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萬里長城: Wanli Changcheng, 완리창청)의 관문
산해관[山海關(关): Shanhai Guan, 샨하이관]
산해관은 하북성(河北省: Hebei, 허베이) 진황도(秦皇島: Qinhuangdao, 진황도)시의 동쪽 산해관구(山海關區)에 있다. 북경에서는 동쪽으로 300km 거리이고 경심고속공로(京瀋高速公路)와 연결되어 있으며, 발해(渤海: Bohai)만 북쪽의 연산(燕山: Yanshan)의 남쪽에 위치한다.
1961년,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주요관문 중 하나인 가욕관(嘉峪關: Jiayuguan)과 거용관(居庸關: Juyongguan)과 함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부분으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으로 알려져 있다. 동쪽의 발해만(渤海灣: Bohai Wan)과 접하는 부분은 “노룡두(老龍頭: Laolongtou)”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중국사에서 산해관은 만주족[계단(契丹: Khitan), 여진(女眞: Jurchen), 만족(滿族: Manchus)]을 방어하는 국경역할을 수행하며, 중국의 북동쪽과 동쪽 사이의 좁을 통로를 지켜왔다.
산해관은 북제(北齊: Qi, 420-589)와 당조(唐朝: Tang, 618-907)시기에 건축되었다. 1381년 명조(明朝: 1368-1644)의 장수 서달(徐達: Xu Da)이 산해관을 건축하고 산과 바다 사이에 위치한다 하여 산해관이라 칭했다.
명조후기 장수 척계광(戚繼光: Qi Jiguang, 1528-1588)이 요새화를 시작하고 산해관의 동쪽, 남쪽 그리고 북쪽에 도시와 요새를 건설하면서 산해관을 군사도시로 만들었다. 산해관은 중국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의 하나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만리장성에서 가장 잘 보전된 관문들 중 하나로 남아있다.
명조 말, 산해관 장령(將領) 오삼계(吳三桂: Wu Sangui, 1612-1678)는 그의 애첩 진원원(陈圆圆: Chen Yuanyuan)이 이자성(李自成: Li Zicheng1606-1644)측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격노한 그는 청의 다이곤(多爾袞: Dorgon)과 접촉했다.
그후, 오삼계는 청군에게 산해관의 문을 개방했고 이자성에 대항해서 결정적인 산해관전투에서 청군과 함께 싸웠다. 청조(淸朝: 1644-1912)에 의한 이 전투의 승리는 이자성의 정치력 약화를 가속화했고 결국 청조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사실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실록 기록(1644, 5, 7, 인조 22년)은 다음과 같다.
문학 이래(李䅘)가 치계하였다.
“세자의 일행이 심양을 출발하면서부터 연일 계속 행차하였습니다. 15일에는 아침 일찍 출발하여 세자를 수행해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렀습니다. 총병(摠兵) 오삼계(吳三桂)가 구왕(九王)1802) 에게 장관(將官) 2명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기를 ‘ 황성(皇城)이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황제는 스스로 목매어 죽고 후비(后妃) 이하는 모두 분신자살하였다. 그래서 관내(關內)의 여러 성이 모조리 다 함락되었고, 오직 산해관만이 남아 있으나 급하기가 시각을 다투는 형편이니, 귀국(貴國)과 함께 그들을 토벌하기를 약속하고자 한다.’ 하였다고 했습니다.
20일에는 금주성(錦州城) 서쪽에 이르러 유숙하였는데, 한인(漢人)이 또 와서 급함을 알려왔습니다. 청병(淸兵)이 마침내 급히 달려, 22일 아침에 관문(關門) 가까이에 당도하니, 오삼계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성을 나와 항복서를 바치고, 성문을 열어서 청병을 맞아들였습니다. 이때 한인은 벌써 관내의 수리 쯤에 있는 큰 들판에서 적병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청병이 곧바로 적진을 돌격하여, 쓰러져 죽은 시체가 잠시 동안에 들판을 덮었고, 남은 적은 모두 패하여 도망치자, 다시 이들을 추격하여 해구(海口)에서 모두 죽였습니다. 밤이 되어서야 관내의 5리 쯤에 있는 진영으로 돌아왔는데, 23일 아침에는 행군하여 북경(北京)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세자는 항상 구왕(九王)의 진중(陣中)에 있고, 적과 싸울 적에는 또한 진을 나올 수 없습니다. 영병장(領兵將) 박한남(朴翰男)은 금주(錦州)의 군졸 5백 54명을 거느리고 영원위(寧遠衛)에 도착하였는데, 구왕의 명령에 따라 군관 김충수(金忠壽)로 하여금 먼저 포(砲) 잘 쏘는 포수 1백 명을 거느리게 하여, 22일에 이미 산해관에 도착하였습니다.”
청조시기 동안 심양[瀋陽(沈: Shenyang]과 북경(北京: Beijing)사이에 위치한 산해관은 수도의 열쇠로 여겨졌다. 8국연군(八國聯軍: 1990)과 2차세계대전 동안 산해관은 많은 전투가 일어난 장소이다.
산해관은 주변 둘레가 4km에 이르는 사각요새이다. 벽의 높이는 14m에 이르고 두께가 7m이다. 동쪽과 남쪽 북쪽은 깊고 넓은 해자(垓子)가 파져 있고, 도개교(跳開橋)가 설치되어 있다. 산해관의 중앙에는 종탑이 서 있다.
산해관 4면에는 모두 문이 있는데, 동, 서, 남, 북쪽으로 각기 진동문(鎭東門: Zhendong), 영은문(迎恩門: Yinun), 망양문(望洋門: Mangyang), 위원문(威遠門: Weiyuan)이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황폐화되어 진동문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산해관의 외부로 접한 진동문은 그 위치 때문에 중요한 곳이다. 진동문에 걸린 현판의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은 산해관을 대변하는 이름이다.
가욕관은 감숙성(甘肅省: Gansu) 가욕관시 서남쪽 6km 떨어진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있는 관문이다. 가욕관은 하서주랑[河西(甘肅)走廊: Hexi Corridor] 서쪽의 가장 협소한 지역인 가욕산 두 능선 사이의 오아시스 근처에 건축되었다.
가욕관은 둘레가 733m 이르는 사다리꼴 모양이다. 성의 높이는 11m이다. 이곳에는 동쪽과서쪽에 2개의 문이 있다. 각 문에는 누각이 세워져 있다. 가욕관의 현판은 서쪽 문에 걸려져 있다. 남쪽과 북쪽은 만리장성과 연결되어 있고, 관내 각 코너에는 작은 탑이 있다.
가욕관은 명조(明朝: 1368-1644)초기 1372년에 최초로 건축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가욕관 건립이 계획에 들어가자 담당관리는 설계자에게 실제 필요한 벽돌 숫자를 예측해 보고하도록 지시했고 설계자는 예상수량을 보고했다. 담당관리는 설계자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벽돌 수량이 충분치 않을 것 같다고 말하자 설계자는 한 개의 벽돌을 추가했다.
가욕관의 건설이 끝나자 하나의 벽돌이 남았고 그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한쪽 문위에 놓여져 있는 벽돌이다. 이 요새는 티무르(Timur)의 침입에 대비해 아주 튼튼하게 건축되었으나, 티무르는 군대를 이끌고 중국으로 향하는 도중 노환으로 죽었다.
가욕관 남쪽의 강변
만리장성의 관문들 중에서 가욕관은 고대 군사시설 중에서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적이다. 가욕관은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란 이름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고대 실크로드의 핵심 경유지이다.
거용관(居庸關: Juyong Guan, 쥐용관)
거용관은 북경시에서 서북쪽으로 50km 떨어진 창평구(昌平區: Changping)내의 18km 길이의 관구(關溝: Guangou)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 영문에서는 산해관(山海關), 가욕관(嘉峪關)과 함께 만리장성의 3대 관문(일본인 관점인 듯)이라고 하지만, 중문에서는 도마관(倒馬關),mso-fareast-language: ZH 자형관(紫荆關)과 함께 내삼관(內三關)이라 칭한다.
거용관(居庸關)은 과거 왕조들에서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거용관이란 명칭이 3대 이상의 왕조에서 사용되어졌다. 최초 거용관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은 진조(秦朝: BC221-BC206)의 진시황(秦始皇: BC259-BC210)이 장성(長城)축조를 명령한 때이다. 거용관은 남과 북의 두 개의 관문으로 되어있다. 남쪽의 것은 남관(南關: Nan Guan)이라 칭하고, 북쪽의 것은 팔달령(八達嶺: Badaling)이라 칭한다.
거용관은 남북조(420-589)시대에 장성과 연결되었다. 중앙의 9.5m 운대[雲臺(云台)]는 과가삼탑[過街三塔]이라고 하는데, 원조(元朝: 1271-1368)시기 백대리석으로 건축되었다. 운대 주변에는 수많은 석재 난간과 초소 같은 수많은 건축물들이 있다.
운대의 아래에는 사람과 말 그리고 수레가 통과할 수 있는 아치형 문이 있다. 양측의 벽면에는 불상과 경전이 조각되어 있다. 과거 운대는 3개의 탑이었으나 원명의 과도기에 파괴되었다. 후에 운대 위에 태안(泰安: Tai an)사가 건축되었으나, 청조(淸朝: 1644-1912)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의 거용관은 명조(明朝: 1368-1644)때 건축되어 후에 많은 중수(重修)를 거쳤다. 이곳은 내륙과 북쪽의 국경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고대 북경을 방어하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거용관 주변의 우거진 꽃과 나무들은 푸른 파도가 겹쳐진 것 같다고 하여, “연경(燕京: Yanjing)팔경”의 하나인 거용첩취(居庸疊翠)란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산림이 많이 훼손돼서 과거의 절경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중국정부는 삼림을 복구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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