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난중일기 - 4

영지니 2008. 4. 13. 19:11

8월 29일 [양력 10월 12일]<갑술> 맑으나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마량첨사?소비포권관이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았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도양장의 머슴 박돌이의 죄를 다스렸다. 도둑 세 놈중에 장손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얼굴에 도둑 자를 새겼다. 해남현감이 들어왔다. 의병장 성응지(成應祉)가 죽었다니, 참으로 슬프다. 8월 그믐날 [양력 10월 13일]<을해> 맑고 바람조차 없다. 해남현감 현즙(玄楫)이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이억기) 및 장흥부사(황세득)가 와서 봤다. 저물 무렵 충청우후(원유남) ?웅천현감(이운룡)?거제현령(안위)?소비포권관(이영남)도 왔다. 허정은도 왔다. 이 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고 했다. 벌써 죽고 사는 것이 결딴이 났는지 모르 겠다. 나라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생각이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아들 셋?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꼬! 쓰리고 아프구나. 김양간(金良幹)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沈 忠謙:병조판서)의 편지를 이곳에 가지고 왔다. 분개한 뜻이 많이 적혀 있다고 했다. 원균 수사의 하는 일이 매우 해괴하다. 나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하니, 천년을 두고서 한탄할 일이다. 곤양군수가 병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보지 못하고 보냈으니 너무 너무 섭섭하다. 밤 열시쯤부터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못잤다.


갑오년 9월 (1594년 9월)

9월 초1일 [양력 10월 14일]<병자> 맑다.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이리 저리 뒤척였다. 이른 아침에 손씻고 고요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환속하는 것과 같고,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다. 또 병세가 덜해질지 어떤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조짐이었다. 순무 사서성 (1558-1631)의 공문과 장계초고가 들어왔다.

9월 초2일 [양력 10월 15일]<정축> 맑다.
아침에 웅천현감?소비포권관이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저 녁나절에 낙안군수가 와서 봤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다고 하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니 염려스럽다.

9월 초3일 [양력 10월 16일]<무인> 비가 조금 내렸다.
새벽에 임금의 비밀분부(有旨)가 들어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병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세 해 동안이나 바다에 나와 있는데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을 뜻을 결심하고 나날을 보내지마는, 적이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있으니, 경솔히 나아가 칠 수도 없다. 하물며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초 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 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밤 열시쯤에 흥양현감이 내가 혼자 앉아 있음을 알고 들어와서 자정까지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9월 초4일 [양력 10월 17일]<기묘> 맑다.
아침에 흥양현감이 와서 봤다. 밥을 먹은 뒤에 소비포권관도 왔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이야기하자고 했 다. 그래서 활터 정자로 내려가 앉아 활을 쏘았다. 원균(元均) 수사가 아홉 푼을 져 술이 취해서 갔다. 피리를 불게하다가 밤이 깊어 헤어졌다. 또 미안한 일이 있었다. 우습다. 여도만호가 들어왔다.

9월 초5일 [양력 10월 18일]<경진> 맑다.
닭이 운 뒤에 머리가 가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 이 를 긁게 했다. 바람이 고르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9월 초6일 [양력 10월 19일]<신사> 맑고 바람이 잔잔하다.
아침에 충청수사 및 우후?마량첨사와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아 활을 쏘았다. 이 날 저녁 종 효대(孝代)?개남(介南)이 어머니의 평안하시다는 편지를 가지고 왔다. 기쁘고 다행함을 어디다 비기랴! 방필순(方必淳)이 세상을 떠나고 방필순이 그 가족을 데리고 우리집으로 온다고 한 말을 들었다. 우습다. 밤 열시쯤에 복춘(福春)이 왔다. 저물녘에 김경 로(金敬老)가 우도(右道)에 이르렀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9월 7일 [양력 10월 20일]<임오>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의 편지가 왔는데, 순찰사(홍세공)가 초열흘 쯤에 본부(순천)에 도착된다고 했다. 좌의정(윤두수:1533-1661)도 도착된다고 했다 심히 불행한 일이다. 순천부사가 진에 있을 때 거제로 사냥을 보냈던 바, 그들은 남김없이 다 잡았다는데, 그 사정을 전혀 보고하지 않은 것이 몹시 해괴하다. 그래서 편지 를 보낼 때에 그것을 지적하여 보냈다.

9월 8일 [양력 10월 21일]<계미> 맑다.
장흥부사(황세득)을 헌관(獻官)으로 삼고, 흥양현감(배흥립)을 전 사(典祀)로 삼아서 초아흐레 날 둑제를 지내려고 입재(入齋) 시켰다. 첨지 김경로가 여기 왔다.

9월 초9일 [양력 10월 22일]<갑신> 맑다. 저물녘에 비가 오다가 그쳤다.
여러 장수들이 활을 쏘았다. 삼도가 아울러 모였는데, 원균(元均) 수사는 병으로 오지 않았다. 첨지 김경로도 같이 쏘고서 경상으로 돌아가 잤다.

9월 초10일 [양력 10월 23일]<을유> 맑고 바람도 잔잔하다.
사도첨사가 활쏘기 대회를 열었는데, 우수사도 모였다. 김경숙(金 敬叔)이 창신도로 되돌아갔다.

9월 11일 [양력 10월 24일]<병술> 맑다.
일찌기 수루 위로 나갔다. 남평(南平)의 색리와 순천의 격군으 로서 세 번이나 양식을 훔친 자를 처형했다.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저녁나절에 충청 수사가 와서 봤다. 소비포권관은 달빛을 따라 본포로 돌아갔는데, 까닭은 원 수사가 몹시 모함하려는 때문이었다.

9월 12일 [양력 10월 25일]<정해> 맑다.
일찌기 김암(金岩)이 방에 왔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의 종놈 이 돌아가는 길에 편지답장을 써 보냈다. 우수사?충청수사가 함께 왔다. 장흥부사가 술을 내어 함께 이야기하다가 몹시 취해서 헤어졌다.

9월 13일 [양력 10월 26일]<무자> 맑고 따뜻하다.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침에 충 청우후가 와서 봤다. 또 조도어사 윤경립(尹敬立)의 장계 두 통 을 보니, 하나는 진도군수를 파면해 달라는 것이고, 하나는 수륙 양군이 서로 침해하지 말라는 것과 수령들을 전쟁에 보내지 말라 는 것이니, 그 뜻은 자못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저녁 에 하천수가 장계 회답과 홍패(과거 합격자 명단) 아흔일곱 장을 가지고 왔다. 영의정 편지도 가져 왔다.

9월 14일 [양력 10월 27일]<기축> 맑다.
흥양현감이 술을 바쳤다. 우수사?충청수사가 같이 활을 쏘았다. 방답첨사가 공사례를 했다.

9월 15일 [양력 10월 28일]<경인> 맑다.
일찌기 충청수사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는 약속을 하고도 병을 핑게하니 한탄스럽다. 새로 합격한 사람들에게 홍패를 나누어 주었다. 남원 도병방과 향소 등을 잡아 가두었다. 충청우후(원유남)가 본도로 돌아갔다. 종 경(京)이 들어왔다.

9월 16일 [양력 10월 29일]<신묘> 맑다.
충청수사 및 순천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밤 꿈에 아들을 보았는데, 경의 어미가 아들을 낳을 징조다.

9월 17일 [양력 10월 30일]<임진> 맑고 따뜻하다.
충청수사?순천부사?사도첨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우후 이몽 구가 둔전에 마당질하는 일로 나갔다. 효대(孝代) 등이 나갔다.

9월 18일 [양력 10월 31일]<계사> 맑고 지나치도록 따뜻하다.
충청수사 및 흥양현감과 함께 종일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저물 무렵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왔다. 이수원(李壽元) 및 담화(曇花)가 들어왔다. 복춘(福春)이 들어왔다. 이 날 밤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을 못 이루었다.

9월 19일 [양력 11월 1일]<갑오> 종일 비가 내렸다.
흥양현감?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해남현감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흥양현감?순천부사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9월 20일 [양력 11월 2일]<을미> 새벽에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비가 잠깐 들었다.
홀로 앉아 간 밤의 꿈을 기억해 봤다. 꿈에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 오다가 눈 앞에 와서 주춤 섰는데,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우뚝 서서 끝내 그것을 구경하니,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다. 충청수사와 흥양현감이 왔다. 거제현령도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체찰사의 공문에 수군에게 군량을 받아 들여 계속 대라고 했다. 잡아 가두었던 친족과 이웃을 다 풀어 주었다고 했다.

9월 21일 [양력 11월 3일]<병신> 맑다.
아침에 활터정자에 나가 앉아 공문을 처리하여 주고, 저녁나절 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순천부사?충청수사가 종일 이야기 했다. 어둘 무렵 여러 장수들이 뛰어넘기를 하게 하고, 또 사병 들로 하여금 씨름을 하게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9월 22일 [양력 11월 4일]<정유>
아침에 활터 정자에 앉았다. 우수사?장흥부사?경상우후가 와 서 명령을 듣고서 갔다. 원수의 비밀서류가 왔는데, 27일에는 꼭 군사들을 출동시키라는 것이었다.

9월 23일 [양력 11월 5일]<무술> 맑으나 바람이 사나왔다.
아침에 활터 정자에 올라가 공문을 써 보냈다. 경상수사 원균 (元均)이 군사기밀을 논의하고 갔다. 낙안의 군사 열한 명과 방답 의 수군 마흔다섯 명을 점고했다. 고성 사람들이 연명으로 하소연하였다. 진주 강운(姜雲)의 죄를 다스렸다. 보성에서 데려온 소관(召官) 황천석(黃千錫)을 끝까지 추궁했다. 광주에 가두었던 창평현 색리 김의동(金義同)을 사형하 라는 전령을 내보냈다. 저녁에 충청수사와 마량첨사가 와서 봤다. 깊은 방이 들어서야 돌아갔다. 초저녁에 복춘(復春)이 와서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다가 닭이 운 뒤에야 돌아갔다.

9월 24일 [양력 11월 6일]<기해> 맑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대청에 앉아서 공무를 봤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충청수 사와 같이 먹었다. 오늘 더그레(號衣: 각 영문의 군사와 馬上才의 軍이 입는 세 자 락 난 웃옷)을 나누는데, 전라좌도는 누른 옷 아홉 벌, 전라우 도는 붉은 옷 열 벌, 경상도에는 검은 옷 네 벌이었다.

9월 25일 [양력 11월 7일]<경자> 맑으며, 바람이 조금 잤다.
첨지 김경로는 군사 일흔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저녁에 첨지 박종남(朴宗男)은 군사 육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조붕(趙 鵬)도 와서 같이 자면서 밤에 모여 앉아 이야기했다.

9월 26일 [양력 11월 8일]<신축> 맑다.
새벽에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이 견내량(거제시 사 등면 덕호리)에 이르렀으므로 박춘양(朴春陽)을 보내어 건너온 까 닭을 물었더니, 수군과 합세할 일로 원수(권율)가 전령하였다고 하였다.

9월 27일 [양력 11월 9일]<임인> 아침에 맑더니 저물녘에 잠깐 비가 내렸다.
아침에 출항하여 포구에 나가자 여러 배들도 일제히 출항하여 적 도(거제시 둔덕면) 앞바다에 대었다. 그러니 첨지 곽재우(郭再祐) ?충용 김덕령(金德齡)?별장 한명련(韓明璉)?주몽룡(朱夢龍) 등 이 와서 약속하고 각각 원하는 곳으로 갈라 보냈다. 저녁에 병사 선거이(宣居怡)가 배에 이르렀으므로 본영의 배를 타게 했다. 저물무렵 체찰사의 군관 이천문(李天文)? 림득의(林得義)? 이홍사(李弘嗣)? 이충길(李忠吉)? 강중룡(姜仲龍)? 최여해(崔汝諧)? 한덕비(韓德備)? 이안겸(李安謙)? 박진남(朴振男) 등이 왔다. 밤에 잠깐 비가 내렸다.

9월 28일 [양력 11월 10일]<계묘> 흐리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치는 일로 길흉을 점쳤 더니, 길한 것이 많았다. 첫 점은 활이 살을 얻은 것과 같고, 다 시 치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바람이 고르지 않았 다. 흉도 안바다에 진을 치고 잤다.

9월 29일 [양력 11월 11일]<갑진> 맑다.
출항하여 장문포(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앞바다로 마구 쳐들어 가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는다. 누각을 높이 양쪽 봉우리에는 진지를 쌓고서 항전하러 나오지 않는다. 선봉의 적선 두 척을 무찔렀더니, 뭍으로 내려가 도망가버렸다. 빈 배들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칠천량에서 밤을 지냈다.


갑오년 10월 (1594년 10월)

10월 초1일 [양력 11월 12일]<을사>
새벽에 출항하여 장문포에 이르렀다. 경상우수사와 잔라우수사가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충청수사와 및 선봉의 여러 장수들과 함께 곧장 영등포로 들어가니, 흉악한 적들은 바닷가에 배를 대어 놓고 한 놈도 나와서 항전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에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와서, 사도의 2호선이 뭍에 배를 매려할 즈음에, 적의 작은 배가 곧장 들어와 불을 던지는데, 불은 일어나지 않고 꺼졌지만, 매우 분통하다. 우수사의 군관 및 경상우수사의 군관은 그들의 실수를 간단히 꾸짖었지만, 사도의 군관에게는 그 죄를 무겁게 시행했다. 밤 열시쯤에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10월 초2일 [양력 11월 13일]<병오> 맑다.
다만 선봉선 서른 척으로 하여금 장문포의 적정을 가서 보고 오게 했다.

10월 초3일 [양력 11월 14일]<정미> 맑다.

몸소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일찌감치 장문포로 가서 종일 싸우 려는데, 적의 무리들은 두려워 항전하러 나오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10월 초4일 [양력 11월 15일]<무신> 맑다.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약속하고서, 군사 수 백 명을 뽑아 뭍에 내려, 산을 오르게 하고, 선봉을 먼저 장문포 로 보내어 들락날락 하면서 싸움을 걸게 했다. 저녁나절에 중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의 무리들은 갈팡 질팡하며 기세를 잃고 동서로 바삐 달아났다. 육군은 적이 칼을 휘드르는 것을 보고는 곧 배로 내려왔다. 돌아와 칠천량에 진을 쳤다. 선전관 이계명(李繼命)이 표신과 선유교서를 가지고 왔다. 안에는 임금님이 하사하신 잘(貂皮: 담비의 털가죽)이 있었다.

10월 초5일 [양력 11월 16일]<기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계초고를 초잡았다.

10월 초6일 [양력 11월 17일]<경술> 맑다.
일찍 선봉으로 하여금 장문포 적의 소굴로 보내었더니, 왜놈들이 패문을 써서 땅에 꽂았는데, 그 글은, "일본은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할 것이니, 서로 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놈 한 명이 칠 천도 산기스락에서 와서 투항하고자 하므로, 곤양군수가 잡아 배 에 싣고 왔다. 물어보니, 영등포 왜적이었다. 흉도로 진을 옮겼다.

10월 초7일 [양력 11월 18일]<신해> 맑다.
병사 선거이(宣居怡)?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이 나 갔다. 띠풀 백여든세동을 베었다.

10월 초8일 [양력 11월 19일]<임자> 맑고 바람조차 없다.
아침에 출항하여 장문포 적의 소굴에 이르니, 적들은 여전히 나 오지 않았다. 군대의 위세만 보인 뒤에 흉도로 되돌아왔다가 그 대로 출항하여 한산도에 일제히 이르니, 밤은 벌써 자정이 되 었다. 흉도에서 띠풀 이백예순 동을 베었다.

10월 초9일 [양력 11월 20일]<계축> 맑다.
아침에 정자로 내려 오니 첨지 김경로?첨지 박종남?조방장 김응함?조방장 한명달(韓命達)?진주목사 배설(裵楔)?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이 아울러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김과 박은 종 일 활을 쏘았다. 박자윤(朴子胤)은 마룻방에서 자고 춘복(春福)이 함께 잤다. 김성숙(金惺叔)은 배로 내려가 잤다. 남해현령?하 동현감?사천현감?고성현령이 아뢰고 돌아갔다.

10월 10일 [양력 11월 21일]<갑인> 맑다.
아침에 나가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박자윤(朴子胤)과 곤양군수는 그대로 머물고 떠나지 않았으며, 흥양현감?보성군수?장흥부 사는 아뢰고 돌아갔다. 이 날 밤 두 가지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울(蔚)과 변존서(卞存緖)?유□(有憲?) 및 정립(廷立)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10월 11일 [양력 11월 22일]<을묘> 맑다.
아침에 몸이 불편했다. 아침에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공문을 처리하였다. 일찍 잘 방으로 들어갔다.

10월 12일 [양력 11월 23일]<병진> 맑다.
아침에 장계초고를 수정하였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여기에 왔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적을 토벌한 일을 스스 로 직접 장계를 올리고자 했다. 그래서 공문을 만들어 와서 주었다. 비변사의 공문에 따르면, 원수가 쥐가죽으로 만든 남바위 (耳掩: 귀가리개)를 전라좌도에 열다섯 개, 전라우도에 열 개, 경 상도에 열 개, 충청도에 다섯 개를 나누어 보냈다.

10월13일 [양력11월24일]<정사>맑다.
아침에 아전을 불러 장계초안을 지었다. 저녁나절에 충청수사를 내보냈다. 본도우수사가 충청수사를 와서 보고도 나를 보지 않고 돌아갔다. 술이 몹시 취한 까닭이었다. 종사관(정경달)이 벌써 사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천 1호선을 내어 보냈다.

10월 14일 [양력 11월 25일]<무오> 맑다.
새벽꿈에, 왜적들이 항복하여 육혈포(六穴砲) 다섯 자루를 바치고, 환도도 바치며, 말을 전하는 자는 김서신(金書信)이라고 하는 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10월 15일 [양력 11월 26일]<기미> 맑다.
박춘양(朴春陽)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10월 16일 [양력 11월 27일]<경신> 맑다.
순무사 서성이 해질 무렵에 이곳에 왔다. 우수사?원균(元均) 수사와 함께 같은 이야기를 했다.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10월 17일 [양력 11월 28일]<신유> 맑다.
아침에 사람을 어사가 있는 곳으로 보냈더니, 아침을 먹은 뒤에 당도한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왔다. 어사도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경상수사 원균(元均)의 속이 는 말을 많이 했다. 몹시도 해괴하다. 원균(元均)도 왔다. 그 흉악 하고도 패악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아침에 종사관이 들어왔다.

10월 18일 [양력 11월 29일]<임술> 맑다.
아침에 바람이 세게 불다가 저녁나절에 그쳤다. 어사에게로 갔더 니, 이미 원 수사에게 갔다고 했다. 그곳에 갔더니 조금 있다가 술이 나왔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종사관이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고서, 서로 인사했다.

10월 19일 [양력 11월 30일]<계해>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대청으로 나가 앉았다가 저녁나절에 돌아와 수루의 방으로 들어 갔다. 어사가 우수사한테 가서 종일 술마시며 이야기했다고 하였 다. 아침에 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저녁에 종 억지(億只) 등을 좨쳐서 왔다. 박언춘(朴彦春)도 왔다.

10월 20일 [양력 12월 1일]<갑자> 아침에 흐렸다.
저녁나절에 순무어사가 나갔다. 작별한 뒤에 대청으로 올라 앉 았있으니 우수사가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공문 작성 때문에 나갔다고 생각된다. 밤 열시쯤에 비가 조금 내렸다.

10월 21일 [양력 12월 2일]<을축> 맑다가 조금 흐렸다.
종사관?우후?발포만호가 나갔다. 투항해 온 왜놈 세 명이 원균 (元均) 수사에게서 왔기로 문초하였다. 영등포만호가 왔다가 밤 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그에게 어린 아이가 있다고 했다. 데려 오도록 일러 보냈다.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10월 22일 [양력 12월 3일]<병인> 흐렸다.
의능(宜能)?이적(李迪)이 나갔다. 초저녁에 영등포만호가 그 아이를 데리고 왔다. 심부름이나 시키고자 머물러 두었다.

10월 23일 [양력 12월 4일]<정묘> 맑다.
그 아이가 아프다고 했다. 종 억(億)의 죄와 애환(愛還)?정말동 (丁唜同)의 죄를 다스렸다. 저녁에 그 아이를 본디 있던 곳으로 보냈다.

10월 24일 [양력 12월 5일]<무진> 맑다.
우우후를 불러서 활을 쏘았다. 금갑도만호도 왔다.

10월 25일 [양력 12월 6일]<기사> 맑으며 하늬바람이 세게 일었다.
저녁나절에 그쳤다. 몸이 불편하여 방을 나가지 않았다. 남도 포만호(강응표)?거제현령이 왔다. 영등포만호(조계종)도 와서 한참 이야기하는 적에, 전 낙안군수 첨지 신호(申浩)가 와서, 체찰사(윤두수)의 공문?목화?벙거지 및 정목(正木) 한 동을 가지고 왔다. 그와 같이 이야기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순천부사 권준이 잡혀 갈 때에도 보러 왔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10월 26일 [양력 12월 7일]<경오> 맑다.
빙부(方震)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첨지 신호(申浩)에 게서 들으니, 김상용(金尙容)이 이랑(吏郞)이 되어 서울로 갈 때 에 남원부내에 들어가 자면서 체찰사를 보지 않고 갔다고 했다. 시절이 이러하니 참으로 해괴하다. 체찰사가 밤에 순변사의 숙소 로 갔다가밤이 깊어서 돌아와 그의 숙소로 왔다고 했다. 체모가 이럴 수가 있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종 한경(漢京)이 본영으로 갔다. 오후 여섯 시께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0월 27일 [양력 12월 8일]<신미>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미조항첨사(성윤문)가 와서 교서에 숙배하고, 그대로 그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뢰고 돌아갔다.

10월 28일 [양력 12월 9일]<임신> 맑다.
대청에 앉아서 공무를 봤다. 금갑만호?이진만호가 와서 봤다. 식사를 한 뒤에 우우후?경상우후가 와서 목화를 받아 갔다. 저 물 무렵에 잠자는 방에 들어갔다.

10월 29일 [양력 12월 10일]<계유> 맑다.
하늬바람이 몹시도 살을 에 듯이 차겁다.

10월 30일 [양력 12월 11일]<갑술> 맑다.
적을 수색하여 토벌하라고 군사를 들여 보내고 싶었으나, 경상도엔 전선이 없어서 다른 배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자정에 아들 회가 들어왔다.

갑오년 11월 (1594년 11월)

11월 초1일 [양력 12월 12일]<을해>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11월 초2일 [양력 12월 13일]<병자> 맑다.
전라좌도에서는 사도첨사(김완)를, 전라우도에서는 우후 이정충을, 경상도에서는 미조항첨사 성윤문(成允文)을 장수로 정하여 적을 수색?토벌하게 들여 보냈다.

11월 초3일 [양력 12월 14일]<정축> 맑다.
김천석(金天碩)이 비변사의 공문을 가지고 와서 투항해 온 야에몬(也汝文) 등 세 명을 데리고 진에 이르렀다. 수색토벌하러 나갔다 오니 벌써 밤 열 시쯤이었다.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11월 초4일 [양력 12월 15일]<무인> 맑다.
투항해 온 왜놈들의 사정을 들었다. 전문(箋文)을 가지고 갈 유생이 들어왔다.

11월 초5일 [양력 12월 16일]<기묘>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송한련(宋漢連)이 대구 열 마리를 잡아왔다. 순변사(이일)가 그의 군관으로 하여금 투항해 온 왜놈 열세 명을 잡아 보냈다. 밤새도록 비가 많이 내렸다.

11월 초6일 [양력 12월 17일]<경진> 흐리고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이정충(李廷忠)도 왔다. 첨지 신호(申浩)와 함께 이야기했다. 송희립(宋希立)이 사냥하러 나갔다.

11월 초7일 [양력 12월 18일]<신사> 저녁나절에 개었다.
아침에 대청으로 나갔다. 항복해온 왜놈 열일곱 놈을 남해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금갑도만호?사도첨사?여도만호?영등포 만호가 아울러 왔다. 이 날 오정때에 첨지 신호는 원수가 되 돌아와서는 수군에 머물러 있다더라고 보고했다.

11월 초8일 [양력 12월 19일]<임오> 새벽에 잠깐 비가 뿌리더니 저녁나절에 개었다.
배 만들 목재를 운반해 왔다. 새벽 꿈에, 영의정이 이상한 모양을 차려 입었고, 나는 관을 벗은 채 함께 민종각(閔宗慤)의 집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깨었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11월 초9일 [양력 12월 20일]<계미> 맑으나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11월 10일 [양력 12월 21일]<갑신> 맑다.
이희남(李喜男)이 들어왔다. 조카 뇌도 영문에 왔다고 했다.

11월 11일 [양력 12월 22일]<을유>
동짓날이라 11월중임에도 새벽에 망궐례를 드린 뒤에 군사들에게 죽을 먹였다. 우우후와 정담수(鄭聃壽)가 와서 보고나서 돌아갔다.

11월 12일 [양력 12월 23일]<병술> 맑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순천 색리 정승서(鄭承緖)와 역자가 남원에 서 폐해를 끼쳤기로 벌주었다. 첨지 신호에게 작별의 술을 대접 했다. 또 견내량에서 경계선을 넘어 고기를 잡은 사람 스무네 명을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11월 13일 [양력 12월 24일]<정해> 맑다.
바람이 차차 자니 날도 따뜻했다. 첨지 신호와 아들 회( )가 이 희남(李喜男)?김숙현(金叔賢)과 함께 본영으로 갔다. 종 한경(漢 京)도 은진 김정휘(金廷輝) 집에 다녀 오게 일렀다. 장계도 내보 냈다. 원수가 방어사의 군관으로 하여금 투항해 온 왜놈 열네 명을 데리고 왔다. 저녁에 윤련(尹連)이 그 누이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망발이 많 다. 우습다. 버리고자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까닭이 있다. 버려진 세 아이가 마침내 의지할 곳이 없게 된 때문이다. 열닷샛 날은 아버지 제삿날이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밤에 달빛이 한 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11월 14일 [양력 12월 25일]<무자> 맑다.
아침에 우병사(김응서)가 투항해 온 왜놈 일곱 명을 자기 군관을 시켜 데리고 왔다. 그래서 곧 남해현으로 보냈다. 이함(李 )이 남해에서 왔다.

11월 15일 [양력 12월 26일]<기축> 맑고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음양의 조화가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그야말로 재난이다. 오 늘은 아버님의 제삿날이므로 나가지 않고, 홀로 앉아 있으니, 슬 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저물무렵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순천 의 교생이 교서의 등본을 가져 왔다. 또 아들 울(蔚) 등의 편지 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상주의 사촌 누이 편지와 그 아들 윤엽(尹曄)이 본영에 이르렀다.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 읽어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영의정의 편지도 왔다.

11월 16일 [양력 12월 27일]<경인> 맑으나, 바람기가 제법 쌀쌀하다.
밥을 먹은 뒤에 대청에 앉았다. 우우후?여도만호?회령포만호 ?사도첨사?녹도만호?금갑도만호?영등포만호?전 어란진만호 ?정담수 등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는 날씨가 무척 따뜻해졌다.

11월 17일 [양력 12월 28일]<신묘> 맑고 따뜻하다.
서리가 눈처럼 쌓였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나절에 산들바람이 종일 불었다. 밤 열 시쯤에 조카 뇌와 아들 울 (蔚)이 들어왔다. 한밤에 미친 듯 바람에 세게 불었다.

11월 18일 [양력 12월 29일]<임진> 맑다.
바람이 저녁내 세게 불더니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11월 19일 [양력 12월 30일]<계사> 맑다.
바람이 세게 불며,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1월 20일 [양력 12월 31일]<갑오> 맑다.
아침에 바람이 잤다. 대청으로 나갔다. 조금 있으니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바람이 밤까지 세게 불었다.

11월 21일 [양력 1월 1일]<을미> 맑다.
아침에 바람이 잤다. 조카 뇌가 나갔다. 그리고 이설(李渫) 이 포폄하는 장계를 가지고 갔다. 종 금선(金善)?우년(禹年)?이 향(離鄕)?수석(水石)?행보(行寶) 등도 나갔다. 김교성(金敎誠)? 신경황(申景潢)이 나갔다. 남도포만호?녹도만호가 나갔다.

11월 22일 [양력 1월 2일]<병신> 맑다.
아침에 회령포로 나갔다. 날씨는 무척 따뜻했다. 우우후(李廷忠) 와 정담수(鄭聃壽)가 와서 봤다. 활 다섯 순을 쏘았다. 왜놈의 옷감으로 무명 열 필을 가져 갔다.

11월 23일 [양력 1월 3일]<정유> 맑고 따뜻했다.
흥양 군량과 순천 군량 등을 받아들였다. 저녁나절에 이경복 (李景福)이 자기 소실(妾)과 함께 들어 왔다. 순변사 등이 비난을 받는다고 하였다.

11월 24일 [양력 1월 4일]<무술> 맑다.
따사롭기가 확실히 봄날 같다. 대청으로 나가서 공문을 적어 보냈다.

11월 25일 [양력 1월 5일]<기해> 흐렸다.
새벽꿈에, 이일(李鎰: 순변사)과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며, "이같 이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날을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뱃심 좋게 음탕한 계집을 끼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밖 여염집에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또 수군 각고을과 포구에 배정된 육전의 병기를 독촉하기에만 겨를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치요? 라고 하니, 순변사가 말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하품하며 기지개켜다 깨고 보니 한 바탕 꿈이었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에 앉아 공문을 적어 주었다. 조금 뒤에 우우후와 금갑도만호가 왔다. 피리를 듣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11월 26일 [양력 1월 6일]<경자> 소한. 맑고 따뜻하다.
방에 앉아 있으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이 날 메주를 열 말을 쑤었다.

11월 27일 [양력 1월 7일]<신축> 맑다.
밥을 먹은 뒤에 대청으로 나가 앉아 있다가 좌도?우도로 갈라 보낸 투항해 온 왜놈들을 모조리 와서 모았다. 그래서 총쏘 는 연습을 시켰다. 우우후?거제현령?사도첨사?여도만호가 아울러 왔다.

11월 28일 [양력 1월 8일]<임인> 맑다.

(** 11월 28일 맨 뒷장(제3책 52장)에 나오는 자료로서 13 장에 걸쳐 적혀 있다. 먼저 그 첫장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망하기는 어렵습니다.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 같은 인재 없으니, 거듭하여 배들을 덮어 그로 하여금 안전치 못합니다. 안으로는 방책을 세울만 한 기둥 재목 같은 인재 없으니, 기계를 고치고 다루며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였습니다. 나를 알고 저를 알면 백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저를 모르 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저도 모르면 싸워봐야 반드시 지게 됩니다. 이것은 만고의 바뀌지 않는 진리입니다. (** 이 다음 장부터는 글쓴 내용이 많이 고쳐 적혀 있다.) 하나, 영남의 좌우 연해에 많은 적들이 가득하고, 저돌적인 침범이 근심됨이 반드시 아침 저녁 -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킨지 3년이나 되어 공사간에 재물이 다 없어지고, 학질 등 의 병이 극성이어서 사망으로 거의 다 없어짐이 육지나 바다가 똑 같이 되버렸습니다. 대총 유정은 이미 군사를 철수시켜 고국으로 되돌아가니 위급한 세력의 급박함이 호흡하는 순간에 달려 있어 온갖 생각을 해도 지킬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또 하나, 영남의 좌우 연해에 많은 적들이 가득하고, 저돌적인 침범이 근심됨이 반드시 아침 저녁 -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군사 를 일으킨지 3년이나 되어 공사간에 재물이 다 없어지고, 학질 등 의 병이 극성이어서 사망으로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호남의 한 도에 의뢰하였으나, 호남에도 큰 난리가 일어나, 전쟁으로 화재를 입은 땅이 더욱 심하며, 이때부터 닥칠 앞 군량과 군사를 의뢰할 곳이 전혀 없습니다. 날마다 줄어드니, 급히 모음만 같지 못하고, 곳곳의 잡색 군사 육로의 요해지를 끊어 막거나 혹 수군을 합세하여 곧바로 적진에 쳐들어 갔습니다. 하나, 영남의 우도의 적세는 전과 같이 별로 다른 흔적이 없고, 다만 다시 그 형상을 보니, 굶은 빛이 많이 있는데, 그 뜻은 반드시 가을 곡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으며, 우리 나라가 미리 방어 해 놓고 있어야 하는 데 극히 두려워하는 자는 수군이요, 수군으로서 전쟁에 임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모이기도 하고 흩 어지기도 하면서 옮겨 다니며 얻어 먹는 무리도 가난하게 되었 습니다. 그러나 군대가 양식을 보지 못하여 질병이 또 일고, 사망이 서로 줄을 이었으니, 여러 장수가 이에 갖추고자 공문을 원수 (元帥)와 관찰사에게 돌리고 계략도 베풀 명령도 없습니다. 온갖 생각을 해보지만, 방어하여 지킬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수군의 한 가지 일이 세력이 파산되어 이 한 몸 만번 죽음도 달게 받을진대, 이 나라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수군은 사소한 군량일지라도 연 해의 여러 고을에 쌓여 있어도 관찰사와 원수가 군관을 파견하여 곳간을 뒤지어 조사해 실어 가도 저는 다른 도 먼 바다에 있으니 아무런 조치를 하지 못하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만약 달리 수군을 보내어 어사가 모든 수군의 일을 구 제할 수 있을 것 같아 망령되이 장계합니다. 그러나 만약 옳지 않다면 영남의 순무어사가 명령을 한 날에 겸하여 불러 모을 군 사는 오로지 물러만 갈 것입니다. 하나, 순변사 이일(李鎰) 그 집에 있어 적들이 가까운 곳에 있 다는 것 듣고 일시에 달려와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해의 수군의 원 소속 병사들이 일시의 편안이 거의 내버려 두게 되어 그 고을에서 독려한다면 순변사가 연해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잡아 오지 않는 것이 일일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나, 정경달(丁景達)이 종사관이 되어 다음을 다하여 감독하고 공문에, 도 안의 일이 본디부터 관찰사가 주재하고 통제하여 둔 전치는 일을 검사받게 하는 것은 실로 그 본디 임무가 아닙니다. 하물며 다른 도의 바다에 진을 치고 멀이 있으니 이 또한 검사하면서 지을 수도 없고 이 뒤로는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 함양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민망함니다. 추수할 때까지만이라 도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검사하도록 장계합니다. 하나, 파총 장홍유(張鴻儒)가 이 달 17일 진에 도착하여 우리 수군의 위세를 보고 탄복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내년 봄 산동?천진 등에서 비호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곧바로 제주도로 경유해서 한 산도로 와서 합세하여 함께 적들을 토벌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비록 깊이 믿을 건 못되지만, 그 정황은 익히 보아온즉 빈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 3일 머물러 있으니, 송(宋)?이(李)의 옹폐 (壅蔽: 어른의 총명을 막아서 가림)함이 많이 유감스럽습니다.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제우치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긴 한숨 거듭하니 눈물만 주룩주룩 흐르는구나. 나라는 어지럽건만 바로잡을 이 그 누구뇨. 몇 해를 배를 타며 해놓은 일들도 홀로 생각하니 임만 속이고. 수십년 뱃전에서 해놓은 일들도 이제와 돌아보니 임만 속였네.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긴 한숨 거듭하니 눈물만 주룩주룩 흐르는구나.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이 아무도 없네.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제우치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마음 살을 에는 양 쓰린 이 가슴 나라가 태평한지 200년이요 문물의 화려함은 3000 이라네. 몇 해를 원수 막이 꾀 뿐인걸. 앞에서 나온 것과 본영의 것을 가져와 모으니, 하얀 접는 부채(白 貼扇) 358 자루, 보통보다 달리 만든 부채(別扇) 453 자루에서 7월 10일 순변사에게 15 자루를 보냈다. 기름친 부채(油扇) 590 자루에 서 7월 10일 순변사에게 10 자루를 보냈다. 옻칠한 부채(漆扇) 58 자루에서 5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내고, 일반부채(扇扇) 50 자루에 서 10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내고, 갈모(笠帽) 40개, 손칼(刀子) 323 자루, 육장부(六丈付) 2개, 들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壯油紙) 5 권, 기름 먹인 종이(注油紙) 5 권을 본영으로 가져 왔다. 들기름 먹인 종이(壯油紙)와 기름 먹인 종이(注油紙)는 앞의 것과 같다. 수은을 빼낸 금(火金) 70은 이미 명나라 장수에게 주었다. 흥양에서 대대로 사는 종 매마(每馬)? 대준(大俊)? 영세(永世)? 방죽(方竹)?영로(永老)가 큰 대(大竹) 23개, 중치 대(中竹) 23개를 7 월 4일에 만들려고 옥지(玉只)가 받아 갔다. 크고 작은 대 93개를 7월 27일 옥지(玉只)가 만들려고 받아 갔다. 큰 대화살(大竹箭) 65 개를 만들어 바쳤다. 중치 대 화살(中竹箭) 40개와 22개를 9월 5일 에 무재(武才)가 바쳤다. 6월 6일 삶은 대(熟竹)로서 약간 무거운 것이 50개, 상품(上品竹) 11개, 약간 가벼운 대(輕竹) 53개가 좋은 품질이다. 가볍고 작은 대 (輕小竹) 48개에서 30개를 충청병사에게 보냈다. 큰 대 78개를 군 관 등에게 주었다. 다음 중치 대(次中竹) 44개를 우수사에게 보냈 다. 좋지 않은 대(下下竹)는 26개다. 본영(여수)의 전선 7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5 척을 정비하여 왔 고, 전에 만든 2 척에서 의병에 1 척, 개조한 것이 1 척이다. 순천에는 10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 1 척 방답의 배 5 척이다. 흥양에는 10 척에서 그 현(縣)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2 척, 본영의 배 1 척, 사도의 배 5 척이다. 낙안에는 3 척에서 그 군(郡)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가 1 척이다. 광양에는 4 척에서 그 현(縣)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가 1 척이다. 보성에는 8 척에서 그 군(郡)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2 척, 녹도가 2 척, 발포가 2 척이 다. 방답에는 4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4 척이다. 여도에는 3 척에 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발포에는 3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사도에는 4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4 척이다. 녹도에는 3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도양장 논의 벼가 20섬 13말 5되 이고 아울러서 13섬 14말 8되와 콩 1섬 7말을 지었다. 1594년 1월 21일에 싸움에 나갈 수군(奔赴水軍) 21 명을 내 보고, 팔결군(八結軍) 16 명을 도로 보냈다. 5월 3일 곳간 뒤지어 조사하 니, 군량이 349섬 14말 4□, 나무를 팔아서 들인 쌀 8십□□ 모두 432섬 14말 4되에서 지금 보내온 것이 65섬 12말 4되가 있다. 명나라 장수 장홍유(張鴻儒)의 자(字)는 중문(仲文)이고 호는 수천 (秀川)이며 □강성 영파부(折江省寧波府)에 살며, 머슴은 주증(周 曾)?구덕(丘德)이고, 같이 온 기패관은 장도관(張覩 )?반준(潘俊) ?주봉(周鳳)이다.

12월기록에없음


을미년 1월 (1595년 1월)

1월 초1일 [양력 2월 9일]<갑술> 맑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라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흐르는 줄 도 몰랐다. 또 나이 여든이나 되신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에 여러 장수들과 여러 색리?군사들이 와서 해가 바뀐 세배를 했다. 원전(元琠)?윤언심(尹彦諶)? 고경운(高景雲) 등이 와서 봤다. 여러 색리와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1월 초2일 [양력 2월 10일]<을해> 맑다.
나라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 祭日)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장계 초고를 수정했다.

1월 초3일 [양력 2월 11일]<병자> 맑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1월 초4일 [양력 2월 12일]<정축>맑다.
우우후?거제현령?금갑도만호?소비포권관?여도만호 등이 와서 봤다.

1월 초5일 [양력 2월 13일]<무인> 맑다.
공문을 결재했다. 조카 봉과 아들 울(蔚)이 들어와서 어머니 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기쁘고 다행이다. 밤새도록 온갖 회포 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1월 초6일 [양력 2월 14일]<기묘> 맑다.
어응린(魚應麟)과 고성현감(趙應道))이 왔다.

1월 초7일 [양력 2월 15일]<경진> 맑다.
흥양현감(배흥립)?방언순(方彦淳)과 함께 이야기했다. 남해의 투항해 온 왜놈 야에몬(也汝文) 등이 와서 현신했다.

1월 초8일 [양력 2월 16일]<신사>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광양현감(송전)의 공식적인 인사를 받은 뒤에 전령에게 기한을 어긴 죄로 곤장을 쳤다.

1월 초9일 [양력 2월 17일]<임오>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야에몬(也汝文) 등을 남해로 돌려 보냈다.

1월 초10일 [양력 2월 18일]<계미>
순천부사 박진(朴晉)이 교서에 숙배했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선창에 왔다고 했다. 불러 들여 같이 이야기했다. 순천부사?우 우후?흥양현감?광양현감?웅천현감?고성현감?거제현령도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1월 11일 [양력 2월 19일]<갑신> 우박이 내리고 샛바람이 불었다.
식사를 한 뒤에 순천부사?흥양현감?고성현감?웅천현감?영등 포만호가 와서 이야기했다. 고성현감은 새 배를 독촉하여 만드는 일로 아뢰고 돌아갔다.

1월 12일 [양력 2월 20일]<을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가 아뢰고 돌아갔다. 영남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봤다.

1월 13일 [양력 2월 21일]<병술> 아침에 맑더니 저녁에 비가 내렸다.
박치공이 왔다.

1월 14일 [양력 2월 22일]<정해>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불편하여 누워서 끙끙 앓았다. 영등포만호?사천현감?여도 만호가 와서 봤다.

1월 15일 [양력 2월 23일]<무자> 맑다.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을 불렀더니, 이정충(李廷忠)은 발을 헛디디어 물에 빠져 한참이나 헤엄치는 것을 간신히 건져냈다. 그를 불러서 위로했다.

1월 16일 [양력 2월 24일]<기축> 맑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17일 [양력 2월 25일]<경인> 맑고 따뜻하며 바람도 없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우우후?소비포권관?거제현령?미 조항첨사가 아울러 와서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

1월 18일 [양력 2월 26일]<신묘> 흐렸다.
공문을 결재했다. 저녁나절에 활 열 순을 쏘고서 헤어졌다.

1월 19일 [양력 2월 27일]<임진> 맑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옥구의 피란민 이원진(李元軫)이 왔 다. 장흥부사?낙안군수?발포만호가 들어왔다. 기한을 어긴 죄를 곤장쳤다. 조금 있다가 여도 전선에서 잘못으로 불을 내어, 광양 ?순천?녹도 전선 네 척에 불길이 번져 탔다. 통탄함을 이길 수 없다.

1월 20일 [양력 2월 28일]<계사> 맑다.
아우 여필과 조카 해( )가 이응복(李應福)과 함께 나갔다. 아들 울(蔚)은 조카 분(芬)과 함께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니 다행이다.

1월 21일 [양력 3월 1일]<갑오>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이경명(李景明)과 함깨 장기를 두었다. 장흥부사가 와서 봤다. 그 편에 들으니, 순변사 이일(李鎰)의 처사가 극히 형편없고 나를 해 치려고 무척 애쓴다고 하니, 참으로 우습다.

1월 22일 [양력 3월 2일]<을미> 맑으나,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원수의 군관 이태수(李台壽)가 전령을 가지고 왔다. 여러 장수들이 왔는지 안 왔는지를 알고 간다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다락위에 올라가 잘못으로 불을 낸 여러 장수들과 색리들에게 곤장을 쳤다. 초저녁에 금갑도만호의 옆집에서 잘못하여 불을내어 다타버렸다.

1월 23일 [양력 3월 3일]<병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흥부사?우후?흥양현감이 와서 이야기하고 날이 저물어 돌아 갔다.

1월 24일 [양력 3월 4일]<정유>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원진(李元軫)을 배웅했다.

1월 25일 [양력 3월 5일]<무술> 맑다.
장흥부사?흥양현감?우후?영등포만호?거제현령이 와서 봤다.

1월 26일 [양력 3월 6일]<기해> 흐리고 바람 불었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흥양현감(배흥립)을 잡아갈 나장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희(李禧)도 왔다.

1월 27일 [양력 3월 7일]<경자> 맑다.
춥기가 한겨울 같다. 대청에 나가, 영암군수?강진현감 등이 공식 인사를 받았다.

1월 28일 [양력 3월 8일]<신축> 맑다. 바람이 세게 불고 추웠다.
황승헌(黃承憲)이 들어왔다.

1월 29일 [양력 3월 9일]<임인>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1월 30일 [양력 3월 10일]<계묘> 맑고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보성군수(안홍국)가 들어왔다.


을미년 2월 (1595년 2월)

2월 초1일 [양력 3월 11일]<갑진> 맑고 바람이 불었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보성군수의 기한 어긴 죄를 곤장치고, 도망 치던 왜놈 두 명을 처형했다. 의금부의 나장이 와서 와서 흥양현 감을 잡아 갈 일을 전했다.

2월 초2일 [양력 3월 12일]<을사>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흥양현감(배흥립)이 잡혀갔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2월 초3일 [양력 3월 13일]<병오> 맑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흥양 배에 불을 던졌다는 신덕수(申德壽)를 심문했으나, 실증을 얻어내지 못하여 가두었다.

2월 초4일 [양력 3월 14일]<정미> 맑다.
몸이 불편하다. 장흥부사?우우후가 왔다. 원수부의 회답 공문과 종사관의 회답 편지도 왔다. 조카 봉?아들 회?오종수 (吳從壽)가 들어왔다.

2월 초5일 [양력 3월 15일]<무신> 맑다.
충청수사가 왔다. 천성보만호 윤홍년(尹弘年)이 교서에 숙배했다.

2월 초6일 [양력 3월 16일]<기유>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흥부사?우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2월 초7일 [양력 3월 17일]<경술> 맑다.
보성군수가 술을 가져와 종일 이야기했다.

2월 초8일 [양력 3월 18일]<신해> 흐렸다.

2월 초9일 [양력 3월 19일]<임자> 비가 내렸다.

2월 초10일 [양력 3월 20일]<계축> 비가 뿌리고 바람도 세게 불었다.
황숙도(黃叔度)와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2월 11일 [양력 3월 21일]<갑인> 비가 오더니 저녁나절에 잠깐 갰다.
황숙도(黃叔度)?조카 분(芬)?허주(許宙)?변존서(卞存緖)가 돌아 갔다. 종일 공무를 봤다. 저물 무렵에 임금의 분부가 왔는데, 둔전을 검열하라는 것이다.

2월 12일 [양력 3월 22일]<을묘> 맑으며 바람은 일지 않았다.
윤엽(尹曄)이 들어왔다. 저녁나절에 활 열 여 순을 쏘았다. 장흥 부사?우우후도 와서 활을 쏘았다.

2월 13일 [양력 3월 23일]<병진> 맑다.
일찍 도양의 둔전에서 벼 삼백 섬을 실어 와서 각 포구에 나누어 주었다. 우수사?진도군수?무안현감?함평현감?남도포만호?마 량첨사?회령포만호 등이 들어왔다.

2월 14일 [양력 3월 24일]<정사> 맑고 따뜻하다.
식사를 한 뒤에 진도군수?무안현감?함평현감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방비처에 수군을 일제히 징발해 보내지 않은 것과 전선을 만들어 오지 않은 일로 처벌했다. 영암군수도 죄를 논했다. 조카 봉?해?분(芬)과 방응원(方應元)이 아울러 나갔다.

2월 15일 [양력 3월 25일]<무오> 맑고 따뜻하다.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가리포첨사?진도군수가 아울러 와서 참가했다. 지휘선(上船)을 연기로 그을렸다.

2월 16일 [양력 3월 26일]<기미> 맑다.
대청으로 나가니, 함평현감 조발(趙撥)이 논박을 당하여 돌아가려 고 하므로 술을 먹여서 보냈다. 조방장 신호(申浩)가 진에 이르 러, 교서에 숙배하고서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에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옮기어 정박했다. 밤 열 시쯤에 출항하여 춘원도(통영시 광도면 끄승개)에 이르니 날은 밝아 오는데도 경상도 수군은 와 있지 않았다.

2월 17일 [양력 3월 27일]<경신> 맑다.
아침에 군사들에게 식사를 재촉하여 먹이고, 곧장 우수영 앞바다 에 이르렀다. 성 안에 있던 왜놈 칠백 명은 우리 배를 보고는 도 망치므로, 배를 돌려 나와서, 장흥부사 및 조방장 신호(申浩)를 불러 종일 대책을 논의하고서 진으로 돌아왔다. 저물 무렵에 림 영(林英) 및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들어왔다.

2월 18일 [양력 3월 28일]<신유> 맑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2월 19일 [양력 3월 29일]<임술> 맑다.
아침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거제현령?무안현감?평산포 만호?회령포만호 및 허정은(許廷誾)도 왔다. 송한련(宋漢連)이 와서 말하기를, 고기를 잡아 군량을 산다고 했다.

2월 20일 [양력 3월 30일]<계해> 맑다.
우수사?장흥부사?조방장 신호(申浩)가 와서 이야기하는데, 원균 (元均)의 악하고 못된 짓을 많이 전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2월 21일 [양력 3월 31일]<갑자> 비가 조금 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보성군수?웅천현감?우우후?소비포권관?강진현감?평산포만호 등이 와서 봤다.

2월 22일 [양력 4월 1일]<을축> 맑다.
대청으로 나가 장계를 봉했다. 저녁나절에 우후?낙안군수?녹도 만호를 불러 떡을 먹였다.

2월 23일 [양력 4월 2일]<병인> 맑다.
조방장 신호(申浩)?장흥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2월 24일 [양력 4월 3일]<정묘> 흐렸다.
우뢰와 번개가 많이 치면서도 비는 오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다. 원전(元琠)이 아뢰고 돌아갔다.

2월 25일 [양력 4월 4일]<무진> 흐리고 바람도 고르지 않았다.
아들 회와 울(蔚)이 들어왔길래 들으니 어머니께서 편안하시 다고 한다. 장계를 받들고 온 이전(李筌)이 들어왔다. 조정의 소 식과 영의정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2월 26일 [양력 4월 5일]<기사> 흐렸다.
아침에 편지와 장계 열여섯 통을 봉하여 정여흥(鄭汝興)에게 부쳤다.

2월 27일 [양력 4월 6일]<경오> 한식. 맑다.
원균(元均)이 포구에서 수사 배설(裵楔)과 교대하려고 여기에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라고 했더니, 불평하는 빛이 많더라고 한 다. 두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고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

2월 28일 [양력 4월 7일]<신미> 맑다.
대청으로 나가 장흥부사?우우후와 함께 이야기했다. 광양현감?목포만호도 왔다.

2월 29일 [양력 4월 8일]<임신> 맑다.
고여우(高汝友)가 창신도로 갔다. 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둔전치 는 일을 논의하였다. 조방장 신호(申浩)도 왔다. 저녁에 옥포만호 방승경(方承慶)?다경포만호 이충성(李忠誠) 등이 교서에 숙배했다.

2월 30일 [양력 4월 9일]<계유> 비가 내렸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을미년 3월 (1595년 3월)

3월 초1일 [양력 4월 10일]<갑술> 맑다.
삼도에 겨울을 지낸 군사들을 모아 임금님께서 하사하신 무명을 나누어 주었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들어왔다.

3월 초2일 [양력 4월 11일]<을해> 흐렸다.

3월 초3일 [양력 4월 12일]<병자> 맑다.

3월 초4일 [양력 4월 13일]<정축> 맑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이 들어왔다.

3월 초5일 [양력 4월 14일]<무인> 비가 내렸다.
노대해가 왔다.

3월 초6일 [양력 4월 15일]<기묘> 맑다.

3월 초7일 [양력 4월 16일]<경진> 맑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조방장 신호(申浩)?우후(이몽구) 및 진 도군수(박인룡)가 와서 봤다.

3월 초8일 [양력 4월 17일]<신사>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갔다. 우수사(이억기)?경상수사(배설)?양 조방장(박종남?신호)? 우후(이몽구)? 가리포첨사? 낙안군수? 보성군수? 광양현감? 녹도만호가 아울러 모두 와서 이야기 했다.

3월 초9일 [양력 4월 18일]<임오> 맑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갔다. 방답의 새로 부임한 첨사 장린(張 麟)?옥포의 새로 부임한 만호 이담(李曇)이 공사례의 인사를 했 다. 진주의 이곤변(李坤 )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3월 초10일 [양력 4월 19일]<계미>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과 함께 이야기했다. 보성군수 안홍국(安弘 國이 아뢰고 돌아갔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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