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난중일기 - 1

영지니 2008. 4. 13. 18:53

                                    

 난중일기  


                                                                          
임진년 1월 (1592년 1월)

1월 초1일 [양력 2월 13일]<임술> 맑다.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 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번이나 설을 세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병마사의 군관 이경신(李敬信)이 병마사의 편지와 설 선물과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등 여러가지 물건을 바치러 가지고 왔다.

1월 초2일 [양력 2월 14일]<계해> 맑다.
나라의 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의 제삿날)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김인보(金仁甫)와 함께 이야기했다.

1월 초3일 [양력 2월 15일]<갑자> 맑다.
동헌(여수시 군자동 진남관 뒷쪽)에 나가 별방군을 점검하고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써 보냈다.

1월 초4일 [양력 2월 16일]<을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초5일 [양력 2월 17일]<병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초6일 [양력 2월 18일]<정묘>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초7일 [양력 2월 19일]<무진> 아침에는 맑았다.
늦게부터 비와 눈이 번갈아 종일 내렸다. 조카 봉이 아산으로 갔다. 남원에서 전문(箋文: 임금께 바칠 일종의 글월)을 받들고 갈 유생이 들어왔다.


1월 초8일 [양력 2월 20일]<기사> 맑다.
객사에 나갔다가 동헌에서 공무를 봤다.

1월 초9일 [양력 2월 21일]<경오> 맑다.
아침밥을 일찍 먹은 다음, 동헌에 나가 전문을 봉하여 올려 보냈다.

1월 초10일 [양력 2월 22일]<신미> 종일 비가 내렸다.
방답(전남 여천군 돌산면)에 새 첨사로 이순신(李純信)이 부임하여 들어왔다.

1월 11일 [양력 2월 23일]<임신>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늦게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이봉수(李鳳壽)가 선생원(전남 여천군 율촌면 성생원)에 돌 뜨는 곳을 가 보고 와서 보고하기를 "이미 큰 돌 열일곱 덩이에 구멍을 뚫었다."고 했다. 서문 밖 해자(성 주위를 파서 물을 채운 곳)가 네 발쯤 무너졌다. 심사립(沈士立)과 이야기했다.

1월 12일 [양력 2월 24일]<계유> 궂은 비가 개이지 않다.
식사한 뒤에 객사 동헌에 나갔다. 본영 및 각 포구의 진무들에게 우등을 가리는 활쏘기를 시합했다.

1월 13일 [양력 2월 25일]<갑술> 아침에 흐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14일 [양력 2월 26일]<을해>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난 뒤에 활을 쏘았다.

1월 15일 [양력 2월 27일]<병자>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망궐례를 하였다.

1월 16일 [양력 2월 28일]<정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각 고을의 벼슬아치와 색리(고을의 아전) 등이 인사하러 왔다. 방답의 병선을 맡은 군관들과 색리들이 그들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장을 쳤다. 우후(지방 병마사영이나 수영에 첨사아래에 있는 무관)?가수(假守: 임시 직원)도 역시 점검하지 않아 이 지경에까지 된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공무를 어줍짢게 여기고, 제 몸만 살찌러 들며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 날의 일을 알만하다. 성밑에 사는 박몽세(朴夢世)는 석수인데 선생원 돌 뜨는 곳에 가서 해를 끼치고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입혔으므로, 곤장 여든 대를 쳤다.

1월 17일 [양력 2월 29일]<무인> 맑다.
춥기가 한 겨울 같다. 아침에 순찰사와 남원의 반자(아전의 별칭)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녁에 쇠사슬 박을 구멍낸 돌을 실어오는 일로 배 네척을 선생원으로 보냈다. 김효성(金孝誠)이 거느리고 갔다.

1월 18일 [양력 3월 1일]<기묘>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여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의 제1호선이 돌아갔다. 우등계문(優等啓聞)과 대가단자(代價單子)를 순찰사 영(營)으로 봉하여 보냈다.

1월 19일 [양력 3월 2일]<경진> 맑다.
동헌에서 공무를 본 뒤 각 군대를 점검했다.

1월 20일 [양력 3월 3일]<신사>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21일 [양력 3월 4일]<임오>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감목관(목장의 감독관)이 와서 잤다.

1월 22일 [양력 3월 5일]<계미> 맑다.
아침에 광양현감(魚泳潭)이 와서 인사했다.

1월 23일 [양력 3월 6일]<갑신> 맑다.
둘째 형 요신(堯臣)의 제삿날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사복시(司僕寺)에서 받아와 기르던 말을 올려 보냈다.

1월 24일 [양력 3월 7일]<을유> 맑다.
맏형 희신(羲臣)의 제삿날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답장을 보니, 고부군수 이숭고(李崇古)를 유임시켜 달라는 장계를 올린 것 때문에 물의를 일으켜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1월 25일 [양력 3월 8일]<병술>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를 쏘았다.

1월 26일 [양력 3월 9일]<정해>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흥양현감(裵興立)과 순천부사(權俊)이 와서 이야기했다.

1월 27일 [양력 3월 10일]<무자> 맑다.
오후에 광양현감이 왔다.

1월 28일 [양력 3월 11일]<기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29일 [양력 3월 12일]<경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30일 [양력 3월 13일]<신묘>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첫여름 같이 따뜻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을 쏘았다.


임진년 2월 (1592년 2월)

2월 초1일 [양력 3월 14일]<임진>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가랑비가 잠간 뿌리다가 늦게야 개었다. 선창(여수시 연등동 입구)으로 나가 쓸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방천안에 몽어 떼가 밀려 들어 왔기로, 그물을 쳐서 이천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쾌했다. 그 길로 전선 위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우후 이몽구(李夢龜)와 함께 새 봄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2월 초2일 [양력 3월 15일]<계사>
맑다. 동헌에서 공무를 봤다. 쇠사슬을 건너매는 데 필요한 크고 작은돌 여든 여 개를 실어 왔다. 활 열순을 쏘았다.

2월 초3일 [양력 3월 16일]<갑오>
맑다. 새벽에 우후가 각 포구의 부정사실을 조사하는 일로 배타고 나갔다. 공무를 마친 뒤 활을 쏘았다. 탐라 사람이 자녀 여섯 식구를 거느리고 도망쳐나와 금오도(여천군 남면)에 머물다가 방답 경비선에 잡혔다고 심부름꾼을 보냈기로 문초를 하고서 승평(순천)으로 압송하고 공문을 써 보냈다. 저녁에 화대석 네 개를 실어 올렸다.

2월 초4일 [양력 3월 17일]<을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북쪽 봉우리의 연대(신호대)쌓는 곳에 오르니, 쌓은 곳이 매우 좋아 무너질 염려가 없으매 이봉수(李鳳壽)의 애썼음을 알겠다. 종일 구경하다가 저녁에야 내려와 해자 구덩이를 순시했다.

2월 초5일 [양력 3월 18일]<병신>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 열여덟 순을 쏘았다.

2월 초6일 [양력 3월 19일]<정유>
종일 바람이 세게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순찰사에게서 편지가 두 번이나 왔다.

2월 초7일 [양력 3월 20일]<무술>
맑다가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발포만호가 부임했다는 공문이 왔다.

2월 초8일 [양력 3월 21일]<기해>
맑다가 또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이 날 거북함에 쓸 돛베 스무아홉 필을 받았다. 정오에 활을 쏘는데, 조이립(趙而立)과 변존서(卞存緖)가 자웅을 다투다가 조이립이 이기지 못했다. 우후가 방답에서 돌아와 방답첨사가 방비에 온 정성을 다하더라고 매우 칭찬했다. 동헌 뜰에 돌기둥 화대를 세웠다.

2월 초9일 [양력 3월 22일]<경자>
맑다. 새벽에 쇠사슬을 꿸 긴 나무를 베는 일로 이원룡 (李元龍)에게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두산도(돌산도)로 보냈다.

2월 초10일 [양력 3월 23일]<신축>
안개비, 개었다가 흐렸다가 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김인문(金仁問)이 순찰사영에서 돌아왔다.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역관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중원(명나라)에 무고하여 군사를 청하기까지 했을 뿐아니라 중원에서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에 무슨 딴 뜻이 있는가 의심하게까지 했으니, 그 흉칙함을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통역관들이 이미 잡혔다고는 하지만, 해괴하고 분통함을 참을 수 없다.

2월 11일 [양력 3월 24일]<임인>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배 위에서 새로 뽑은 군사들을 점검했다.

2월 12일 [양력 3월 25일]<계묘>
맑고 바람도 자다. 식사를 한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서 해운대 (여수시 동북쪽에 있는 작은 섬)로 자리를 옮겨 활을 쏘았다. 침렵치(沈獵雉)라는 운자(韻字)를 띄워 봤더니 너무 조용했다. 나중에 군관들도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趙而立)이 시를 읊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2월 13일 [양력 3월 26일]<갑진>
맑다. 전라우수사(李億祺)의 군관이 왔기로 화살대 큰 것 ?중치 백 개와 쇠 쉰근을 보냈다.

2월 14일 [양력 3월 27일]<을사>
맑다. 아산 어머니께 문안차 나장(고을이나 병마사?수사의 영문에 있는 使令) 두 명을 내어 보냈다.

2월 15일 [양력 3월 28일]<병오>
비바람이 매우 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새로 쌓은 해자 구덩이가 많이 무너져 석수(石手)들에게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했다.

2월 16일 [양력 3월 29일]<정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 여섯 순을 쏘았다. 신구번의 군사를 점검했다.

2월 17일 [양력 3월 30일]<무신>
맑다. 나라제삿날(世宗의 祭祀)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2월 18일 [양력 3월 31일]<기유>
흐렸다.

2월 19일 [양력 4월 1일]<경술>
맑다. 순찰하러 떠나 백야곶(여천군 화양면 백야도)의 감독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 권준(權俊)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렸다. 기생도 왔다. 비가 온 뒤라 산의 꽃이 활짝 피어 경치가 멋져 형언키 어렵다. 저물어서야 이목구미(여천군 화양면 이목리)에 이르러 배를 타고 여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에 이르니 영주(고흥)현감(裵興立)과 여도 권관(黃玉千)이 마중했다. 방비를 검열하는데 흥양현감은 내일 제사가 있다고 먼저 갔다.

2월 20일 [양력 4월 2일]<신해>
맑다. 아침에 모든 방비와 전선을 점검해 보니, 모두 새로 만들었고 무기도 웬간히 완비되었다. 늦게야 떠나서 영주(고흥)에 이르니 좌우의 산의 꽃과 들가의 봄풀이 한폭의 그림 같다. 옛날에 영주가 있다더니 역시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 !

2월 21일 [양력 4월 3일]<임자>

맑다. 공무를 본 뒤에 주인(감영과 고을의 연락을 취하는 營邸吏)이 자리를 베풀어 활을 쏘았다. 조방장 정걸(丁傑)도 와서 보고 능성현 감 황숙도(黃叔度)도 와서 함께 술취했다. 배수립(裵秀立)도 나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신홍헌(申弘憲)으로 하여금 술을 걸러 지난날에 심부름하던 삼반하인(軍奴?使令?及唱 등)들에게 나누어 먹이도록 했다.

2월 22일 [양력 4월 4일]<계축>
아침에 공무를 본 뒤에 녹도로 갔다. 황숙도(黃叔度)도 같이 갔다. 먼저 흥양 전선소에 이르러 배와 집기류을 몸소 점검했다. 그 길로 녹도로 가서 곧장 봉우리 위에 새로 쌓은 문다락으로 올라가 보니, 경치의 아름다움이 이 근방에서는 으뜸이다. 만호의 애쓴 흔적이 손닿지 않은 곳이 없다. 흥양현감(裵興立)과 능성현감 황숙도(黃叔度) 및 만호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겸하여 대포 쏘는 것도 봤다. 촛불을 밝혀 이슥해서야 헤어졌다.

2월 23일 [양력 4월 5일]<갑인>
흐렸다. 늦게야 배를 타고 발포로 가는데, 맞바람(逆風)이 세게 불어 배가 갈 수가 없다. 간신히 성머리에까지 이르러 배에서 내려 말을 탔다. 비가 몹시 쏟아져 일행 모두가 꽃비에 흠뻑 젖은 채로 발포로 들어가니, 해는 벌써 저물었다.

2월 24일 [양력 4월 6일]<을묘>
가랑비가 온 산에 내려 지척을 헤아리지 못하겠다.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 마북산(고흥군 포두면 마복산) 아래의 사량에 이르러 배를 타고 노질을 재촉하여 사도(고흥군 점암면 금사리)에 이르니, 흥양현감이 먼저 와 있다. 전선을 점검하고 나니, 날이 저물므로 그대로 눌러 잤다.

2월 25일 [양력 4월 7일]<병진>
흐렸다. 여러 가지 전쟁 방비에 탈난 곳이 많다.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줬다.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고을 수령 아랫 벼슬아치)를 내어 보냈다. 이곳의 방비가 다섯 포구 가운데 최하인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라고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조차 하지 못했으니 우습다.맞바람이 세게 불어 출항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잤다.

2월 26일 [양력 4월 8일]<정사>
아침 일찍 출항하여 개이도(여천군 화정면 개도)에 이르니, 여도진의 배와 방답진의 마중하는 배가 나와서 기다렸다. 날이 저물어서야 방답에 이르러 공사례를 마치고서 무기를 점검했다. 장전과 편전은 하나도 쓸만한 것이 없어 고민이다. 전선은 좀 온전한 편이니 기쁘다.

2월 27일 [양력 4월 9일]<무오>
흐렸다.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에 북쪽 봉우리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깎아지른 외딴 섬인지라 사면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무척 근심이 된다. 첨사가 애쓰기는 했으나, 미쳐 시설을 못했으니 어찌하랴. 저녁나절에야 배를 타고 경도(여수시 경호동 대경호도)에 이르니, 여필(汝弼)과 조이립(趙而立)이 군관?우후들이 술을 싣고 마중나왔다. 이들과 함께 마시고 즐기다 해가 넘어간 뒤에야 관청으로 돌아왔다. 2월 28일 [양력 4월 10일]<기미>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을 쏘았다.

2월 29일 [양력 4월 11일]<경신>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중위장을 순천부사로 고쳐 임명했다고 하니 한심하다.


임진년 3월 (1592년 3월)

3월 초1일 [양력 4월 12일]<신유>
망궐례를 했다. 식사를 한 뒤에 별방군과 정규군 하번군을 점검 하고서 놓아 보냈다. 공무를 마친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3월 초2일 [양력 4월 13일]<임술>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나라제삿날(中宗 章敬王后 尹氏 祭祀)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승군 (僧軍) 일백 명이 돌을 주웠다.

3월 초3일 [양력 4월 14일]<계해)
비가 저녁내 오다. 오늘은 삼짇날 명절이건만 비가 이렇게 내리니 답청도 못하겠다. 조이립(趙而立) 우후?군관 등과 동헌에서 이야기하며 술을 마셨다.

3월 초4일 [양력 4월 15일]<갑자>
맑다. 아침에 조이립(趙而立)을 배웅하고 객사 대청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서문밖 해자와 성을 더 쌓는 곳을 순시했다. 승군들이 돌줍 는 것을 성실히 하지 않으므로 책임자(首僧)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아산에 문안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 하니 다행이다.

3월 초5일 [양력 4월 16일]<을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군관들은 활을 쏘았다. 저물녁에 서울 갔던 진무가 돌아왔다. 좌의정 류성룡(柳成龍)의 편지와 "증손전 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책을 가지고 왔다. 이 책을 보니 수 전?육전?화공전 등 모든 싸움의 전술을 낱낱이 설명했는데, 참 으로 만고의 훌륭한 책이다.

3월 초6일 [양력 4월 17일]<병인>
맑다. 아침밥을 먹고난 뒤 출근하여 군기물을 점검했는데, 활?갑옷? 투구?전통?환도 등이 깨지고 헐어진 것이 많아 색리?궁장?감 고 등을 문책했다.

3월 초7일 [양력 4월 18일]<정묘>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난 뒤에 활을 쏘았다.

3월 초8일 [양력 4월 19일]<무진>
종일 비가 내렸다.

3월 초9일 [양력 4월 20일]<기사>
종일 비가 내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3월 초10일 [양력 4월 21일]<경오>
맑으나 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난 뒤에 활을 쏘았다.

3월 11일 [양력 4월 22일]<신미>
맑다.

3월 12일 [양력 4월 23일]<임신>
맑다. 식사한 뒤에 배있는 곳으로 나가 경강(여수시 봉산동)의 배를 점 검했다. 다시 배를 타고 소포(여수시 종화동 종포)로 나가는데 때 마침 샛바람이 세게 불고 격군(보조사공)도 없어 도로 돌아왔다. 곧바로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3월 13일 [양력 4월 24일]<계유>
아침에 흐렸다. 순찰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3월 14일 [양력 4월 25일]<갑술>
종일 많은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순찰사(李洸)를 만나러 순천으로 가는데, 비가 몹시 퍼부어서 길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선생원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서 다시 해농창평(순천시 해룡면)에 이르니, 길 바닥에 물이 석 자나 괴었다. 겨우 겨우 순천부에 이르렀다. 저녁에 순찰사와 격조를 터 놓고 이야기했다.

3월 15일 [양력 4월 26일]<을해>
흐리며 가랑비 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다락 위에 앉아서 활쏘고, 군관들에게는 편을 갈라 활을 쏘 게 했다.

3월 16일 [양력 4월 27일]<병자>
맑다. 순천부사가 환선정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겸하여 활도 쏘았다.

3월 17일 [양력 4월 28일]<정축>
맑다. 새벽에 순찰사에게 작별을 고하고 선생원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인 뒤에 본영으로 돌아왔다.

3월 18일 [양력 4월 29일]<무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3월 19일 [양력 4월 30일]<기묘>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3월 20일 [양력 5월 1일]<경진>
비가 몹시 쏟아지다.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각 관방의 회계를 밝혔다. 순천 관내를 수색하는 일이 제 날짜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대 장?색리?도훈도 등을 문책했다. 사도첨사(김완)에게도 만날 일 로 공문을 보냈는데, 혼자서 수색했다고 했다. 또 한나절 동안에 내나로도?외나로도(고흥군 봉래면)와 대평두?소평두 섬을 다 수색하고 그 날로 돌아왔다고 하니, 이 일은 너무도 엉터리 거 짓이다. 이를 바로 잡으려는 일로 흥양과 사도첨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들어왔다.

3월 21일 [양력 5월 2일]<신사>
맑다. 몸이 불편하여 아침내 누워 앓다가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공무 를 봤다.

3월 22일 [양력 5월 3일]<임오>
맑다. 성 북쪽 봉우리 아래에 도랑을 파내는 일로 우후 및 군관 열 명 을 나누어 보냈다. 식사한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3월 23일 [양력 5월 4일]<계미>
아침에 흐리고 저녁나절에는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보성에서 올 널빤 지가 아직 안 들여 왔기 때문에 색리에게 다시 공문을 보내어 독 촉했다. 순천에서 심부름꾼을 보내 온 소국진(蘇國進)에게 곤장 여든 대를 쳤다. 순찰사가 편지를 보내었는데 보니, "발포권관은 군사를 거느릴 만한 재목이 못 되기로 갈아 치워야 하겠다"고 하 므로 아직 갈지 말고 그대로 유임하여 방비에 종사하게 해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3월 24일 [양력 5월 5일]<갑신>
나라제삿날(世宗 昭憲王后 沈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우후 가 수색하고 탈없이 돌아왔다. 순찰사와 도사(都事)의 답장을 송 희립(宋希立)이 아울러 가져왔다. 순찰사의 편지 가운데, "영남 관찰사(김수)의 편지에 `대마도주(종의지)가 공문을 보냈는데, 벌 써 대마도 배 한 척을 귀국(조선)에 보냈는데, 만일 도착하지 않 았다면 풍랑에 깨졌을 것이라'고 했더라는 것이다. 그 말이 매우 음흉하다. 동래에서 서로 바라다 보이는 바다인데 그럴 리가 만 무하며, 말을 이렇게 거짓으로 꾸며대니, 그 간사함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3월 25일 [양력 5월 6일]<을유>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경상병마사가 평산포에 도착하지 않고 곧장 남해로 간다고 하였다.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스럽다는 뜻으로 답장을 보냈다. 새로 쌓은 성을 순시해 보니, 남쪽이 아홉 발이나 무너져 있었다.

3월 26일 [양력 5월 7일]<병술>
맑다. 우후와 송희립(宋希立)이 남해로 갔다.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3월 27일 [양력 5월 8일]<정해>
맑고 바람조차 없다. 일찍 아침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소포(여수시 종화동 종포)에 이르러 쇠사슬을 가로질러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고, 종일 나무 기둥 세우는 것을 바라 보았다. 겸하여 거북함에서 대포 쏘는 것 도 시험했다.

3월 28일 [양력 5월 9일]<무자>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활 열 순을 쏘았는데, 다섯 순은 모조 리 다 맞고, 두 순은 네 번 맞고, 세 순은 세 번 맞았다.

3월 29일 [양력 5월 10일]<기축>
맑다. 나라제삿날(世祖 貞憙王后 尹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아산 고향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 니 참으로 다행이다.


임진년 4월 (1592년 4월)

4월 초1일 [양력 5월 11일]<경인> 흐렸다.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공무를 본 뒤에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별조방을 점검했다.

4월 초2일 [양력 5월 12일]<신묘> 맑다.
식사를 하고 나니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점점 더 아파 온 종일 밤새도록 신음했다.

4월 초3일 [양력 5월 13일]<임진> 맑다.
기운이 어지럽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4월 초4일 [양력 5월 14일]<계사> 맑다.
아침에야 비로소 겨우 통증이 가라앉았다.

4월 초5일 [양력 5월 15일]<갑오> 맑다가 저녁나절에 비가 조금 내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4월 초6일 [양력 5월 16일]<을미> 맑다.
진해루로 나가 공무를 본 뒤에 군관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아우 여필(汝弼)을 배웅했다.

4월 초7일 [양력 5월 17일]<병신>
나라제삿날(中宗 文定王后 尹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낮 열 시경에 비변사에서 비밀공문이 왔는데, 영남관찰사와 우병마사의 장계에 의한 것이었다.

4월 초8일 [양력 5월 18일]<정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쌌다. 저녁나절에 여필(汝弼)이 떠나갔다. 객창에 홀로 앉았으니 만단의 회포가 어리어 온다.

4월 초9일 [양력 5월 19일]<무술> 아침에 흐리더니 저녁나절에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방응원(方應元)이 방비처에 갈 공문에 관인을 찍어서 보냈다. 군관들이 활을 쏘았다. 광양현감(어영담) 이 수색에 대한 일로 배를 타고 왔다가 저물어서 돌아갔다.

4월 초10일 [양력 5월 20일]<기해>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활 열 순을 쏘았다.

4월 11일 [양력 5월 21일]<경자> 아침에 흐리더니 저녁나절에 맑았다.
공무를 본 뒤에 활을 쏘았다. 순찰사(이광)의 편지와 별록을 순찰 사의 군관(남한)이 가져 왔다. 비로소 베로 돛을 만들었다.

4월 12일 [양력 5월 22일]<신축>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거북함의 지자?현자 포를 쏘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살펴 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관청으로 올라 갈 때 노대석을 보았다.

4월 13일 [양력 5월 23일]<임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4월 14일 [양력 5월 24일]<계묘>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4월 15일 [양력 5월 25일]<갑진> 맑다.
나라제삿날(成宗 恭惠王后 韓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써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 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의 통첩에, "왜선 아흔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다. "왜적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미 도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즉시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이광)?병마사(최원)?우수사(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다.

4월 16일 [양력 5월 26일]<을사>
밤 열 시쯤에 영남우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다.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4월 17일 [양력 5월 27일]<병오> 흐리고 비오더니 저녁나절에 맑았다.
영남우병마사(김성일)에게서 공문이 왔다.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 뒤에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한다. 저녁나절에 활 다섯 순을 쏘았다. 번을 그대로 서는 수군(仍番=上番)과 번을 새로 드는 수군(奔番=下番)이 잇달아 방비처로 왔다.

4월 18일 [양력 5월 28일]<정미> 아침에 흐렸다.
이른 아침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순찰사(이광)의 공문이 왔다. "발포권관은 이미 파직되었으니, 대리(假將)를 정하여 보내라" 고 하였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羅大用)을 이 날로 바로 정하여 보냈다. 낮 두 시쯤에 영남우수사의 공문이 왔다. "동래도 함락되고, 양산(조영규)?울산(이언함) 두 군수도 조방장으로서 성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고 한다. 이건 정말로 통분하여 말을 할 수가 없다. 병마사(이각)와 수사(박홍)들이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뒷쪽까지 이르렀다가 그만 즉시 회군했다고 하니 더욱 가슴 아프다. 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 병방이 석보창(여천군 쌍 봉면 봉계리 석창)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잡아 가두었다.

4월 19일 [양력 5월 29일]<무신> 맑다.
아침에 품방에 해자 파는 일로 군관을 정해 보내고, 일찌기 아침 밥을 먹은 뒤에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를 몸소 독려했다. 오후에 상격대를 순시했다. 이날 분부군(입대하러 온 군사) 700 명을 만나 보고 역사하는 일은 점검했다.

4월 20일 [양력 5월 30일]<기유>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이 왔다. "많은 적들이 휘몰아 쳐들어 오니 이를 막아낼 수가 없고 승리한 기세가 마치 무인지경을 드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내게 전선을 정비하여 와서 후원해 주기를 바란다고 조정에 장계하였다"고 하였다.

4월 21일 [양력 5월 31일]<경술> 맑다.
성 위에 군사를 줄지어 서도록 과녁터에 앉아서 명령을 내렸다. 오후에 순천부사(권준)가 달려 와서 약속을 듣고 갔다.

4월 22일 [양력 6월 1일]<신해>
새벽에 정찰도 하고 부정사실도 조사할 일로 군관을 내어 보냈다. 배응록(裵應祿)은 절갑도(고흥군 금산면 거금도)로 가고, 송일 성(宋日成)은 금오도(여천군 남면 금오도)로 갔다. 또 이경복(李 景福) ?송한련(宋漢連) ?김인문(金仁問) 등으로 하여금 두산도(여천군 돌산도)의 적대목(敵臺木)을 실어 내리는 일로 각각 군인 쉰 명씩을 데리고 가게 하고 나머지 군인들은 품방에서 역사를 시켰다.

4월 26일 [양력 6월 5일]<을묘>
<장계에서> 이 달 20일 성첩한 좌부승지(민준)의 서장이 왔다. "물길을 따라 적선을 요격하여 적들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그래서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이 내려갈 때, 이미 일러 보내었는데, 다만 군사상 진퇴하는 것은 반드시 기회를 보아 시행하여야만 그르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먼저 적선의 많고 적음과 지나가는 섬 사이에 적병이 있나 없나를 살펴 본 뒤에 나아감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매우 좋은 방책이지만, 만일 형세가 유리한데도 시행해야 할 것을 시행하지 않으면 기회를 크게 놓치게 되는 바,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의 판단에 맡 길 따름이다. 본도는 이미 이 뜻을 알렸으니 경상도에는 공문을 보내어 서로 의논하고 기회를 보아 조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일개의 주장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겸 관찰사 이광(李洸)?방어사 곽영(郭嶸)?병마절도사 최원(崔 遠) 등에게도 분부한 사연을 낱낱이 알렸으며, 한편 경상도 순변사 이일과 겸관찰사 김수?우수사 원균(元均) 등에게는 "그 도의 물길 사정과 두 도의 수군이 모처에 모이기로 약속하는 내용과 더불어 적선의 많고 적음과 현재 정박해 있는 곳과 그 밖의 대책 에 응할 여러 가지 기밀을 모두 급히 회답해 달라."고 통고 하고 각 관포에도 "전쟁 기구와 여러 가지 비품을 다시 철저히 정비하여 명령을 기다리라."고 공문을 돌렸다.

4월 27일 [양력 6월 6일]<병진>
<장계에서> 이 달 23일 성첩된 좌부승지의 서장이 새벽 네 시쯤 에 선전관 조명(趙銘)이 가져 왔다. "왜적들이 이미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또 밀양에 들어 왔다는데, 이제 경상도 우수사 원균 (元均)의 장계를 보았더니,'각 포구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군사의 위세을 뽐내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다.'고 하니, 이는 가장 좋은 기회이므로 마땅히 그 뒤를 따라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대가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평정시킬 것 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노니, 그대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에 있으므로 혹시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대의 판단대로 하고 너무 명령에 거리끼지는 말라.'고 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왜적들은 침입한지 오래되어 반드시 지쳐서 사기가 떨어지고 가진 전비품도 거의 없어졌을 것이니, 왜적들을 꼭 이 때에 막아내야 하겠거니와 다만 앞뒤 적선의 척수가 500여 척 이상이라 하므로 우리의 위세를 불가불 엄하게 갖추어 엄습할 모습을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겁내고 떨도록 해야 하겠다. 그래서 수군에 소속된 방답?사도?여도?발포?녹도 등 5개 진포의 전선만으로는 세력이 심히 고약하기 때문에 수군이 편성되 어있는 순천?광양?낙안?흥양?보성 등 5개 고을에도 아울러 방략에 의해서 거느리고 갈 예정으로 처음에는 경상도로 출전하면 해로를 지나게 되는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통고하였다. 그러나 출전할 기일이 급한데다 수군의 여러 장수중에 보성 및 녹도 등지는 3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통고하여 불러 모은다 해도 그곳 수군은 쉽게 모일 수 없으므로 반드시 기일 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므로, 그 밖의 여러 장수들만이라도 모두 이달 29일 본영 앞바다에 모이게 하여 거듭 약속을 밝힌 뒤에 즉시 경상도로 출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풍세의 순역을 미리 생 각하여 어렵게 되면 형편에 따라서 빨리 출전하려고 하는 바, 경상도 순변사(이일)?겸관찰사(김수)?우수사 등에게도 공문을 보내어 약속하였음을 장계올렸다.

4월 29일 [양력 6월 8일]<무오>
<장계에서> 정오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회답 공문이 왔다. "적산 500여 척이 부산 ?김해 ?양산 ?명지도 등지에 정박하고, 제 맘대로 상륙하여 연해변의 각 관포와 병영 및 수영을 거의 다 점령하였으며, 봉홧불이 끊어졌으니 매우 통분하다. 본도(경상우 도)의 수군을 뽑아 내어 적선을 추격하여 10 척을 쳐부수었으나, 나날이 병마사를 끌여들인 적세는 더욱 성해져서 적은 많은데다 우리는 적기 때문에 적을 맞아 싸울 수 없어서 본영(경상우수영) 도 이미 함락되었다. 귀도(전라좌도)의 군사와 전선을 남김없이 뽑아 내어 당포 앞바다로 급히 나와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소속 수군으로, 중위장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부 장에 낙안군수 신호(申浩), 전부장에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중 부장에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유군장에 발포가장?영군관?훈 련원봉사 나대용(羅大用), 우부장에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후 부장에 녹도만호 정운(鄭運), 좌척후장에 여도권관 김인영(金仁 英), 우척후장에 사도첨사 김완(金浣), 한후장에 영군관?급제 최대성(崔大晟), 참퇴장에 영군관?급제 배응록(裵應祿), 돌격장에 영군관 이언량(李彦良) 등을 모두 배치하고 거듭 약속을 명확히 하였다. 선봉장은 우수사 원균(元均)과 약속할 때 그도의 변장으로써 임명할 계획이며, 본영은 우후 이몽구(李夢龜)를 유진장으로 임명하고, 방답?사도?여도?녹도?발포 등의 5개 포구에는 담략이 있는 이를 가장(假將)으로 임명하여 엄중히 훈계하여 보냈다. 나는 수군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4월 30일 새벽 네 시에 출전할 예정으로 경상우도 남해현 미조항과 상주포?곡포?평산포 등 네 개 진영이 이미 거듭 들어왔으므로 그 현령?첨사?만호 등이 "당일 군사와 병선을 정비하여 길 중간까지 나와서 대기하라"고 새벽에 공문을 만들어 사람을 달려 보냈다. 낮 두 시경 본영의 진무이고 순천 수군인 이언호가 급히 돌아와서 보고했다. "남해현 성안의 관청 건물과 여염집들은 거의 비었고, 집안에서 밥짓는 연기마자 별로 나지 않으며, 창고의 문은 이미 열려 곡물은 흩어진채로 있고 무기고의 병기마저 모두 없어지고 비어 있는데, 마침 무기고의 행랑채에 한 사람이 있기에 그 이유를 물어 보니, `적의 세력이 급박해지자 온 성안의 사졸들이 소문만 듣고 달아났으며, 현령과 첨사도 따라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다'고 대답하므로, 돌아오다가 또 한사람을 보았는데, 쌀 섬을 진채 장전을 가지고 남문 밖에서 달려 나오다가 장전의 일부를 소인에게 주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장전을 살펴 보니, "곡포(曲浦)"라고 새긴 것이 분명하며, "성을 비우고 달아났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그러나 하인들 이 보고하는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워서 군관 송한련(宋漢連)에 게 "이 말이 사실과 같다면 적의 군량을 쌓아 주는 격이 되고, 점점 본도(전라좌도)로 침입하여 오래 머물며 물러 가지 않을 것이므로 그 창고와 무기고 등을 불살라 없애라"고 전령하여 급히 달려 보냈다. 대체로 보아 흉악한 적의 세력이 크져 부대를 나누어 도적질을 하는데, 한 부대는 육지 안으로 향하여 먼 곳까지 석권하고, 한 부대는 연해안으로 향하여 닥치는대로 함락하고 있으나, 육지나 바다의 여러 장수들이 한 사람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적의 소굴이 되어 버렸고, 바다의 진영으로서도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우수영과 남해의 평산포 등 네 개의 진영 뿐이지만, 이제 들으니 우수영마저도 함락되었고, 남해의 온 섬들은 벌써 무인지경이 되었다고 하는 바, 이른바 우수영은 내가 지키는 진영과 일해상접이고, 남해는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앉은 사람의 모양마저 똑똑히 세어 볼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그러므로 본도로 침범해 올 시기가 곧 박두하였으니 매우 한심할 뿐 아니라, 본도 내의 육지와 연해안 각 고을과 변두리의 성을 방어함에 있어서 새로 뽑은 조방군 등 정예의 사졸은 모두 육전으로 나가고 변두리에 남은 진보에는 병기를 가진 사람조차 너무 적어 다만 맨손으로 모인 수군을 거느리게 되므로 그 세력이 매우 약하여 달리 방어할 대책이 없다. 뿐만 아니라 수군의 중위장이며 순천부사인 권준(權俊)도 바다로 나가 사변에 대비하다가 관찰사의 전령으로 전주로 달려 갔다. 더구나, 오랫동안 임지에 있던 자들은 뜬소문만 듣고서도 가족을 데리고 짐을 지고 길가에 잇달았으며, 혹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고 혹은 틈을 타서 이사 하는데, 본영의 수졸과 본고장 사람들 사이에도 또한 이같은 무리들이 있으므로 그 길목에 포망장(도망자 잡는 장수)을 보내어 도망자 두 명을 찾아내어 우선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하여 군사들의 공포심을 진정시켰거니와 "경상도를 구원하러 출전하라."는 분부가 이같이 정녕할 뿐 아니라 나도 그 소식을 듣고 분노가가 슴에 서리고 쓰라림이 뼈속에 사무쳐 한번 적의 소굴을 무찔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려는 충곡이 자나 깨나 간절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우수사와 함께 합력하여 무찔러서 적의 무리를 섬멸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런데 남해에 첨입된 평산포 등 네 개의 진영 의 진장과 현령 등이 왜적들의 얼굴을 보지아니하고 먼저 도피하였으므로, 나는 남의 도의 군사이니 그 도의 물길이 험하고 평탄한 것도 알 수 없고 물길을 인도할 배도 없으며, 또 작전을 상의할 장수도 없는데, 경솔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천만 뜻 밖의 실 패도 없지 않을 것이다.소속 전함을 모두 합해 봐야 30 척 미만 으로서 세력이 매우 고약하기 때문에 겸관찰사 이광(李洸)도 이미 이 실정을 알고 본도 우수사(이억기)에게 명령하여 "소속 수군을 신의 뒤를 따라서 힘을 모아 구원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이 다 도착되는 것을 기다려서 약속한 연후에 발선하여 바로 경상도로 출전해야 하겠다. 흉하고 더러운 무리들이 벌써 새재를 넘어 서울을 육박하게 되어 본도의 겸관찰사가 홀로 분발하여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곧 서울로 향하여 왕실을 보호할 계획이라 하는 바, 이 말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칼을 어루 만지며 혀를 차면서 탄식하고, 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서울로 달려가 먼저 육지 안으로 들어간 적을 없애고자 하니, 국경을 지키는 신하의 몸으로서 함부로 하가 어려워 부질없이 답답한 채 분함을 참고 스스로 녹이며 엎드려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다. 내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세력이 이와 같이 왕성하여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모두 해전으로써 막아내지 못하고 적을 마음대로 상륙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상도 연해안 고을이는 깊은 도랑과 높은 성으로 든든한 곳이 많은데, 성을 지키던 비겁한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 간담이 떨려 모두 도망갈 생각만 품었기 때문에 적들이 포위하면 반드시 함락되어 온전한 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지난번 부산 및 동래의 연해안 여러 장수들만 하더라도 배들을 잘 정비하여 바다에 가득 진을 치고 엄습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를 보아 전선을 알맞게 병법대로 진퇴하여 적을 육지로 기어 오르지 못 하도록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반드시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분함을 더 참을 수 없다. 이제 한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로 바로 두들겨 요망한 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에 하나라도 씻으려 하는 바, 성공하고 안하고, 잘 되고 못 되고는 내 미리 생각할 바가 아니리라.

4월 30일 [양력 6월 9일]<기미>
<장계에서> 낮 두 시경에 전날 쓴 일을 장계로 써 올렸다.


임진년 5월 (1592년 5월)

5월 1일 [양력 6월 10일]<경신>
수군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이 날은 흐리되 비는 오지 않고 마파람만 세게 불었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첨사(이순신)?흥양 현감(배흥립)?녹도만호 정운(鄭運) 등을 불러 들이니, 모두 분격 하여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모습이 실로 의사들이라 할만 하다.

5월 2일 [양력 6월 11일]<신유> 맑다.
겸 삼도순변사의 공문과 우수사의 공문이 도착했다. 송한련(宋 漢連)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현령(기효근)?미조 항첨사(김승룡)?상주포?곡포?평산포만호(김축) 등이 하나같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함부로 벌써 달아나 버렸고, 군기물 등도 흩어 없어져 남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놀랍고도 놀랄 일이다. 오정 때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 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신 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첩입된 지역을 왕래?연락하는 배) 세 척 이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에서 세 어른의 명령이 내려왔다. 창평현령이 부임하였다는 공문을 와서 바쳤다. 저녁에 군호를 용호(龍虎)라 하고, 복병을 수산(水山)이라 하였다.

5월 3일 [양력 6월 12일]<임술> 가랑비가 아침내 내렸다.
경상우수사의 회답편지가 새벽에 왔다. 오후에 광양과 흥양현감 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던 중 모두 분한 마음을 나타냈다. 전라 우수사가 수군을 끌고 와서 같이 약속하고서 방답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우수사가 온다고 기뻐하였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았다. 그러니 그건 방답의 배였다. 실망하였다. 그러나 조금 뒤에 녹도만호가 보자고 하기에 불러들여 물었더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 가니 통분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곧 중위장(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고쳤다. 이 날 여도수군 황옥천(黃玉千)이 왜적의 소리를 듣고 달아났다. 자기 집에서 잡아 와서 목을 베어 군중앞에 높이 매달았다.

5월 초4일 [양력 6월 13일]<계해> 맑다.
먼동이 틀 때에 출항했다. 곧바로 미조항(남해군 미조면 미조 리)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약속했다. 우척후?우부장?중부장?후 부장 등은 오른편에서 개이도(여천군 화정면 개도)로 들어가서 찾아 치게하고 나머지 대장선들은 아울러평산포?곡포 ?상주포?미조항을 지나 갔다.(이 뒤로 28까지 빠짐)

5월 29일 [양력 7월 8일]<무자>
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미리 약속한 곳에 와서 만나 그와 함께 상의했다. 왜적이 머물러 있는 곳을 물으니, "왜적들은 지금 사천선창에 있 다"고 한다. 바로 거기로 가보았더니 왜놈들은 벌써 뭍으로 올 라 가서 산 위에 진들 치고 배는 그 산 아래에 줄지어 매어 놓고 항전하는 태세가 재빨리 튼튼해졌다. 나는 장수들을 독려하 여 일제히 달려 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포들을 우레 같이 쏘아대니, 적들이 무서워서 물러나는데, 화살을 맞은 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왜적의 머리를 벤 것만도 많지만, 이 싸움에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활꾼과 격군중에서 탄환을 맞은 사람이 또한 많았다. 적선 열세 척을 불 태워버리고 물러나 머물렀다.


임진년 5월 (1592년 5월)

5월 1일 [양력 6월 10일]<경신>
수군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이 날은 흐리되 비는 오지 않고 마파람만 세게 불었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첨사(이순신)?흥양 현감(배흥립)?녹도만호 정운(鄭運) 등을 불러 들이니, 모두 분격 하여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모습이 실로 의사들이라 할만 하다.

5월 2일 [양력 6월 11일]<신유> 맑다.
겸 삼도순변사의 공문과 우수사의 공문이 도착했다. 송한련(宋 漢連)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현령(기효근)?미조 항첨사(김승룡)?상주포?곡포?평산포만호(김축) 등이 하나같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함부로 벌써 달아나 버렸고, 군기물 등도 흩어 없어져 남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놀랍고도 놀랄 일이다. 오정 때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 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신 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첩입된 지역을 왕래?연락하는 배) 세 척 이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에서 세 어른의 명령이 내려왔다. 창평현령이 부임하였다는 공문을 와서 바쳤다. 저녁에 군호를 용호(龍虎)라 하고, 복병을 수산(水山)이라 하였다.

5월 3일 [양력 6월 12일]<임술> 가랑비가 아침내 내렸다.
경상우수사의 회답편지가 새벽에 왔다. 오후에 광양과 흥양현감 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던 중 모두 분한 마음을 나타냈다. 전라 우수사가 수군을 끌고 와서 같이 약속하고서 방답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우수사가 온다고 기뻐하였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았다. 그러니 그건 방답의 배였다. 실망하였다. 그러나 조금 뒤에 녹도만호가 보자고 하기에 불러들여 물었더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 가니 통분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곧 중위장(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고쳤다. 이 날 여도수군 황옥천(黃玉千)이 왜적의 소리를 듣고 달아났다. 자기 집에서 잡아 와서 목을 베어 군중앞에 높이 매달았다.

5월 초4일 [양력 6월 13일]<계해> 맑다.
먼동이 틀 때에 출항했다. 곧바로 미조항(남해군 미조면 미조 리)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약속했다. 우척후?우부장?중부장?후 부장 등은 오른편에서 개이도(여천군 화정면 개도)로 들어가서 찾아 치게하고 나머지 대장선들은 아울러평산포?곡포 ?상주포?미조항을 지나 갔다.(이 뒤로 28까지 빠짐)

5월 29일 [양력 7월 8일]<무자>
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미리 약속한 곳에 와서 만나 그와 함께 상의했다. 왜적이 머물러 있는 곳을 물으니, "왜적들은 지금 사천선창에 있 다"고 한다. 바로 거기로 가보았더니 왜놈들은 벌써 뭍으로 올 라 가서 산 위에 진들 치고 배는 그 산 아래에 줄지어 매어 놓고 항전하는 태세가 재빨리 튼튼해졌다. 나는 장수들을 독려하 여 일제히 달려 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포들을 우레 같이 쏘아대니, 적들이 무서워서 물러나는데, 화살을 맞은 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왜적의 머리를 벤 것만도 많지만, 이 싸움에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활꾼과 격군중에서 탄환을 맞은 사람이 또한 많았다. 적선 열세 척을 불 태워버리고 물러나 머물렀다.


임진년 6월 (1592년 6월)

6월 초1일 [양력 7월 9일]<기축> 맑다.
사량도(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뒷바다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 다.

6월 초2일 [양력 7월 10일]<경인> 맑다.
아침에 떠나 곧장 당포 선창(船倉)에 이르니, 적선 스무여 척이 줄지어 머물러 있다.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한 척은 우리 나라 판옥선만 하다. 배위에 다락이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겠고,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떡 버티고 우뚝 앉아 끄덕 도 아니 하였다. 또 편전과 대?중?승자 총통으로 비오듯 마구 쏘아대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떨어졌다. 그러자 왜적들은 한꺼번에 놀라 흩어 졌다.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 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모조리 섬멸하고 한 놈도 남겨두지 않았다. 얼마 뒤에 왜놈의 큰 배 스무 여 척이 부산에서부터 깔려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서는 개도(介 島: 통영시 산양면 추도; 싸리섬)로 뺑소니치며 들어가 버렸다.

6월 초3일 [양력 7월 11일]<신묘> 맑다.
아침에 다시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개도(介島)를 협공하였으나, 이미 달아나버려 사방에는 한 놈도 없었다. 고성 등지로 가고 자 했으나, 아군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기 때문에 울분을 참으면서 머물러 밤을 지냈다. 수군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서 왔다. 장병들이 기뻐 날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내일 군사를 합치기로 약속하고 ?에서 잤다.

6월 초4일 [양력 7월 12일]<임진>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면서, 어설렁거리며 형 세를 관망하고 대책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데, 정오가 되니 우수사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돛을 올리고서 왔다.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서 날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사를 합치고 약 속을 거듭한 뒤에 착포량(통영시 당동 착량)에서 밤을 지냈다.

6월 초5일 [양력 7월 13일]<계사>
아침에 출항하여 고성땅 당항포에 이르니, 왜놈의 배 한 척 이 판옥선과 같이 큰데, 배 위에 누각이 높고 그 위에 적장이 앉아서, 중선 열두 척과 소선 스무 척(계 서른두 척)을 거느렸다. 한꺼번에 쳐서 깨뜨리니, 활을 맞은 자가 부지기수요, 왜장의 모가지도 일곱 급이나 베었다. 나머지 왜놈들은 뭍으로 내려가 즉시로 달아났다. 그래봤자 나머지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6월 초6일 [양력 7월 14일]<갑오> 맑다.
적선의 동정을 살피며, 거기서 그대로 잤다.

6월 초7일 [양력 7월 15일]<을미> 맑다.
아침에 출항하여 영등 앞바다에 이르니, 적선이 율포에 있다고 했다. 복병선으로 하여금 탐지케 했더니, 적선 다섯 척이 먼저 우리 군사가 오는 것을 알고 남쪽 넓은 바다로 달아나는데, 여러 우리 나라 배가 일제히 쫓아가 사도첨사 김완(金浣)이 한 척을 온전히 잡고, 우후도 한 척을 온전히 잡고, 녹도만호 정운(鄭運)도 한 척을 온전히 잡으니, 모두 왜적의 머리가 서른여섯 개이다.

6월 초8일 [양력 7월 16일]<병신> 맑다.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의논하면서 바다 가운데서 머물러 지냈다.

6월 초9일 [양력 7월 17일]<정유> 맑다.
곧장 천성?가덕에 이르니, 왜적이 하나도 없다. 두세번 수색 하고나서, 군사를 돌려 당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새벽도 되기 전에 배를 출항하여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이억기)와 이야기하였다.

6월 초10일 [양력 7월 18일]<무술>은 맑았다.
임진년 7월 (1592년 7월)

7월 초4일 [양력 8월 10일]<신유>
<장계에서> 떼를 지어 출몰하는 적을 맞이하여 낱낱이 무찌르고자 서로 공문을 돌려서 약속하며 배를 정비하고, 경상도의 적세 를 탐문하였는데, "가덕?거제 등지에 왜선이 혹 열 여 척, 혹은 서른 여 척이 떼를 지어 출몰한다"고 할 뿐 아니라, 본도 금산(나 주시 금성동) 지경에도 적세가 크게 뻗치었는 바, 수륙으로 나누어 침범한 적들이 곳곳에서 불길 같이 일어나건만, 한번도 적을 맞아 싸운 적이 없어서 깊이 침범하게 되었으므로 처음에 본도 우수사와 모이기로 약속한 오늘 저녁 때에 약속한 그 장소에 도착하였다.

7월 초5일 [양력 8월 11일]<계해>
<장계에서> 서로 약속하다.

7월 초6일 [양력 8월 12일]<임술>
<장계에서> 함대를 거느리고 일시에 출항하여 곤양과 남해의 경 계인 노량에 도착하니, 경상우수사가 파손된 것을 수리한 전선 일곱 척을 거느리고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서 같이 만나 재삼 약속하고 진주땅 창신도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밤을 지냈다.

7월 초7일 [양력 8월 13일]<갑자>
<장계에서> 샛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하기 어려웠다. 고성 땅 당 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기로 나무하고 물 긷고 있을 때, 피란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의 목동 김천손(金千孫)이 우리 함대를 바라 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말하였다.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일흔 여 척이 오늘 낮 두 시쯤 영등포 앞바다에서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다"고 하므로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하였다.

7월 초8일 [양력 8월 14일]<을축>
<장계에서>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견내량)으로 항해했다. 한바다에 이르러 바라보니, 왜의 대선 한 척과 중선 한 척이 선봉으로 나와서 우리 함대를 몰래 보고서는 도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 서른 여섯 척과 중선 스무 네 척, 소선 열세 척(모두 일흔세 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은 서로 부닥치게 될 것 같아서 싸움하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왜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다.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뭍으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먼저 나온 적을 뒤쫓아서 엄습할 기세를 보이게 하니, 적 선들이 일시에 돛을 올려서 쫓아 나오므로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돌아 나오자, 왜적들도 따라 나왔다. 그때야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 ?현자?승자 등의 총통들을 쏘아서 먼저 두세 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은 사기가 꺾이어 물러나므로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 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같고 우레같 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순천부사 권준(權俊)이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 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 급을 베고 우리 나라 남자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도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쏘아 맞혀서 내 배로 묶어 왔는데, 문초하기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중상이고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즉시 목을 베었으며, 다른 왜적을 비롯하여 머리 열두 급을 베고, 우리 나라 사람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여섯 급을 베었고, 현양현 감 배흥립(裵興立)이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여덟 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네 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두 척을 쫓아가서 쳐부수어 일시에 불태웠다. 좌돌격장 급제 이기남(李奇男)은 왜대 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잡아 머리 일곱 급을 베었으며, 좌별도장 본영 군관 전 만호 윤사공(尹思恭)과 가안책(賈安 策) 등은 층각선 두 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여섯 급을 베었다. 낙안군수 신호(申浩)는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일곱 급을 베었으며, 녹도만호 정 운(鄭運)은 층각대선 두 척을 총통으로 뚫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불태우고 머리 세 급을 베고 우리 나라 사람 두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세 급을 베었고, 발포만호 황정록(黃廷祿)은 층각선 한 척을 쳐부수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힘을 모아 불태우고 머리 두 급을 베었다. 우별도장 전 만호 송응민(宋應珉)은 머리 두 급을 베었고, 흥양통장 전 현감 최천보(崔 天寶)는 머리 세 급을 베었고,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李應華)는 머리 한 급을 베었고, 우돌격장 급제 박이량(朴以良)은 머리 한 급을 베었고, 내가 타고 있는 배에서 머리 다섯 급을 베었고, 유군일령장 손윤문(孫允文)은 왜의 소선 두 척에 총을 쏘고 산 위 에까지 추격하였으며, 오령장 전 봉사 최도전(崔道傳)은 우리나라 소년 세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그 나머지의 왜대선 스무 척, 중선 열일곱 척, 소선 다섯 척 등은 좌도와 우도의 여러 장수들 이 힘을 모아 부수고 불태우니 화살을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놈 사백 여 명은 형세가 아주 불리하고 힘이 다 되었는지 스스로 도망가기 어려운 줄 알고, 한산도에서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으며, 그 나머지 대선 한 척?중선 일곱 척?소선 여셧 척(모두 열네 척) 등은 접전할 때 뒤처져 있다가 멀리서 배를 불태우며 목베어 죽이는 꼴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도망해 버렸으나, 종일 접전한 탓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노곤하고 날도 땅거미가 져 어둑어둑하므로 끝까지 추격할 수 없어서 견내량 내항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7월 초9일 [양력 8월 15일]<병인>
<장계에서> 가덕으로 향하려는데, "안골포에 왜선 마흔 여 척이 정박해 있다."고 탐망군이 보고했다. 즉시 본도 우수사 및 경상 우수사와 함께 적을 토멸할 계책을 상의한 바, 이 날은 날이 이미 저물고 맞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하여 앞으로 나갈 수 없으므 로 거제땅 온천도(거제도 하청면 칠천도)에서 밤을 지냈다.

7월 초10일 [양력 8월 16일]<정묘>
<장계에서> 새벽에 출항하여 "본도 우수사는 안골포 밖의 가덕 변두리에 진치고 있다가, 우리가 만일 접전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달려 오라"고 약속하고, 나는 함대를 이끌고 "학익진"을 형성하여 먼저 진격하고, 경상 우수사는 내 뒤를 따르게 하여 안골포에 이르러 선창을 바라보니, 왜대선 스무한 척?중선 열다섯 척?소선 여섯 척(모두 마흔두 척)이 머물고 있었다. 그중 삼층으로 방이 마련된 대선 한 척과 이층으로 된 대선 두 척이 포구에 서 밖을 향하여 물에 떠 있었고, 나머지는 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구의 지세가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뭍이 드러날 것이고 판옥대선으로는 쉽게 드나들 수가 없으므로 여러번 유인 해내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선운선(先運船) 쉰아홉 척을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남김없이 불태우고 목베었기 때문에 형세가 궁해지면 뭍으로 내려갈 계획으로 험한 곳에 배를 매어둔 채 두려워 겁내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서로 교대로 드나 들면서 천자?지자?현자 총통과 여러 총통 뿐아니라 장전과 편전 등을 빗발 같이 쏘아 맞히고 있을 적에, 본도 우수사가 장수를 정하여 복병시켜 둔 뒤 급히 달려 와서 협공하니, 군세가 더욱 강해져서 삼층방 대선과 이층방 대선을 타고 있던 왜적들은 거의 다 사상하였다. 그런데 왜적들은 사상한 자를 낱낱이 끌어내어 소선으로 실어내고, 다른 배의 왜적들을 소선에 옮겨 실어 층각대선으로 모아들였다. 이렇게 종일토록 하여 그 배들을 거의 다 깨부수자, 살아남은 왜적들은 모두 뭍으로 올라갔는데, 뭍으로 간 왜적들은 다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곳 백성들이 산골에 잠복해 있는 자가 무척 많은 데, 그 배들을 모조리 불태워 궁지에 몰린 도적이 되게 한다면, 잠복해 있는 그 백성들이 오히려 비참한 살륙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잠깐 일 리 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다.

7월 11일 [양력 8월 17일]<무진>
<장계에서> 새벽에 다시 돌아와 포위해 보았으나, 왜적들이 허둥지둥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밤을 틈타 도망갔으므로 전일 싸움 하던 곳을 탐색해 보니, 전사한 왜적들을 열두 곳에 모아 놓고 불태웠는데, 거의 타다남은 뼈다귀와 손발들이 흩어져 있고, 그 포구 안팎에는 흘린 피가 땅바닥에 그득하여 곳곳이 붉은 빛인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도적들의 사상자를 이루 헤아릴 수 가 없었다. 낮 열 시쯤 양산강과 김해포구 및 감동포구를 모두 수색하였으 나, 왜적의 그림자는 전혀 없다. 그래서 가덕 바깥에서부터 동래 몰운대에 이르기까지 배를 늘여 세워 진을 치게 하고, 군대의 위세를 엄하게 보이게 한 다음 "적의 많고 적음을 탐망해서 보고하라"고 가덕도 응봉과 김해의 금단곶 연대 등지로 탐망군을 정하여 보내었는데, 밤 여덟 시 쯤에 그 탐망군인 경상우수영 수군 허수광(許水光)이 와서 보고했다. "연대에서 탐망할려고 올라갈 때, 산봉우리 아래 작은 암자에 한 늙은 중이 있기에 같이 연대로 올라가서 양산과 김해의 두 강의 으슥한 곳과 그 두 고을 쪽을 바라보니, 적선이 나뉘어 정박해 있는 수는 거의 백 여 척쯤 되는데, 그 늙은 중에게 적선의 동정 을 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날마다 쉰 여 척이 떼를 지어 드나 들며, 11일 본토에서 그 강으로 들어왔다가 어제 안골포 접전 때, 포 쏘는 소리를 듣고는 간 밤에 거의 다 도망가고 다만 배 여 척 이 남아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왜놈들은 너무 두려워서 도망친 꼴을 짐작할 수 있겠다. 저물녘 에 천성보로 나아가서 잠깐 머물면서 적에게 우리들이 오랫동안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군사를 돌렸다.

7월 12일 [양력 8월 18일]<기사>
<장계에서> 낮 열 시쯤에 한산도에 이르니, 이 곳에 하륙했던 왜적들이 연일 굶어서 걸음을 잘 걷지 못한 채 피곤하여 바닷가 에서 졸고 있었다.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이미 머리를 세 급 을 베었고, 그 나머지 사백 여 명의 왜적은 탈출해도 도망갈 길 이 없는 초롱 속의 새와 같았다. 나와 본도 우수사는 다른 도에 주둔하는 군사로서 군량이 벌써 떨어졌을 뿐 아니라 "금산의 적 세가 크게 성하여 이미 전주에 도착했다"는 기별이 잇달아 도착 하므로 그섬에 하륙한 적들은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합력하여 목을 베고 그 급수를 통고하도록 그 도의 우수사와 약속했다.

7월 13일 [양력 8월 19일]<경오>
<장계에서> 본영으로 돌아왔다. 여러 사람의 문초 내용이 비록 낱낱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배를 정비하여 전라도로 향한다"는 말만은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 것 같다. 이들중에, 첫째 부대의 왜선 일흔세 척은 거제도 견내량에 와서 머물고 있다가 이미 섬멸되었고, 둘째 부대의 왜선 마흔두 척은 안골포 선창에 벌여 진치고 있었으나, 역시 우리에게 패하여 무 수한 사상자를 내고 밤에 도망하였으니, 다시 그 무리를 데리고 와서 병력을 합세하여 바로 몰아 침범해 오면, 마침내는 우리가 앞뒤로 적을 받게 될 것이므로 병력이 분산되고 형세가 약한 것 이 극히 염려스럽다. 그래서 "군대를 정비하여 창을 베개로 삼아 변을 기다려 다시 통고하는 즉시로 수군을 거느리고 달려오라"고 본도 우수사 이억기와 약속하고 진을 파하였으며, 포로되었다가 도로 잡혀 온 사람은 각각 그 빼앗은 관원에게 명하여, "구휼하 고 편히 있게 하였다가 사변이 평정된 뒤에 고향으로 돌려 보내 라"고 알아 듣도록 타일렀다.

7월 15일 [양력 8월 21일]<임신>
<장계에서> 여러 장수와 군사 및 관리들이 제몸을 돌아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여전하여 여러번 승첩을 하였다만 조정이 멀 리 떨어져 있고 길이 막혔는데, 군사들의 공훈 등급을 만약 조정 의 명령을 기다려 받은 뒤에 결정한다면, 군사들의 심정을 감동 케 할 수 없으므로, 우선 공로를 참작하여 1?2?3 등으로 별지 에 기록하였으며, 당초의 약속과 같이 비록 왜적의 머리를 베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을 힘을 다해 싸운 사람들은 내가 본 것으로 써 등급을 나누어 결정하고서 함께 기록하였다. 이 내용을 장계하였다.

7월 16일 [양력 8월 22일]<계유>
<장계에서> 본영과 본도 소속 각 진포의 군량은 원 수량이 넉넉 하지 못하였는데, 세번이나 적을 무찌르느라고 해상에서 여러 날 을 보내게 되어 많은 전선의 군졸들이 굶주리므로 원 군량은 벌 써 다 나누어 주었다. 적은 물러가지 않으므로 잇달아 바다로 내 려가 출전해야 하고 군량은 달리 변통하여 마련할 길이 없어 순 천부에 두었던 군량 오백 여 섬을 본영과 첩입한 방답진에, 흥양 군량 사백 여 섬을 여도?사도?발포?녹도 등의 네 개 포구에는 백 섬 씩을 먼저 옮겨다가 뜻밖의 일에 대비토록 하고, 도순찰사 에게 공문을 보냈다. 이 내용을 장계하였다.


임진년 8월 (1592년 8월)

8월 24일 [양력 9월 29일]<신해> 맑다.
아침밥은 객사 동헌에서 정 영감(충청수사 정걸)과 같이 먹고 곧 침벽정으로 옮겼다. 우수사와 점심을 같이 먹었는 데 정 조방장 도 함께 먹었다. 오후 네 시쯤에 배를 출항하여 노질을 재촉하여 노량 뒷바다에 이르러 정박하다. 한밤 열두 시에 달빛을 타고 배를 몰아, 사천땅 모자랑포에 이르니 벌써 날이 새었다. 새벽 안개가 사방에 끼 어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8월 25일 [양력 9월 30일]<임자> 맑다.
오전 여덟 시쯤에 안개가 걷혔다. 삼천포 앞바다에 이르니 평 산포만호가 공장(수령이나 찰방이 감사?병마사?수사등에게 공 식으로 만날 때에 내는 관직명을 적은 편지)을 바쳤다. 당포 가 까이에 이르러 경상우수사(원균)와 만나 배를 매 놓고 이야기했다. 오후 네 시쯤에 당포에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 자정에 잠깐 비가 왔다.

8월 26일 [양력 10월 1일]<계축> 맑다.
견내량에 이르러 배를 멈추고서 우수사와 더불어 이야기했다. 순천부사 권준(權俊)도 왔다. 저녁에 배를 옮겨 각호사(角乎寺:거제 시 사등면) 앞바다에서 밤을 지냈다.

8월 27일 [양력 10월 2일]<갑인> 맑다.
영남수사(원균)과 같이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내도(漆乃 島)에 이르렀다.웅천현감 이종인(李宗仁)이 와서 말하는데, "왜 적의 머리 서른다섯 개를 베었다."고 한다. 어두울 무렵에 제 포(濟浦)?서원포(西院浦)를 건너니, 밤이 벌써 열 시쯤이 되어 자려는데, 하늬바람이 차겁게 부니, 나그네의 회포가 어지럽 다. 이 날 밤 꿈자리도 많이 많이 어지러웠다.

8월 28일 [양력 10월 3일]<을묘> 맑다.
새벽에 앉아 꿈을 생각해보니, 처음에는 나쁜 것 같았으나 도리어 좋은 것이었다. 가덕에 이르렀다. (** 날짜는 알수 없으나, 8월 28일 이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삼가 요즘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전일 승평에서 받들었던 것은 매우 기쁘고 다행한 것이었습니다. 줄이고. 일본은 바다 가운데 있으며, 비록 추운 겨울이 되어도 날씨 는 늘 따뜻한데, 지금까지 흉한 적들이 오랫동안 남의 땅에 머물 러 있어도 풍속에 익숙되지는 않습니다. 한 겨울이 되면, 추위로 지내기 괴로우며, 가난할 뿐 아니라, 군량은 이미 다 떨어지고, 용기와 힘도 다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틈타 급히 공격하여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일어난 왕실이 바로 이 때인데 한해가 새해로 바뀌었어도 아직 적을 없앴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 다. 한 구석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통탄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우리나라 팔도 중에 오직 이 호남만이 온전한 것은 천만 다행이며,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옮기는 것 모두 이 전라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해를 다 없애어 국권을 회복하 는 것도 이 도(전라도)의 계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라도 감사가 다시 임금에게 충성하러 부임했고, 절도사는 오 랫동안 남의 땅(경상도)에 머물면서 군사와 말을 정예하게 여거 하는데, 군기?군량은 이가운데서 다하여 돌아가고, 진과 보(鎭堡) 에 이르러 방어군사를 정하는 것 또한 각각 반으로 나누어 뽑아 거느렸습니다. 그런데 장수는 늙어 중도에서 굶주림과 추위가 아울러 들이닥쳐 반 이상은 달아나 흩어졌습니다. 비록 혹 흩어지지 않은 자가 있다손 해도, 굶주림과 추위가 이미 극에 달하여 죽음이 잇달았습니다. 큰 고을이면 300여 명, 힘차고 왕성한 사람을 조급히 가리어 채우기를 강요하며 독려하니, 한 도가 소동하였습 니다. 더구나 소모사(召募使)가 내려와서 남아있는 군사를 징발하니, 각 진포에 방군을 나누고, 여러 읍의 초병도 뽑아 그 수를 채우는 데, 한 도가 소동한 것은 알지 못하는 바, 이 도의 보전도 어려워 꼭 길에서 통곡하였습니다. 지난 9월에 유지에, 각 고을의 떠돌이 군사일지도 일족 가까이 있는 자에게는 일체의 세금을 면제하라고 하신 정녕한 서신이 있었거늘, 백성을 풀어 비상한 고난을 견줄데 없이 급하였던 것입니다. 큰 적(왜적)이 각 도에 가득차, 아무 죄없는 백성은 몇 십만 명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독한 해를 입었습니다. 종사(宗社)와 도성(都城)도 보전할 수 없었고, 말과 생 각이 이에 미치어 고통이란 불타서 갈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달 10명의 군사가 방비하는 고을에 부임하니, 한번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다음 달 방비에 들어가는 사 람이 겨우 서너 명인데, 어제는 10 명의 유방군이 오늘은 너댓 명 미만이니, 몇 달 가지 않아서 바닷가의 진(鎭)은 하나같이 텅 비어 진(鎭)의 지휘관은 홀로 빈 성을 지키게 되니, 어떻게 알지 못하 겠습니다. 만약 옛 전례를 다른다면, 임금의 분부를 어기게 되고, 옛 명령을 따르면, 적을 방어하는데, 계책이 없으니, 이 두 가지 중 편리한대로 밤낮으로 생각하여 보고했더니, 관찰사의 공문에 일족 의 대충징발하는 폐단이 백성을 심하게 병들게 합니다. 정녕 명령을 내리신다면, 이른바 명령을 이행할 틈이 없거니와, 그 보고 내용 또한 일거리가 있으니, 백성을 어루만지고, 적을 방어하는데에 둘 다 그 편리한 일을 얻는 것이라 답하여 왔습니다. 각 고을에는 죽은 자가 자손이 모두 끊어지면, 도목장(都目狀)에서 빼버리라고 공문을 내 보냈습니다. 대개 본도(전라도)는 나누어 방비할 군사가 경상도의 예와는 같지 않으며, 좌?우 수영에는 320여 명이고, 각 진포에는 혹 200 혹 150여 명씩 나누어 방비하였거늘, 그중에서 멀리 도망갔거나 죽은자가 오래 되었다. 아직 본래대로 정하지 않은 자 는 10에 7~8이며, 현재 나타나 있는 사람을 거두어 주는 것도 모두 늙고 쇠잔하여 방비업무에 알맞지 않습니다. 힘이 부득이 하면 물론 일족에게 숫자만 채우려 입방할지라도 탈이 났다고 소송하는 자가 많고, 아직 방비에 도착하지 않은 자는 혹 이름을 대어 힘을 합하는 가운데 이것 저것 엇갈리게 한다면, 끝내 점고에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 사이의 질병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폐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큰 적이 앞에 있어 방비하는 일이 무척 급하고 예나 다름없이 병에 걸려 방어하는 것은 줄이기 때 문에, 전례를 따라 재촉하고 분발하면, 하나는 배의 사부를 채우게 되고, 하나는 성을 지키기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5번 출동에 적을 맞아 14번이나 싸워 이겼던 것은 이미 8달이나 되었습니다. 대개 국방이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은 중앙에까지 곧 미치게 됩니다. 이 것은 실로 이미 체험한 것입니다. 저의 어리석은 계책은 먼저 옛 전례를 따라 변방을 방어해야 하겠습니다. 차츰 차츰 조사하여 군사와 백성들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급한 일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호남에 달려 있는 것은, 마치 제(齊)나라의(山東省 地方의) 거현( 縣)이나 즉묵현(卽墨縣)과 같이 항복하지 않다가 공격해온 연(燕)나라를 파하고 국토를 회복하였던 것)처럼 (곧 전 쟁이 끝나지 않고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것은 몸을 온전히 하는 것과 같으니, 몹쓸 병있는 자가 겨우 한쪽 다리의 구 할 수 없는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허다하게 군사와 말을 지경밖으로 쓸어내 버렸습니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汝松)이 수십만 명의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개성?서울 세 곳의 도적을 토멸했으며,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와 남김없이 소탕해 버리고 돌아왔습니다.


임진년 9월 (1592년 9월)

9월 초1일 [양력 10월 5일]<정사>
<장계에서> 닭이 울자 출항했다. 낮 여덟 시에 몰운대를 지날 무렵 샛바람이 갑자기 일고파도가 크게 일어 간신히 배를 저어 화준구미에 이르러 왜대선 다섯 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여덟 척, 서평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아홉 척, 절영도에 이르러서는 왜대선 두 척을 각각 만났는데, 모두 기스 락을 의지하여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으므로 삼도의 수사가 거느 린 여러 장수와 조방장 정걸(丁傑) 등이 힘을 합하여 남김없이 깨어 부수고, 배 안에 만재한 왜놈의 물건과 전쟁 기구도 끌어내 지 못하게 하여 모두 불태웠으나, 왜놈들은 우리의 위세를 바라 보며 산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머리를 베지는 못했다. 그리고 절영도 안팎을 모조리 수색하였으나, 적의 종적이 없으므 로 즉시 소선을 부산 앞바다로 급히 보내어 적선을 자세히 탐망 케 하였더니, "대개 오백 여 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의 언덕아래 줄지어 대었으며, 선봉 왜대선 네 척이 초량 목으로 마주 나오고 있다."고 하므로 원균(元均) 및 이억기 등과 약속하기를, "우리 군 사의 위세로써 만일 지금 공격하지 않고 군사를 돌이킨다면 반드 시 적이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고 말하고 독전기 를 휘두르며 진격했다.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鄭運)?귀선돌격장 군관 이언량(李彦良)?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중위장 순천부사 권준(權俊)?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申浩) 등이 먼저 곧바로 돌진하여 선봉 왜 대선 네 척을 깨부수니, 적도들이 헤엄쳐 뭍으로 오르므로 뒤에 있던 여러 배들은 곧 이 때를 이용하여 승리한 깃발을 올리고 북 을 치면서 "장사진"으로 돌진했다. 이 때 부산성 동쪽 한 산에서 오 리쯤 되는 언덕 밑 세 곳에 둔박한 왜선이 모두 사백일흔 여 척이었는데,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 고 있으므로 여러 전선이 곧장 그 앞으로 돌진하자, 배 안과 성 안?산위?굴 속에 있던 적들이 총통과 활을 갖고 거의 다 산으 로 올라 여섯 곳에 나누어 머물며 내려다 보면서 철환과 화살을 빗발 처럼, 우레 처럼 쏘는 것이었다. 그런데 편전을 쏘는 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과 같았으며, 혹 대철환을 쏘기도 하는데, 크기 가 모과만 하며, 혹 수마석을 쏘기도 하는데, 크기가 주발덩이 만 한 것이 우리 배에 많이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한층 더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 어 돌진하면서, 천자?지자 총통에다 장군전?피령전?장전과 편 전?철환 등을 일시에 일제히 쏘며, 하루종일 교전하니 적의 기 세는 크게 꺾이었다. 그래서 적선 백 여 척을 삼도의 여러 장수 들이 힘을 모아 쳐부순 뒤에 화살을 맞아 죽은 왜적으로써 토굴 속에 끌려 들어간 놈은 그 스를 헤아릴 수 없었으나, 배를 쳐부 수는 것이 급하여 머리를 벨 수는 없었다. 여러 전선의 용사들 을 뽑아 뭍으로 내려서 모조리 섬멸하려고 하였으나, 무릇 성 안 팎의 예닐곱 곳에 진치고 있는 왜적들이 있을 뿐 아니라 말을 타 고 용맹을 보이는 놈도 많은지라, 말도 없는 외로운 군사를 가벼 이 뭍으로 내리게 한다는 것은 빈틈없는 계획이 아니며, 날도 저 물었는데, 적의 소굴에 머물러 있다가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될 환 란이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배를 돌려 한밤중에 가덕도를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그런데, 양산과 김해에 정박한 왜선이 혹은 말하기를 "점차 본도 로 돌아간다"고 한다마는, 몇달 이내로 세력이 날로 외로워짐을 스스로 알고 모두 부산으로 모이는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부 산성 안의 관사는 모두 철거하고 흙을 쌓아서 집을 만들어 이미 소굴을 만든 것이 백 여 호 이상이나 되며, 성 밖의 동서쪽 산기 스락에 여염집이 즐비하게 있는 것도 거의 삼백 여 호이며, 이것 이 모두 왜놈들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중의 큰 집은 층계와 희게 단장한 벽이 마치 불당(절간)과도 비슷한 바, 그 소행을 따 져보면 매우 분통하다.

9월 초2일 [양력 10월 6일]<무오>
<장계에서> 다시 돌진하여 그 소굴을 불태우고, 그 배들을 모조리 깨부수려고 하였는데,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널리 가득차 있으므로 그들의 귀로를 차단한다면, 궁지에 빠진 도적들의 반격이 있을 것이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수륙으로 함께 진격해야만 섬멸할 수 있을 것이며, 더구나 풍랑이 거슬러 전선이 서로 부딪쳐서 파손된 곳이 많이 있으므로 전선을 수리하면서 군량을 넉넉히 준비하고 또 육전에서크게 물러나오는 날을 기다려 경상 감사 등과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하여야 하기 때문에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9월 초10일 [양력 10월 14일]<병인>
<장계에서> 원균(元均)은 그 뒤 적선이 많이 온다고 잘못 듣고서 포위한 적을 풀고 가버렸기 때문에 뭍으로 올라간 왜인들이 "벌목하여 뗏목을 만들어 타고 모두 거제로 건너가 버렸다"고 하 는 바, 솥 안에 든 고기가 마침내 빠져 나간 것 같아 매우 통분하다. 이 내용을 갖추어서 장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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