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7>

영지니 2010. 4. 15. 19:47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7>

조조, 중국이 포기한 영웅(하)


[
들어가는 글]

중국인들은 영웅들을 서로 대조시켜서 묘사하기를 즐겨합니다.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유비(劉備)와 조조(曹操), 조조와 원소(袁紹), 제갈량(諸葛亮)과 사마의(司馬懿) 등의 비교를 통하여 고금(古今)을 얘기하고 영웅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비단 중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본(日本)의 경우에도 난세의 두 영웅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비되면서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르게 평가되기도 합니다. 도요토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업적을 계승하여 무력으로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하여 동아시아에 국제전쟁을 일으킨 사람이고, 도쿠가와는 도요토미가 죽은 후 일본을 수습하고 평화의 일본을 연 사람이지요.



평화 시에 도쿠가와는 일본의 사마의요 유비에 버금가는 인물로 묘사가 됩니다. 실제로 도쿠가와는 살아온 환경이 유비만큼 힘들었으며 지략 면에서도 사마의에 못지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전시(戰時)라든가 일본이 군국주의적인 경향이 강화되면 도요토미가 부상합니다. 도요토미는 제갈량 이상으로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폭군으로 알려진 세조를 다시 평가하기도 하고 살제폐모(殺弟廢母), 즉 어머니 격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였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천하에 의리 없는 폭군으로만 알려진 광해군(光海君 : 1608~1623)이 재평가되어 시대에 매우 능동적으로 대처한 현명한 군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삼국지’로 말하면, 조조(曹操)와 유비(劉備)는 시대를 걸쳐 달리 해석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조조는 이미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새삼 거론한다는 것이 재미가 없을 듯도 합니다. 그러나 ‘삼국지’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그래도 조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 어차피 조조에 대한 평가를 한 번은 해야 하니 일반적인 이야기를 해보지요. 조조에 대한 기록은 많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반드시 지적할 사항들을 중심으로 거론 하도록 하겠습니다.


(1) 승자(勝者) 조조

저는 이전 강의에서 조조가 촉한정통론으로 인하여 폄하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세설신어(世說新語)’와 ‘조만전(曹瞞傳)’을 토대로 ‘조조 = 악인’이라는 등식을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본대로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조조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사람인가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흔히 ‘삼국지’를 읽는 사람들이 한쪽으로 편협되어 “너는 누구편이냐?”는 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조조의 편을 들면 어떻고 유비의 편을 들면 무엇 합니까?). 그저 사실을 한 번 보자는 것이죠.

조조를 제대로 알기 위하여 먼저 조조의 약력을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조조는 20세에 효렴(孝廉)을 통해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황건 농민전쟁(황건적의 난) 때 황건군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조조는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다가 동탁이 죽고 이각ㆍ곽사의 난 중에서 장안[지금의 서안(西安)]을 탈출한 헌제(獻帝)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許)로 맞아들여 대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조조는 가후를 비롯하여 순유ㆍ순욱ㆍ곽가ㆍ장료 등 천하의 인재들을 등용하여 제도와 군대를 정비한 후 최대의 경쟁자인 원소(袁紹)를 관도(官渡)에서 격파하고 중원통일을 달성합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제압한 후 중원통일을 달성한 조조는 자신의 심복들로 조정을 장악합니다. 이 때 조조의 신하들은 조조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특권을 누리게 합니다. 즉 황제 앞에 나아가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찬배불명(贊拜不名)], 황제 앞에서 경의를 표하면서 빨리 나아가는 것이 황제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나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고[입조불추(入朝不趨)], 황제 앞에 나아갈 때에도 칼과 군화를 착용할 수 있는 특권[검리상전(劍履上殿)]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주 관내의 10군으로 위국(魏國)이 성립되자 조조는 위공(魏公)이 됩니다(215). 뿐만 아니라 조조는 사실상 황제의 예우에 준하는 구석(九錫)을 받게 됩니다. 

이어 조조는 당시 중국의 외곽에 잔존한 반란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남중국 정벌에 나섰으나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에 패하였습니다. 그 후 조조는 위왕(魏王)이 되어 독자적인 영역과 관료체제를 갖추어 후한을 대체할 새로운 왕조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216), 조조가 죽자 맏아들 조비는 헌제를 폐하고 제위에 오릅니다.

정사에 기록된 부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조는 분열된 중국의 대부분을 통일했으며 중앙집권제를 강화하였고, 둔전제(屯田制)를 시행하여 국가경제를 살리고 모범적인 인재등용(人才登用)을 실시한 군주로 중국사 전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조조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진수는 조조를 평하여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에 대처하였으며 구악(舊惡)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위서 : 무제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이성적인 판단으로 일에 대처하고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사람을 등용했다는 것이죠.

조조는 재능이 있는 사람을 매우 아껴 자신에게 반역한 필심(畢諶)이 효자라는 이유를 들어서 중용하기도 하고 자신의 적을 도왔던 위충(魏
?)을 하내군의 태수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원소 휘하의 문장가였던 진림(陳琳)이 관도대전에 임하여 조조에 대해 모독적인 인신공격성 격문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줍니다. 그러면서 조조는 진림에게 “이 보시게, 나를 비판하는 것이야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지만, 나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대해서까지 욕할 게 무엇이 있었나?”하는 정도의 불평만 합니다.

  [그림④] 두 아들(조비와 조식)을 시험하는 조조(드라마의 한 장면) ⓒ프레시안

관도대전이 끝날 무렵입니다. 조조는 원소의 부대를 점령하고 난 뒤 원소의 기밀서류를 모두 불태워버립니다. 그런데 이 편지들은 조조 휘하의 사람들이 은밀히 원소와 내통한 편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위씨춘추(魏氏春秋)’에 따르면, 조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보시게, 원소가 얼마나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나? 당시에는 나 자신도 마음을 수습하기가 어려웠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위서, 무제기 주석)” 하면서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자기 부하들의 과오를 덮어둠으로써 새 정부에 참여하기 쉽도록 만들어 줍니다. 조조의 정치가로서 도량의 크기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가들이 배워야할 덕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로만 상생(相生)의 정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조조와 같이 실천을 해야지요.

조조는 다독(多讀)하는 편이었지만 가장 탐독한 책은 법가사상과 병법이었다고 합니다. 조조는 후한말기의 혼란한 사회는 예(禮)와 같은 도덕적 규율로 통치할 수 없다고 보고, 관자(管子)·한비자(韓非子)와 같은 법가의 저술을 탐독하였습니다.

 

조조는 황건 농민전쟁(황건적의 난) 당시, 30세에 기도위(騎都尉 : 기병대장)로서 출정하여 공을 세우고 그 공적으로 제남국(濟南國)의 상(相)이 되었는데, 이 당시 조조는 8명의 장관을 파면하고 6백여 개의 사당(祠堂)을 모조리 없애어 관민에게 제사를 금합니다. 즉 허례허식을 일소하여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자는 말이죠.

지금 여러분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제가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교과서에는 제사나 무당의 굿 등의 허례허식으로 많은 돈이 낭비되어 경제적 부담이 크니 이것을 줄여야 된다는 캠페인이 있기도 했습니다. 하물며 유교가 국시(國是)인 나라에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조조의 이러한 조치는 ‘귀신’에 대해 경원시하는 일반적인 유교의 신봉자라면 하기는 어려운 일이죠. 조조의 과단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조조는 황제를 모시고 중앙정부를 운영ㆍ유지하였기 때문에 다른 제후들에 비하여 많은 예산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조조는 어떻게 해서든지 국고(國庫)를 증대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경제 개발에 전력하거나 조세원(租稅源)을 확보하여 군형재정(均衡財政)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말이지요.

 

조조 자신도 제도의 개혁과 정비가 다른 어떤 무력보다도 국력을 증강시킨다고 보고 제도 개혁에 전력합니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주변의 모든 제후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경제적 원동력이 됩니다. 제도개혁과 관련하여 조조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수리시설 정비와 둔전제(屯田制)의 시행이었지요. 조조의 정책은 부국을 위한 중농주의(경제제일주의), 강병을 위한 군사주의(군사지상주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추구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는 다루지 않지만, 조조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둔전제(屯田制)의 시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가들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특성보다는 어떤 정책으로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는가 하는 점이지요. 나폴레옹은 자신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은 수십 차례에 걸친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나폴레옹 법전’이라고 강조했던 것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둔전제는 중국 한(漢)나라 이후 청(淸)나라 때까지 시행된 토지제도로 일정한 지방에 집단적으로 경작자를 설정하여 새로운 영토나 관유지를 경작하는 방식입니다. 둔전제는 전한시대 이후 국경지방에 대군을 주둔시킬 때 흔히 사용되던 정책이었는데 조조는 이를 대규모로 시행하였던 것이지요.

조조는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토지가 황폐해지자 전시 하에서 대량으로 발생한 유랑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정착시키는 동시에 군대를 편성한 점이 이전의 둔전제와는 다릅니다. 둔전제를 통하여 조조는 유랑농민들에게 토지를 주고 예비군으로 편성하여 국방력을 강화했으며 둔전제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재정 적자를 메우고 중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전란으로 인한 기아문제도 조조로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지요. 즉 다른 제후들의 병사를 궤멸시키고 그 병사들을 수용했다고 해서 이내 군사력의 증강이 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먹여살려야 할 인구만 더 증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조의 입장에서는 청주 등지에서 투항(192)한 30여만 명의 황건 농민군 병사들(1백만 이상의 주민), 북방에서 투항(207)한 유목민의 20여만 명 및 각지에서 투항한 병사들은 심각한 재정 부담의 증가를 초래한다는 말이죠.

이들 투항한 병력은 조조 군사력을 강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만큼 부양할 인구의 증대를 초래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만큼 생산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뿐만 아니라 투항병들은 이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다르므로 전투력으로 그대로 전환시키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지속적으로 무수한 정벌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마다 발생하는 투항병과 주민들의 수용은 천하통일도 통일이지만 이들을 먹여 살려야만 하는 부담을 조조는 끊임없이 지게 되는 것이죠. 조조는 불가피하게도 준전시(準戰時 : 계엄령) 통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에 상응하는 경제정책이 절실히 요청된 것입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형태가 둔전제라 볼 수 있습니다.

둔전제의 토지세율은 비교적 높은 편(5할)이었지만 큰 무리 없이 시행되었고 이 정책은 성공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에서 유랑민들이나 빈민들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굶어죽거나 도적이 되는 것보다는) 기꺼이 둔전으로 모여들었던 것이죠.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것도 둔전제로 인한 풍부한 식량 덕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오나라나 촉도 이를 모방하여 시행합니다. 관도대전을 비롯한 여러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둔전제로 군대를 손쉽게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위나라는 둔전제를 통하여 버려진 땅들을 유랑농민에게 임대해 줌으로써 황폐한 산업기반을 다시 구축하고, 토지세를 받음으로써 균형재정을 달성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으며, 그 농민들을 예비군으로 편성하여 병력확보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국방력 강화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조조는 중원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죠. 

 

조조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내면서 수많은 승리를 이끌어냅니다. 조조는 군사 전략가로서 탁월한 사람이지만 그 부분은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조조는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자신이 직접 주를 달고 제가병법(諸家兵法)을 집대성하여 전술의 교본(敎本)으로 군(軍)에 반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조조는 정책이라는 측면에서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재를 중시하고 상생과 화합의 정치를 추구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당시가 내전(內戰)중이었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군주로서의 역할은 매우 훌륭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조조의 과오

그렇다면 앞서 지적한 것처럼 조조는 장점만이 있는 사람일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조조에게는 크게 두 가지의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살펴봅시다.

정사에 따르면,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曹嵩 : ?-193)이 가족을 이끌고 피난을 갔다가 도겸에게 몰살당하자 조조는 대대적으로 도겸을 토벌합니다. 조조는 도겸의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조조의 군대가 지나간 지역은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위서 : 무제기).

관도대전에서 대패한 원소가 황하를 건너 도망가고 원소의 장수 고람(高覽)과 장합(張?)이 이끄는 군대는 투항했으나 나머지 병력들이 거짓 투항을 하여(소요를 계속 일으키자) 이들을 모두 매장합니다(紹將高覽、張?等率其衆降。… 餘衆僞降,盡坑之 : 위서, 원소전). 

조조는 가족이 몰살당하자 아마 거의 이성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주를 향하여 대대적인 정벌을 하였는데 이 때 많은 양민들이 죽습니다. 그리고 관도대전에서 승리를 하는데 황하를 건너 탈출하지 못한 병력들 가운데 투항을 거부한 원소의 병사들을 생매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도겸이 충의지사이며 조숭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도겸은 매우 파렴치하고 도의를 모르는 인물로 여러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으며 도겸은 기병 수천을 보내어 조조의 일족을 멸족시킨 사람입니다. 이에 조조는 크게 분노하여 도겸을 정벌하여 다섯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그 토지를 공략하여 동해까지 갔다가 도겸이 부장 조표와 유비가 조조를 공격했으나 조조는 이들을 격파합니다.

이 때 조조가 지나간 지역은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고 정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이 일로 평생 정치적인 부담을 안고 있었으며 후일 서주를 방어하고 있던 관우를 살려준 것도 이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당시 서주를 홀로 방어하고 있던 관우를 죽이지 않고 서주인들에 대해 호의를 보임으로써 서주인들을 위로하려 했던 것이지요. 조조는 관우에 대해 관용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을 보면 정치가들은 아무리 화가 날 일이 있어도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걸린 일을 함부로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원소의 군대들 가운데 투항하지 않은 병사들을 생매장한 문제도 조조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입니다. 한기(漢紀)에는 “이 때 죽은 원소의 병사들이 모두 8만여 명에 이른다(殺紹卒凡兵八萬人)”고 합니다만, 그 수는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 중국의 경우에 전쟁에서 이긴 사람이 패자의 군대를 대량으로 생매장하거나 학살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는 생각해 볼만한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난세에는 식량부족이 만성화된 상태입니다. 이들 군인들은 군대생활에 젖어있기 때문에 농민으로 전환시키기도 어렵고 군대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면 많은 비용이 따릅니다. 설령 귀농하여 농민이 된다 해도 위험한 불평분자가 될 소지가 많고 자기 휘하에 두더라도 정치적으로 완전히 종속시키기가 어렵고 반역의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설령 그 어떤 이유가 있었더라도 인명을 대량 학살한 것은 용납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특히 정치가로서 그 같은 일에 개입되었다는 것은 정치 생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만약 같은 상황에서 유비였다면 그 많은 군인들을 죽이거나 생매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같은 조조의 행위는 이후에도 조조를 악인으로 인식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같은 행위들은 조조의 역사적 과오로 기록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관념으로 포로에 대한 처리는 기본적으로 승자의 몫이지만 서주의 경우와 관도대전의 경우에서는 적절히 대응한 것으로 볼 수는 없겠지요. 어쩌면 이 같은 과오가 조조를 천년 이상 악인으로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3) 조조의 딜레마

조조의 위대성으로 흔히 인재 등용정책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틀리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조의 인재 등용 정책은 모두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조조의 큰 업적 중의 하나인 인재 등용정책은 그 자체에 상당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죠.

조조는 기존의 한나라 황제를 옹립하고 있었고 장기적으로는 새 왕조를 창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황위 찬탈에 대한 비난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나치게 원칙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보다는 능력이 있고 시대의 흐름에 순응할 줄 아는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등용한 것이지요.

따라서 조조에게는 한나라를 주도하던 가문들, 예건데 공씨(孔氏)·양씨(楊氏)·원씨(袁氏) 등이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조조는 원소의 도전을 물리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의 영역 내에 있는 당대의 주류 가문들을 정치적으로 제거하게 됩니다. 이들은 한나라 황실을 철저히 보호하려던 사람들이었기에 조조와는 친할 수가 없는 가문들이었지요. 그리고 이들은 한황실과 정치경제적으로 이해관계가 동일하죠.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공융(孔融 : 153-208)이나 양수(楊修 : 175-219)의 죽음 등이 이 부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나라를 이끌어 온 이들 가문들은 나름대로 상당히 강건한 기풍과 학문적인 건강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몰락은 결국 한나라의 건강성을 유지하던 중추 세력의 몰락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죠. 나아가 중국 내의 강건한 기풍이 사라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결국 조조에게는 도덕성보다는 능력만 가진 사람들이 다수 모이게 됩니다. 이것은 위나라의 장기적인 발전에 분명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어느 단체나 조직이든지 능력만 있는 사람들만 모아 놓으면 대부분은 대의(大義)보다는 개인적인 영달이나 부귀, 영화를 추구하게 되면서 강건한 기풍이 사라지게 됩니다. 특히 정당이 뚜렷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소신도 없이 정권만 잡으려 하다 보면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마련이지요. 이것은 조조의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딜레마였던 것이죠.

다시 말해서 위나라 조정의 분위기는 강건한 기풍이 사라지고 오직 출세만 지향하는 환경에서 현실주의적인 풍토가 조성이 되니 왕조의 멸망을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외면 받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결국 위나라가 사마씨 가문에 의해 몰락한 것도 그 결과라고 보여 집니다.

그러므로 조조는 위대한 업적과 허물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군주가 장점만을 가질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관중 ‘삼국지’ 식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군주의 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하나의 시각만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통하여 조조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장단점을 파악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일부의 업적에 대해서는 평가를 했지만 종합적인 평가와 판단은 여러분들께 맡겨두기로 하겠습니다.

사족으로 조조는 철저히 실용적이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군주였습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진림의 반조조(反曹操) 격문(檄文)인데 여기에서 진림은 조조를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 : 묘를 파헤치는 사령관)이나 모금교위(摸金校尉 : 도굴대장)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진림이 조조를 도굴대장으로 묘사를 했다는 것은 조조가 분묘를 파헤치고 그 분묘 안에 있는 금은보화를 나라 정책을 위하여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즘에는 과거의 유산을 함부로 파헤치는 일이 용납될 수 없겠지만 조조는 아마 국가경제의 중요한 재화인 금과 은 등의 보물들은 지하에 두어 썩힐 것이 아니라 현실 경제에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유가(儒家)에 젖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조조는 임종(臨終)을 맞아 다음과 같이 유언합니다.

“천하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예법을 따를 수 없다. 나의 장례가 끝나면 모두 상복(喪服)을 벗어라. 그리고 장병들은 진영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 관리들도 제 자리를 지켜라. 입관(入棺)할 때는 평상복을 입히고 금은보화를 넣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