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줄기인 오음산 자락에 오밀조밀 모여 앉은 왕곡민속마을이 정겹다.
속초에서 고성 통일전망대를 향해 가다가 보면 석호인 송지호가 나온다. 송지호를 지나 간성을 바라보고 달리면 길 우측에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흑색으로 된 안내판은 문화재 등을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눈길이 멈출 수밖에 없다. 「중요민속자료 제235호 고성왕곡민속마을」. 여정을 바꾸어 도로 밑 지하통로를 지나 마을을 향한다. 큰 보물이라도 찾은 것 차람 설레는 마음은, 마을을 향해 달리는 차보다 앞장을 선다. 동해의 해변에서 불과 1.5Km 정도. 길이 갈라지는 곳에 하늘을 닮아 선 울창한 송림이 나그네를 반긴다. 일부러 마을을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진입로를 비켜 먼발치에서 마을 전체를 보기위해 우회를 한다.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차를 세우고 부리나케 밖으로 나온다.
마을 입구에는 수령 150여년 정도가 된 푸른 송림이 우거져 있다.
마을에는 50년~180년이 된 집들이 오음산을 둥지로 삼아 처마를 맞대고 늘어서 있다. 초가와 와가(瓦家)가 적당히 섞인 모습이 오밀조밀하니 다정해 보인다. 왕곡마을은 1988년 8월 18일에는 문화공보부 고시 제736호 <전통건조물 보존지구 1호>로 제정되는 등 옛날 조상들의 삶의 숨결과 지혜를 고스란히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송지호 뒤편에 위치해 있는 왕곡마을은 송지호에서 0.5km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왕곡마을은 다섯 봉우리로 이뤄진 오음산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어 한국전쟁 당시에도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아서 마을 전체의 전통 가옥을 온전히 보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주변에는 수많은 재난이 있었으나 왕곡마을만은 그 어떤 재난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마을은 길지 중에 길지로 알려지고 있다. 1997년에 마을을 방문한 유네스코 관계자까지 극찬할 정도로 전통 민속마을로서의 명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왕곡마을은 실제로 TV문학관과 배달의 기수 등 다수의 TV 프로에 등장을 했으며, 마을사람들은 엑스트라로 나선 경력도 갖고 있다고 한다.
왕곡마을이 마을을 이룬 것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고려에 충성을 하는 〈강릉(양근)함씨〉들이 이곳에 정착을 하여 집성촌(集成村)을 이루면서 시작이 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말 두문동 72인 중 한 분인 함부열(咸傅烈 : 弘文博士)이 조선왕조의 건국에 반대하여 간성(杆城)에 은거한데서 연유되며 임진왜란으로 폐허화된 이래 180여 년에 걸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은 오음산의 봉우리와 송지호가 마을을 둘러쌓고 있어 마을 이름도 오봉리라고 하였다. 수려한 자연 환경 속에 마을을 형성하고 19세기를 전후하여 건축된 북방식 전통가옥들이 군락을 이루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는 왕곡마을은 현대 문화의 변화와 영향에도 불구하고 자연경관 주택 건축 농업위주의 생활 등이 원래의 모습대로 전래되고 있다. 왕곡민속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구조를 보면, 마을을 흐르는 개천을 따라 남동향의 배치를 하고 있으며, 50년에서 180년 정도가 된 가옥들은 온돌 중심에 겸집 평면으로 마루가 도입된 형태다.
마을로 걸음을 옮긴다. 눈을 돌려 마을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바라다본다. 남들이 보고 가지 못한 것 하나라도 찾을 욕심에 마음만 바쁘다. 바람은 세차게 불고 집 뒤편 대나무는 가지가 휘어지게 소리를 내며 떨고 있다. 한 집 한 집, 바라다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적당히 어우러지면서 여기저기 벌린 듯 서 있는 집들. 초가집과 기와집들이 드문드문 섞인 것이 마치 누군가가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기 위해 계획적으로 배열을 해 놓은 것만 같다.
자연과 어우러지면서 자연을 거부하지 않는 집들. 그것이 바로 우리네 선조들의 지혜요 멋이었나 보다. 마을은 봄맞이 단장을 하느라 부산하다. 덕분에 깨끗이 단장이 되어가고 있는 집들을 찍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고풍스러움은 가시었다고 하나 초가의 지붕 용마름를 새로 잇고, 벽을 황토로 단정해 마을이 온통 새색시가 단장을 한 듯하다.
봄맞이 단장을 하고 있는 왕곡마을의 집들. 깨끗하게 새옷을 갈아입었다.
왕곡마을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전통을 지켜 온 것은 어떤 구심점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 살아가게 하는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랬구나. 이 마을이 이렇게 공동체를 무너트리지 않고 오랜 시간을 버티어 온 것은 바로 이것이었구나. 한 가지 궁금증을 풀어낸 후에 갖는 희열은 어느 것 보다도 더 기쁘다.
왕곡마을 안에는 두 곳의 효자각이 있다. 하나는 1869년에 건립한 함희석(咸熙錫)의 효자비다. 힘희석은 병환중인 부모님을 위해 바다에 나아가 헤엄을 쳐 귀한 고기를 잡아다가 봉양을 하였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을 시묘살이를 하였다. 시묘를 사는 동안에는 범이 호위를 했다고 전한다.
또 하나의 효자각은 바로 양근함씨 4세 5효자각이다. 1820년에 건립이된 이 효자각은 동몽교관인 함성욱이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부친을 7일을 더 살게 하였다. 나라에서는 그 효를 칭송하고 <조봉대부>의 칭호를 내렸다. 그의 두 아들 인흥과 인홍은 부친 성욱에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임으로써 3일을 더 살게 만들어 <통정대부>의 칭호를 받았다. 자식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했던가. 인홍의 아들 덕우는 부친이 변환으로 눕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하루를 더 살게 해 <가선대부>의 칭호를 받았으며, 덕우의 아들 희용은 부친이 병환으로 눕게 되자 피를 내어 먹임으로써 3일을 더 살게 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나라에서는 4대 5명의 효자에게 벼슬을 내리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비를 건립하고 4세 5효자각이라고 칭하게 하였다.
효자 함희석의 효자비(위)와 4세 5효자각의 정문(가운데)와 5효자비(아래)
오랜 세월을 멈추어 버린 시간 안에 사는 왕곡민속마을. 천혜의 자연경관을 바라보고 사는 왕곡마을 사람들은 이제 봄맞이 기지개를 켠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전통마을 체험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과연 무엇을 배우고 돌아갈 것인가? 그저 전통마을에서 하는 갖가지 체험을 하고만 돌아간다면 180년 동안 시간이 멈추어 버린 왕곡마을을 찾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안에서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를 먼저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겨울잠에서 깨어난 왕곡마을 사람들이 급변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정체성을 놓지 않고 이어가는 버팀목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안고 왕곡리를 떠난다. 몇 번이나 뒤돌아서서 바라다 본 왕곡리, 좁은 마을길에 바람이 흙먼지를 일구고 오음산 날망으로 달아난다.
♣ 왕곡민속마을을 가려면
◉영동고속도로 이용 시에는 대관령터널 - 현남톨게이트 - 낙산사 - 설악산입구 - 속초시내 - 청간정 - 송지호해수욕장 - 공현진교 건너기전에 좌회전 하여 1.3km 진입 - 왕곡마을
◉진부령국도 이용 시에는 진부령 - 알프스리조트 - 건봉사입구 - 대대리 검문소(우회전) - 간성읍 - 공현진교 건너 우회전하여 1.3km 진입 - 왕곡마을
◉한계령국도 이용 시에는 한계령 - 설악산 오색지구 - 양양읍내 - 낙산사 - 설악산입구 - 속초시내 - 청간정 - 송지호해수욕장 - 공현진교 건너기전에 좌회전 하여 1.3km 진입 - 왕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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