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난중일기 - 5

영지니 2008. 4. 13. 19:13

3월 11일 [양력 4월 20일]<갑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사도시(대궐 안의 쌀?간장 등을 맡은 관청)의 주부 조형도(趙亨 道)가 와서 전라좌도의 왜적의 정세를 말하고, 또 투항해 온 왜놈 들의 말을 전하는데,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삼년간이나 출병해도 끝내 효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내어 바다를 건너 부산에다 진 영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 오기로 벌써 정해졌다고 했다.

3월 12일 [양력 4월 21일]<을유> 흐렸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과 우후(이몽구)가 장기를 두었다.

3월 13일 [양력 4월 22일]<병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자윤 박종남(朴宗男) 영감을 불러 같이 밥을 먹었다. 저녁 에 식사를 한 뒤에 조형도(趙亨道)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3월 14일 [양력 4월 23일]<정해> 비는 오고 바람은 그쳤다.
남해현령이 진에 이르렀다.

3월 15일 [양력 4월 24일]<무자> 비가 잠깐 그치고 바람도 잤다.
식사를 한 뒤에 조형도(趙亨道)가 아뢰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활을 쏘았다.

3월 16일 [양력 4월 25일]<기축> 비가 내렸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이 들어왔다. 그 편에 들으니, 충청수사 입부 이순신(李純信)이 군량미 이백 여 섬을 조도어사 강첨(姜簽)에게 발각되어 그 때문에 잡혀 심문당했다고 했다. 또 새로 부임한 충 청수사 이계훈(李繼勛)은 배에서 불을 내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 랄 일이다. 동지 권준(權俊)이 본영에 왔다고 했다.

3월 17일 [양력 4월 26일]<경인> 비가 걷힐 듯하다.
아들 면?허주(許宙)?박인영(朴仁英) 등이 돌아갔다. 오늘 군 량을 계산하여 딱지를 붙였다. 충청우후(원유남)가 달려 와 보고 하는데, 수사 이계훈(李繼勛)이 불을 내고 자신은 물에 빠져 죽었 으며, 군관과 격군 백마흔 여 명이 불에 타 죽었다고 하니, 놀랍 기도 하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달려와 보고하기를, "견내량의 복병한 곳에 서 온, 투항한 왜인 심안은이(沈安隱已: 시마즈)를 문초했더니, 그 놈은 본시 영등에 있던 왜놈이고, 그의 장수 심안둔(沈安頓: 島津 義弘)이 그의 아들(島津忠恒)을 대신 두고 가까운 시일내에 본국 으로 돌아갈 것이라 한다."고 했다.

3월 18일 [양력 4월 27일]<신묘> 맑다.
권언경(權彦卿)?아우 여필?조카 봉?이수원(李壽元) 등이 들어왔다. 그 편에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말을 들으니, 천만다 행이다. 우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3월 19일 [양력 4월 28일]<임진> 맑다.
권언경(權彦卿) 영감과 함께 활을 쏘았다.

3월 20일 [양력 4월 29일]<계사> 비가 내렸다.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에게로 가다가 길에서 수사 배설(裵楔)을 만나 배 위에서 잠깐 이야기했다. 그는 밀포(蜜浦)의 둔전치는 곳을 살펴 볼 일로 간다고 했다. 그 길로 우수사에게로 가서, 몹시 취하고, 저물어서 돌아왔다.

3월 21일 [양력 4월 30일]<갑오> 맑다.
저녁나절에 아우 여필?조카 봉?이수원(李壽元)이 돌아갔다. 나주 반자(元宗義)와 우후(李夢龜)가 와서 봤다.

3월 22일 [양력 5월 1일]<을미>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날씨가 일찍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세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다. 우수사가 여기 와서 같이 쏘았다. 날이 저물어 헤어져 돌아왔다.

3월 23일 [양력 5월 2일]<병신>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세 조방장 및 우후와 함께 걸어서 앞산 봉우 리에 오르니, 삼면으로는 바라보이는 앞이 막히지 않고, 길은 북 쪽으로 트여 있다. 과녁을 세우고 자리를 닦고, 거기에 앉아 종일 토록 돌아올 것을 잊었다.

3월 24일 [양력 5월 3일]<정유> 흐리고 바람이 없다.
공문을 결재했다. 저녁나절에 세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다.

3월 25일 [양력 5월 4일]<무술> 종일 비가 내렸다.
동지 권준(權俊)?우후?남도포만호?나주반자가 와서 봤다. 영광 군수도 왔다.동지 권준(權俊)과 장기를 두었는데 권준(權俊)이 이 겼다.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했는데 닭이 울어서야 열이 조금 내리고 땀은 흐르지 않았다.

3월 26일 [양력 5월 5일]<기해> 맑다.
영광군수(丁淵)가 나갔다. 저녁나절에 조방장 신호(申浩)?박종남 (朴宗男)과 우후와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저녁에 수사 배 설(裵楔)?이운룡(李雲龍)?안위가 와서 새 감사(監司) 맞이할 일 을 아뢰고, 사량(통영시 사량면)으로 갔다. 밤 열 시쯤에 동쪽이 어둡다가 밝아지니, 무슨 상서로운 조짐인지 모르겠다.

3월 27일 [양력 5월 6일]<경자>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가 여기 와서 종일 활을 쏘았다. 어둘 무 렵 조방장 박종남(朴宗男)에게로 가서 발포만호?사도첨사?녹도 만호를 불러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표마(表馬)와 종 금이가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3월 28일 [양력 5월 7일]<신축> 맑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저녁나절에 사도첨사가 와서 보고하기를,"각 포구의 병부(兵符)를 순찰사의 공문에 따라, 각 포구에 직접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3월 29일 [양력 5월 8일]<임인>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두 조방장과 이운룡(李雲龍)?조계종(趙繼宗)이 활 스무세 순을 쏘았다. 수사 배설(裵楔)이 순찰사에게서 오고, 미조항첨사(성윤문)도 진에 왔다.


을미년 4월 (1595년 4월)

4월 초1일 [양력 5월 9일]<계묘> 맑으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남원 유생 김굉이 수군에 관한 일로 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와 같이 이야기했다.

4월 초2일 [양력 5월 10일]<갑진> 맑다.
종일 공무를 봤다.

4월 초3일 [양력 5월 11일]<을사> 맑다.
세 조방장이 우수영의 진으로 가고, 나는 사도첨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4월 초4일 [양력 5월 12일]<병오>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배설)가 활을 쏘자고 청하므로, 권?박 두 조방 장과 함께 배를 같이 타고 경상수사에게 갔더니, 전라수사(이억 기)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같이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4월 초5일 [양력 5월 13일]<정미> 맑다.
선전관 이찬(李燦)이 비밀 유지(有旨)를 가지고 진에 이르렀다.

4월 초6일 [양력 5월 14일]<무신> 가랑비가 종일 내렸다.
동지 권준(權俊)과 같이 이야기했다.

4월 초7일 [양력 5월 15일]<기유> 맑다.
저물 무렵 바다로 내려가 어두울 때에 견내량에 이르러 잤다. 선 전관(이찬)이 돌아갔다.

4월 초8일 [양력 5월 16일]<경술> 맑으나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왜적들이 밤에 도망갔다고 하므로 들어가 치지 않았다. 저녁나절 에 침도에 이르러, 우수사(이억기)?경상수사 배설(裵楔)과 함께 활을 쏘았다. 여러 장수들도 모두 와서 참여했다. 저녁에 본진으로 돌아왔다.

4월 초9일 [양력 5월 17일]<신해> 맑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과 함께 활을 쏘았다.

4월 초10일 [양력 5월 18일]<임자> 맑다.
구화역(仇化驛: 丘墟驛) 역졸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세 척이 또 역앞(통영시 광도면 노산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삼 도의 중위장들에게 각각 다섯 척씩 배를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달려가 형세를 보아 무찌르게 했다.

4월 11일 [양력 5월 19일]<계축> 맑다.
우수사가 와서 보고는 그대로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 아갔다. 정여흥(鄭汝興)이 들어왔다. 또 변존서(卞存緖)의 편지를 보니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줄을 알겠다. 기쁘다.

4월 12일 [양력 5월 20일]<갑인> 맑다.
장계의 회답 열여덟 통과 영의정(류성룡)?우의정(정탁)의 편지와 자임(子任: 李軸)영감의 회답 편지가 왔다. 군량을 독촉할 일로 아병(牙兵: 군사의 일종) 양응원(梁應元)을 순천?광양으로, 배승 련(裵承鍊)을 광주?나주로, 송의련(宋義連)을 흥양?보성으로, 김 충의(金忠義)를 구례?곡성으로 정하여 보냈다. 삼도의 중위장 성윤문(成允文)?김완(金浣)?이응표가 견내량에서 돌아와 왜적이 물러갔다고 보고했다. 경상수사 배설(裵楔)은 밀포(蜜浦)로 나갔다.

4월 13일 [양력 5월 21일]<을묘> 흐리고 비가 내렸다.
세 조방장이 같이 왔다. 장계와 편지 네 통을 봉하여 거제 군관 편에 올려 보냈다. 저녁에 고성현령 조응도(趙應道)가 와서 왜적의 일을 말하고, 또 "거제의 왜적이 웅천에 군사를 청하여 야간에 습격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비록 믿을만 하지는 않으나, 그럴 염려가 없지도 않다.

4월 14일 [양력 5월 22일]<병진>
잠깐 비가 내렸다. 아침에 흥양현감이 교서에 숙배했다.

4월 15일 [양력 5월 23일]<정사> 흐렸다.
여러 가지 장계와 단오절의 진상품을 봉해 올렸다.

4월 16일 [양력 5월 24일]<무오> 종일 큰 비가 왔다.
비가 흡족히 오니, 올해 농사는 큰 풍년임을 점칠 수 있다.

4월 17일 [양력 5월 25일]<기미> 맑으나 높새바람이 세게 불었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세 조방장과 활 열다섯 순을 쏘 았다.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여기에 왔다가 해평장의 논밭 일구 는 곳으로 갔다. 미조항첨사도 와서 활을 쏘고서 갔다.

4월 18일 [양력 5월 26일]<경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우수사(이억기)?경상수사 배설 (裵楔)? 가리포첨사(이응표)? 미조항첨사(성윤문)? 웅천현감(이운룡)? 사도첨사(김완)? 경상우후 이의득(李義得)? 발포만호(황정록 ) 등 삼도의 장수가 모두 와서 모여 활을 쏘았다. 권준(權俊)?신 호(申浩) 두 조방장도 같이 모였다.

4월 19일 [양력 5월 27일]<신유> 맑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이 적을 수색?토벌하는 일로 배를 탔다.

4월 20일 [양력 5월 27일]<임술> 맑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에게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이 영남이 장계 회답을 가지고 내려 왔는데, 남해현령을 효시하라고 했다.

4월 21일 [양력 5월 28일]<계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대청에 나갔다. 활 열 순을 쏘았다.

4월 22일 [양력 5월 30일]<갑자> 맑다.
오후에 미조항첨사(성윤문)?(웅천현감)이운룡(李雲龍)?적량만호 고여우(高汝友)?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과 두 조방장이 아울 러 왔다. 그래서 정사준(鄭思竣)(판관 鄭承復의 아들)이 보낸 술과 고기를 같이 먹으면서, 남해현령이 군령을 어기었으니 효시하라는 글을 보았다.

4월 23일 [양력 5월 31일]<을축> 맑다.
마파람이 세게 불어 배를 운항할 수 없으므로 다락위에 앉아 공무를 보았다.

4월 24일 [양력 6월 1일]<병인> 맑다.
이른 아침에 아들 울(蔚)?조카 뇌?완(莞)을 어머니 생신에 상차려 드릴 일로 내어 보냈다. 오정 때에 강천석(姜千石)이 달려 와서 보고하기를, "도망한 왜놈 망기시로(望己時老: 孫四郞)가 우 거진 풀 숲 속에 엎드려 있다가 잡혀 왔고, 다른 한 놈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곧 그 놈을 압송해 오게 하고 삼도에 갈라 맡긴 항복한 왜놈들을 모두 불러 모아 곧 머리를 베라고 하였더니, 망기시로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죽으러 나왔다. 참으로 독한 놈이었다.

4월 25일 [양력 6월 2일]<정묘> 맑도 바람도 없다.
구화역 역졸 득복(得福)이 경상우후(이의득)의 보고를 가지고 왔 는데, "왜적의 대선?중선?소선을 아울러 쉰 여 척이 웅천에서 나와 진해(마산시 합포구 진동면 진동리)로 향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수(吳水) 등을 정탐하도록 내어 보냈다. 흥양현감이 와 서 봤다. 사량만호 이여념(李汝恬)이 아뢰고 돌아갔다. 아들 회 및 조카 해가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니, 다행이다.

4월 26일 [양력 6월 3일]<무진> 맑다.
새벽에 우수사가 조방장 신호(申浩)와 함께 자기 소속의 배 스무 여 척을 거느리고 탐색하러 나갔다. 저녁나절에 종지 권준(權俊)? 흥양현감(배흥립)? 사도첨사(김완)? 여도만호(김인영(金仁英))과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4월 27일 [양력 6월 4일]<기사> 맑으며 바람도 없다.
몸이 불편하다. 동지 권준(權俊)?미조항첨사(성윤문)?영등포만 호(조계종)가 와서 같이 활 열 순을 쏘았다. 한밤 자정에 우수사 가 적을 수색?토벌하고서 진으로 돌아아서는, "아무데도 적의 자취가 없다."고 하였다.

4월 28일 [양력 6월 5일]<경오>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우수사?경상수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송덕일이 하동현감(성천유)을 잡으러 왔다.

4월 29일 [양력 6월 6일]<신미> 밤 두 시쯤에 비가 오더니, 아침 여섯 시쯤에 깨끗이 개었다.
해남현감(최위지)이 공사례를 마친 뒤에, 하동현감에게는 두 번이 나 기일에 이르지 않은 죄로 곤장 아흔 대를 때렸고, 해남현감에 게는 곤장 열 대를 때렸다. 미조항첨사는 휴가 가겠다고 아뢰었 다. 세 조방장과 같이 이야기했다. 노윤발(盧潤發)이 미역을 아흔 아홉 동을 따 가지고 왔다.

4월 30일 [양력 6월 7일]<임신> 맑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을미년 5월 (1595년 5월)

5월 초1일 [양력 6월 8일]<계유>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내렸다.

5월 초2일 [양력 6월 9일]<갑술> 맑다.
아침에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었다. 웅천현감?거제현령?영등포 만호?옥포만호가 와서 봤다. 밤 열 시쯤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며, 종사관이 벌써 본영에 이르렀다고 한다.

5월 초3일 [양력 6월 10일]<을해> 맑다.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해남현감이 와서 봤다. 금갑도만호는 진에 이르렀다.

5월 초4일 [양력 6월 11일]<병자> 맑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다. 몸소 나아가 잔을 드리지 못하고, 홀로 멀리 바다에 앉았으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저녁나절에 활 열 다섯 순을 쏘았다. 해남현감이 아뢰고 돌아갔다. 아들 편지를 보니, "요동의 왕작덕(王爵德)이 (고려)왕씨의 후예로서 군사를 일으키고자 한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5월 초5일 [양력 6월 12일]<정축> 비가 내렸다. 오후 여섯 시쯤 잠깐 개었다.
활 세 순을 쏘았다. 우수사?경상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 였다. 오후 다섯 시에 종사관 류공진이 들어왔다. 이충일(李忠一) ?최대성(崔大晟)?신경황(申景潢)이 같이 이르렀다. 몸이 춥고 불편하고 아파 토하고서 잤다.

5월 초6일 [양력 6월 13일]<무인> 맑으며 바람도 없다.
아침에 종사관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례를 받고 함께 이야기 하였다. 저녁나절에 활 스무 순을 쏘았다.

5월 초7일 [양력 6월 14일]<기묘> 맑다.
아침에 종사관(류공진)?우후(이몽구)와 함께 이야기했다.

5월 초8일 [양력 6월 15일]<경진>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출항하여 삼도가 가 같이 선인암(仙人巖: 통 영시 한산면 하소리 하포)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고 구경도하며, 또 활도 쏘았다. 오늘 방답첨사(張麟)가 들어와 아들들의 편 지를 가지고 왔는데, "초나흘에 종 춘세가 잘못 불을 내어 집 열 채가 번져 타버렸다. 다만 어머니께서 계신 집에는 불이 붙지 않 았다."고 했다. 이거야 말로 다행이다. 어둡기 전에 배를 돌려 진에 이르렀다. 종사관과 우후는 방 붙이는 일로 뒤떨어졌다.

5월 초9일 [양력 6월 16일]<신사> 맑다.
아침에 식사를 한 뒤에 종사관이 돌아갔다. 우후도 같이 갔다. 활 스무 순을 쏘았다.

5월 초10일 [양력 6월 17일]<임오> 맑다.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많이 적중했다. 종사관 등이 영문에 이르 렀다고 했다.

5월 11일 [양력 6월 18일]<계미> 저녁나절에 비가 뿌렸다.
두치(하동읍 두곡리)의 군량, 남원?순창?옥과 등을 합하여 예순 여덟 섬을 실어왔다.

5월 12일 [양력 6월 19일]<갑신> 궂은비가 그치지 않더니, 저녁에야 잠깐 개었다.
대청에 나가 공무를 봤다. 동지 권준(權俊)과 조방장 신호(申浩) 가 함께 왔다.

5월 13일 [양력 6월 20일]<을유> 비가 퍼붓듯이 오는데 종일 그치지 않다.
홀로 대청 가운데 앉아 있으니 온갖 회포가 끝이 없다. 배영수 (裵永壽)를 불러 거문고를 타게 했다. 또 세 조방장을 불러 오게 하여 같이 이야기했다. 하루 걸릴 탐후선이 엿새나 지나도 오지 않아 어머니 안부를 알 수가 없다. 속이 타고 무척 걱정이 된다.

5월 14일 [양력 6월 21일]<병술> 궂은비가 그치지 않고 종일토록 왔다.
아침에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사도첨사가 와서 보고하는데, "흥양현감이 받아 간 전선이 암초에 걸려 뒤집 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대장(代將) 최벽(崔璧)과 십호선 장수(十船將)와 도훈도(都訓導)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동지 권준(權俊)이 왔다.

5월 15일 [양력 6월 22일]<정해> 궂은비가 그치지 않아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겠다.
새벽 꿈이 어수선했다. 어머니 소식을 들은지 이레나 되니 몹시 속이 타고 걱정이 된다. 또 조카 해가 잘 갔는지 궁금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보자니, 광양의 김두검(金斗劍) 이 복병으로 나갈 적에, 순천과 광양의 두 원에게서 이중으로 월 급(朔料)을 받은 것 때문에 벌로써 수군으로 나왔는데, 칼도 안 차고 활도 안 차고서 나왔는데다가 무척 오만하므로 곤장 일흔 대를 쳤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몹시 취하여 돌아갔다.

5월 16일 [양력 6월 23일]<무자>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는 편안하시다고 하고, 아 내는 실수로 불을 낸 뒤로 마음이 많이 상하여 담천이 더해졌다 고 한다. 걱정이 된다. 비로소 조카 해 등이 잘 간 줄을 알았 다.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동지 권준(權俊)이 잘 맞추었다.

5월 17일 [양력 6월 24일]<기축> 맑다.
아침에 나가 본영의 각 배에 사부?격군의 급료받은 사람들을 점 고했다. 저녁나절에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박?권 두 조방장이 잘 맞추었다. 오늘 소금 굽는 가마솥 하나를 부어 만들었다.

5월 18일 [양력 6월 25일]<경인> 맑다.
충청수사가 진에 이르렀다. 다만, 결성현감(손안국)?보령현감? 서천만호(소희익)를 거느리고 왔다. 충청수사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세 조방장과 함께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 열 순을 쏘았다. 거제현령이 와서 보고 그대로 잤다.

5월 19일 [양력 6월 26일]<신묘> 맑으나, 샛바람이 차게 불었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권?박?신 세 조방장과 사도?방답 두 첨사 와 함께 활 서른 순을 쏘았다. 수사 선거이(宣居怡)도 와서 같이 참여했다. 저녁에 소금 굽는 가마솥 하나를 부어 만들었다.

5월 20일 [양력 6월 27일]<임진> 비바람이 저녁내 오고 밤새도록 멎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공무를 봤다. 수사 선거이(宣居怡)?조방장 권준(權俊)과 같이 장기를 두었다.

5월 21일 [양력 6월 28일]<계사> 흐렸다.
오늘은 꼭 본영에서 누가 올 것이겠지만 당장 어머니 안부를 몰 라 답답하다. 종 옥이(玉伊)? 무재(武才)를 본영으로 보내고, 전복과 밴댕이 젓갈, 물고기알 몇 점을 어머니께 보냈다. 아침에 나가 공무를 보자니,투항해 온 왜놈들이 와서 보고하기를, "저희 같은 또래 중에 산소(山素)란 놈이 흉칙한 짓거리를 많이 하기 때문에 죽이겠다"고 했다. 그래서 왜놈을 시켜서 그놈을 목을 베게 했다. 활 스무 순을 쏘았다.

5월 22일 [양력 6월 29일]<갑오> 맑고 화창하다.
동지 권준(權俊) 등과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이수원(李壽元) 이 상경할 일로 들어왔다. 비로소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이다.

5월 23일 [양력 6월 30일]<을미> 맑다.
세 조방장과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5월 24일 [양력 7월 1일]<병신> 맑다.
아침에 이수원(李壽元)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조방장 박종남 (朴宗男)과 충청수사 선거이(宣居怡)를 시켜 활을 쏘게 했다. 소금 굽는 가마솥을 부어 만들었다.

5월 25일 [양력 7월 2일]<정유> 맑다가 저녁나절에 비가 내렸다.
경상수사?우수사?충청수사가 모여서 같이 활 아홉 순을 쏘았 다. 충청수사가 술을 내어 몹시 취하여 헤어졌다. 경상수사 배설 (裵楔)에게서 김응서(金應瑞)가 거듭해서 대간들의 혹평을 받고 있고, 원수도 거기에 끼었다는 말을 들었다.

5월 26일 [양력 7월 3일]<무술> 저녁나절에 개었다.
홀로 대청에 앉아 있었다. 충청수사?세 조방장과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저녁에 현덕린(玄德麟)이 들어왔다.

5월 27일 [양력 7월 4일]<기해> 맑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수사 선거이(宣居怡)와 두 조방장이 취하여 돌아갔다. 정철(丁哲)이 서울에서 진에 왔다. 장계 회답 내용에, " 김응서(金應瑞)가 함부로 강화에 대하여 한 말이 죄가 죄었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영의정(류성룡)?좌의정(김응남)의 편지가 왔다.

5월 28일 [양력 7월 5일]<경자> 흐리다가 마침내 저녁에 비가 많이 내렸다.
끝내 밤에 바람이 세게 불어, 전선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는데, 간간히 구호했다. 식사를 한 뒤에 수사 선거이(宣居怡)?세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했다.

5월 29일 [양력 7월 6일]<신축>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 부었다.
사직(社稷: 社; 土地의 神, 稷; 穀食의 神)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 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로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인으로 서의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을미년 6월 (1595년 6월)

6월 초1일 [양력 7월 7일]<임인> 저녁나절에 맑다.
권?박?신 세 조방장과 웅천현감?거제현령과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충청수사 선거이(宣居怡)는 이질에 걸려 쏘지 않았다. 새로 번드는 영리가 들어왔다.

6월 초2일 [양력 7월 8일]<계묘> 종일 가랑비 내리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에서 공무를 봤다. 한비(韓 )가 돌아갔다. 어머니께 편지를 편지를 썼다. 영리 강기경(姜起敬)?조춘종(趙春 種)?김경희(金景禧)?신홍언(申弘彦)이 모두 당직을 마치고 나왔 다. 오후에 가덕진첨사?천성만호?평산포만호?적량첨사 등이 와서 봤다. 천성보만호 윤홍년(尹弘年)이 와서 청주의 이계(李繼) 의 편지와 서숙부의 편지를 전하며, 김개(金介)가 지난 3월에 죽 었다고 했다. 비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저물 무렵에 권언경(權彦 卿) 영감이 와서 이야기했다.

6월 초3일 [양력 7월 9일]<갑진>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각 보고 문서를 처리하고, 하 달 공문을 내보냈다. 느즈막이 가리포첨사?남도포만호가 왔다. 권?신 두 조방장과 방답첨사?사도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가 와서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아침에 남해현령이 달려와서 보고 하는데, 해평군 윤두수(尹斗壽)가 남해에서 본영으로 건너온다고 한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나 곧 배를 정비하고 현덕린(玄德麟) 을 본영으로 보냈다. 사량만호가 와서 양식이 떨어졌다고 보고하고서 돌아갔다.

6월 초4일 [양력 7월 10일]<을사> 맑다.
진주의 서생 김선명(金善鳴)이라는 자가 계원유사(繼援有司: 식량 을 잇대주는 직책 이름)가 되고 싶다고 여기에 왔는데, 보인(保 人) 안득(安得)이라는 자가 데리고 왔다. 그 말을 들어 살펴보니, 그 속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 같아 아직 좀 두고 보자고 하고 공 문을 만들어 주었다. 세 조방장과 사도첨사?방답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가 와서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탐후선이 오지 않아 어머니의 안부를 알 수 없다. 걱정이 되고 눈물이 난다.

6월 초5일 [양력 7월 11일]<병오> 맑다.
이(李) 조방장 등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하는데,자윤 박종남(朴 宗男)(조방장)은 병으로 오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웅천현 감?거제현령이 와서 같이 종일 이야기했다. 오정 때부터 비가 내려서 활을 쏘지 못했다.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저녁식사도 먹지 않고 종일 쓰리고 앓았다. 종 경(京)이 들어 와서 어머니께 서 편안하시다고 하니 다행이다.

6월 초6일 [양력 7월 12일]<정미>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송희립(宋希立)이 들어 왔다. 그 편에 도양 장의 농사 형편을 들으니, 흥양현감(배흥립)이 무척이도 애를 썼 기 때문에 추수가 잘 될 것이라고 했다. 계원유사 림영(林英)도 힘을 많이 쓴다고 했다. 정항(鄭沆)이 이곳에 왔으나, 나는 몸이 불편하여 종일 앓았다.

6월 초7일 [양력 7월 13일]<무신>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신음하며, 앉았다 누웠다 했다.

6월 초8일 [양력 7월 14일]<기유> 비가 내렸다.
몸이 좀 나은 것 같다. 저녁나절에 세 조방장이 와서 보고, 곤양 군수는 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매우 섭섭하다.

6월 초9일 [양력 7월 15일]<경술> 맑다.
몸이 아직도 쾌하지 않는다. 답답하고 걱정된다. 조방장 신호(申 浩)?사도첨사?방답첨사가 편을 갈라서 활쏘기를 했는 데, 신호 (申浩) 편이 이겼다. 저녁에 원수군관 이희삼(李希參)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이곳에 왔는데, 조형도(趙亨道)가 수군 한 사람에 양식 다섯 홉씩?물 일곱 홉씩이라고 없는 것을 꾸며서 장계를 하였다고 했다. 인간의 일이란 참으로 놀랍다. 천지에 어찌 이처 럼 속이는 일이 있단 말인가. 저물녘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렸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난다.

6월 초10일 [양력 7월 16일]<신해> 맑다.
새벽에 탐후선을 본영으로 내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세 조방장? 충청수사?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광주의 군량 서른아홉 섬을 받 았다.

6월 11일 [양력 7월 17일]<임자> 가랑비가 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원수군관 이희삼(李希參)이 돌아갔다. 저녁에 나가 공무를 봤다. 광주 군량을 훔쳐간 도둑놈을 가두었다.

6월 12일 [양력 7월 18일]<계축> 가랑비가 오고 바람 불었다.
새벽에 아들 울(蔚)이 들어왔다. 어머니의 병환이 좀 덜하다고 한 다. 그러나, 연세가 아흔인지라 이런 위험한 병에 걸리셨으니, 염려가 되고 또 눈물이 난다.

6월 13일 [양력 7월 19일]<갑인> 흐렸다.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대신으로는 권준(權俊)이 되었다. 남해현령 기효근(奇孝謹)은 그 대로 유임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배 설(裵楔)에게 다녀가서 보고 돌아왔다. 어두워서 탐후선이 들어왔다. 금오랑이 이미 영(營) 안에 와 있다고 한다. 또 별좌의 편지 를 보니, 어머니 병환이 차차 나아간다고 한다. 다행이다.

6월 14일 [양력 7월 20일]<을묘> 새벽에 큰 비가 내렸다.
사도첨사가 활을 쏘자고 청하여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다 모였 는데, 저녁나절에 개었으므로 활 열두 순을 쏘았다. 저녁에 금오 랑이 경상수사 배설(裵楔)을 잡아갈 일로 들어왔다. 권준(權俊)을 수사로 임명한다는 조정의 공문과 유서와 밀부(密符: 유수?감사 ?병마사?수사?방어사들이 차던 兵符)도 왔다.

6월 15일 [양력 7월 21일]<병진>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식사를 한 뒤에 포구로 나가 배설(裵楔)을 떠나 보내니 마음이 불편하다. 아들 울(蔚)이 돌아갔다. 오후에는 조방장 신호(申浩)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6월 16일 [양력 7월 22일]<정사> 맑다.
나가 공무를 봤다. 순천의 7호선의 장수 장일(張溢)이 군량을 훔 치다가 잡혀 왔으므로 처벌했다. 오후에 두 조방장과 미조항첨사 등과 함께 활 일곱 순을 쏘았다.

6월 17일 [양력 7월 23일]<무오> 맑으나 바람이 종일 불었다.
경상수사(권준)?충청수사(선거이)?두 조방장이 같이 활을 쏘았다.

6월 18일 [양력 7월 24일]<기미> 비가 오락가락 했다.

진주의 유생 류기룡(柳起龍) 및 하응문(河應文)이 양식을 대어 달 라면서 쌀 다섯 섬을 받아 갔다. 저녁나절에 조방장 박종남(朴宗 男)과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고 헤어졌다.

6월 19일 [양력 7월 25일]<경신> 비가 내렸다.
홀로 다락 위에 앉아서 몽매간에 아들 면이 윤덕종(尹德種)의 아들 윤운로(尹雲輅) 와 같이 왔는데, 어머니의 편지를 보니 병환 이 완쾌하시다고 한다. 천만 다행이다. 신홍헌(申弘憲) 등이 들어 와서 보리 일흔여섯 섬을 바쳤다.

6월 20일 [양력 7월 26일]<신유> 비가 오락가락 했다.
종일 다락에 앉아서 충청수사가 말이 분명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몸소 가보니, 중태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습한 곳에 기거함으로 일어나는 뼈마디가 저리고 아픈 풍습이라는 병으로 많이 상했다. 무척 염려가 된다.

6월 21일 [양력 7월 27일]<임술> 맑다.
몹시 덥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신홍헌(申弘憲)이 돌아갔다. 거제현령은 또 왔다. 경상수사(권준)가 보고하는데, 평 산포만호(김축)가 병에 걸려 심하다고 한다. 그래서 내어 보낼 일 로 적어서 보냈다.

6월 22일 [양력 7월 28일]<계해> 맑다.
할머니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6월 23일 [양력 7월 29일]<갑자> 맑다.

두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다. 저녁에 배영수(裵永壽)가 돌아갔 다.

6월 24일 [양력 7월 30일]<을축> 맑다.
우도(右道)의 각 고을과 포구에 부정사실을 조사했다. 음탕한 계 집열두 명을 잡아다가 그 대장(隊長)을 아울러 처벌했다. 저녁나 절에 침을 맞아 활을 쏘지 않았다. 허주(許宙)?조카 해가 들 어왔다. 전마(戰馬)도 왔다. 기성백(奇誠伯)의 아들 기징헌(奇澄 憲)이 그의 서숙부 기경충(奇景忠)과 함께 왔다.

6월 25일 [양력 7월 31일]<병인> 맑다.
원수의 공문이 들어왔다. "세 위장(衛將)을 세 패로 갈라 보낸다" 고 했고, 또 소서행장이 일본에서 와서 화친할 것을 이미 결정했 다고 한다. 저녁에 조방장 박종남(朴宗男)과 충청수사 선거이(宣 居怡)에게로 가서 그의 병세를 보니, 이상한 일이 많았다.

6월 26일 [양력 8월 1일]<정묘> 맑다.
식사를 한 뒤에 공무를 보고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오늘이 권언경(權彦卿) 영감의 생일이라고 했다. 그래 서 국수를 만들어 먹고 술도 몹시 취하며 거문고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6월 27일 [양력 8월 2일]<무진> 맑다.
허주(許宙)?조카 해?기운로(奇雲輅) 등이 돌아갔다. 나는 조방장 신호(申浩)?거제현령과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6월 28일 [양력 8월 3일]<기사> 맑다.
나라제삿날(明宗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6월 29일 [양력 8월 4일]<경오> 맑다.
아침에 대청으로 나갔다. 우수사가 와서 활 열 여 순을 쏘았다.

6월 30일 [양력 8월 5일]<신미> 맑다.
문어공(文語恭)이 날 삼(生麻)을 사들일 일로 나갔다. 이상록(李 祥祿)도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영등포만호가 와서 봤 다. 방답첨사?녹도만호?조방장 신호(申浩)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을미년 7월(1595년 7월)

7월 초1일 [양력 8월 6일]<임신>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제삿날(仁宗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다락 위 에 기대어 나라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마치 아 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기둥같은 인재(棟 樑)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같은 인물(柱石)이 없으니, 모르겠다.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어갈지.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워서 종일 엎치락뒤치락하였다.

7월 초2일 [양력 8월 7일]<계유> 맑다.
오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날이다. 슬픈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저녁나절에 활 열 순을 쏘고, 또 철전 다섯 순?편전 세 순을 쏘았다.

7월 초3일 [양력 8월 8일]<갑술> 맑다.
아침에 충청수사에게로 가서 문명하니 많이 나았다고 한다. 저녁 나절에 경상수사가 이곳에 와서 서로 이야기한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밤 열 시쯤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 다고 하나 입맛이 없으시다고 한다. 몹시 걱정이다.

7월 초4일 [양력 8월 9일]<을해> 맑다.

나주판관이 배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왔다. 이전(李筌) 등이 산 일터에서 노 만들 나무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갔다. 미조항첨사?웅천현감이 와서 활을 쏘았다. 군관들은 내기로 환각궁을 쏘았는데 노윤발(盧潤發)이 으뜸이었다. 저녁에 림영(林英)? 조응복(趙應福)이 왔다. 양정언(梁廷彦)은 휴가를 얻어 돌아갔다.

7월 초5일 [양력 8월 10일]<병자> 맑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저녁나절에 조방장 박종남(朴宗男)? 조방장 신호(申浩)가 왔다. 방답첨사는 활을 쏘았다. 림영(林英)은 돌아갔다.

7월 초6일 [양력 8월 11일]<정축> 맑다.
정항(鄭沆)?금갑도만호?영등포만호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나 가 공무를 보고 활 여덟 순을 쏘았다. 종 목년(木年)이 곰내(古音 川)에서 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7월 초7일 [양력 8월 12일]<무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경상수사?두 조방장?충청수사가 왔다. 방답첨사?사도첨사 등을 편을 갈라 활을 쏘았다. 경상우병사에게서 임금님의 분부가 왔는데, "전쟁의 재앙이 나라에 참혹하게 만들고, 원수놈은 나라 안에 있어 귀신도 부끄러워 하고, 사람도 원통해 함이 천지에 사무쳤건만, 아직도 요망한 기운을 빨리 쓸어버리지 못하고, 원수놈과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있 음(不共戴天)을 끊어버리지도 못하니 통분하다. 그러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로서 누가 팔을 부르걷고 마음을 썩히면서 원수놈의 그 살점을 저미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경은 적과 마주 진치고 있는 일선 장수로서 조정의 명령도 없이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패역한 말을 지꺼리고, 또 여러번 사사로이 편지를 통하여 적의 기세를 높이고, 적에게 애교를 부릴 뿐더러, 수호?강화설이 명나라에까지 미쳐 부끄러럽 게 하고, 흔단을 열어 놓기에 조금도 꺼리낌이 없도다. 생각건대 군율로 다스려도 아까울 것이 없을 것이지만, 오히려 관대히 용서하고 돈독히 타이르고 경계하도록 책망하기도 했다. 아닌게 아 니라 오히려 고집을 부리고 스스로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니, 내가 보기에는 몹시 해괴하고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에 비변사의 낭청 김용을 보내어 구두로 나의 뜻을 전하니, 경은 그 마음을 고쳐서 정신을 가다듬어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는 것 이었다. 이것을 보니, 놀랍고도 죄송스러움을 가눌 길이 없다. 김응서(金應瑞)란 어떠한 사람이기에 스스로 회개하여 다시 힘쓴 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만약 쓸개라도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살이라도 할 것이다.

7월 초8일 [양력 8월 13일]<기묘>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영등포만호?조방장 박종남(朴 宗男)이 와서 봤다. 우수사의 군관 배영수(裵永壽)가 그 장수의 명령을 받고 와서 군량 스무 섬을 주고 갔다. 동래부사 정광좌(鄭 光佐)가 와서 부임했다고 아뢰었다. 활 열 순을 쏘고 헤어졌다. 종 목년(木年)이 돌아왔다.

7월 초9일 [양력 8월 14일]<경진> 맑다.
오늘은 말복이다. 가을 기운이 서늘해지니, 회포가 많이 일어난다. 미조항첨사가 와서 보고 갔다. 웅천현감?거제현령이 활을 쏘고 갔다. 밤 열 시쯤에 바다 위의 달빛이 다락에 가득차니, 생각이 번거로와 다락 위를 어슬렁거렸다.

7월 초10일 [양력 8월 15일]<신사>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저녁나절에 우수사를 만나 서로 이야기했다. 양식이 떨어져도 아무런 계책이 없다는 말을 많이 했다. 무척 답답하여 괴롭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도 왔다. 술 두어 잔을 마셨더니, 몹시 취했다. 밤이 깊어 다락 위에 누었더니, 초생달 빛이 다락에 가득하여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7월 11일 [양력 8월 16일]<임오> 맑다.
아침에 어머니 앞으로 편지를 쓰고, 여러 곳에도 편지를 써 보냈다. 무재(武才)?박영(朴永)이 직접 일하러 나갔다. 나가 공무를 보고, 활 열 순을 쏘았다.

7월 12일 [양력 8월 17일]<계미>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경상우수사가 와서 봤다. 그와 함께 활 활 열 순?철전 다섯 순을 쏘았다. 해질 무렵 서로 회포를 풀고 물러갔다. 가리포첨사도 와서 같이 했다.

7월 13일 [양력 8월 18일]<갑신> 맑다.
가리포첨사?우수사가 같이 와서 가리포첨사가 술을 바쳤다. 활 다섯 순?철전 두 순을 쏘았는데 나는 몸이 몹시 불편했다.

7월 14일 [양력 8월 19일]<을유> 저녁나절에 개었다.
군사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宗)으로 하여금 사망한 군졸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쌀 두 섬을 주었다. 이상록 (李祥祿)?태구련(太九連)?공태원(孔太元) 등이 들어왔다. 어머니 께서 병이 나아 펀안하시다고 한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7월 15일 [양력 8월 20일]<병술> 맑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니, 박?신 두 조방장과 방답첨사?여도만호? 녹도만호? 보령현감? 결성현감 및 이언준(李彦俊) 등이 활을 쏘고 술을 마셨다. 경상수사도 와서 같이 이야기하고, 그로 하여금 씨름 내기를 했다. 정항(鄭沆)이 왔다.

7월 16일 [양력 8월 21일]<정해> 맑다.
아침에 들으니, 김대복(金大福)이 병세가 몹시 위태롭다고 한다. 매우 걱정스럽다. 곧 송희립(宋希立)?류홍근(柳洪根)을 시켜 간 호 치료케 했으나, 무슨 병인지를 알지 못하여 무척 답답하다. 저 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순천부사 정석주(鄭石柱)?영광도훈 도 주문상(朱文祥)을 처벌했다. 저녁에 원수에게 가는 공문과 병 사에게 갈 공문를 초잡아 주었다. 미조항첨사(성윤문)? 사도첨사(김완)가 휴가신청서를 제출하므로 성 첨사에게는 열흘, 김 첨사 에게는 사흘을 주어 보냈다. 녹도만호는 유임한다는 병조의 공문이 내려 왔다.

7월 17일 [양력 8월 22일]<무자> 비가 내렸다.
거제현령이 달려와서 보고하는데, "거제에 있던 왜적이 벌써 철 수하여 돌아갔다"고 했다. 그래서 곧 정항(鄭沆)을 시켜 정하여 보냈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내일 출항하여 나갈 일을 전령했다.

7월 18일 [양력 8월 23일]<기축> 맑다.
아침에 대청으로 나가, 박?신 두 조방장과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오후에 출항하여 지도(통영시 용남면)에 이르러 정박하고 밤 을 지냈다. 한밤 자정에 거제현령이 와서 말하기를 장문포(거제 시 장목면 장목리)의 왜적 소굴이 이미 텅텅 비어 버렸으며, 다만 서른 명 남짓 뿐 이라고 했다. 또 사냥하는 왜놈을 만나 활을 쏘 아 한 놈은 목을 베고, 한 놈은 사로잡았다고 했다. 밤 두 시쯤에 출항하여 견내량으로 돌아왔다.

7월 19일 [양력 8월 24일]<경인> 맑다.
우수사?경상수사?충청수사?두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하고서 헤 어졌다. 오후 네 시쯤에 진으로 돌아왔다. 당포만호를 찾아서 잡 아다 현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쳤다. 김대복(金大福)의 병세를 가서 보았다.

7월 20일 [양력 8월 25일]<신묘> 흐렸다.
두 조방장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느지막이 거제현령 및 전진해현감 정항(鄭沆)이 왔다. 오후에 나가 공무를 보고 활 다섯 순?철전 네 순을 쏘았다. 좌병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7월 21일 [양력 8월 26일]<임진>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내렸다.
우후가 들어온다고 들었다. 식사를 한 뒤에 태구련(太九連)?언복 (彦福)이 만든 환도를 충청수사?두 조방장에게 각각 한 자루씩 나누어 주었다. 저물 무렵에 아들 울(蔚)?회와 우후가 같은 배로 섬 밖에 이르러 아들들만 들어왔다.

7월 22일 [양력 8월 27일]<계사>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충일(李忠一)이 그의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나갔다.

7월 23일 [양력 8월 28일]<갑오> 맑다.
저녁나절에 말달리는 일로 원두구미(통영시 한산면 염호리 역졸 포)로 갔더니, 두 조방장 및 충청수사도 왔다. 저녁에 작은 배를 타고 돌아왔다.

7월 24일 [양력 8월 29일]<을미> 맑다.
나라제삿날(度祖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7월 25일 [양력 8월 30일]<병신> 맑다.
충청수사의 생일이라 음식을 마련하여 왔다. 우수사?경상수사 및 조방장 신호(申浩) 등과 함께 취하여 마구 이야기했다. 저녁에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왔다.

7월 26일 [양력 8월 31일]<정유> 맑다.
아침에 정영동(鄭永同)?윤엽(尹曄)?이수원(李壽元) 등과 흥양현 감이 들어왔다.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와 충청수사도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7월 27일 [양력] 맑다.
어사의 공문이 들어왔다.

7월 28일 [양력 9월 2일]<기해>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배로 내려가 삼도를 모아 포구 안에 진을 쳤 다. 오후 두 시쯤에 어사 신식(申湜)(1551-1631; 신숙주의 5세손) 이 진에 왔다. 곧 대청으로 내려가 마주하여 이야기하고, 각 수사 및 세 조방장을 청하여 같이 이야기했다.

7월 29일 [양력 9월 3일]<경자>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어사(신식)가 좌도 소속의 다섯 포구의 부정사실을 조사?점고했다. 저녁에 이곳에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을미년 8월 (1595년 8월)

8월 초1일 [양력 9월 4일]<신축> 비바람이 세게 일었다.
어사(신식)와 같이 식사하고, 곧 배로 내려가 순천 등의 다섯 고을의 배를 점검했다. 저물어서 나는 어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같이 이야기했다.

8월 초2일 [양력 9월 5일]<임인> 흐렸다.
우도의 전선을 점고한 뒤에 그대로 남도포 막사에서 머물렀다. 나는 나가 앉아 충청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8월 초3일 [양력 9월 6일]<계묘> 맑다.
어사는 느지막이 경상도 진으로 가서 점고했다. 저녁에 경상도 진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몸이 불편하여 곧 돌아왔다.

8월 초4일 [양력 9월 7일]<갑진> 비가 내렸다.
어사가 이곳에 왔기에, 여러 장수들을 모아 종일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8월 초5일 [양력 9월 8일]<을사>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사와 작별을 이야기하러 충청수사 있는 곳에 이르러 어 사를 전별(餞別)하고 나니,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아뢰고 돌아 갔다.

8월 초6일 [양력 9월 9일]<병오> 비가 흠뻑 쏟아졌다.
우수사?경상수사?두 조방장이 모여 함께 종이 이야기하고서 헤 어졌다.

8월 초7일 [양력 9월 10일]<정미> 비가 내렸다.
아침에 아들 울(蔚)과 허주(許宙) 및 현덕린(玄德麟)?우후(이몽 구)가 같이 배를 타고 나갔다. 저녁나절에 두 조방장?충청수사가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표신을 가진 선전관 이광후(李光後)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원수가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바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며 밤을 새웠다.

8월 초8일 [양력 9월 11일]<무신> 비가 내렸다.
선전관이 나갔다. 경상수사?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과 같이 이야기하다가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날이 저물어서 저마다 돌아갔다.

8월 초9일 [양력 9월 12일]<기유>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8월 초10일 [양력 9월 13일]<경술> 맑다.
몸이 불편한 것 같다. 홀로 다락 위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 난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고 난 뒤에 활 다섯 순을 쏘았다. 정제(鄭霽)와 결성현감(손안국)이 같이 배로 나갔다.

8월 11일 [양력 9월 14일]<신해> 비가 오락가락 했다.
종 한경(漢京)도 본영으로 갔다. 배영수(裵永壽)?김응겸(金應謙) 이 활쏘기를 겨루었다. 김응겸(金應謙)이 이겼다.

8월 12일 [양력 9월 15일]<임자> 흐렸다.
일찍 나가 공무를 봤다. 저녁나절에 두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 다. 김응겸(金應謙)이 경상우수사에게 갔다가 돌아올 때에 우수사 (이억기)에게 들러서 뵙고 활쏘기 겨루기를 했는데, 배영수(裵永 壽)가 또 졌다고 했다.

8월 13일 [양력 9월 16일]<계축> 종일 비가 내렸다.
장계 초고를 고치고 공문을 결재했다. 독수(禿水)가 왔는데, 도양 장(고흥군 도양면)의 둔전치는 일에 이기남(李奇男)이 하는 짓이 괴상한 것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우후가 달려가 부정사실을 조사하도록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8월 14일 [양력 9월 17일]<갑인> 종일 비가 내렸다.
진해현감 정항(鄭沆) 및 조계종(趙繼宗)(영등포만호)이 와서 이야기했다.

8월 15일 [양력 9월 18일]<을묘>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이억기)?가리포첨사(이응표)?임 치현감(홍견) 등 여러 장수들이 함께 왔다. 오늘 삼도의 사수와 본도 잡색군을 먹이고, 종일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같이 취했다. 오늘 밤 으스름 달빛이 다락을 비치니, 잠을 이룰 수 없어 밤새도록 휘파람불며 시를 읊었다.

8월 16일 [양력 9월 19일]<병진> 궂은비가 걷히지 않고 종일 부슬부슬 내렸다.
생각이 몹시 어지럽다. 두 조방장과 같이 이야기했다.

8월 17일 [양력 9월 20일]<정사> 가랑비가 오고 샛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김응겸(金應謙)을 불러 일을 물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두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하고 활 열 순을 쏘았다.

8월 18일 [양력 9월 21일]<무오> 궂은비가 걷히지 않았다.
신?박 두 조방장이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8월 19일 [양력 9월 22일]<기미> 날씨가 활짝 개었다.
두 조방장 및 방답첨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밤 열 시쯤에 조카 봉?아들 회?울(蔚)이 들어왔다."체찰사(이원익)가 21일 에 진주성에 이르러 군사에 관한 일을 묻고자 체찰사의 군관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8월 20일 [양력 9월 23일]<경신> 맑다.
종일 체찰사의 전령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경상수사 권준(權俊)? 우수사(이억기)? 발포만호(황정록)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밤 열 시쯤에 전령이 들어왔다. 한밤 자정에 배를 타고 곤이도(통 영시 산양면 곤리도)에 이르렀다.

8월 21일 [양력 9월 24일]<신유> 흐렸다.
저녁나절에 소비포(고성군 하이면 덕명포) 앞바다에 이르니, 전라 순찰사(홍세공)의 군관 이준(李俊)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 강응표 (姜應彪)?오계성(吳繼成)이 같이 와서 함께 한 시간 남짓이 이야 기했다. 경수(이억기의 字)?권언경(權彦卿)?자윤(박종남의 字)? 언심(신호의 字)에게 편지를 썼다. 저물 무렵에 사천 땅 침도(針 島: 삼천포 신수도?)에 이르러 잤다. 밤에 몸이 몹시 차갑고 마음이 쓸쓸하다.

8월 22일 [양력 9월 25일]<임술> 맑다.
이른 아침에 각종 공문을 만들어 체찰사에게 보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걸어서 사천현에 이르렀다. 오후에 진주 남강 가에 이 르니, 체찰사는 벌써 진주에 들어왔다고 했다.

8월 23일 [양력 9월 26일]<계해> 맑다.
체찰사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에 백성을 위해 서 고통을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났다. 호남순찰사는 헐 뜯어 말하는 기색이 많으니, 한탄스럽다. 저녁나절에 나는 김응서 (金應瑞)와 같이 촉석루에 이르러 장병들이 패전하여 죽은 곳을 보니,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윽고 체찰사가 나더러 먼저 가라고 하므로 배를 타고 소비포로 돌아와 정박했다.

8월 24일 [양력 9월 27일]<갑자> 맑다.
새벽에 소비포 앞에 이르니, 고성현령 조응도(趙應道)가 와서 알 현하고서 소비포 앞바다에서 잤다. 체찰사?부사(김륵)과 종사관 (노경임)도 잤다.

8월 25일 [양력 9월 28일]<을축> 맑다.
일찍이 식사를 한 뒤에 체찰사와 부사?종사관은 함께 내가 탄 배를 타고, 오전 여덟 시쯤에 출항하여, 같이 서서 여러 섬들과 여러 진을 합병할 곳과, 또 접전할 곳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면서 종일 의논했다. 곡포(남해군 이동면 화계리)는 평산포 (남면 평산리)에 합하고, 상주포(상주면 상주리)는 미조항(미조면 미조리)에 합하고, 적량(창선면 진동리 적량)은 삼천포(사천시 삼 천포)에 합하고, 소비포(고성군 하이면 덕명포)는 사량(통영시 사 량면 금평리)에 합하고, 가배량(거제시 도산면 노전동)은 당포(통 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합하고, 지세포(일운면 지세포리)는 조라 포(일운면 구조라리)에 합하고, 제포(진해시 웅천 1동 제덕동)는 웅천에 합하고, 율포(거제시 장목면 대금리)는 옥포(거제시 장승 포시 옥포동)에 합하고, 안골포(진해시 안골동)는 가덕진(부산시 강서구 천가동)에 합치기로 결정했다. 저녁에 진중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고 공사례를 한 다음 헤어졌다.

8월 26일 [양력 9월 29일]<병인> 맑다.
저녁에 부사(김륵)와 서로 만나 은밀히 이야기했다.

8월 27일 [양력 9월 30일]<정묘> 맑다.
군사 5480 명에게 밥을 먹였다. 저녁에 상봉에 이르러 적진이 있는 곳과 적이 다니는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바람이 몹시 사납다. 밤을 틈타 도로 내려왔다.

8월 28일 [양력 10월 1일]<무진> 맑다.
이른 아침에 체찰사 및 부사?종사관이 같이 다락 위에 앉아 여 러 가지 폐단되는 점을 의논했다. 식사를 하기 전에 배로 내려와 서 배를 타고 나갔다.

8월 29일 [양력 10월 2일]<기사> 맑다.
일찍 나가 공무를 봤다. 경상수사가 체찰사 있는 곳에서 왔다.


을미년 9월 (1595년 9월)

9월 초1일 [양력 10월 3일]<경오>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우후가 도양장에서 와서 영에 이르러 공문을 가치고 와 바치는데, 정사립(鄭思立)을 해 치는 뜻이 많이 있으니 우습다. 종사관(류공진)도 병을 돌아가서 조리하겠다고 하므로 결재해 보냈다.

9월 초2일 [양력 10월 4일]<신미> 맑다.
새벽에 지휘선(上船)을 출항시켰다.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1283 명에게 밥을 먹이고서 끌고 내려왔다. 충청수사?우수사?경상수 사?두 조방장과 함께 이르러 종일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9월 초3일 [양력 10월 5일]<임신> 맑으며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우 여필과 아들 울(蔚)과 유헌(有憲)이 돌아갔다. 강응호(姜應 虎)가 도양장 추수할 일로 같이 돌아갔다. 정항(鄭沆)?우수(禹 壽)?이섬(李暹)이 정탐하고 들어와서, "영등포 적진은 초이틀에 소굴을 비우고 누각과 모든 소굴을 불살라 버렸다."고 했다. 웅천 의 적에게 투항하여 붙었던 사람 공수복(孔守卜) 등 열일곱 명을 달래어 왔다.

9월 초4일 [양력 10월 6일]<계유)맑다.
경상수사가 와 보기를 청하여 종일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아우 여필?아들 울(蔚) 등이 잘 갔는지 알 수 없어 몹시 궁금하다.

9월 초5일 [양력 10월 7일]<갑술>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 권준(權俊)이 소고기를 조금 보냈다. 충청수사 ?조방장 신호(申浩)와 같이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신 조방장?충 청수사 선거이(宣居怡)와 함께 같은 배로 경상수사 있는 곳으로 가서 종일 이야기하고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이 날 체찰사의 공 문이 왔는데, 순천?광양?낙안?흥양이 갑오년(1594년)의 전세 (田稅)를 실어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답장했다.

9월 초6일 [양력 10월 8일]<을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충청수사가 술을 바치므로 우수사?두 조방장이 와서 같이 마셨다. 송덕일이 들어왔다.

9월 초7일 [양력 10월 9일]<병자> 맑다.
식사를 한 뒤에 경상수사가 왔다. 충청도 병영의 배와 서산?보 령의 배를 내어 보냈다.

9월 초8일 [양력 10월 10일]<정축> 맑다.
나라제삿날(世祖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 아들 회와 송덕일이 같은 배로 나갔다. 충청수사?두 조방 장이 와서 이야기했다.

9월 초9일 [양력 10월 11일]<무인> 맑다.
우수사 및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모여서 영내의 군사들에게 떡 한 섬을 나누어 주고 초저녁에 끝내고 돌아갔다.

9월 초10일 [양력 10월 12일]<기묘> 맑다.
오후에 나는 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과 함께 우수사 있는 데로 가 서 같이 이야기하고 밤에 돌아왔다.

9월 11일 [양력 10월 13일]<경진> 흐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못했다.

9월 12일 [양력 10월 14일]<신사> 흐렸다.
아침에 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을 청해다가 같이 아침밥을 먹고 늦게 끝내고 돌아갔다. 저녁에 경상수사와 우후 및 정항(鄭沆)이 술을 가지고 와서 같이 이야기하고서는 밤이 늦어서야 헤어졌다.

9월 13일 [양력 10월 15일]<임오> 맑다.
다락에 기대어 혼자 앉았으니 마음이 불편하다.

9월 14일 [양력 10월 16일]<계미> 맑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우수사?경상우수사가 같이 와서 이별하는 술잔을 들고서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수사 선거이(宣居怡)와 작별하며 준 시는 이러하다.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남쪽에 와서도 죽사리 같이 하더 니, 오늘 밤 이 달 아래 한 잔을 나누면, 내일이면 우리 서로 헤어져야 하리.

9월 15일 [양력 10월 17일]<갑신> 맑다.
수사 선거이(宣居怡)가 와서 아뢰고 돌아가는데, 또 이별의 잔을 들고나서 헤어졌다.

9월 16일 [양력 10월 18일 ]<을유> 맑다.
나가 공무를 봤다. 장계 봉하는 것을 감시했다. 이 날 저물 무렵 일식을 하여 밤이 되어서야 밝아졌다.

9월 17일 [양력 10월 19일]<병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서울에 편지를 써 보냈다. 김희번(金希番)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유자 서른 개를 영의정에게 보냈다.

9월 18일 [양력 10월 20일]<정해>
저녁나절에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들어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9월 19일 [양력 10월 21일]<무자> 맑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들어왔다가 돌아갔다.

9월 20일 [양력 10월 22일]<기축>
밤 두 시쯤에 둑제를 지냈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이 헌관으로 행사했다.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봤다.

9월 21일 [양력 10월 23일]<경인> 맑다.
박?신 두 조방장과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박 조방장을 작별하 려 했으나, 그대로 경상수사를 작별하고서 갔다가 그만 날이 저 물었기 때문에 하지 못했다. 저녁에 이종호(李宗浩)가 들어왔다. 다만 목화만 가져 왔기로 모두 나누어 주었다.

9월 22일 [양력 10월 24일]<신묘>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박자윤(종남의 字) 영감이 나갔다. 경상우 수사도 와서 전별했다.

9월 23일 [양력 10월 25일]<임진> 맑다.
나라제삿날(太祖 神懿王后 韓氏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웅천 사람인데 사로잡혔던 박록수(朴祿守)?김희수(金希壽)가 와 서 알현하고 겸하여 적정을 보고했다. 그래서 무명 한 필 씩을 나누어 주어 보냈다.

9월 24일 [양력 10월 26일]<계사> 맑다.
아침에 각처에 편지 열 통 남짓 썼다. 아들 울(蔚)?면( )과 방 익순(方益純) 및 온개(溫介) 등과 함께 나갔다. 이 날 저녁에 우 수사?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9월 25일 [양력 10월 27일]<갑오> 맑다.
오후 두 시쯤에 녹도의 하인이 실수로 불을 내어 대청 다락방 등이 모두 타버렸다. 군량?화약?군기 등의 창고에는 불이 붙 지 않았으나, 다락 위에 있던 장전과 편전 이백 여 개가 모두 타 버렸으니, 애석하다.

9월 26일 [양력 10월 28일]<을미> 맑다.
홀로 온 종일 배 위에 앉아 있다가 앉았다 누웠다 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이언량(龜船將)이 재목을 깎아 가지고 왔다.

9월 27일 [양력 10월 29일]<병신> 흐렸다.
안골포 사람으로 왜적에게 붙었던 자 이백서른 여 명이 왔다. 배는 스물두 척이라고 우수(禹壽)가 와서 보고했다. 식사를 한 뒤 에 불난 데로 올라가 집 지을 만한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9월 28일 [양력 10월 30일]<정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 우수사?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아들 회?울(蔚)이 기별을 듣고 들어왔다.

9월 29일 [양력 10월 31일]<무술> 맑다.

9월 30일 [양력 11월 1일]<기해> 맑다.


을미년 10월 (1595년 10월)

10월 초1일 [양력 11월 2일]<경자> 맑다.
조방장 신호(申浩)와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그대로 작별하는 술자리를 베풀었다. 저녁나절에 신(申) 조방장이 나갔다.

10월 초2일 [양력 11월 3일]<신축> 맑다.
대청에 대들보를 올렸다. 또 지휘선(上船)을 연기로 그을렸다. 우 수사?경상수사 및 이정충(李廷忠)이 와서 봤다.

10월 초3일 [양력 11월 4일]<임인> 맑다.
해평군 윤근수(尹根壽)의 공문을 구례의 유생이 가지고 왔다. "김덕령(金德齡)과 전주의 김윤선(金允先) 등이 죄없는 사람을 쳐 죽이고 수군 진영으로 도망하여 진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을 수색해 보니 9월 10일경에 보리씨를 바꿀 일로 진에 왔다가 곧 돌아갔다고 했다.

10월 초4일 [양력 11월 5일]<계묘> 맑다.

10월 초5일 [양력 11월 6일]<갑진>
이른 아침에 다락에 올라가 역사(役事)하는 것을 보고서 다락 위 바깥쪽 서까래에 흙을 치올려 발랐다. 투항해온 왜놈들로 하여금 물건 나르는 일을 시켰다.

10월 초6일 [양력 11월 7일]<을사>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 및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저녁에 웅천현 감(이운룡)이 왔다. 그 편에 명나라 사신(楊方亨)이 부산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 날 사로잡혔던 사람 스물네 명이 나왔다.

10월 초7일 [양력 11월 8일]<병오> 맑다.
화창하기가 봄날 같다. 임치첨사(홍견)가 와서 봤다.

10월 초8일 [양력 11월 9일]<정미> 맑다.
조카 완(莞)이 들어왔다. 진원(珍原)과 조카 해의 편지도 왔다.

10월 초9일 [양력 11월 10일]<무신> 맑다.
각처에 답장을 써서 보냈다. 대청을 짓는 것을 다 마쳤다. 우우후 (이정충)가 와서 봤다.

10월 초10일 [양력 11월 11일]<기유> 맑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우수사?경상수사가 아울러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10월 11일 [양력 11월 12일]<경술> 맑다.
일찍 다락 방으로 올라가 종일 역사(役事)하는 것을 보았다.

10월 12일 [양력 11월 13일]<신해> 맑다.
일찍 다락 위로 올라가 역사(役事)하는 것을 보았다. 서쪽 행랑을 만들어 세웠다. 저녁에 송홍득(宋弘得)이 들어왔는데, 미친 듯이 망녕된 말이 많았다.

10월 13일 [양력 11월 14일]<임자> 맑다.
일찍 새로 지은 다락에 올라가 대청에 흙을 치올려 붙이는데 투항해 온 왜놈들에게 시켰다. 송홍득(宋弘得)이 군관으로 따라 나갔다.

10월 14일 [양력 11월 15일]<계축> 맑다.
우수사?경상수사?사도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 등이 와서 봤다.

10월 15일 [양력 11월 16일]<갑인>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저녁에 달빛을 타고 우수사 이억기에게 가서 전별했다. 경상수사?미조항첨사?사도첨사도 왔다.

10월 16일 [양력 11월 17일]<을묘> 맑다.
새벽에 새로 지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우수사?임치첨사?목포 만호 등이 나갔다. 그대로 새 다락방에서 잤다.

10월 17일 [양력 11월 18일]<병진> 맑다.
아침에 가리포첨사?금갑도만호가 와서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진주의 하응구(河應龜)? 류기룡(柳起龍) 등이 계원미(繼援米) 스무 섬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부안의 김성업(金成業)? 미조항첨사 성윤문(成允文)이 와서 봤다. 정항(鄭沆)이 아뢰고 돌아갔다.

10월 18일 [양력 11월 19일]<정사> 맑다.
경상수사 권준(權俊)과 우우후(이정충)이 와서 봤다.

10월 19일 [양력 11월 20]<무오> 맑다.
아들 회( )?면( )이 나갔다. 송두남(宋斗男)이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갔다. 김성업(金成業)도 돌아갔다. 이운룡(李雲龍)이 와서 봤다. 계향유사(양식 잇대는 책임자) 하응문(河應文)?류기룡(柳 起龍)이 나갔다.

10월 20일 [양력 11월 21일]<기미> 맑다.
저녁나절에 가리포첨사?금갑도만호?남도포만호?사도첨사?여 도만호가 와서 보기에 술을 먹여 보냈다. 저물 무렵에 영등포만 호도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갔다. 이 날 밤바람은 몹시도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은 대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리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민다.

10월 21일 [양력 11월 22일]<경신> 맑다.
이설(李渫)이 휴가 신청을 했으나 허가하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우우후 이정충(李廷忠)?금갑도만호 가안책(賈安策)?이진권관 등 이 와서 봤다. 바람이 몹시 싸늘하여 잠을 이룰 수 없어 공태원 을 불러 왜적의 정형을 물었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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