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9>

영지니 2010. 4. 15. 19:56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9>

손권의 성공시대

 

(唐)나라 현종(玄宗)은 매우 훌륭한 군주였습니다. 현종은 혼란했던 정국을 바로 잡고 태평성대를 열었습니다. 이를 '개원(開元)의 치(治)'라고 합니다. 현종은 구조 조정의 명수로 요즘으로 치면 각종 공기업을 정리하고 엉터리 승려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재상을 기용하여 나라가 평안하고 부강해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현종은 자기의 며느리였던 양귀비(楊貴妃)를 본 이후 그녀와 사랑에 빠져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군왕은 부끄러울 일이 없다(君王無恥)'고 하지만 며느리와 사랑에 빠진다? 좀 심하지 않습니까?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있는 동안 절도사의 반란으로 당나라는 쇠락의 길을 갑니다. 대체로 현종이 정치를 망친 이유는 그가 너무 오래 권좌에 있어 정치에 싫증을 내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렇지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게 되어있습니다. 사회과학에 이렇다할 법칙은 거의 없지만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바로는 이 말은 절대 진리인 듯합니다. 오랫동안 권좌에 있으면서도 정치를 잘 하기란 매우 어려운 법입니다. 


(1) 멀쩡한 태자를 치맛바람에 죽인 한무제(漢武帝)
 

한무제(漢武帝)는 정통 한족(漢族)으로는 중국을 처음 통일한 사람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한고조 유방(劉邦)이 통일하지 않았나요? 둘 다 맞는 얘깁니다. 유방은 한족으로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였지만 지방의 제후들을 그대로 둔 채 통일을 한 것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통일이라고 하기는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고조 때의 정치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고 하죠. 한무제는 지방 분권적인 호족들을 제압하고 철저한 중앙집권을 이룩한 사람입니다. 이 때 비로소 중국 전역이 군과 현으로 나눠져서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한무제는 유교(儒敎)를 국교로 만들고 대외 정복사업을 강행, 위청(衛淸)이나 곽거병(?去病) 등에 명하여 서북방의 유목민들을 대거 몰아냅니다. 한족들에게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지요. 왜냐하면 한나라 초기에는 늘 서북방의 유목민(대쥬신?)들에게 조공도 바치고 화친정책으로 무마하기에 바빴으니까요.

사실 저는 고교 때 한무제를 중국의 대단한 군주로 알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이 부분까지 밖에 배우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후에 한무제가 오히려 한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는 데 놀랐습니다.

일단 유목민 정벌에 너무 많은 전쟁 비용이 들어갔고 말년에 들면서 진시황처럼 영생(永生)하려는 꿈을 충족하기 위해 온갖 이상한 의식과 엉터리 건축물을 짓는 데 국고를 낭비했습니다. 이 정도는 그래도 봐줄만 합니다. 그런데 한무제는 61세가 되어 어린 여인 조첩여(趙 )를 총애하여 그 와중에 멀쩡한 태자를 죽입니다. 그래서 조첩여가 낳은 7세의 어린 아이가 황위에 오르게 되지요(나중에 이 아이도 23세에 요절합니다). 한무제는 17세에 즉위하여 71세에 죽습니다.

한무제의 치적은 전반기의 영명(英明)함과 후반기의 노회(老獪)함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권좌에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한무제는 보여줍니다. 제가 보기에 역사상은 물론이고 요즘도 오랫동안 독재한 사람치고 제대로 정치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손권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웬 한무제 이야기냐고요? 그러게요. 저도 참 이상하지만 이 한무제의 일생과 손권의 일생이 너무 흡사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죠.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런 군주나 지도자들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2) 손권의 성공시대

손권(孫權 : 182-252)은 오(吳)나라의 초대 황제입니다. 손견(孫堅)의 둘째아들로 머리는 네모나고 입이 크며 눈은 파랗고 수염은 붉으며 제왕(帝王)의 기상을 가졌다고 합니다. 손권은 황제위에 있었던 것으로 치면 24년 정도지만, 실제로 손권이 손책(孫策 : 손권의 형)을 계승한 연대(서기 200년)로 치면 거의 50년 이상을 권좌에 있은 사람입니다. 즉 손권은 18세에 권좌에 올라 71세에 죽을 때까지 권좌에 있었습니다. 

손권은 적벽(赤壁)에서 조조(曹操)의 대군을 대파시켜 삼분천하의 기반을 굳히고 219년에는 여몽(呂蒙 : 178-219)에게 명하여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함락합니다. 손권은 정치적 감각도 탁월하여 조비에게 신하로 칭하면서 국가적 위기를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림③] 오나라 황제 손권 ⓒ프레시안손권은 아버지인 손견(孫堅 : 155-191)과 형님인 손책(孫策 : 175-200)의 심복들(정보·장소·주유 등)이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가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먼저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손권의 대권 계승 장면을 간략히 보지요.

손책은 병상에서 손권과 여러 문무백관에게 "지금 천하가 어렵지만 장소(張昭) 등이 내 아우를 보살펴주면 다행이겠다"고 말하고 관인(官印)을 손권에게 넘겨주면서 "강동의 많은 인재를 가지고 조조와 유비를 대항하여 천하를 다투는 일은 네(손권)가 나(손책)보다 못할 것이지만 어진 사람을 적재적소에 발탁해서 자기 힘을 다하도록 하여 강동 땅을 보전하는 일은 내(손책)가 너(손권)보다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 <중략> … 이 때 손책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손권이 어린데 어찌 대권을 받는단 말이냐?" 라고 하자 손책은 "손권의 재능은 저보다 열 배가 나으니 능히 대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니 어머니 너무 걱정 마세요"라고 하였다(나관중 '삼국지' 29회).

이렇게 손책은 26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용의 기상의 가진 사람이 암살자(暗殺者)의 손에 죽고 말았던 것이죠.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오나라에 대한 부분들은 적벽대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정사와 일치합니다만 유비를 옹호하기 위한 미묘한 차이점들은 많이 있습니다. 일단 위의 내용도 다시 봅시다.

나관중 '삼국지'와는 달리 손책은 평소에 손권을 대단하지 않게 여긴 듯합니다. 손책은 죽으면서 장소(張昭 : 156-236)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합니다. 

"만일 손권이가 대임을 맡을 재목이 아니면 그대가 적절한 때에 권력을 장악하여 스스로 그 대임을 맡아주시오.(策謂昭曰若仲謀不任事者 君便自取之 : 오서 장소전 주석)" 

그런데 이런 종류의 말을 어디에서 들은 말 같은데요. 그렇지요. 유비가 죽으면서 제갈량에 한 말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왜 나관중 '삼국지'에는 나오지 않느냐고요. 그러면 유비의 고귀한 정신이 훼손되기 때문이죠. 그런 말은 '요순(堯舜)의 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유비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 나관중 '삼국지' 식의 생각이겠지요.

사실 대권을 잡은 손권은 앞일이 막막하여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策薨, 以事授權, 權哭未及息)"고 합니다(오서 : 오주전). 이 때 주공의 도를 발휘하여 일을 제대로 처리한 사람이 바로 장소(張昭)입니다. 제가 보기에 장소는 전체 '삼국지'를 통하여 가장 훌륭한 신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쪽같은 성품으로 아무런 사심(私心) 없이 오직 오나라의 발전만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나중에 손권은 그를 멀리 합니다).

손권은 초기에는 제왕으로서의 재목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손권은 장소와 주유의 도움으로 서서히 안정을 찾았고 명망 있는 선비인 노숙(魯肅)과 제갈근(諸葛瑾 : 174-241)을 초빙하여 스승으로 삼음으로써 비로소 제왕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손권은 지속적으로 훌륭한 인재들을 초빙해 와서 오나라의 미래를 대비합니다. 노숙과 제갈근·장소·주유 등의 보좌를 받은 손권은 이제 매우 영명한 군주로 거듭 태어납니다. 손권의 '성공시대'가 열린 셈이죠. 

  전성기의 손권을 한마디로 하자면 매우 신중하고 실리적인 인물입니다. 특히 삼국이 서로 대립할 때는 이 균형을 잡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지요. 정사에 따르면 위문제 조비가 오나라에서 온 사자 조자(趙咨)에게 손권에 대해서 묻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 가운데 노숙(적벽대전의 영웅)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그의 총명함이요, 보통 사람들 가운데 여몽(관우 제거ㆍ형주 정벌)을 발탁했으니 이것은 그의 현명함을 보여줍니다. 우금(위나라 맹장)을 붙잡았지만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그의 어짊이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형주를 얻었으니 그의 지혜로움입니다. 세 주를 차지하고 호랑이처럼 천하를 보고 있으니 그의 웅대함이요, 폐하(위나라 문제)에게 몸을 굽혔으니 이는 그의 재략(才略)입니다."

이 말은 손권이라는 인물을 가장 짧고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나관중 '삼국지'에는 유비가 제갈량을 스승 모시듯 했다고는 하나 손권이 주유(周瑜)나 노숙(魯肅)을 모신 정도에 미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지극 정성으로 인재를 대한 사람이 손권입니다.

손권의 '인재 사랑'은 큰 화제가 될 정도인데 이 점이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부각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애정을 돋보이게 하려고 이 점을 애써 감춘 듯합니다.

손권은 주유를 친형과 같이 대하여 주유가 죽자 직접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유의 자식들을 극진히 대해주었고 주유의 아들을 사위로 삼고 딸은 며느리로 삼기도 하였습니다(오서 : 주유전). 그리고 여몽이 중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많은 돈으로 의원을 모집하고 여몽이 병세를 살피면서도 혹시라도 자신이 있는 것을 알면 여몽이 부담스러워할까 걱정하여 벽에 구멍을 뚫어 그를 살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몽이 조금이라도 식사를 하면 크게 기뻐하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탄식하여 잠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여몽이 죽자 300가구로 하여금 여몽의 묘소를 돌보게 합니다(사마광 자치통감 2171 / 오서 여몽전)

  그런데 여몽과 관련된 부분이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매우 엽기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여몽은 관우를 사로잡아 죽인 사람입니다). 그 대목을 잠시 요약해 볼까요? 

손권이 여몽의 공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여몽에게 술을 따르자 여몽이 갑자기 손권의 멱살을 잡더니 '쥐새끼 같은 놈아'라고 욕을 하고 손권을 때려눕히면서 '내가 바로 관우'라고 소리친다. 그러더니 "내가 살아서 손권이를 죽이지 못했으니 혼백이라도 살코기를 질근질근 씹어서 죽이리라" 라고 외치니 손권과 그의 부하들이 모두 엎드려 (여몽에게) 절을 하였다. 그러자 여몽은 땅에 꼬꾸라지면서 눈ㆍ코ㆍ입 모두에서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나관중 '삼국지' 77회).

어떻습니까? 누가 보아도 나관중 '삼국지'가 좀 심하지요. 참고로 유비와 제갈량에 대한 부분을 살펴봅시다. 

유비는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가까워졌다. 이것을 관우·장비가 싫어하자 유비는 "나에게 제갈량은 물과 물고기를 만난 것이니 더 이상 이에 대해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촉서 : 제갈량전).

물론 제갈량에 대한 유비의 사랑도 보시는 바와 같이 대단함에는 틀림이 없지만 손권의 인재사랑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손권은 기본적으로 오나라의 보전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손권은 철저한 현상유지론자로 수성형(守成型)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손권을 천하통일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정사(노숙전)에는 손권이 노숙에게 천하의 계책을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노숙은 먼저 형주를 점령하고 양자강 전역을 차지한 후에 제왕을 칭하고 천하통일을 도모하라고 주문하였습니다. 그리고 229년 손권은 촉과 협의하여 위나라를 정벌했을 경우 예주ㆍ청주ㆍ서주ㆍ유주는 오나라에 속하게 하고 연주ㆍ기주ㆍ병주ㆍ양주는 촉에 귀속시킨다고 협약합니다. 위나라로 보면 웃을 일이지만 이들은 그래도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한 듯합니다.

  제가 보건대 젊은 날의 손권은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청장년의 손권을 비판하려고 요모조모 뜯어봐도 별 내용이 없었습니다. 비판하자면 손권은 제갈량처럼 강경하게 북벌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던 수성형(守成型)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이죠.

그러나 이 점도 함부로 말할 사안은 아닙니다. 군주가 전쟁을 피하여 국가를 안전하게 보위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당시 오나라 남부 지방도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촉나라에 대한 의리가 없다고 몰아붙일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제갈량의 주장처럼 소국(小國)이 가만히 현상유지만 하려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위나라에 의해 먹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가 거의 500년 이상 지속된 사실을 보면 중국도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고구려라는 절대 강자가 있는 상황에서도 백제와 신라는 오랫동안 국체(國體)를 유지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북방 전쟁으로 고구려가 약해진 상황에서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제갈량처럼 자기 당대에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너무 서두르다가 오히려 촉의 멸망이 촉진된 점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차라리 제갈량도 자기 당대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나라와의 동맹을 보다 견고히 하고 후계자들을 키워서 다음 세대를 대비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3) 오나라의 황혼 

손권은 처음 군주가 되었을 때는 다소 나약하고 용(龍)의 기상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이 영명한 군주 손권은 말년이 되어갈수록 탈이 나기 시작합니다. 장사를 할 때도 "잘 될 때 조심해야하는 법"인데 손권은 이 점을 무시했습니다.

특히 손권은 황제가 된 이후 50대부터 실정(失政)을 거듭하는데, 이것이 아이러니라는 것이죠. 그 풍부한 경험에 노련미가 더해졌는데도 왜 실정을 하는가 말이죠.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겠지만 성공한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경험을 너무 믿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인 듯합니다. 실제 사회는 많이 바뀌었는데 자신의 20대의 성공 경험을 50대에 적용하려하면 되겠습니까? (모택동도 마찬가지지요. 1930년대 정강산의 유격전을 한 경험을 가지고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추진하였으니 나라꼴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손권의 실패는
인재등용 및 관리의 문제, 외교의 실패(50대), 황위 계승의 실패(70대)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재에 대해 극진히 예우하고 온갖 사랑으로 대하던 손권은 나이가 들수록 교만해지더니 결국 많은 아까운 인재들을 죽입니다. 진수는 "손권은 성격적으로 의심과 질투가 많아서 사람을 지나치게 많이 죽였으며 나이가 들수록 이 같은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손권은 대체로 황제로 즉위하기 전까지는 인재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있었고 이 때문에 강동에는 많은 인재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손권은 황제 등극 이후(48세)에는 점점 교만해지고 나태해져서 많은 인재들을 해치게 됩니다. 이것은 후계자 문제와 겹쳐서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됩니다.

둘째, 손권은 황제가 된 이후 엄청난 외교적인 실수를 하는데, 이것이 그의 정치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줍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손권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신중하기로 소문난 손권이 말년이 될수록 긴장감이 떨어져서 생긴 사건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이 손권의 외교적인 실패를 구체적으로 봅시다.

231년 연나라(요동 반도)의 공손연이 신하를 칭하면서 모피와 훌륭한 말들을 바치니 손권은 크게 기뻐합니다. 사실 손권은 유비와 달리 황실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사람도 아니요, 강동은 워낙 호족들의 연합체적인 성격이 있고 국력도 위나라처럼 강성하지도 않으므로 항상 콤플렉스가 있었던 차에 연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앞으로 (손권을) 황제로 모시겠다"고 오니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너무 기분이 좋은 손권은 여러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태상 장미(張彌)를 사신으로 하여 보물, 진귀한 물건과 황제의 예물들을 배에 잔뜩 실어서 연나라의 공손연에게 보냅니다(국가 재정이 흔들릴 정도로 예물을 보냈다고 하죠). 그런데 막상 온갖 보물들을 받은 공손연은 위나라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사신으로 온 장미 일행을 죽여서 그 수급(首級)을 위나라 황제에게 보내고 맙니다. 손권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비용을 낭비하면서 망신만 당하게 되었고, 공손연은 가만히 앉아서 많은 돈을 벌은 셈이 되었으며 위나라는 공손연이 그래도 확실히 위나라에 복종하고 있음을 확인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손권에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황제로서 이만큼 망신을 당할 수도 없고, 신하들 보기도 이 이상 민망스러운 일이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장소를 비롯한 많은 중신들이 반대를 했거든요.

분노한 손권은 대군을 일으켜 연나라 정벌에 나서려 하지만 신하들이 멀리 바다를 건너 가야하는 연나라 원정을 모두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 때 손권의 나이는 오십대인데, 손권은 과거 자신의 성공 경험을 과신하여 생긴 외교적인 대실패였습니다.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한 나관중 '삼국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화 2년(228년) 공손연은 자라면서 성질이 강하고 용맹하였다. 조예는 공손연을 요동태수에 봉하였다. 뒤에 동오의 손권이 장미와 허안을 사신으로 보내어 갖가지 금은보화를 전하고 공손연을 연나라 왕으로 봉했다. 그러나 공손연은 위나라를 두려워하여 장미와 허안의 목을 베어 위황제 조예에게 바쳤다.(106회)"

나관중 '삼국지'로만 보면 이 사건의 전말이 거꾸로 이해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실은 공손연의 사기행각이었는데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손권이 공손연에게 추파를 던진 것으로 나와 있죠.

  세째 환갑이 지난 손권은 황위 계승에도 큰 실패를 하게 됩니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손권은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요절하자 셋째 아들인 손화(孫和)를 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손권은 넷째 아들인 손패(孫覇)도 극진히 사랑합니다. 일단 손화를 태자로 삼았으면 손화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야 할 터인데 손권은 손패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손패가 방자해지기 시작하여 사사건건 손화와 대립하게 됩니다.

손화와 손패의 대립을 부채질 한 사람이 전공주(全公主)입니다(전공주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깊이 다루겠습니다). 전공주는 끊임없이 손화에 대하여 온갖 나쁜 말을 하여 손권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결국 손화가 폐위가 된다는 소문이 돌게 됩니다.

그런데 손화의 동생 손패(孫覇)가 형이 폐위된다는 소문을 듣자 자기 세상이 오리라 보고 사람을 모으러 다닙니다. 이제 오나라 조정은 손화 지지파와 손패 지지파로 양분되어 정국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것이죠. 이에 격노한 손권은 손화를 폐위시키고 손패를 분란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처형하고 말았습니다(252년). 손화는 태자 자리에서 쫓겨난 후 화병이 나서 죽고 맙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나라의 대부분 중신(重臣)들이 손화파와 손패파로 나누어 싸우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손권은 말년에 어린 소녀인 반씨(潘氏 또는 반황후 : ?-252)를 사랑하여 아들을 둡니다. 이 아들의 이름이 손량(孫亮)인데 이 아이가 황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손량은 손권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군주 자리에 있은 지가 무려 50여년이 된 사람의 막내아들이 황제에 오른다니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이 때 손량의 나이는 9세였습니다. 그리고 반씨도 이 해에 후궁들에게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손량은 10년도 안되어 퇴위되고 결국 17세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오나라는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정국은 극도로 혼미하게 됩니다.

한무제와 똑같은 상황인데, 한무제가 죽은 후에는 현명한 재상이 '주공(周公)의 도(道)'를 발휘하여 대단히 잘 다스려 위기를 넘어갔으나 오나라는 손권이 죽은 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과 숙청의 악순환이 되풀이됩니다. 오나라의 황혼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한무제나 손권, 그리고 당현종, 그리고 수많은 역사의 경험들을 보면 우리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이 고금(古今)의 진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영웅이나 대정치가들이 명심해야 할 일은 자기의 그늘 아래 사람들이 너무 오래 머물려 하면 오히려 야단을 쳐서 새로운 벌판으로 나가도록 종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 권력자가 교만해지고 너무 오래 권좌에 있게 되면 정치도 부패하고 나라도 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대가 바뀌면 군소리 없이 다음 세대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로서는 최고의 미덕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늘 만델라나 워싱턴 같은 정치가가 그리운 것이죠.


출처 : 올드뮤직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