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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고조선에 대한 인식과 동방예의지국 고조선

영지니 2007. 12. 30. 22:55
맹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으실 겁니다. 맹자는 공자와 더불어 중국에서 받드는 성인의 한 사람이지요. 맹자하면 성선설이 떠오를 겁니다. 맹자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하였지요. 게다가 공자의 仁사상을 계승, 발전 시키고 정치에 응용하여 인정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중요하지 않다'인데 당시로서는 이는 매우 혁명적인 사상이었습니다. 맹자의 인정사상은 그가 사상가로서 이미 백성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맹자는 백성을 항상 백성을 생각하였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맹자를 좋게 봅니다. 하지만 『맹자』를 보면 과연 맹자가 백성을 위한 사람인지 의구심을 들게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맹자가 우리민족을 경멸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제 그 기록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백규(白圭)가 말하기를, "나는 20분의 1에 해당되는 세금을 받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 맹자가 이르기를, "그대의 방법은 맥(貊)의 방법이오. 만호가 모인 장안에 도공(陶工) 한 사람만으로 되겠소" 백규가 이르기를, "안됩니다. 그릇이 쓰기에 부족합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대개 맥에서는 오곡이 나지 않고 오직 기장만 생산되며, 성곽, 종실, 종묘, 제사의 예(禮)가 없고 제후에 대한 폐백, 향연도 없고 여러 벼슬과 관청도 없으므로 20에서 하나를 세금으로 받아도 충분하지만 지금 중국에 살면서 인륜을 버리고 참된 사람도 없다면 어떻게 옳다고 하겠소. 도공이 적어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거늘 하물며 참된 사람이 없어서랴. 요 · 순의 방법보다 가볍게 하려는 것은 대맥(大貊)과 소맥(小貊)이며, 요 · 순의 방법보다 무겁게 하려는 것은 대걸(大桀)과 소걸(小桀)이오">>

 

맹자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백규는 절약과 검소함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20분의 1로 받을 것을 주장하면서 맹자에게 의견을 물었죠. 당시 맹자는 제후들의 가렴주구를 막기 위해 9분의 1이나 10분의 1 세법을 주장하고 있었는지라 백규는 맹자가 자신의 의견에 찬동하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맹자는 오히려 그걸 반대하며 10분의 1만 받아도 족하다고 답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백성들은 세금을 자신의 농토에서 생산된 곡식의 10분의 1보다 20분의 1을 내는게 덜 힘들죠. 맹자가 백성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백규의 주장에 찬동해야 하는데 그는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는 백규의 제안을 거절하였을까? 그건 바로 백규가 주장한 20분의 1세법이 맥, 그러니까 단군조선의 세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고조선을 일컬어 동이, 산융, 맥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오랑캐라는 뜻입니다. 당시 중국인들은 고조선의 무력에 굴복을 하였죠. 논어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제나라 환공의 신하 관중이 없었다면 중국은 피발이 되었을 것" 여기서 피발은 종발을 뜻하는데, 이는 고대 조선인들의 상투를 튼 모양을 말합니다. 이는 당시 단군조선의 공격으로 중원이 거의 멸망지경에 까지 갔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고조선에 대한 중국인들의 적개심은 대단했을 겁니다. 맹자 역시 고조선에 대해 적개심에 불타올랐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세법을 중원 사람 백규가 받아들이려 하자 못하게 막았죠..

 

 단군세기를 보면 제8대 단군 우서한 때 20분의 1 세법을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맹자가 언급한 맥국이 바로 조선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맹자가 백규에게 말한 "성곽, 종실, 종묘, 제사의 예(禮)가 없고 제후에 대한 폐백, 향연도 없고 여러 벼슬과 관청도 없으므로"  이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정말 조선은 예의도 없는 야만국가, 관료제도도 갖추지 못한 야만족의 나라였을까요?

 

 맹자의 이 말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조세제도가 있다는 것은 곧 그 나라에 관료기구, 관료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조선을 깎아내리기 위한 맹자의 왜곡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곽, 종실, 종묘, 제사의 예가 없다는 건, 정말로 조선이 그러한 예가 없다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곽, 종실, 종묘의 예가 없다는 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무리한 성곽, 종실, 종묘의 예를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대체로 한 국가의 성곽을 짓기 위해서는 많은 백성들이 엄청난 부역을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곽, 종실, 종묘의 예가 없다는 건 백성들에게 무리한 토목공사를 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사의 예가 없다는 맹자의 말은 중국 사서와는 앞 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중국 사서는 한결같이 우리민족을 일컬어 동방예의지국이라 하였으며, 공자 역시 예의가 있는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당시 고조선은 예의가 바른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에 제사의 예가 없었을까요? 이는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간소화 한 걸 맹자가 곡해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중국처럼 백성에게 큰 부담을 주면서까지 성곽, 종실, 종묘, 제사에 대한 예를 성대히 하는 것보다는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성곽, 종실, 종묘, 제사에 대한 예를 간소하게 한 고조선이야 말로 진정한 동방예의지국이요, 군자국입니다.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