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난중일기 - 1- 3 [누락분 추가]

영지니 2008. 4. 13. 19:08

 

1- 3 [누락분 추가]


3월 18일 [양력 4월 19일]<계유> 맑다.
바람이 세게 불어 사람이 출입조차 하지 못했다. 소비포권관과 아침밥을 먹었다. 우수사와 같이 장기를 두었는데 이겼다. 남해현령 기효근(奇孝謹)도 왔다. 저녁에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왔다. 밤 열시에 비가 왔다.

3월 19일 [양력 4월 20일]<갑술> 비가 내렸다.
우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3월 20일 [양력 4월 21일]<을해> 맑다.
우수사와 같이 이야기했다. 오후에 소문을 들으니, 선전관이 임금의 분부(有旨)를 가지고 온다고 한다.
3월 21일 [양력 4월 22일]<병자> 맑다.

3월 22일 [양력 4월 23일]<정축> 맑다.
(** 날짜는 알 수 없지만, 계사년 3월 22일 이후 별도의 장부터 적혀 있다.) 예하에 내릴 공문. 이제 섬오랑캐의 변고(變故)는 오랜 옛적부터 아직 들은 바 없고, 역사에도 전해진 것이 없습니다. 영남의 바다와 여러 성은 그 위세를 보기만 하고서도 달아나 무너졌으며, 각 진(鎭)의 크고 작은 장수들은 한결같이 움츠리고 물러서 산골에 쥐죽은 듯이 숨어 버렸습니다.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가 버리어 연이어 삼경(三京)을 함락하였습니다. 종사(宗社) 약속하는 일. 오랜 옛적부터 아직 들은 바 없는 흉변이 우리 동방예의의 나라에 차례로 미치었습니다. 가까운 경계구역까지 오면 다하여 도와 주었다. 영남 바다의 여러 성에는 왜적의 위세를 바라보고는 달아나 무너지니, 석권할 힘을 주게 되었습니다. 임금의 수레는 서쪽으로 옮겨 가고, 백성은 고기밥이 되고, 연이어 삼경이 함락되니, 종사는 버려지고 오직 나는 삼도수군은 있는 힘과 의리를 다 내고 죽음을 바치려 하지 않은 이 없을지라도, 기회가 마땅치 않고, 아직 뜻을 펴지 못하여 지금은 다행히 명나라 조정이 천하 대장군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파견하여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왜적을 멀리 쫓아내어 삼도(三都)를 회복하였다고 하는 바, 신하된 자는 기뻐 날뛰고 너무 기뻐서 말할 바를 모르고, 또 죽을 곳도 알지 못했습니다. 위에서는 연이어 선전관을 파견하여 죽여라고 임금이 명령했으니, 숨은 도적들을 한 척도 돌려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정녕 하교(下敎)하신지 5일이 되었다고 하거늘 정정 당당하게 충성을 다하고 몸을 잊어서라도 어제 적을 만나 지휘할 때 교묘히 피하여 머무는 사람이 많이 있어 너무도 통분하였습니다. 곧 마땅히 규율에 따라 전에도 많이 있었지만, 또 삼군에 내린 명령이 있을 뿐 아니라, 다시 효력이 있도록 지시하고, 또 군사의 일이라 한들 그 죄를 용서해 주고 적발하지 않거든 속사정을 들어 낱낱이 시키는대로 받들어 행하였습니다. 9월 초1일 밤 2시에 출항하여 몰운대에 이르니, 경상우수사가 먼저 그가 거느린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와, 다대포 앞바다로 돌아가 대었습니다.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더불어 서로 약속하고서 절영도 남쪽 바다에 이르러 부산을 바라보니, 좌우 산기스락에 적선이 무수하게 줄지어 대어 있을 뿐 아니라 좌우의 산중턱과 성안에 초가를 지어 흙을 쌓고 담 쌓는 것이 가득 하거늘 저는 울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선봉이 되어 본도(전라도)로 달려 들어 왔더니, 우수사는 본도 우수사와 경상우수사와 더불어 말하기를, '신의 뒤를 이어서 서로 어긋남없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천자?지자 각 총통을 연방 쏘아대어 왜적선 50여 척을 깨뜨렸는데, 날이 또 막 어두워졌습니 다. 더위가 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전에 아팠던 학질과 이질이 이제는 어떠하십니까. 낮이나 밤이나 사모하 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가뭄이 더욱 심하고, 강 여울은 극히 얕아져서 적을 도우고 힘을 더해주니, 신령과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이렇게 극에 이르렀습니다. 의분을 품어도 할 말이 없고, 화가 나 쓸개가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전에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적탄을 맞은 자리의 아픔을 곧 알려 드리지 못한 것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지난번에 군사를 돌린 뒤로 사정은 더욱 무너져 다시 징발하는 것인데도 민심은 이미 무너져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더위가 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전에 아팠던 학질과 이질은 이제는 어떠하십니까. 걱정되어 우려하고 염려하지만 아픔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밤낮으로 그리운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일찍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적탄을 맞은 자리의 아픔을 곧 알려 드리지 못한 것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이제 이 지방의 민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돌린 뒤로 사정은 더욱 무너져 다시 징발하는 명령을 내린다 해도 달아날 꾀만 생각하니, 혹 의병을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적을 물리치는 일. 이전에 선전관 조명(趙銘)이 가지고 온 임금의 분부와 편지를 받고, 저는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경상우수사 원균 (元均)이 거느린 전선 3척과 더불어 옥포 등지로 거느리고 가서 적선 40여 척을 분멸한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지난 5월 27일에 도착 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공문에, 적도들이 수륙으로 침범하여 우도의 여러 읍에는 적들이 그득하고, 곤양?사천도 함몰하여 패하였다고 하거늘, 저는 소속 수군 장수들을 한편으로는 불러 모으고, 한편으로는 본도 우수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우도는 수로가 멀고 바람의 순역(順逆)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넉넉잡아 6월 초3일 까지 신이 있는 본영(여수)앞바다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기일 안에 적과 싸우도록 하였는데, 이미 다시□□하면 기다렸다가 본도 (전라)우수사가 기한대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사세가 느리고 더디어질까봐 5월 29일 새벽머리에 저는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곤양 ?남해 땅 노량에 이르렀는데,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신의 수군을 바라보고는 전선 3척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元 均)은 패군한 뒤로 군사없는 장수이니, 별로 지휘할 것이 없거니와, 그날 정오 쯤에 적선 1척이 곤양땅 중간의 태포(太浦)에서 작난치며 천가호(千家戶)를 분탕하는 것을 찾아 내려다가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 달아나려 하는데 여러 배가 일시에 몰아냈습니다. 일찍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적탄을 맞은 자리의 아픔 때문에 곧 알려 드리지 못한 것은 평생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요즘 이 지방의 민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돌린 뒤로 군의 사정은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원망스러워 군사를 징발하는 명령을 내린다 해도 모두 달아날 꾀만 생각하니, 이와 같으니 어떻게 지휘해야 할지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에도 불구하고, 한번 휴가를 얻는다면 민심은 반드시 이렇게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정예한 수군을 얻고 잡색군중에 자원하는 사람을 모아 이들로 하여금 힘을 길러도 휴가를 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8월 초에 거느리고서 이 지방에서 나아가도록 지휘를 이어받아 죽음으로써 결전하니, 군량과 군기가 거의 경상도에서 다 썼으니, 다시 나가 싸우고 또 옮길 걱정만 난감합니다. 이 도로 하 여금 미리 헤아려 보수를 주니 우러러 봅니다. 이 도로 하여금 전쟁에 임하여서 부끄러움을 녹이려 합니다. 이와같이 마음이 급급하여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힘을 다하려 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인정이 이러하니 어찌하랴! 그러나 대장의 명령이라 오히려 신중하여 감히 가벼이 할 수 없고, 일이 비록 다하고서 급속하면, 인정과 마음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처지입니다. 문안 편지를 받았습니다만, 잘 계신다고 하니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고기부레를 내리주십시오. 변고가 일어난 뒤로 여러 고을에 정하여 일체 바치지 않으니, 단지 장수가 마음속으로 10장을 올려 보내라고 했으니 부끄럽습니다.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아팠던 학질이 이제는 어떠하 십니까. 두번이나 편지를 받았습니다만, 적탄을 맞은 자리가 아물지 않아서 곧 알려 드리지 못하여 답장을 보내지 못했으니,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민심이 무너져 흩어진 것이 이 때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아팠던 학질과 이질은 어떠하 십니까. 가뭄과 더위가 이렇게 심합니다. 강 여울은 극히 얕아져서 적을 도와주어 그 독한 성미를 부려 적이 이동하여 침범하니, 만약 촛불 옮겨 붙듯 빨리 침범하니 하느님의 신령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이렇게 극에 이르렀으니, 의분을 품어도 할 말 이 없고, 화가 나 쓸개가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전에 두번이나 안부 편지를 받아 곧 뵈오려 하였으나 적의 탄환을 맞은 자리가 아직도 낫지 않고, 마음이 억세어 그저 분주하다보니, 흔데가 너무 헐어서 이렇게 되버렸으니, 죄스러울 뿐입니다. 또 민심은 이미 무너져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으니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비록 혹 응징하려는 사람이 있다손해도 혼자서는 싸울 수 없습니 다. 분함도 부끄러움도 참을 수 없고, 얻거나 잃음도, 이루거나 실패함도 서로 이 같이 멀기만 한데 가히 경계할 수 없구나. 다시 군사를 일으켜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함이 이제는 너무도 바쁘기만 한데 오히여 더 신중해야 하며 감히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 싸울 수 없도다. 형세를 살펴보니 근심하고 괴로우며 원망스러움이 독하기만 하다. 가뭄과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 까. 전에 아팠던 이질은 이제 어떠하십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 지 없습니다. 제가 엎드려 안부를 묻고 싶었습니다만, 지난번 접전 할 적에 분투하였어도 조심하지 않고 먼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나갔다가 적의 탄환을 맞은 자리가 심하였고 비록 죽을만큼 다치 지는 않았으나, 어깨뼈까지 깊이 다쳐 궂은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으며, 또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 무척 민망스럽습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일이 생각뿐이고 몸은 이렇게 병이 들어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탄식하면서 오직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군사를 움 직이는 시기는 언제인지 정해졌습니까. 요즘 이 지방의 민심을 보니, 한번 연해 지방에 징병한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여도 모두 달아 날 꾀만 품고 있으며, 혹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물길을 따라 가서 적을 토벌하고 자리를 옮겨 가며 싸우러 깊이 들어간다면 되돌아 올 수 없다고 하고, 또 경상도에 인접한 땅에서 남김없이 징발한 다면 이 도는 왜적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방어하는 사람도 없고, 부모처자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합니다. 민심이 이러하니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순천부사가 죄인을 잡아올 사람 을 보내어 힘을 다하여 잡아 왔으나 와야 할 사람은 매우 드물 다고 하니,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각 포구의 보고의 내용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한을 넉넉히 잡아 의리 때 문에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이를 잡아 왔습니다. 아랫쪽 삼도(경상 ?전라?충청)에는 겨우 온전한 것은 이 도가 대충 그렇고, 만약 이 도를 잃는다면 회복할 길이 없어집니다. 낮이나 밤이나 울다 지쳐 목이 메입니다. 더욱 더 이도가 잃게 되어 잘못 하지 않게 하도록 회복할 꾀를 오래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종사(宗社)를 도로 찾는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이백(李白) 두 장수의 (충성된) 죽음은 모두 스스로 저지른 것입니다. 요행히 만일에 사실이 아니라해도 병가(兵家)에서는 오랜 계산에서 나온 것입 니다. 지난번 임금의 분부에 따라 이 도의 공문에 지금 의병을 많이 모아 올려 보낸다는 말을 들으니, 저는 앞으로 해야할 일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비록 아직 스스로 적을 죽일 능력이 없어 지시한대로 거느리기만 하면 가히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 나 싸움말(戰馬)이 한 필도 없고 군관들도 한 필의 말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까요. 전쟁 도구를 다스리지 않으니 싸울 수가 없습니다. 병기는 일찌기 경상도 싸움에서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에 나머지는 매우 엉성하여 이제 곧 조치하여 준비하기만 하면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약이 매우 어려우니 민망합니다. 지난번 임금의 분부에 따라 이 도의 공문에, 좌우의 병세로 하여금 적이 돌아갈 길을 끊어 막는다면 적을 멸하는데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래서 일찍 경상수사 본도(전라)우수사와 소속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이미 기일을 정한대로 이 명령을 내리면 어떻겠습니까. 처 음에는 15일로 잡았으며, 이제는 이 도로 하여금 약속을 가지고 오라고 하시니 물려서 27일로 정하였습니다. 대개 물길을 따라 가니 이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요, 다만 짐배를 정하여 군량을 수송하는 것이 매우 합리적일 것 같으니 짐작하여 처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살피지 못했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두번이나 글을 받고 진작 뵈옵고 또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을 건의코자 했습니다만, 접전할 적에 조심하지 않아 적탄을 맞았으나 죽음에 이를 만큼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연일 갑옷을 입고 있는데다 다친 구멍이 넓게 헐어 궂은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밤낮을 잊고서 혹 뽕나무 잿물로 혹 바닷물로 씻어 보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으니 민망합니다. 군사를 출발하는 날이 정해진 것이 언제입니까. 소속 변방의 장수 중에서 녹도만호?방답첨사가 있고, 수령 중에서는 흥양현감?순천부사?낙안군수가 있으나 비단 이 지방의 사람들이 모두 무너져 흩어지려는 마음을 품고 있고, 우도의 각 고을과 포구도 혹 스스로 무너질 곳이 있으니, 아직 적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나아진 것이 이와 같습 니다. 가뭄과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 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아팠던 이질은 이제 어떠하십니까. 밤낮으로 못내 걱정합니다만 제 생각이 아무 소용이 없겠습니다만, 나아가 알현하고자 했으나, 몸을 돌보지 않고 먼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분투하다가 적의 탄환을 맞아 매우 무겁게 되었고, 비록 죽을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의 큰 뼈까지 깊이 다쳐 구멍 궂은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뽕나무 잿물로 연일 씻으며,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습니다. 장마가 걷히자 가뭄이 들고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우러러 사모합니다. 전에 아팠던 이 질은 이제 어떠하십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제 생각이 아무 소용이 없겠습니다만, 두번이나 주신 글을 받았음에도 곧 나아가려했으나, 접전할 적에 몸을 돌보지 않고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분투하다가 적의 탄환을 맞아 매우 무겁게 되었고, 비록 죽을만큼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연일 갑옷을 입고 서로 싸우고 있으니, 구멍이 헐어서 궂은물이 줄줄 흘러 나와,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연일 씻어도 아직 별로 차도가 없으며 치료하러 다니고 있으나 아직 아픈 고비를 넘 기지 못하고 있어 민망합니다. 군사를 출발시킬 날이 언제로 정해 졌습니까. 단지 이 지방의 민심이 무너져 흩어졌으며 징병한다는 소식만 듣고도 바삐 달아나 피하려고만 한다니 통분함을 이길 길 없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어깨뼈을 깊이 다쳐 아직도 활시위 를 당길 수 없어 버린 몸이 되었습니다. 팔을 쓸 수가 없고 또 활시위를 당길 수 없고 민망스럽습니다.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 에는 생각만 바쁘며, 몸의 병이 예까지 이르렀으니, 북쪽을 바라 보며 길이 탄식할 따름입니다. 군사를 움직이는 시기는 언제인지 정해졌습니까. 요즘 이 지방의 민심을 보니, 한번 징병한다는 소식 을 듣기만 하여도 모두 달아날 꾀만 품고 있으며, 연해의 사람 들도 거의 이미 무너져 흩어졌고 또 하는 말이 물길을 따라 가서 평안도 지방으로 옮겨 간다면 되돌아 올 수 없다고 하고, 바닷 가 땅에서는 방어할 사람도 없고, 앞으로는 적의 소굴이 될 것이며, 부모처자 다시 서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민심이 헤어 짐이 이 지경까지 되었으니,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왜적을 분멸하고 곧 바로 사천선창에 이르렀더니 왜적들이 무려 350여 명이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있고, 산아래에 줄지은 배들은 대선 7척?중선 5척 (계 12척)이 깃발들을 많이 꽂아 두고서 날뛰 고 있거늘, 거북함으로 하여금 돌진케 하고, 천자?지자 총통을 연 이어 쏘아대며 여러 배들이 한꺼번에 진격하여 화살을 쏘고 탄환을 쏘는 것이 바람과 비처럼 어지러우니, 왜적들은 물러가 숨어버 리고, 화살을 맞아 물에 빠지는 자와, 혹 끌어 안고 산으로 올라가 는 자가 셀 수 없이 많았고, 왜놈의 머리도 많이 베고 또 왜장의 머리를 베었으며, 배는 남김없이 다 분멸하였습니다. 이튿날 6월 초1일 고성땅 모사랑포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습니다. 6월 초2일 이른새벽에 출항하여 경쾌선으로 하여금 왜적이 머물러 있는 곳 을 찾아내게 하였더니, 그 회신 보고에, 당포에 왜대선 12척, 소선 20척(계 32척)이 머물러 대어 있는데, 천천히 육지에 내려 당포 고 을의 집들을 분탕하고 있었습니다. 더러는 배 위에 있다고 보고하므로, 다시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한꺼번에 따라가서 소선 2척을 유인하였는데, 층루가 있는 대선과 여러 배들은 노를 저어 따라 나오는지라, 소리지르며 나발을 불게 하여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둘러 쌌습니다. 먼저 거북배로 하여금 곧장 쳐들어가 연이어 천자?지자 총통을 쏘아 그 층루가 있는 대선을 깨뜨렸습니다. 왜적들은 스스로 그 힘으로는 우리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도로 당포선창으로 들어가 육지로 내려가는데, 철환과 화살을 쏘는 것이 바람과 비 처럼 나가니, 거의 다 맞아 다치거나 죽은 자도 많 았으며, 먼저 왜장과 그를 따르는 왜놈의 목 7급을 베었으며, 나 머지 배들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또 망보는 군사가 보고하기를, 왜 대선 20척 소선 10척(계30척)이 접때와 같다고 하거늘, 재촉하여 바다 가운데로 나가 찾아서 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습니다. 왜적 들은 우리 수군을 바라 보고서는 물러나 숨으려고 견내량으로 향 하였습니다. 날도 벌써 저물어서 그대로 머물러 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초3일에는 우리 수군을 정비하여 협공하고 찾아서 토별하려다가 전혀 흔적이 없었으므로, 먼저 작은 경쾌선으로 하여금 적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찾으려고 그대로 머물게 하여 우수사를 기다렸습니다. 초4일 정오쯤에 우수사가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대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견내량에서 약속하고 착포(鑿梁)에서 밤을 지내고서 출항하였습니다. 고성 20리쯤 못미쳐서 섬 하나가 있는데, 한 사람이 나를 불러 말하기를, 왜적선 대중소 아울러 30여 척 이 지금 고성땅 당항포에 들어와서 분주히 드나들고 있다고 하거늘, 그 당항포로(이 뒤에는 글이 없다.)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이토록 우러러 생각하여도 제 정성이야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일찍 건강이 편치 않으시단 말을 듣고도 먼 바다를 지키고 있어 아직도 안부를 살피기 어려워 민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곳의 적의 형세는 요즘 다른 흔적은 없고, 날마다 정탐해보니, 굶주린 빛이 많이 있어, 그 뜻이 반드시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는 모양인데, 감추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방비는 곳곳이 허술하고 도무지 방어하며 지키는 꼴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왜놈들 중에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수군인데 수군으로써 싸움에 나서는 자가 아무도 없고,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어도 얼추 감독할 뜻을 가지지 않으며, 군량조차 의뢰할 길이 없어, 온갖 생각을 해봐도 조처할 도리가 없으니, 수군의 일은 어쩔 수 없이 파하게 되겠습니다. 저같은 한 몸이야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겠지만, 나라 일을 어찌 하오리까. 전라도에 새로온 관찰사와 원수(元帥)조차 바닷가 수군의 양식을 군관을 보내어 곳간째 털어서 싣고 가니, 저는 다른 도의 먼 바다에 나와 있으니, 어떻게 조치할 길이 없어서 사세가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어찌 하오리까. 만약 특별히 수군에 어사(御史)를 보내어 수군에 관한 일을 통털어 검사하게 한 다면 바로잡을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계를 올렸으나, 아직 조정의 처분을 알 수가 없습니다. 종사관 정경달이 둔전을 감독 하는 일에 무척 애썼는데, 전 관찰사의 공문에는, 관찰사 이외에는 둔전을 계속 경작할 수 없고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하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정경달도 함양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그 감독하던 일도 앞으론 허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민망합니다. 추수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대로 눌러 둘 수는 없겠습니까.

4월기록에없음


계사년 5월 (1953년 5월)

5월 초1일 [양력 5월 30일]<갑인>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하였다.

5월 초2일 [양력 5월 31일]<을묘> 맑다.
선전관 이춘영(李春榮)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가지고 왔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이 날 보성군수 (김득광)?발포만호(황정록) 두 장수가 와서 모이고, 나머지 여러 장수들은 정한 기일을 물렸기 때문에 모이지 못하였다.

5월 초3일 [양력 6월 1일]<병진>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왔는데, 수군들이 많이 뒤떨어져 한탄스럽다. 선전관 이춘영이 돌아가고, 이순일(李純一)도 왔다.

5월 초4일 [양력 6월 2일]<정사> 맑다.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날이건만 이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우수사 및 군관들과 함께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부사도 모여서 약속 하였다.

5월 초5일 [양력 6월 3일]<무오> 맑다.
선전관 이순일(李純一)이 영남에서 돌아왔다. 아침밥을 대접하였다. 명나라에서 내게 은청금자광록대부(명나라의 직품)를 주었다고 한다. 아마 잘못 들은 것이리라. 저녁나절에 우수사?순천? 광양?낙안의 영감들과 함께 같이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또 군관들을 편을 갈라 활을 쏘게 하였다.

5월 초6일 [양력 6월 4일]<기미> (흐린 뒤에 비가 내렸다.)
아침에 친척 신정(愼定)과 조카 봉이 게바우개(蟹浦)에서 왔다. 저녁나절에 퍼붓 듯 내리는 비가 온 종일 그치지 않았다. 내와 개울물이 넘쳐 흘러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니 참으로 다행이다. 저녁 내내 친척 신씨와 같이 이야기했다.

5월 초7일 [양력 6월 5일]<경신>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진해루로 옮겨 앉아 공무를 돈 뒤에 배를 타고 떠나려는데, 발포의 도망간 수군을 처형 했다. 순천의 이방(吏房)에게는 입대에 관한 일을 태만히 한 죄를 처형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미조항에 이르자, 샛바람이 세게 불어 파도가 산같아 간신히 이르러 대고 잤다.

5월 초8일 [양력 6월 6일]<신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출항하여 사량 바다가운데에 이르니, 만호(이여염)가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남해군 창선도) 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쳐 배를 타지 못했다고 했다.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보고, 수사(원균)의 망녕된 짓이 많음을 자세히 말했다. 잤다.

5월 초9일 [양력 6월 7일]<임술> 흐리다.
아침에 출항하여 걸망포(巨乙望浦)에 이르니, 바람이 불순했다. 수사(이억기)? 가리포첨사(구사직)과 한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하며 의논했다. 저녁에 수사 원균(元均)이 배 두 척을 거느리고 왔다.

5월 초10일 [양력 6월 8일]<계해>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러 저녁나절에 작은 마루위로 올라가 앉았다. 흥양(고흥)의 군사를 점검했다. 기약한 날짜를 어긴 여러 장수들의 죄를 처벌하였다. 우수사? 가리포첨사도 모이어 같이 이야기했다. 조금 뒤에 선전관 고세충(高世忠)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받들고 와서 전하였는데 보니, "부산으로 후퇴하여 돌아가는 왜적을 무찌르라."는 것이었다. 부찰사의 군관 민종의(閔宗義)가 공문을 가지고 왔다. 저녁에 영남우후 이의득 (李義得)?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져 돌아갔다. 봉사 윤제현(尹齊賢)이 본영에 이르렀다는 편지가 왔다. 곧 답장을 보냈다. 그것은 본영에서 좀 기다리라는 내용이다. 거제도 견내량 진중에는 전라우대장(全羅左右大將)?경상중위장 (慶中衛將) 김승룡(金勝龍)?경상우대장 전위장(慶尙右大將 前衛 將) 기효근(奇孝謹)?좌중위장(左中衛將) 권준(權俊)?우중위장(右 中衛將) 구사직(具思稷)?좌좌부장(左左部) 신호(申浩)?전부장(前 部) 이순신(李純信)?중부장(中部) 어영담(魚泳潭)?척후장(斥候) 김완(金浣)?김인영(金仁英)?유군장(遊軍將) 황정록(黃廷祿)?우 부장(右部) 김득광(金得光)?후부장(後部) 가안책(賈安策)?대장 (代) 송여종(宋汝悰)?참퇴장(斬退) 이응화(李應華)

5월 11일 [양력 6월 9일]<갑자> 맑다.
선전관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의 진중으로 갔더니, 이홍명(李弘明)과 가리포첨사도 와었다. 바둑을 두기도 했다. 순천부 사가 또 오고, 광양현감이 이어서 왔다. 가리포첨사가 술과 고기를 내었다. 조금 있다가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로 적정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기를, "가덕도 앞바다에 적선이 무려 이백 여 척이나 머물면서 드나들며 웅천에는 전일과 같다."고 했다. 선전관이 돌아갈 때임금의 분부를 집행하는데 관해서 도원수?체찰사에게 삼도의 공문을 한 서류로 만들어, 그걸 가지고 가는 사람도 함께 떠나 보냈다. 이 날 남해현감도 와서 봤다.

5월 12일 [양력 6월 10일]<을축> 맑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그 편에 순찰사의 공문과 시랑 송응창 (宋應昌)이 패문을 가지고 왔다. 사복시(司僕寺)의 말 다섯 필을 중국에 보낼려고 올려 보내라는 공문도 왔다. 그래서 병방 진무를 띄워 보냈다. 저녁나절에 영남에서 온 선전관 성문개(成文 漑)가 와서 봤다. 피란 중에 계신 임금의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통곡 통곡함을 가누지 못했다. 새로 만든 정철총통(正鐵銃 筒)을 비변사로 보내면서 흑각궁?과녁?화살을 넉넉하게 보냈다. 앞의 성이라는 사람(성문개)은 순변사 이일(李鎰)의 사위이라고 한 때문이다. 저녁에 이영남(李英男)?윤동구(尹東?)가 와서 봤다. 고성현령 조응도(趙應道)도 와서 봤다. 이 날 새벽에 좌?우도 체탐인을 정하여 영등포 등지로 보냈다.

5월 13일 [양력 6월 11일]<병인> 맑다.
식사를 하고나서 작은 산봉우리에 과녁을 쳐 메달아 놓고, 순천부사? 광양현감? 방답첨사? 사도첨사 및 우후?발포만호가 편을 갈라 활을 쏘아 자웅을 겨루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밤에 소문에 영남우수사에게 선전관 도언량(都彦良)이 와 있다고 한다. 이 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니 온갗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자려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닭이 울때에야 풋잠이 들었다.

5월 14일 [양력 6월 12일]<정묘> 맑다.
선전관 박진종(朴振宗)이 왔다. 같은 시각에 선전관 영산령(寧 山令) 예윤(禮胤)이 또 임금의 분부(宥旨)를 받들고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나는 우수사(이억기)의 배에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 배 돌리자, 영남우수사 원균(元均)이 나타나서 술을 함부로 마시고 못할 말이 없으니, 배안의 모든 장병들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럴 듯이 속이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영산 영감이 취하여 엎어져 인사불성이 되었으니 우습다. 이 날 저녁에 두 선전관이 돌아갔다.

5월 15일 [양력 6월 13일]<무진> 맑다.
아침에 낙안군수(신호)가 와서 봤다. 조금 뒤에 윤동구(尹東?) 가 그의 대장이 장계한 초본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그럴 듯 이 속이는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와서 봤다. 늦은 아침에 조카 해와 아들 울(蔚)이 봉사 윤제현(尹濟 賢)과 함께 왔다. 마침 정오에 활쏘는 곳에 이르러 순천?광양?사도?방답 등과 자웅을 겨루는데, 나도 쏘았다. 저녁에 배로 돌아와 봉사 윤제현(尹濟賢)과 자세히 이야기했다.

5월 16일 [양력 6월 14일]<기사> 맑다.
아침에 적량만호 고여우(高汝友)?감목관 이효가(李孝可)?이응화(李應華) ?강응표(姜應彪) 등이 와서 봤다. 각 고을에 공문과 솟장(所志)을 써 보냈다. 조카 해와 아들 회가 돌아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신음하다가,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무르는 것은 무슨 교묘한 술책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나라를 위해 걱정이 많은 중에 일일이 이러하니, 더욱 더 한심스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점심을 먹을 때 윤동구(尹 東?)에게서 서울 관동(館洞: 서울)의 숙모가 양주의 천천(楊州 泉川: 양주군 회천읍 회천)으로 피난갔다가 거기에서 작고하셨다 는 말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부터 세상사가 이토록 가혹한가! 장사 지내는 일은 누가 맡아서 지내는지! 대진 (大進)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애통하다.

5월 17일 [양력 6월 15일]<경오> 맑다.
새벽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순천부사?광양현감?보성 군수?발포만호 및 이응화(李應華)가 와서 봤다. 변존서(卞存 緖)가 병으로 돌아갔다. 영남수사(원균)가 군관을 보내어 진양의 보고서를 가지고 왔다. 보았더니,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지금 충주에 있다 하고,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으져 분탕질하며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한다. 통분하고도 통분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부니, 마음이 어지럽다. 고성현령이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또 추로수(秋露水: 약술이름)와 소고기 요리한 꼬치와 꿀통을 가져 왔다고 한다. 복중(服中)이라 받자니 미안하고, 그렇다해서 정으로 보낸 것을 의리상 돌려 보낼 수도 없으므로 군관들에게 주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5월 18일 [양력 6월 16일]<신미> 맑다.
이른 아침에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위장약) 네 알을 먹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우수사와 가리포첨사가 와서 봤다.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니 좀 편안해진다. 종 목년(木年)이 게바우개(蟹浦: 아산시 염치읍 해암리 해포)에서 왔는데, 어머니 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곧 답장을 써 돌려 보내며 미역 다섯 동을 함께 보냈다. 이 날 접반사에게 적세에 관한 공문을 삼도에 한 서류로 만들어 보냈다. 전주부윤(권율)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금 겸순찰사 절제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면서 도장은 찍지 않았 으니, 까닭을 모르겠다. 방답첨사가 와서 봤다. 대금산과 영등포 등지의 척후병이 돌어와 보고하기를, 왜적들이 나타나기는 하 지만 그리 큰 음흉한 꾀는 없다고 했다. 새로 협선 두 척을 만드는데 못이 없다고 한다.

5월 19일 [양력 6월 17일]<임신> 맑다.
아침밥을 봉사 윤제현(尹濟賢)과 같이 먹는데, 여러 장수들이 몹시 권하고, 몸이 불편해도 억지로 입맛을 내게 하니 더욱 더 비통하다. 순찰사의 공문에는 명나라 장수(劉員外)의 패문에 의하여 부 산바다 어귀는 벌써 끊어 막았다고 한다. 곧 공문을 받았다는 확 인서를 써 보내고 또 공무에 관한 보고를 써서 보성 사람이 지니고 가게 했다. 순천부사가 소고기 등 일곱 가지를 보내 왔다. 방 답첨사 및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봤다. 기숙흠(奇叔欽)도 와서 봤다.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다른 변고는 없다고 했다.

5월 20일 [양력 6월 18일]<계유> 맑다.
새벽에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데 역시 영등포의 척후병과 같았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가 오고 소비포권관도 왔다. 오후에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여 말하기를, 왜선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본영군관 등에게 왜놈의 물건을 실어올 일에 관한 편지를 썼다. 흥양 사람이 지니고 가게 일러서 보냈다.

5월 21일 [양력 6월 19일]<갑술>
새벽에 출항하여 거제 유자도(통영시 한산면 유자도. 한산도와 서좌도 사이) 가운데 바다에 이르니,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출몰이 여전하다고 한다. 우수사와 같이 저녁내내 이야기했다. 이홍명(李弘明)도 왔다. 오후 두시쯤에 비가 왔다. 농민이 바라던 것을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게 했다.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수사 원균(元均)이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대군을 동요케 했다. 군중에서 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흉측함을 말할 수 없다. 마침내 밤에 미친듯이 비바람이 일었다. 먼동틀 무렵 거제 도 선창(船滄)에 배를 대니 곧 22일이다.

5월 22일 [양력 6월 20일]<을해> 비가 내렸다.
사람들이 바라던 차에 아주 흡족하게 왔다. 늦은 아침에 나대용(羅大用)이 본영에서 명나라 시랑(송응창)의 패문을 가지고 왔는 데, 파견원과 본도 도사 행(낮은 직책으로 높은 품계를 맡은 것) 상호군 선전관 한 사람이 먼저 기별을 가지고 왔다. 그건 송시랑이 파견한 사람이 전선을 시찰하러 온다고 했다. 곧 우후로 하여금 영접하도록 내보내고, 오후에 칠천량으로 옮겨 대었다. 나대용(羅大用)으로 하여금 문안하는 일로 내어 보냈다. 저녁에 방답이 와서 명나라 사람 접대할 일을 말했다. 영남우수사의 군관 김준계가 와서 저희 장수의 뜻을 전했다. 비가 종일 그치지 않는다. 흥양군관 이호(李琥)가 죽었다고 들었다.

5월 23일 [양력 6월 21일]<병자> 새벽에 흐리고 비는 오지 않더니, 저 녁나절에 비가 오락가락하다.
우수사가 오고 이홍명(李弘明)도 왔다. 영남우병사의 군관이 와서 적의 소식을 전했다. 본도(전라도)의 병마사(선거이)의 편지 및 공문이 왔는데,. "창원에 있는 적을 치고 싶으나, 적의 형세가 거세기 때문에 경솔히 나아갈 수 없다."고 한다. 저녁에 아들 회가 와서, "명나라 관원이 영문에 와서 배를 타고 떠나온다"고 전했다. 어두울 무렵 영남수사(원균)도 명나라 관원을 접대하는 일로 와서 의논하였다.

5월 24일 [양력 6월 22일]<정축> 비가 오락가락했다.
아침에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진을 옮겼다. 나대용(羅大用) 이 명나라 관원을 사량 뒷바다에서 발견하고 먼저 와서 전하되, "명나라 관원과 통역 표헌(表憲)과 선전관 목광흠(睦光欽)이 함께 온다."고 했다. 오후 두 시쯤에 명나라 관원 양보(楊甫)가 진문에 이르므로, 우별도위 이설(李渫)을 배웅하고 마중하게 하여 배로 안내하여 오니, 매우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우리 배로 청하여 오르게 하고, 황제의 은혜를 재삼 사례하며 마주 앉기를 청하니 굳 이 사양하였다. 그는 앉지 않고 선 채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이야기하며 수군이 장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예물 명단을 올리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받고는 매우 기뻐 하며 두번 세번 감사하다고 했다. 선전관이 표신을 평상에 놓은 뒤에 조용히 이야기했다. 아들 회가 밤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5월 25일 [양력 6월 23일]<무인> 맑다.
명나라 관원과 선전관은 숙취로 술이 깨지 않았다. 아침에 통역 표헌(表憲)을 다시 청하여 맞아들여 명나라 장수가 하는 일을 물었더니니, 명나라 장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왜적을 쫓아 보내려고만 할 따름이다."고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송시랑이 수군이 허실을 알고자 하여, 자기가 데리고 온 군중탐정(夜不守) 양보(楊甫)를 보낸 것인데, 수군의 위세가 이렇게도 장하니 기쁘기 한이 없다고 했다. 늦게야 명나라 관원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증명서를 준것도 있다. 오정에 거제현 앞 유자도 앞 바다가운데에 진을 옮기고서 우수사(이억기)와 작전을 토의하였다. 광양현감이 오고, 최천보(崔天寶)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바둑을 두고 헤어졌다. 저녁에 조붕(趙 鵬)이 와서 보고 이야기하고 보냈다. 초저녁이 지나서 영남에서 오는 명나라 사람 두 명과 우도관찰사의 영리(營吏) 한 사람과, 접반사 군관 한 사람이 진문(陣門)에 이르렀으나, 밤이 깊어 들이지 아니 하였다.

5월 26일 [양력 6월 24일]<기묘> 비가 내렸다.
아침에 명나라 사람을 만나 보니, 절강성의 포수 왕경득(王敬得) 인데, 문자는 좀 안다.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했지만 알아들을 수 가 없으니, 답답했다. 순천부사가 집에다 노루고기를 차려 놓았다. 광양현감도 왔다. 우수사 영감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가리포는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비가 저녁내 그치지 않고 밤새도록 퍼부었다. 밤 열 시쯤부터 바람이 세게 불어 각 배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처음에는 우수사의 배와 맞부딪치는 것을 겨우 구해 놓았더니, 또 발포만호(황정록)가 탄 배와 맞부딪쳐 거의 부서 질 뻔하다가 겨우 면하고, 내 군관 송한련(宋漢連)이 탄 협선은 발포 배에 부딪쳐 많이 다쳤다고 한다. 늦은 아침에 영남우수사(원균)가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순변사 이빈(李濱)이 공문을 보냈는데, 허튼소리가 많으니 가소롭다.

5월 27일 [양력 6월 25일]<경진>
비바람에 부딪친 까닭에 진을 유자도(柚子島)로 옮겼다. 협선 세 척이 간 곳이 없더니, 저녁나절이 되자 돌아왔다. 순천부사와 광양현감이 와서 노루고기를 차려 놓았다. 영남병마사(최경회) 의 답장이 오고, 그걸 보니 수사 원균(元均)은 경략 송응창(宋應 昌)이 보낸 화전을 혼자서 쓰려고 꾀를 내었다. 우습고도 우습다. 전라병마사(선거이)의 편지도 왔는데, "창원의 적들은 오늘 토벌하려 했다가 비가 오고 개이지 않아 아직 나가 치지 못 했다"고 했다.

5월 28일 [양력 6월 26일]<신사> 종일 비가 내렸다.
순천부사와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이야기했다. 광양사람이 장계를 가지고 왔다. 독운어사 임발영(任發英)을 위에서도 몹시 좋지 않게 여겨 아울러 조사하여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수군으로 한 가족을 징발하는 일에 대해서도 전에 내린 명령대로 하라고 했다. 비변사에서 공문이 왔다. 광양현감은 그대로 유임시킨다는 것이었다. 승정원의 관보를 가져왔기에 이를 대강 보았더니 얼마나 통분한지 알수가 없다. 의병 용호장(龍虎 將) 성응지(成應祉)에게 그 배를 바꿔 달 수 있도록 명령서를 써서 본영으로 내 보냈다.

5월 29일 [양력 6월 26일]<임오> 비가 내렸다.
방답첨사와 영등포만호 우치적(禹致績)이 와서 봤다. 공문을 만들어 접반사(김수)? 도원수(김명원)? 순변사(이빈)?순찰사(권율)? 병마사(선거이)?방어사(이복남) 등에게 보냈다. 밤 열 시에 변유헌(卞有憲)과 이수(李銖) 등이 왔다.

5월 30일 [양력 6월 28일]<계미> 종일 비가 내렸다. 오후 네 시쯤에 잠깐 개다가 도로 비가 왔다.
아침에 봉사 윤제현(尹濟賢)?변유헌(卞有憲)에게 왜적에 관한 일을 물었다.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봤다. 수사 원균(元均)은 경략 송응창(宋應昌)이 보낸 화전을 혼자만 쓰려고 꾀하다가 병사의 공문에 나누어 보내라는고 하니까, 그는 공문도 내려고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자꾸 지껄였다고 한다. 우습다. 명나라의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무기인 화전 천오백서른 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독차지하여 쓰려고 한다니 그 꾀부리는 꼴을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저녁에 조붕(趙鵬)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남해현령 기효근(奇孝謹)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이었는데, 그 배 안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가소롭다. 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맞았는데도 미인을 태우고 놀아나니 그 마음 씀씀이야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 원균(元 均) 수사부터 역시 그러하니 어찌하랴! 봉사 윤제현(尹濟賢)이 일이 있어 본영으로 돌아갔다. 군량미 열넉 섬을 실어 왔다.



계사년 6월 (1953년 6월)

6월 초1일 [양력 6월 29일]<갑신>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 편지도 왔는데. 평안하시다고 한다. 다행 다행이다. 아들의 편지와 조카 봉의 편지가 한꺼번에 왔다. 명나라 관원 양보(楊甫)가 왜놈의 물건을 보고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왜놈의 말안장 하나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순천부사?광양 현감이 와서 봤다. 탐후선이 왜놈의 물건을 가져 왔다. 충청수사 정걸(丁傑) 영감이 왔다. 나대용(羅大用)?김인문(金仁問)?방응원 (方應元)과 조카 봉도 왔다. 그 편에 어머니가 평안하심을 알았다. 다행다행이다. 충청수사 정걸(丁傑) 영감과 함께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저녁밥 을 대접했는데, 그 편에 들으니, 황정욱(黃廷彧)?이영(李瑛)이 강가로 나가서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한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 날은 맑았다.

6월 초2일 [양력 6월 30일]<을유> 맑다.
아침에 본영의 공문을 적어 보냈다. 온양의 강용수(姜龍壽)가 진에 와서 명함을 드리고 나서 와 보고서 먼저 경상도 본영으로 갔 다. 판옥선과 군관 송두남(松斗男)? 이경조(李景祚)? 정사립(鄭思 立)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아침을 먹고나서 순찰사 군관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 적의 정세를 알아서 돌아가는데 우수사와 상의하여 답하여 보냈다. 강용수(姜龍壽)도 왔다. 양식 다섯 말을 주어 보냈다. 원훈(元塤)이 같이 왔다고 한다. 정 영감도 배에 와 서 같이 이야기했다. 가리포첨사 우경(虞卿: 具思稷)과 같이 한 시간이나 이야기하였다. 저녁에 송아지를 잡아서 나누어 먹었다.

6월 초3일 [양력 7월 1일]<병술> 새벽에 맑더니 저녁나절에 비가 많이 왔다.
지휘선에 연기를 그을리려고 좌별선에 옮겨 탔다. 막 활쏘기를 하려는데, 비가 많이 왔다. 온 배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어 앉을 만한 마른 곳이 없다. 한심스럽다. 평산포만호?소비포권관? 방답첨사가 함께 와서 봤다. 저물 무렵에 순찰사(권율)?순변사 (이빈)? 병사(선거이)? 방어사(이복남) 등의 답장이 왔는데, 딱한 사정이 많았다. 각도의 군마가 많아야 오천 마리를 넘지 못한다 고 하고, 양식도 거의 다 떨어졌다고 했다. 왜적들의 발악이 날로 더해 가는 이 때에 일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초저녁에 상선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6월 4일 [양력 7월 2일]<정해> 종일 비가 내리니 긴 밤이었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순천부사(권준)가 왔다. 식사한 뒤에는 충청 수사 정걸(丁傑) 영감과 이홍명(李弘明)?광양현감(어영담)이 와서 종일 군사에 관한 이야기하였다.

6월 5일 [양력 7월 3일]<무자> 종일 비가 내렸다.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사람들이 감히 배 밖으로 머리를 내밀기가 어려웠다. 오후에 우수사가 왔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저물 무렵 바람이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므로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했다. 이홍명(李弘明)이 왔다. 저녁에 밥을 먹은 뒤에 돌아갔다. 경상수사가 웅천의 적도들이 혹감동포(부산시 북구 구포동)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 들어가 치자고 공문을 보냈다. 그 음흉한 꾀가 가소롭다.

6월 6일 [양력 7월 4일]<기축>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순천부사가 와서 봤다. 보성군수(김득광)은 갈려가고, 김의검 (金義儉)이 되었다고 한다. 충청수사가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이홍명(李弘明)이 오고 방답첨사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저녁에 본영 탐후인이 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또 소문에 흥양현감의 말이 낙안에 이르러 죽었다고 한다. 몹시 놀랬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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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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