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문화유산

보물 464호 흥법사지 3층 석탑

영지니 2007. 3. 4. 20:28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1리 517-2에 소재한 흥법사지는 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흥법사지 앞쪽으로는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이 흐르고 뒤쪽으로는 영봉산 자락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진공대사부도비의 귀부와 이수가 있다. 진공대사는 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의 봉림산파에 소속된 스님이었다. 진공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자, 새로 나라를 연 태조 왕건이 대사를 왕사로 임명하고 극진히 예우하고 이곳 흥법사를 중건해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흥법사는 흥법선원이 되고 선수행을 닦기 위해 찾아오는 스님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이는데, 절터는 모두 밭으로 변했다. 약 만 여평에 달하는 흥법사지 옛터에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현재 흥법사지에는 보물 463호인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 그리고 보물 464호인 3층 석탑이 서있다. 흥법사지는 원주에서 지정면 간현유원지 옆 도로를 이용하여 양평, 여주 방향 국도를 이용해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로 찾아갈 수 있다. 지금은 주변이 모두 밭이고 만여 평에 달했다는 흥법사의 위용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진입로는 비좁아 차가 한 대 겨우 들어갈 만한 도로로 보물이 있는 곳치고는 너무 정리가 안되어 있어 아쉬움이 크다.   


 

보물 463호 진공대사탑 귀부 및 이수

 

진공대사탑비 귀부이수는 지정면 안창리 517-2번지 흥법사지 내에 소재하고 있으며 1968년 7월 5일 보물 제463호로 지정되었다. 진공대사탑비는 신라말 고승인 진공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된 후 태조 23년(940)에 입적하자 태조가 비문을 짓고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운비이다. 귀부와 이수는 현 위치에 있으나 비신석은 네 개의 단석으로 파손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진공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 1월 1일에 태어나서 고려 태조 23년(940) 7월 18일에 입적하였다. 강원도 양양군 진전사에서 수도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승이다. 고려 태조가 진공대사의 설법에 감화 받아 왕사로서 머물길 원했으나 사양하고 소백산 수도암으로 갔다고 한다. 대사가 세상을 떠난 뒤 태조 23년(940)에 태조가 손수 글을 짓고 당 태종의 글씨를 모아서 비를 세웠다. 귀부는 용머리를 한 거북이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인데 네발로 대석을 힘 있게 딛고 있다. ‘진공대사.란 전자 글씨가 새겨있는 이수에는 구름무늬 속에 생동하는 용이 정교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대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보물 464호 흥법사지 3층 석탑

 

흥법사지 삼층석탑은 지정면 안창리 517-2번지 흥법사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8년 7월 5일 보물 제464호로 지정되었다. 흥법사지 삼층석탑은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으로 흥법사 터에 비교적 잘 보존되어 남아 있다. 이 석탑의 크기는 높이 3.69m, 지대석 2.2m이며 화강암 재질이다. 하층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인 우주와 버팀 기둥인 탱주가없이 각 면에 3구씩의 안상만 조각되어 있다. 기단에 비하여 탑신이 빈약하게 작아졌으며 지붕돌인 옥개석의 물매인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다. 상륜부 위 쪽의 장식물은 모두 없어지고 아래쪽 노반만 남아 있다. 이 탑의 크기와 비례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만들어진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높이 약 3m, 길이 약 60cm의 석축을 비롯해 문자와 초석들이 산재해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출처 : 누리의 취재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