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누락분 추가>
9월 11일 [양력 10월 15일]<정묘>
<장계에서> 녹도만호 정운(鄭運)은 맡은 직책에 정성을 다하였고, 담략이 있어서 서로 의논할만한 사람이다. 사변이 일어난 이래 의기를 격발하여 나라를 위해서 제몸을 잊고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변방을 지키는 일에 힘쓰기를 오히려 전보다 더욱 더 하므로 믿을 사람은 오직 정운(鄭運) 등 두세 사람이다. 세번 승첩을 했을 때 언제나 선봉에 섰고, 이번에 부산포해전에서도 몸을 던져 죽음을 잊고 먼저 적의 소굴에 돌입하였으며, 하루 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힘을 다하여 쏘았던지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는바 이는 정운(鄭運)의 힘이 컸다. 그런데, 그날 돌아올 무렵에 철환을 맞아 죽었지만, 그 늠늠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쓸쓸히 아주 없어져서 뒷 세상에 아주 알려지지 못할까 애통하다. 이대원의 사당이 아직도 그 포구에 있으므로 같은 제단에 초혼하여 함께 제사를 지내어 한편으로는 의로운 혼령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남을 경계해야 겠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변방수비에 온갖 힘을 다하고,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더욱 부지런히 힘써 네번이나 적을 무찌를 적에 반드시 앞장을 서서 분격하였으며, 당항포 접전을 할 때에는 왜 장을 쏘아 목을 벤 그 공로가 월등하다. 뿐만아니라, 사살하는데만 전력하고 목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으므로 그 연유를 들어 별도로 장계하였는데, 이번 포상의 글월 중에 이순신(李純信)의 이름만 들어 있지 않으니 해괴하다.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어영담(魚泳 潭)?배흥립(裵興立)?정운(鄭運) 등은 달리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권준(權俊)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으로 승진 되었으나, 오직 이순신(李純信)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 므로 이에 조정에서 포상하는 명령을 내리기를 엎드려 기다린다. 이 내용을 사실대로 잘 아뢰어 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9월 12일 [양력 10월 16일]<무진>
<장계에서> 당항포 승첩계본을 받들고 올라간 전생서(典牲署:궁 중의 제사에 쓸 짐승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는 종6품의 主簿) 이 봉수(李鳳壽)가 가지고 내려온 우부승지(이국)의 서장 내용에, " 전쟁이 일어난 이래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패퇴하였는데, 이번 당항포 싸움에서 비로소 대승리를 하였으므로, 특히 경을 `자헌대부'로 승진시키니, 끝까지 스스로 힘써 하라" 하신 것과, "경의 장계를 보니, 각 목장의 말들을 몰아내어 길들이고 먹여서 육전에 쓰도록 해 달라고 건의하였는데, 경이 그 수를 급히 몰아내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성공을 기다려서 그대로 영구히 주도록 하라" 하신 분부의 서장 등을 본영에서 받았다.
9월 18일 [양력 10월 22일]<갑술>
<장계에서> "행재소에서 쓸 종이를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고 하였으나, 계본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고생스럽게 길로 무거운 짐 을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우선 장지(狀紙) 열 권을 올려 보냄을 써 올렸다.
9월 25일 [양력 10월 29일]<신사>
<장계에서> 순천에 사는 전 훈련원봉사 정사준(鄭思竣)은 사변이 일어난 뒤에 상제의 몸으로 기복된 사람인데, 충성심을 분발하였으므로 경상도와 접경한 요충지인 광양현 전탄의 복병장으로 정하여 보낸 뒤, 무릇 매복하여 적을 막는 일에 있어서 기특한 계책을 마련하여 적들로 하여금 감히 경계선에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정사준(鄭思峻)은 순천부의 외로운 선비이며, 전훈련봉사였던 이의남(李義男) 등과 약속하고 각각 의연곡(義捐穀)을 모아서 모두 한 배에 싣고 행재소로 향했다. 비변사의 공문에 "전죽(箭竹)을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고 하였으 나, 부산 승첩계본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육로로 올라가야 하는 먼 길에 가져 가기 어려운 형편이어서 올려보내지 못했는데, 비로소 이번에 정사준(鄭思峻) 등이 올라갈 때에 장편죽전과 종이 등의 물품을 함께 봉하여 같은 배에 함께 싣고 물건의 목록은 따로 적어 올렸다. 순천부사 권준(權俊)과 낙안군수 신호(申浩)?광양현감 어영담(魚 泳潭)?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등도 수군 위부장으로서 본영 앞 바다에 진을 치고 사변에 대비하면서 각각 공문으로 보고한 내용에 "연해변 각 고을의 관원들이 사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군량 을 원 수량 이외에 별도로 쌓아 두었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임금께서 서쪽으로 몽진하신지 벌써 여섯 달이 되어 많은 장수와 군사들의 양식을 계속 지급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신하된 자의 정의에 통곡함을 이기지 못하여 위에 별도로 쌓아 둔 군량 등 물품을 각각 배에 싣고 자원해 들어온 사람에게 맡겨 주어 올려 보낼려 했으나, 수령들로서는 진달할 길이 없으니, 이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여 함께 장계하도록 공문을 보낸다."고 하였다. 그런데, 권준(權俊)은 원 수량 이외에 군량 백 섬과 다른 잡물을 함께 정사준(鄭思峻) 등이 의연곡을 싣고 가는 배에 같이 실어 우선 올려 보내다. 신호(申浩)?어영담(魚泳潭)?배흥립(裵興立) 등이 올려 보내는 군량과 군기 등 물건은 각각 그들의 배에 싣고 각 고을에서 자원해 들어온 사람들에게 맡기어 올려 보내므로 물목을 만들어 주어 올려 보냄을 차례로 아뢰었다.
임진년 10월 (1592년 10월)
10월 30일 [양력 12월 3일]<병진>
<편지에서> 아래 의주에서 보내온 글은 꿈도 아닌 정이 아닌가. 펴 보기를 두번 세번 한 것은, 종이에 간절한 정이 가득하기에, 실상 나의 친구 위서(渭瑞)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거니와,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알지는 못하나, 요사이 노장의 건강은 어떠하오. 멀리서 호소하여 마지 않는다. 이 사람은 용졸한 재주로 난국을 당하여 오랑캐가 두 번 움직이니, 이에 이 전쟁사이에 근심 한 자 뿐인데, 다행히 별장 최균?강 두분의 힘을 입어 크게 웅천의 도적을 이기고, 또 바다에 뜬 두목을 잡았다. 어찌 마음이 크게 패한 것이 아니겠는 가. 그러나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우리 임금의 수레를 서울 에 돌아 오시게 하는 것 뿐이다. 남은 것은 군무가 어지럽고 매 우 바쁘므로 다 갖추지 못한다.
임진년 10월 (1592년 10월)
10월 30일 [양력 12월 3일]<병진>
<편지에서> 아래 의주에서 보내온 글은 꿈도 아닌 정이 아닌가. 펴 보기를 두번 세번 한 것은, 종이에 간절한 정이 가득하기에, 실상 나의 친구 위서(渭瑞)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거니와,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알지는 못하나, 요사이 노장의 건강은 어떠하오. 멀리서 호소하여 마지 않는다. 이 사람은 용졸한 재주로 난국을 당하여 오랑캐가 두 번 움직이니, 이에 이 전쟁사이에 근심 한 자 뿐인데, 다행히 별장 최균?강 두분의 힘을 입어 크게 웅천의 도적을 이기고, 또 바다에 뜬 두목을 잡았다. 어찌 마음이 크게 패한 것이 아니겠는 가. 그러나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우리 임금의 수레를 서울 에 돌아 오시게 하는 것 뿐이다. 남은 것은 군무가 어지럽고 매 우 바쁘므로 다 갖추지 못한다.
임진년 12월 (1592년 12월)
12월 초10일 [양력 1593년 1월 12일]<병신>
<장계에서> 흉한 적들이 여러 도에 널리 가득 차 있고, 오직 이 곳 호남만이 다행히 하늘의 도움에 힘입어 다소 보완하여 한 나 라의 근본을 이루고 있으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일을 다 이 도에서 마련하여야 하는데, 지난 육?칠월 사이에 육 만의 군마와 허다한 군량을 모두 서울 등지에서 잃어버리고, 병 마사가 거느렸던 사만의 군사들도 또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 어서 얼고 주려서 다 없어졌는데, 이제 순찰사가 또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며 다섯 의병장도 서로 이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출전하게 되므로 이 뒤부터는 온 지방의 소동이 공사간의 재물을 다 없애고, 비록 늙고 허약한 백성은 있다해도 병기와 군량을 운 반할 무렵에는 채찍질이 빈번하여 구덩이에 넘어지는 자가 많이 있다. 더구나 소모사가 내려와서 내륙과 연해안을 분별하지 않은 채, 소집할 군사의 수만을 결정하여 심하게 독촉하므로, 각 고을 에서는 그 수를 충당하기 어려워서 변방을 지키는 수졸을 많이 빼내어 갈 뿐 아니라, 체찰사의 종사관이 각 고을을 분담?검색 하여 남아있는 장정을 재촉하여 징발하고, 변방의 진포에 있는 군기를 또한 많이 다른 곳으로 실어가며, 복수장 고종후(高從厚) 등이 또 따라 일어나서 내시의 종을 남김없이 뽑아 내는데, 소모 관이 방금 내려와서 번갈아 수색하는 일이 거의 쉬는 날이 없으 므로 백성들의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으니, 국가가 부흥되어야 할 시기에 바라는 바, 실망이 커서 한 모퉁이 에 있는 외로운 신하로서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탄하며, 마음은 죽고 형태만 남아 있다. 지난해 분부한 서장에 "각 고을에서 도망한 군사들이 있어도 사 변이 평정될 때까지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일체 면하라"고 했다. 무릇 신하된 자로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 은 자가 없다. 그러나 이같이 위태롭고 어려운 날을 당하여 수졸 한 명은 무던 히 평시의 백 명에 적합한 것인데, 한번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서는 모두 다 면제될 꾀를 품기 때문에 지난 달에는 열 명이나 유방군을 보내던 고을이 이번 달에는 겨우 서너 명을 보내고 있으며, 어제 열 명이 있던 유방군이 오늘 너댓 명 안이 므로 몇 달 내에 수자리를 지키는 일이 날로 비어 진포의 장수들 이 속수무책일 것인 바, 배를 타고 적을 토멸함에 무엇을 힘입어 제어할 것이며, 성을 지켜 항전함에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 만일 전례를 지켜 책임 수량을 채운다면 분부를 어기게 될 것이며, 분 부를 준수한다면 수자리를 지킬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이 두가 지 중에 편한 방법을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의견을 체찰사에 게 보고하였던 바, 회답 공문에,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폐단은 백성을 괴롭히는 것 중에 가장 심한 것이므로 임금의 분부대로 단연히 준수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고한 의견도 또한 일리가 있는 것이니,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는데, 양편이 다 좋은 일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고을 관원들에게 "사람이 죽고 자손이 끊어진 호구를 도목장에서 뽑아 없애 버리도록 하 라."고 통고했다. 대체로 보아 변방에서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이 중앙에까지 미 치는 실례는 이미 경험한 일이다. 하물며, 본도에 분산된 방위군 의 수는 경상도와 같지 않고, 매번 방비에 임하는 군사가 큰 진 이 많아야 삼백스무 여 명을 넘지 못하고 작은 보에는 백쉰 여 명도 차지 못하는 데, 그 중에서 도망하거나 죽은지 오래된 채 정리되지 않은 자가 십중팔구이며, 현재 일하고 있는 자로는 태 반이 늙고 쇠약한 사람이므로 만일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전적으로 면제한다면 성을 지키고 배를 운행하는데, 아무런 조처 가 없을 것이므로 지극히 민망할 뿐 아니라, 이번에 도착된 것으 로 비변사에서 분부를 받고서 보내온 공문 내용에, " 근래에 와 서 적을 토멸하는 데는 해전을 당할만한 것이 없으니, 전선의 수 를 넉넉하게 더 만들도록 하라."고 한 바, 전선은 비변사의 공문 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본영과 여러 진포에 명령하여 많은 수를 더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 척의 전선에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서 백서른 여 명의 군사를 충당할 방법이 없어서 더욱 민망하니, 위의 '친족에게 징 발하는 일들"을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전과 같이 시행하되, 조금 씩 좋고 나쁜 점을 가려내어 백성의 원성을 풀어주는 것이 지금 으로서는 가장 당연한 급선무이다. 그러니 조정에서는 다시 헤아 려 생각하고, 우선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한 명령을 중지 하여 길이 남쪽 변방을 회복하는 기초가 온전해지도록 해야겠다. 수군으로 방비에 임하는 수가 저같이 너무 적은데, 방비 임무에 결석하여 죄를 지은 무리들이 혹은 소모군에 붙으며, 혹은 다투 어 의병으로 붙어서 어느 쪽이든지 소속되는 바, 지금 같이 봄철 의 방비가 매우 급한 때에 방어하는 군사를 다른 곳으로 소속을 옮겨서 변방을 충실하게 항 뜻은 없으므로 일체 다른 곳으로 옮 기지 말도록 각별히 널리 백성들에게 분부를 내리도록 해야겠다. 겨울 석 달 동안에 사색 제방군(四色除防軍)은 평시에는 그대로 있다가 전적으로 사변이 일어날 때 쓰이는 보충군이거니와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서는 정규군도 많지 않데다가 또 사색 군졸마 자 면제해 버리면 더욱 방비할 길이 없다. 해상으로 출전한 여가 에 전선을 보수하고 병비를 조련하는 일들이 전혀 수졸들의 책임 이므로 사색 제방군 등을 육군과 함께 방위 임무에서 면제하지 말고 남김없이 방위에 임하도록 각 진포에 아울러 검칙하였으며, 순찰사에게도 공문을 보내었음을 갖추어 아뢰었다.
11월은 기록에없음
임진년 12월 (1592년 12월)
12월 초10일 [양력 1593년 1월 12일]<병신>
<장계에서> 흉한 적들이 여러 도에 널리 가득 차 있고, 오직 이 곳 호남만이 다행히 하늘의 도움에 힘입어 다소 보완하여 한 나 라의 근본을 이루고 있으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일을 다 이 도에서 마련하여야 하는데, 지난 육?칠월 사이에 육 만의 군마와 허다한 군량을 모두 서울 등지에서 잃어버리고, 병 마사가 거느렸던 사만의 군사들도 또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 어서 얼고 주려서 다 없어졌는데, 이제 순찰사가 또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며 다섯 의병장도 서로 이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출전하게 되므로 이 뒤부터는 온 지방의 소동이 공사간의 재물을 다 없애고, 비록 늙고 허약한 백성은 있다해도 병기와 군량을 운 반할 무렵에는 채찍질이 빈번하여 구덩이에 넘어지는 자가 많이 있다. 더구나 소모사가 내려와서 내륙과 연해안을 분별하지 않은 채, 소집할 군사의 수만을 결정하여 심하게 독촉하므로, 각 고을 에서는 그 수를 충당하기 어려워서 변방을 지키는 수졸을 많이 빼내어 갈 뿐 아니라, 체찰사의 종사관이 각 고을을 분담?검색 하여 남아있는 장정을 재촉하여 징발하고, 변방의 진포에 있는 군기를 또한 많이 다른 곳으로 실어가며, 복수장 고종후(高從厚) 등이 또 따라 일어나서 내시의 종을 남김없이 뽑아 내는데, 소모 관이 방금 내려와서 번갈아 수색하는 일이 거의 쉬는 날이 없으 므로 백성들의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으니, 국가가 부흥되어야 할 시기에 바라는 바, 실망이 커서 한 모퉁이 에 있는 외로운 신하로서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탄하며, 마음은 죽고 형태만 남아 있다. 지난해 분부한 서장에 "각 고을에서 도망한 군사들이 있어도 사 변이 평정될 때까지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일체 면하라"고 했다. 무릇 신하된 자로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 은 자가 없다. 그러나 이같이 위태롭고 어려운 날을 당하여 수졸 한 명은 무던 히 평시의 백 명에 적합한 것인데, 한번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서는 모두 다 면제될 꾀를 품기 때문에 지난 달에는 열 명이나 유방군을 보내던 고을이 이번 달에는 겨우 서너 명을 보내고 있으며, 어제 열 명이 있던 유방군이 오늘 너댓 명 안이 므로 몇 달 내에 수자리를 지키는 일이 날로 비어 진포의 장수들 이 속수무책일 것인 바, 배를 타고 적을 토멸함에 무엇을 힘입어 제어할 것이며, 성을 지켜 항전함에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 만일 전례를 지켜 책임 수량을 채운다면 분부를 어기게 될 것이며, 분 부를 준수한다면 수자리를 지킬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이 두가 지 중에 편한 방법을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의견을 체찰사에 게 보고하였던 바, 회답 공문에,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폐단은 백성을 괴롭히는 것 중에 가장 심한 것이므로 임금의 분부대로 단연히 준수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고한 의견도 또한 일리가 있는 것이니,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는데, 양편이 다 좋은 일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고을 관원들에게 "사람이 죽고 자손이 끊어진 호구를 도목장에서 뽑아 없애 버리도록 하 라."고 통고했다. 대체로 보아 변방에서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이 중앙에까지 미 치는 실례는 이미 경험한 일이다. 하물며, 본도에 분산된 방위군 의 수는 경상도와 같지 않고, 매번 방비에 임하는 군사가 큰 진 이 많아야 삼백스무 여 명을 넘지 못하고 작은 보에는 백쉰 여 명도 차지 못하는 데, 그 중에서 도망하거나 죽은지 오래된 채 정리되지 않은 자가 십중팔구이며, 현재 일하고 있는 자로는 태 반이 늙고 쇠약한 사람이므로 만일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전적으로 면제한다면 성을 지키고 배를 운행하는데, 아무런 조처 가 없을 것이므로 지극히 민망할 뿐 아니라, 이번에 도착된 것으 로 비변사에서 분부를 받고서 보내온 공문 내용에, " 근래에 와 서 적을 토멸하는 데는 해전을 당할만한 것이 없으니, 전선의 수 를 넉넉하게 더 만들도록 하라."고 한 바, 전선은 비변사의 공문 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본영과 여러 진포에 명령하여 많은 수를 더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 척의 전선에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서 백서른 여 명의 군사를 충당할 방법이 없어서 더욱 민망하니, 위의 '친족에게 징 발하는 일들"을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전과 같이 시행하되, 조금 씩 좋고 나쁜 점을 가려내어 백성의 원성을 풀어주는 것이 지금 으로서는 가장 당연한 급선무이다. 그러니 조정에서는 다시 헤아 려 생각하고, 우선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한 명령을 중지 하여 길이 남쪽 변방을 회복하는 기초가 온전해지도록 해야겠다. 수군으로 방비에 임하는 수가 저같이 너무 적은데, 방비 임무에 결석하여 죄를 지은 무리들이 혹은 소모군에 붙으며, 혹은 다투 어 의병으로 붙어서 어느 쪽이든지 소속되는 바, 지금 같이 봄철 의 방비가 매우 급한 때에 방어하는 군사를 다른 곳으로 소속을 옮겨서 변방을 충실하게 항 뜻은 없으므로 일체 다른 곳으로 옮 기지 말도록 각별히 널리 백성들에게 분부를 내리도록 해야겠다. 겨울 석 달 동안에 사색 제방군(四色除防軍)은 평시에는 그대로 있다가 전적으로 사변이 일어날 때 쓰이는 보충군이거니와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서는 정규군도 많지 않데다가 또 사색 군졸마 자 면제해 버리면 더욱 방비할 길이 없다. 해상으로 출전한 여가 에 전선을 보수하고 병비를 조련하는 일들이 전혀 수졸들의 책임 이므로 사색 제방군 등을 육군과 함께 방위 임무에서 면제하지 말고 남김없이 방위에 임하도록 각 진포에 아울러 검칙하였으며, 순찰사에게도 공문을 보내었음을 갖추어 아뢰었다.
1월기록에없음
계사년 2월 (1593년 2월)
계사년 2월은 대길하다.
2월 초1일 [양력 3월 3일]<병술> 종일 비가 내렸다.
발포만호(황정록)?여도권관(김인영)?순천부사(권준)이 와서 모였다. 발포진무 최이(崔已)가 두 번이나 군법을 어기었으므로 군률로써 처벌했다.
2월 초2일 [양력 3월 4일]<정해> 늦게야 개었다.
녹도가장?사도첨사(김완)?흥양현감(배흥립) 등의 배가 왔다. 낙안군수(신호)도 왔다.
2월 초3일 [양력 3월 5일]<무자> 맑다.
여러 장수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보성군수(김득광)이 미쳐 오지 못했다. 동쪽 상방으로 나가 앉아 순천부사?낙안군수?광양현 감과 한참 동안 의논했다. 이 날 경상도에서 옮겨온 공문에 포로 되었다가 돌아온 김호걸과 나장 김수남(金水男) 등이 명부에 올린 수군 여든 여 명이 도망 가버렸다고 하며, 또 뇌물을 많이 받고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므로, 군관 이봉수(李鳳壽) ?정사립(鄭思 立) 등을 몰래 파견하여 일흔 여 명을 찾아서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누어 주고, 김호걸(金浩乞)?김수남(金水男) 등을 그날로 처형했다. 오후 여덟 시쯤부터 비바람이 세게 불어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했다.
2월 초4일 [양력 3월 6일]<기축> 늦게야 개었다.
성 동쪽이 아홉 발이나 무너졌다. 객사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오후 여셧 시쯤부터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바람조차 몹시 사납게 불어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하였다.
2월 초5일 [양력 3월 7일]<경인> 비가 억수같이 내리다가 늦게야 개었다.
경칩날이라 둑제(대장기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아침밥을 먹은 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보성군수(김득광)는 이슥한 밤에 육지를 거쳐 달려 왔다. 뜰 아래에 붙잡아 놓고 기일을 어긴 죄를 문초하며 그 대장(代將)에게 따졌다. 그랬더니 순찰사 등이 명나라 군사에게 음식을 이바지하는 차사원으로서 강진 ?해남 등지의 고을로 왔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역시 공무이므로 그 대장과 도훈도 및 아전들을 처벌했다. 저녁에 이언형이 작별을 고하였다.
2월 초6일 [양력 3월 8일]<신묘>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야 개었다.
밤 세시에 첫나발을 불고 동틀 무렵에 둘째나발과 세째나발을 불었다. 배를 풀고 돛을 올렸으나, 정오 때에 맞바람(샛바람)이 불어 저물어서야 사량에 이르러 머물렀다.
2월 7일 [양력 3월 9일]<임진> 맑다.
새벽에 떠나 곧장 견내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이미 먼저 와있었다. 그와 함께 서로 이야기했다. 기숙흠(奇叔欽)도 와서 보고, 이영남(李英男)?이여염(李汝恬)도 왔다.
2월 초8일 [양력 3월 10일]<계사> 맑다.
아침에 영남우수사가 내 배에 와서, 전라우수사의 기약 어긴 잘못을 몹시 탓하고는 지금 먼저 떠나자고 했다. 나는 애써 말려 " 좀 더 기다려 봅시다. 오늘 안으로 도착할 겁니다."고 언약을 하였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와서 모이니, 바라보는 사람마 다 기뻐 날뛰지 않는 이가 없으며 기뻐 날뛰었다. 온 것을 보니 거느리고 온 것이 마흔 척 미만이었다. 바로 그날 오후 네시쯤에 출항하여 초저녁에 온천도(칠천도)에 이르렀다. 본영에 편지를 보냈다.
2월 초9일 [양력 3월 11일]<갑오>
첫나발을 불고 둘째나발을 불고 나서 다시 날씨를 보니 비가 많이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출항하지 않았다. 종일 많은 비가 내렸다. 그대로 머물러 출항하지 않았다.
2월 초10일 [양력 3월 12일]<을미>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오전 여섯 시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 웅포에 이르니, 적선이 줄지어 정박했는데, 두 번이나 유인했으나, 진작부터 우리 수군을 겁 내어 나올 듯하다가도 돌아가 버리므로, 끝내 잡아 없애지 못하였다. 참으로 분하다. 밤 열 시쯤에 도로 영등포뒤의 소진포(장목면 송진포)에 이르러 배를 대고서 밤을 지냈다. 이에 병신일(11일) 아침에 순천탐후선이 돌아왔다. 본영에 편지를 보냈다.
2월 11일 [양력 3월 13일]<병신> 흐렸다.
군사를 쉬게 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2월 12일 [양력 3월 14일]<정유> 아침엔 흐리다가 저녁나절에는 개었다.
삼도의 군사가 일제히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웅포에 이르니, 왜적들은 어제와 같다. 나아갔다 물러갔다하며 유인했지만, 끝내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두 번이나 뒤쫓았으나, 잡아 섬멸하지 못하니, 어찌할꼬! 너무도 분하다. 이 날 저녁에 도사가 우후에게 공문을 보냈다. 그것은 명나라 장수에게 줄 군용 물품을 배정한 것이라고 했다. 저녁에 칠천도에 이르자,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2월 13일 [양력 3월 15일]<무술> 비가 창대 같이 내렸다.
오후 8시쯤에야 비가 그쳤다. 적 토벌에 관해 의논할 일로 순천부사(권준) ?광양현감(어영담) ?방답첨사를 불러 이야기하였다. 정담수(鄭聃壽)가 와서 봤다. 활장이와 화살장이 대방(大邦)?옥지(玉只) 등이 돌아갔다.
2월 14일 [양력 3월 16일]<기해> 맑다.
증조부의 제삿날이다.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왔다. 아침 밥을 먹은 뒤에 삼도의 군사들을 모아 약속할 적에 영남수사 (원균)는 병으로 모이지 않고, 전라좌우도의 장수들만이 모여 약속하는데, 다만 우후가 술에 취하여 마구 지껄이며 떠드니, 그 기막힌 꼴을 어찌 다 말하랴. 어란포만호(정담수)?남도포만호 강응표(姜應彪)도 역시 그러하다. 이렇게 큰 적을 맞아 무찌르는 일로 모이는 자리에 술이나 만취되어 이렇게까지 되니, 그 인물됨이야 더욱 말로 나타낼 수 가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저녁에 헤어져서 진 친 곳으로 왔다. 가덕첨사 전응린(田應 )이 와서 봤다.
2월 15일 [양력 3월 17일]<경자> 아침에 맑더니 저녁에 비가 내렸다.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도 잤다. 과녁을 걸고 활을 쏘다.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왔다. 사량만호?소비포권관?영등포만호 우치적(禹致績)도 같이 왔다. 이 날 순찰사(이광)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에서 또 수군을 보내니 미리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다. 또 순찰사 영의 아전이 보낸 고목에는 명나라 군사가 2월 초1일에 에 들어가 왜적들이 모두 섬멸되었다고 하였다. 해질 녁에 원균(元均)이 와서 봤다.
2월 16일 [양력 3월 18일]<신축> 맑다.
늦은 아침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소문에 영의정 정철이 사은사가 되어 북경에 간다고 했다. 그래서 노비단자를 정원명에게로 부치면서 그것을 가져다가 행차하는 일행에게 전하라고 일러 보냈다. 오후에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보고 함께 밥을 먹고서 갔다. 순천부사?방답첨사도 와서 봤다. 밤 열 시쯤에 신환(愼環) 과 김대복(金大福)이 교서 두 장과 부찰사의 공문을 가져 왔 는데 보니, 명나라 군사들이 바로 송도(松都)를 치고, 이 달 초6 일에는 마땅히 서울에 있는 왜적을 함몰시키겠다고 하였다.
2월 17일 [양력 3월 19일]<임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종일 샛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일제히 이영남(李英男)?허정은 (許廷誾) ?정담수(鄭聃壽) ?강응표(姜應彪) 등이 와서 봤다. 오후 에 우수사(이억기)에게 가서 봤다. 새로 온 진도군수 성언길(成彦 吉)을 봤다. 우수사와 함께 영남우수사(원균)의 배에 갔다가 선전관이 임금님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는 소문을 듣고, 저물어 돌아 갈 즈음에 길에서 선전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노를 바삐 저어 진으로 돌아올 때에 선전 표신(表信)을 만났으므로 배위로 맞아 들여 임금의 분부(宥旨)를 받들고 보니, "급히 적의 퇴로를 끊고 도망하는 적을 몰살하라"는 것이었다. 즉시 받았다는 답서를 써 부치고 나니, 밤이 벌써 두 시가 넘었다.
2월 18일 [양력 3월 20일]<계묘> 맑다.
이른 아침에 행군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형세는 여전하다. 사도첨사(김완)를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만호?녹도가장?좌우 별도장?좌우돌격장?광양이선?흥양대장?방답이선 등을 거느리고 송도(진해시 웅천2동)에 복병하게 하고, 모든 배들로 하여금 유인케 하니, 과연 적선 열 여 척이 뒤따라 나왔다. 경상도 복병선 다섯 척이 재빨리 나가 쫓을 때, 나머지 복병선들이 일제히 적선들을 에워싸고 여러 무기들을 쏘아대니, 왜적의 죽은 자의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어져 다시는 나와서 항거하지 않는다. 날이 저물어서 사화랑(진해시 웅천2동)으로 돌아왔다.
2월 19일 [양력 3월 21일]<갑진> 맑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배를 띄울 수가 없어 그대로 머무르고 출항하지 않았다. 남해현령에게 붓과 먹을 보냈다. 저녁에 남해현령이 와서 봤다. 고여우(高汝友)와 이효가(李孝可)도 와서 봤다. 그대로 사화랑에 있었다.
2월 20일 [양력 3월 22일]<을사> 맑다.
새벽에 출항하자 샛바람이 약간 불더니, 적과 교전할 때에는 바람이 세게 불어 배들이 서로 부딪치고 깨어질 지경이다. 거의 배를 감당할 수 조차 없다. 곧 호각을 불게 하고 초요기(지휘기)를 올려 싸움을 중지시키니, 여러 배들이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흥양의 한 척, 방답의 한 척, 순천의 한 척, 본영 의 한 척이 서로 들이 받아 깨졌다. 날이 저물기 전에 소진포로 돌아와 물을 긷고 밤을 지냈다. 이 날 사슴 떼가 동서로 달아났는데, 순천부사(권준)가 노루 한 마리를 잡아 보냈다.
2월 21일 [양력 3월 23일]<병오>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영남(李英男)?이여염(李汝恬)이 와서 봤다. 우수사 원균(元均)과 순천부사?광양현감도 와서 봤다.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자정이 되서야 그쳤다.
2월 22일 [양력 3월 24일]<정미>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적을 무찌르는 일이 급하므로 출항하여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 멎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바람이 멎는 듯하므로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삼혜와 의능 두 승장과 의병 성응지 (成應祉)를 제포(진해시 웅천2동)로 보내어 곧 상륙을 하는 체 하게 하고, 우도의 여러 장수들의 배들은 변변찮은 배들을 골라서 동쪽으로 보내어 이들도 상륙하는 체 하게 했더니, 왜적들이 당황하여 갈팡질팡하였다. 이 틈을 타서 모든 배를 몰아 일시에 무찔렀더니, 적들은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약해져서 거의 섬멸하였는데, 발포의 두 배와 가리포의 두 배가 명령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돌입하다가 그만 얕은 곳에 얹혀(좌초), 적에게 습격받은 것은 참으로 통분하여 가슴이 정말로 찢어질 것 같다. 조금 있으니, 진도의 지휘선 한 척도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하게 되지 못하게 될 즈음에 우후가 곧장 달려가 구해내었다. 경상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을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이것을 경상도 우수사에게 파 물었다. 한심스럽다. 오늘의 통분함을 어찌 다 말하랴. 모두 경상우수사 (원균)의 탓이다. 돛을 달고 소진포로 돌아와서 잤다. 아산에서 뇌와 분의 편지가 웅천 진중에 왔고, 어머니 편지도 왔다.
2월 23일 [양력 3월 25일]<무신>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봤다. 식사를 한 뒤에 원균(元均) 수사가 오고, 천부사 ?광양현감 ?가덕첨사 ?방답첨사도 왔다. 이른 아침에는 소비포권관?영등포만호?와량첨사 등이 와서 봤다.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하는 그 음흉함을 이를 길이 없다. 최천보가 양화진(고흥군 영남면 양화리)에서 와서 명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또 조도어사의 편지와 공문을 전했다.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
2월 24일 [양력 3월 26일]<기유> 맑다.
새벽에 아산?온양 편지와 집안 편지를 아울러 써서 보냈다. 아침에 출항하여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니, 비가 몹시 퍼부어 곧 장 다다를 수 없으므로 배를 돌려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비가 그치자,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영감?순천부사?가리포첨사?진 도군수 성언길(成彦吉)과, 노는 계집을 빼놓고서, 조용히 이야 기했다. 초저녁에 배 만드는 기구를 들여 보내는 일로 패자(牌字: 계급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보내는 글)와 흥양에 갈 공문을 써 보냈다. 양식에 쓸 쌀 아흔 되를 자염과 바꾸어 보냈다.
2월 25일 [양력 3월 27일]<경술> 맑다.
풍세가 불순하므로 그대로 칠천량에 머물렀다.
2월 26일 [양력 3월 28일]<신해> 바람이 세게 불었다.
종일 머물렀다.
2월 27일 [양력 3월 29일]<임자>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2월 28일 [양력 3월 30일]<계축> 맑으며 바람조차 없다.
새벽에 출항하여 가덕에 이르니, 웅천의 적들은 기가 죽어 대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우리 배가 바로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 목(禿沙伊項:부산시 강서구 명지동)으로 향하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리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달려가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수사 원균(元均)의 군관의 배와 가덕첨사의 사후선(척후선) 등 두 척이 섬에서 들락날락 하는데, 그 짓거리가 황당했다. 두 배를 잡아 매어 경상수사 원균에게 보냈던 바, 수사 (원균)가 크게 성을 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본의는 군관을 보내어 어부들의 목을 찾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초저녁에 아들 염(苒)이 왔다. 사화랑에서 잤다.
2월 29일 [양력 3월 31일]<갑인> 흐리다.
바람이 몹시 불까 염려되어 배를 칠천량으로 옮겼다.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와서 봤다. 순천부사?광양현감도 왔다. 경상 우수사(원균)가 와서 봤다.
2월 30일 [양력 4월 1일]<을묘> 종일 비가 내렸다.
봉창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계사년 3월 (1593년 3월)
3월 초1일 [양력 4월 2일]<병진> 잠간 맑다가 저녁에 비왔다.
방답첨사(이순신)가 왔다. 순천부사(권준)는 병으로 오지 못했다.
3월 초2일 [양력 4월 3일]<정사> 온 종일 비왔다.
배의 봉창 아래에 웅크리고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가슴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이응화(李應華)를 불러다가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그대로 순천의 배로 보내어 병세를 살펴 보게 했다고 한다. 이영남(李英男)?이여염이 와서 원균 영감의 비리를 들으니, 더욱더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이영남이 왜놈의 작은 칼을 두고 갔다. 그 때 이영남에게서 들었는데, 강진의 두 사람이 살아 왔는데, 고성으로 붙들려가 문초를 받고 왔다고 했다.
3월 초3일 [양력 4월 4일]<무오> 아침에 비왔다.
오늘은 답청(삼짇날 돋아나는 싹을 밟음)하는 날인데, 흉악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 있으며, 또 명나라 군사들이 서울에 들어 왔는지 아닌지 조차 듣지 못하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종일 비가 내렸다.
3월 4일 [양력 4월 5일]<기미> 맑아졌다.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영감이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원균(元均) 영감도 왔다. 순천부사가 병이 몹시 아프다고 한다. 소문에 들으니,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汝松)이 북로(함경도) 쪽으로 간 왜적들이 설한령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는 송도까지 왔다가 서관(평안도)으로 되돌아갔다는 기별이 왔다. 통분함을 이길 길 없다.
3월 5일 [양력 4월 6일]<경신> 맑다.
바람기가 매우 사납다. 순천부사(권준)가 병으로 도로 돌아간다기에 아침에 몸소 배웅하여 보냈다. 탐후선이 왔다. 내일로 적을 치자고 약속하였다.
3월 6일 [양력 4월 7일]<신유>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도들은 바쁘게 뭍으로 도망쳐 산중턱에 진을 쳤으므로, 관군(官軍)이 철환과 편전을 비 오듯 마구 쏘니, 죽는 자가 무척 많았다. 포로되었던 사천에 사는 여인 한 명을 빼앗아 왔다. 칠천량에서 잤다.
3월 7일 [양력 4월 8일]<임술> 맑다.
우수사(이억기)와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출항하여 걸망포(통영시 산양면 신전리 신전포)에 이르니, 날은 이미 새었다.
3월 8일 [양력 4월 9일]<계해> 맑다.
한산도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나니, 광양현감(어영담)?낙안군 수?방답첨사(이순신)가 왔다. 방답첨사와 광양현감은 술과 안주를 많이 준비해 오고, 우수사(이억기)도 오고, 어란만호(정담수)도 소고기로 만든 음식 몇 가지를 보내 왔다. 저녁에 비가 왔다.
3월 9일 [양력 4월 10일]<갑자> 궂은 비가 종일 내렸다.
원식(元埴)이 와서 봤다.
3월 10일 [양력 4월 11일]<을축> 맑다.
사량으로 가는 낙안 사람이 행재소(임금이 피란 가 계신 곳)에서 와서 전하는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들이 진작 송도까지 왔지만, 연일 비가 와서 길이 질므로, 행군하기가 어려워 날이 개기를 기다려서 서울로 들어 가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는 그 기쁨을 이길 길 없다. 첨사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봤다.
3월 11일 [양력 4월 12일]<병인>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원균(元均) 수사와 이억기(李億祺) 수사도 왔다. 같이 이야기 하고 술도 마셨다. 원균 수사는 몹시 취하여 동헌으로 돌아갔다. 본영의 탐후선이 왔다. 돼지 세 마리를 잡아 왔다.
3월 12일 [양력 4월 13일]<정묘> 맑다.
아침에 각 고을에 공문을 써 보냈다. 본영의 병방 이응춘(李應春) 이 공문을 마감하고 갔다. 아들 염(苒)과 나대용(羅大用)?덕민 (德敏)?김인문(金仁問)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식사한 뒤에 우수사(이억기)의 사첫방에서 바둑을 두었다. 광양현감이 술을 가져왔다. 한밤에 비가 왔다.
3월 13일 [양력 4월 14일]<무진> 비가 많이 오다가 늦은 아침에야 개었다.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첨사 이홍명(李弘明)이 바둑을 두었다.
3월 14일 [양력 4월 15일]<기사> 맑다.
각 배를 출항시켜 배 만들 재목을 싣고 나서 왔다.
3월 15일 [양력 4월 16일]<경오> 맑다.
우수사가 이곳에 왔다. 여러 장수들이 관덕정에서 활을 쏘는데, 우리 편의 장수들이 이긴 것이 66푼이다. 그래서 우수사가 떡과 술을 장만하여 왔다. 저물 무렵부터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퍼부었다.
3월 16일 [양력 4월 17일]<신미> 저녁나절에야 맑다.
여러 장수들이 또 활을 쏘았다. 우리 편 여러 장수들이 서른 푼 남짓이 이겼다. 원균(元均) 영감도 왔다. 많이 취하여서 돌아갔다. 낙안은 아침에 왔기에 고부로 가는 편지를 주어 보냈다.
3월 17일 [양력 4월 18일]<임신> 맑으며 종일 센 바람이 불엇다.
우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모양이 형편 없으니 우습다. 신경황(申景潢)이 와서 전하기를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선전관(채진 ?안세걸)이 본영에 왔다고 했다. 곧 도로 돌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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