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서천 무형문화재

영지니 2008. 3. 2. 07:15

 

당과의 교역품으로 각광을 받던 한산세모시


모시는 오랜 기간동안 이용되어 온 직물로서 일명 저포·저치라고 하며, 모시풀 줄기를 꺾어 그 껍질을 벗긴 것을 재료로 한다. 통일신라 경문왕(재위 861∼875) 때 중국 당나라에 보낸 기록으로 보아 외국과의 교역품으로도 이용되었다.


한산세모시는 한산에서 만드는 모시로 예로부터 품질이 우수하며 섬세하고 단아하여 모시의 대명사로 불려왔다. 제작과정은 재배와 수확, 태모시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모시표백의 9과정으로 나뉜다. 우선 재배를 해서 수확을 한다. 태모시는 껍질을 벗겨 인피섬유를 만드는 것인데 모시째기는 태모시를 쪼개는 과정이다. 모시삼기·모시굿만들기는 쪼개진 인피섬유를 이어 실을 만드는 과정이며, 모시날기는 실의 굵기에 의해 한 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한다. 모시매기인 풀먹이기 과정을 거친 후 베틀을 이용해 모시를 짠다. 마지막으로 모시표백은 물에 적신 다음 햇빛에 여러 번 말려 백저포, 곧 흰모시로 만드는 과정이다.


한산모시는 백제시대 한 노인의 현몽으로 건지산 기슭에서 모시풀을 발견한 이래 1,000여 년 동안 나라의 진상품으로 이어져 온 서천군의 명물이다. 한산모시는 백옥같이 희고 우아하며 잠자리 날개처럼 섬세하고 가늘어 여름철 옷감으로는 으뜸으로 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명나라 공물로, 조선시대에는 진상품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이와같이 한산모시는 과거 삼국시대부터 최고의 명성을 누려온 대한민국 전통 직조기술로 생산하는 자연섬유이며 한산면 일대에는 질좋은 모시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또한 서천군의 특산품인 한산모시 생산소득이 미곡 생산소득의 17%에 해당할 만큼 서천지역 경제에 기여도가 매우 높다.


모시는 습도가 모자라면 끊어지기 쉬우므로 더위에도 통풍이 안되는 움집에서 짜야 했고 바람이 불거나 비오는 날에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섬유공업의 발달과 함께 수요가 줄어들어서 이 지방의 모시짜기 기술도 점차 쇠퇴하고 있다. 한산세모시는 우리나라의 미를 상징하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여름 전통 옷감으로, 제작기술을 보호하고 전승하고자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한산모시는 대한민국의 미를 상징하는 여름 전통옷감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아 제작기술을 보호하고자 국가에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또 현재 한산 모시짜기 기능보유자로는 문정옥(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나상덕(충남무형문화재 제1호)등 전통직조기능 보유자를 지정하여 전통의 맥을 잇게 하였다.

 

 

술맛에 취해 자리를 못 뜨는 술 한산소곡주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하였으나 강건했던 국가 백제를 되살리려는 백제유민의 항쟁역사는 패망 이후 3년 동안 지속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할 때의 성이 200이라 하고 백제가 부흥운동을 일으켰을 때 호응한 성이 200여 개소나 된다고할 정도로 기세를 올렸으나 백제유민의 항쟁은 자체 내의 내분으로 와해되기에 이르러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마침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서천 한산면 소재 건지산성)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663). 이리하여 3년간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종말을 하고 말았다.


이후 백제 백제유민(百濟流民)들이 주류성에서 나라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빚어 마셨다는 한산소곡주(韓山素穀酒)는 백제 때 궁중술이며 1,500여 년의 전통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한산소곡주는 한산지방의 이름난 술로서 빛깔은 청주와 같다. 백제 때의 궁중술로서 백제 유민들이 나라를 잃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빚어 마셨다고 한다. 한산소곡주는 조선시대에 들어 가장 많이 알려진 술로『동국세시기』·『경도잡지』·『시의전서』·『규합총서』등에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다. 소곡주는 서천군 한산면에서 생산되는 전통술로써 1979년 7월 3일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한산소곡주"라는 술 이름은 추수가 끝난 뒤 여인들이 목욕재계하고 소복으로 갈아입은 후 정성을 다하여 빚었다 하여 소곡주라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