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6>

영지니 2010. 4. 15. 19:45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6>

조조, 중국이 포기한 영웅(상)


[
들어가는 글]

이번에는 조조에 대한 이야기를 2회에 걸쳐 해드리겠습니다. ‘삼국지’ 마니아 여러분들은 이미 아시는 내용이라 재미가 없겠지만 일반적인 ‘삼국지’ 독자들을 위해서는 한 번은 반드시 거론해야 할 주제이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 조조(曹操 : 155~220)만큼 악평을 받은 사람은 없지요. 조조는 조숭(曹嵩)의 아들이었는데 조숭은 유력한 환관 조등(曹騰)의 양아들이었습니다. 조숭은 환관이었지만 중앙의 최고귀족에 속하는 계층이었지요. 따라서 조조는 중앙 귀족으로 당대 최고의 문사들이나 지식인들과의 교류가 가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유비와 손권 또는 손책과 비교할 수는 없지요.

중국인들은 조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까요? 나관중 ‘삼국지’만을 두고서 생각하면 조조는 천하의 악인으로 생각하겠지요. 현실적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나관중 ‘삼국지’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요.

조조가 이처럼 악인으로 다시 탄생하게 된 연원을 더듬어 가면 성리학과 관련이 있습니다. 북방 유목민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던 중국인들에게 의리와 명분만을 중시하는 주자학(朱子學 : 성리학)이 등장하고 유비가 정통으로 인정이 되면서 유비는 그 모든 행동거지가 의리의 표상으로 묘사되고 조조는 악인(惡人)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된 것이죠. 이 점은 그 동안 우리가 살펴 온 것과 같습니다.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는 자신이 편찬한 ‘지림(志林)’에서 다음과 같이 이 상황을 적고 있습니다.

“골목길에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그것으로 먹고 사는 이야기꾼들이 많았는데 이들 이야기꾼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는 삼국 시대의 이야기들이었다. 아이들은 유비가 전쟁에서 패했다는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조조가 싸움에 져서 도망가는 이야기를 들으면 손뼉을 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따라서 ‘조조 = 악인’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은 송나라 이전부터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천년을 넘게 조조는 악인으로 행세한 것이죠.


(1) 조조(曹操) 악당 만들기

나관중 ‘삼국지’는 조조를 완벽한 악인(惡人)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나관중 ‘삼국지’에는 조조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많은 예가 있고 그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조는 동탁을 피해 달아나던 중 진궁(陳宮 : ?-198)에게 잡혔다가 자기 아버지의 친구인 여백사(呂伯奢)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여백사의 가족들이 돼지고기를 요리하려고 준비하는데 조조는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여백사의 가족을 모두 죽인 후 다시 도망치다가 시장에 갔다 돌아오는 여백사까지 잔인하게 살해합니다. 이에 실망한 진궁은 조조와 결별합니다.

조조가 원술을 정벌하러 갔다가 군량미가 떨어져 군의 사기가 떨어지자 군량미 담당관인 왕후(王后)에게 군량미를 떼어 먹은 범법자로 죄를 씌워 목을 베어 군의 동요를 막습니다.

조조가 적벽대전에 앞서 지은 시를 유복(劉馥 : ?-208)이 ‘달은 밝고 별빛 사라지니 까마귀 울며 남으로 날아가 나무를 세 바퀴 돌아도 의지할 가지가 없어라’라는 대목이 불길하다고 하자 긴 창을 뽑아 유복을 찔러 죽입니다.

조조는 자기가 잘 때는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죽이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합니다. 어느 날 거짓으로 자는 척하고 있는데 시중드는 사람이 이불을 덮어주려 하자 조조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난 뒤 그대로 잠이 든 척하다가 나중에 침대에서 일어나 애통해 합니다. 그때부터 아무도 조조가 잠잘 때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조는 여러 여자를 탐하다가 원소의 며느리였던 견씨를 두고 아들 조비와 약간이 갈등을 빚는 등의 여색(女色)을 지나치게 밝히는 행위를 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조조는 참으로 상종 못할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들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정사를 중심으로 이 점을 하나씩 간략히 봅시다.

정사에 “동탁은 조조를 수도경비대장(효기교위)에 임명하여 모든 일을 그와 상의하려 했으나 조조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샛길을 따라 고향인 초현으로 돌아왔다. 중모현을 지날 때 의심을 받아 현성까지 압송되었지만 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났다.”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백사 가족 몰살 사건은 없었던 사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진궁이 실은 조조에게는 배신자였다는 것입니다. 조조가 도겸을 공략할 때, 진궁은 장막과 함께 조조에 반역하여 여포를 연주로 불러들여 군과 현이 모두 이에 호응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눈앞에 둔 서주 정벌을 다하지 못하고 다시 철군하게 됩니다. 진궁은 적어도 조조에게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후일 조조에게 투항하려던 여포를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조조는 투항을 거부한 진궁을 죽인 후 진궁의 가족들을 후하게 보살펴줍니다. 진궁은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오히려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나오고 있지요.

왕후의 죽음은 정사에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 왕후라는 인물 자체가 정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도 지어낸 사건으로 볼 수 있지요. 논자에 따라서 정사에 없다고 그 사건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분이 가끔 있는데 그것은 아니지요. 설령 정사가 나온 이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후세의 다른 책에 어떤 새로운 사건이 기록되었다고 그것을 사실로 보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이 이야기는 야담집 ‘세설신어’에 있는 이야기일 뿐입니다.‘세설신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조조가 전선에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장수와 상의해보니 병력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당시 조조가 군사들을 속이고 있다는 말이 돌자 즉시 그 말을 퍼뜨린 주동자를 잡아서 병사들에게 줄 양식을 계량기 조작으로 빼돌려 도둑질한 자라고 처형하였다. 조조는 ‘너의 죽음으로 모범삼아 군사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라고 말했다"(이 글은 ‘조만전’에도 있지요)

유복의 죽음도 조조와는 무관합니다. 유복은 정확히 208년에 죽었으며 양주자사로서 합비에 있었기 때문에 적벽대전에 참전할 수가 없는데, 유복의 죽은 연대가 대체로 시기가 일치하니까 나관중이 갖다 붙인 것입니다.

조조가 잠을 잘 때는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죽이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다가 시중드는 사람을 일부러 죽인 것도 정사에는 없는 얘기입니다. 단지 야담집 ‘세설신어’에 ‘조조는 자기가 잘 때는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죽이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였다. 어느 날 거짓으로 자는 척하고 있는데 시중드는 사람이 이불을 덮어주려 하자 조조는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때부터 아무도 조조가 잠잘 때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라는 이야기가 있죠.

정사에 따르면 견씨를 아들과 함께 차지하려고 했다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조(아버지)와 조비(아들)가 한 여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동양사회에서는 가장 큰 인신 모독을 가하려는 시도입니다.

이상의 사실을 보면 위의 내용들은 대부분 지어낸 이야기로 사실이 아니지요. 결국 조조가 악인으로 등장한 가장 큰 이유는 나관중 ‘삼국지’에 있고 그 연원을 더듬어 가면 ‘세설신어(世說新語)’라는 야담집(野談集)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세설신어(또는 ‘세어’)’는 위진 남북조시대의 대표적 산문 작품으로 당시에 살았던 유명 인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에 처음으로 완역되었습니다. ‘세설신어’는 위진남북조시대 송(宋)나라의 문인 유의경(劉義慶ㆍ403- 444)이 지은 것으로 후한 말에서 동진말까지 약 200년간 실존했던 제왕과 귀족·문인·현자·스님·부녀자 등 7백여명에 달하는 인물의 언행과 일화를 총 1천여 항목 36편(篇)으로 구성하여 수록해 놓은 고사 모음집입니다.

'세설신어’는 당시의 문학·예술·정치·역사·사회상 등 인간생활의 전반적인 면모를 담고 있어 당시의 문화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필독서로 꼽히고 있지만 그 내용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주로 소문이나 야담에 근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세설신어’는 중국 후한시대부터 동진(東晋)시대에 걸쳐 사대부의 일화를 기록한 책이고 동진과 관련된 기록이 대부분입니다.

‘세설신어’는 후에 양(梁)나라의 유효표(劉孝標:462-521)가 다시 주(注)를 달아놓았는데, 이 때 달아놓은 주석에는 현존하지 않는 서적들의 이름이 많이 나와서 문헌학 상으로도 중요한 책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중국의 소설 발전에 있어서는 매우 큰 기여를 합니다. 위에서 말하는 조조의 행위들은 대부분 실제의 정사의 기록에는 없으며 다만 ‘세설신어’에만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모두 지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 외에도 ‘세설신어’에 나오는 대표적인 이야기들을 소개해보겠습니다.

조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행군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군사들이 갈증에 시달리자 조조는“조금 더 가면 매화나무 숲이 있다. 이제 곧 갈증을 풀 수 있다.”라고 하자 병사들이 매화를 생각하자 입에 침이 고여서 물이 있는 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조조는 항상 자기를 죽이려는 자가 가까이 있으면 가슴이 쿵쿵 뛰어서 알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심복을 시켜 칼을 품고 몰래 다가오면 조조가 사로잡아서 심문을 하더라도 자기가 시킨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심복은 조조의 말대로 하다가 즉각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주위 신하들도 감히 조조를 해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조조가 어느 날 건축현장을 시찰하였다. 조조는 대문의 기둥에다 활(活)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놓고 갔다. 일꾼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양수(楊修)가 이를 보더니 “ 문(門)에다 활(活)자를 넣으면 넓을 활(闊)이 되지 않나? 즉 문이 너무 크다는 소릴세.”라고 하였다.

조조에게는 노래를 잘하는 기녀(妓女)가 있었는데 성질이 고약하였다. 그래서 조조는 여자 1백 명을 선발하여 노래를 배우게 하고 노래를 잘하는 기녀가 생기게 되자 성질이 고약한 기녀를 죽여 버렸다.

‘세설신어’ 이후에도 조조에 대한 각종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져 왔습니다. 중국에는 전문적인 이야기꾼들이 있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도 원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설신어’와 더불어 조조를 악인으로 묘사한데 크게 기여한 책은 ‘조만전(曹瞞傳 : 작자 미상)’이 있습니다. 오나라가 멸망한 후 오나라 땅에 살던 사람이 쓴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 ‘조만전’에는 조조가 경박스럽기 그지없고 교활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요. 이 책의 저자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오나라를 핍박한 조조나 진나라에 대해 상당한 적대감을 가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만전’에 있는 내용으로 조조는 낮잠을 제 시간에 깨우지 않았다고 애첩(愛妾)을 매질해 죽이기도 하고, 관도대전 중 원소의 보급창인 오소(烏巢)를 공격할 때 원소의 병사들을 살해한 후 코를 베고, 마소의 입과 혀를 잘라 버리기도 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책은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세설신어’와 ‘조만전’은 조조가 악인의 대명사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후에도 시대적인 분위기를 타고 조조에 대한 각종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졌지요. 직업적인 이야기꾼들의 입장에서는 ‘콩쥐 팥쥐처럼 선과 악이 확실히 대비되고 좀더 엽기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라야 밥벌이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 조조, 참을 수 없는 경박스러움

나관중 ‘삼국지’에서 묘사된 조조는 매우 천연덕스럽고 경박스럽습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장면들을 보지요.

첫째 장면입니다. 진궁이 여포의 수하로 들어간 뒤, 조조와 여포의 일대 접전이 벌어집니다. 여포의 위계에 속아서 조조는 고립되는데 이 때 여포의 장수들이 추격하자 조조는 북쪽으로 도망칩니다. 어둠 속에서 여포가 말을 달려와 조조를 자기의 부하인 줄 착각한 여포가 조조의 뒤통수를 툭 치면서 ‘조조는 어디에 있어?’라고 하자 조조는 손을 들어 반대편을 가리키면서 ‘저 앞에 누런 말을 타고 도망가는 놈이 조조입니다’라고 둘러댑니다.

이 부분의 정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94년 여름 여포의 군대가 조조의 청주병을 공격하자 청주병이 무너졌고 조조군의 진세가 혼란스러워졌다. 조조는 급히 말을 달려 불길을 빠져나오다 말에서 떨어져 왼쪽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위서 무제기).

진궁이 여포를 맞이하자 견성·동아·범현 등을 제외한 연주의 나머지 군들이 여포에 호응하였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여포와 복양에서 싸웠는데 조조군이 불리한 가운데서 1백여 일 동안 서로 대치했다(위서 여포전).

둘째 장면입니다. 마초(馬超 : 176-222)가 211년 한수 등과 함께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키자 조조는 이를 진압하러 갔다가 대패하여 도망을 치게 됩니다. 조조가 도망을 치는 가운데 “붉은 도포를 입은 놈이 조조다.”라고 하는 소리를 듣자, 조조는 겁에 질려 말위에서 붉은 도포를 벗어던집니다. 그러자 서량의 군사들이 다시 “수염이 긴 놈이 조조다.”라고 하니 조조는 놀라서 칼을 뽑아 수염을 자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수염이 짧은 놈이 조조다”라고 하니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칩니다.



그런 와중에서 마초가 창을 휘두르며 뒤따라오자 조조는 급한 김에 나뭇가지 위로 튀어 오릅니다. 마초가 이 때 창을 던졌는데 창은 아슬아슬하게 조조를 스쳐 지나가 나뭇가지에 박힙니다. 마초가 급히 창을 거두는 순간 조조는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마치 코믹 만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정사에는 이런 내용이 없고 “조조가 마초 등과 동관(東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치게 되었다. 조조는 정면에서 급히 마초를 압박하고 견제하는 한편 은밀히 황하 서쪽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조조는 동관의 북쪽으로 강을 건너 마초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미처 강을 건너기도 전에 마초군과 격전을 치렀다.”라는 정도만 되어있습니다.

셋째 장면입니다.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조조가 도망을 갈 때 이야기죠. 조조는 오림(烏林)을 지나면서 이제야 살았다는 듯 깔깔 웃더니 “주유와 제갈량은 모두 멍청한 놈들이야. 나 같으면 산 밑에 군사를 매복했을 텐데.”라고 하자 이내 쿵 하고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으면서 조자룡이 나타납니다. 혼 줄이 난 조조가 달아납니다.

호로구(胡虜口) 앞에 이른 조조와 그의 군대가 밥을 지어먹습니다. 조조는 나무 밑에서 쉬고 있다가 다시 깔깔거리며 웃으며 “주유와 제갈량이 우둔한 놈일세. 나 같으면 이렇게 우리가 쉴 때 기습할 터인데.”라고 하자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전후에서 일제히 함성이 일어납니다. 조조는 다시 정신없이 말을 타고 줄행랑을 칩니다.

화용도에 접어든 조조가 행군을 하다가 갑자기 채찍을 치켜들고 깔깔거리며 웃더니, “ 주유와 공명이 최고의 전략가라더니 내가 보기엔 어리석은 놈들이야 이런 곳에 군사 몇 백만 배치해도 우리는 꼼짝없이 잡힌 몸일 텐데 말이야.” 라고 합니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둥소리 같은 포를 신호로 칼을 든 5백 명의 군사들이 달려오고 관운장이 청룡도를 들고 앞길을 가로 막습니다. 이에 조조는 다시 관우에게 인정에 호소하며 통 사정을 하여 무사히 탈출합니다. 이 대목은 관우는 신의가 두터운 사람으로 묘사된 대표적인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대부분은 모두 없는 이야기입니다. 정사에는 “조조는 적벽(赤壁)에 도착하여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해졌고, 이 때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위서 무제기, 촉서 선주전).”라고만 되어있습니다.


이 당시 상황을 좀더 정확히 나타내주는 자료로는 위서 무제기의 주석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조조는 유비에 의해 군선들이 불태워 지는 것을 보고 군대를 이끌고 화용(華容)으로 난 길을 통해 도보로 돌아왔는데 진펄을 만나 다시 길이 막혔다.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조조는 군사들 모두 풀을 등에 지고 진펄을 막도록 하니 기병들이 곧 지나갈 수 있었다. 군사들 가운데 말에 밟히고 진흙 속에 빠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 군대가 무사히 탈출하자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유비는 나와 비슷한 류의 사람이라도 계략을 짜는 데에 있어서 한 박자 느리지. 유비가 화공(火攻)으로 우릴 공격했으면 우린 전멸했을 거야”라고 하였다. 유비가 불을 놓아 공격했으나 이미 이들이 지난 후였다."

이상과 같이 나관중 ‘삼국지’는 조조를 매우 경박스러운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인 듯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모습은 나오지를 않지요. 결국 이 같은 나관중 ‘삼국지’식의 묘사덕분으로 조조는 흉악한 사람인데다 그 성격에 걸맞은 경박한 인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죠. 따라서 조조는 동양에 있어서 가장 전형적인 악인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이로써 조조는 후세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겠지요? 즉 악인의 모습은 말이야 바로 바로 ‘조조’같은 모습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3) 조조, 중국인이 포기한 영웅

조조의 예를 통하여 우리는 중국인들이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얼마나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극심하게 왜곡할 수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정사나 역사적 사실보다는 대중 소설이 가까이 있습니다. 특히 나관중 ‘삼국지’는 이른 바 ‘천년의 고전(古典)’이어서 사람들은 역사적인 실제보다는 나관중 ‘삼국지’를 사실로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요구한다고 해도 역사적인 인물의 실체를 외면하고 철저히 왜곡시킬 수 있는 중국적 풍토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죠.

물론 일시적으로 이 같은 현상은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최영 장군과 이성계와 같이 서로 상반된 인물들은 경우에 따라서 한 사람만 미화(美化)될 수 있지요. 그러나 나관중 ‘삼국지’(이전의 아류를 포함)는 천년 이상의 베스트셀러가 됨으로 심각한 역사적 왜곡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중국인들이 꾸며낸 이야기 속에는 중국의 당면 과제를 해소하기 위한 시대정신이 존재하겠지요. 그리고 이것은 중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고리가 됩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조조 악인설(曹操惡人說 : 조조는 나쁜 사람이라는 뜻)에 기반하여 조조를 악인의 상징으로 묘사하죠.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필요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간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재단한 경우입니다. 쉽게 말해서 중국인들은 중원을 통일한 영웅 조조를 포기하고 맙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했을까요? 여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네 가지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시대적이고 정치적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조광윤이 건국한 송나라(960) 이후 명나라가 건국될 때(1368)까지 중국은 지속적으로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특히 송나라 초기에는 요나라와 금나라에 의해 굴욕[전연의 맹(1004), 정강의 변(1142)]을 당하다가 장강 남쪽으로 쫓겨 가고(1127) 송 말기에는 아예 몽골의 침입으로 국가가 망하고(1279) 이민족에 의한 통치를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한족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지만 무력으로 그들을 쳐부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삼국지’는 이용되었을 수가 있죠.

즉 한족(漢族)의 입장에서 지배세력인 요나라·금나라·몽골 등을 직접적으로 비난할 수 없으므로 조조를 악인으로 만들어 그가 남하하는 것이 마치 이들 북방민족(요나라·금나라·몽골)들이 남침하는 것과 동일시한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환난에 쫓기는 유비는 도덕적이고 어진 중국인으로 묘사하고 이에 정반대의 인간으로서 조조를 묘사한 것입니다. 즉 조조는 바로 북방 유목민 계열의 종족의 상징이었던 것이죠(조조가 북방유목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둘째는 남중국과 북중국간의 문화적 이질감(異質感)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마염의 진(晋)나라는 북방유목민에 의해 남중국(양자강 이남)으로 밀려가고(317) 이것은 당나라의 건국(618)까지도 계속됩니다. [그림
]을 보시죠.



[그림 ]에서 왼쪽 그림이 사마염(司馬炎)이 건국하고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즉 서진(西晋)의 영역인데, 이 서진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북방 유목민(대쥬신?)이 대륙에 진출함에 따라 강남 지역으로 이동하여 동진(東晋)이 건국됩니다([그림 ] 가운데). 즉 한족의 중심 영역이 역사상 최초로 강남으로 이동한 것이죠(‘세설신어’에는 동진시대에는 북쪽에 두고 온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거나 북중국을 회복해야한다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이후 수나라, 당나라 때까지는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됩니다([그림
] 오른쪽).

그리고 당나라의 건국 시조도 모계(母系)가 북방유목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는 강력한 한화정책을 시행하여 사실상 한족(漢族)의 정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송나라 때도 북방유목민의 침입을 받아서 남중국에 정착(1127)합니다. 남송시대는 몽골의 침입으로 역시 북중국과는 상당한 민족적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남송시대에 특히 주자(朱子 : 1130-1200)를 중심으로 유비(劉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죠(남송 멸망 이후 원나라 말기부터 명나라 초기에 나관중 ‘삼국지’가 편찬되지요).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1368) 역시 남중국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명나라는 강남땅을 근거로 하여 전 중국을 통일한 유일한 왕조입니다. 명나라는 과거 오나라의 수도였던 건업(현재의 난징)을 수도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볼 때 한족(漢族)의 순수성(純粹性)은 주로 양자강 이남의 남중국에서 지켜졌다는 인식이 퍼져 나갔을 것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한족들에게 있어서 양자강 이북의 사람들에 대한 민족적ㆍ문화적 이질감이 나타나 조조를 포함한 위나라 사람들을 한족(漢族)과는 다른 이민족에 비유하기 쉽게 된 것도 원인일 수가 있습니다. 실제 [그림]들을 보면 위나라 영역과 북방유목민들의 영역들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북조-금-원(몽골) 등은 위나라의 영역과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소설 또는 연극적인 재미를 위하여 조조는 더욱 악인으로 변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일정한 사회관습을 벗어나서 존재하기가 어렵지요. 그래서 세상에는 아주 엽기적인 사람들을 찾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평균적으로 보아 남보다 악행을 더 하는 정도이지 악행 그 자체를 위해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극소수겠지요.

그런데 소설이나 연극이 너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면 인기가 없는 법입니다. 특히 이야기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이야기꾼들(또는 연극인 무리)의 존재가 있으면 더욱 그러합니다. “보다 재미있게 보다 신기하게, 보다 엽기적으로” 이야기 해주면(연극을 공연하면) 사람들에게 인기가 올라가고 돈벌이도 잘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 과정에서 유비와 조조를 더욱더 선과 악으로 선명하게 대비시킨 것이겠죠.


넷째는 중국의 지리적인 특성을 들 수 있습니다. 즉 땅이 광대하다는 것이죠. 원래 한 사람의 이력이란 복잡하게 마련이고 이것을 객관적인 묘사하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땅이 너무 넓은데다 지식인은 많지 않다면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묘사할 수밖에 없지요.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은 나쁘게 보이지만 사실은 그 당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고 따라서 그를 나쁘게 보는 것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식으로 복잡하게 묘사하게 되면 중국같이 넓은 나라에서는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습니다. 그저 “그 사람은 교활하고 간사하고 나쁜 놈이야. 그 놈이 하는 일이라는 게 다 그런 식이지 뭐”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요즘은 언론이 발달하고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구축되어있지만 지금부터 불과 50년 전만 해도 신문이나 언론이 제대로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유언비어가 난무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조조는 더욱 악당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봐야죠. 유언비어(流言蜚語)는 중국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이 하나입니다(극단적으로 말하면 유언비어를 빼놓고서 중국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여러 종류의 뜬소문들이 이야기꾼들의 입을 타고 다양한 모습으로 재구성되고 새롭게 탄생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인물들의 실체를 철저히 왜곡함으로써 소설적인 재미를 극대화하면서 중국이 대외적으로 얻을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큰 의미에서 보면 조조(曹操)라는 영웅을 포기함으로써 중화주의(中華主義)가 세계적인 전파가 가능하게 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역사의 인물들은 모르면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줄줄이 외우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보다도 더 중국이 문화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요즘의 시각에서 보아도 ‘삼국지’는 매우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워낙 볼거리나 소일거리가 많은데도 ‘삼국지’에 이 만큼 열광을 하는 정도이니 과거에는 오죽했겠습니까? ‘삼국지’를 통하여 중국의 주변 국가 사람들은 중국의 광대함과 중국인들의 의리, 충성스러움 등을 배우게 되고 그것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무의식중에 ‘중국은 위대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중국적인 요소들은 나쁜 것이고 중국적인 것은 옳은 것이고 본받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죠. 다음 회에서는 실제의 조조라는 인물을 함께 평가해봅시다.

 

출처 : 올드뮤직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