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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고사와 단군세기에 대하여...

영지니 2007. 3. 11.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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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 -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1. 행촌 이암은 누구인가?

행촌 이암은 고려 충렬왕 23년 ~ 공민왕 13년(1297~1364)때 사람이다.

고성이씨로 수문하시중(수상)을 역임하였다. 행촌의 행적은 고려사 이암傳에 실려 있다. 후손인 이삼문과 그 후손들이 증보하여 1920년에 간행한 '행촌선생연보'가 있는데 여기에 독립투사인 홍범도의 발문이 실려 있다.

 

1922년 후손 이기문이 간행한 '행촌선생실기'가 있는데, 여기에 단군세기와 태백진훈이란 책을 행촌선생이 저술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백교의 입장에서 행촌을 민족주의자로 묘사한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암은 고려사, 이색(이암의 제자)의 문정공묘지명에 전하는 고려 후기 대표적인 사대부 가운데 한명이다. 행촌에 대한 것은 야사에 기록이 많고 주로 민족주의자로 그리고 있으며 이는 민족주의자들로부터 행촌이 숭상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야사의 기록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되는지는 신중한 판단이 요망된다. 따라서 야사의 기록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以疑傳疑"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있다.

일단 정사를 중심으로 행촌의 행적을 추적하되, 필요에 따라서는 "以疑傳疑"의 입장에서 야사의 기록을 참고하려 한다. 원래 이름은 이군해이며 62세부터 '이암'으로 개명했다.

고려사열전 김희조 전에는 1360년(공민왕 9년) 왜구가 개경을 위협하므로 장정은 물론 관료들과 국자감의 學官들까지 군대로 동원하자 학관들이 "신들은 항상 공자묘를 모시고 있으며 학관이 종군하는 것은 옛부터 예가 없다"라며 종군을 반대하자 행촌은 "너희들은 비록 공자를 모시지 못하더라도 군대에 가야한다"고 하였다.

공자보다 국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행촌 자신 뿐만 아니라 행촌의 후손들도 홍건적 침입 때 전투에 참가해 셋째 아들 음은 안주전투에서 전사까지 하는 등 애국적 행동이 집안의 가풍이었다.

1361년 홍건적 10만이 침략해오자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가는 중 행촌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의병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에 호종공신 1등으로 책봉되었다.

홍건적 토벌에 공을 크게 세운 정세운, 김득배, 이방실 등이 모함으로 죽음을 당하자 얼마 뒤 수문하시중을 사임하고 강화도로 은퇴했다가 1364년 5월 5일 68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연보에는 1363년(공민왕 12년) 10월 3일 단군세기를 완성했다고 한다. 환단고기의 전파 과정에 고성이씨 가문의 역할이 매우 크다. 한말의 이기, 대일항쟁기의 이상용, 해방이후 이유립이 그들인데 모두 유학과 역사학에 조예가 깊은 애국지사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14세기 행촌의 학풍과 행적이 600년을 뛰어넘어 후손들에게 전수된 것인가, 아니면 20세기 애국지사 후손들이 600년 전의 조상을 더욱 애국적으로 보이게 만든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그리 쉽지 않지만, 아마 두 가지 질문에 모두 정답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단군세기의 단군조선은 천자적 지위를 가진 대국으로서 문화적으로나 영토상으로나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것이 기본 골격이다.


2. 일제시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3가지 책

일제시대에 규원사화, 단기고사, 단군세기 등 3책이 유행하였는데 두갈래 계통이 있는 듯 하다.

그 하나는 규원사화이고 다른 하나는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이다. 후자의 두 책은 선후 관계가 있는 듯 한데 내용이 소략하고 현대적 감각이 덜한 단군세기가 먼저이고 현대적 감각이 지나치게 투영된 단기고사는 단군세기를 토대로 윤색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규원사화는 조선 숙종때 북애자가 편찬했다고 되어 있으며

단기고사는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원저자로 되어 있고 1907년 대한제국 학부편집국장의 重刊序와 1912년 신채호가 쓴 重刊序가 실려있으나 실제 두 책의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이후 이다.

 

규원사화가 처음 식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이후이다.

1928년 김광이 쓴 '대동사강'에는 규원사화와 내용이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나온다.

같은해 신태윤이 쓴 '배달조선 정사'에도 단군 47대 왕명과 업적이 규원사화와 일치한다.

1934년 이창환이 쓴 '조선역사'는 규원사화를 직접 인용하고 있다.

 

1940년 손진태 교수는 양주동 박사가 소장하고 있던 규원사화를 빌려 필사한 뒤 "이 책은 조선 사상사 상의 하나의 기서"라고 평했고 국립중앙도서관은 1945년과 1946년 1월 사이에 규원사화를 구입하여 1972년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

반면 단군세기는 1949년, 단기고사는 1959년 이후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3. 이암은 단군세기의 저자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존하는 단군세기는 한사람의 저술로 보긴 어렵다.

이 책 속에는 지극히 현대적인 용어와 안목이 담겨 있는가 하면, 또 현대인의 창작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古記의 채취가 풍긴다.

 

현대적 감각이 가장 많이 보이는 곳은 서문이다. 우국충정에 넘치는 한말 일제시대 애국지사의 글을 보는 듯하다. 내용은 마치 민족주의적 역사학자인 박은식과 신채호 같은 분들의 글을 연상시킨다.

 

삼신일체사상은 대종교의 교리와 같은 표현이 되어있다. 또 고려니 몽고니 하는 용어는 고려시대에 사용하던 용어가 아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서문은 대종교나 단학회 계통의 애국지사가 쓴 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책을 교열한 해학 이기의 글이거나 편집한 계연수의 글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또 해방 후 이유립씨나 단단학회 측의 손을 거쳐 세상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또 부분적으로 어떤 변용이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본문 내용 또한 그런 부분이 상당수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가 한말 일제시대 이후 지식인의 손을 거쳐 윤색, 가필되었다는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이 책을 전적으로 위서로 판정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아무리 위서라 하더라도 무언가 토대가 된 모본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기나 야사는 거짓 속에 진실이 있고, 진실 속에 거짓이 있다.

 

원래 고기나 야사라는 것은 한 사람의 손으로 완결된 책이 아니다.

오랜 세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중층적으로 변용되게 마련이다. 단군세기도 행촌이 지은 모본을 토대로 후세인들이 중층적으로 가필 윤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사료로서의 가치보다는 이 책을 보급한 사람들의 마음을 담고 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사상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