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사 서대 전망대에 서면 낙동강 너머 선산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묵호자墨湖子가 구미에 간 이유
●신라 최초의 사찰을 찾아서
역사 이야기를 해 달라는 요청에 문화유산 해설사님의 첫 질문이 ‘불교로 할까요? 유교로 할까요?’였다.
하루 일정으로는 둘 다 돌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불교를 먼저 선택한 이유는 아도화상* 때문이었다.
누구나 익숙하게 들어 봤을 아도阿道는 묵호자墨湖子와 동일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구미에 전해지는 숱한 ‘전승’의 주인공이다.
옛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불교가 신라의 국교로 공인된 527년 법흥왕 14년보다 100여 년이 앞선 시점이고 주요 무대는 도리사, 대둔사 그리고 모례장자샘이다.
이야기는 도리사를 향하며 계속됐다.
↑고려시대 지어진 도리사 화엄석탑과 극락전
도리사는 4.7km에 이르는 드라이브 코스가 끝나는 해평면 냉산(태조산)의 7부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을 절터로 정한 사람이 바로 아도화상이다.
어느 겨울날 냉산자락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 세운 사찰이 418년 눌지왕 2년에 세워진 신라 최초의 가람인 도리사다.
복숭아 도桃, 오얏 리李자를 써서 도리사桃李寺라 불렀다.
절은 깊은 솔숲에 안겨 있지만 다행히 주차장까지 잘 닦인 포장도로다.
차에서 나오니 향기로운 솔바람이 코끝에 먼저 걸렸다.
돌아서니 늘씬한 소나무들의 시원한 자태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다.
소나무 사이의 벤치들이 객석이 되고, 주차장은 무대로 바뀌는 솔바람음악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솔숲 못지않게 위용을 자랑했을 원래의 도리사는 많은 사찰이 그러하듯 화재1677년로 인한 소실과 이전1729년 등을 거쳐 지금은 산내암자였던 금당암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산사에 온 손님을 가장 먼저 반겨 주는 것은 역시 아도화상이다.
예불을 드리면 병을 낫게 해 준다는 믿음이 전해진다.
그가 좌선을 했다던 바위도 남아 있고, 그 옆에는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였던 모례장자, 아도화상의 아버지 아굴마, 어머니 고도녕의 이름들이 당우에 새겨져 있었다.
알수록 보이는 것이 많아졌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극락전과 도리사 화엄석탑에도 눈길이 머물렀다.
도리사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것은 새로 지은 사리탑과 적멸보궁이다.
1977년에 조용했던 도리사에 큰 사건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도리사의 부도탑에서 세존 진신사리가 담긴 금동육각사리함국보 208호이 발견된 것. 드물게 육각형태를 지닌 사리함은 8세기에 만들어졌다가 조선시대에 부도탑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밝혀져 국보로 지정됐다.
당시 발견된 사리를 모시기 위해 1987년에 새로 만든 것이 지금의 석가세존사리탑이고, 그 탑을 잘 참배할 수 있도록 큰 창을 내어 지은 것이 적멸보궁이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오니 문화유산해설사님의 손짓이 바쁘다.
그를 따라 작은 오솔길로 접어드니 예상 못했던 전망이 펼쳐졌다.
낙동강과 멀리 구미시의 해평면과 선산들, 낙동강 너머 황악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대에 서서 시원한 바람,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하고 있자니 산사 음악회가 열릴 즈음 도리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고 싶어졌다.
그런 감상을 가로지른 것은 다시 해설사님의 손가락이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 끝에 김천 황악산의 직지사가 있다는 것이다.
아도화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절을 세웠다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불리는 사찰이다.
현재 도리사의 금동육각사리함이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위탁 전시되어 있다.
산사의 해거름이 빨라지고 있었다.
직지사의 말사인 대둔사大芚寺에 잠시 들르기 위해 차를 북쪽으로 몰았다.
대둔사 역시 아도가 446년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몽골 침략을 포함해 여러 차례 무너졌기에 가장 오래된 전각이 17세기 말에 지어진 대웅전이다.
대웅전에 들어가 고려 시대 만들어진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1633호을 보고 나오니 마당 한켠에는 1666년에 세워졌다는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 옆 명부전 안에는 1714년에 그렸다는 탱화 유명도幽冥圖가 있다지만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시간이 늦었지만 꽃을 그냥 지나칠 수야 있나.
대웅전의 창호에 새겨진 빗꽃살 무늬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하나하나 문양이 다 다르다.
그러고 보니 처마를 받치는 구조물인 공포에도 온통 꽃천지다.
멀리서 보면 다 똑같지만 가까이 보면 다 다르다. 마치 사람이 그러하듯.
사실 대둔사를 찾아가는 길도 온통 꽃길이었다.
시골길에서 갑자기 등장한 벚꽃터널은 최고의 일주문이었다.
아도화상이 복사꽃, 배꽃이 피는 자리에 절을 세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겨울에도 꽃을 피워내는 자리라면 사람도 불심도 건강하게 피어날 수 있을 터.
바로 그 증거가 물 좋고, 터 좋은 구미의 도리사와 대둔사였다.
*아도화상
고구려 승려인 아도는 포교의 뜻을 품고 서라벌로 갔다가 배척을 당했고 천신만고 끝에 일선현(지금의 선산)에 살던 모례라는 장자長者,
큰 부자의 집으로 피신해 굴을 파고 숨어서 포교했다고 한다.
3년간 삯도 받지 않고 머슴살이를 한 아도는 모례장자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그의 시주로 도리사를 창건할 수 있었다.
*직지사 | 절을 중건할 때 능여가 자를 쓰지 않고 손으로 측량해서 직지사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도리사 템플스테이
산사에 머물면서 타종, 예불, 운력, 108배 등을 경험하거나 속세를 떠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산사에 머물면서 타종, 예불, 운력, 108배 등을 경험하거나 속세를 떠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는데 비용은 1박 2일을 기준으로 성인 5만원, 청소년 3만원이다.
주소: 경북 구미시 해평면 도리사로 526
전화: 054 474 3877
홈페이지: www.dorisa.or.kr
홈페이지: www.dorisa.or.kr
↑구미 도개면 도개리의 신라불교 초전기념관
●우물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
모례장자의 우물
모례장자의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
도리사 창건자금이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구미에는 신라불교 초전지마을이 있다.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였던 모례장자의 우물터가 남이 있는 도개면桃開面 도개리道開理다.
앞의 도개桃開는 복숭아꽃이 열린다는 뜻이고, 뒤에 도개는 불교道開의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점차 가세가 기운 모례장자의 저택은 사라졌지만 양천골, 우천골이라는 이 근방의 지명은 양 천 마리, 소 천 마리를 길렀다는 그의 재력을 증명한다.
모례장자의 우물은 ‘전모례가정傳毛禮家井’이라고 불린다.
멋들어진 향나무 옆에 소중하게 보존되어 있는 우물은 마치 ‘내가 우물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테두리가 우물 정井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위에 같은 모양의 나무 덮개를 짜서 올려 두었다.
더 이상 물은 마실 수 없지만 이 우물에서 샘솟은 많은 이야기들로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다. 모례장자가 도리사 창건을 위한 시주에 인색한 태도를 보이자 아도는 꾀를 냈다.
바리때와 오쟁이 하나를 내밀며 그것을 채울 만큼의 시주만 하면 된다고 했던 것. 하지만 밑 빠진 독처럼 곡식 1,000석을 부을 때까지 채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엉겁결에 모례장자는 큰 재산을 내놓게 되었지만 덕분에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됐다.
신라불교가 처음 전해졌던 마을은 고즈넉했다.
방문객이 많지는 않아 보였지만 신라불교초전기념관에는 아도화상과 신라 불교 전파에 대한 설명들이 전시되어 있고 빛바랜 일월곤륜도와 불교 벽화들은 1990년도에 동국대 학생들이 그려 놓은 것이다.
우물을 찾아 여기까지 온 이들의 목을 축일 수 있는 식수대도 설치되어 있으니 이래저래 몸과 마음이 촉촉하다.
↑ 1.아도화상을 숨겨 주었던 모례장자의 우물터 2.아도화상의 초상화
▶신라불교 초전지마을
신라의 불교가 처음 전해진 구미시 도개면 소재의 마을이다.
silla.invi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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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소현 기자
'-$$나의고향산천$$- > 내고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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