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한단고기 24. 태백일사(신시본기 3)

영지니 2007. 12. 30. 13:55

 

 

태백일사


신시본기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대저 백두의 큰 산은 대황의 가운데 자리잡았으니 세로는 1,000리에 걸치고 높이 200리를 넘는다. 웅장하고 험준하니 울퉁불퉁 거창하여 배달천국의 진산이라 한다. 신인이 오르내림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이 다만 낭림의 서쪽을 달리는 산맥을 잇는 것으로써 능히 그와같은 성스러운 일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으리요. 세상의 속담에는 이미 묘향산을 가지고 태백산이라고들 한다. 즉 이를 보니 동쪽에 치우쳐 압록강 이남의 한 구석을 차지한 땅일 뿐이라. 산의 조종을 곤륜산이라 떠들어 대며 기분 좋아하며, 소중화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한다.

조공 올리는 사신이 북쪽을 들락거린 역사가 백년이다. 이를 치욕으로 알지 못하다니 이야말로 글을 폐하고 장탄식하는 이유어늘. 그런데 동방의 뭇산을 태백의 이름으로써 불리는 바가 사뭇 많다. 세속에는 영변에 있는 묘향산으로 그것을 가리킨다 하니 이것은 일연의 <<삼국유사>>의 설에 비롯하였음이라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눈구멍은 콩알이라 할 것이요, 큰 콩알과 같다 할지언저. 이제 백두산 꼭대기에는 큰 연못이 있거늘 둘레가 80리이며 압록 송화 두만의 물줄기는 모두 여기에서 근원이 시작된다. 가로대 천지란 한웅씨가 구름타고 하늘로부터 내리신 곳이니 묘향산은 일찌기 한웅큼의 물구덩이조차 없었던즉 한웅천왕이 내려오신 땅을 태백산이 아니라고 함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위서>>의 물길전에 '나라 남쪽에 도태산이 있다'라고 했는데 위에서는 이를 태황이라고 했다. 범 표범 곰 이리가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지 않았고 길을 가는 이마다 모두 물건을 가득 채워가지고 가게 되니, 이는 아마도 한웅천왕께서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시사 이미 이산에 계시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산을 신주흥왕의 영지라 하니, 반드시 소도제천의 옛 풍속은 반드시 이 산에서 시작되고, 옛부터 한족의 숭경도 역시 이 산에서 시작된 일이니, 단순히 심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또 짐승들도 빠짐없이 신의 교화로 목욕 하듯하여 안락하게 이산에 서식하며 일찌기 사람을 상처낸 적 없고, 사람도 감히 산위에 오르지 않고 오줌 누어 신을 모독하지도 않으며, 항상 끝없이 공경하고 보호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대저 우리 한족은 신시가 이끄는 삼천의 무리들의 장막에서 나왔다. 후세 이후로 여러 씨성의 구별의 있다 하지만 실은 한단 한줄기 후예 후손에서 벗어나는자 없으며, 신시에 처음으로 내리신 공덕은 당연히 반드시 전송하여 잊지 말아야할진저! 곧 선왕과 선민들이 그 삼신고제의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이라 함도 역시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대저 신시 이래 신의 다스림과 성인의 교화는 점점 세월을 따라 오히려 더해 가며 점점 깊어간다.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커다란 근본은 세상의 주변의 나라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 그 신풍과 성속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었다. 천하만방의 사람들로서 신성이화를 흠모하는 자들은 반드시 삼산을 추모하고 숭상하여 동북쪽에 신며사라 불리는 곳이 있게 되었다. 그 말류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차츰 허랑방탕한 일에 빠져들더니 더 나아가서는 차츰차츰 더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연나라 제나라의 바다위에 괴상한 도사얘기도 나왔다.

대저 저들의 땅이 구한의 신시와 서로 접해있어 문물의 교류도 왕성했던 터라 저절로 풍문에 접할 수 있어 괴기하다느데 놀랐던 게 아닐까? 게다가 상상으로 늘리고 부연하는 자도 있어 가로대 '삼신산은 봉래 방장 영주산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함으로써 세상을 미혹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사람은 동쪽으로 바다에 가보아도 아득하기만 할 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발해 가운데 다른 바다가 있다는 말도 못 들었고,'삼신산도 역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했으나, 실은 바로 삼신산이 아니고 각각 세개의 섬에 있는 산이니 봉래는 쑥이 무성하게 자란 내경으로서 곧 천왕이 내려오신 곳이요, 방장은 사방 일장의 각으로서 곧 소도가 있는 곳이요, 영주의 영은 주도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으로서 곧 천지가 샘솟는 곳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삼신산이라 하는 산이니 삼신은 곧 상제인 것이다.그렇지만 더욱 그 황탄한 자는 삼신의 원 뜻을 알지 못하고 곧 금강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하고, 한라를 영주산이라 함이 모두 그런 따위이다.

<<사기>> 봉선서에서,'그것은 발해의 가운데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일찌기 그곳에 갔다 온 자가 있는 듯, 모든 선인 및 죽지 않는 약은 고곳에 있다 하며, 그곳은 사물들과 짐승들까지 빠짐없이 흰색이요,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또 <<선가서>>엔 가로대 '삼신산은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이라 한다.'라고 했다. 지금의 백두산은 옛부터 흰사슴,흰 꿩 등속의 짐승이 있었는데 <<괄지지>>가 말하는 바 '새 짐승 나무가 있으나 모두 희다'고 한 대목은 이를 가리킨 말일 것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선 많은 산삼이 나오는 바 세상 사람들이 이를 불로초라고 생각한다. 산사람들이 채취하려 할 때엔 반드시 먼저 목욕재계하고 산신에 제사를 지내고 난 후라야 감히 채취하러 입산한다. 아마도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한다는 말도 역시 생각컨대 여기에 근원한 것이라 여겨진다. <<세기>>에 가로대, '단군 오사구의 원년 북쪽을 순수할 때 영초를 얻다'라고 함은 곧 이것이라 여겨진다.

10월 제천은 마침내 천하만세의 풍습이 되었다. 이는 곧 신의 나라 특유의 성대한 행사로서 외국에는 이와 견줄만 한 것이 없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은 명성을 누르고도 남는다. 옛날의 삼신산이라 함은 곧 태백산으로서, 역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저 그 옛날 신시의 인문교화는 근세에 이르러 건재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천경신고는 오히려 후세에 전해진 바가 있는 듯 거국적으로 남녀가 역시 모두 말없는 가운데 받들고 있는 바로서,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열살 미만일 때에는 목숨의 안전과 위험,우환,잘나고 못남 따위는 애오라지 모두 삼신께 의탁한다. 저 삼신은 곧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이시다. 옛날 사마상여는 한나라의 왕 유철 무제에게 말하기를,'폐하께서 겸양하사 방탕하지 않으시면 삼신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인즉'라고 했는데, 위소는 삼신상제에 주를 달아 '삼신의 설은 어느덧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진역유기>>에서 말한다.

'제의 풍속에 8신의 제가 있다. 8신이란 천주, 지주, 병주, 양주, 음주, 월주, 일주, 사시주,를 말한다. 천은 음을 좋아한다. 반드시 높은 산의 밑인 작은산 위에서 한다. 고 하늘을 태백산 기슭에서 제사지내는 유법인 것이다. 땅은 양을 좋아한다. 그래서 땅에 제사지낼 땐 반드시 못가운데의 네모진 언덕에서 제사지냄은 역시 곧 천을 참성단에서 제를 지내던 습성이라 할 것이다.'

'천주로서 삼신에 제사하고 병주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무신으로서 용강의 조라 할지니,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또 만세의 도술의 조종으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고 모든 귀신들을 부른다. 이로써 태시의 세계에서부터 항상 천하전쟁의 주가 되었다.해대의 땅은 이미 엄 람 양 개 우 래 서 회의 8족이 자리잡고 사는 곳이 되었으니 곧 8신설은 8족으로부터 싹터서 당시에 번성하던 설이 되었다.

유방은 동이 계통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병사를 풍패에서 일으켰는데 곧 풍패의 풍속은 치우에게 제를 지내므로 나라도 역시 그 풍속을 따라 치우에게 제를 지냈다. 그리하여 혼고(희생물의 피를 북에 바르고 제사지내는행위)하고 깃발을 들고 마침내 10 월에 패상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을 평정하고 즉위하여 한왕이 되었던바 이로인해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정하고 이것이 진나라의 정월 초하루를 빼앗는 일이긴 하나, 역시 동황태일(단군왕검)을 받들어 공경하고 치우를 공경하여 제사지낸 때문이라 할 것이다. 뒤에 4년만에 진나라 땅이 이미 평정되니 축관에게 명하여 치우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하였다. 그가 치우를 존경하기 이와 같았다.

<<진나라의 <<천문지>>는

치우기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신 때문이다. 또 <<통지>>씨족략엔 <치씨는 치우의 후예>라고 했고 혹은 창힐은 고신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다. 대극성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의 회북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으니, 대저 치우천왕의 영풍위열함이 먼나라의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연나라 제나라의 선비들이 신비하고 괴상스러운 소리에 탐닉한 지도 역시 오래 되었다. 제나라의 위왕(B.C.356 ~ 320)과 연나라의 소왕(B.C.311 ~ 279)때부터 사신을 파견하여 삼신산을 찾았으니, 진한 때의 송무기 정백교 극상 이문자고는 초하의 무리로서 연나라 사람들이요, 문성오리공 손경 신공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들이다.옛날 여상도 역시 치우씨의 후손이다. 때문에 역시 성은 강이다. 대저 치우는 강수에 살았다. 아들들을 모두 강씨라고 한 것이 아닐런지?

강태공은 제나라를 통치하기에 앞서 도술을 닦고 천제못에서 하늘에 제사지냈다. 그리하여 역시 제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8신의 풍속이 이 땅에 더욱 번성하였다. 후세엔 그 땅에 도술을 잘하는 자가 많이 배출되어 신선 사상과 도가의 사상을 섞어서 널리 퍼뜨리고 또 다듬었으니, 바로 강태공이 이를 장려함이라. 일찌기 <<음부경>>의 주를 만들어 자부삼황의 뜻을 조술하였다. 그런즉 연나라 제나라 선비들이 어찌 괴상스럽고 신비스런 말들을 즐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또 오행치수의 법과 <<황제중경>>이라는 책은 태자 부루로부터 나와서 우사공에게 전해진 것이다. 뒤에 다시 기자의 홍범을 주왕에게 말했다함은 역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설인 것이니, 대저 그 학문의 근본은 신시의 구정과 균전으로부터 전해진 법일지라.

<<밀기>>에서 말한다.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향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합쳐서 한군데에 매장하고 표시하여 지석이라 하더니, 뒤에는 변하여 단을 만들고 지석단이라 불렀던 것이다. 또 제석단이라고도 했다. 산의 꼭대기에 있으며 산을 파고 성단을 만들어 놓은 것을 천단이라 했다. 산골짜기에 있고 나무를 심어 토단을 만든것을 신단이라 한다. 지금 승도들이 혼동하여 제석을 단이라 부르는 것은 곧 옛고사를 말함이 아니다. 삼신을 지키고 사람의 목슴을 이치대로 하는 자를 삼시랑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의 시종랑이다. 삼랑은 본래 배달의 신하요 삼신을 수호하는 직책을 세습한 것이다.'

<<고려팔관잡기>>에서 말한다.

'삼랑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뿌리고 재물을 주관하는 자를 업이라 하고, 교화하고 복종하게 함을 주관하는 자를 랑이라 하고, 무리를 모아 공을 이루는 것을 주관하는 자를 백이라 한다. 작 옛날에 시작된 신도이니 모두가 영을 받아 예언하는 일이 많은데, 하늘의 이치에 따라 종종 적중하기도 한다.지금 혈구에 삼랑성이 있는바, 성은 곧 삼랑이 머무르던 장소이다. 랑은 곧 삼신을 수호하던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 들어 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들이 옛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의 승가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대 승도와 유생이 모두 낭가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함을 이로써 알 수 있다.혹은 말한다. 옛날엔 백성들이 계곡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장사지낼 정해놓은 땅이 없었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다 동굴로 옮겨서 천신과 나란히 모시고 이어 제사지냈다. 뒤엔 혹은 땅을 평평히하고 장사지내는 자도 있고, 둘레에 박달나무 버드나무 소나무 잣나무 등을 심어 이로써 표시를 하였다. 이는 신시의 시절엔 능이나 묘를 쓰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후에 중고시대에 이르러 나라는 풍부해지고 민족은 강성하게 되었으니 점차 번거로워져서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르게도 되었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가 있었고, 묘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였으며, 높이 크기 넓이 폭 모지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생겼으며, 안쪽은 벽과 바깥쪽은 덮는 것까지 고르게 정밀하고 교묘하였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