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난중일기 - 3

영지니 2008. 4. 13. 19:05

1월 28일 [양력 3월 19일]<정미> 맑다.
아침에 우후가 와서 봤다. 종사관에게 낱낱이 공문을 조회하여 써서 강진 영리에게 주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원식이 서울로 올 라 간다고 왔기에 술을 먹여서 보냈다. 아침에 경상우후(이의 득)가 보고하기를,"명나라 제독 유정이 군사를 돌려 이달 25?26 일 사이에 올라간다"고 하며, 또, "위무사(장병을 위로하러 파견 된 관리)홍문교리 권협이 도내를 순시한 뒤에 수군 영으로 온다" 고 하며, 또, 화적 이산겸(李山謙) 등을 잡아다 가두고, 아산? 온양 등지에서 함부로 다니는 도적떼 아흔 여 명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고 했다. 또, "익호장(김덕령) 근일 중에 들어 올 것이다" 고 했다. 저물무렵에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내려 쓸쓸했다. 전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1월 29일 [양력 3월 20]<무신> 비가 종일 오고 밤새도록 왔다.
새벽에 각 배들이 아무 탈 없다고 한다. 몸이 불편하여 저녁에 누워서 신음했다.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가 거세어 배를 안정하게 매어 둘 수가 없으니, 마음이 몹시도 괴롭다. 미조항첨사(김승룡)가 배를 꾸밀 일로 돌아갔다.

1월 30일 [양력 3월 21일]<기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저녁나절에는 개이고 바람도 조금 잠잠했다. 순천부사 및 우수사 우후?강진현감(류해)이 왔다. 미조항첨사가 와서 아뢰고 돌아 갔다. 그래서 평산포의 도망군 세 명을 잡아와서 그 편에 딸려 보냈다.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땀을 흘렸다. 군관과 여러 장수들은 활을 쏘았다.


갑오년 2월 (1594년 2월)

2월 초1일 [양력 3월 22일]<경술> 맑다.
느지막이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청 주의 겸 사복 이상(李祥)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가지고 왔다. 그 내용에 경상감사 한효순(韓孝純)의 장계에 "좌도의 적들이 모여서 거제로 들어가서 앞으로 전라 땅으로 침범하려 하니, 경 은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적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오후에 우수사위 우후(이정충)을 불러 활을 쏘았다. 초저녁에 사 도첨사(김완)가 전선 세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이경복(李 景福)?노윤발(盧潤發)?윤백년(尹百年) 등이 도망군을 싣고 뭍으로 옮겨가는 배 여덟 척을 붙잡아 왔다. 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얼마 안가 그쳤다.

2월 초2일 [양력 3월 23일]<신해> 맑다.
아침에 도망군을 실어 내던 사람들의 죄를 처벌했다. 사도첨사가 와서 전하기를 낙안이 파면됐다고 했다. 느지막이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동궁에게 올린 달본(신본)의 회답이 내려왔다. 각 관포 에 공문을 써 보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바람이 잔잔하지 못했 다. 사도첨사가 기한에 미치지 않았으므로 허물을 따졌다.

2월 초3일 [양력 3월 24일]<임자> 맑다.
새벽꿈에 눈 하나가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올라서 활을 쏘았다. 광풍이 세게 일었다. 우조방장(어영담)이 왔는데, 역적들의 소식을 들으니 걱정되며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우우후가 빚진 물건을 여러 장수에게 보냈다. 원식?원전이 와서 상경한다고 보고했다. 면 천공문 한 장을, 원식이 남해에게 쇠붙이를 바치고서, 받아 갔다. 날이 저물어 막사로 내려왔다.

2월 4일 [양력 3월 25일]<계축>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순천부사?우조방장을 불러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본영 전선?거북함이 들어왔다. 조카 봉( )과 이설(李渫)?이언량(李彦良)?이상록(李尙祿) 등이 강돌천(姜乭千)을 데리고 왔다. 동궁의 달본을 가지고 내려 왔다. 우찬성 정탁(鄭琢)의 편지도 왔다. 각 관포에 공문을 써 보냈다. 순천에서 와서 보고하기를, 무군사(撫軍司)의 공문에 따른 순찰사의 공문에는 진중에서 시험을 보게하는 장달을 올린 것이 몹시 나쁘니까 그 허물을 캐물어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우습다. 조카 봉( )이 오는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이다.

2월 초5일 [양력 3월 26일]<갑인> 맑다.
꿈에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첩첩인 산마루로 올라가니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동서로 뻗쳐 있고, 산마루 위에는 평평한 곳이 있기 로 거기에 자리잡으려다가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웠다. 아침에 군기시에서 받아온 흑각궁 백 장을 낱낱이 헤아려 서명하고 화피(활 만드는데 쓰는 벚나무 껍질) 여든아홉 장도 셈하여 서명했다. 발포만호(황정록)?우 수사의 우후가 와서 보고, 같이 식사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순창과 광주 색리들의 죄를 벌주었다. 우조방장 및 우우후? 여도만호 등은 활을 쏘았다. 원수(권율)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유격 심유경이 벌써 화친을 결 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을 헤아릴 수 없 다. 전에도 놈들의 꾀에 빠졌었는데 또 이처럼 빠지려드니 한탄 스럽다. 저녁에 날씨가 찌는 것 같아 마치 초여름 같다. 밤 아홉 시에 비가 내렸다.

2월 6일 [양력 3월 27일]<을묘> 비가 내렸다. 오후에 맑게 개었다.
순천부사?조방장?웅천현감?사도첨사가 와서 봤다. 어두울 무렵 흥양에서 김방제(金邦濟)가 왔다. 누르고 향기로운 것(柚子?) 을 서른 개 가져 왔는데 새로 캔 것 같았다.

2월 7일 [양력 3월 28일]<병진> 맑은데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우조방장이 와서 보고 또 부지휘선에 타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와 홍군우(洪君遇)? 이숙도(李叔道)? 강인중(姜仁仲) 등에게 문안편지를 조카 분(芬)이 가는 편에 부쳤다. 조카 봉은 분(芬)과 같이 떠나는데 봉은 나주로 가고 분(芬)은 온양으로 갔다. 마음이 섭섭하다. 각 배에 솟장(所志) 이백 여 장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고성현령(조응도)이 보고에,"적선 쉰 여 척이 춘원포(고성군 광도면 예승리 끄승개)에 이르렀다"고 했 다. 삼천포권관과 가배량권관 제만춘(諸萬春)이 와서 서울 소식 을 말했다. 이경복(李景福)을 격군 붙잡아올 일로 내보냈다. 오늘 군대를 개편하고, 격군을 각 배에 옮겨 태웠다. 방답첨사에게 죄인을 잡아오라고 전령했다. 낙안군수의 편지가 왔는데, 새 군수 김준계(金俊繼)가 내려왔다고 하므로 그에게도 붙잡아 오라고 전 령했다. 보성의 전선 두 척이 들어왔다.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2월 8일 [양력 3월 29일]<정사>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는 몹시 추워 무척 걱정된다. 봉과 분(芬) 등이 배를 타고 떠났으니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말하기를,"고성 땅 소소포(召所浦:마암면 두호리)에 적선 쉰 여 척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곧 제만 춘을 불러 지형이 편리한지를 물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경상우병사의 군관이 편 지를 가져 와서 저희 장수 방지기(房人)를 면천하는 일을 말했다. 진주에 피란해 있는 전좌랑 이유함(李惟 )이 와서 이야기하 고서 저녁에 돌아왔다. 바다에 달이 밝아 잠이 오지 않는다. 순 천부사와 우조방장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밤 열 시쯤에 헤어졌다. 변존서(卞存緖)가 당포에 가서 꿩 일곱 마리를 사냥해 왔다.

2월 9일 [양력 3월 30일]<무오> 맑다.
새벽에 우후가 배 두세 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쪽에 띠풀을 베 러 나갔다. 아침에 고성현령이 왔다. 돼지머리도 가져왔다. 그 편에 당항포에 적선이 드나들었는지를 물었다. 또 백성들이 굶 어서 서로 잡아 먹는다고 하니, 앞으로 어찌하면 살 수 있을 것 인지도 물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활 열 순을 쏘 았다. 이유함(李惟 )이 왔다가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그의 자 (字)를 물으니, 여실(汝實)이라 했다. 순천부사? 우조방장? 우후? 사도첨사? 여도만호? 녹도만호? 강진현감? 사천현감?하동현 감?소비포권관도 왔다. 저물무렵에 보성군수가 들어왔다. 무군사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시위할 긴창을 수십 자루를 만들 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 날 동궁이 문책하는데 대한 답을 써 보냈다.

2월 11일 [양력 4월 1일]<경신> 맑다.
아침에 미조항첨사(김승룡)가 왔다. 술 석 잔을 권하고서 보냈 다. 종사관의 공문 세 통을 써 보냈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 자로 올라가니, 경상우수사(원균)가 와서 봤다. 술 열 잔을 마시니 취하여 미친 말을 많이 했다. 우습다. 우조방장도 왔다. 같이 취했다. 저물어서 활 세 순을 쏘았다.

2월 12일 [양력 4월 2일]<신유> 맑다.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조카 분(芬)의 편지에 선 전관 송경령(宋慶 )이 수군을 살펴볼 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오전 열 시쯤에 적도(거제시 둔덕면)로 진을 옮겼다. 오후 두 시쯤에 선전관(송경령)이 진에 도착했다. 임금의 분부(有旨) 두 통과 비밀문서 한 통, 모두 세 통을 가지고 왔는데, 한 통에는 "명나라 군사 십만 명과 은 삼백 냥이 온다"고 하였고, 한 통에는 "흉적들의 뜻이 호남지방에 있으니, 힘을 다하여 파수보며, 형세 를 보아 무찌르라"고 하였으며, 비밀문서에는 "일년이 지나도록 해상에서 근로하는 것을 임금님께서 잊지 못하니, 공로를 세운 장병들이 아직도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거던 적어 올리라"는 것 이 적혀 있었다. 또 그에게서 서울에서 여러 가지 소식과 역적 들의 일을 들었다. 영의정(류성룡)의 편지도 왔다. 임금님께서 밤낮으로 근심하며 분주하시다니, 감개무량하다.

2월 13일 [양력 4월 3일]<임술>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영의정에게 회답편지를 썼다. 식사를 한 뒤에 선전관(송 경령)을 불러 다시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작별을 하고서는 종일 배에 머물렀다. 오후 네 시쯤에 소비포만호(이영남)?사량만 호(이여염)?영등포만호(우치적)가 왔다. 오후 여섯 시쯤에 첫나발을 불자 출항하여 한산도로 돌아올 때, 경상우수사의 군관 제홍록(諸弘祿)이 삼봉(고성군 삼산면 삼봉리)에서 와서 말하기를, "적선 여덟 척이 들어와 춘원포(春 元浦)에 정박하였으므로, 들이칠 만하다고 했다. 그래서 곧 나 대용을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 보내어 상의케 하면서 전하게 한 말은,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치다가 큰 이익을 이루지 못 할 우려가 있으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 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찔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조항첨사?순천부사?조방장이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 다. 박영남(朴永男)?송덕일(宋德馹)이 되돌아갔다.

2월 14일 [양력 4월 4일]<계해> 맑고 따뜻하며 바람도 잔잔했다.
경상도의 남해?하동?사천?고성 등지에는 송희립(宋希立)?변 존서(卞存緖)? 류황(柳滉)? 노윤발(盧閏發) 등을, 우도에는 변유헌(卞有憲)?나대용(羅大用) 등을 점검하여 내어 보냈다. 본영 군량미 스무 섬을 실어 왔다. 정종(鄭宗)?배춘복(裵春福)도 왔다. 방답첨사와 첨지 배경남(裵慶男)이 왔다. 장언춘(張彦春)을 천민 에서 면하게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흥양현감이 들어왔다.

2월 15일 [양력 4월 5일]<갑자> 맑다.
새벽에 거북함 두 척과 보성의 배 한 척을 멍에나무(駕木) 치는 곳으로 가서 초저녁에 실어 오게 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 터 정자로 올라가서 좌조방장의 늦게 온 죄를 신문했다. 흥양배 의 부정을 조사해 보니, 허술한 일이 많았다. 또 순천부사?우 조방장?우수사의 우후?발포만호?여도만호?강진현감 등이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날이 저물 때에 순찰사(이정암)의 공문 내용에, "조도어사 박홍로(朴弘老)의 계본에서 순천?광양? 두치 등지에 복병을 두고 파수보게 해달라는 주문을 바친 바, 수 군과 수령을 아울러 이동시키는 일이 합당하지 않다는 대답이 내 려왔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2월 16일 [양력 4월 6일]<을축> 맑다.
아침에 흥양현감?순천부사가 왔다. 흥양이 암행어사(柳夢寅)의 비밀 장계초안을 가져 왔는데 임실현감 이몽상(李夢祥)?무장 현감 이충길(李忠吉)?영암군수 김성헌(金聲憲)?낙안군수 신호 (申浩)를 파면하고, 순천에는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를 논난하고, 나머지 담양부사(李景老)? 진원현감(趙公瑾)? 나주목사(李用純)? 장성부사(李貴)? 창평현령 백유항(白惟恒) 등 수령의 악행은 덮어 주고 포상하도록 상신한다.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랏일이 이러고서야 매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또 그 가운데에는 수군 가족에 대한 징발과 네 장정 속에서 두 장정이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일을 심히 비난하였으니, 암행어사 류몽인(柳夢寅)은 나라의 위급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쓸데 없이 눈앞의 임시 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있다. 남쪽 지방의 종작없는 말만 듣고서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악무목에 대한 진회의 짓거리와 다를 바가 없다. 나라를 위하여 심히 통탄할 일이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순천부사? 흥양현감? 우조방장? 우수사우후? 사도첨사? 발포만호?여도만호? 녹도만호? 강진현감? 광양현감 등과 활 열두 순을 쏘았다. 순천감목관이 진에 왔다가 돌아갔다. 우수사가 당포에 이르렀다고 했다.

2월 17일 [양력 4월 7일]<병인> 맑다.
따뜻하기가 초여름 같다. 아침에 지휘선에 연기 그을리는 일 때 문에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각 처에 공문을 써 보냈다. 오전 열 시쯤에 우수사가 들어왔다. 우두머리 군관 정홍수와 도 훈도를 군령으로 곤장 아흔 대를 쳤다. 이홍명(李弘明) 및 임희 진(林希璡)의 손자도 왔다. 대로 총통(竹銃筒)을 만들어 왔기에 시험으로 쏘아 보니, 소리는 비슷한데, 별로 쓰일 데가 없다. 우습다. 우수사가 거느린 전 선이 다만 스무 척이니, 더욱 한스럽다. 순천부사?우조방장이 와서 활 다섯 순을 쏘았다.

2월 18일 [양력 4월 8일]<정묘> 맑다.
아침에 배 첨지가 왔다. 가리포 이응표(李應彪)가 왔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해남현감 위대기(魏大器)에게 명령 을 거역한 죄를 벌주었다.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한 뒤에 활 두어 순을 쏘았다. 오후에 우수사가 왔다. 때마침 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심하게 취했기 때문에 한두번 밖에 못했다. 초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왔다.

2월 19일 [양력 4월 9일]<무진> 가랑비가 종일 왔다. 날씨가 찌는 듯했다.
활터 정자에 올라가 혼자 앉아 있는데, 우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오고 이홍명(李弘明)도 왔다. 조금 있다가 손충갑(孫忠甲)이 왔다고 보고하기에 불러 들여서 그 왜적을 토벌하던 일을 물었 더니, 감개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종일 이야기했다. 저물어서 숙소로 내려왔다. 변존서(卞存緖)가 본영으로 갔다.

2월 20일 [양력 4월 120일]<기사> 안개같은 이슬비가 걷히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우조방장과 첨지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이야기했다. 울(蔚)이 우수사 영감의 배에 갔다가 몹시 취해서 돌아왔다.

2월 21일 [양력 4월 11일]<경오> 맑고 따뜻하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순천부사와 우조방장 어영 담(魚泳潭) 영감이 와서, 견내량에 복병한 곳을 가서 살펴봤더 라고 보고했다. 청주 의병장 이봉(李逢)이 순변사에게 가서 육지의 사정을 자세히 일러 주고서 우 영감은 청주영감의 아제이다. 해질녘에 돌아갔다. 오후 여섯 시쯤에 벽방의 척후장(諸漢國)이 와서 구화역(통영시 광도면 노산리) 앞바다에 왜선 여덟 척이 와서 대었다고 했다. 그래서 배에서 내려 삼도에 전령하기를, 진격할 약속을 내리고서 원균(元均)의 군관 제홍록(諸弘祿)의 보고가 오기를 기다렸다.

2월 22일 [양력 4월 12일]<신미>
밤 한 시가 막 넘자 제홍록(諸弘祿)이 와서 말하는데, "왜선 열 척은 구화역에 이르렀고, 여섯 척은 춘원포(春原浦)에 이르 렀다"고 했다. 또 이미 날이 새어 미처 따라 잡지 못했다고 하므로, 다시 정찰이나 하라고 명령하고서 보냈다. 아침에 순천부사 ?우

2월 28일 [양력 4월 18일]<정축> 맑다.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종사관(정경달)과 종일 이야기했다. 장흥부사(황세득)가 들어왔다. 우수사를 처벌했다.

2월 29일 [양력 4월 19일]<무인> 맑다.
아침에 종사관과 같이 식사를 하고, 또 전별의 술을 마시며 종일 이야기했다. 장흥부사도 함께 했다. 벽방의 척후장 제한국 (諸漢國)의 긴급보고 내용에, "적선 열여섯 척이 소소포로 들어 왔다"고 하므로 각 도에 전령하여 알리도록 했다.



갑오년 3월 (1594년 3월)

3월 초1일 [양력 4월 20일]<기묘> 맑다.
망궐례를 드렸다. 활터 정자로 곧바로 올라가 검모포만호에게 캐묻고서 만호에게 곤장치고, 도훈도를 처형했다. 종사관(정경 달)이 돌아왔다. 막 어두울 녘에 출항하려할 때, 벽방척후장 제한 국(諸漢國)이 보고하기를, "왜선이 이미 도망가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초저녁에 장흥의 2호선이 실수로 불을 내어 다 타버렸다.

3월 초2일 [양력 4월 21일]<경진> 맑다.
아침에 방답?순천?우조방장이 왔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좌조방장? 우조방장? 순천부사? 방답첨사와 활을 쏘았다. 이 날 저녁에 장흥이 와서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강진의 모종으로 쌓아 둔 곳에 실수로 불을 내어 모두 다 타버렸다.

3월 초3일 [양력 4월 22일]<신사> 맑다.
아침에 전문(명절하례로 임금께 올리는 글월)을 절하여 보내고 곧 활터 정자에 앉았다. 경상우후 이의득이 와서 말하기를, "수군 이 많이 잡아 오지 못했다고 그의 수사(원균)에게서 매를 맞고, 또 발바닥까지 맞을 뻔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 좌조방장? 우조방장? 방답첨사? 가리포 첨사? 좌수사 우후? 우수사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오후 여섯 시쯤에 벽방척후장(제한국)이 보고한 내용에, "왜선 여섯 척이 오리량(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고리량)?당항포 등지에 정박 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곧 배를 소집시키라고 전령하고, 대군을 흉도 앞바다에 진치고 정예선 서른 척을 우조방장(어영담)이 거 느리고 적을 무찌르도록 했다. 초저녁에 배를 움직여 지도에 이르렀다가 새벽 두 시쯤에 출항했다.

3월 초4일 [양력 4월 23일]<임오> 맑다.
밤 두 시쯤에 출항했다. 진해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 여섯 척을 뒤쫓아 잡아 불태워 버렸고, 돝섬(猪島: 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저도. 용두산 해발 203m)에서 두 척을 불태워 버렸다. 또 소소강 에 열네 척이 들어왔다고 하므로, 조방장과 경상우수사 원균(元 均)에게나가 토벌하도록 전령했다. 고성땅 아잠포(阿自音浦;고성 군 동해면 당거리)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3월 초5일 [양력 4월 24일]<계미> 맑다.
겸 사복(윤붕)을 당항포로 보내어 적선을 쳐부수고 불태웠는지를 탐문케 하였더니, 우조방장 어영담(魚泳潭)이 긴급보고한 내용에 "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겁내어 밤을 틈타서 도망했으 므로 빈 배 열일곱 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했다. 경상우 수사(원균)의 보고도 같은 내용이었다. 우수사가 와서 볼 적에 비 가 많이 퍼붓고바람도 몹시 불었다. 바로 자기 배로 돌아갔다. 이 날 아침 순변사에게서도 토벌을 독려하는 공문이 왔다. 우조 방장과 순천?방답?배 첨사도 와서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배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은 각각 돌아 갔다. 저녁에 광양의 새 배가 들어왔다.

3월 초6일 [양력 4월 25일]<갑신> 맑다.
새벽에 망군이 보니, 적선 마흔 척 남짓이 청슬(거제시 사등면 지석리)로 건넜다고 했다. 당항포 왜선 스무한 척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긴급보고를 했다. 저녁나절에 거제로 향하는 데 맞바람이 거슬러 불어 간신히 흉도에 도착하니, 남해현감이 보고하되, "명나라 군사 두 명과 왜놈 여덟 명이 패문을 가지고 왔기에 그 패문과 명나라 군사 두 명을 보낸다."고 했다. 그 패문을 가져다 보니, 명나라 도사부(都司府) 담종인이 적을 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서 앉고 눕기 조차 불편하다. 저녁에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명나라 군사를 만나 보고서 보냈다.

3월 초7일 [양력 4월 26일]<을유> 맑다.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꼼짝하기 조차 어렵다. 그래서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패문을 지어라고 하였더니 지어 놓은 글이 꼴이 아니다. 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손의갑(孫義甲)으로 하여금 작성했는 데도 그것마저 못 마땅하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짓고, 정사립(鄭思立)에게 이를 쓰게 하여 보냈다. 오후 두 시쯤에 출항하여 밤 열 시쯤 한산도 진중에 이르렀다.

3월 초8일 [양력 4월 27일]<병술> 맑다.
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다. 기운이 더욱 축이 나서 종일 아팠다.

3월 초9일 [양력 4월 28일]<정해> 맑다.
기운이 좀 나은 듯 하므로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웠다. 아프긴 해도 다른 증세는 없다.

3월 초10일 [양력 4월 29일]<무자> 맑다.
병세는 차츰 나아지는 것 같은데, 열기는 치올라 그저 찬 것만 마시고 싶은 생각 뿐이다.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3월 11일 [양력 4월 30일]<기축> 종일 큰 비가 왔다.
어두울 무렵에는 개였다. 병세가 아주 많이 나아졌고 열도 또 한 내리니 참으로 다행이다.

3월 12일 [양력 5월 1일]<경인>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매우 불편하다. 영의정에게 편지를 썼다. 장계를 정서하 는 일을 마쳤다는 말을 들었다.

3월 13일 [양력 5월 2일]<신묘> 맑다.
아침에 장계를 봉해 올렸다. 몸은 차츰 나아지는 것 같으나, 기 력이 매우 고달프다. 그대로 회( )와 송두남을 내어 보냈다. 오후에 원균(元均) 수사가 왔다. 그의 잘못된 일을 말했다. 그래 서 장계를 도로 가져 와서 원사진(元士震)과 이응원(李應元) 등 거짓으로 왜인 노릇한 놈을 목잘라 바친 일을 고쳐서 보냈다.

3월 14일 [양력 5월 3일]<임진> 비가 내렸다.
몸은 나은 듯하지만, 머리가 무겁고 기분이 좋지 않다. 저녁에 광양현감(송전)? 강진현감(류해)? 첨지 배경남(裵慶男) 같이 갔다. 소문에 "충청수사(구사직)가 이미 신장(薪場)에 왔다"고 한다. 종일 몸이 불편했다.

3월 15일 [양력 5월 4일]<계사> 비는 그쳤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미조항첨사가 돌아갔다. 종일 신음했다.

3월 16일 [양력 5월 5일]<갑오> 맑다.
몸이 매우 불편하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충청수사가 전선 아홉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3월 17일 [양력 5월 6일]<을미> 맑다.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 변유헌(卞有憲)은 본영으로 돌아가고 순천도 돌아갔다. 해남현감(위대기)는 새 현감과 교대하는 일로 나가고, 황득중 등은 복병에 관한 일로 거제도로 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3월 18일 [양력 5월 7일]<병신> 맑다.
몸이 몹시 불쾌하다. 남해현감 기효근(奇孝謹)?보성군수(김득광) ?소비포권관 이영남(李英男)? 적량첨사 고여우(高汝友)가 와서 봤다. 기효근(奇孝謹)은 파종 때문에 돌아갔다. 보성군수는 말을 하려 했다가 사정을 말하지 않고 돌아갔다. 낙안 유위장(留衛將)과 향소(鄕所) 등을 잡아 가두었다.

3월 19일 [양력 5월 8일]<정유> 맑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3월 20일 [양력 5월 9일]<무술> 맑다.
몸이 불편하다.

3월 21일 [양력 5월 10일]<기해> 맑다.
몸이 불편하다. 명단을 작성하는 관리로 여도만호(김인영)?남도 포만호(강응표)?소비포권관 이영남(李英男)을 뽑아 담당시켰다.

3월 22일 [양력 5월 11일]<경자> 맑다.
몸이 약간 나아진 것 같다. 원수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 지휘 담종인의 자문(중국과 왕래하던 문서)과 왜장의 서계(書契:일본과 왕래하던 문서)를 조파총이 가지고 간다"고 하였다.


3월 23일 [양력 5월 12일]<신축> 맑다.
기운이 여전히 불쾌하다. 방답첨사(이순신)?흥양현감(배흥립)? 조방장(어영담)이 와서 봤다. 견내량이 미역 쉰세 동을 캐어 왔 다. 발포만호(황정록)도 와서 봤다.

3월 24일 [양력 5월 13일]<임인> 맑다.
몸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다. 미역 예순 동을 캐 왔다. 정사립 (鄭思立)이 왜놈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왔다.

3월 25일 [양력 5월 14일]<계묘> 맑다.
흥양현감과 보성군수가 나갔다. 사로잡혔던 아이(希順)가 왜의 진중에서 명나라 장수(담종인)의 가지고 왔던 자인데, 흥양으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에 올라갔는데 몸이 몹시 불편 하여 일찍 숙소로 내려왔다. 저녁에 아우 여필?아들 회( )? 변존서(卞存緖)?신경황이 와서 어머니 안부를 자세히 들었다. 다만 선산이 모두 산불에 탔는데, 아무도 끄지 못했다고 한다. 몹시 가슴 아프다.

3월 26일 [양력 5월 15일]<갑진> 맑다.
따뜻하기가 여름 날씨 같다. 조방장?방답첨사가 와서 왔다. 발포 만호가 휴가를 받아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마량첨사?사량만호? 사도첨사?소비포가 아울러 와서 봤다. 경상우후(이의득)? 영등포만호(우치적)도 왔다가 창신도로 돌아가 겠다고 했다.

3월 27일 [양력 5월 16일]<을사> 흐리되 비는 아니 오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몸이 좀 나은 것 같다. 초저녁에 비가 왔다. 봉( )이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한다.

3월 28일 [양력 5월 17일]<병오> 종일 비가 내렸다.
조카 봉( )의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 몹시도 걱정된다.

3월 29일 [양력 5월 18일]<정미> 맑다.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였다. 웅천현감? 하동현감?소비포권관 등이 와서 봤다. 장흥부사?방답첨사도 와서 봤다. 저녁에 여필과 봉( )이 같이 돌아갔다. 봉( )은 중 병이 들어 돌아 갔으니 밤새도록 걱정으로 새웠다. 어두워서 방 충서와 조서방의 사위 김함(金 )이 왔다.

3월 30일 [양력 5월 19일]<무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충청군관?도훈도를 처벌하고 낙안유위장?도병방 등을 처벌했다. 저녁나절에 삼가현감 고상안(高尙顔)이 와서 봤다. 저녁에야 숙소로 내려왔다.


갑오년 4월 (1594년 4월)

4월 초1일 [양력 5월 20일]<기유> 맑다.
매일 먹는 밥인데도 밥을 먹지 못했다. 장흥부사(황세득)?진도 군수(김만수)?녹도만호(송여종)이 여제(악질병에 걸려 죽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려고 아뢰고 돌아갔다.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4월 초2일 [양력 5월 21일]<경술>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삼가현감과 충청수사 와 같이 종일 이야기했다. 조카 해가 들어왔다.

4월 초3일 [양력 5월 22일]<신해> 맑다.
오늘 여제를 지냈다.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 천여든 동이를 먹였다. 우수사와 충청수사도 같이 앉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숙소로 내려왔다.

4월 초4일 [양력 5월 23일]<임자> 흐렸다가 어둘녘에 비가 왔다.
아침에 원수의 군관 송홍득(宋弘得)과 변홍달(卞弘達)이 새로 급제한 홍패(과거 합격증)를 가지고 왔다. 경상우병사의 군관 박 창령(朴昌齡)의 아들 박의영(朴義英)이 와서 그의 장수의 안부 를 전했다. 식사를 한 뒤에 삼가현감이 왔다. 저녁나절에 활터정 자로 올라가니 장흥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종일 오손도손 이야기하였다.

4월 초5일 [양력 5월 24일]<계축> 흐리다.
새벽에 최천보(崔天寶)가 죽었다.

4월 초6일 [양력 5월 25일]<갑인> 맑다.
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丙年마다 보이던 문무 시험)를 보는 시험장소를 개설하였다. 시험관은 나와 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구사직)이요, 참시관(시험감독관)은 장흥부사(황세득)? 고성현령(조응도)?삼가현감(고상안)?웅천현감(이운룡)을 시험을 감독하게 하였다.

4월 초7일 [양력 5월 26일]<을묘> 맑다.
일찍 모여 시험을 받았다.

4월 초8일 [양력 5월 27일]<병진> 맑다.
몸이 불편한 채 시험장으로 올라갔다.

4월 초9일 [양력 5월 28일]<정사> 맑다.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어 붙였다. 큰 비가 왔다. 조방장 어영담 (魚泳潭)이 세상을 떠났다. 통탄함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으랴!

4월 초10일 [양력 5월 29일]<무오> 흐리다.
순무어사(각지의 군대와 백성을 순찰하려고 파견되는 중앙관리) (서성)가 진에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4월 11일 [양력 5월 30일]<기미> 맑다.
순무어사가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문안하는 배를 내어 보냈다.

4월 12일 [양력 5월 31일]<경신> 맑다.
순무어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이억기)?경상 수사(원균)?충청수사(구사직)가 함께 왔다. 술이 세 순배 돌자, 경상수사 원균은 짐짓 술취한 척하고 미친 듯이 날뛰며, 억지 소리를 해대니, 순무어사도 무척 괴이쩍어 했다. 삼가현감이 돌아갔다.

4월 13일 [양력 6월 1일]<신유> 맑다.
순무어사가 전쟁연습하는 것을 보고싶어 한다. 그래서, 죽도(통영 시 한산면)바다 가운데로 나가서 연습했다. 선전관 원사표(元士 彪)?금오랑 김제남(金悌男)이 충청수사(구사직)를 잡아갈 일로 왔다.

4월 14일 [양력 6월 2일]<임술> 맑다.
김제남과 함께 자세한 말을 했다. 저녁나절에 순무어사의 배로 가서 군사 기밀을 자세히 의논했다. 잠시후에 우수사가 오고, 순 천부사?방답첨사?사도첨사도 아울러 왔다. 나는 하직하고 배로 돌아왔다.

4월 15일 [양력 6월 3일]<계해> 맑다.
충청수사(구사직)가 선전관(원사표)?금오랑(김제남)?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왔다. 충청수사 우경(虞卿) 구사직(具思稷)과 작별 했다.

4월 16일 [양력 6월 4일]<갑자>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정자로 올라갔다. 밀려 쌓인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경상수사(원균)의 군관 고경운(高景雲)과 도훈도 및 변고(變故)에 대비하는 색리?영리를 잡아다가, 지휘에 응하지 않고 적변도 빨리 보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쳤다. 저녁에 송두남(宋斗南)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장계에 따라 낱낱이 하교한 대로 시행했다.

4월 17일 [양력 6월 5일]<을축> 맑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거제현령(안위)가 급히 와서 보고한 내용에, "왜선 백 여 척이 본토(日本)에서 처음 나와서 절영도(折影島)로 향한다."고 했다. 저물 무렵에 거제에 살다가 사로잡혔던 남녀 열여섯 명이 도망하여 돌아왔다.

4월 18일 [양력 6월 6일]<병인> 맑다.
새벽에 도망쳐 돌아온 사람이 있는 곳에 가서 적정을 자세히 물으니, 대마도 평의지(宗義智)는 웅천땅 입암(진해시 웅천동 제덕 리)에 있고, 평행장(小西行長)은 웅포에 있다고 한다. 충청도 신임 수사(李純信)?순천부사 및 우수사우후(李廷忠)가 왔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안위)도 왔다.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세차게 왔다.

4월 19일 [양력 6월 7일]<정묘> 비가 내렸다.
첨지 김경로(金敬老)가 원수부에서 와서 적을 토벌할 대책을 논 의하고서 그대로 한 배에서 잤다.

4월 20일 [양력 6월 8일]<무진> 종일 가랑비가 걷히지 않았다.
우수사?충청수사?장흥부사?마량첨사(강응표)가 와서 바둑을 두고, 군사에 관한 일도 의논했다.

4월 21일 [양력 6월 9일]<기사> 비가 오락가락 했다.
혼자 봉창 아래 앉아 있으도 저녁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방답첨사가 충청수사로 되어 중기(重記)를 수정하는 일로 아뢰고 돌아갔다. 저녁에 김성숙(金惺叔)과 곤양의 이광악(李光岳)이 와서 봤다. 저물녁에 흥양이 들어 왔다. 본영 탐후선도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4월 22일 [양력 6월 10일]<경오> 맑다.
바람이 시원하여 가을 날씨 같다. 첨지 김경로가 다시 돌아왔다. 장계를 봉하고, 또 조총을 동궁에게 줄 긴 창과 더불어 봉해 올렸다. 장흥부사가 왔다. 저녁에 흥양현감도 왔다.

4월 23일 [양력 6월 11일]<신미>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권준)?흥양현감(배흥립)이 왔다. 저녁나절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이 술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도 왔다. 임치첨사(홍견)도 같이 왔다. 곤양이 몹시 취해서 미친 소리를 마구 해대니 우습다. 나도 잠깐 취했다.

4월 24일 [양력 6월 12일]<임신> 맑다.
아침에 서울 편지를 썼다. 저녁나절에 영암군수(박홍장)?마량 첨사(강응표)가 와서 봤다. 순천부사가 아뢰고 돌아갔다. 각 항목의 장계를 봉해 보냈다. 경상우수사가 있는 곳에 순찰사 종사관이 왔다고 한다.

4월 25일 [양력 6월 13일]<계유> 맑다.
꼭두새벽부터 몸이 불편하여 종일 괴로워했다. 아침에 보성군수가 와서 봤다. 밤새도록 앉아서 앓았다.

4월 26일 [양력 6월 14일]<갑술> 맑다.
통증이 극히 심하여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곤양군수가 아뢰고 돌아갔다.

4월 27일 [양력 6월 15일]<을해> 맑다.
통증이 잠깐 덜하다. 숙소로 내려갔다.

4월 28일 [양력 6월 16일]<병자> 맑다.
기력과 아픈 증세가 많이 덜했다. 경상수사(원균)과 좌랑 이유함(李惟 )이 와서 봤다. 울(蔚)이 들어왔다.

4월 29일 [양력 6월 17일]<정축> 맑다.
기운이 상쾌해진 것 같다. 아들 면이 들어왔다. 곧 고을의 종 넷과 관의 종이 들어왔다. 오늘 우도에서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갑오년 5월 (1594년 5월)
5월 초1일 [양력 6월 18일]<무인>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의 방에 올라가니 날씨가 무척 맑고 시원했다. 종일 땀이 비오듯이 흐르더니, 좀 나아진 것 같다. 아침에 아들 면과 집안 계집 종 넷, 관 계집 종 네 명이 병을 간호하러 들어왔다. 덕이(德)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내일 돌려 보내라고 일렀다.

5월 초2일 [양력 6월 19일]<기묘> 맑다.
새벽에 회는 계집 종 등과 더불어 어머니 생신에 상차려 드릴 일로 돌아갔다. 우수사(이억기)?흥양현감(배흥립)?사도첨사 (김완)?소근첨사(박윤)이 와서 봤다. 몸이 차츰 나아져 갔다.

5월 초3일 [양력 6월 20일]<경진> 맑다.
흥양현감이 휴가를 얻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장흥부사와 발포 만호가 와서 봤다. 군량명세서와 공명고신(이름이 안 적힌 사령 장) 삼백 여 장(丈)과 임금의 분부 두 통이 내려왔다.

5월 초4일 [양력 6월 21일]<신사> 거센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리는데 종일 그치지 않았다. 밤새도록 더 심하게 내렸다.
경상우수사의 군관이 와서 고하기를, "왜적 세 명이 중선(中船)을 타고 추도(통영시 산양면)에 온 것을 만나 잡아 왔다."고 했다. 이를 추문(推問)한 뒤에 압송할 일로 일러 보냈다. 저녁에 공 대원(孔大元)에게 물으니, 왜적들이 바람을 따라 배를 몰고 본토 (日本)로 향하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를 조 종할 수가 없어 떠 다니다가 이 섬에 닿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 나 간사한 사람의 말이니 믿을 수 없다. 이설(李渫)?이상록(李尙 祿)이 돌아갔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5월 초5일 [양력 6월 22일]<임오> 비바람이 세게 불어쳤다.
지붕이 세 겹이나 말리어 조각 조각 높이 날려가고, 빗발은 삼대 같이 내려 몸을 가누지 못했다. 우습다. 사도첨사가 와서 문안 하고 돌아갔다. 큰 비바람이 오후 두 시쯤에야 조금 멈추었 다. 발포만호(황정록)가 떡을 만들어 보내 왔다. 탐후선이 들어 왔다. 어머니가 평안하심을 알았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5월 초6일 [양력 6월 23일]<계미> 흐렸다가 저녁나절에 개이다.
사도?보성?낙안?소근 등이 와서 봤다. 오후에 경상수사 원 균(元均)이 왜놈 세 명을 잡아 왔기에 문초를 해 보니, 이랬다 저랬다 만번이나 속이므로 수사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목을 베고 보고케 했다. 우수사도 왔다. 술을 세 순배 돌렸다가 상을 물리고 돌아갔다.

5월 7일 [양력 6월 24일]<갑신> 맑다.
기운이 편안한 것 같다. 침 열여섯 군데를 맞았다.

5월 8일 [양력 6월 25일]<을유> 맑다.
원수의 군관 변응각(邊應慤)이 원수의 공문과 장계 초본과 임금 의 분부(有旨)를 가지고 왔다. "수군을 거제로 진격시켜 적이 무서워 도망 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경상수사와 전라우수사 를 불어 의논했다.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밤에 큰 비가 왔다.

5월 9일 [양력 6월 26일]<병술> 종일 비가 내렸다.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 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아득하여 술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5월 10일 [양력 6월 27일]<정해> 비가 내렸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 보니, 우리의 많은 배들이 바다에 가득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 온다 해도 섬멸할만하다. 저녁나절에 우우후(李廷忠)과 충청수사(李純信)이 와서 두 사람이 장기를 두었다. 원수의 군관 변응각도 같이 점심을 먹었다. 보성군수(金得光)가 저물 무렵에 왔다.비가 종일 걷히지 않았다. 아들 회( )가 바다로 나간 것이 걱정된다. 소비포권관이 약품을 보내 왔다.

5월 11일 [양력 6월 28일]<무자> 비가 저녁 때까지 내렸다.
3월부터 밀려 쌓인 공문을 낱낱이 적어서 내려줬다. 저녁에 낙안군수(金俊繼)가 와서 이야기했다. 큰 비가 퍼붓듯이 내려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5월 12일 [양력 6월 29일]<기축> 큰 비가 종일 내리다가 저녁이 되서 야 조금 그쳤다.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봤다.

5월 13일 [양력 6월 30일]<경인> 맑다.
이 날 검모포만호의 보고에, "경상우수사 소속의 보자기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가다가 현장에서 붙들렸는데, 많은 보자기들이 원 수사가 있는 곳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복들을 보 내어 잡아 오게 하였더니, 원균(元均) 수사가 도리어 사복(司僕) 들을 묶어서 가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관 노윤발을 보내어 이 를 풀어 주게 했다. 밤 열 시쯤에 비가 왔다.

5월 14일 [양력 7월 1일]<신묘> 종일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이순신)?낙안군수(김준계)?임치현감(홍견)?목포만호( 田希光) 등이 와서 봤다. 영리(營吏)에게 시켜 종정도(벼슬이름을 품계와 종별을 따라 그려 놓고 윷놀이 하듯이 말을 쓰는 놀이)를 그렸다.

5월 15일 [양력 7월 2일]<임진> 종일 비가 내렸다.
아전에게 시켜 종정도를 그렸다.

5월 16일 [양력 7월 3일]<계사>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저녁에는 큰 비가 밤새도록 내려 지붕이 새어서 마른 데가 없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가 매우 괴로울 것이 염려된다. 곤양군수 (이광악)가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사명당 유정이 진진 안으로 왕 래하면서 문답한 초기(草記:각 관청에서 업무상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을 사실만 간단히 적어 올리던 글)를 보내 왔기로 보니, 분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5월 17일 [양력 7월 4일]<갑오>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바다의 안개가 캄캄하여 눈앞을 분간할 수 없는데, 저녁내 그치지 않았다.

5월 18일 [양력 7월 5일]<을미> 종일 비가 내렸다.
미조항첨사(金勝龍)가 와서 봤다. 저녁에 상주포권관이 와서 봤다. 저녁에 보성현감이 돌아갔다.

5월 19일 [양력 7월 6일]<병신> 맑다. 장마비가 잠깐 걷혔다.
마음이 몹시 상쾌했다. 아들 회와 면과 계집 종 등이 돌아갔다. 그때때, 바람이 순탄치 않았다. 이날 송희립과 회가 같이 착량에 가서 노루를 잡을 적에 비바람이 몹시 일고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초저녁에 돌아왔는데도 활짝 걷히지 않았다.

5월 20일 [양력 7월 7일]<정유> 비가 오고 또 거센 바람이 조금 그 쳤다.
웅천현감(이운룡)과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온종일 홀로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민다. 호남의 관찰사들이 나라를 저버리는 것에 더 많이 유감스럽다.

5월 21일 [양력 7월 8일]<무술> 비가 내렸다.
웅천현감?소비포권관이 와서 종정도를 했다. 거제 장문포에서 적에게 사로잡혔던 변사안(卞師顔)이 도망쳐 와서 하는 말이, 적의 형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했다. 센 바람이 밤낮으로 불 었다.

5월 22일 [양력 7월 9일]<기해> 비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오는 29일이 장모의 제삿날이다. 아들 회와 면을 내보냈 다. 계집 종들도 내 보냈다. 순찰사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또 순변사에게도 편지를 써 보냈다. 황득중(黃得中)?박주하(朴注河)? 오수(吳水) 등은 격군을 잡아 올 일로 내 보냈다.

5월 23일 [양력 7월 10일]<경자> 비왔다.
웅천현감?소비포권관이 왔다. 저녁나절에 해남현감(위대기)이 와서 술과 안주를 바치므로, 충청수사(李純信)를 청하여 왔다. 밤 열 시쯤에 헤어졌다.

5월 24일 [양력 7월 11일]<신축> 잠시 맑다가 저녁에 비가 내렸다.
웅천?소비포가 와서 종정도를 놀았다. 해남도 왔다. 오후에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구사직(具思稷)에 대한 장계를 가져 갔던 진무가 들어왔다. 조카 해가 들어왔다.

5월 25일 [양력 7월 12일]<임인>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서 돌아갔다. 소비포도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마음이야 오죽 답답하랴. 조카 해가 돌아갔다.

5월 26일 [양력 7월 13일]<계묘> 걷히기도 하고 비오기도 하였다..
마루에 앉았는데 서쪽 벽이 무너져 있었다. 바라지 창으로 들어 오는 바람을 다시 쐬니 기분을 맑게 하여 무척 좋았다. 과녁판을 정자 앞으로 옮겨 놓았다. 오늘 이인원(李仁元)과 토병 스무세 명을 본영으로 보내어 보리를 거두어 들이라고 일러 보냈다.

5월 27일 [양력 7월 14일]<갑진> 맑다가 비오기더 했다.
사도첨사가 충청수사?발포만호?여도만호?녹도만호와 함께 활을 쏘았다. 이 날 소비포권관이 누워서 앓았다고 했다.

5월 28일 [양력 7월 15일]<을사> 잠깐 개이다.
사도첨사?여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겠다고 여쭈었다. 그래서 우수사?충청수사를 청해 와서 활쏘고, 취하여 종일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광양 4호선의 부정사실을 조사했다.

5월 29일 [양력 7월 16일]<병오>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엿다.
장모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저녁에 진도군수(金萬 壽)가 아뢰고 돌아갔다. 웅천현감(李雲龍)?거제현령(安衛)?적량 첨사(高汝友)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물녁에 정사립(鄭思立)이 보고하는데, "남해 사람이 배를 가지고 와서 순천 격군을 싣고 간다"고 했다. 그래서 잡아서 가두었다.

5월 30일 [양력 7월 17일]<정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왜놈들과 도망가자고 꾄 광양 1호선 군사와 경상도 보 자기 세 명을 처벌했다.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충청수사가 왔다.


갑오년 6월 (1594년 6월)

6월 초1일 [양력 7월 18일]<무신> 맑다.
아침에 배 첨사(배경남)와 같이 밥을 먹었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활을 쏘았다.

6월 초2일 [양력 7월 19일]<기유> 맑다.
아침에 배 첨사(배경남)와 같이 밥을 먹었다. 충청수사도 왔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이억기)의 진으로 갔더니, 강진현감(류해)이 술을 바쳤다. 활 두어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 원균(元均)도 왔다. 나는 곧 몸이 불편하여 돌아가 누워서 충청수사와 첨사 문길(門吉) 배경남(裵慶男)이 내기 장기두는 것을 구경했다.

6월 3일 [양력 7월 20일]<경술> 초복이다. 아침에 맑더니 오후에 소 나기가 퍼부어 종일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
바닷물 빛조차 흐리니, 근래에 드문 일이다. 충청수사?첨사 배경 남(裵慶男)이 와서 바둑을 두었다.



6월 4일 [양력 7월 21일]<신해> 맑다.
충청수사?미조항첨사와 웅천현감이 와서 보기에 종정도를 놀게 했다. 저녁에 겸 사복이 임금의 분부(有旨)를 가지고 왔다. 그 사연에 이르기를,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다음부터는 전날의 버릇을 버려라."는 것이다. 통탄하기 그지없다. 이는 원균(元均)이 술에 취하여 망발한 때문이다.

6월 5일 [양력 7월 22일]<임자>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사도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가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밤 열 시쯤에 급창(관청의 심부름하는 종) 김산(金山)과 그 처자 등 세 명이 유행병으로 죽었다. 세 해나 눈앞에 두고 미덥게 부리던 사람인데, 하루 저녁에 죽어가다니, 참으로 슬프다. 무우밭을 갈았다. 송희립?낙안군수?흥양현감?보성군수가 군량을 독촉할 일로 나갔다.

6월 6일 [양력 7월 23일]<계축> 맑다.
충청수사?여도만호와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소나기가 왔다.

6월 7일 [양력 7월 24일]<갑인> 맑다.
충청수사?첨사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이야기했다. 남해군관과 색리 등의 죄를 처벌했다. 송덕일(宋德馹)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임금의 분부(有旨)가 들어온다고 했다. 오늘 무우씨 두 되 다섯 홉을 부침했다.

6월 8일 [양력 7월 25일]<을묘> 맑으며 물쿠었다.
우우후가 왔다. 충청수사와 다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저녁 에 종 한경(漢京)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심을 알았다. 참으로 기쁘고도 다행이다. 미조항첨사가 아뢰고 돌아갔다. 회 령포만호(민정붕)가 진에 왔다. 전공(戰功)에 따라 포상하는 관교 (官敎:敎旨)도 왔다.

6월 9일 [양력 7월 26일]<병진> 맑다.
충청수사?우우후가 와서 활을 쏘았다. 우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 기했다. 밤이 깊은데 피리소리 가득한 바다, 거문고를 타며 장수를 기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6월 10일 [양력 7월 27일]<정사> 맑으며, 물쿠다.
활 다섯 순을 쏘았다.

6월 11일 [양력 7월 28일]<무오> 맑으며,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아침에 아들 울(蔚)이 본영으로 갔다. 작별하는 회포가 씁쓸하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저녁나절에 바람이 몹시 사나와지며 걱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충청수사가 와서 활을 쏘고 그대로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앉아서 오래도 록 있다가 헤어졌다.

6월 12일 [양력 7월 29일]<기미> 바람이 세게 불었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가뭄이 너무 심하다. 농사의 근심이 더욱 염려스럽다. 이 날 어둘 무렵에 본영의 배 격군 일곱 놈이 도망갔다.

6월 13일 [양력 7월 30일]<경신> 바람이 몹시 불고 더위는 찌는 듯하다.

6월 14일 [양력 7월 31일]<신유> 더위와 가뭄이 너무 심하다.
바다의 섬도 찌는 듯하다. 농사일이 아주 걱정된다. 충청수사?사 도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와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충청 수사가 가장 잘 맞혔다. 이 날 경상수사는 활꾼을 거느리고 우수 사가 있는 곳으로 왔다가 크게 지고 돌아갔다고 했다.

6월 15일 [양력 8월 1일]<임술> 맑더니 오후에 비가 내렸다.
신경황(申景滉)이 영의정(류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라를 근심함이 이보다 더한 이가 없을 것이다. 지사 윤우신(尹又 新)이 죽었다니, 애석할 따름이다. 순천부사?보성군수가 달려와 보고하는데, "명나라 총병관 장 홍유가 호선(號船)을 타고 백 여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거쳐 벌써 진도 벽파정(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이르렀다."고 했다. 날짜로 짚어보면 오늘이나 내일에 이르를 것이지만, 바람이 맞불 어 맘대로 배를 부리지 못한 것이 닷새째이다. 이 날 밤 소나기가 흡족하게 내렸다. 어찌 하늘이 백성을 살리려는게 아니겠는가. 아들의 편지가 왔는데, 잘 돌아갔다고 했다. 또 아내의 편지에는 면( )이 더위를 먹어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괴롭고 답답하다.

6월 16일 [양력 8월 2일]<계해>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에 개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6월 17일 [양력 8월 3일]<갑자> 맑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충청수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탐 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으나, 면은 많이 아프다고 했다. 몹시 걱정된다.

6월 18일 [양력 8월 4일]<을축> 맑다.
아침에 원수의 군관 조추년(趙秋年)이 전령을 가지고 왔다. "원 수가 두치(하동읍 두곡리)에 이르러 광양현감(송전)이 수군 중에 복병을 뽑을 적에 사사로운 정을 썼다 말을 들었다. 그래서 군관 을 보내어 그 까닭을 물으니, 놀라운 일이다. 원수가 그 서처남 조대항(曺大恒)의 말을 듣고 이렇게도 사사로이 행하니 통탄스럽 기 그지 없다. 이 날 경상우수사가 청했는데 가지 않았다.

6월 19일 [양력 8월 5일]<병인> 맑다.
원수의 군관과 배응록(裵應祿)이 원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변존서(卞存緖)? 윤사공(尹思恭)? 하천수(河千壽) 등이 들어왔다. 충청수사가 와 보고서 그 어머니 병환 때문에 곧 그의 사처(私 處)로 돌아갔다.

6월 20일 [양력 8월 6일]<정묘>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보고 활을 쏘았다. 박치공(朴致恭)이 와서 말하 고 서울로 갔다. 마량첨사도 왔다. 저녁에 영등포만호는 본포(영 등포)에 물러나 있었던 죄를 다스렸다. 탐후선 이인원(李仁元) 이 들어왔다.

6월 21일 [양력 8월 7일]<무진>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마량첨사가 와서 봤다. 명나라 장수(장홍유)가 바닷길로 벌써 벽파정에 이르렀다고 한 것은 잘 못 전한 것이라고 했다.

6월 22일 [양력 8월 8일]<기사> 맑다.
할머님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오늘 불꽃과 같은 삼복 더위가 전보다 더하여 큰 섬이 찌는 듯하여 사람이 견디기가 여 간 어렵지 않다.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식사를 두 끼니나 먹지 않았다. 초저 녁에 소나기가 내렸다.

6월 23일 [양력 8월 9일]<경오> 맑더니 저녁나절에 소나기가 왔다.
순천부사?충청수사?우우후?가리포첨사가 아울러 와서 봤다. 우후(이몽구)가 군량 독촉하는 일로 나갔다가 견내량에서 왜놈을 사로잡았다. 왜적의 동태를 캐묻고, 또 무엇을 잘하는지 물었더 니, 염초굽는 일과 총쏘기를 다 잘한다고 했다.

6월 24일 [양력 8월 10일]<신미> 맑다.
순천부사?충청수사가 와서 활 스무 순을 쏘았다.

6월 25일 [양력 8월 11일]<임신> 맑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이여념(李汝恬)도 와서 활을 쏘았다. 종사관(정경달)을 모시는 아전이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 데, 조도어사의 말이 몹시 놀라왔다. 부채를 봉하여 보냈다.

6월 26일 [양력 8월 12일]<계유> 맑다.
충청수사?순천부사?사도첨사?여도만호?고성현령 등이 활을 쏘았다. 일찍 김양간(金良幹)에게 단오날의 진상물을 봉해 올렸 다. 마량?영등포가 여기 왔다가 곧 돌아갔다.

6월 27일 [양력 8월 13일]<갑술> 맑다.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6월 28일 [양력 8월 14일]<을해> 맑다. 더위가 찌는 듯하다.
나라제삿날(明宗 祭日)이라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진무성(陳 武晟)이 벽방산의 망보는 곳의 부정사실을 조사하고 와서 적선은 없더라고 보고했다.

6월 29일 [양력 8월 15일]<병자> 맑다.
순천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다. 우수사?충청수사와 같이 와서 활을 쏘았다. 윤동구(尹東?)의 아버지가 와서 봤다. 울(蔚)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갑오년 7월 (1594년 7월)

7월 초1일 [양력 8월 16일]<정축> 맑다.
배응록(裵應祿)이 원수에게서 들어 왔다. 원수가 뉘우치는 말을 하고서 보냈다는 것이다. 우습다. 이 날이 나라제삿날(仁宗 祭 日)이라 홀로 종일 앉있었다. 저녁에 충청수사가 여기 와서 서로 이야기했다.

7월 초2일 [양력 8월 17일]<무인> 맑다.
늦더위가 찌는 듯하다. 이 날 순천의 도청(원을 보좌하는 아전)과 색리?광양의 색리 등의 죄를 다스렸다. 좌도 사수들의 활쏘기 를 시험하고, 적의 장물을 나누어 줬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충 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배 첨지가 휴가를 받아 갔다. 노윤 발(盧潤發)에게 흥양군관 이심(李深)과 병선 색리?괄군색리 등을 붙잡아 올 일로 전령을 주어 내 보냈다.

7월 초3일 [양력 8월 18일]<기묘> 맑다.
충청수사?순천부사가 활을 쏘았다. 웅천현감 이운룡(李雲龍)이 휴가를 신고하고 미조항으로 돌아갔다. 음란한 계집을 처벌했다. 각 배에서 여러번 양식을 훔친 사람들을 처형했다. 저녁에 새로 지은 다락으로 나가 보았다.

7월 4일 [양력 8월 19일]<경진>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은 뒤에 마량첨사?소비포권 관도 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왜적 다섯 명과 도망병 한 명을 아울러 처형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옥과의 계원유사 조응복(曺應福)에게 참봉의 직첩을 주어 보냈다.

7월 5일 [양력 8월 20일]<신사> 맑다.
새벽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심을 알았다. 참으로 다행이다. 심약(審藥: 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감시하기 위하여 각 도에 파견하는 종9품의 벼슬인데, 전의감 혜민서의 의원중에서 뽑음)이 내려왔는데 매우 용렬하니 한심스럽다. 우수사?충청수사가 같이 왔다. 여도만호는 술을 가져와 같이 마셨다. 활 열여 순을 쏘았다. 너무 취해서 수루에 올랐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7월 6일 [양력 8월 21일]<임오> 종일 궂은비 오다.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큰 도둑 세 놈을 최귀석(崔貴 石)이 잡아 왔다. 또 박춘양(朴春陽) 등을 보내어 그 괴수를 잡아 왼쪽 귀를 잘라서 왔다. 아침에 정원명(鄭元溟) 등을 격군을 정비하지 않은 일로 이를 잡아 가두었다. 저녁에 보성군수가 들어온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밤 11시 쯤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빗발이 삼대 같 아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치밀었다.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7월 7일 [양력 8월 22일]<계미> 저녁에 비가 뿌렸다.
충청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다고 아뢰고 모이지 못했다. 우수사는 순천부사? 사도첨사? 가리포첨사? 발포만호? 녹도만호가 함께 활을 쏘았다. 이영남(李英男)이 배를 거느리고 올 일로 곤양으로 간다고 아뢰고 돌아갔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고성 보인(保人)을 문초했다. 보성이 왔다.

7월 8일 [양력 8월 23일]<갑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곤하여 장수들을 보지 않았다. 각 고을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오후에 충청수사에게 가서 봤다. 저녁에 고성 사람으로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온 사람을 직접 문 초했다. 광양의 송전(宋銓)이 그의 지휘관인 병사의 편지를 이곳에 가지고 왔다. 낙안과 충청우후가 온다고 했다.

7월 9일 [양력 8월 24일]<을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충청우후(원유남)가 교서에 숙배하였다. 저녁나절에 순 천?낙안?보성의 군관과 색리들이 격군을 소홀히 하고 또 기일을 어긴 죄를 처벌했다. 가리포?임치?소근포?마량첨사 및 고성현령이 아울러 왔다. 낙안의 군량 벼 이백 섬을 받아서 나누었다.

7월 10일 [양력 8월 25일]<병술>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비가 조금 내렸다.
아침에 낙안의 겨냥 벼 찧은 것과 광양 벼 백 섬을 되었다. 신 홍헌(申弘憲)이 들어왔다. 저녁나절에 송전(宋筌)과 군관이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아침에 아들 면의 병이 중태에 빠졌다는 말을 들었다. 또 피를 토하는 증세까지 있다고 하므로, 울(蔚)과 심약 신경황? 정사립? 배응록(裵應祿)을 아울러 내 보냈다.

7월 11일 [양력 8월 26일]<정해> 궂은비가 내렸다.
바람이 세게 불고 종일 그치지 않았다. 울(蔚)이 가는 길이 고 되고 힘들 것이 많이 염려되고, 또 면의 병이 어떠한지 궁금 하다. 장계를 손수 초잡아 고쳐 주었다. 경상 순무(서성)의 공 문이 왔는데, 원 수사가 불평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오후에 군관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봉학(奉鶴)도 같이 활을 쏘았다. 윤언침(尹彦 )이 점고 받으러 왔기에 점심을 먹여 도로 보냈다. 저물무렵에 비바람이 몹시 치더니 밤 내내 계속 되었다. 충청 수사가 와서 봤다.

7월 12일 [양력 8월 27일]<무자> 맑다.
아침에 소근첨사가 와서 보고 화살 쉰네 개를 만들어 바쳤다. 공문을 적어서 나누어 주었다. 충청수사는 순천?사도?발포?충 청우후와 아울러 와서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기 에 어머니의 평안하심은 알았으나, 면의 병세는 중하여 몹시도 애타지만 어찌하랴. 영의정 류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 다. 이는 류 정승을 미워하는 자들이 반드시 말을 만들어 비방하는 말일 것이다. 이런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 날 어둘 무렵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제대 로 걷잡을 수 없다. 염려가 더욱 답답하여 밤이 깊어 가도 잠들 지 못했다. 류 정승이 만약 어찌 되었다면 나랏일을 어찌하랴! 어찌하랴!

7월 13일 [양력 8월 28일]<기축> 비가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까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임금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 다. 두 괘가 다 좋았다. 마음이 좀 놓인다. 또 류 정승의 점을 친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은 괘가 나 왔다. 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 왔다.무척 좋았다. 저녁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저녁나절에 송전(宋筌)이 돌아가는데, 소금 한 휘 를 주어 보냈다. 오후에 마량첨사와 순천이 와서 보고 어두워 서 되돌아갔다. 비가 올 것인가 개일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뿜어 내는 것과 같은 괘가 나왔다. 앞으로 비가 많이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저녁에 발포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7월 14일 [양력 8월 29일]<경인> 비가 내렸다.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삼대 같았다. 지붕이 새어 마른 곳이 없다. 간신히 밤을 지냈다. 점괘를 얻은 그대로이니 참으로 묘하다. 충청수사와 순천부사를 청해 와서 장기를 두게 하고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근 심이 뱃속에 있으니, 어찌 조금인들 편안하랴!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에 수루 위로 걸어 나가 몇 바퀴나 어설렁거리다가 돌아왔 다. 탐후선이 오지 않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자정에 비가 또 내렸다.

7월 15일 [양력 8월 30일]<신묘> 비가 내렸다. 저녁나절에 개었다.
조카 해?종 경이 들어와서 아들 면의 병이 차도가 있다 는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조카 분(芬)의 편지 에, 또 아산 고향의 선산이 아무 탈 없고, 가묘도 편안하며, 어머 니께서도 편안하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이흥종(李 興宗)이 환자하는 일로 매를 맞다가 숨졌다고 했다. 놀랍다. 그 삼촌(충청수사 李純信)이 처음 이를 듣고서 비통한 나머지, 그 어 머니도 듣고 병세가 더욱 위중해졌다고 한다. 활 열 여 순을 쏜 뒤에 수루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거닐 적에, 박주사리(朴注沙 里)가 급히 와서 명나라 장수의 배가 이미 본영 앞에 이르러 이 리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곧 삼도에 전령하여 진을 죽도(통영시 한산면)로 옮겼다. 밤을 지냈다.

7월 16일 [양력 8월 31일]<임진> 흐리고 바람이 차겁다.
늦은 아침부터 큰 비가 내리더니 종일 퍼붓듯이 왔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충청수사?우수사가 모두 와서 봤다. 소비포가 소의 다리 등을 보내 왔다. 명나라 장수가 삼천진(사천시 삼천 포)에 이르러 머물러 묵는다고 했다. 여도만호가 먼저 왔다. 저녁에 본진으로 돌아왔다.

7월 17일 [양력 9월 1일]<계사> 맑다.
새벽에 포구로 나가 진을 쳤다. 오전 열 시쯤에 명나라 장수 파총 장홍유(張鴻儒)가 병호선(兵號船) 다섯 척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 들어와서 곧장 영문에 이르러서는 육지에 내려서 이야기하자고 청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수사들과 함께 활터 정자에 올라가서 올라오기를 청했더니, 파총이 배에서 내려 곧 왔다. 이들과 같이 앉아서 먼저 바닷길 만리 먼 길을 어렵다 않으시고 여기까지 오신데 대하여 감사함을 비길 길이 없다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작년 7 월 절강에서 배를 타고 요동에 이르니, 요동사람들이 말하기를, 바닷길에는 돌섬과 암초가 많고, 또 앞으로 강화가 이루어질 것이니 갈 필요가 없다고 억지로 말리는데도 그대로 요동에 머물면 서 시랑(侍郞) 손광(孫鑛)과 총병(總兵) 양문(楊文)에게 보고하고, 올 3월초에 출항하여 들어왔으니, 무에 수고라고 할 것이 있는 가 했다. 나는 차를 마시라고 청하고 또 술잔을 권하니 감개무량 하다. 또 적의 형세를 이야기하느라고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7월 18일 [양력 9월 2일]<갑오> 맑다.
다락 위로 올라가자고 청하여 점심을 먹은 뒤에 나가 앉아 술을 서너 차례 권했다. 대체로 내년 봄에 배를 거느리고 곧장 제주에 이르러, 공히 우리 수군과 합세하여 으시대면서 추악 한 적들을 무찌르자고 성의있게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헤어졌다.

7월 19일 [양력 9월 3일]<을미> 맑다.
아침에 환영 예물 단자를 올리니, 감사해 마지 못하겠다면서 주시는 물건이 매우 풍성했다. 충청수사도 드렸다. 저녁나절에 우 수사가 예물을 주는데 몇몇은 나와 같았다. 점심을 먹은 뒤에 경상 원 수사가 혼자서 술 한 잔을 올리는데, 상은 무척 어지럽건만 한가지라도 아래쪽 힘쓸 것이 없었다. 우습고 우스웠다. 또 자(字)와 호(別號)를 물으니, 써서 주는데, 자는 중문(仲文)이 요, 호(軒號)는 수천(秀川)이라고 했다. 촛불을 밝히고 다시 이야 기하다가 헤어졌다. 비가 많이 올듯하여 배로 내려가 잤다.

7월 20일 [양력 9월 4일]<병신> 맑다.
아침에 통역관이 와서 전하여 말하기를, 명나라 장수(장홍유)가 남원에 있는 총병 유정(劉綎)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곧장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명나라 장수에게 간절히 말을 전하기를, "처음에 파총(장홍유)이 남원으로 온다는 소식이 이미 총병관 유 정에게 전해졌으니, 만약 가지 않는다면, 그 중간에 남의 말들이 있을 것이므로, 바라건대 가서 만나 보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그러니 파총이 나의 말을 전해 듣고, 과연 옳다고 하 며, "내 말을 타고 혼자 가서 만나 본 뒤에 군산으로 가서 배를 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하고서 파총이 내 배로 내려와서 조용히 이야기 하고, 이별의 잔을 권했다. 파총이 일곱 잔을 마신 뒤 홋줄을 풀 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가 두번 세번 애달픈 뜻으로 송별하였다. 그리고 경수(景修:이억기)? 충청수사? 순천부사? 발포만호?사 도첨사와 같이 사인암(舍人巖)으로 올라가 취하며 이야기하고서 돌아왔다.

7월 21일 [양력 9월 5일]<정유> 맑다.
아침에 원수에게 명나라 장수와의 문답 내용을 공문을 만들어 내 보냈다. 저녁나절에 마량첨사?소비포첨사가 와서 봤다. 발포만호가 복병 내보내는 일로 와서 아뢰고 갔다. 저녁에 수루 로 올라 있는데,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오후에 흥양의 군량선이 들어왔다. 그래서 색리와 배 주인에게 발바닥을 호되게 때렸다. 저녁에 소비포가 와서 보고는 하는 말이, 기한에 대지 못 했다고 해서 수사 원균(元均)에게 곤장 서른 대를 맞았다고 했다. 몹시 해괴한 일이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군량 스무 섬을 꾸어 갔다.

7월 22일 [양력 9월 6일]<무술> 맑다.
아침에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임치첨사와 목포만호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사량만호와 영등포만호이 와서 봤다. 오후에 충청 수사?순천부사?충청우후?이영남(李英男)이 함께 활을 쏘았 다. 저물 무렵 수루에 올라가 밤이 되어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7월 23일 [양력 9월 7일]<기해> 맑다.
충청수사가 우수사?가리포첨사와 같이 와서 봤다. 활을 쏘았 다. 조카 해( )가 돌아갔다. 목년(木年)이 들어 왔다.

7월 24일 [양력 9월 8일]<경자> 맑다.
여러 가지 장계를 직접 봉했다. 영의정(류성룡)과 심 병판(심충 겸)?윤 판서(윤근수) 앞으로 보냈다. 저녁에 활 일곱 순을 쏘았다.

7월 25일 [양력 9월 10일]<신축> 맑다.
아침에 하천수에게 장계를 지니게 하여 내 보냈다. 아침 식사 를 하고서 충청수사?순천부사 등과 함께 우수사에게로 가서 활 열 순을 쏘았다. 몹시 취하여 돌아왔는데 밤새도록 토해냈다.

7월 26일 [양력 9월 11일]<임인> 맑다.
각 고을에 공문을 써 보냈다. 밥을 먹은 뒤에 수루 위로 옮겨 앉았다. 순천과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녹도만호가 도망병 여덟 명을 잡아 왔다. 그래서 그 중 주모자 세 명을 처형 하고 그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아들들의 편지를 보니, 어머니께서 편안하시고 면( )의 병도 나아 진다고 한다. 허씨 댁이 병이 점점 더해졌다고 한다. 걱정이다. 유홍(兪弘)과 윤근수(尹根壽)가 세상을 떠나고 윤돈(尹敦:1551-1612)이 종사관으로 내려 온다고 한다. 신천기(申天機)도 들어왔다. 어둘 무렵 신제운(申霽雲)이 와서 봤다. 노윤발(盧潤發)이 흥양의 색리와 감관을 붙잡아 들어왔다.

7월 27일 [양력 9월 11일]<계묘>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밤 꿈에 머리를 풀고 곡을 했다. 이 조짐은 매우 좋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날 충청수사?순천부사와 함께 수루 위에서 활을 쏘았다. 충청수사가 과하주(여름을 지내도 시어지지 않는 약주)를 가지고 왔다. 나는 몸이 불편하여 조금 마셨다. 역시 좋아지지 않았다.

7월 28일 [양력 9월 12일]<갑진> 맑다.
흥양의 색리들의 죄를 다스렸다. 신제운이 주부의 직첩을 받고 서 갔다. 저녁나절에 수루에 올라가 벽 바르는 일을 감독했다. 의능이 와서 그 일을 맡았다. 저물 무렵에 숙소로 내려 왔다.

7월 29일 [양력 9월 13일]<을사> 종일 가랑비가 왔다.
바람기는 없었다. 순천부사와 충청수사가 바둑을 두는데, 구경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낙안군수도 와서 같이 했다. 이 날 밤 신음했는데 아침까지 했다.


갑오년 8월 (1594년 8월)

8월 초1일 [양력 9월 14일]<병오> 비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수루의 방으로 옮겨 앉았다가 곧 뒷동 헌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낙안군수(金俊繼)가 강집(姜緝)을 데려다가 군량 독촉하는 일로 군율에 따라 문초하고 내어 보냈다. 비가 종일 내리더니 밤까지 왔다.

8월 초2일 [양력 9월 15일]<정미>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하루 한밤중에 꿈을 꾸었는데, 부안사람(李舜臣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따져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다. 그래서 꿈이지만 내쫓아버렸다. 몸이 나은 것 같다. 저녁나절에 수루 위로 옮겨 앉 아 충청수사?순천부사 및 마량첨사와 함께 이야기 하며 새로 빚 은 술을 몇 잔 마셨다. 비가 종일 내렸다. 송희립(宋希立)이 와 서 아뢰기를, 흥양의 훈도도 작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고 했다.

8월 초3일 [양력 9월 16일]<무신> 아침에는 흐렸으나 저물녁에야 개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서너 순을 쏘았다. 수루(戍樓)의 방을 도배 했다.

8월 초4일 [양력 9월 17일]<기유> 아침에비가 뿌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발포만호 등이 와서 활을 쏘았다. 수루의 방의 도배를 마쳤다. 경상수사의 군관과 색리들이 명나라 장수를 접대할 때에 여자들에게 떡과 음식물을 머리에 이고 오게 한 죄를 처벌했다. 화살장이 박옥래(朴玉來)가 와서 대를 가져 갔다. 이종호(李宗浩) 가 흥양에 안수지(安守智) 등을 잡아 오려고 갔다.

8월 5일 [양력 9월 18일]<경술> 아침에 흐렸다.
밥을 먹은 뒤에 충청수사?순천부사와 같이 활을 쏘았다. 오 후에 경상수사 원균(元均)에게로 갔더니, 우수사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서로 이야기하다가 한 시간쯤이나 지나서 돌아왔다. 이 날 웅천현감?소비포권관?영등포만호 및 윤동구(尹東?) 등이 선봉장으로서 여기에 왔다.

8월 6일 [양력 9월 19일]<신해> 아침에 맑다가 저물녁에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저녁에 장흥부사가 들어 왔다. 보성군수가 나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는 편 안하시고 아들 면은 차츰 나아진다고 한다. 고성현령과 사도 첨사?적도만호가 아울러 왔다가 갔다. 이 날 밤 수루의 방에서 잤다.

8월 7일 [양력 9월 20일]<임자> 종일 비가 내렸다.

8월 8일 [양력 9월 21일]<계축> 종일 비가 내렸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들어왔다.

8월 9일 [양력 9월 22일]<갑인> 비가 내렸다.
우수사 및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충청수사?순천부사?사도첨 사가 같이 이야기했다.

8월 10일 [양력 9월 23일]<을묘> 종일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이 날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8월 11일 [양력 9월 24일]<병진> 종일 비가 많이 내렸다.
이 날 밤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지붕이 세 겹 이나 벋겨져 삼대 같이 비가 샜다. 밤새도록 앉아서 새벽을 맞았 다. 양 창문은 모두 바람에 깨져 다 젖었다.

8월 12일 [양력 9월 25일]<정사>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웅천현 감?소비포권관도 와서 활을 쏘았다. 아침에 원수의 군관 심 준(沈俊)이 여기 왔다. 그 전령에, 군사 약속을 직접 만나서 논 의하자고 하므로 오는 17일에 사천으로 나가 기다리겠다고 했다.

8월 13일 [양력 9월 26일]<무오> 맑다.
아침에 심준(沈俊)이 돌아갔다. 노윤발(盧潤發)도 돌아갔다. 오전 열 시쯤에 배에서 내려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가서, 별도로 날랜 장수들을 뽑아 춘원포(春原浦:통영시 광도면 끄승개) 등지로 가서, 적을 엿보아 무찌르게 할 일을 사도첨사에 게 전령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사람을 보내고 그대로 머물러 잤다.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 없어 잔잔하여 해( )를 시켜 피리를 불게 했다. 밤이 깊어서야 그만 뒀다.

8월 14일 [양력 9월 27일]<기미> 아침에 흐리다가 저물녁에 비가 왔다.
사도첨사?소비포권관?웅천현감 등이 달려 와서 보고한 내용에, "왜선 한 척이 춘원포(春原浦)에 정박해 있으므로 불의에 엄습하였더니, 왜놈들은 배를 버리고 도망쳐 달아나기에, 우리 나라 남녀 열다섯 명을 빼앗아 돌아오고, 적의 배도 빼앗아 왔 다."고 했다. 오후 두 시쯤에 진으로 돌아왔다.

8월 15일 [양력 9월 28일]<경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출항하여, 경상수사 원균(元均)과 함께 월명포(통 영시 산양면 수월리)에 이르러 잤다.

8월 16일 [양력 9월 29일]<신유>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소비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 에 돛을 올려서 사천 선창((船滄: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이르 니, 기직남(奇直男)이 곤양군수(이광악)와 함께 와 있었다. 그대로 머물러 잤다.

8월 17일 [양력 9월 30일]<임술> 흐리다가 저물 무렵에 비가 왔다.
원수가 오정에 사천에 이르러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곤양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물고 있는 사천현감(기직 남)이 맞아주는 곳으로 나아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 간의 예를 마치고, 그대로 함께 이야기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다. 원균(元均)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머리를 들 지 못하였다. 우습다. 술을 가지고 마시자고 청했다. 여덟 순을 돌리니 원수가 몹시 취하여 상을 물리고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니, 박종남(朴宗男)과 윤담(尹潭)이 와서 봤다.

8월 18일 [양력 10월 1일]<계해>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 원수가 청하므로 나아가 이야기했다. 또 조촐한 술잔치를 벌였는데 잔뜩 취해서 아뢰고 돌아왔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은 취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만 곤양군수(이광악)?거제현령(안위)?소비포권관(이영 남) 등과 함께 배를 돌려 삼천포앞에 이르러 잤다.

8월 19일 [양력 10월 2일]<갑자> 맑다. 저녁에 잠깐 비가 왔다.
새벽에 사량(통영시 사량면) 뒷쪽에 이르니,원균(元均) 수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칡을 예순 동이나 캐니, 원균(元均) 수사가 그제야 왔다. 늦게 출항하여 당포(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이르러 잤다.

8월 20일 [양력 10월 3일]<을축> 맑다.
느지막이 출항하여 진(한산도)에 이르렀다. 우수사(이억기)와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와서 보고는 정은 곧 돌아갔다. 우수사 및 장흥부사?사도첨사?가리포첨사?충청우후와 함께 활을 쏘았다. 저녁에 피리를 불고 노래했다.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미안스러운 일이 많았다. 충청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흥양으로 곧장 도로 돌아갔다.

8월 21일 [양력 10월 4일]<병인> 맑다.
외가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곤양군수?사도첨사? 마량첨사? 남도만호? 영등포만호? 회령포만호? 소비포권관가 아울러 왔다. 양정언(梁廷彦)이 와서 봤다.

8월 22일 [양력 10월 5일]<정묘> 맑다.
나라제삿날(成宗貞顯王后 尹氏)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 우우후가 와서 봤다. 낙안군수?사도첨사도 왔다가 갔다. 저녁 에 곤양군수?거제현령?소비포권관?영등포만호가 와서 이야 기하고 밤이 깊어서 돌아갔다.

8월 23일 [양력 10월 6일]<무진> 맑다.
아침에 공문 초안을 잡았다. 밥을 먹은 뒤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 았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그대로 활을 쏘았다. 바람이 몹시 험악하게 불었다. 장흥부사?녹도만호가 같이 왔다. 저물 무렵에 곤양군수과 웅천현감?영등포만호?거제현령?소비 포권관도 왔다. 초저녁에 헤어져 돌아갔다.

8월 24일 [양력 10월 7일]<기사> 맑다.
각 고을에 수군을 징발하는 일로 박언춘(朴彦春)?김륜(金倫)?신 경황(申景潢)을 내어 보냈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돌아갔다. 저물 무렵에 소비포가 와서 봤다.

8월 25일 [양력 10월 8일]<경오> 맑다.
아침에 곤양군수?소비포권관을 불러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사도첨사가 휴가를 받아 갔다. 9월 초7일에 돌아오도록 일러 보냈다. 현덕린(玄德麟)이 제 집으로 돌아갔다. 신천기(申天紀)도 곡식을 바칠 일로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흥양이 돌아왔다. 활 터정자로 내려가 활 여섯 순을 쏘았다. 정원명(鄭元明)이 들어왔다고 했다.

8월 26일 [양력 10월 9일]<신미> 맑다.
아침에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써 보냈다. 흥양 보자기 막 동이란 자가 장흥의 군사 서른 명을 몰래 그의 배에 싣고 도망간 죄로 처형하여 효수했다. 저녁나절에 내려가 활터정자에 앉아 서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와서 같이 쏘았다.

8월 27일 [양력 10월 10일]<임신> 맑다.
우수사는 가리포첨사?장흥부사?임치첨사?우후 및 충청우후가 와서 활을 쏘는데, 흥양현감은 술을 바쳤다. 아침에 아들 울 (蔚)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 보냈다.

8월 28일 [양력 10월 11일]<계유> 밤 두시쯤부터 비는 조금 오다가 바람이 세게 불었다.
비는 아침 여섯 시께 개었으나, 바람은 종일 세게 불고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아들 회가 잘 갔는지 아닌지 몰라서 몹시 염 려된다. 진도군수(김만수)가 와서 봤다. 그 편에 원수의 장계로 해서 문책 하는 글이 내려 왔는데, 대체로 장계를 낸 것에 잘못 풀이한 때 문이었다.

 

출처;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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