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8>

영지니 2010. 4. 15. 19:50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8>

유비, 여복(女福)이 넘치는 남자


[
들어가는 글]

제 이야기를 하나 할까요? 저는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이 많습니다. 할머니는 1905년생이셨는데 욕도 잘하시는 데다 정신도 오락가락하셔서 어머니와 갈등도 많았습니다.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심한 욕을 해대셨지요. 그리고 좋은 옷들은 장롱 속에 꼭꼭 숨겨두고선 몸빼 바지에 더러운 수건만을 쓰고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머니의 가족들도 다 할머니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모할머니들을 뵙게 되었는데, 그 분들은 당시 최고의 신세대 할머니들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영어를 저보다 잘하는 할머니들을 처음 보았습니다. 이 분들이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시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언니는 젊었을 때 그렇게 여자다울 수가 없었지. 도무지 남에게 싫은 말을 할 줄을 몰랐어.” “언니 고운 얼굴은 다 어디로 갔어?”, “형부는 기방(妓房)으로, 첩(妻)질이나 다니니 언닌들 별 수가 있겠니?”, “언닌, 그 잘하던 요리 솜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할머니는 우리나라 삼대 시장의 대포목상(大布木商)의 장녀(長女)였습니다. 열아홉에 시집온 할머니는 스무 두 살이 넘어서부터 홀로 방을 지켜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할머니 댁에 계시는 할아버지께 ‘학비’를 타오는 일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다녀온 큰 한약상이셨지요.

할아버지는 오십이 넘자 중풍이 들어 소가(小家)에서 쫓겨나 할머니께로 다시 오셨지요. 30년만의 귀가(歸家)였습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똥오줌을 받는 생활이 십년 이상이 계속되었죠. 할머니의 정신이 몽롱해지고 황폐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환갑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이모할머님들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할머니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길거리에서 할머니를 만나면 창피해서 피해 가기 일쑤였지만 이후에는 할머니를 업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님의 처녀시절의 꿈 많았던 모습을 사진을 통해서나마 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에게 결혼은 하나의 악몽(惡夢)이었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던 처녀 시절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을까요?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지자 할아버지를 원망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6개월 전 쯤에는 가장 할머니께 잘해 드린 저를 기억하시지를 못하셨지요.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세상 모든 일을 망각(忘却)에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월에는 할머니 산소에 가보아야겠네요.


(1) 유비, 여복이 넘치는 남자

나관중 ‘삼국지’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별 다른 개성이 없이 (1) 제갈량의 아내, 미부인, 감부인, 손부인 등과 같은 어진 아내나 또는 조강지처(糟糠之妻), 서서의 어머니와 같은 훌륭한 어머니, (2) 초선이나 추씨 부인 등과 같은 남성들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형, (3) 원소의 부인과 같이 투기가 심하고 잔인한 유형 등의 세 가지 유형으로 존재합니다.

이 세 가지 유형은 여성들의 실존적인 모습들이 극심하게 왜곡된 형태로 유교적 가부장 사회가 가진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요. 경제적 능력이 없는 여성들이 과거시대에 살아가기란 너무 고단한 일이었죠. 또 대부분의 여성들은 글도 읽지를 못했지요.

나관중 ‘삼국지’ 시대, 즉 남성들의 천국 ‘유교 가부장 시대’에서도 가장 여복(女福)이 있는 사람으로 그려진 인물은 유비입니다. 유비는 여러 부인들을 맞이하는데 모두 하나같이 유비를 위하여 온갖 희생을 바치면서도 군소리 하나 없이 오직 유비의 안전만을 기원하고 순정을 바쳐 사랑합니다. 마치 국민가수 이미자 선생님의 ‘동백아가씨’ 같은 여인들입니다.

그러나 유비는 ‘삼국지’ 등장인물들 가운데서도 최악(最惡)의 가장(家長)이었습니다. 유비는 툭하면 가족을 버려두고 홀로 줄행랑을 쳐서 가족들의 시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록상으로 나타난 것만으로도 유비는 처자를 네 번이나 버립니다. 일단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유비의 아내들의 극적인 모습을 한번 보지요. 

 

유표 휘하에 있던 유비가 조조의 침공을 받자 홀로 도망치고 유비의 부인들은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데리고 피난하다가 길을 잃고 맙니다. 이 때 우리의 영웅 조운(조자룡)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을 구출합니다. 조운은 먼저 감부인(甘夫人)을 구한 후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 아두를 안고 있는 미부인( 夫人)을 발견합니다. 이 때 미부인은 이미 많이 다쳐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미부인은 조운에게 “나는 이미 틀렸으니 귀한 아들을 빨리 주공(유비) 곁으로 보내라,”고 말한 뒤 조운이 망설이자 미부인은 이내 우물 속으로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맙니다. 하시라도 빨리 아두를 유비 품으로 보내야겠다는 일념으로 자결한 것이지요. 최악의 가장에 대한 애정이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손부인(孫夫人 : 손권의 여동생)의 행동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죠. 나관중 ‘삼국지’에서 손부인은 유비와 정략 결혼했지만 유비에 대한 사랑은 하늘에 닿아있습니다. 손부인은 중국을 대표하는 열녀(烈女)로 사당에 모시기도 하지요. 먼저 나관중 ‘삼국지’를 보시죠.

“한편 오나라에 머물고 있던 손부인은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패하여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강가로 가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크게 통곡하고는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이 그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강가에 사당을 짓고 그 이름을 효희사(梟姬祠)라고 하였다. 사당을 지은 사람들은 ‘황제는 백제성으로 갔건만, 부인은 황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숨을 끊고 말았네. 아직도 그 강변, 비석이 서 있어 천추의 열녀, 그 이름 전하네’라고 부인의 죽음을 애도했다(84회).” 

  [그림②] 유비와 손부인(드라마의 한 장면) ⓒ프레시안

손부인 같은 여자를 평생 한번이라도 만날 수 있는 남자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유비는 참으로 여복(女福)이 넘칩니다. 미부인은 자신이 낳은 아들도 아닌데 자신의 목숨을 바꾸어 아두를 살려내고 손부인은 풍문으로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자결합니다. 그리고 미부인과 감부인은 ‘마치 친자매처럼’ 사이가 좋습니다. 이들은 정겨운 모습으로 같이 한마음으로 유비를 걱정합니다. 손부인을 포함, 미부인과 감부인은 남성들이 원하는 가장 바람직한 아내 상을 보여줍니다. 열녀(烈女)의 전형적인 모습들입니다. 이쯤 되면 남성들의 천국에서도 가장 행복한 사람은 단연 유비입니다.

이와 같이 나관중 ‘삼국지’에서 유비 부인들은 하나같이 열녀 형으로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유비의 인덕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사실일까요? 객관적으로 보면 유비는 여성들에게는 최악의 배우자였습니다. 아무리 그 시대의 가치가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순종적인 여인들이 있을까요?


(2) 유비의 아내들

먼저 기록상으로 보이는 유비의 아내들을 살펴봅시다. 196년 유비는 원술의 공격을 받고 이에 대응하여 싸워 한 달간 대치하게 되자 여포(呂布)가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포로로 잡았다(촉서, 선주전)고 하는데 이 때는 감부인·미부인과 결혼하기 이전의 일입니다. 미부인이 유비의 아내가 된 것은 유비가 여포의 공격을 받고 해서(海西)로 물러갔을 때의 일(촉서, 미축전)이고 감부인이 유비의 시중을 든 것은 유비가 예주에 부임(197년 또는 198년)하여 소패(小沛)에 머물렀을 때의 일(촉서, 감황후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부인과 미부인 이전에도 유비는 이미 결혼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후에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없습니다. 정사에 “유비는 본처를 여러 번 잃었으므로(先主數喪嫡室 : 촉서, 감황후전)”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비의 아내는 여러 명이었는데 일찍 사망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유비는 ‘처자(妻子)는 의복(衣服)’이라는 생각에 젖어 가족을 등한시하여 전란 중에 목숨을 잃었거나 방치된 상태에서 병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식들도 고아가 되어 떠돌다가 유비에게 돌아오지 못했겠죠.

감부인(甘夫人 : ?-?)은 유비의 부인으로 미천한 신분에서 후일 황후로까지 신분이 격상한 사람입니다. 감부인은 패(沛) 출신으로 시호는 소열황후(昭烈皇后)이고 촉의 2대 황제 유선(劉禪)의 생모(生母)입니다. 감부인의 사망연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적벽대전(208)이 끝난 후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사에 따르면 조조가 당양 장판까지 유비를 추격할 당시(208년) 상황이 위급하므로 유비는 감부인과 유선을 버리고 떠났는데, 조운(조자룡)이 이들을 보호하여 난을 면하였고 감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남군(南郡)에 매장되었으며 그 후 223년 유선이 즉위한 후 그녀를 소열황후로 추서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군은 형주에 속하고 당시의 수부(首府)는 강릉(江陵)인데 현재 호북성(湖北省)의 강릉이죠.

유비는 촉을 평정한 후 과부인 오씨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219년 오씨는 한중왕후가 되고 221년 유비에 의해 황후(목황후)에 책봉되는데 이것을 보면 감부인은 이보다 훨씬 전에 사망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감부인은 원래는 유비가 예주(豫州)로 부임하여 소패(小沛)에 살 때 그 지역에 살던 여인인데, 유비가 그녀를 맞아 첩으로 삼았습니다. 유비는 정주하여 살지 못했기 때문에 본처를 여러 차례 잃어 감씨가 집안일을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정사(촉서, 감황후전) 기록에 ‘先主數喪嫡室, 常攝內事 隨先主於荊州 産後主(유비는 여러번 처가 죽어서 감씨가 집안일을 관리했고 유비를 따라 형주로 갔을 때 유선을 낳았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감씨는 가정부로 들어와서 집안일들을 돌보면서 유비와 사실혼(事實婚 : 법적 부부는 아니지만 사실상 부부 관계)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비는 당시 미부인( 夫人)과 정식으로 결혼하지만 정사 ‘삼국지’ 촉서「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 : 황후전)」에는 미부인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촉서「미축전( 竺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입니다.

‘196년 여포는 유비가 출정하여 원소에 대항하는 틈을 타서 하비를 습격하여 유비의 처자식을 포로로 잡았다. 유비는 군대를 광릉군 해서로 돌렸고, 미축은 이 때 여동생을 유비에게 보내어 부인이 되도록 하고 노비 2천명을 보냈으며 금은 등의 재화를 주어 군자금에 보탰다. 그 당시 곤궁했던 유비는 이들의 도움에 의지하여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미축의 여동생인 미부인이 유비의 아내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로 판단됩니다.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 보면 미부인( 夫人)은 부호(富豪)이자 호족(豪族)의 딸이었으므로 감부인에 비하여 지위가 훨씬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비는 미부인과 결혼함으로써 재정적인 안정은 물론 참모 및 지역 명사들과의 교류가 용이하게 되었으므로 미부인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었을 것입니다.

미부인과의 결혼은 다소 정략적인 요소가 강한데 유비는 미부인과의 결혼을 통하여 정치경제적인 안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유비는 미축(미부인의 오빠)을 끝까지 각별하게 대한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즉 정사에 따르면, 유비는 평생을 미축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였고 항상 최고의 상빈(上賓)으로 대우했다고 합니다. 유비가 익주, 즉 촉 정벌에 성공했을 때에도 미축의 지위는 안한장군(安漢將軍)으로 제갈량보다도 서열이 높았던 사람이지요.

뿐만 아니라 미축( 竺)은 거의 평생을 유비와 함께 한 사람이고, 동생이었던 미방( 芳)이 오나라에 투항하여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을 경우에도 유비는 ‘동생의 일은 동생의 일’이라고 오히려 위로하였을 정도로 미축을 공경합니다. 이것은 위기에 처한 유비에게 미축의 도움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던가를 보여줍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미부인과 감부인의 지위는 서로 비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미부인은 호족의 딸로 정치력과 경제력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정실부인이었고 감부인은 미천한 신분의 하녀 수준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미부인이 감부인을 하녀 다루듯 했을 가능성이 크지요. 뿐만 아니라 미부인은 유비와의 결혼 이후 감부인과 사실상의 경쟁관계에 들어서게 되어 감부인에 대한 질시도 상당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부인이 유비와 결혼할 당시 유비는 감부인과 사실혼(事實婚)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죠. 세상에 “사이좋은 처첩(妻妾)”은 없는 법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유비에게는 감부인이 편하고 가까운 존재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부인과의 결혼은 다소 정략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미부인은 얼마나 도도했겠습니까? 기록이 없어 이 같은 사정을 세세히 알 수는 없지만 결국 감부인은 유비의 아들 유선을 낳았습니다. 유비가 유선을 낳은 것은 나이가 거의 오십 줄(47세)에 가까이 된 때였습니다. 유비에게 이 아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였을 지는 상상이 갑니다. 그전에도 유비의 아들들이 있었겠지만 모두 유비가 버렸기 때문에 생사도 불명한 상태입니다. 유선의 출생이후 어쨌든 유비는 감부인과의 관계가 돈독할 수밖에 없었겠지요(아마 유선의 출생 이후 미부인이 유비를 떠났을 수도 있겠지요).

예로부터 ‘여인은 그 아들로 귀하게 된다(母以子貴)’는 말처럼, 감부인은 유비의 아들 유선을 낳음으로서 미부인과의 격차는 물론 후일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됩니다(물론 황후로 오른 것은 그녀가 죽은 뒤의 일이지요).

감부인의 유해(遺骸)는 유비가 죽고 난 후 남군으로부터 이장(移葬)하여 유비와 합장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비의 정식 황후가 되었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정사에 따르면, 제갈량이 촉의 2대 황제 유선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감부인이 품행이 바르고 인덕을 닦아 그 자신을 맑고 공순하게 하였으며 유비가 살아있을 때 은혜를 내렸으며 감부인의 영구(靈柩)가 먼 곳에 떠도는 것을 생각하여 특별히 사자를 보내 영구를 옮겨와 유비와 합장하여야 한다고 주청하였고 이에 유선은 흔쾌히 허락합니다.

제갈량이 올린 상소문에서는 감부인에 대한 몇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죠. 즉 감부인은
품행이 바르다는 점, 유비가 살아있을 때 은혜를 내렸다는 점 등이 그것입니다. 이 점을 토대로 다시 분석해봅시다.

촉서「감황후전(甘皇后傳)」에 따르면, 유비는 평생을 도망 다니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여러 부인들을 잃었다고 합니다. 부인들을 잃었다는 것은 전란의 과정에서 유비가 부인들을 버리고 떠났거나 아니면 유비가 전란 중에 피신하는데 따라가지 않았을 경우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유비는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대개의 경우 혼자만 도피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여자들의 입장에서 유비를 따라가지 않았을 가능성도 큽니다. 따라서 제갈량이 칭송하는 감부인의 바른 품행이란 지아비를 끝까지 따라다녔던 감부인의 우직함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다음으로 유비가 살아있을 때 은혜를 내렸다는 부분은 유비가 감부인과 금슬이 좋았다는 것을 우아하게 표현한 문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비는 실제로는 고독한 사람인데 감부인은 어떤 의미에서 유비를 가장 편안하게 위로해줄만한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유비의 지위가 일정하게 오르고 난 뒤 정략적으로 결혼하지만 감부인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유비를 따라다니고 사랑한 사람인 듯합니다. 그러나 감부인은 유비에게서 버려진 상태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도 감부인의 유해는 십년 이상을 촉 땅도 아닌 곳에 방치되었습니다.


(3) 미부인과 손부인의 행방

미부인은 미축의 여동생으로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당양파(當陽坡) 싸움에서 부상을 당하고 조운을 만나 아두의 보호를 당부한 뒤 자결한 것으로 그려져 있죠. 그런데 정사에서는 유비가 황제에 오르고 난 뒤에도 미부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사 조운전에는 “조운이 아두(유선)를 품에 안고 감부인을 보호하여 모두 난을 피하도록 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감부인에 대해서는 많은 미사여구가 등장하는데 반하여 유비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준 미부인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으니 이상한 일이지요.

미부인은 유비가 유표에게로 왔을 때 이미 사라져 버린 상태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비가 유표에게 머무른 것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때 미부인이 이미 사망했다면, 그것을 숨길 하등의 이유는 없지요. 그리고 감부인이 특히 품행이 바르다는 말을 강조함으로써 비슷한 시기에 유비의 아내로서 미부인을 대비시킨 것은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유비가 여기저기 도망다니자 그것으로 유비와의 관계를 끊고 재가(再嫁)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죠.

결국 미부인의 행방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미부인이 대책 없는 유비를 일찌감치 떠났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일찍 사망했을 가능성입니다(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이럴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유비가 도망친 후 일종의 전리품으로 다른 장군의 처첩으로 간 경우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미부인은 오래 전에 유비 곁을 떠났을 것이라는 점이죠.

설령 미부인이 유비를 그렇게 떠났다고 해도 유비는 미축에게 오히려 미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유비에게 바쳤는데 미부인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고 홀로 도망만 다닌 사람이 큰 처남(미축)에게 무슨 볼 낯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손부인(孫夫人)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부인은 손권의 여동생으로 209년 유비와 결혼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따르면 손부인은 주유가 형주를 되찾을 욕심으로 정략적으로 결혼을 시킨 것으로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촉 땅으로 들어가자 손부인은 형주에 남았지요. 손권은 형주를 되돌려 받기 위해 거짓으로 모친의 병이 위중하다고 하여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오나라로 돌아오게 하면서 아두(阿斗)를 데려와 인질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조운과 장비가 쫓아가서 아두를 빼앗아 오지요. 그런데 이 손부인 또한 정사 ‘삼국지’ 왕비전에는 따로 나오지 않습니다.

손부인에 대한 왕비전(王妃傳) 기록은 ‘목황후전(촉서)’에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에 따르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손부인(孫夫人)이 오나라로 돌아갔으므로(先主定益州, 而孫夫人還吳) 신하들이 목황후(오씨)를 맞이하도록 권유했다.’라고 되어있고 그 주석에서 인용한 ‘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 ‘유비가 촉으로 들어가자 오나라는 사자를 보내어 손부인을 맞으려했다. 손부인은 태자를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 했는데 제갈량이 조운을 시켜 이를 저지하고 태자를 남게 하였다(先主入益州, 吳遣迎孫夫人. 夫人欲將太子歸吳, 諸葛亮使趙雲勒兵斷江留太子, 乃得止)’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사실로 보면 유비는 촉 땅으로 아내인 손부인을 데리러 가지도 않았고, 손부인은 유비가 떠나자 자기도 미련 없이 오나라로 돌아온 듯합니다.

 

나관중 ‘삼국지’의 대표적인 열녀인 손부인은 소설과는 달리 유비와는 많은 갈등을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손권은 형주를 장악하고 있는 유비를 우려하여 동맹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비 영토의 수도(首都)인 공안(公安 : 현재 호북성 공안현)에 자신의 누이동생을 보내어 결혼시킵니다(촉서, 선주전). 정략 결혼이죠.(나관중 ‘삼국지’처럼 유비가 오나라로 직접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손부인은 결혼 후에도 손씨 집안 특유의 강한 기풍을 가지고 있어서 시녀 1백여 명으로 하여금 무장해 자기를 호위하도록 하여 유비는 내실로 들어갈 때마다 늘 마음속으로 두려워합니다(촉서, 법정전). 공안에 있을 때 유비는 북으로부터는 조조의 공격을 두려워했고, 동으로는 손권의 압박을 내부적으로는 손부인이 변고를 일으킬까 전전긍긍합니다(촉서, 법정전).

그런 상태에서 손부인은 교만한데다 오나라에서 데려온 많은 관리와 장졸들이 법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행동하여 유비는 조운에게 명하여 이들을 법으로 철저히 다스릴 것을 명령합니다(촉서, 조운전 주). 그러던 차에 익주가 평정되자 유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익주로 들어가고 손부인은 바로 오나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유비는 익주로 들어간 뒤, 바로 과부로 지내고 있던 오씨를 아내로 취합니다. 그런데 이 오씨는 유장의 형수였던 것이죠. 유장은 잘 아시겠지만 익주(촉)를 다스리던 사람으로 유비에게 익주를 빼앗긴 사람이죠. 즉 유비는 촉 땅을 점령하고 적장의 형수를 아내로 취한 것이죠. 다시 말해서 유비는 동족이었던 유언(劉焉)의 아들 유모((劉瑁 : 유장의 형)의 과부(寡婦)였던 오씨를 맞아서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 오씨가 목황후(穆皇后)입니다.

유비가 죽자 목황후는 황태후가 되었다가 245년 사망하자 유비와 합장합니다.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따로 있고 호강을 누리는 사람도 따로 있지요. 사실 ‘조강지처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속담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조강지처를 버린데서 만들어진 속담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된 유비가 같은 종실의 아내였던 사람을 자기가 취하는 이 같은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유비에게 오씨는 형수(兄嫂), 또는 제수(弟嫂)가 되는 사람이 아닙니까? 유교적인 덕목을 강조하는 유비가 취할 행동이 아니었을 텐데요.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주인공에 대해 나관중 ‘삼국지’는 어떻게 묘사하는 지를 비교해봅시다. 나관중 ‘삼국지’ 52회에 보면 조운(조자룡)이 적벽대전 후 계양성(桂陽城)을 점령하고 계양 태수인 조범(趙範)이 조자룡과 의형제를 맺습니다. 이 때 조범은 자신의 형수인 과부 번씨(樊氏)를 조운에게 소개하여 결혼을 권하자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조운은 조범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너와 나는 이미 의형제를 맺었으니 네게 형수이면 나에게도 형수가 아니냐. 네 놈의 하는 짓이 천하의 인륜을 어지럽히는 게 아니고 뭐냐?” 
조범은 예상치 않게 무안을 당하자 얼굴이 벌겋게 되어 언성을 높였다. 
“나는 호의로 한 말을 가지고 왜 이리 무례하게 구는 거요?” 
조범의 행동에 다소 살기가 있는 듯하자 조자룡은 한 주먹에 조범을 때려눕히고 성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 (77회)에서는 법정이 “촌수(寸數)가 걸리는 것도 아닌데 무어 어떻습니까?” 라고 하자 그대로 유비는 오씨를 왕비로 맞이합니다. 이것은 정사와도 일치합니다.

제가 보기엔 아무리 과거라고 해도 여성이 무조건 참고만 살았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유비와 같이 대책 없는 사내를 보고 한평생을 의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겠죠. 홀로 떨어져 쓸쓸히 생을 마친 감황후도 죽음에 임하여 유비를 원망했을 지도 모르죠.

세상의 일을 만들어진 신화(神話)로만 바라보게 되면 그만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실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인(聖人)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겠죠. 일단 그 실체를 바라보고 난 후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는 그 때 가서 다시 판단해도 늦은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과 그 터전에서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끝없이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만이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니까요.

 

 

출처 : 올드뮤직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