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5>

영지니 2010. 4. 15. 19:42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5>

최고의 전략가, 가후


[
들어가는 글]

혹시 2.28 민중항쟁을 들어보셨습니까? 아하, 우리나라 4.19 학생의거의 도화선이 된 사건 말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2.28 사태가 아니라 대만(臺灣)의 이야기입니다. 2.28 민중항쟁을 모르고 오늘날 대만을 알 수는 없지요. 2.28 민중항쟁은 오늘날 대만인(臺灣人)들이 중국 본토인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는 원인이 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2.28 민중항쟁은 대만에 진주했던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군이 대만인들을 가혹하게 다루자 대만인들이 반발하여 대륙인들을 습격하고 이어 본토에서 파견된 국민당 군이 대만인들을 대학살(大虐殺)한 사건입니다.

원래 대만은 청·일 전쟁(1894) 결과 일본에 할양되어 51년간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지요. 일본은 대만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했다고 하지만 정치적 차별정책으로 반일(反日) 감정이 격화되어 다양한 항일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대만인들은 일본의 오랜 식민 통치로 광복을 염원하였지요.

그러던 가운데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고 국민당 군이 대만에 진주하자 대만인들은 이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당시 대만인들은 이제 다시 조국(중국)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이제 대만인들은 다른 모든 중국인들처럼 중국인으로서 평등한 지위와 권리를 가질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지요.

그런데 말이죠. 대륙에서 진주한 국민당 사람(대륙인)들은 대만을 마치 적을 굴복시키고 정복한 영토로 간주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합니다. 대만인들은 다시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피정복민(被征服民)으로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일제시대가 더 나았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대만인들과 본토인들 사이에 차별도 심해서 광복 이전 일본인들의 자리는 고스란히 대륙인들의 차지가 되었고 대만의 행정 장관에서 주임 비서까지 21명 가운데서 단지 한 사람만이 대만 출신이었을 정도였죠. 뿐만 아니라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만연한 실업을 정부가 해결할 생각을 아니하고 오히려 특산물 판매를 독점함으로서 이익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된 것은 대륙에서 온 경찰과 군인들이 사소한 일에도 사람들을 총으로 사살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대만인들을 같은 동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마치 일본 식민 정권에 놀아난 민족 배신자 다루듯이 대했다는 것이죠. 이로써 대만인들의 불만은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을 좀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1947년 2월 28일 저녁 단속원(전매국)이 담배 좌판을 벌이고 있던 노파인 임강매(林江邁)의 담배를 압수하려 들자 그녀는 땅에 엎드려 사정했지만 단속원들이 폭행을 가하여 노파가 피를 흘리고 쓰러집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단속원에게 항의하자 그는 총을 쏴 사람들을 위협하다가 급기야는 총으로 진문계(陳文溪)라는 사람을 쏴 죽입니다. 흥분한 군중들은 정부 차량을 불로 태워 버렸고 이것이 사건의 시작이었지요.

민중봉기가 대만 전역으로 확대되자 대만성의 책임자였던 진의(陳儀)는 이들을 무마하는 척하면서 본토의 장개석에게 군대의 증파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1947년 3월 8일 본토에서 제 21사단이 3월 8일 새벽 타이페이(臺北) 시에 진입하여 무차별 학살을 가하여 대만의 지식인들 상당수가 살해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도시를 진압하면서 대학살을 자행합니다. 당시 죽은 사람들이 최소 2만에서 3만 명이라고 합니다. 3월 21일 모든 진압작전이 완료됩니다. 이것이 2.28 대만 민중 항쟁의 전모입니다.

이 때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는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만한 것으로는 비정성시(非情城市 : 비정한 도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삼국지’는 가후의 일대기

'삼국지’를 읽은 사람 대부분은 ‘삼국지’의 최고 전략가는 제갈량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대로 제갈량은 위대한 정치가였지 최고의 군사 전략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삼국지’ 최고의 전략가로 소개할 사람은 가후(賈? : 147- 223) 입니다. 가후는 위나라의 대신으로 무위(武威) 고장(姑臧) 사람입니다. 이 지역은 당시에는 서량 지역으로 실크로드(Silk Road)로 나가는 길목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후는 흔히 권모술수에 능하다든지, 능력은 있으나 지조가 없다든지, 하는 식으로 평가 절하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후를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먼저 가후의 이력을 간단히 살펴봅시다.

가후는 동탁(董卓)의 참모를 거쳐 이각ㆍ곽사의 군사(軍師)를 지냅니다. 그는 한수와 마등의 근왕병을 물리치고 이각과 곽사를 도와 장안을 회복합니다. 이 때 가후는 이각과 곽사를 설득하여 황제와 대신들을 보호합니다. 이각ㆍ곽사의 권력투쟁으로 난이 일어나자 가후는 이들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각과 곽사가 실각하자 가후는 장수(張繡)의 막하에 있으면서 장수와 형주의 유표(劉表)를 도와 신출귀몰한 병법으로 조조군(曹操軍)을 대파합니다.

그 후 가후는 장수를 설득하여 함께 조조에게 귀순합니다. 조조의 휘하에서 가후는 순욱과 더불어 관도대전의 승리에 기여했고 적벽대전을 하려는 조조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조조군은 적벽에서 대패하였습니다. 이로써 중국의 통일이 70여 년이 미루어지게 됩니다.

이후 가후는 조조의 가장 큰 우환거리였던 마초와 한수 연합군을 물리치고 장노를 공격할 때 큰 공을 세워 방덕을 조조의 휘하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조조가 후계 문제로 고민하자 원소의 예를 들어서 장자인 조비에게 물려주도록 권하여 이를 성사시킵니다. 가후는 조조의 맏아들 조비의 후견인이 됩니다. 이것은 용인(用人)의 대가인 조조가 가후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당시 가후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사를 통해 봅시다. 정사에 따르면, 조조는 가후가 귀순한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기뻐하면서 가후의 손을 어루만지며 “나의 신의가 천하에 중요하게 된 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군요.”하였고 즉각 가후를 도정후에 봉하고 기주목에 임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牧)이라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미국의 주지사입니다. 유비가 그 많은 세월을 전장에서 보내면서 받은 지위가 예주목이지요. 기주는 원소의 근거지였던 곳으로 조조에게는 매우 중요한 주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가후에 대한 명성의 정도를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조비(문제)가 즉위하자 가후를 태위로 삼았습니다. 태위란 최고위직 삼공(三公)의 하나로 국방관련 업무를 전담하는데 대개 대장군이 겸임했던 직책입니다. 조비는 가후의 맏아들인 가목(賈穆)을 부마도위로 삼았고 둘째 아들 가방(賈訪)을 열후로 삼았습니다.

이상의 사실을 냉정히 살펴보면, 사실 우리가 말하는‘삼국지’는 가후의 일대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황건 농민군의 전쟁 이후, 동탁 군벌정권의 탄생 - 이각ㆍ곽사의 신군부 통치 - 관도대전 - 적벽대전 - 서량 정벌 - 조비의 황제 등극 - 조비의 오나라 정벌전쟁 등에 이르기까지 ‘삼국지’의 대부분의 주요 사건들에서 가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만약 우리가 ‘삼국지’에서 가장 오랫동안 등장할 사람을 중심으로 ‘삼국지’를 다시 쓰게 된다면 바로 가후를 중심으로 쓰면 될 정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삼국지’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전쟁이나 전투와 정책의 대부분에 가후는 관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최고 권력자들이 가후의 견해를 제대로 수용했던 경우에는 매사가 원활하게 풀리는 데 그의 견해를 듣지 않고 고집스럽게 추진한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이각과 곽사가 화해하여 천자를 영접하러 갔을 때 가후는 천자를 위협하는 행동을 못하도록 했으며 이각과 곽사로부터 대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가후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가후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천하의 안정에 노력했으며 인재들을 보호했나 하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각과 곽사의 몰락도 이 둘 사이에서 가후의 중재가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각과 곽사의 신군부(新軍部) 정권이 안정되어갈 무렵부터 이각과 곽사는 가후를 무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조가 적벽대전을 위해 군대를 일으키자 가후는 이미 조조군의 군세가 천하에 떨치고 있어서 “초나라의 풍부한 경제력으로 선비들을 포상하고 백성을 위로해주고 편안한 땅에서 즐겁게 일하게 되면,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손권은 투항할 것”이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천하통일을 갈망하던 조조는 가후의 권고를 듣지 않고 군대를 일으켜 적벽대전에서 대패합니다. 이로써 유비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맞이하죠. 

위나라 문제(조비)가 오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도 가후는 아직 천하에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치에 힘쓸 것을 권고하지만 문제는 이를 거부하고 강릉으로 출병하였다가 대패하였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세월이 감에 따라 예지력(叡智力)이 떨어지는데 가후는 이상하리만큼 예리한 판단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후라는 인물은 ‘삼국지’의 대표적인 미스터리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가후가 성장한 곳이 문명의 교차지역이었던 실크로드로 나가는 길목이라서 수많은 변화들 속에서 단련된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보는 데 반하여 가후는 과거와 현재의 현상을 정확히 분석하고 그것을 토대로 미래를 내다보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끝없이 고정관념을 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

지금 우리가 인터넷이 없던 시대를 토대로 미래를 분석할 수 없듯이 현재는 과거의 기계적인 연속이 아니라 과거의 연속에 화학적인 변화가 쌓여진 것이죠. 이 변화는 미세할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쌓여 가면 우리가 과거를 통해 분석한 것과는 전혀 다른 미래가 있다는 것이죠.

현재에서는 이 미세한 변화를 느낄 수 없어 현재는 과거의 연속인 듯이 보이지만 실제의 이 화학적 작용은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미래를 잘 예측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미세한 변화들을 반드시 참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현재에는 과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과거를 통하여서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오류가 될 수밖에 없지요. 물론 우리는 이 미세한 변화들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최대한 민감하게 느낌으로써 미래의 변화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현상의 변화만 따라가는 것(개혁 지상주의)도 위험하지만 과거의 일만을 고집하는 것(보수주의)도 위험합니다. 개혁주의나 보수주의는 모두 새로운 미래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과거에 눈이 멀고 다른 하나는 현상에 눈이 멀어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죠.

가후가 위대하다는 것은 오히려 개혁 지상주의자도 아니고 보수주의자도 아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가후는 오직 사실 그 자체를 보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후는 명분에 흔들리지도 않고 현실의 변화에만 따라가지도 않습니다. 가후는 항상 전체적인 시각에서 현상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을 정사로 다시 확인해봅시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순유와) 가후는 잘못된 계획을 세우는 적이 거의 없고 변화에 따르는 융통성이 있어 장량이나 진평과 어깨를 견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가후는 가급적 사람들과 교분을 쌓지 않았지만 천하의 지혜를 논하려는 자는 가후에게 왔다(위서 : 가후전)”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관중 ‘삼국지’는 가후를 일개의 모사 정도로만 묘사하고 있지요. 나관중 ‘삼국지’는 지나칠 정도로 가후의 공적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예를 들면 관도대전에서 군량미의 부족으로 조조가 철군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조조의 마음을 바로잡아 준 사람은 가후와 순욱인데 나관중 ‘삼국지’에는 순욱만이 등장합니다. 가후에게는 무슨 다른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2) 평가 절하된 가후

정사(위서 : 순유ㆍ순욱ㆍ가후전)에서 후세의 배송지가 달아 논 주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사실 열전(列傳)이라는 것은 비슷한 인물들끼리 모아두어야 하는데 … 진수는 순유와 가후를 어떻게 같은 서열에 두고서 서술하였는가를 비판하는 의견들이 있다. 순유가 마치 밤에 찬란히 빛나는 불빛(夜光)이라면 가후는 촛불(蒸燭)에 불과하다. 이들은 밤을 밝힌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다. 진수(정사의 편찬자)가 순유(荀攸)와 가후를 평가하면서 이런 구별도 못하다고 있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즉 정사에서 진수가 가후를 순욱(荀彧)ㆍ순유(荀攸)와 동일한 반열에 두고서 서술하고 있는 데 대하여 이 같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 순유나 순욱을 가후에 비교하기가 무리인 듯한데 오히려 그 반대로 가후를 폄하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상하지요.

(晋)나라 무제(사마염)가 사도(우리나라의 영의정에 해당) 자리가 비게 되자 이에 적합한 인물을 찾아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 때 순조라는 사람이 “삼공이란 모든 백성들이 우러러 보고 의지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직위에 합당한 사람을 임용해야 합니다. 옛날 위 문제(조비)가 가후를 삼공으로 임명한 것을 오나라의 손권이 비웃었습니다.”라고 하고 있지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보면 가후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단지 가후가 조비를 지지한 이유 때문에 그런 지위를 얻은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가후의 능력은 참으로 비범합니다. 그런데 순조의 말은 가후를 은연중에 비하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나관중 ‘삼국지’ 전반을 통틀어 가후가 평가 절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제가 해설해 드리고 싶은 것은 가후가 동탁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 가후의 출신 지역이 무위(武威 : 현재의 우웨이) 고장(姑藏)으로 유목민의 거주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 등입니다.

첫째, 가후가 동탁과 관계가 있다고 해서 그가 당시에 한 행적을 보지 않고 무조건 잘못된 사람으로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어느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전체를 매도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마녀 사냥이죠. 마녀 사냥은 엄밀하게 보면 새로운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계층들의 의도적인 책동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탁이나, 원소·조조·유비 등 군벌 제후들이 무엇이 그리 다릅니까? 모두 다 천하를 도둑질하려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둘째, 가후의 출신지를 살펴봅시다. 가후가 태어난 곳은 중국인들이 반오랑캐 취급을 하던 서량(西?)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은 북방 유목민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출신지 문제가 가후에게는 평생의 짐이 된 듯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일부에서는 “에이, 그런 것이 어디에 있어? 정사에 그런 말이 있는가?”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짐작할 만한 내용들은 꽤 있습니다. 





정사에는 “이각은 장안에서는 양주(서량) 사람을 모조리 죽인다는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했다(위서 : 동탁전)”라는 말이 있고, “장안에 있는 사람들이 동탁의 수하에 있는 량주(서량) 사람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위서 : 가후전)”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시 한족이 서량인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만약에 형주나, 예주·연주 사람이 정권을 잡았다가 놓쳤어도 똑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진시황의 진(秦)나라를 반쯤 오랑캐로 인식하였다는 점은 이미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진나라가 근거지로 삼았던 서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죠. 따라서 유목민들의 중국 진출의 통로였던 서량에서 태어났다면, 설령 한족(漢族)이라고 해도 한족으로 대접 받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마치 서북 민중봉기(1811 : 홍경래의 난) 때의 서북인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삼국지’의 주요 인물 가운데 유목민 지역 즉 서량이나 몽골 지역 출신으로는 여포와 동탁·가후·이각·곽사·마등 등이 있습니다. 먼저 [그림] 삼국지 주인공들의 출신 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가후는 자신의 출신 배경 때문에 항상 노심초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사(위서 : 가후전)에 따르면, 가후는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항상 문을 잠그고 스스로를 지켰다고 합니다. 가후는 개인적으로 사사로이 어떤 교분도 맺지 않았고 자식들을 시집ㆍ장가 보낼 때도 권문세족과 혼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한족 주류사회에 얼마나 적응하기 힘들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동안 가후에 대한 평가가 나빴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류 한족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최근 일본의 삼국지 연구가가 쓴 글 가운데 조조와 가후 등을 권모술수의 대명사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이들은 정사 가후전에 저족의 반란군을 만나 임기응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예를 두고서 지나치게 과장되게 생각한 결과입니다.

가후는 관우(촉나라)나 사마의(위나라), 제갈각(오나라) 등과는 달리 어떠한 자기 세력도 만들지 않았고 가급적이면 자신의 일에만 충실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가후는 특정 사람을 배신한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모시고 있던 사람에 대해 최선을 다하다가 그 사람과의 협의를 통하여 새로운 진로를 모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고용한 사람이 자기를 버리는 경우에는 미련 없이 그를 떠나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략을 갖춘 사람(정치가)이 톱 클래스(top class)의 자신의 지위를 바탕으로 자기 세력도 키우지 않고 업무에만 충실한다면 그보다 괜찮은 정치가가 있을까요? 정치가가 파벌(派閥)만 만들다 보면 지역갈등이 생기고 지역차별이 생기는 것이죠.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지역 갈등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지금은 영ㆍ호남 사이에 갈등이 많았지만 조선시대에는 변경 지방이었던 서북지방(평안도)에 대한 차별이 심했지요.

순조 때 홍경래{洪景來 : ? - 1812)가 군대를 일으켜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것도 평안도 사람들에 대해 지나친 차별을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 일어난 제주도 4.3 민중 봉기도 본토인들이 제주도민에 대해 함부로 대한 것이 하나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평안도 사람들에 대해 지역 차별이 심했겠습니까?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변경 지방인 것이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조선 정부 지도부가 만주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오랑캐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면 그들에게 서북인들은 반(半) 오랑캐였겠지요. 해방 후 김일성(평양 출신)이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부한 것은 여러 가지 다른 정치적인 요소들도 많았겠지만 기본적으로 서북인들을 차별해온 서울의 중앙정부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문제들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북한도 함경도와 평안도 사이에 갈등이 매우 심하다고 합니다). 이탈리아도 남북 갈등이 심하고 일본이나 중국,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나라나 지역 갈등은 있게 마련입니다. 미국의 클린튼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워싱턴 정객들에게 많이 시달린 이유들 가운데 하나도 그의 출신지가 가난한 시골 주(州)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변방 지역이나 가난한 시골을 출신지로 하는 사람들은 심한 따돌림을 받는 경우가 많지요. 지난 번에 다룬 원숭환의 억울한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나자렛에 무슨 인물이 나오겠느냐?”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역 갈등은 어디나 있으니 당연하다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을 정치인들이나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교묘히 자기의 이익에 따라 이용하게 되면 발생합니다. 그것은 2.28 민중 항쟁과 같은 엄청난 비극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나아가서는 민족분단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역 차별이나 지역 갈등을 조장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최근 들어 조영남 선생님(화수 : 화가겸 가수)을 포함, 지역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뜻있고 바른 정치인들의 노력으로 많이 해소 중에 있습니다. 너무 반가운 일입니다. 이런 분들이 많이 나와야 민족의 장래도 밝은 것이죠.


(3) 대 정치가 가후

정사에 나타나는 가후는 성실하고 합리적이면서도 청렴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가후는 자신에 대해 매우 엄격했던 사람이며 청렴하여 여러 가지의 벼슬을 주려 해도 사양합니다. 예를 들면 이각과 곽사가 가후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제후로 봉하려 하자 사양하였고 상서복야(尙書僕射)를 제수하자, “상서복야란 모든 관리의 사장(師長)이며,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 받드는 직책인데 저는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가 없을 것(위서 : 가후전)”이라고 사양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전문가로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 가후가 지조(志操) 없는 사람의 대명사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가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너무 나관중 ‘삼국지’ 적인 풍토에 오래 젖어있었기 때문이겠죠. 물론 사람의 생각이란 바뀌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역사란 무엇보다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나관중 ‘삼국지’의 서술 방식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할 이유는 없는 것이죠. 가후에 대해서 옹유반조(擁劉反曹 : 유비를 옹호하고 조조를 반대함)식으로 평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온 대로 유비는 춘추필법의 혜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리고 제갈량과 관우에 대한 평가나 찬사는 합당하였습니까?

가후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사건의 마디마디에서 보다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급적 인명이 희생되는 것을 피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결국 우리는 가후가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최소의 비용으로 천하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부의 전문가들이 가후에게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져 내린 한(漢)나라에 대해 맹목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입니다. 유비도 사실 한나라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 사람임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음양오행 사상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특정한 왕조에 대한 충성도는 생각보다도 약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따지고 보면 유비가 한실을 강조한 것은 자신의 성이 유(劉)씨이기 때문이 아닌가요?

제가 보기에 가후는 ‘삼국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이자 탁월하고 청렴한 정치가요 군사 전략가입니다.‘삼국지’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중요한 사건에는 가후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조조가 가후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했다면 조조는 생전에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에 오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후의 역사도 많이 달라질 수 있었고 진(晋)나라로 국권이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후의 중국 역사도 더 나은 형태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남북조 시대와 같은 극도의 혼란도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천하가 혼란하면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대다수의 민중입니다. 정치가들은 무릇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것인지에 물어봐야 합니다. 많은 수의 정치가들은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대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세우는 명분보다도 한심한 것은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를 보세요. 명분 때문에 희생되는 것은 민생(民生)입니다. 무릇 정치라는 것은 국민을 편안하게 살게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국가는 고용을 창출하고 지역 균형발전에 주력하며 인플레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엉뚱하게 명분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대개 야심을 그 곳에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종류의 정치가들은 더 위험한 일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가후와 같은 정치인들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가후는 최고 권력층에 있으서면서도 권력을 등에 업고 부정부패를 행한 적이 없으며, ‘이기는 정치’보다는 ‘비기는 정치’로 화합(和合)과 상생(相生)의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말 가후처럼 아무런 사심 없이 큰 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저 속 빈 강정에 말만 무성할 뿐 아니라 경망스럽고 국민들을 고통 속으로만 몰아가는 정치가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아 안타깝습니다.
 

 

 

출처 : 올드뮤직의 향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