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을 계승한 열국시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은 어디에 위치해 있었을까.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인, 지금의 중국 북경 가까이에 있는 난하( 河) 동부유역에는 일찍이 서기전 12세기경에 기자 일족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기전 195년에 위만(衛滿)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서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지금의 대릉하(大凌河)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렇게 되자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들은 그들의 영토를 잃게 되었고, 이런 와중에 요서지역에 있었던 거수국들의 지배층과 주민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곳에 정착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뒤 요서지역에서는 또 한번의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한-漢)사군(四郡)의 설치였는데 중국의 서한(西漢) 무제는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서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켜 그곳에「낙랑(樂浪)ㆍ임둔ㆍ진번ㆍ현도(玄 )」4개의 군(郡)을 설치했다.
이 때문에 단군조선의 서부 영토였던 지금의 요서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아직까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일부 단군조선의 백성들은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두번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뒤 단군조선이 통치능력을 잃게되자 그들은 독립국이 되었다.
동부여(∼494)ㆍ고구려(지금의 요동과 평안북도 지역ㆍ∼668)ㆍ읍루(연해주 지역ㆍ∼6년 이전)ㆍ동옥저(함경도 지역ㆍ∼56년)ㆍ최씨낙랑국(평안남도 지역ㆍ∼300년)ㆍ동예(강원도 지역ㆍ∼245년 이전)ㆍ대방국(황해도 지역ㆍ∼300년)ㆍ한(삼한)(∼300년경)ㆍ가야(∼562년)ㆍ신라(∼935년)ㆍ백제(∼661년) 등이 그런 나라들이다. 이렇게 해서 열국시대(서기전 1∼5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 사국시대(가야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로 정립되기 전까지 한반도와 만주에는 여러 정치 집단이 있었다.
그런데 기존 연구는 이 집단들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위만조선이나 한사군 등을 통해 중국이 한반도를 지배했던 것처럼 잘못 평가해왔던 것이다.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扶餘)가 위치해 있던 지역이 어디였을까.
부여는 원래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 북부유역에 있었다.
난하 동부유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자, 다소 북쪽으로 이동하여 '북부여'라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서한(西漢)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자, 동으로 이동해 지금의 중국 길림성 북부에 도읍하고 내몽골자치구 동부와 흑룡강성 전부를 영토로하여 이를 부여 또는 '동부여'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동부여)를 북부여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단군조선 거수국이었던 북부여가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잘못이다.
이 시기에 지금의 요하 서쪽과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는 동일한 명칭이 병존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서한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면서 대부분 단군조선에서 사용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고구려현, 옥저 등과 후에 낙랑군에서 분리된 대방군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단군조선인들이 세운 최씨낙랑, 고구려, 동옥저, 대방국 등의 나라가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를 혼동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있었던 이러한 국명들을 중국의 군현 명칭으로 해석해 중국의 군현이 만주와 한반도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예컨데 요서지역에는 고구려현이 있었고, 요동지역에는 고구려국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곳과 새로 나라를 세운 곳에서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위만조선의 수도와 영역
위만조선의 수도... 위만조선의 초기수도는 의(義:대릉하방면) 서북경에 있었다.
위만은 기자조선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웠는데,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창려의 험독현이 조선 국왕 위만의 수도였다고 적혀 있다.
徐廣曰..昌黎有險督縣 應注地里志遼東險督縣朝鮮王舊都 서광은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하였고, 응소는 지리지에서 주석하기를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지라고 하였다.」史記集解
「應曰..朝鮮王滿都也 응소는 말하기를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라고 하였다.」 漢書地里志 遼東郡 險督縣 注
위 창려의 험독 위치에 대하여 한서보주(漢書補註)에는 "今營州古城東南一百七十里"라고 적혀 있고,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에는 "今錦州府義州西北境""이라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위만조선의 초기수도는 의(義:대릉하방면) 서북경에 있었다.
위만조선의 후기수도는 북진 동남 바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위만조선이 멸망할 무렵 한나라의 수군(水軍)은 왕검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열구(洌口:일명 列口)로 갔는데, 이 열구는 당시의 요하하류(遼河下流)이다.
고대에는 요하(遼河)가 하류에서 혼하(渾河)와 만나 지금의 영구(營口) 방면으로 흘렀다.
[註 전한서지리지에는 고대에 요하가 혼하와 만난 곳이 요대현이라고 적혀 있다. "遼山遼水(혼하)所出西南至遼隊(遂?)入大遼水(요하)"]
중국의 사서에는 요하와 가까운 험독의 위치에 대하여 북진 동남 바다 가까운 곳이라고 적혀 있다. 북진 동남 바다 가까운 곳이고, 당시의 요하하류와 멀지 않은 곳은 지금의 반산(盤山) 방면으로 추정된다.
험독(險督) 옛 성(城)이 광녕현(廣寧縣) 동남(東南)에 있는데, 한(漢) 대(代)에는 현(縣)으로써 요동군(遼東郡)에 속해 있었다.」大淸一通志
광녕(廣寧) 동남(東南) 빈해(濱海)의 지(地)이다.」後漢書集解(郡國志 遼東屬國)
요동(遼東)의 서경(西境)이다.」漢書補註(地理志 遼東郡)
위 문구를 정리하면 위만조선의 초기수도는 의(義:대릉하방면) 서북경에 있었고, 후기수도는 북진 동남 바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위만조선의 영역... 위만조선은 기자조선을 빼앗은 것이므로, 위만조선의 처음 영역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영역과 거의 같았다.
* 위만조선의 동쪽
위만조선의 동변(東邊)은 초기에는 기자조선 때와 같았으나, 뒤에 요동반도(遼東半島)를 고구려(高九黎)에게 빼앗기고부터 요하(遼河)가 위만조선의 동변이 되었다.
한단고기(桓檀古記)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적혀 있는 위만조선의 동변 변동상황을 살펴본다.
「모수리(慕漱離) 단제 무신년(B.C 193년)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 위만에 대비케 하였다. 위만 또한 싫고 괴로운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
戊申年帝遣上將延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滿亦厭苦不復侵擾」
[註 북부여기는 고려 때 지어졌는데, 위에 나온 평양은 뒤에 부른 명칭으로 적은 것이다. 고구려 때 평양으로 불린 곳 중 해성과 가까운 곳은 요양과 심앙인데, 위에 나온 평양은 해성 동북쪽에 있는 요양으로 추정된다.]
「기유년(B.C 192년)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 단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수비하게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므로 양곡을 풀어 먹이었다. 겨울 10월 경향분수의 법을 세워 서울은 천왕이 친히 총괄하여 위수하고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사를 주둔시키니, 마치 윶놀이에서 용도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己酉年以海城屬平壤道使皇弟高辰守之中夫餘一域悉從糧餉冬十月立京鄕分守之法京則天王親總衛戍鄕則四出分鎭恰如柶戱觀戰龍圖知變也」
위 문구에 의하면 해성이 평양도에 속했으므로, 해성 남쪽은 위만조선이 영유하고 있었고, 해성 이북은 고구려가 영유하고 있었다. 즉 위만조선과 고구려는 해성 남쪽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고해사(高奚斯) 단제 계축년(B.C 128년)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 도둑 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
[註 남여성은 고구려의 남쪽 담당 제후 남여(南黎)가 있었는 성으로, 사서를 지을 때 뒤에 부른 명칭으로 적은 것이다.]
고구려(高句麗)가 요동반도에 남여(南閭:원래 용어는 南黎)를 두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위만조선으로부터 빼앗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해 B.C 128년에 한나라는 고구려의 남쪽 담당 제후 남여(南閭)를 재물로 꼬여 한나라에 복속시키고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한나라는 B.C 126년경에 요동반도를 위만조선에게 빼앗겼고, 위만조선은 B.C 115년에 요동반도를 고구려에 빼앗겼다.
「고우루(高于婁) 단제 신유년(B.C 120년)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로 삼았다.
遣將討右渠不利擢高辰守西鴨綠增强兵力多設城柵能備右渠有功陞爲高句麗侯」
「계해년(B.C 118년) 우거(註 위만조선의 3세 왕) 도적들(註 위만조선의 군사를 비하한 것)이 대거 침범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이 모조리 오랑케(註 위만조선)의 땅이 되었다.
右渠賊大擧入寇我軍大敗海城以北五十里之地盡爲虜有」
「고우루 단제 병인년(B.C 115년) 단제가 몸소 정예군 5천을 이끌고 해성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니 구려하(註 요하)의 동쪽이 모두 항복하였다.
丙寅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之薩水九黎河印悉降」
이후 위만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요동반도를 다시 수복하지 못하여 요하(구려하)가 위만조선의 동변(東邊)이 되었다.
* 위만조선의 서쪽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 한나라의 동변(東邊)이 패수(浿水)라고 적혀 있으므로, 위만조선의 서변(西邊)은 난하이다.
* 위만조선의 남쪽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남변(南邊)은 발해연안 해안지대이다.
* 위만조선의 북쪽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북변(北邊)은 서요하나 시라무렌하보다 남쪽이다. 이는 위만(衛滿)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빼앗기 전에 서요하나 시라무렌하 방면에 살던 동호(東胡) 무리들이 흉노(匈奴)의 묵특선우(冒頓單于)에게 패하여 선비산(鮮卑山)이나 오환산(烏桓山)으로 이동하였고, 남은 무리들은 흉노에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B.C 134년에 한나라 무제(武帝) 원광(元光) 원년에 한나라 대신 엄안은 무제에게 엄안은 이민족에 대한 대책을 상주(上奏)하였다.
지금 남이(남쪽 방면 이민족)를 불러내고, 야량(註 서남쪽 방면 이민족)을 조공시키고, 강북(註 서남 방면 이민족)을 항복시킨 다음 예주(註 위만조선)를 공략하여 성읍을 쌓은 뒤 흉노에 깊숙히 침입하여 용성을 불지르자. 今欲招南夷朝夜郞降羌略濊州建城邑深入匈奴燔其城」
위 문구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예주(濊州)로 적혀 있고, 그 북쪽 호(胡) 무리가 흉노(匈奴)로 적혀 있다. 이로 보아 위만조선의 북변(北邊)은 서요하나 시라무렌하 방면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위만조선의 북변 중 동쪽은 부신(阜新), 북표(北票)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1975년 이래 만리장성(萬里長城)쪽에서 요하(遼河) 쪽으로 길게 뻗은 장성 유적 2개가 발굴되었는데, 하나는 그 동쪽 끝이 북표(北票)에서 끝이 나고, 다른 하나는 부신(阜新)에서 끝이 났다.
이 장성은 위만조선과 고구려의 경계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위만조선 지역은 전에 왕검조선의 번한(番汗) 지역이었는데, 왕검조선 때는 진한(辰汗)과 번한(番汗) 사이에 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고, 고구려와 기자조선(箕子朝鮮)도 우호관계에 있었으므로 역시 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만조선의 영역(B.C 128년 이전)과 수도
[위만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위만조선의 영역은 기자조선 말기의 영역과 같았으나, 건국된 그해부터 적대국 고구려의 계속되는 공격을 받아 B.C 192년경부터 요하동쪽지방은 해성 이남으로 영역이 줄어 들었다.
그후 B.C 128년에 고구려에 요하동쪽지방을 모두 빼앗겼으나, 한나라가 그곳을 빼앗아 창해군을 설치하자 B.C 126년에 한나라로부터 요하동쪽지방을 수복하였다. 그후 B.C 115년에 고구려에 다시 빼앗겼다]
'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분리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에서 서기전 1122년까지이고, 기자(箕子)조선은 서기전 1122년에서 서기전 194년까지, 위만(衛滿)조선은 서기전 194년부터 한무제에 의해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서기전 108년까지 존속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단군조선은 2096 년간 지속된 강대한 부족연합 광역국가'였고,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로서,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인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 유역에 서기전 12세기경(서기전 1122년경)에 기자일족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 된 것이 '기자조선'이다.
'위만조선'은 서기전 195년에 위만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단군조선의 거수국인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나라를 세우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 아닌, '서한의 외신(外臣)'이 된 것이 위만조선이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 즉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계승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위만조선이 건국되고 그 뒤를 이어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서술된, "서기전 194년에 위만이 단군조선의 국왕이 되고, 서기전 108년에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현행 국사체계는 사실과 전혀 다른 크게 잘못된 것이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낙랑ㆍ임둔ㆍ진번ㆍ현도의 4개군(郡))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당시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河) 동부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 역사의 주류일 수 가 없고, 단군조선의 변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 역사의 주류는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으로부터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동부여-북부여)ㆍ고구려ㆍ읍루(이전의 숙신)ㆍ동옥저ㆍ최씨 낙랑국ㆍ동예ㆍ대방국ㆍ한(韓, 삼한) 등의 열국시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체계화되어야 한다.
이들은 원래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는데 단군조선이 붕괴되자 독립국이 된 것으로 이 가운데 고구려가 북방을 통합하고, 남방은 가야ㆍ백제ㆍ신라로 분열되어 사국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한민족의 고대사를 단군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으로 설정한 체계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위만은 중국에서 망명한 자이고,
(한)사군은 중국에서 주장하는 중국의 행정구역일 뿐이다.
요동지역에서 고구려가 서기전 37년에 건국됐는데 한사군이 종말을 고한 것은 서기 313년이다.
기존 연구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단군조선 멸망 후 5백여 년간 중국 지배 아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같은 요동지역에 고구려와 (한)사군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모순이 생긴다.
한나라 무제가 멸망시켰다는 위만조선은 평양지역이 아니라 북경 근처 난하유역이었다.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요동지역이 아닌, 요서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한민족은 위만조선이나 (한)사군과는 별도로 요동지역과 한반도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 고구려 등 열국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재통합과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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