나로 모였듯이 중국인들이 한족으로 다시 탄생한 것은 한(漢) 나라 이후의 일이지요.
따라서 현재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의 영역이라는 것은 지속적인 ‘한족팽창주의(漢族膨脹主義)’의 결과물입니다. 한족들은 엄청난 동화력(同化力)으로 주변 민족들을 동화시켜버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종족들도 많습니다(이제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한족입니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중국(中國)이라는 의미는 한족(漢族)만의 중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실제로 한족이 스스로 중국을 통치한 시기는 한(漢)-당(唐)-명(明) 정도가 아닙니까? 중국은 말 그대로 하나의 천하이며 이 천하의 소유자는 반드시 한족이라는 논리는 역사적인 견지에서 보면 옳다고만 할 수 없지요. 광대한 중국의 역사를 보면, 지금은 한족이 강성하여 향후 1-2백년은 한족의 국가로 유지되겠지만 다른 이민족의 중국 지배가 영원히 없어질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요.
현대 중국은 쥬신(?)계열의 청나라가 이룩한 광대한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이민족인 청나라가 복속한 나라들(대만·만주·몽골·티벳 등)에 대하여 한족들이 영유권을 주장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중국의 지도자들은 편협한 중화주의를 버리는 길이 오히려 한족의 안정된 기득권(旣得權)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동북아 평화공존(平和共存)의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지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원소라는 사람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나관중 ‘삼국지’가 표방하는 편협한 중화주의(한족 민족주의)는 궁극적으로는 중국과 한족(漢族)들의 고립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수민족들을 인위적으로 한족에 동화하려는 정책들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지요. 티벳이나 만주족들에 대한 정책들이 가장 전형적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중국 정부는 타이완 사람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지요.
중국인은 한 마디로 ‘복합성(複合性)을 본질로 합니다.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을 비교한다면 한국인들은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교조적이며 정열적이며 외향적이라면 중국인들은 복잡하고 유연하며 냉정하고 내성적이며 신중합니다. 또 중국인들은 개인적인 데 반하여 한국인들은 다소 집단적이기도 합니다.
원소는 이 같은 중국인들의 특성을 가장 골고루 가진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오히려 원소와 같은 인물이 중국의 지도자가 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편협된 중화주의는 편협된 대쥬신주의와 같이 단기간에는 민족적인 영광과 희열을 줄지도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이 점에서 원소와 같은 상호공존적 전통 유교주의적인 사고가 세계의 새로운 리더로 부상한 중국이 추구해가야 할 역사적 사명은 아닐까요?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원소는 북방 유목민들 가운데 요서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던 답돈을 정치적인 파트너로 하였고 그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북방 유목민들에게서 받은 도움이 원소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가가 나빠지게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수많은 소수 민족들이 어우러진 현대 거대 중국을 이끌어 가야 하는 중국의 지도자들이라면 오히려 대외적인 평화공존과 대내적인 포용으로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려 했던 원소에게서 어떤 해답을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편협한 유비나 북방 유목민들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인식한 조조보다는 원소의 정책과 전략이 필요한 시점으로 보여집니다.
출처 : | 올드뮤직의 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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