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세기檀君世紀 (행촌 이암 지음)
단군세기 서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에,선비의 기세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보
다 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까닭인고. 역사가 밝혀지지 않으면 선비의 기세가 펼
쳐 질 수 없고,선비의 기세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다스림이 법도
에 맞지 않는다.무릇 올바른 역사 학은 나뿐 것은 나쁘다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며,
사람을 저울질하고 세상을 이야기 하니,이 모든 것이 세상에 표준이 되는 것이다.이 백
성이 생긴지도 오래되어 세상이 열린 이래의 여러 가지 질서도 많이 변화하였다.나라
와 역사는 나란히 이어지며 사람과 다스림도 따로 나누워 말할수 없는 것이니.모두가
한 개인 보다 먼저 생각해야 되고 또 소중하게 생각해야 됨이라.
아아! 다스린다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뜻에 따르는 것이고 사람은 오로지 바른길을 생
각해야 되나니,사람의 뜻에 따른다는 것이 어찌 바른 길를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겠는
가? 나라에는 모습이 있고 역사에는 얼이 깃들여 있을진데 ,모습이 어찌 얼을 잃고도
모습만으로 우쭐댈수 있다고 할까? 바른길로 바로 다스리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
요 ,모습과 얼을 함께 갖추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다.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일
은 먼저 나 자신을 아는데 있음이라.그런데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어떤 것부터 알아야
할까? 무릇 (삼신이 하나)라는 이치는 *대원일大圓一에 그 뜻 이 있으니 조화의 신은
내려와 나의 성품을 이루고,가르침의 신은 내려와 나의 삶을 이루고, 다스림의 신은 내
려와 나의 정신을 이룬다.*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만물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
인저.
*대원일;거발의 뜻. *성품.삶.정신;원문은 性.命.精으로 되어 있는바,성품,삶,정신으로
각각 해석함.
무릇 사람의 성품이라는 것은 신의 뿌리다.그렇지만 신이 성품에 그 뿌리를 둔다고 해
서 성품이 바로 신 그대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기가 밝게 빛나며 어둡고 더럽지 않을
때에 비로소 참 성품이라 한다.이로서 신은 기를 떠날수 없는 것이며,기도 또한 신을
떠날수 없는 것이다.내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신의 성품과 기가 잘 조화되어 합쳐진 후
에 스스로의 성품이나 삶을 알 수 있는 것이리라.
성품은 삶을 떠나서 있을수 없고 삶도 성품을 떠나 있을수 없는 것이니,스스로의 성품
과 삶이 잘 어울린뒤에야,이 몸이 신의 성품에 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기운넘치는 삶에
서 비롯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그 성품을 깨닫게 됨은 천신
과 그 뿌리를 같이 함이고,그 삶이 세상에 나는 것은 자연과 그 기운을 같이 함이며, 그
정신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모든 목숨있는 것들과 그 업을 같이 하는 것이다.하나
를 알아 셋을 품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 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따라서 굳은 마음이 바뀌지 않을 때 (참 나)라고 하며, 신통하여 무었으로든 바뀔수 있
을 때 신이라고 하나니 참된나는 신이 머무르는 바른 곳이다.이 참된 근원을 알고 올바
르게 수련한다면 좋은 징조는 스스로 몰려오고 밝은 빛이 항상 비추리라.바로 하늘과
사람이 잘 어울릴 때 이로부터 세 가지 신의 성품을 배워 계율로서 맹세한다면 비로소
하나라는 것에 돌아 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품과 정신이 잘 어울려서 빈틈이 없으면 세 가지 신이 하나인 상제(上帝)와
같아서 우주만물과도 잘 어울리고,마음과 기와 몸도 있는 듯 없는듯 자취도 없이 오랬
동안 존재하게 된다.감感.식息.촉觸이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면 그것이 바로 한님 그데
로인 셈이니 이 세상 어디에나 두루 그 덕을 베풀어서 함께 줄거우며,하늘,땅,사람과
더불어 끝없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까닦에 가르침을 세우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자기 스스로를 바르게 하고,그
모습을 뒤집어 바꾸려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모습없는 것에서부터 바꾸어 나가야할
것이다.이것이 바로 나를 알아나가는 단 하나의 길인저! 오호라 슬프다! 부여夫餘는 부
여 스스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한족漢族이 부여에 쳐들어와서 점령해 버렸고,
고려高麗는 고려대로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몽고蒙古가 고려에 쳐들어와서 차지해
버렸다. 만약 그때에 이보다 먼저 부여에 부여다움이 고스란히 있었다면 한인漢人은
자기 나라로 돌아 갔을 것이고,고려에 고려다움이 있었다면 몽고사람들은 몽고로 돌아
갔을 것이다.
아,슬프도다!얼마전에는 *잠潛이나 청淸과 같은 무리들의 못된 의견들이 몰래 수많은
귀신들처럼 어두운 세상을 덮었다.*남생男生이나 *발기發岐 따위들과 같은 반역하는
마음으로 서로 만나 합쳐진 것이다.바른길도 사람다운 생각도 다 없어져,나라 꼴도 나
라 정신도 다 사라져 버린후에 나라를 위한다는 이들인들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만 안
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잠이나 청;오잠과 유청신(?~1326).두사람다 고려중기의 역적이다.먼저 오잠은 고려
충열왕(1236~1308)때의 간신.승지로 있을 때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연락宴樂을 좋
아하므로 김원상.석천보등과 함께 총애를 미끼로 성색聲色으로 임금을 기쁘게 하려고
삼장사三藏寺,사룡蛇龍등의 노래를 지어 가무를 관람 시키는등 재주를 부렸다.지도첨
의사知都僉議事가 되어 항상 임금의 부자를 모함으로 이간 시켰고 어진 신하들을 모해
하여 원성이높았다.원충갑등 50여 명이 원나라에서 파견된 다루가치(達魯花赤) 첩목아
불화(帖木兒不花)에게 호소하니 윤만비.홍자번 등도 들고일어나서 오잠의 처벌을 요청
하였으나 그도 아무일 못하고 돌아가 버렸다. 참다 못한 김심.오감량.홍자번등은 군대
를 이끌고가서 대궐을 포위하고 오잠을 내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임금은 듣지 않앗
다.이에 오감량은 임금의 거처에 들어가 오잠을 끌어내다 최숙천으로 하여금 원나라로
압송하니 원나라 황제는 그를 안서로 귀양보냈다.훗날 충선왕(1275~1314)때에는 첨
의찬성사僉議贊成事구성군龜城君에ㅡ봉해져서 여전히 간신노릇을 하여 해독이 많았
다. 유청신은 어려서 몽고어를 공부하여 후에 여러번 원나라에 내왕하는 동안 외교에
능했으므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대장군을 거쳐 동지밀직감찰이 되고 충선왕때 강정
부사.충렬왕복위 후 첨의정승이 되고 고흥 부원군 에 피봉,왕의 옥대를 하사 받았다.충
숙왕 즉위 후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을 때 심왕 고로 하여금 고려의 왕위에 올리려
는 매국적 반역의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여 귀국하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
*남생;고구려 보장왕 대 연개소문의 맏아들로 당나라에 망명하여 고구려 정벌의 향도
가 됨으로서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반역 행위를 한 고구려의 반역자.
*발기;고구려 8대 신대왕 백고의 아들,9대고국천왕의 동생.10대산상왕 연우의 형에 해
당한다.형 고국천왕이 후사없이 죽자 동생 연우가 우왕후와 짜고 왕위를 계승하자 반
란을 일으키나 막내동생 계수에게 평정되어 자살함.계수는 북부여왕 위구대와 동일인
이며 백제왕 구수이다.또 가지마는 그를 일본의 진무덴노오의 모델이라 비정했다.따라
서 발기는 이쯔세노미고도의 모델이라고 상상했다. 여기서 남생과 함께 쓰여진 것은
발기 때문에 고구려가 분열했기 때문이다.분열뒤에 계수가 부여국으로 되돌아와 뒤에
이도국을 세우고 그것이 백제국이 된다.위지는 장자 발기와 소자 이이모만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간섭하는 정치는 갈수록 심해져서, 임금님을 바꾸고 다시 앉
히기도 하며 대신을 마음데로 임명하기도 하는 등,멋대로 설쳐대고 있어도,나와 같은
나라의 기둥되는 신하라는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앉아있을 뿐,그 대책이 없음은 무슨
까닦인가? 이는바로 나라에 역사가 없으니 모습은 있어도 그 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 벼슬아치의 힘으로 조금도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바로 나라안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다 스스로 나라를 구할 것을 다짐하고 그 할바를 찾을때에 나라
를 구하는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그런 후에야 비로소 나라를 구한다는 소리를 들을
만 한 것이다.
그러면 나라를 구함은 어디에 그 중요함이 있을까?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나라에는 역
사가 있어야만 되고 그 모습을 가지려면 얼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신시神市에 하늘
을여니 이로부터 나라의계통이 이어지게 되었고,나라의계통이 이어짐에 나라가 바로
서게 되었으며,백성도 다스리는 계통이 있음으로써 모여들게 되었으니 역사가 어찌 중
요하지 않겠느가? 이런까닦에 기쁘게 단군님의 역사를 쓰기 시작 했다.해경대왕12년
(1363)계묘*10월3일 홍행촌洪行村의 늙은이가 강도江都의 해운당海雲堂에서 쓰다.
*다시 앉히기도; 중조重祚라고 하였으니 한번 왕위를 떠난 임금이 다시 즉위하는 것.
*효경대왕12년 계묘;원문에서 上之12年癸卯라고 했으니 .
고려31대 공민왕 12년을 뜻함
*강도;강화도를 말함
출처 : | 이선생의 블로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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