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암자.정자

양양 의상대에서 강릉 경포대까지

영지니 2008. 2. 24. 22:46

낙산사 경내 동해 암벽위에 서 있는 의상대의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양양 의상대에서 강릉 경포대까지


여행기 제목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7번 국도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가면서 인근의 정자를 소개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막상 답사를 시작하고 보니 욕심이 생긴다. 지난 해 고찰 100곳을 돌아보았다. 물론 마음에 간구하는 바가 있어서 뙤약볕에서도 산을 오르고는 했지만 이번에는 동해안을 따라가는 7번 국도의 절경을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동해안 도로로 국한하기는 그 경치가 나를 너무 유혹한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동해를 마친 다음에는 남해로 돌아, 서해를 거슬려 올라가 통일전망대 까지 가볼 생각이다. 결국 이번 여정은 동해안에 있는 동쪽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해안을 끼고 돌아 서해안에 있는 경기도 파주 탄현의 서부 통일전망대까지를 돌아보는 길이다. 언제 그 여정을 마무리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올해 안에 그 여정을 마치고 다음에는 내륙에 있는 정자를 찾아보리라 마음을 다진다.


양양과 강릉에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고성과 속초가 정(亭)이란 명칭을 붙인데 비해 양양과 강릉의 해안에는 대(臺)란 명칭이 많이 보인다. 이는 정적이고, 특별한 사람들만이 출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속초를 벗어나 강릉을 향해 가다가 보면 제일 먼저 만나는 정자가 양양 낙산사 안에 있는 의상대다. 

 

의상대는 낙산사로 들어가 해수관음을 우측에 두고 보타전 길로 들어가면 동해를 바라다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바람 부는 날 의상대에 오르면 시원한 동해의 푸른 물이 발아래 펼쳐지고, 암벽에 부딪쳐 흰 포말을 내며 부서지는 동해의 물은 포효하는 한 마리 범의 소리인 듯 거칠다. 


의상대(義灀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만든 정자이다. 원래 이곳은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할 당시 머무르면서 참선을 하였던 곳이라고 하여 정자가 없을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1936년 폭풍으로 도괴가 되었던 것을 1937년에 재건하였고, 1975년에 중수를 하였다. 6각으로 만들어진 아담한 크기의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홍련암으로 가는 길 해안 언덕에 있어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의상대의 난간은 비스듬하게 세운 것이 특징이다.  

 

의상대 앞을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들 

 

낙산사의 복원이 궁금해 들린 의상대. 홍련암으로 가는 길도 파헤쳐지고 무너져 내린 곳이 있어 보수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의상대 곁에 큰 키를 자랑하는 노송 서너 그루가 뛰어난 풍광을 연출한다. 오랜 시간 암벽 위에서 참선을 하여 깨달음을 얻은 의상대사의 마음을 아는지, 철새 한 무리가 하늘을 나는 것이 도솔천을 오르려는 마음 같아 보인다.

 

하륜과 조준이 경관에 반해서 이곳을 떠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조대(하륜과 조준의 은거지. 양양군 현북면 소재)

양양군 현북면에 있는 경승지인 하조대는 그 일대가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갖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루어져 주위의 울창한 송림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동해안에서 가장 넓은 은설(銀雪)의 백사장으로 옛 부터 ‘산은 설악이요, 바다는 하조대라.’하여 영동지방의 명승지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하조대(河趙臺)는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로 유명해진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 조준 두 충신이 고려 말엽 이곳에서 잠시 은거하였다하여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이 외에 하씨 집안 총각과 조씨 집안의 두 처녀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연으로 인해 명명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조대는 조선 정종 때 정자를 세웠으나 철폐되었으며,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1940년 8각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55년과 1968년에 각각 재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해체·복원한 건물로 초익공 굴도리양식의 육모정으로 지붕에 절병통을 얹어 소나무와 함께 주위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고 있다. 정자각 앞에는 조선 숙종 때 참판 벼슬을 지낸 이세근이 쓴 「하조대」 3자가 암각 된 바위가 있다.  

 

등대에서 바라본 하조대는 가히 천하절경이 아닐 수 없다.  

 

기암괴석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하조대. 동해바다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돌출된 만의 정상부에 위치하여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으며, 맞은편 등대에서 바라다보는 하조대의 풍관은 그야말로 천하 일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절경에서 은거를 한 하륜과 조순이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한 웅지의 나래를 편 곳이라 하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장죽이 많아 붙여진 명칭, 죽도에 있는 죽도정

 

♣ 죽도정(현남면 인구리 죽도 소재)
양양군 현남면 인구리 산 1-1번지인 죽도(竹島)는 섬에 산죽이라고 하는 장죽이 많아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죽도는 지금은 내륙과 연결이 되어 있으나 원래는 둘레 1km, 높이 53m의 작은 섬이었다고 한다. 섬에는 늘 송죽(松竹)이 푸름을 읽지 않고 있어서 한겨울에도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며, 섬에서 나는 장죽은 전시용으로 적합해 나라에 진상을 했다고 전한다. 
 

 

죽도정 송림사이로 바라보는 동해 또한 절경이다.

 

장죽 숲에 쌓여있는 죽도정은 노송 사이로 동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죽도정은 1965년 5월 13일 현남면 내 부호들이 주축이 되어 행정지원을 받아 건립을 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정자 앞에는 철봉 틀이 있어 마을 주민들이 이곳을 산책로로 이용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자 위에 오르면 가슴이 시원하다. 온 세상에서 찌든 마음의 때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것 같다. 심호흡을 하면 푸른 장죽의 향내가 폐부가득 고인다. 멀리 동해를 헤치고 지나가는 배 한척의 모습이 한가롭다. 그래서 동해 죽도를 가면 꿈을 꿀 수 있는가 보다.(필자의 글 ‘꿈이 그리우면 죽도로 가자’에서 발췌) 

 

강릉 선교장 안에 세워진 활래정.

 

♣ 활래정(강릉 선교장 내 정자)

정자는 궁궐․절․향교․서원․일반주택에 부속된 건물로 건축하는 경우와 독립된 단일 건물로 건축하는 경우로 구분된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이나 경복궁의 향원정 등은 궁궐에 부속된 정자이다. 이와는 달리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과 금원 연경당의 농수정, 안동 임청각의 군자정 등은 주택에 부속된 정자이다.


강릉 선교장은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오죽헌으로부터 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경포호가 있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李乃蕃)이 집터를 잡은 후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을 1815년에 축조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86년에는 활래정(活來亭)과 동 ․ 서별당 등이 후손들에 의해 지어졌다. 6·25전쟁 이후 일부 건물이 유실되었으나 복원되었으며, 조선시대 사대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활래정은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일부를 누마루로 만들어 마치 물위에 떠있는 것 같다.  

 

활래정을 한바퀴 돌아보면 선조들의 건축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볼 수 있다. 

 

활래정은 주변의 풍경과 함께 선조들의 뛰어난 조형미와 조원기법을 엿볼 수 있는 정자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활래정은 연못을 한 바퀴 돌면서 바라다보면, 보는 면마다 그 느낌이 달라진다. 어느 한 곳 멋들어지지 않은 곳이 없으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작은 정자 하나를 지으면서도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을 했는지를 알게 된다. 활래정을 보면서 선조들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느낄 수가 있다.  

 

보물로 지정이 된 해운정은 소박하면서도 품위를 잃지않은 정자이다.

 

♣ 해운정(보물 제183호)

선교장을 나와 경포호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9호인 심상진가옥과 돌담을 경계로 보물 제183호인 해운정(海雲亭)이 있다. 해운정은 경포호 서안에 있는 별당형식의 건물로 조선 중종 25년인 1530년에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 선생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것이라 전한다. 어촌 심언광 선생은 중종 2년(1507) 진사가 된 후 부제학, 이조와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났었다.


해운정은 초익공양식에 팔작집으로 외부는 소박한 모양을 하였으나 내부는 비교적 세련된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해운정>이란 현판은 송시열의 글씨이며, 내부에는 권진응, 율곡 이이등 당대의 여러 명사들의 기문과 시문판이 걸려 있다. 건축양식은 3단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남향으로 지었는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안쪽의 오른쪽 2칸은 대청이며 왼쪽 1칸은 온돌방이다. 대청 앞면에는 문을 달아 모두 열 수 있게 하였으며 건물 주위에는 툇마루를 돌려놓았다.  

 

해운정의 문간에 달린 방들은 방바닥이 목재로 되어있다. 

 

강릉시 운정동 256번지에 자리한 해운정. 지금은 퇴락하기는 하였지만 경포호를 가까이 하고 노송과 어우러져 있는 해운정의 옛 모습을 그려보면 당대에 견줄만한 정자가 그리 흔치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화려하지 않고 멋을 내며, 기교를 부리지 않고도 품위를 지키는 정자. 그것이 바로 해운정이었다.  

 

경포호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경포대.

 

♣ 경포대

강릉에서 북동쪽으로 6km 정도를 가면 해안모래와 만나는 곳에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석호인 경포호가 있고, 호반 서쪽 언덕 위에 유명한 경포대가 있다. 경포호는 옛 부터 시인묵객들이 예찬한 곳으로 호수가 거울처럼 맑다고 하여 일명 경호(鏡湖), 군자호(君子湖)라고 도 부른다.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소개되는 이 호수는 바다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와 붉게 물드는 석양, 야경으로 보는 호수경치,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백사청송(白沙靑松)과 해당화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고 하니 그 누구라도 이곳에 오르면 시한 수 읊조리지 않으리오. 


경포대(鏡浦臺)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에 강원도의 한 관리였던 박숙정이 당시의 인월사 옛터에 세웠던 것을, 조선 중종 3년 (1508년)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에 옮겨놓았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경포대 내부에는 숙종의 어제시와 율곡이 10세에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해, 조하망의 상량문 등 수많은 명사와 시인묵객의 글이 게시돼 있다. 호수를 바라보는 쪽 누대의 단은 한 단 더 높여 놓았는데 이는 방문객들이 주변의 경치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하기위한 배려일 것으로 보인다. 호수 주위에는 과거 12개의 정자가 있었으나, 현재는 경포대, 금란정(金蘭亭), 경호정(鏡湖亭), 호해정(湖海亭), 석란정(石蘭亭), 방해정(放海亭), 해운정(海雲亭) 등이 남아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철과, 여름 피서를 하기위해 찾았던 경포대. 그러나 2월 초의 따듯한 날씨 속에서 찾은 경포대의 느낌은 또 다르다. 꽃에 파묻힌 경포대는 아름답다고만 느꼈는데 지금은 오히려 웅장함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묵객들은 사시사철 한 정자에 올라 다 다른 느낌의 글을 남기고 간 것일까?


2월의 길지 않은 해가 아쉽다. 석양이 물드는 경포호를 뒤로하고 떠난다. 앞으로의 긴 여정이 어떤 즐거움을 줄 것인지를 기대하면서.  

 

 

'고궁.암자.정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포호의 정자들, 그 감탄과 실망  (0) 2008.02.24
고성 청학정에서 속초 학무정까지  (0) 2008.02.24
낙화암  (0) 2008.02.24
공산성  (0) 2008.02.24
정자기행  (0) 2008.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