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한단고기 2.삼성기 전하편

영지니 2007. 12. 30. 12:02

 

 

 

삼성기  전하편 (원동중 지음)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서로 만난 곳은 아이사타 라고하는데 꿈에 천신이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한(우리민족의 옛조상을 가리키는 말)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 이다. 옛날 한국이 있었나니 백성은 부유하였고 또 많았다. 처음 한임(하느님)께서 천산(天山:천산산맥 동쪽의 기련산)에 올라 도를 얻으시사 오래오래 사셨으니 몸에는 병도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서 널리 교화 하시니  사람들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싸울 일도 없게 하였으며, 누구나 힘껏 일하여 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없게 되었다. 다음에 혁서한임,고시리한임,주우양한임,석제임한임,구을리한임에 전하고 지위리 한임에 이르더라. 한임은 혹은 단임이라고도 말한다.

 옛글에 말한다. 파나류산(중국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바이칼호 또는 북해)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여 리니 통틀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비리국,양운국,구막한국,구다천국(캅차카), 일군국, 우루국, 객현 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사납아국,선비국(퉁구스),수밀 이국(서양의 인류학계가 주목하는 슈메르 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수밀이국이다. 사실 한국이라는 나라는 12연방국가였다. 중국에서는 12연방 국가인 한국을 숙신이라불렀다.)이니 합하여 12국이다. 천해는 지금 북해라 한다.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국의 말기에 안파견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 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 할 곳이로다"하시며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오가 (마가. 우가. 구가. 저가. 양가)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한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찌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써 세상을 바꿀 뜻이 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이를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하니 마침내 천부인 세 가지를 내려주시고 이에  말씀을 내려,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 졌도다.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라고 하셨다. 때에 반고라는 자가 있어 괴상한 술법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 십이지의 신장들을 이끌고 공공, 유소, 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감숙성 돈화현 삼위산은 저 유명한 돈황학의 본고장인 돈황동굴이 있는곳이다. 480굴 정도의 굴이 있는데 그굴의 벽화에는 고구려 인의 벽화와 단군신앙 벽화가 그려져있다.)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 이라 하고 그를 반고가한이라 했다.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신시개천을 한분은 단군이 아닌 한웅님  이시다.)라하고 이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데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을 주관하고, 생사를 주관하며, 무릇 인간의 362여 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 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때에 한 곰과 한 범이 이웃하여 살더니 일찌기  신단수에서 빌었다. "원컨데 변하여 신계의 한 무리(맹氓이라 함은 외래의 이주민, 외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가 되어지 이다"하니, 한웅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가르쳐 줄지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주술로써 몸을 바꾸고 정신을 바꾸었다. 먼저 신이 만들어  놓은  영혼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내놓았으니 즉,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라.  이에 경계하여 가로데 "너희들이 이를 먹고 햇빛을 백일동안 보지 않으면 쉽사리 인간다움을 얻으리라."하니, 곰과 호랑이 두무리가 모두 이를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기(忌)하였는데 곰은  기한을 잘지켜서 타이름을 따르며 모습을 얻게 되었지만, 범은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어서 금지하는 바를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이들의 두 성질이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곳이 없었으므로 단수(壇樹)의 무성한 숲  밑에서 잉태하기를 간곡히 원하였다. 그래서 임시로 변화하여 한(桓)이 되고 그와 더불어 혼인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호적(靈籍장부) 에 실리게 되었다.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몸소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을 낳아 교화를 배풀고 천경과 신고를 가르치니 무리들이 잘 따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후에 치우 천황이 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하나로 뭉쳐 화백(화백이라 함은 우리가 알기로는 신라 때의 제도로 알고 있으나 여기 나와 있는 말로 미루어 보아 화백제도는 신라 때 새로 생겨난 법이 아니라 신라인들이 오래전에 있었던 법을 되살린 것이라 할수 있겠다.)을 하였다. 아울러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구한은 모조리 삼한(세나라가 아닌 세 임금을 뜻한다,  진辰.번番.막莫이라는 세 조선을 통치하는 임금을 뜻한다.)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 불렀다.

 <밀기 密記>에서 말한다. 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 있어서 걱정 거리였다. 한웅은 마침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만들고 전계를 베풀어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켜 선악을 상주고 벌하는 법을 갖게 하였다. 이로부터 슬그머니 토벌하여 벌할 뜻을 품었다. 이때에 무리의 이름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오히려 점점 달라졌다. 원래 살던 무리는 범 무리였으며 새로 살기 시작한 것은  곰 무리였다. 범 무리의 성질은 잔악한 짓을 즐기며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고 곰 무리의 성질은 어리석으며 또 자만에 쌓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비록 같은 굴에 산지는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날로 멀어지기만 해서 일찌기 서로 도울 줄도 몰랐고 혼인도 터놓고 한 적이 없었다. 일마다 서로 따르지 않았고 모두가 하나같이  그 길을 같이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곰 무리의 여추장은 한웅이 신과 같은 덕이 있다함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찾아가 뵙고 말한다. "원컨대 한 굴에 함께 사는 저희들을 위하여 굴 하나를 내려주시고 신계의 무리로 받아 주옵소서"하니 한웅이 이를 허락하시고 저들을 받아들여 아들을 낳고 산업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범 무리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이를 사해로 내쫓았다. 한족의 일어남이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뒤에 갈고 한웅(신시역대기에 의하면 제10세 한웅에 해당함.)이 나셔서 염제신농(중국의 삼황가운데 두 번째 황제. 농사 .의약의 시조라 한다. B.C 3218 ~ 3078)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하였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 한웅(14세 한웅, 치우천왕 이라고도 함)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 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산동성 임치현 동남쪽 여수의 남쪽에 있는 성명)로 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중국삼황의 하나로"황제가 청구에 와서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문을 받아 만신을 부르고 불렀다"라고 중국사서에 기록되있으니 그 또한 동이족 임을 증명하는 말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이 황제 헌원을 아카드왕 사루곤을 모델로한 거짓역사라 하며 중국 삼황의 존재를 거부했고, 자신들을 실크로드의 주역인양 하며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자신들의 황국사관에 꿰맞추려 하였다.)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하북성 탁록현의 동남에 있다.)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치우가 졌다하고 북애자의 규원사화 에서는 치우의 승리라 하고있음, 그리고 삼성기에서도 치우의 승리라 하고있음.)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 쪽으로 계곡고신(황제의 증손이니 극의 아들이다.)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한 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아마도 요임금 즉 제요효 당을 가리키는 것 같다.)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문자의 조상이라 알려진 중국사의 전설적인 인물 황제의 신하로서 새 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지었다 한다.)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 헌원이 치우 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 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찌기 간지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말하기를,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극히 횡포 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 때 헌원이 섭정 했다. 치우의 형제가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 도극, 태노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사마천은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쓰기위해 우리민족을 낮추어야 했고 그러한 이유로 탁록의 전투의 승자를 황제헌원 이라 했습니다, 위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북애자의 규원사화의 내용이 좀더 사실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마천이 중국적 역사관을 정립하기 위하여 우리민족의 단군이신 치우천왕을 곡해했음이 여기서 단적으로 들어 나고 있습니다.)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