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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금오산을 보물단지로 만들었을까

영지니 2016. 9. 16. 12:52

금오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이다. 금오산 케이블카는 1974년 개통되었다.

"어디 가도 이런 산 없습니다.
금오산은 구미의 보물단지지요!"
구미 시민들은 자랑스러운 눈동자로 금오산을 이야기했다.
그 보물이 무엇인지 궁금해 금오산을 올랐다.

시민을 지켜준 산

참 신기하다. 점점 산이 좋아진다. 철모를 땐 등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고생을 사서 할까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세상을 한 해 더 살아낼 때마다 산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어렵게 올라가면서 흘리는 땀방울의 값짐, 지칠 때 불어오는 바람의 소중함,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의 성취감, 인생길이든 산길이든 내려올 때 더 조심해야 한다는 깨달음 같은 감정들을 모두 반나절만에 느낄 수 있는 건 등산뿐이다.

아침 7시, 금오산을 오를 채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섰다. 아침 7시5분, 금오산 입구에 도착했다. 단 5분이다, 구미역 인근에서 금오산까지 자동차로 걸리는 시간. 보통 등산을 하려면 등산로 입구까지 가는 데만 30분에서 1시간씩 걸리는 것이 예사이지만 금오산은 다르다. 작은 뒷동산도 아닌 해발 970m가 넘는 큰 산이 도심과 이토록 가까운 경우는 거의 없다.

도심과 산의 물리적 거리만큼 시민과 산의 심리적 거리도 가깝다. 금오산은 산 중에서도 오르내리기 험하다는 돌산에 속하지만, 구미 시민들은 산책 가듯 부담 없이 금오산을 찾는다. 금오산 절경 중 하나인 대혜폭포 인근까지 케이블카가 연결되어 있어, 무릎 아픈 어르신도, 걸음마를 막 배운 꼬마도 산을 즐길 수 있다.

조선시대 명필로 유명했던 고산 황기로 선생이 새긴 글귀 ‘금오동학’

1. 봄꽃이 피어난 4월의 금오산성 ⓒ구미시청 2. 단풍으로 물든 11월의 금오산성 ⓒ구미시청

두 다리 튼튼한 우리는 처음부터 걸어서 금오산을 만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만난 금오산의 보물은 바위에 크게 새겨진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는 글귀였다. ‘깊고 그윽한 절경’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 중국 왕희지(王羲之) 다음 가는 명필이었다는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선생이 새긴 것이다. 한 글자당 가로 세로 1m에 달하는 규모와 수려한 필체가 예부터 금오산이 아름다운 절경으로 사랑받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금오산성, 도선굴, 해운사, 대혜폭포까지 명물들을 잇달아 만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왜구의 침략에 맞서 금오산을 지켜냈던 금오산성은 2.7km 길이의 내성, 그 밖을 다시 둘러싼 3.5km의 외성, 2중으로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성곽만 남아 있는 외성 주변으로 봄이면 핑크빛 꽃이 피고, 가을이면 노랑 주황빛 단풍이 화사하게 물든다. 

해운사 곁의 도선굴과 대혜폭포는 구미 지역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자연경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장소들이다. 암벽에 뚫려있는 천연 동굴인 도선굴의 본래 이름은 ‘큰 구멍’이란 뜻의 ‘대혈(大穴)’이었다. 신라 말 풍수의 대가로 유명했던 도선스님이 참선하다 득도한 이후 ‘도선굴’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임진왜란 당시 지역민 500~600명이 이 굴로 피난했는데, 바위틈에 쇠못을 박고 칡과 등나무 넝쿨로 이동해 왜군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한다. 대혜폭포는 ‘우리나라 자연보호운동 발상지’라는 표지판을 자랑스레 내걸고 있다. 1977년 9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혜폭포에 방문했다가 “우리 청소 작업부터 하지”라고 말하며 깨진 병 조각과 휴지를 주웠다고. 이후 새마을운동과 함께 자연보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한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대혜폭포의 물줄기 ⓒ구미시청

시민이 지키는 산

본격적인 등반은 대혜폭포 다음부터다. 이곳부터 정상을 잇는 길은 가파른 경사 때문에 숨이 할딱할딱 거린다 해서 ‘할딱고개’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 부지런히 올라가면 정상까지 1시간30분~2시간 정도가 걸린다. 마음 단단히 먹고 할딱고개로 들어서려는데, 한쪽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는 한 할아버지를 마주쳤다. 이수용(67세) 할아버지는 매일 금오산을 올라 쓰레기를 줍고 있다고 했다. “구미 금오산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연보호운동이 시작된 자연보호 발상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다른 어떤 산보다 깨끗하게 가꿔야지요. 아침마다 운동 삼아 쓰레기도 주울 겸 올라와요.”

1. 매일 아침 금오산을 올라 쓰레기를 줍는다는 구미시민, 이수용 할아버지 2. 금오산은 우리나라 자연보호운동 발상지다.

 너른 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선굴과 해운사 풍경

할아버지가 매일 올라가신다는 ‘너른 바위’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할딱고개라고는 해도 튼튼한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생각처럼 힘들지는 않다. 이윽고 도착한 너른 바위. 그곳에서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해운사와 도선굴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저 밑에서 오르내리는 빨간색 케이블카까지도 울창한 산세와 어우러져 예쁜 수채화를 보는 듯했다. “몇 년 전에 이 너른 바위에 정자를 짓는다고 공사를 시작하던 것을 내가 나서서 항의하고 막느라 고생깨나 했어요. 자연은 자연 그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법인데.” 

금오산에는 이 할아버지처럼 매일같이 찾아와 산을 지키고 가꾸는 시민들이 여럿 계신다. 그중 한 아주머니는 너른 바위보다 훨씬 높은, 정상 인근의 마애보살입상(보물 제 490호)까지 매일 올라 기도를 올리고 내려가는 길에 쓰레기를 주워 가신단다. 마애보살입상 곁에 활짝 핀 꽃 화분들에서 아주머니 손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금오산 정상 바로 밑에 자리한 사찰, 약사암은 매년 멋진 사진으로 달력을 제작한다. 프로수준의 사진실력을 가진 시민, 유봉종씨가 사계절을 망라하며 수많은 금오산 사진을 찍어주기 때문이다. 약사암 달력 표지에는 ‘유봉종 사진작품 – 약사암의 사계’라는 제목이 자랑스레 적혀 있다.

자연암석에 조각된 높이 5.5m의 마애보살입상.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오산 정상의 낭떠러지 곁에 둥지를 튼 약사암. 의상대사의 득도로 인해 세워진 사찰로 전해진다 ⓒ구미시청

금오산의 명물이 된 ‘오형돌탑’도 그러한 시민 중 한 명의 손에서 탄생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나 말하지도 걷지도 못했던 손자가 10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는 손자가 저승에서라도 행복하길 기도하며 금오산 높은 곳에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오형’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의 ‘오’와 손자 이름인 ‘형석’의 ‘형’을 인용해 지은 것이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10년 동안 꼬박 쌓았다는 수많은 돌탑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숙연해진다.

 

<오형돌탑>
큰 돌 작은 돌
잘생긴 돌 못생긴 돌
차곡차곡 등에 업고
돌탑으로 태어나서
떨어질까 무너질까
잡아주고 받쳐주며
비바람을 이불삼아
산님들을 친구삼아
깨어지고 부서져서
모래알이 될 때까지
잘가라 띄워 보낸
낙동강을 굽어보며
못다 핀 너를 위해
세월을 묻고 싶다
석아

1, 2. 수많은 오형돌탑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숙연해 진다

 해발 976m, 금오산 정상 ‘현월봉’

마침내 정상, 달이 걸려 있는 봉우리라는 뜻의 ‘현월봉(懸月峯, 해발 976m)’에 닿았다. 사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현월봉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1953년 11월 맺어진 한미행정협정에 따라 금오산 정상에 미군 통신기지가 들어선 이후 줄곧 출입통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 다행이도 구미시의 10년에 걸친 노력 끝에 미군과의 협상으로 정상을 재개방하게 되었다. 약 1년간 복원사업을 마치고 2014년 9월, 약 60년 만에 현월봉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엔 케이블카를 탔다. 대혜폭포부터 산 입구까지 6분 만에 도착하는 편리함도,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이는 금오산성의 풍경도, 꿀맛 같았다. 구미시민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보물이 무엇인지 궁금해 올랐던 산. 금오산성도 대혜폭포도 마애보살입상도 물론 멋지지만, 금오산의 진짜 보물은 산을 아끼고 가꾸는 구미시민들의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