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암자.정자

경복궁에서 정동 쪽으로 계속 가면 어디일까?

영지니 2007. 3. 3. 23:56

대진마을 항구 끝단에 있는 근정전에서 정동 쪽이라는 표지석 

 

어릴 적 이런 생각을 혹 해보신 적은 없나요? 어느 방향으로 계속 쉬지 않고 걸어가면 과연 어디에 도착할 것인가? 라는 생각 말입니다. 전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결국은 딱 한번인가 창경궁을 갔다가 무조건 전차 길을 따라 계속 걸었죠. 집이 돈암동이었는데 반대편으로 계속 걸었으니 아마 종로를 거쳐 어디론가 갔을 텐데 결국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지금에 와서 왜 하는가? 궁금하시겠지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동해안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보면 동해시 바닷가에 대진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정동 쪽이라고 합니다. 정동이란 곧바로 가서 만나는 곳이라는 뜻이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보 제223호 경복궁 근정전

근정전에서 계속 정동쪽으로 가면 만나게 되는 곳이 대진마을임을 알리는 설명 


작은 지도를 펴놓고 서울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동해와 일직선이 됩니다. 그러니 대진마을이 경복궁에서 정동 쪽이 된다는 말이 사실인 듯합니다. 거기다가 대진마을의 정동임을 알리는 석비에는 1999년 10월 26일에 국립지리원에서 인증을 했다고 하니 정확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서울서 동해를 이어 선을 하나 그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경기도 하남시, 양평군을 거쳐 강원도 횡성군, 평창군, 정선군을 지나 동해로 이어지더군요. 예전에 그 길을 걸어갔다면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었을까요? 백두대간을 넘어야 하니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길인데 지금은 서울에서 한 3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황당하겠지만 재미있지 않나요?

 

대진마을에서 의식을 치루는 제장과 대진항구


동해시 대진마을.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망상IC 나들목으로 내려와 7번 국도를 이용해 해안도로를 타면 6km 정도 거리이다. 대진마을 항구 끝자락에는 이곳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정동방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의 앞에는 제단처럼 생긴 시멘트 단이 있어 마을에서 제를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진항에는 파도가 일렁여서인지 고깃배들이 줄지어 있고, 바위를 치는 동해의 푸른 물은 그렇게 밀려들어왔다 나갔다 반복하면 철썩거린다. 파도를 탄 작은 배 한척은 물이 출렁일 때마다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경복궁 근정전이라니, 생각 할수록 재미있다.

 

대진마을 표지석 앞에서 본 동해의 밀려드는 파도


대진마을은 인근의 해수욕장과 회 타운, 어항, 그리고 해양레포츠를 복합적으로 즐길 수 있는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대진마을에는 오징어, 미역, 새우, 명란, 창란, 황태 등의 특산물이 있어 우리 입맛을 돋우어 주는 청정 해산물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표지석 옆 방파제로 오르니 밀려드는 파도가 검은 바위들을 치며 솟아오른다. 하얀 포말은 도회지에서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는 듯 상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겨울바다를 즐겨 찾는 것인지.

 

대진마을을 벗어나 7번 국도를 따라 삼척 방향으로 내려가면 바닷가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솟아있다. 까막바위. 이 바위를 보고 사람들은 까막바위라고 부른다. 단 하나 커다랗게 솟아오른 생김새가 긴 옛날이야기 한 자락은 지니고 있을법하다. 바위와 표지석 사이에는 문어상이 있다. 이곳이 돌출이 되어있어 까막바위를 찍기가 안성맞춤이다. 이 까막바위는 남대문의 정동 쪽이라고 한다. 근정전에서 남대문을 내려오는 거리를 대진마을에서 내려온 셈이다. 가만히 속으로 계신을 해보니 그 정도 거리인 것 같다. 괜히 무슨 큰 발견이나 속으로 웃음을 흘린다.  

 

백성을 사랑하는 한 호장의 넋이 깃든 전설의 까막바위 


이 까막바위에 전해지는 전설은 이러하다. 조선조 중엽에 이곳에 인품이 온후하고 덕망이 있는 호장(戶長)이 살고 있었다. 당시는 생활이 어려워서 춘궁기가 되면 굶는 사람이 많았는데 호장은 자기의 재산을 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루 먹여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지나는 걸인까지도 후하게 대접을 해주었기에 인근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곳은 동해안이라 항상 왜구들의 침범이 심했던 곳이고 사람들은 그 피해가 막심했다. 이에 호장은 앞장서서 왜구의 만행을 제지하며 꾸짖었지만 듣지를 않자 백성들과 함께 왜구와 대적해 싸웠다.

 

까막바위는 남대문의 정동방이다. 

호장의 넋이라는 호국 문어상 


그러나 어찌 고기나 잡던 어부들이 왜구들을 당할 수 있을까. 결국 왜구들은 약탈한 재물과 호장을 데리고 돌아가려 하니 주민들이 일제히 항거를 하였으나 왜구들에게 무참히 살육을 당했다. 이를 지켜보며 분노에 떨던 호장은 왜장에게 큰소리로 “비록 내가 너희들에게 잡혀죽는다 해고 너희들을 다시는 이곳에 침범치 못하게 하리라” 라고 크게 꾸짖으며 물속에 뛰어들으니 맑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천둥, 번개가 치고 파도가 밀어 닥쳐 호장이 탔던 배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남은 왜구들은 겁이나 달아나려 하였으나 거대한 문어가 나타나 배를 내리쳐 배는 산산조각이 나고 왜구는 모두 죽었다. 그러더니 한 떼의 까마귀가 몰려들어 왜구들의 시체를 뜯어 먹었다.


사람들은 이 문어가 호장이 죽어 변신한 혼 이라고 말하며, 그 후부터 이 마을에 왜구의 침입이 끊기고, 이 까막바위 밑에 큰 굴이 두개 있는데 여기에 그 호장의 영혼이 살면서 근처 마을을 지켜준다고 전한다. 어느 날 마을 에 사는 어부 한사람이 까막바위 밑에 있는 굴속에 들어갔더니 큰 문어가 있어 잡으려 하자 어디서 왔는지 수십 마리의 까마귀 떼가 날아와 마구 울어대기에 기겁을 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이곳에서 매년 풍어제를 지내며 수호신으로 받들고 있다.

 

7번국도 도로변에 세워진 까막바위 회마을


까막바위 곁에 세워진 문어상은 그런 전설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며 이곳 마을 주민들이 의인들임을 알려주고 있다. 까막바위 길 건너편에는 까막바위 회 마을이 있어 각종 싱싱한 수산물을 입맛에 맞게 골라 즐길 수 있다. 까막바위를 뒤로하고 묵호항을 향해 내려가면서 표지석 하나가 우리에게 주는 큰 의미를 되짚어 본다. 우리들은 과연 지금 어려움이 닥치면 까막바위의 호장이나 마을주민처럼 그렇게 담대한 행동을 할 수 있으려나. 오늘 작은 마음하나 길에서 담아간다.

 

출처 : 누리의 취재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